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8권 월광천추(月光千秋)편 : 8화
제185장. 불비불명(不飛不鳴)
낙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낙양에 사는 사람들은 여러 명의 이름을 거론할 것이다.
개중에는 오랫동안 강북 제일의 거부로 이름난 석가장의 장주를 말하는 자도 있을 테고, 낙양 제일의 고수로 알려진 천풍검객(天風劍客) 동방표응(東方飄鷹)을 꼽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또 다른 이는 낙양지부인 곽로당을 지적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하나 낙양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女人)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모든 낙양 사람들의 대답은 한결같은 것이다.
― 그야 물론 정난향이지.
낙양제일화(洛陽第一花)란 바로 그녀를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누구나가 인정하는 낙양제일의 미녀, 꽃 중의 꽃, 그녀는 단순한 기녀가 아니라 낙양에 사는 모든 남성들의 마음속 연인(戀人)이었다.
그래서 모든 남자들은 그녀를 한 번이라도 보기를 간절히 원했다. 당연히 그녀가 머무르는 난향원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나 난향원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기녀하고 해봤자 그녀 외에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들 중 누구도 몸을 파는 여인은 없었다. 단지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를 뿐이었다.
기루는 크게 청루(靑樓)와 홍루(紅樓)로 나뉜다. 청루의 기녀들이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것에 비해 홍루의 기녀들은 손님들 앞에서 기예(技藝)를 뽐내거나 담소를 나누는 것에 그쳤다.
난향원은 낙양에 있는 홍루의 대표적인 곳이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리자 난향원에서는 한 가지 규칙을 내세웠다. 난향원에서 술을 마시려면 어느 한 방면이라도 기녀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했다. 글에 자신 있는 문인(文人)이라면 글로, 연주에 자신 있는 악공(樂工)이라면 연주로 인정을 받았다. 심지어 물론 무공에 자신 있는 무인들은 무공으로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 인정을 받는 게 너무도 힘들어서 백 명이 왔다가 겨우 한 사라만 통과할 정도였다. 게다가 설사 인정을 받고 난향원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겨우 술이나 마실 수 있을 뿐 기녀들의 손목조차 잡을 수 없었다.
더욱 큰 문제는 그렇게 해서도 정난향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정난향을 만나기 위해서는 아홉 명의 기녀들 중 적어도 다섯 명 이상의 인정을 받아야만 했다.
이렇게 많은 난관(難關)이 있음에도 난향원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줄지 않았고, 정난향에 대한 소문은 더해만 갔다. 오히려 그녀를 만나기 힘들다는 점이 그녀의 가치를 높여서인지 그녀는 한낱 기녀의 신분으로 낙양 제일의 여인으로 공인받게 된 것이다.
오늘도 난향원의 앞에는 기나긴 행렬이 늘어서 있었다. 낙양성 안을 온통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정난향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은 줄어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줄은 꽤 길게 이어졌는데, 그래도 사람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 유난히 작은 눈을 가진 쥐눈의 장한이 지루함을 견디기 힘든지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아함! 이거 왜 줄이 통 줄지를 않는 거야? 혹시 앞에서 누가 새치기라도 하는 거 아냐?”
그의 뒤에 서 있던 털북숭이 장한이 싱겁게 웃었다.
“통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군. 당신은 혹시 난향원에 처음 오지 않았소?”
쥐눈 장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모처럼 낙양에 왔더니 정난향이란 이름이 하도 귀에 쟁쟁거려서 도대체 어떻게 생긴 여인인지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고 왔소. 그런데 벌써 한 시진 가까이 서 있었는데 난향원의 입구 근처에도 가지 못했으니 갑갑한 마음만 드는구려.”
“그럴 줄 알았소. 여기서 난향원 입구까지 가려면 적어도 두 시진은 잡아야 하오.”
쥐눈 장한은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이오?”
“그뿐인 줄 아시오? 그렇게 해서 난향원 입구에 도착한다 해도 그곳에서 다시 심사를 봐야 하오. 그 심사를 보는 시간까지 합치면 아무리 빨라도 난향원에 들어가는 건 세 시진 후가 될 거요. 물론 그것도 심사에서 통과해야 가능한 이야기지만 말이오.”
쥐눈 장한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입을 딱 벌렸다.
“아니 정난향이란 여자가 얼마나 대단한 미녀이기에 여자 하나 만나는 데 세 시진씩이나 기다려야 한단 말이오?”
털북숭이 장한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난들 알겠소?”
“당신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서 그녀의 얼굴 한번 못 봤단 말이오?”
“말하지 않았소? 그녀를 만나려면 두시진을 기다려서 심사를 본 다음에나 가능하다고. 심사에 통과했다면 내가 여기서 이렇게 죽치고 기다리고 있겠소? 벌써 난향원 안으로 들어갔지.”
“그건 또 무슨 말이오?”
털북숭이 장한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쥐눈 장한을 쳐다보았다.
“이제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깡통이군. 내 말 잘 들으시오. 여기서 줄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모두 그 심사를 받기 위한 사람들이오.”
“그건 방금 말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예전에 이미 심사를 통과한 사람은 어떻겠소? 그런 자들도 우리처럼 이렇게 기다리고 있겠소?”
그제서야 털북숭이 장한의 말을 알아차린 듯 쥐눈 장한은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렇다면 일단 그 심사만 통과하면 이렇게 기다리지 않아도 난향원으로 들어갈 수 있단 말이오?”
“두말하면 잔소리지. 올 때마다 매번 심사를 본대서야 누가 난향원의 단골이 되려 하겠소? 그리고 심사에 통과한 사람은 다음에 심사를 해도 또 통과할 게 뻔한데 뭐 하러 귀찮게 매번 심사를 보겠소?”
“그럼 조금 전에 저쪽 길로 해서 난향원 쪽으로 걸어가던 두 사람도 이미 예전에 심사를 통과한 자들이겠구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소.”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난향원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심사를 봐서 통과하는 것이오.”
“그건 나도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았소?”
“참 성질 급한 친구로군. 그 외에도 또 한 가지 방법이 있소.”
쥐눈 장한은 귀가 번쩍 뜨이는지 황급히 물었다.
“그게 뭐요?”
털북숭이 장한은 냉큼 대답하지 않고 싱겁게 웃었다.
“우리 같은 사람은 해당 사항이 없으니 신경 끄는 게 좋을 거요.”
“거 답답하게 사람 애태우지 말고 빨리 알려 주시구려.”
“간단하오. 한 문파를 이끌고 있는 우두머리라면 가능하오.”
“엑? 일파(一派)의 주인이어야 한단 말이오?”
“그렇소. 정사(正邪)를 불문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문파를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심사 여부에 관계없이 난향원에 들어갈 수 있소.”
“일정 규모라면 어느 정도요?”
“문하제자가 스무 명 이상이거나 세워진 지 십년 이상이 지나면 되오.”
쥐눈 장한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우…… 정말 나하고는 먼 나라 이야기로군.”
“그래서 내가 신경 쓰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제기랄. 여자 하나 만나기가 이렇게 까다로워서야……”
“보아하니 조금 전의 그 두 사람은 나이도 별로 많지 않고 외모도 그리 뛰어나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무슨 신통한 재주라도 가지고 있어서 심사에 통과한 자들인 모양이오.”
“정말 불공평하군. 외모라면 조금 전의 그자들보다 내가 몇 배나 더 뛰어나지 않소?”
털북숭이 장한은 쥐눈 장한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여름도 아닌데 더위를 먹은 것도 아니고……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거울부터 먼저 보고 오시오.”
쥐눈 장한은 쭉 찢어진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럼 내가 그 말라비틀어진 꺽다리와 허여멀건 애송이보다 못하단 말이오?”
“내가 보기엔 오십보백보요. 그래도 그자들은 눈은 뜨고 다니는 것 같더군.”
털북숭이 장한이 자신의 유달리 작은 눈을 빗대어 조롱하자 쥐눈 장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털북숭이 장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 산적 두목같이 생긴 놈이 감히 뭐라고 떠드는 거야?”
털북숭이 장한도 지지 않고 쥐눈 장한에게 덤벼들었다.
“내가 틀린 말을 했냐? 낙양성 고양이들이 네놈만 보면 침을 질질 흘리겠다!”
“뭐라고?”
두 사람은 서로 드잡이질을 하다 결국 난향원 근처에 가 보지도 못하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정말 별놈들 다 있군.”
손풍은 난향원 앞에 끝도 없이 길게 늘어진 줄을 희한한 듯 보고 있다가 줄서 있던 자들 중 두 사람이 서로 멱살잡이 끝에 끌려 나가는 광경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여자 하나 보려고 이렇게 줄서 있는 것도 모자라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하다니…… 낙양(洛陽) 사람들의 풍류가 겨우 이것밖에 안 된단 말인가?”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손풍이 당대의 풍류재사(風流才士)라도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누군가가 그 말을 들었는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형장의 말이 맞소. 여인 하나를 보기 위해 저런 추태를 보인다는 건 확실히 풍류를 아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
손풍이 소리가 들려온 곳을 힐끗 돌아보니 진한 청삼(靑衫)을 입은 헌칠한 키의 사나이가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다.
비록 머리카락이 반쯤 풀어헤쳐지고 옷매무새도 그리 단정치는 않았으나,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은 상당히 수려한 것이었다. 게다가 입고 있는 청산 또한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때가 묻어 있기는 했으나 상당히 질이 좋은 것이어서 그리 추레해 보이지 않았다.
손풍은 청삼사나이의 위아래를 쓰윽 훑어보았다. 무척이나 무례해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청삼사나이는 여전히 웃고 서 있었다. 손풍은 그의 웃음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살을 찡그렸다.
“당신도 그리 풍류를 아는 사람 같지는 않은데.”
청삼사나이는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손풍의 말에도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더욱 활짝 웃었다.
“하하…… 그건 나를 몰라서 하는 소리요. 내 이름은 손풍류(孫風流)요. 이름에서부터 풍류를 아는 자라는 느낌이 팍 오지 않소?”
손풍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당신도 손씨요?”
자칭 손풍류라고 주장하는 청삼사나이는 손풍의 반응에 무언가를 느낀 듯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활짝 웃어 보였다.
“하하…… 그럼 형장도 손씨인 모양이구려. 이런 공교로운 일이 있나? 확실히 우리는 무언가 질긴 인연(因緣)의 끈으로 이어져 있는 모양이오.”
손풍은 이렇게 퇴락한 모습의 남자와 질긴 인연을 맺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신통치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확실히 공교로운 일이긴 하군. 손씨가 비록 희귀한 성씨(姓氏)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쉽게 보기는 힘든 것인데.”
손풍이 비록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음성에는 청삼사나이가 진짜 손씨인지 의심스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손풍류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밝은 얼굴로 미소를 보냈다.
“사해(四海)가 다 동도(同道)라 했는데, 우리는 풍류가 무엇인지 아는 사이인데다 성마저 똑같으니 남이라고 할 수 없구려. 어서 들어갑시다. 이런 반가운 날 술이 없을 수야 없지.”
손풍류는 손풍의 소맷자락을 잡더니 난향원의 정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손풍은 어어 하는 사이에 그에게 이끌려 가고 말았다.
“어어? 난 일행이 있소.”
손풍이 다급하게 말했으나 손풍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짤막한 음성을 내뱉었다.
“알아서 따라오라고 하시오.”
손풍은 화가 치밀어 올라 손풍류에게 붙잡힌 소맷자락을 떨쳐내려 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소맷자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이 비리비리하게 생긴 놈이 무슨 힘이 이렇게 좋은 거야?’
손풍은 몇 번이나 손풍류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는 다급한 시선으로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진산월은 손풍류가 나타날 때부터 침묵을 지키고 있더니 손풍이 그의 손에 반강제적으로 끌려가는 광경을 보면서도 전혀 제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풍류의 말대로 그들의 뒤를 말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손풍은 그 모습을 보자 기가 막히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더 이상 손풍류를 뿌리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맥없이 끌려가고 말았다.
그들이 난향원의 정문에 도착하자 정문 앞에 서 있던 호위무사가 막아섰다.
“본원에는 어인 일이시오?”
막상 정문에 오자 손풍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오히려 손풍의 뒤로 가서 섰다. 자연히 손풍이 일행의 가장 앞에 나서게 되었다.
손풍은 원래 이런 일에 경험이 풍부한지라 자신의 뒤에 숨듯이 서 있는 손풍류를 슬쩍 노려보고는 앞으로 성큼 나섰다.
“난향원에 난향을 보러 왔지 다른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그의 태도가 너무도 의젓하고 말투가 당당해서인지 호위무사의 태도가 한결 공손해졌다.
“패(牌)를 보여 주시겠습니까?”
호위무사가 말하는 ‘패’란 심사에서 통과한 사람에게 주는 일종의 신물(信物)이었다. 패는 금은동(金銀銅)의 세 종류로 나눠지는데, 한 명의 기녀에게라도 심사를 통과한 사람은 동패(銅牌)를 받고, 다섯 명 이상의 기녀에게 인정을 받은 사람은 은패(銀牌)를 받으며, 모든 기녀에게 인정을 받은 자는 금패(金牌)를 받게 된다.
동패 이상을 소지한 사람은 난향원에 언제라도 출입할 수 있으며, 은패 이상을 소지한 사람은 정난향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금패 소지자는 난향원 내에서 철저한 자유를 보장받게 된다. 다시 말해서 기녀들의 몸을 취하는 행동을 제외한 어떠한 것이라도 할 수가 있다.
지금까지 동패를 소지한 사람은 삼백여 명쯤 되었고, 은패를 소지한 자도 십여 명이 나왔으나 금패를 받은 자는 단 세 명뿐이라고 했다. 하나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금은 패는커녕 동패를 소지한 것만으로도 모든 낙양에 있는 남자들의 부러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낙양이라고는 처음 밟아 보는 손풍에게 이렇게 귀한 패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 건 없다.”
손풍이 넉살좋게 고개를 가로젓자 호위무사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나 호위무사가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손풍이 먼저 말했다.
“본파의 장문인께서 오셨으니 안으로 들어가 속히 영접할 준비를 하라고 일러라.”
호위무사는 찔끔하여 손풍의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손풍류와 진산월을 번갈아 살피던 호위무사가 도저히 모르겠는지 다시 손풍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분이 귀파의 장문인이신지…….”
그도 그럴 것이 허름하고 추레한 몰골의 손풍류나 비쩍 마른 몸에 칼자국이 나 있는 진산월의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일파의 장문인 같지 않았다. 그러니 호위무사로서는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손풍은 그것도 모르냐는 듯 성난 눈빛을 번뜩이며 진산월을 가리켰다.
“당연히 이쪽 분이시지. 아무려면 일파의 장문인께서 저자와 같은 몰골을 하고 계시겠느냐?”
손풍이 말을 하며 턱으로 손풍류를 가리키자 손풍류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슬그머니 진산월을 훔쳐보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지 않는데 저자가 장문인이라고? 강호에 저렇게 젊은 장문인이 있었나?’
진산월의 전신을 빠르게 훑고 있던 손풍류의 눈에 한 줄기 예리한 광채가 번뜩이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저런 인상의 인물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 같은데…….’
호위무사는 손풍의 기세에 눌려 막 안으로 들어가려다 문득 생각난 듯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본파라면 어느 파를 말씀하시는지…….”
손풍이 눈을 부라리면 호통을 내질렀다.
“본파가 어떤 곳인데 남에게 함부로 신분을 밝히겠느냐? 어서 안으로 가서 알리기나 해라.”
호위무사도 상대가 진정으로 일파의 장문인이라면 일개 기녀를 찾아온 것을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다시 나타난 호위무사의 뒤에는 궁장(宮裝)을 한 중년미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중년미부는 진산월과 손풍을 차례로 보더니 이내 진산월의 앞으로 다가왔다. 특이하게도 그녀는 손풍류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어느 파의 누구신지 명호를 알 수 있을까요?”
그녀의 태도는 예의를 잃지 않으면서도 범접하지 못할 위엄을 담고 있었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종남의 진산월이라 하네.”
중년미부의 얼굴에 한 줄기 경악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그 빛은 나타날 때보다도 더욱 빠르게 사라졌다. 그녀는 이내 평정을 되찾고는 진산월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이제 보니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진 장문이셨군요. 미처 알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괜찮네. 그보다 이제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소?”
약간은 묘한 의미를 담은 진산월의 말에 중년미부는 주저하지 않고 그들을 난향원의 안으로 안내했다.
정문을 지나자 별천지(別天地) 같은 절경이 나타났다. 그리 크지 않은 화원(花園)은 온갖 꽃들로 천자만홍(千紫萬紅)을 이루고 있었고, 한쪽에는 작은 폭포까지 있어 그야말로 선경(仙境)을 연상케 했다. 이곳저곳을 빠르게 지나치는 여인들 또한 선녀가 아닌가 할 정도로 하나같이 빼어난 미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화원의 곳곳에는 이름 모를 누각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누각들의 위치가 절묘하여 서로 시선에 가리지 않았다. 중년미부는 그들을 누각 중 가장 오른쪽에 있는 누각으로 데리고 갔다.
그 누각은 다소 고풍스런 분위기에 우아한 멋을 풍기는 곳이었다. 아무런 현판도 달려 있지 않았으나, 누각 안으로 들어서자 은은한 향기가 풍겨 나왔는데 그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평안해지며 머릿속이 맑아졌다.
진산월은 단번에 그 향이 무척 귀하디귀한 용연향(龍涎香)임을 알아차렸다.
“이곳에 계십시오. 조금만 기다리시면 아가씨께서 나오실 겁니다.”
중년미부는 그들을 누각 안으로 안내한 후 다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세 사람만 동그마니 남은 누각에 시비 두 사람이 들어와 술상을 보기 시작했다.
진산월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으나, 화류계에서 잔뼈가 굵은 손풍은 난향원의 대응이 어딘지 모르게 미숙하고 굼뜬 것을 알고는 속으로 혀를 찼다.
‘쯧, 술상을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허둥지둥 대다니…… 다른 건 몰라도 기루의 수준은 서안에 미치지 못하는구나.’
손님을 접대하는 방식이 다소 투박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시비들의 얼굴은 무척이나 뛰어났으며, 몸매도 훌륭해서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손풍은 두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술상을 차리느라 허리를 굽히며 이리저리 움직이는 두 시비의 뒷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시비들이 이 정도인데, 이곳의 주인이라는 정난향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접대 수준이 조금 떨어지면 어떠냐? 여자 수준이 더 뛰어나면 그게 바로 훌륭한 기루지.’
손풍은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그와는 달리 진산월과 손풍류가 앉아 있는 곳에는 어떤 긴장감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손풍류는 손풍을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난향원 안으로 들어온 다음부터는 말수가 없어지고 행동이 과묵해졌다. 진산월 또한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니 자연히 주위의 공기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정적을 깬 사람은 뜻밖에도 진산월이었다.
진산월은 자신의 앞에 놓인 술병을 들더니 손풍류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한 잔 하지 않겠소?”
손풍류는 무언가 골똘히 상념에 잠겨 있다가 진산월이 자신을 향해 술을 권하자 묵묵히 술잔을 내밀었다. 진산월이 그의 잔에 술을 가득 따르자 손풍류는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
“좋군.”
술을 마신 그가 짤막한 말을 토해내자 진산월이 다시 술병을 들었다.
“한 잔 더 하겠소?”
손풍류는 주저하지 않고 빈 술잔을 내밀었고, 진산월이 술을 따르자 이번에도 즉시 술잔을 비웠다. 이렇게 연거푸 석 잔을 마신 다음에야 손풍류는 한바탕 크게 웃으며 자신의 무릎을 내리쳤다.
“하하…… 좋군, 정말 좋아! 이번에는 내 잔을 받으시오.”
손풍류가 술병을 잡자 진산월이 술잔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계속 손풍류가 술을 따르고 진산월이 술을 마셨다. 이렇게 똑같이 세 번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손풍류는 술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아까부터 이들의 행동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던 손풍은 그들이 자신은 쏙 빼놓고 서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자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다가 기회다 싶어 재빨리 술병을 잡았다. 그리고는 술잔에 따르지 않고 술병째 자신의 목구멍에 들이붓기 시작했다.
“꿀꿀꿀…….”
단숨에 술병을 모두 비운 다음에야 손풍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좋구나. 바로 이 맛이야!”
신나게 소리치던 손풍은 자신의 처지를 알아차리고 황급히 입을 다문 채 진산월의 눈치를 살폈다. 문파의 제자가 장문인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그 앞에서 술을 병째 마셔댔으니 다른 문파 같았으면 파문(破門)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이곳에는 종남파 외의 인물도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제기랄. 정말 모처럼 술을 보게 되자 정신을 잃었군. 아무튼 나는 이게 문제라니까. 술만 앞에 두면 주체를 못하니 이거야 원.’
진산월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한 시선으로 손풍을 응시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는 우리가 마신 석 잔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아느냐?”
손풍은 움찔하여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원래 처음 만난 두 사람이 대작(對酌)하게 되면 일배일배부일배(一杯一杯復一杯)하는 법이다. 첫 잔은 상대를 만나서 반갑다는 의미로, 두 번째 잔은 당신도 나를 만나서 반갑지 않느냐는 의미로, 그리고 세 번째 잔은…….”
그때 손풍류가 그의 말을 받았다.
“앞으로 두 사람이 잘 지내보자는 의미로 마시는 것이오.”
진산월은 손풍류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손풍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그렇다. 우리가 마신 석 잔은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다. 네가 마신 술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느냐?”
손풍은 머리가 복잡하여 미칠 지경이었다. 술 한 잔 마시는 데 무슨 의미를 찾는단 말인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손풍 자신은 술을 마시면서 무슨 의미를 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손풍은 고민하다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제자는 그저 모름지기 남자란 일단 술을 마시면 모든 걸 잊고 통쾌하게 마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술병째 마신 겁니다.”
대답하고 나니 자신이 생각해도 그럴듯해 보였다. 진산월은 조용히 웃었다.
“네가 네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했다면 그것으로 됐다. 앞으로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적어도 첫 번째로 하는 행동만큼은 반드시 심사숙고해야만 한다, 알겠느냐?”
보통 때 같으면 진산월의 말이 잔소리로만 들려졌겠으나,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손풍은 신이 나서 넙죽 머리를 조아렸다.
“명심하겠습니다, 장문인.”
“그럼 어디 네가 얼마나 통쾌하게 마시는지 한번 보자.”
진산월은 시비들에게 술을 몇 병 더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술병이 날라져 오자 손풍은 과연 열심히 마셔대기 시작했다. 자신이 내뱉은 말도 있고, 장문인의 승낙도 내려졌으니 거리껴 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정난향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독한 죽엽청을 일곱 병이나 비운 손풍이 술상에 머리를 처박고 뻗어 버리자 지금까지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던 손풍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단순무식의 극치인 친구로군. 장문인을 앞에 두고 제자가 먼저 술에 취해 잠들어 버리다니 이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한심하다고 해야 할지…….”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다고 해야 옳겠지.”
진산월이 담담히 대꾸하자 손풍류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진산월을 응시하는 손풍류의 눈빛은 수정처럼 차갑고 맑아서 조금도 취기를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한동안 진산월의 두 눈을 뚫어지게 주시하던 손풍류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정말 나와 잘 지내기를 원하시오?”
“그건 당신 입으로 내뱉은 말이 아니오?”
“그렇소. 그리고 진 장문인은 그 말을 시인했소.”
“나는 내 입으로 한 말을 어겨 본 적이 없소.”
손풍류는 한층 더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그렇소.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친구가 되기로 하는 거요.”
진산월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이제부터 당신과 나는 친구요.”
진산월의 대답을 듣자 손풍류의 얼굴에 돌연 한 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어린아이의 미소처럼 환한 웃음이었다.
“하하…… 반갑소, 친구. 당신은 내가 사귄 첫 번째 친구요.”
“그것 참 영광이군. 당신은 내가 친구로 생각하는 세 번째 사람이오.”
손풍류의 두 눈이 기이한 열기로 반짝거리며 목소리에 흥이 담기기 시작했다.
“역시 내 짐작대로 당신도 친구가 많은 사람은 아니었군. 당신이 사귄 그 대단한 두 친구는 어디에 있소?”
“한 명은 서안에 있고, 다른 한 명은 죽었소.”
손풍류는 움찔하다가 재빨리 말했다.
“그럼 내가 두 번째 친구인 셈이로군.”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신은 세 번째요.”
손풍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납득을 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친구란 살아 있든 죽었든 마음속에 남아 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나는 이번에 사귄 새로운 친구의 본명(本名)을 알고 싶소.”
손풍류는 히죽 웃었다.
“내 이름이 가명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그런 이름을 붙여 준단 말이오? 아무리 풍류를 좋아하는 자라 해도 자식이 풍류 속에 허우적거리기를 바라지는 않을 거요.”
“하하…… 옳은 말이오. 내 아버님은 항상 자신이 풍류를 아는 사람이기를 바랐지만, 사실은 그다지 풍류적이지는 못했소. 나도 마찬가지지. 풍류란 내 별호요, 스스로는 풍류거사(風流居士)라고 부르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렇게 불러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알겠소, 풍류거사. 당신의 이름은?”
손풍류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검당(劍堂). 검으로 일가(一家)를 이루라는 뜻이지. 이제 친구가 되었으니 말을 놓음세.”
“알겠네, 풍류거사 손검당(孫劍堂). 내 이름은 진산월일세.”
“만나서 반갑네, 친구.”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본 채 빙그레 웃었다. 우연한 만남이었고, 예상치 못한 전개였지만 그들은 지금 이 순간이 만족스러웠다.
상대가 누구든, 어떤 신분이든 관계없이 서로가 마음의 부름에 이끌려 가슴을 열고 친구가 된다는 것은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수도 있었으나, 그들은 석 잔의 술을 교환함으로써 인연을 보다 깊은 것으로 만들었다.
손검당은 진산월의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자네에 대한 말은 많이 들었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 이곳까지 온 건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네.”
“누군가? 서안 토박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지.”
“누군지는 나도 모르네. 이제부터 찾아봐야지.”
손검당은 더 자세하게 묻지 않았다.
“무언가 복잡한 사연이 있는 모양이군. 언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게. 힘쓰는 일에는 별로 쓸모가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을 찾는 일이라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지 모르네.”
“알겠네.”
손검당은 화제를 돌려 다른 질문을 했다.
“자네의 나이는?”
“스물다섯. 자네는?”
“내가 한 살 많군. 난 스물여섯이네.”
“그래서 억울한가?”
“뭐 그렇진 않네. 내가 나이보다 철이 없어서 말이지.”
진산월은 피식 웃었다. 그로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미소였다. 손검당은 진산월이 미소 지을 때 그의 얼굴에 나 있는 칼자국이 미묘하게 꿈틀거리는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웃음은 무척이나 이상하군.”
“뭐가 말인가?”
“왠지 냉혹해 보이면서도 무언가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끌어당기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아. 여자들 앞에서는 되도록이면 그렇게 웃지 말게.”
“그게 풍류를 안다는 자의 대답인가?”
손검당은 정색을 했다.
“원래 진정한 풍류란 경쟁자를 없애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네. 나 말고 풍류를 뽐내는 자가 아무도 없다면 내가 바로 제일가는 풍류남아란 뜻이 아니겠나?”
“그럴듯하군.”
“그럴듯한 게 아니라 그게 사실인 걸세.”
두 사람은 몇 차례 더 술잔을 기울였다. 크게 취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장내의 공기는 훈훈했고, 서로간의 감정은 한층 더 친밀해졌다.
진산월이 손검당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검당이란 이름은 무척 특이한데 그런 이름이 지어진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내 이름이 아무리 특이해도 자네 이름만 하겠나? 산월이 뭔가, 산월이? 여자 이름도 아니고.”
진산월은 자신이 그런 이름을 얻게 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난 손검당은 다소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사연이 있었는 줄은 몰랐네. 나도 고아라네. 오년 전에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완벽한 고아가 됐지.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는 고아가 된다네. 자네는 그 시기가 조금 더 빨랐을 뿐일세.”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는 건가?”
“위로가 안 되던가? 그럼 어쩔 수 없지.”
“자네는 아직 자네 이름이 지어진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네.”
손검당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조금씩 사라졌다. 그는 가만히 진산월을 응시하더니 진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정말 듣고 싶나?”
“그렇네.”
손검당의 얼굴에 한 줄기 고민스러워하는 빛이 떠올랐다. 손검당은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다. 하나 조금 전과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음울하게 무거운 미소였다.
“자네 혹시 불비불명(不飛不鳴)이라는 말을 아나?”
“알고 있네.”
불비불명은 ‘사기(史記)’의 <골계열전(滑稽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春秋)시대 초(楚)나라의 장왕(莊王)은 즉위하자마자 날마다 주지육림에 빠져 나라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자연히 정사는 문란해졌고, 신하들 간의 질서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함부로 나서서 장왕에게 간언을 하지 못했다.
조정에는 아예 나오지도 않고 주색에 파묻히기를 삼년, 그러던 어느 날 충신 오거(伍擧)가 죽음을 각오하고 장왕에게 물었다.
“전하, 언덕 위에 커다란 새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새는 삼년 동안 날지도 않고(不飛), 울지도 않는다(不鳴)고 합니다. 그 새가 어떤 새인지 아십니까?”
장왕은 한참 동안이나 오거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 새가 삼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지만, 한번 날기 시작하면 구만리 창공을 날을 것이며, 한번 울면 온 천하를 진동시킬 것이다.”
머지않아 장왕은 타락했던 생활을 접고 국정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간언하지 않고 같이 향락을 일삼았던 간신배들을 모두 처단하여 나라를 크게 부강하게 만들었다.
불비불명이란 날지 않고 울지 않으며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손검당은 왜 갑자기 이런 고사(故事)를 꺼낸 것일까?
손검당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바로 그 짝일세. 다만 장왕(莊王)과 다른 것은 그자는 삼년을 기다려 원하던 때를 얻을 수 있었지만, 나는 기다림에 지쳐 시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지.”
“……!”
“막상 날갯짓을 했을 때 장왕은 구만리 창천(蒼天)을 날았지만 나는 뒤뜰도 벗어나지 못할 걸세. 장왕은 호령 한번으로 천하를 경동(驚動)시켰지만, 나는 고함을 질러도 어린아이조차 놀라게 할 수 없게 되었네.”
손검당의 음성에 담긴 암울함을 절절이 느낄 수 있었던 진산월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손검당은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후후…… 너무 걱정 말게. 언젠가는 불비불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걸세. 내 이름에 얽힌 사연은 그때 말해 주겠네.”
진산월로서는 꼭 그렇게 되길 바란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의 우울함을 떨쳐 버리려는 듯 손검당은 주위를 둘러보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왜 아직 아무도 안 오는 거야? 난향원의 방침이 바뀌었기라도 했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인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럴 리가 있나요? 나는 이미 와 있답니다.”
그와 함께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그윽한 난초 향기가 짙게 풍겨 왔다.
그리고 한 사람이 천천히 실내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