군림천하 17권 재출강호(再出江湖)편 : 10화
제 176 장. 신차살인(神車殺人)
강 위에서의 여행은 생각보다 힘든 것이었다. 좁은 선실에 하루 종일 갇혀 있어야 했고, 주변의 풍경 또한 처음에만 신기했을 뿐 비슷비슷한 경치 일색이어서 이내 단조로움을 느껴야 했다. 무엇보다 불편한 것은 생리적인 문제였다. 특히 배 안에는 여덟 명의 남자 외에 두 명의 여자가 같이 타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강변에 잠깐씩 머무르는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했으나, 여러모로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 삼문협까지 배로 이동하기로 했던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중간에 배를 내리고 말았다. 위남에서 배로 이틀 정도 떨어진 곳인데, 자세한 지명은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아, 이제야 살 것 같구나.”
며칠 동안 흔들리는 배 안에서만 활동해서인지 딱딱한 땅바닥에 발을 딛자 모두들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특히 배를 타 본 적이 별로 없는 손풍은 그동안 고초가 심했던지 유난히 반색하는 모습이었다. 맹천익이 땅을 밟으며 어린아이처럼 좋아라 하는 손풍을 보고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저 꼬마도 잘 참고 있는데 다 큰 놈이 창비하지도 않나?”
맹천익이 말한 꼬마란 다름아닌 유소응이었다. 사실 배를 타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유소응이 손풍보다 더욱 심했다. 하지만 유소응은 힘들다는 내색 한번 하지 않고 꿋꿋하게 잘 지내왔는데, 손풍은 그동안 몇 번이나 투덜거렸던 것이다. 불과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좁은 선실에서 함께 북적거리며 지내온 탓인지 진산월 일행과 양중초 일행은 빠른 속도로 친해졌다. 그중에서도 맹천익과 손풍의 관계는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두 사람 모두 보통 성격이 아닌데다 처음에는 원수를 보는 것처럼 서로를 싫어해서 종종 험악한 광경을 자아냈으나, 어찌된 일인지 점점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아지더니 종내에는 서로 말을 터놓고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그런 소리를 들으면 펄쩍 뛰며 부인을 했으나,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험악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바였다. 지금도 맹천익이 욕을 섞어 가며 빈정거렸으나, 손풍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하고 있었다.
“그건 네놈이 몰라서 그런다. 원래 사람마다 잘 참는 게 따로 있다. 난 다른 건 몰라도 속이 불편하거나 배 멀리 같은 걸 잘 참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너도 잘 참는 게 있단 말이냐?”
“당연하지. 어려서부터 참을성 많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나다.”
맹천익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거짓말이라니. 아무리 밖에서 두들겨 맞고 들어와도 아프다는 소리 한번 안 한 사람이 바로 이 몸이시다. 네놈 같은 엄살꾼과 비교가 되는 줄 아느냐?”
맹천익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얼씨구. 별게 다 자랑이구나.”
“그뿐인 줄 아느냐? 네놈은 삼무(三無)라는 말을 들어 보았느냐?”
“그게 무엇이냐?”
“귓구멍을 파고 똑똑히 들어라.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서 욕지기가 치밀어도 한 번도 토한 적이 없었으니 이를 무취무토(無醉無吐)라 하고, 아무리 배고파도 공짜 밥을 먹은 적이 없었으니 이름 무전무식(無錢無食)이란 한다.”
맹천익의 눈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그래. 대단하구나. 계속 말해 봐라.”
맹천익이 부추기자 손풍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리고 아무리 여자를 원해도 결코 강제로 취한 적이 없었으니 이게 바로 무욕무색(無慾無色)이라……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삼무공자(三無公子)라고 부르기도 했지.”
그때 누군가가 그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때렸다. 팍!
“아이고!”
손풍은 눈앞에서 별이 번쩍이며 뒤통수가 뽀개지는 듯한 통증에 머리를 싸안고 주저앉았다. 그의 뒤에는 싸늘한 표정의 전흠이 무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네놈이 이제 대놓고 본파의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큰소리로 떠들어댄단 말이냐?”
손풍은 어찌나 아픈지 눈물이 핑 돌았으나 머리통을 쓰다듬으면서도 감히 무어라고 대꾸하지 못했다. 전흠의 표정이 너무 험악해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던 것이다. 옆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맹천익이 배를 잡고 웃었다.
“하하…… 내가 보기엔 네놈은 버릇이 없고, 운도 없으며, 눈치까지 없으니 삼무공자가 맞기는 맞다.”
맹천익은 전흠이 손풍의 바로 뒤에 다가와 있는 것을 알고는 일부러 그를 충돌질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가뜩이나 자신을 벼르고 있는 전흠의 코앞에서 무전무식이니 무욕무색이니 떠들어댔으니 스스로 화를 자초한 셈이었다. 전흠은 기분 같아서는 늘씬하게 두들겨 주고 싶었으나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지라 더 이상 손을 쓰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리고 말았다. 전흠이 멀어지자 그제서야 손풍은 쭈그리고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더니 맹천익을 노려보았다.
“이놈 맹가야! 네가 정말 너무하는구나. 네놈이 이런 짓을 하고도 이 형님 손에서 무사하기를 바라느냐?”
맹천익을 코웃음을 쳤다.
“흥! 겨우 한 달 먼저 태어난 놈이 형님은 무슨 형님? 네놈 실력으로 내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으냐?”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서로 동갑이었다. 말다툼을 하다가 나 이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서로 같은 나이임을 알자 누가 먼저 태어났는지로 한참을 다퉜다. 두 사람 사이가 급속도로 가까워진 것은 그 뒤로부터였다. 손풍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씨근덕거렸다.
“만약 사저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네놈은 이미 죽은 목숨이다. 사저가 여기 없는 걸 감사해야 할 거다.”
“사저라니? 그게 누구냐?”
손풍의 얼굴이 갑자기 구겨졌다.
“그런 여자가 있다. 호랑이보다 더 무섭고 암고양이보다 더 앙칼진 여자가. 으이구…… 내 주변에는 어째 그런 괴물들만 있는지……”
맹천익은 손풍이 치를 떠는 여자가 누구인지 호기심이 동한 모습이었으나, 손풍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다시는 떠올리기도 싫었던 것이다.
‘종남파에는 정말 대단한 인물들이 즐비한 모양이구나. 손풍 같은 녀석이 생각만 하는 것으로도 진저리를 치는 여자가 있다니……’
맹천익은 언제고 기회가 닿는다면 그 여자에 대해 자세히 알아두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왠지 그 여자에 대해 알아두면 손풍을 두고두고 곯려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강변을 벗어나서 얼마쯤 걸어가니 제법 잘 닦인 관도(官道)가 나왔다. 열 사람은 말도 없이 터벅터벅 걸어서 관도를 이동했다. 봄날이었기에 길을 걷기에는 어려움이 없었으나, 한 시진쯤 걸어가니 모두 슬슬 지루함을 느끼게 되었다. 관도 주위의 풍경이란 게 특별한 것이 없어서 쉽게 싫증이 날 만했다. 그때 갑자기 손풍이 소리쳤다.
“앗? 마차다!”
과연 멀리서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한 대의 마차가 있었다. 마차 하나를 보고 호들갑을 떠는 손풍의 모습이 우스웠으나 아무도 웃지 않았다. 이곳에 고수 아닌 사람은 없었으므로 손풍이 소리치기도 전부터 모두들 그 마차를 발견했던 것이다. 마차가 가까이 올수록 중인들의 표정이 무겁게 굳어졌다. 마차는 무척이나 거대했다. 우선 앞에 매달려 있는 말이 모두 여덟 마리나 될 뿐 아니라, 그 말들이 하나같이 좀처럼 보기 힘든 한혈마(汗血馬)들이었다. 마차는 전체가 금색으로 번쩍거리고 있었고, 네 귀퉁이에 비상하는 천룡(天龍)의 모습이 양가되어 있어 그야말로 호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하나 그 호화로운 마차는 여기저기가 부서지고 핏자국이 묻어 있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을 당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여덟 필의 한혈마가 이끄는 금빛 마차는 천하에 오직 하나뿐이었다.
“운룡신차(雲龍神車)다!”
낙일방이 짤막한 탄성을 토해냈다. 동중산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중에서도 대운룡(大雲龍)입니다.”
운룡신파는 운문세가의 상징과도 같은 마차로, 특히 여덟 필의 한혈마가 이끄는 대운룡은 운문세가의 당대 가주인 천룡신군(天龍神君) 운대방(雲大方)만이 탈 수 있는 것이었다. 중인들이 땅에 내려선 지 얼마 되자 않아 그들의 앞에 나타난 운룡신차,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운문세가의 가주가 타고 있는 운룡신차의 처참한 몰골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워워……”
동중산이 앞으로 달려가서 운룡신차를 멈춰 세웠다. 여덟 필이나 되는 한혈마들은 상당히 먼 길을 달려온 듯 온몸이 먼지로 자욱하게 뒤덮여 있었으나, 피처럼 붉다는 땀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전속력으로 질주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만약 여덟 마리의 한혈마가 전속력으로 달려왔다면 아무리 동중산이라 해도 멈추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가까이서 본 운룡신차는 엄청난 위압감을 자랑했다. 진산월과 낙일방은 삼년 전에도 석가장의 정문에서 운룡신차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운룡신파는 운문세가의 소가주였던 운자추가 타고 있는 소운룡이었는데,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소운룡만으로도 그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겨 주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여덟 마리나 되는 한혈마가 이끄는 거대한 대운룡을 보게 되자 그 엄청난 위용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쉬운 것은 그 귀하고 화려해 보이는 대운룡의 군데군데가 파손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문짝 부근은 거의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문에 내쳐쳐 있던 진주(眞珠)로 만든 주렴도 대부분이 어디론가 사라져 밖에서도 마차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마차안을 들여다본 동중산이 짧은 경호성을 흘렸다.
“엇? 마차안에 누군가가 쓰러져 있습니다.”
중인들이 다가가서 보니 과연 마차 바닥에 금의(錦衣)를 입은 사람 하나가 피바다 속에 누워 있었다. 동중산은 마차 안으로 들어가서 금의인의 몸을 뒤집어 보았다. 금의인은 검은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위맹한 모습이었으나, 이미 숨이 끊어졌는지 몸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금의인을 본 양중초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음……”
동중산이 그들 돌아보며 물었다.
“아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가 바로 천룡신군 운대방이오.”
중인들은 막상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시신이 마차의 주인인 운대방 본인임을 알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운문세가를 이끌고 있는 당대의 가주가 지신의 마차 안에서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의 사인(死因)은 무엇이오?”
양중초의 물은에 동중산이 재빠른 눈길로 운대방의 시신을 살펴보았다. 사인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운대방의 왼쪽 가슴에 검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던 것이다. 그 구멍은 정확히 심장까지 뚫려 있어 누구라도 그 상처가 운대방을 즉사케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양중초는 그 무멍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슨 상처지? 검(劍)이나 도(刀)로는 이런 흔적을 남길 수 없을 텐데……”
다른 사람들도 모두 어리둥절한 모습들이었다.
“창(槍)이나 판관필(判官筆)같이 끝이 날카로운 병기가 아닐까요?”
낙일방이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양중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병기에 당했다면 흉터가 좀더 매끄러웠을걸세. 그런데 잘 보면 이 흉터들은 마치 무언가 뭉툭한 것이 억지로 뚫고 들어간 듯 표명이 몹시 거칠다네.”
그때 묵묵히 운대방의 가슴에 난 구멍을 보고 있던 진산월이 짤막하게 말했다.
“그건 사람의 손가락에 의한 흉터요.”
양중초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바로 그거요. 그것도 지공(指功)을 사용한 게 아니라 순전히 손가락의 힘만으로 뚫은 구멍이오.”
양중초는 자신의 입으로 말해 놓고도 당혹해하는 모습이었다. 운대방 같은 고수가 누군가의 손가락에 가슴이 뚫려 죽었다니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운대방의 몸에 그 외에 별다른 상처가 없는 것으로 보아 변변한 반항조차 못했음이 분명했다. 동중산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의혹에 찬 음성으로 물었다.
“운대방 같은 고수를 손가락으로 찔러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견문이 부족해서인지 특별하게 떠오르는 인물이 없군요.”
“나도 마찬가지요. 지공을 사용했다면 몇 명의 고수들이 있을 텐데, 지공이 아닌 순수한 손가락으로 사람의 가슴을 꿰뚫다니…… 대체 누가 그런 불필요한 일을 한단 말이오?”
손가락으로 직접 사람의 가슴을 찌르는 것보다 지공을 사용하는 편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위력이 있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그런데도 흉수는 지공을 쓰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운대방의 심장에 직접 구멍을 뚫는 방법을 택했다. 아마도 운대방은 죽기 직전에 엄청난 고통과 치욕감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흉수가 그것을 의도했는지 아니면 자신만의 독특한 무공을 사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때는 한 지역의 패자(覇者)로 군림했던 절정고수의 참혹한 죽음에 모두들 마음이 무거워졌다. 흉수가 누구인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바로 며칠 전에 운문세가의 이공자가 포함된 무리들에게 쫓겼을 때만 해도 설마 운문세가의 당대 가주의 시신을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운대방의 죽음이 그 일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관련이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막연했고, 아니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미심쩍은 것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배에서 내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의 시선을 발견하게 된 것이 단순한 우연인지 쉽게 판단되지 않았다. 운대방의 시선 처리도 문제였다. 그가 어느 사람이라면 그냥 묻고 떠나면 되었으나, 그래도 오랫동안 강호에 명성을 쌓아온 명문세가의 가주였다. 그런 그의 시신을 이름도 모르는 벌판에 묻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시신을 끌고 다니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게다가 그들과 운문세가는 여러모로 불편한 관계가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뾰족한 방법이 없자 동중산은 진산월의 의견을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진산월 또한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관도 위에서 한없이 머물고 있을 수는 없었던지라 그는 잠시 생각을 굴리고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일단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시신을 운반한 후에 돈을 주고 시신을 맡긴다. 그 후에 인편으로 운문세가에 그 사실을 알리도록 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동중산도 그 이상 다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말들은 어떻게 할까요?”
여덟 마리의 한혈마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명(名馬)들이었다. 이대로 버려두거나 남에게 맡긴다는 건 바보짓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마을 사람들에게 맡긴다면 엉뚱한 곳에 팔아 버리거나 잡아먹을 게 분명했다. 진산월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우리가 타고 간다.”
그 말에 모두들 표정이 밝아졌다. 많이 걸은 것은 아니었으나 끝도 없이 펼쳐진 관도를 걷는 일에 모두들 싫증이 나 있었던 것이다. 여덟 필의 한혈마 중 여섯 마리는 풀어서 진산월과 전흠, 낙일방 등 종남파 고수 세 명과 양중초, 중년미부, 홍의여인 등 삼월보 사람 세 명이 각각 한 마리씩 올라탔다. 유소응은 진산월의 등 뒤에 탔으며,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운룡신차를 이끄는 두 필의 말에 나누어 탔다. 모두 만족해했으나, 손풍과 맹천익만이 불만에 가득 차 투덜거렸다.
“왜 우리 둘이 말 한 마리에 같이 타고 가야 하느냐?”
“나도 싫다. 그런데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운룡신차를 이끄는 두 필의 말 중 하나에 동중산이 올라타자 남는 말이 한 필밖에는 없어서 두 사람은 울며 겨자 먹기로 같이 탈 수밖에 없었다. 손풍은 종남파의 막내 제자였고, 맹천익 또한 일행 중 큰소리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다. 둘은 연신 투닥거리며 목소리를 높여 불만을 토로했으나 아무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두 문제아는 팔자에도 없는 공동 마부가 되어 시신 한 구가 실린 마차를 끄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마을을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두 시진 후였다. 상당히 먼 거리를 달려왔음에도 인가(人家)를 발견할 수 없어서 초조해 있던 참이라 모두들 반색을 했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이었으나 중앙에 마침 작은 주루 하나가 있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거대한 마차와 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자 마을 주민들이 모두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동중산이 운룡신차의 문을 가지고 다니던 피풍의로 가렸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은 시체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운룡신차의 호화스러움에 신기해하는 모습들이었다. 주루에서도 난리가 났다. 여덟 필이나 되는 커다란 말에서 사람들이 내려 주루 안으로 우르르 들어오자 주인과 주방장이 모두 나와서 수선을 피웠다. 한바탕의 소란이 가라앉고 주위가 조용해진 다음에야 중인들은 주루 안에 앉아서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여전히 주루 밖에 있는 운룡신차 주위를 어른거리며 구경을 하고 있었고, 주루의 주인은 주방장을 도와 음식을 만드느라 주방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주루에는 탁자가 네 개뿐이었는데, 일행이 앉으니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운룡신차를 세우고 한혈마들을 묶어 두느라 손풍 등과 함께 제일 늦게 들어온 동중산이 진산월에게 다가와 보고를 했다.
“이곳은 향화촌(向火村)이라고 하며, 삼문협에서 이백여 리쯤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삼문협 근처까지는 큰 마음이 없다 고 하니 별수없이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지내야 할 듯싶습니다.”
“이백 리라면 내일 아침에 일찍 출발하면 오후쯤에는 도착할 수 있겠군. 그런데 마을이 이렇게 작은데 잘 곳이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마을 촌장에게 조금 후에 이곳으로 오라고 말해 두었습니다. 촌장에게 말해 보면 하루쯤 묵을 곳이 있지 않겠습니까?”
“잘했다.”
동중산과 진산월의 대화를 듣고 있던 양중초는 동중산을 보며 저런 부하 한 사람만 있으면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알아서 필요한 일을 척척 해치우니 웟사람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부하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충성심이 강하고 머리 또한 비상하니 한 집단을 이끌고 있는 양중호로서는 탐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중초는 오랫동안 문파를 이끈 경험으로 문파에서는 무공이 고강한 고수보다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종남파가 단시일 내에 옛날의 명성을 되찾게 된 것에는 신검무적의 무공뿐 아니라 저자의 역활도 컸을 것이다. 아직 젊은 사람들뿐인 종남파가 어째서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고 있는지를 이제야 알 것 같구나.’
일행이 식사를 절반쯤 마쳤을 때 촌로(村老) 한 사람이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주루 안으로 들어왔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잔주름이 가득한 촌로의 두 눈에는 불안한 빛이 잔뜩 어려 있었다. 동중산이 부드럽게 웃으며 촌로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촌장 어른.”
손풍은 동중산이 작은 마을의 일개 촌장에게 지나치게 공대를 한다고 생각했으나, 양중초는 내심 다시 한 번 감탄을 했다. 지금 촌장은 낯선 외지인들이 잔뜩 있는 주루에 오느라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동중산이 손짓해 부르지 않고 직접 마중을 나가서 웃어 주는 것은 그런 촌장의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었다. 촌장은 여전히 딱딱한 표정이었으나, 조금 전보다는 한결 안정을 찾은 모습이었다.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한 거요?”
동중산은 촌장에게 자리를 권했다.
“우선 이곳에 앉으십시오.”
동중산은 비록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해서 첫인상이 썩 좋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눈빛이 온화하고 태도가 예의발라서 촌장은 이내 그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동중산은 촌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 동안 촌장과 대화를 한 동중산은 촌장을 돌려보내고 진산월에게 다가왔다.
“촌장 말로는 이 마을에서 우리 인원이 모두 묵을 수 있는 집은 없다고 하는군요. 다만 촌장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비어 있다 집이 한 채 있는데, 촌장은 자기 집과 그 집을 나누어서 묵으면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전흠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럴 방에는 그냥 노숙(露宿)을 하는 게 더 낮지 않겠나?”
동중산이 한쪽 탁자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양중초 일행을 향해 슬쩍 눈짓을 했다.
“우리만 있으면 그래도 큰 상관이 없지만, 저쪽을 조금 힘들지 않겠습니까?”
전흠도 그 말에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야 모두 남자들이니 노숙을 해도 문제 될 게 별로 없지만, 양중초 일행은 여자가 두 명이나 끼어 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외서 그들을 떼어놓고 갈 수도 없었다. 도움이 필요할 때는 그들의 신세를 지고, 이제 와서 자기들이 조금 편하자고 헤어지자고 한다는 것은 욕먹기 딱 좋은 일이었다.
“그러면 사람을 어떻게 나누겠다는 건가?”
“마침 그들과 우리는 일행 수도 비슷합니다. 그러니 그들 네 사람을 촌장 집에서 묵게 하고 우리가 빈 집을 이용한다면 서로간에 불편함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겁니다.”
듣고 있던 진산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을 것 같다.”
“그럼 제가 양 대협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운룡신차와 운대방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하기로 했느냐?”
“내일 마차에서 말을 분리하여 마차의 본체만 마을의 후미진 곳에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마차에 시신이 한 구 있다고 했으니 그들이 마차를 훼손하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운문세가에 연락을 취할 방법은 알아보았느냐?”
“이곳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고, 일단은 삼문협까지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이 워낙 외진 곳이어서 운문세가가 어떤 곳인지 촌장도 잘 모르고 있더군요.”
“알았다.”
동중산이 양중초에게 가서 사정을 설명하자 양중초도 수긍을 했다. 촌장의 집은 주루에서 삼백여 장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마을에서 가장 크기는 했으나, 방은 고자 세 개뿐이었다. 촌장의 식구들이 하나를 이용하고 다른 두 개를 일행들에게 내어준 것이니 촌장 말마따나 네댓 명이 묵을 수 있을 정도였다. 다행이 촌장의 집에서 오십여 장 떨어진 언덕 아래쪽에 한 채의 모옥(茅屋)이 있었다. 모옥은 앞마당도 제법 넓었고, 방도 큼직한 것이 두 개나 되어 진산월 일행이 하룻밤을 지새우기에 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지가 제법 오래된 듯했으나 진산월 일행이 식사를 하는 동안에 촌장이 사람들을 시켜 청소를 했는지 아주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대신 몸을 씻을 곳이 없어서 일행은 씻지도 못하고 방에 들어가야 했다. 진산월과 전흠, 낙일방이 조금 큰 방을, 나머지 세 사람이 작은 방을 쓰리기로 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을 하기로 계획했기 때문에 방에 들어가자 모두들 잠을 청했다. 사실 이런 외진 곳에서는 잠을 자는 것 외에 달리 할 일도 없었다.
그날 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졌을 삼경 무렵에 어디선가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크아악!”
그 비명 소리는 밤공기를 산산이 찢고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