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8권 월광천추(月光千秋)편 : 2화
제179장. 십방금쇄(十方禁鎖)
장내에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한참 후에야 흑포인은 나직한 탄식을 토해냈다.
“진 장문인에게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검이 아니라 나이답지 않게 깊고 치밀한 심계(心計)라고 하더니 과연 틀린 말이 아니었군. 어떻게 나와 사제의 정체를 알았는지는 묻지 않겠소. 아마 위남에서의 일이 본 방의 행사임을 알고 유추(類推)한 것일 테지만,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구려.”
흑포인은 조금 의기소침한 모습이었으나, 눈빛은 여전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어 말과는 달리 그다지 놀라거나 당황한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음성 속에는 일말의 흥겨워하는 기색마저 담겨 있었다.
반면에 진산월은 여전히 입가에 알 듯 말 듯한 엷은 미소를 띠고 있어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나 겉으로 드러난 표정과는 달리 그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흑의사신과 화면신사는 최근에 강북 지방에서 진산월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정확한 신분이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손속과 추측하기 힘들 정도로 고강한 무공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동관 일대에서 이미 그들은 제왕(帝王)과도 같은 위세를 부리고 있으며, 그들이 이끄는 흑갈방은 강북삼보에서도 경계의 눈을 보낼 만큼 무서운 속도로 세력이 커지고 있었다.
하나 진산월의 마음이 무거워진 것은 단순히 흑갈방의 우두머리들이 자신을 노리고 나타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종남파와는 어떠한 관계도 없었던 흑갈방이 전력을 기울여 자신을 제거하려고 노골적으로 나선 이상, 그들이 종남파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수(魔手)를 뻗었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니 진산월로서는 뒤에 두고 온 낙일방을 비롯한 사제들과 동중산에 대한 안위가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런 마음속의 부담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쉽게 흥분하거나 불안감에 휩싸여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오히려 양손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채 담담한 눈길로 흑포인, 흑의사신을 응시했다.
“이제 밤도 깊고 올 사람은 모두 온 것 같은데 슬슬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지 않겠소?”
흑의사신은 금색 면구 너머로 묘한 눈길을 번뜩였다.
“내가 할 말을 진 장문인이 대신 해주는구려. 진 장문인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한 가지만 말해 주겠소. 오늘 이곳에 펼쳐진 것은 내가 고안한 십방금쇄진(十方禁鎖陣)이오. 진 장문인이 십방금쇄진을 뚫든 그렇지 않든 양중초 일행은 돌려보내겠소. 어차피 진 장문인이 이곳에 온 것으로 그들에 대한 우리의 목적은 이루어졌으니 말이오.”
진산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흑의사신의 금색 면구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면 고마운 일이지. 이제 시작합시다.”
마치 바둑이라도 한 판 두자는 듯한 태평한 말이었으나, 그 말을 기점으로 장내는 그야말로 질식할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흑의사신이 별다른 신호를 보내지 않았는데도 오색마왜 강씨오형제와 다른 세 사람이 어느새 진산월을 에워싼 채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 숲 속에서도 하나둘씩 검은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수는 족히 백을 헤아릴 정도였다.
“만나서 반가웠소.”
흑의사신은 마치 친한 친구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듯 짤막한 말을 남긴 채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화면신사의 모습 또한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하나 진산월은 더 이상 그들의 행방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진산월을 에워싸고 있던 여덟 명의 고수들 중 가릉이 돌연 광소를 터뜨리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으하하! 이놈 진가야! 명년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가릉의 오른손 손목에 감겨 있던 검은 채찍이 어느새 풀어져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진산월의 허리춤을 향해 날아들었다. 가릉의 채찍은 질기기로 유명한 흑혈사(黑血蛇)의 껍질을 특수하게 조제한 약물에 넣어 만든 것으로 강도와 탄력이 놀라울 정도였다. 지금 가릉의 흑살편이 날아드는 속도와 위세는 살벌하기 그지없는 것이어서 일단 격중되기만 하면 아무리 대단한 기공(奇功)을 익힌 고수라 할지라도 살이 갈라지고 뼈가 부서질 게 뻔했다.
진산월은 정면에서 맞서지 않고 훌쩍 옆으로 몸을 날려 채찍의 공세 범위를 피했다.
쉬아악!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진산월의 몸을 스치고 지나갈 듯하던 흑살편이 갑자기 살아 있는 생명체라도 된 듯 허공에서 꿈틀거리며 진산월의 앞가슴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진산월이 재차 몸을 움직여 채찍을 피하려 했으나, 그때 등 뒤에서 예리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파파팍!
어느새 양후일이 진산월의 뒤로 바짝 다가와서 무서운 기세로 도광(刀光)을 뿌려대고 있었다. 잔살패도라는 별호대로 양후일의 도법은 잔인하고 무자비했다. 일체의 허식(虛式)을 배제한 채 오직 급소만을 노리고 날아드는 그의 도는 순식간에 진산월의 몸을 난자해 버릴 것만 같았다.
앞뒤로 다가오는 두 사람의 공세는 그야말로 시기적절해서 진산월은 어느 쪽으로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진산월의 허리춤에 매어져 있던 용영검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
언제 용영검이 검집에서 뽑혀져 나왔는지는 누구도 제대로 본 사람이 없었다. 다만 도광과 편영(鞭影)에 가려 있던 진산월의 몸에서 갑자기 새하얀 검광이 번뜩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무서운 기세로 사방을 휘몰아치는 광경을 목격하고 눈을 부릅떴을 뿐이다.
그들은 모두 조금 전에 화면신사와 진산월이 싸우는 장면을 목격했었다. 그때 그들은 진산월의 검이 비록 날카롭기는 하지만 왜 화면신사가 염왕추의 가공할 공력을 지니고도 그토록 쩔쩔매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몇몇 사람은 화면신사가 너무 진산월을 경시하다가 큰코를 다친 것이라고 믿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진산월의 검을 직접 겪게 되자 그들은 왜 화면신사가 염왕추의 최고 수법을 펼치고도 그토록 맥없이 패퇴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진산월의 검은 밖에서 보던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바깥에서 볼 때는 단순하게 움직이는 것 같던 검로(劍路)가 실제로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면서도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었고, 그리 빠른 것 같지 않던 검광의 꿈틀거림이 어찌나 빠르고 영활하던지 검이 어느 부위를 노리고 있는지를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검광 자체에서 실처럼 세밀한 경력이 줄기줄기 흘러나와 몸을 감는 바람에 제대로 움직이기조차 힘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검을 손에 쥔 진산월이라는 인간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기도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이건 단순히 검법이 어떻고 공력이 어떻고 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자신이 강호상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희대의 검신(劍神)을 만났음을 깨달았으나, 그때는 이미 어디로도 피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파파파팍!
가장 먼저 무서운 기세로 날아들던 가릉의 흑살편이 마치 썩은 새끼줄처럼 가닥가닥 잘려 나갔다. 이어 가릉의 오른팔이 떨어져 나가고 그의 머리카락이 잘려져 사방으로 흩날렸다. 가릉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크아악!”
가릉은 오른팔이 잘려지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처참한 비명을 토해냈으나 이내 상반신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허무하게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양후일의 처지는 그보다 더울 비참했다. 그는 진산월의 등 뒤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진산월이 출수한 것을 가릉보다 조금 늦게 알았다. 그가 무언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진산월의 검이 두 사람의 공세를 완벽히 막아내고 오히려 그들의 전신을 무섭게 핍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양후일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려다 검광에 부딪친 가릉의 흑살편이 너무도 맥없이 잘려지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안색이 대변해 황급히 도를 거두었다. 하나 그 때문에 그는 더욱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어느새 뒤로 휘몰아쳐 오는 진산월의 검에 앞가슴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버린 것이다.
양후일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전력을 다해 뒤로 몸을 날렸으나 이미 진산월의 용영검이 그의 앞가슴을 피범벅으로 만들어 버린 뒤였다. 그나마 그가 뒤로 움직이는 바람에 그 상처들은 그리 깊지 않았으나, 그가 채 신형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다시 용영검의 가공할 검세가 폭풍처럼 다가왔다. 양후일은 그저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앞에 구름처럼 휘몰아쳐 오는 검의 폭풍을 응시할 뿐이었다.
비명도 없었다. 양후일은 앞가슴이 갈라지고 목이 베어진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가 벼락 맞은 고목처럼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그의 몸뚱어리는 마치 앞으로 벌어질 참혹한 일을 미리 예고해 주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고수가 검하고혼(劍下孤魂)이 되어 쓰러지자 주위에 죽음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쌍극후 위관은 양손에 들고 있는 두 개의 극을 휘둘러보지도 못한 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춤거리면 뒤로 물러나 버렸다. 가릉과 양후일은 자신과 별로 실력의 차이가 없는 고수들인데 몇 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으니 위관이 덤벼들 엄두도 내지 못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진산월이 처음부터 가차 없는 살초(殺招)를 펼친 것은 더 이상 상대의 의중대로 끌려가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이번 일을 뚫고 나가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진산월의 시선이 한쪽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위관에게로 향했다.
“당신은 나를 막을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나는 이만 가보겠소.”
위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진산월이 그를 지나쳐 몇 걸음 걸었을 때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오색마왜 강씨오형제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강씨오형제의 가뜩이나 험상궂은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어 보기에 거북할 지경이었다.
“이놈, 소문보다 더욱 악독하구나.”
오형제 중 흰옷을 입은 백왜(白倭) 강태(康泰)가 살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며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강태는 강씨오형제 중의 맏이로, 나이가 칠십이 넘은 강호의 노마(老魔)였다.
진산월은 강태의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을 에워싼 다섯 노인들을 한차례 둘러보더니 이내 수중의 용영검을 들어올렸다. 어차피 싸울 것이라면 말이 필요 없다는 그의 단호한 태도는 강태를 비롯한 다섯 사람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짓눌러 왔다.
강태도 입을 굳게 다문 채 무서운 눈으로 진산월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다섯 명의 노인들이 일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씨오형제의 강호에서의 명성을 생각해 볼 때 새파랗게 젊은 애송이에게 다섯 사람이 합공(合攻)을 가한다는 것은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나 지금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처음부터 자신들의 비전(秘傳) 합격술(合擊術)인 오행마라진(五行魔羅陣)을 펼쳐 진산월에 맞서고 있었다. 그것만 보아도 그들이 진산월을 얼마나 경계하고 두려워하고 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강씨오형제는 오랜 세월 동안 함께 행동했기 때문에 눈빛만 마주쳐도 서로의 의중을 알 수 있을 만큼 마음이 통해 있었다. 오행마라진은 그들의 그런 특성을 최대한 살려 만들어냈기 때문에 대일인합격진(對一人合擊陣)으로는 강호에서도 내로라하는 무서운 절진이었다. 지금까지 강씨오형제가 오행마라진을 펼친 것은 모두 세 번이었는데, 그 상대들은 하나같이 강호의 이름난 절정고수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오행마라진 앞에서 일각(一刻) 이상을 견뎌낸 사람이 없었다.
강씨오형제의 움직이는 속도가 어찌나 빨랐는지 장내에는 흑백청홍황의 다섯 가지 그림자만이 어른거릴 뿐, 그 가운데에 있는 진산월의 모습은 오색의 그림자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우우웅!
진 안의 진산월은 심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강씨오형제가 익히고 있는 오행진산마공(五行塵山魔攻)의 기운이 서로 융합하여 바위라도 가루로 만들어 버릴 듯한 막강한 강기로 변해 전신을 짓눌러 오고 있는 것이다. 웬만한 고수라면 움직이기는커녕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강기의 압력은 가공스러웠다. 게다가 강씨오형제의 음직임이 점차로 빨라지면서 압력의 세기 또한 증가하여 이런 식으로 더 지체하다가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고 한줌 피먼지로 스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진산월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다섯 사람의 기척을 느끼려고 애를 썼다. 지난 몇 달 간 적지 않은 고수들과 수많은 싸움을 했지만 이런 식의 합격진을 상대한 적은 별로 없었다. 서안의 대응표국에서 화산파의 일대제자들이 펼친 오안검진을 상대한 것이 거의 유일한 기억이었다.
합격진은 즉흥적으로 펼쳐지는 단순한 합공과는 달리 처음부터 서로간의 무공 특성과 성격, 장단점을 파악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치밀한 계획 하에 만든 것이라서 대전(對戰) 경험이 풍부한 고수라 할지라도 자칫하면 낭패를 당하기가 일쑤였다.
더구나 강씨오형제는 개개인이 뛰어난 무공을 지닌 고수들인데다, 그들이 펼치는 오행마라진 자체가 한 명의 절정고수를 상대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위력은 진산월의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진산월도 처음에는 그들을 쓰러뜨리는 데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오행마라진이 발동하자 자신이 너무 그들을 경시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신을 압박해 들어오는 강기의 압력도 무서웠지만, 그들 오형제의 기척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이 그를 당혹케 했다.
분명 다섯 사람이 빠른 속도로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각각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러니 그들을 공격하고 싶어도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그들이 먼저 손을 써 오기를 기다릴 수도 없었다. 계속 시간이 흐를수록 전신을 짓눌러 오는 압박이 강해져서 이대로 있다가는 검을 쳐드는 일조차도 힘들지도 몰랐다.
강호에서 대일인합격진은 오래된 전통을 지닌 문파하면 몇 개씩은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고수들이 많다고 해도 문파의 모든 제자들이 일류고수일 수는 없으니, 무공이 떨어지는 제자들만으로 절정고수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대일인합격진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름난 합격진들은 대부분 강호에서 가장 전통이 깊은 구대문파가 가지고 있었다.
종남파에도 물론 몇 개의 합격진이 있었다. 문제는 그동안의 거듭된 쇠락으로 거의 모든 합격진이 실전(失傳)되었다는 것이었다. 문파의 존속조차 위태로운 상황에서 합격진을 연마할 시간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 식으로 세월이 흐르다 보니 뛰어난 합격진이 하나둘씩 사라져서 현재의 종남파에 남아 있는 것은 삼선검진(三旋檢陣)과 풍운사방진(風雲四方陣)뿐이었다.
이름만 들으면 그럴듯해 보여도 실상 삼선검진은 평범한 삼재진(三宰陣)을 변형한 것에 불과했고, 풍운사방진은 여타 문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상검진을 종남파의 유운검법과 합친 것일 뿐이었다.
종남파에서 가장 뛰어난 합격진은 음양쌍반진(陰陽雙盤陣)이라는 것이었다. 이제는 이름만 전해져 올 뿐인 전설의 절진이었으나, 그 위력은 종남파는 물론이고 능히 강호일절(江湖一絶)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고 했다.
음양쌍반진은 남녀 두 사람이 펼치는 것인데, 남자는 반드시 육합신공 중의 구양신공(九陽神功)과 삼락검을 익히고 있어야 하고, 여자는 칠음진기와 월녀검법을 익힌 상태여야만 했다. 그 조건이 비록 까다롭기는 했으나, 그만큼 음양쌍반진의 위력은 가히 놀라운 것이어서 한때는 강호의 오대합격진(五大合擊陣)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었다.
오대합격진의 다른 네 가지는 소림사의 십팔나한진(十八羅漢陣)과 무당파의 태청복마검진(太淸伏魔劍陣), 화산파의 삼응검진(三鷹劍陣), 그리고 아미파의 무극연환진(無極連環陣)으로, 하나같이 강호상에서 오랫동안 혁혁한 명성을 누리던 이름난 절진들이었다. 하나 종남파에서 음양쌍반진의 비결이 실전된 후 오대합격진의 다른 한 자리는 형산파의 건곤참(乾坤斬)이 차지하고 말았다.
형산파의 건곤참은 형산파의 최고 검객 두 사람이 펼치는 것으로, 이름 그대로 하늘과 땅을 단숨에 갈라 버리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담고 있다고 했다.
일전에 대응표국에서 진산월이 상대한 오안검진은 비록 화산파의 뛰어난 합격진 중하나였으나, 당시에 오안검진을 펼치던 화산파의 일대제자들은 싸우기도 전부터 진산월에게 압도당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검진을 펼친 곳이 실내였기 때문에 방위조차 완벽하게 잡지 못했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지금 진산월은 강호에 출도한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합격진을 상대하게 된 셈이었다.
오행마라진의 위력은 과연 뛰어났다. 반각이 넘도록 진산월은 절진을 상대할 뚜렷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강씨오형제의 위치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검을 휘두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무작정 절진을 뚫고 나갈 수도 없었다. 전신에 가중되는 압력은 이미 숨쉬기도 힘들 정도였다.
‘일단 부딪치고 보자.’
진산월은 결심을 하고는 때마침 자신의 눈앞을 지나가는 희끗한 홍영(紅影)을 향해 용영검을 휘둘렀다. 하나 채 검을 반도 휘두르기 전에 진산월은 황급히 검을 거두어들이며 왼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휘잉!
방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가 한 줄기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버렸다. 얼핏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아도 진산월은 그 회오리바람에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강대한 힘이 담겨 있음을 직감했다. 아마 그 자리에서 계속 검을 휘둘렀다면 그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커다란 낭패를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무거운 압력이 짓누르기는 했어도 전혀 아무런 움직임도 없던 공간에서 난데없이 회오리가 나타나다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그 가공할 위력이라니…….
그 회오리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님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진산월은 이번에는 청영(淸影)을 향해 검을 내뻗었다. 그러더니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재빨리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휘아앙!
조금 전보다 더 강력한 회오리가 그가 서 있던 공간을 휩쓸고 지나갔다. 바닥에 거의 두 치나 되는 깊이의 회오리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것만 보아도 그 회오리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진산월은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회오리들은 반탄강기의 일종이 분명하다.’
자신이 공격을 할 때마다 그에 대한 반발력으로 강기가 튕겨져 나오는 것이다.
더구나 그 위력은 공격하는 힘의 세기에 비례했다. 처음에 휘두른 검보다 두 번째 검을 찔렸을 때 진산월은 일성(一成)의 공력을 더 기울였다. 그 결과 처음보다 두 번째에 더욱 강력한 반탄강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것은 실로 낭패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상대를 공격할 때마다 더욱 강력한 반탄강기를 맞게 된다면 결국 상대에게 아무런 공격도 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가중되는 압력에 질식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모두 강씨오형제가 익히고 있는 오행진산마공의 특이한 효능 때문이다. 오행진산마공은 각기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여타의 오행기(五行氣)를 이용하는 무공들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었다. 하나 오행진산마공이 서로 뭉치면 그 위력이 놀랍도록 상승하여 다섯 가지가 모두 합쳐지면 천하의 어떤 신공절학에도 뒤처지지가 않았다.
‘진산(塵山)’이란 이름이 붙은 것도 처음에는 ‘먼지(塵)’처럼 가벼운 공력이 합쳐져서 종내에는 ‘산(山)’과도 같은 강대함을 가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오행마라진은 이 오행진산마공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위력을 배가(倍加)시키기 때문에 그 안에 갇힌 사람은 말 그대로 거대한 산에
전신이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때 지금까지 진산월의 주위를 돌기만 했던 다섯 개의 그림자들 중 황영(黃影)이 진산월의 정면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들었다. 오행마라진의 위력이 정점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강씨오형제가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진산월은 무모하리만치 직선적으로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 황영을 향해 용영검을 내뻗었다.
쉬아악!
조금 전의 두 번의 경우와는 달리 이번에는 회오리가 일지 않았다. 대신 검이 내밀어지는 주변의 공기가 요동을 치며 수십, 수백 개의 보이지 않는 칼날이 무서운 속도로 진산월의 전면을 휘몰아 쳐 왔다. 강씨오형제가 스스로의 몸을 하나의 축(軸)으로 이용해 압력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만큼 무형의 기운이 다가오는 속도도 빨랐고, 그 위세 또한 무시무시했다.
이런 상태에서 뒤로 물러나거나 피하려 했다가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주위를 선회하고 있는 다른 네 명의 노인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당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내찔러 가던 용영검의 검봉(劍鋒)이 미묘한 변화를 일으키며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수백 가닥으로 변해 다가오는 무형의 기운들 속을 교묘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세찬 물살을 가로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물고기의 모습과도 같았다.
파파파팍!
검을 쥔 진산월의 오른쪽 소맷자락이 경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갈가리 찢겨지더니 이내 먼지로 화해 팔뚝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나 그때는 이미 진산월의 용영검은 코앞으로 다가오는 황영의 지척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 황영은 황왜(黃倭) 강풍(康風)이란 자로, 강씨오형제 중에서도 가장 폭급한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강풍은 진산월이 오행마라진의 가공할 압력을 뚫고 자신을 향해 계속 검을 찔러 오자 두 눈 가득 살광을 이글거리며 노성을 내질렀다.
“이 하룻강아지 같은 놈! 네놈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는 짓이다!”
그는 오행마라진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진산월의 검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양손을 앞으로 세차게 내뻗었다. 그와 함께 진산월을 향해 몰아쳐 가던 무형의 기운이 은은한 금색(金色)을 띠면 송곳처럼 뾰족하게 변했다. 그것은 마치 수백 개의 금침(金針)이 날아오는 것 같았다.
강풍이 익힌 것은 오행진산마공 중에서 금(金)의 기운을 지닌 금인마공(金刃魔功)이었다. 혼자 펼치면 십여 개의 물고기 비늘 같은 날카로운 강기를 날리는 것이 고작이었겠으나, 오행마라진 안에서 금인마공은 수백 개의 무시무시한 강기 파편을 날리는 가공할 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미약하게 떨리고 있던 진산월의 용영검이 강기 다발에 닿기 직전에 갑자기 크게 흔들리더니 갑자기 빗발 같은 검기들이 사방으로 피어올랐다. 강풍은 뜻밖의 사태에 깜짝 놀랐으나 그때는 이미 그가 날린 금인마공의 강기들이 구름 같은 검광과 정면으로 부딪치고 있었다.
따따다다당!
마치 철편에 수백 개의 화살이 부딪치는 듯한 음향이 터져 나오며 세찬 경기와 검광이 장내를 휘감았다.
“크윽!”
강풍은 자신이 날린 수백 개의 금인강기들이 산산이 흩어지며 무언가 차갑고 예리한 것이 자신의 가슴을 난자하는 것을 느끼며 짤막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비록 즉사를 면했으나 상반신을 피로 뒤집어쓴 듯 처참한 몰골이 되어 연신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진산월의 모습 또한 그리 좋지 않았다. 진산월은 비록 결정적인 순간에 공력을 집중하여 강풍을 혈인(血人)으로 만들었으나, 자신 또한 양쪽 옆구리와 어깨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강풍의 공격을 격퇴시키기 위해 진산월이 택한 방법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무식한 것이었다. 그것은 강풍이 날린 수백 개의 금인강기들을 용영검으로 일일이 쳐내는 것이었다.
아무리 진산월의 검법이 뛰어나다고 해도 지척에서 무서운 속도로 날아드는 수백 개의 강기 다발을 모두 완벽하게 쳐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중 다섯 개의 강기를 막지 못해 옆구리와 어깨에 부상을 입고 만 것이다. 그나마 치명적인 부위로 날아드는 강기들을 모두 막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강풍이 어렵지 않게 진산월을 쓰러뜨릴 줄 알았던 강씨오형제는 오히려 강풍이 피투성이가 되어 금시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자 크게 놀라며 진산월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들 중 가장 먼저 진산월을 향해 날아든 자는 홍왜(紅倭) 강호(康昊)였다. 강호가 익힌 것은 화령마공(火靈魔功)으로, 그래서인지 강호가 양손을 펼치자 수백 개의 시뻘건 불꽃들이 진산월의 전신을 향해 폭포수처럼 쏘아져 갔다. 마치 거대한 폭죽(爆竹)이 터진 듯한 모습이었다.
진산월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용영검을 힘주어 잡고 무서운 기세로 자신을 삼켜 버릴 듯 날아오는 불꽃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뒤로 물러나거나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오행마라진의 반탄강기에 휩쓸려 반격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진산월은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 오행마라진을 상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이런 진산월의 판단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도 사방을 에워싼 오행마라진의 반탄강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가 격렬하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오행마라진은 더욱 강력하게 반발해 올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금처럼 가급적 움직임을 자제하고 제자리에 선 채로 손목만을 움직여 최소한의 동작으로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 오행마라진을 깨는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문제는 지금 날아오는 불꽃들을 조금 전의 강기 다발처럼 검으로 쳐낼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 불꽃들은 화령마공의 기운이 응축된 것으로, 검이나 장력으로 쳐낸다면 응축된 기운이 폭발하여 일대를 송두리째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그대로 불꽃을 맞았다가는 불꽃의 폭발력에 뼛가루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산화(散華)되고 말 것이다.
쳐낼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진산월의 용영검이 느릿느릿 앞으로 전진했다. 아주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도 벌써 진산월의 전신은 휘몰아쳐 오는 회오리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옷자락이 금시라도 찢어질 듯 세차게 펄럭였고, 전신을 짓누르는 압력은 한층 강해져서 피부가 바늘로 찌르는 듯 따끔따끔함을 느낄 정도였다. 조금만 더 압력이 강해진다면 피부가 찢어지거나 호흡이 곤란해질 게 뻔했다.
용영검은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허공을 가로지르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불꽃들이 진산월의 코앞으로 육박해 들어왔을 때 용영검 또한 진산월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막 불꽃에 닿기 직전 용영검이 허공에서 커다란 원을 그려냈다. 그러자 금시라도 진산월을 잿더미로 만들 기세로 날아들던 수백 개의 불꽃들이 모두 용영검의 움직임을 따라 허공에서 원을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진산월이 용영검을 세차게 떨치자 원을 그리며 뭉쳐 있던 불꽃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앗?”
이번에야말로 진산월이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거라고 믿고 있던 강씨오형제들이 다급한 외침을 토해내며 불꽃들을 피하느라 이리저리 신형을 움직였다.
파파팡!
삽시간에 사방이 온통 불바다로 변해 버렸다.
진산월은 천단신공 중의 흡자결(吸字訣)을 용영검으로 펼쳐 불꽃들을 한곳으로 끌어 모은 다음 태진강기의 반탄력을 이용해 단숨에 사방으로 날려 버린 것이다. 설명하기는 쉬웠으나 진산월이 두 신공을 검으로 자유롭게 펼칠 수 있을 만큼 완벽하게 익히고 있지 않았거나, 불꽃들을 끌어 모았다가 날려 버리는 시간차가 조금이라도 어긋났다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진산월을 무겁게 압박하고 있던 기운들이 순간적으로 약해졌다. 불꽃을 피하느라 강씨오형제들이 급히 움직이는 바람에 오행마라진이 잠깐 동안 흔들렸던 것이다. 그것은 알아차리기도 힘들 만큼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진산월에게는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그 자리에 석상처럼 꼼짝도 않고 서 있던 진산월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앞으로 움직였다. 그와 함께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던 용영검이 세차게 흔들리며 구름 같은 검광이 피어올랐다. 드디어 진산월이 절세무적의 유운검법을 펼친 것이다.
그 검광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사방으로 퍼져 나가더니 이내 반경 오 장 이내를 송두리째 뒤덮어 버렸다. 그 바람에 주위를 온통 불태우고서야 멈출 듯하던 불바다가 순식간에 꺼져 버렸다.
“피…… 피해라!”
다급한 경호성이 거푸 터져 나왔으나, 검광이 비산하는 속도가 워낙 빨랐다.
“아악!”
제일 먼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진 자는 홍왜 강호였다. 강호는 자신이 자랑하던 화령마공이 너무도 어이없이 깨어진 것에 충격을 받아 멍하니 있다가 용영검의 검세에 그대로 휩쓸리고 말았다.
이어 강호의 뒤를 이어 공세를 취하려고 앞으로 나섰던 흑왜(黑倭) 강패(康覇)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옆구리와 앞가슴이 피범벅이 된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원래 오행마라진의 또 하나의 특징이 차륜 공격으로 상대를 숨쉴 틈 주지 않고 몰아치는 것인데, 이번에는 그 장점이 오히려 독(毒)으로 작용한 것이다.
평생을 동고동락했던 형제들이 연거푸 피를 뿌리며 쓰러지자 남은 사람들은 안색이 시퍼렇게 질린 채 살광을 줄기줄기 뿌리며 진산월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나 오행마라진이 깨어진 이상 그들 개개인은 결코 진산월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불과 숨 몇 번 내쉴 시간도 지나지 않아 오형제 중의 나머지 또한 다른 형제들의 뒤를 이어 용영검에 쓰러지고 말았다. 진산월이 조금 전까지도 오행마라진에 갇혀 제대로 몸도 움직이지 못했던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너무도 허망한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이 합격진의 맹점(盲點)이었다. 진이 완벽하게 발동했을 때는 개개인의 능력보다 훨씬 뛰어난 위력을 발휘하지만, 일단 진이 깨어지게 되면 오히려 평범한 합공(合攻)보다 못한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이다. 진의 변화에만 너무 익숙해 있기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불은 꺼졌으나 장내는 피를 뿌리면 쓰러진 시체들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진산월은 용영검을 거둔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에는 일곱 구의 시신들이 이리저리 누워 있을 뿐, 위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오색마왜 강씨오형제가 쓰러지는 순간 재빨리 몸을 피한 모양이었다.
밤은 여전히 깊었고, 숲은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진산월은 그 짙은 어둠 속에 그보다 더욱 짙은 살기들이 이글거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적지 않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