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9권 천룡고궤(天龍古櫃)편 :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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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9권 천룡고궤(天龍古櫃)편 : 4화


제 191장 상봉지희

석가장의 아침은 언제나 분주하다.

오늘은 평상시보다 한층 더 분주했다. 아침 일찍부터 석가장의 하인들은 바닥을 쓸고 드넓은 장원의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석가장에 야채를 배달하는 곡노대가 마침 정문 앞을 쓸고 있는 마칠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오늘 무슨 중요한 손님이라도 오나? 아침부터 무척 번잡하군그래.”

마칠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가 오긴 온다고 하는 것 같소. 뭐래더라? 어디의 장문인이라고 했는데…”

“정문 앞까지 청소하는 걸 보니 구대문파 중 하나라도 되는 모양이군?”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종남파라던가? 아무튼 별로 관심 없어서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팔공자의 손님이라고 하오.”

곡노대는 야채를 배달하느라 여기저기 다닌 통에 제법 견문이 넓었는지 탄성을 터뜨렸다.

“허! 종남파의 장문인이 팔공자의 손님이라니… 그 별볼일 없을 것 같던 팔공자가 아주 제대로 봉을 잡았구나.”

마칠은 귀가 솔깃해졌는지 급히 물었다.

“종남파의 장문인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오?”

“이를 말인가? 자네는 신검무적이라는 이름도 듣지 못했나?”

마칠은 멋쩍게 웃었다.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솔직히 요새 다른 일에 신경 쓰느라 통 바깥 소식에 관심을 두지 못했소.”

“보나마나 그 애화년에 빠져서 정신이 없었겠지.”

“헤헤… 알면서 굳이 그렇게 말할 건 뭐요? 그나저나 신검무적이 엄청난 고수라도 되는 모양이구려?”

“말해서 무엇하나? 최근 들어 강호에서 가장 명성이 대단한 인물일세. 지난 백 년 동안 나타난 검객들 중 제일가는 솜씨를 지녔다고 하더군.”

마칠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이오? 내가 알기로는 강호제일검이 검봉이라고 불리는 화산파 장문인이라고 했는데. 그새 바뀌기라도 했단 말이오?”

곡노대는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고는 한층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네. 그런데 요즘 들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나?”

“뭐라고 하오?”

“봉시고단유운저(산봉우리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구름 아래 있을 뿐이다)”

“그게 무슨 뜻이오?”

“여기서 봉우리는 검봉, 즉 화산파 장문인을 뜻하네.”

“그럼 구름은?”

“당연히 신검무적이지. 일설에 의하면 신검무적이 일단 검을 휘두르면 구름 같은 검광이 일어나 장내를 완전히 뒤덮어 버린다고 하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를 일검운해라고 부르기도 한다네.”

“그럼 검봉이 아무리 뛰어난 검객이라고 해도 신검무적을 당해내지 못한다는 말이오?”

곡노대는 황급히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눈짓을 했다.

“쉿! 소리를 낮추게. 그런 말이 떠돈다는 것이지. 두 사람이 직접 검을 겨뤄 보지 않은 다음에야 누가 더 뛰어난 검객인지를 어느 누가 알겠는가?”

마칠도 덩달아 찔끔하여 주위를 둘러보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절세의 검객들이 섣불리 싸우려 하겠소? 패한 사람은 평생 쌓은 명성이 무너지고 말 텐데…”

“그런데 그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들어 보게. 종남파와 화산파는 수백 년 동안 서안 일대의 패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어 오고 있었네. 그러다 종남파가 몰락하여 지난 백여 년간 화산파가 서안은 물론이고 섬서성 전체를 쥐고 흔들었지. 그런데 이번에 종남파가 다시 부활했네. 자네 생각에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은가?”

마칠은 잠시 생각하다가 눈을 반짝거렸다.

“그럼 종남파와 화산파가 다시 격돌이라도 한단 말이오?”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있을 수 없으니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들 두 사람이 싸우게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마칠은 멍하니 곡노대의 말을 듣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짤막한 탄성을 토해냈다.

“아! 그렇다면 어쩌면 팔공자와 대공자가 다툴지도 모르겠구려.”

이번에는 곡노대가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마칠은 신이 나서 입을 놀렸다.

“대공자가 후원하는 문파가 바로…..”

그때 정문 안쪽에서 누군가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마칠은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고는 허겁지겁 빗자루를 들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곡노대는 멀어지는 마칠의 등을 바라보며 아쉬운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제길. 나 혼자 실컷 떠들고 정작 들어야 할 얘기는 하나도 못 들었군.”

그는 혼자서 무어라고 투덜거리더니 다시 야채를 운반하기 위해 수레로 다가갔다.


정오 무렵, 굳게 닫혀 있던 석가장의 정문이 나직한 굉음을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활짝 열린 정문 사이로 이십여 명의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 나와 양쪽으로 도열해 섰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여 호기심 어린 눈길로 쳐다보는 동안, 열려진 정문 앞으로 몇 명의 사람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들은 모두 여섯 명이었는데, 네 사람은 젊은 청년들이었고 한 사람은 나이 어린 소년, 또 한 사람은 애꾸눈의 중년인이었다. 그들 중 유달리 키가 크고 얼굴에 칼자국이 나 있는 청년이 특히 중인들의 시선을 끌었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놀란 외침을 토해냈다.

“앗? 저 사람은 신검무적이다!”

그 말이 퍼지자 장내는 시장바닥처럼 시끌벅적한 소리에 뒤덮여 버렸다.

“저 사람이 바로 대종남의 장문인인 진산월이다.”

“강호제일검이 낙양에 왔다!”

삽시간에 석가장의 정문 앞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서로 신검무적의 얼굴을 보려고 앞을 다투어 다가왔으나, 차마 그들의 앞까지 다가오지는 못했다. 행여라도 그들이 몸을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중인들의 따가운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진산월 일행은 하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석가장의 활짝 열린 정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모습이 석가장 안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 선 채로 떠날 줄을 몰랐다.

“아….. 신검무적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정말 꿈만 같구나.”

“누가 아니래나? 정말 당당한 풍모가 아닌가? 멀리서 보기만 해도 절세검객의 위엄이 생생하게 느껴지더군.”

“신검무적의 오른쪽에 있던 옥을 깎아 놓은 듯한 미남자는 누군가?”

“보고도 모르나? 옥면신군이 아니고 누구겠나?”

“그럼 그 옆의 애꾸가 바로 비천호리겠군?”

“그렇지. 오늘 우리는 강호의 전설들을 줄줄이 본 걸세.”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흥분된 목소리로 떠들어 댔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흩어질 때, 그들 중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이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공교롭군. 천룡궤의 행방이 밝혀지기 직전인 이런 미묘한 시기에 신검무적이 석가장을 방문하다니…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보라색 장삼을 걸친 그 중년인은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를 서성이고 있다가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삼 년 만에 다시 온 석가장은 별로 달라진 곳이 없어 보였다. 적어도 낙일방의 눈에 비친 모습은 그러했다.

끝없이 늘어서 있는 화려하고 웅장한 고루거각들도 그대로였고,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각양각색의 화원들도 여전히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시기상으로도 당시와 같은 계절이어서 더욱 그런 느낌이 강했는지 몰랐다.

낙일방이 석가장의 경내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자, 중인들을 안내하고 있던 석지명이 그 모습을 보았는지 낙일방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낙 소협은 예전에 오셨을 때도 화원을 한참이나 바라보시더니 지금도 그러시는군요. 화원이 마음에 드십니까?”

낙일방이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걸 지금까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하하… 그때 화원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던 낙 소협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상의 옥동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저렇게 잘생긴 소년도 다 있구나 하고 속으로 몹시 감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군요.”

당시의 일을 회상하듯 석지명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긴 했으나 낙일방은 자신의 용모가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부담스러워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때 우리를 안내했던 분이 계셨던 것 같은데 오늘은 안 보이는군요.”

“하 집사 말씀이군요.”

석지명의 얼굴에 왠지 씁쓸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 집사는 지금 본가에 없습니다.”

낙일방은 석지명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 말씀드리기에는 조금 복잡한 일이라서…..”

석지명이 별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하자 낙일방도 더 이상 물을 수는 없었다.

그러는 동안 일행은 화원을 지나 제법 커다란 누각 앞에 이르게 되었다. 누각은 단층이었으나, 그들이 석가장에서 본 어떤 건물보다도 크고 웅장해 보였다.

<정연각>이라고 쓰인 현판이 누각의 정중앙 높은 곳에 달려 있었다.

이곳은 석가장을 찾아온 손님들이 머무르는 객소로, 석가장에서 이러한 객소가 무려 열두 곳이나 존재했다. 정연각은 그 열두 개의 객소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곳 중 하나였다.

정연각 앞에는 여섯 명의 시비와 한 명의 중년인이 나란히 서 있다가 그들이 들어오자 공손히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석지명은 그들 중 중년인을 그들에게 소개했다.

“이 사람은 정연각을 맡고 있는 모일우라고 합니다. 진 장문인 일행께서 본가에 머무르시는 동안 이 사람이 시중을 담당하게 될 겁니다.”

삼 년 전과 비하면 확실히 달라진 대접이었다. 당시에 진산월 일행은 객소의 구경도 하지 못하고 석지명의 거처인 청운각에 머물렀으며, 시비나 시중을 드는 사람도 특별히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객소 중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곳으로 안내되었을 뿐 아니라, 여섯 명의 시비와 한 명의 안내인을 두게 되었으니 그때와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실감이 날 지경이었다.

진산월 일행의 안내를 모일우에게 넘긴 석지명은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며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모일우는 삼십 대 초반의 이목구비가 단정한 중년인이었다. 모일우는 진산월의 앞으로 다가와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모일우라 합니다.”

모일우의 안내로 정연각에 들어선 일행들은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연각의 내부는 그야말로 호화로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귀하디귀한 서역의 양탄자였고, 벽에는 대가들의 도서가 걸려 있었다. 높은 천장에는 기이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고, 기둥은 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실내의 화려함은 서안 제일의 부자를 아버지로 둔 손풍조차도 놀라게 할 정도였으니 종남파의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해서 무엇하랴.

모두들 입을 쩍 벌린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가운데 모일우의 조용한 음성이 중인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이 정연각은 본가의 열두 개 객소 중에서도 제일 귀빈을 모시는 곳입니다. 그래서 본가의 다른 곳보다도 조금 더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사실 석가장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보다는 내실의 실용적인 면을 더 중시하는 가풍이 있어서 대다수의 건물들은 그리 크지 않았고 오히려 아담하면서도 고아한 풍취를 풍기고 있었다.

다만 객소들은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기 때문에 일부러 사치스럽게 꾸민 모양이었다.

정연각에는 모두 열 개가 넘는 방과 세 개의 크고 작은 대청이 있어서 사오십 명의 손님도 충분히 묵을 수 있을 정도였다.

진산월 일행은 모두 하나씩의 방을 배정받았는데, 방 하나하나가 어찌나 크던지 어제 머물렀던 별실의 방을 모두 합친 것만 했다.

진산월의 방은 특히 거대해서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이 방은 거대 문파의 장문인이나 한 지방의 패주들만이 묵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 인물들이라면 당연히 가까운 거리에서 호위하는 인물들이 있을 터이니, 두 개의 작은 방은 그런 호위무사들을 위한 곳이었다.

진산월 일행이 여장을 풀고 정연각의 가운데 있는 넓은 대청에 모였을 때였다.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정연각의 문이 활짝 열리며 한 사람이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낙일방이 들어온 사람을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뇌 숙부님!”

들어온 사람은 종남파 고수들을 둘러보더니 눈자위를 실룩거리며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붉은색 장포를 걸친 오십 대 후반의 중늙은이였다. 노인답지 않게 키가 상당히 컸고, 넓은 어깨에 당당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 혈색이 좋지 않았고, 양쪽 뺨이 홀쭉해서 왠지 초췌해 보였다.

그 홍포노인은 다름 아닌 진산수 뇌일봉이었다.

뇌일봉은 종남파의 전대 장문인인 임장홍의 절친한 친구로, 진산월을 비롯한 종남파 고수들과도 친분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삼 년 전의 무림대집회가 끝난 후 그는 종남파 고수들과 함께 무림매의 집결지로 이동하다가 서장의 고수인 삼색귀파 호용의 암습을 받아 절독에 중독되어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진산월은 석지명에게 부탁하여 그를 석가장으로 데려가게 했는데, 뇌일봉의 독상이 예상보다 심각하여 삼년 가까이 병석에 누워 있다가 얼마 전에야 겨우 회복될 수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병고에 시달려서인지 그토록 혈기왕성하고 거칠 것 없던 뇌일봉이었건만 지금은 보는 사람이 안타까움을 느낄 정도로 수척해 있었다. 낙일방은 뇌일봉의 초라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는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뇌일봉 또한 종남파 고수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쉴 사이 없이 얼굴에 잔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특히 앙상하게 마른 진산월을 볼 때 뇌일봉의 얼굴에는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착잡한 빛이 감돌았다.

하나 뇌일봉은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종남파의 풋내기들이 이제 제법 강호인 냄새가 나는걸 보니 그동안 허송세월만 하고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구나.”

외모는 아직 병색을 완전히 씻지 못했으나 그 걸걸한 음성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제서야 낙일방의 얼굴에도 조금씩 미소가 떠올랐다.

“뇌 숙부도 그다지 늙지 않으셨네요. 흰머리도 별로 안 보이는걸 보니 사십대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뇌일봉은 짐짓 눈을 부라렸다.

“네 녀석이 요즘 쥐꼬리만한 명성을 날리고 있다고 감히 노부를 놀리려 드느 게냐? 그나저나 안 본 사이에 부쩍 커졌구나. 무얼 먹고 그리리 큰거냐?”

뇌일봉은 예전에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았던 낙일방이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한 모습에 자못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낙일방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덩치만 커졌지 아직 어설픈 구석이 많습니다. 뇌 숙부께서 예전처럼 잘 보살려 주셔야 합니다.”

뇌일봉은 껄껄 웃으며 그의 어깨를 탁 쳤다.

“하하…. 풋내만 가득하던 놈이 제법 남자다운 소리를 하는구나. 오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보가 너 하나 돌보지 못하겠느냐?”

“몸은 완전히 회복되신 겁니까?”

“물론이다. 지금도 네놈 정도는 한 손으로 상대할 수 있다. 시험해 보겠느냐?”

낙일방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뒤로 물러났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뇌 숙부를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한 손이 아니라 손가락 하나도 감당 못할 겁니다.”

“녀석. 엄살은 여전하구나.”

낙일방과 대화를 나누면서 뇌일봉은 부쩍 표정이 밝아지고 음성에 힘이 들어갔다. 그 동안의 고생으로 몸과 마음이 많이 쇠약해졌던 뇌일봉은 낙일방을 보면서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것 같았다.

진산월이 뇌일봉에게 다가와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진작 찾아오니 못해 죄송합니다. 그동안 별래무양하셨습니까?”

뇌일봉은 낙일방을 대할 때와는 달리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고 한참이나 진산월을 쳐다보더니 간신히 무거운 음성을 내뱉었다.

“보고도 모르느냐? 노부는 잘 있다. 그런데 몸은 어쩌다 그렇케 된 거냐? 아니 그보다 얼굴의 그 상처는…..”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강호인이 되는 과정에 벌어진 일입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너무도 평온한 그의 음성에 뇌일봉은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입을 다물고 말았다. 뇌일봉은 진산월의 깊게 가라앉은 두 눈을 보고서야 지난 세월 동안 그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눈은 강호의 무정함을 뼛속 깊숙이 새긴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뇌일봉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진산월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비록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진산월의 어깨를 두드리는 그의 이 작은 행동에는 그동안 가슴속에 쌓였던 많은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반가운 해후를 마치 일행은 대청에 커다란 탁자 주위에 동그렇게 둘러 앉았다.

“뇌 대협.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동중산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뇌일봉은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알고 있네. 자네는 동중산이 아닌가? 자네도 잘 있는 것 같군.”

동중산을 대하는 뇌일봉의 태도는 다소 냉랭한 것이었다.
과거에 뇌일봉은 동중산 때문에 진산월이 곤궁에 처한 광경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최근에는 동중산이 종남파의 부흥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머릿속의 깊숙이 박인 그에 대한 나쁜 인상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뇌일봉은 동중산이 순진하고 어수룩한 종남파 고수들의 눈을 속여 그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심정이 얼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으니 눈치 빠른 동중산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나 동중산은 조금도 화르 내거나 언짢아하지 않고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뇌 대협께서는 전대 장문인의 친구분이시니 제게는 사조뻘이 되십니다. 그러니 아랫사람 대하듯 편하게 대하셔도 됩니다.”

동중산의 나이가 강호에서의 명성으로 볼 때 뇌일봉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아랫사람을 자처할 만큼 미약한 존재도 아니었다. 하나 동중산은 뇌일봉을 종남파의 선배 고수와 같은 웃어른으로 인정을 했고, 그에 맞게 행동을 한 것뿐이다. 뇌일봉은 사양하지도 않고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말투를 바꾸었다.

“알았다. 앞으로 잘 지켜보도록 하마.”

뇌일봉의 말 속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으나 동중산은 담담한 얼굴로 그에게 머리를 숙인 후 자리에 앉았다. 뇌일봉은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달리 동중산이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자 다소 의외인 듯했으나, 여전히 그에게 날카로운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다 뇌일봉의 시선이 동중산의 옆에 있는 전흠과 손풍 등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다른 세 사람은 모두 처음 보는군. 이들도 종남파의 제자들이냐?”

진산월이 그들을 뇌일봉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본파의 사숙조이신 전풍개 어른의 손자로, 제게는 사제가 됩니다. 그리고 다들 두 사람들은 제가 새롭게 거두어들인 제자들입니다. 인사 올려라. 이분은 진산수 뇌일봉, 뇌 대협이시다. 나의 선사와 막역지우로, 오랫동안 본파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분이시다.”

전흠은 이곳에 오기 전에 뇌일봉에 대한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전흠입니다. 뇌 대협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뇌일봉은 전풍개의 손자라는 말에 놀란 빛을 감추지 못했다.

“오! 전 선배께서 종남파로 돌아오셨다는 말은 들었다만 네가 그분의 손자로구나. 선배님께서는 별고 없으시더냐?”

“예. 아직 정정하십니다. 지금도 단 하루도 손에서 검을 놓는 날이 없으십니다.”

“역시…..”

뇌일봉의 두 눈에 잠시 아련한 빛이 떠올랐다. 뇌일봉이 임장홍과 교분을 나누기 시작한 것은 벌써 이십 년도 더 된 오래전의 일이었다. 당시 임장홍은 종남파의 여러 제자들 중 한 사람에 불과했고, 자신이 장문인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 기산취악 이후 종남파의 많은 제자들이 종남파를 떠나면서 임장홍은 자연스레 종남파의 장문인이 되었다. 당시 임장홍이 무엇보다 아쉬워했던 것은 전풍개를 비롯한 종남삼검이 모두 종남파를 등진 것이었다. 그들의 행방을 수소문하느라 임장홍은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쉰 적이 없었다. 그토록 찾아 헤메던 종남삼검 중의 한 사람이 임장홍의 사후에야 비로소 종남파로 되돌아왔으니 뇌일봉으로서는 흐믓함과 착잡함이 교차하는 심정이었다.
친우의 소망을 생각한다면 늦게라도 돌아와 준 것이 한없이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었으나, 그토록 찾아도 보이지 않다가 친우가 죽은 다음에야 돌아온 것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마음이야 어쨌든 뇌일봉은 누구보다 거칠고 불같은 성격에 검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니고 있던 전풍개의 모습을 떠올리며 잠시 감회에 젖었다.
그 바람에 전흠의 뒤를 이어 인사를 하려던 손풍과 유소응은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유소응이야 침착한 성격답게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나, 손풍은 눈꼬리가 쭉 찢어지면서 두 눈에 못마땅한 표정이 가득했다.

‘제길. 어디서 다 죽게 생긴 노인네가 선배랍시고 어른 행세를 하려 하는군. 어째 이놈의 문파는 가면 갈수록 제대로 된 사람을 보기가 힘들단 말이냐?’

손풍은 자기 같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비정상적인 인물들로만 이루어진 종남파에 꼭 있어야 하는지 잠시 진지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대청의 문이 열리며 석지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석지명은 중인들 틈에 뇌일봉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뇌 대협을 모시려 가려 했는데 이미 와 계셨군요. 인사들은 잘 나누셨습니까?”

“이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좀이 쑤셔서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먼저 오고야 말았네.”

“잘하셨습니다.”

석지명은 빙긋 웃으며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외 대협의 독상이 생각보다 지독하여 침상에서 일어난지 불과 몇 달 되지도 않으십니다. 어제만 해도 기력이 없어 꼼짝도 안 하시던 분이 종남파 분들을 뵈자마자 이렇듯 활달해지셨으니 확실히 반가운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좋은 특효약은 없는 모양입니다.”

석지명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사실 뇌일봉을 치료하기 위해서 석지명은 적지 않은 무리를 해야만 했다. 당시 뇌일봉은 삼색귀파 호용이 자랑하는 삼색사 중에서도 가장 무섭다는 청설사에게 물려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석지명이 그를 데리고 석가장에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열흘 가까이 시간이 흐른 후였는데, 그 때문인지 청설사의 맹독이 골수까지 파고 들어 뇌일봉은 하마터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고 한줌 핏물로 녹아 버릴 뻔했다.

석지명은 낙양의 이름난 명의들을 불러들이느라 적지 않은 고생을 했고, 그 후에도 약값으로 만만치 않은 금액을 지출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그가 삼 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과는 특별한 관계도 없는 뇌일봉을 극진히 보살핀 것은 확실히 찬사를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뇌일봉은 비록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으나 석지명을 바라볼 때마다 그의 시선 속에는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진산월을 비롯한 종남파의 고수들 또한 석지명의 노고가 대단했다는 것을 새삼 절감할 수 있었다.

석지명은 장내의 분위기가 조금 무거운 것을 깨닫고는 짝 소리가 나도록 자신의 양손을 힘껏 움켜잡으며 활기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에는 종남파의 여러분들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조촐한 연회를 열 예정이니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해 주셨으면 합니다.”

연회라는 말에 손풍이 귀가 번쩍 뜨이더니 시무룩했던 얼굴이 급격히 밝아졌다.

“석가장에서 연회라면 기대가 되는군요. 어떤 일이 있어도 참석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이 난 손풍이 무심결에 큰소리를 내뱉고는 제풀에 놀라 찔끔거렸다. 하늘같은 장문인과 문파의 선배들이 있는 자리에서 제일 아래 서열의 손풍이 불쑥 말을 내뱉자 모두들 황당하다는 표정을 했다. 낙일방이나 동중산이야 으레 그러려니 하고 포기하는 모습이었으나 전흠은 금시라도 달려들 듯 험악한 눈으로 손풍을 사저없이 쏘아보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희한하게 생각한 사람은 뇌일봉이었다.

“허허…. 그놈 목소리 한번 우렁차구나. 네 이름은 무엇이냐?”

손풍은 즉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뇌일봉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저는 종남차의 이십이대 제자인 손풍이라 합니다.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뇌 대협을 직접 뵙게 되니 금생의 영광이 아닐까 합니다.”

손풍이 평상시와는 전혀 다르게 의젓하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하자 중인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나 동중산은 손풍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아마 뇌 대협에게 잘 보이면 장문인이나 전 사숙이 자신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사제, 자네는 정말 험한 길로만 가고 있군 그래.’

뇌일봉같이 강호에서 평생을 굴러먹은 노련한 인물이 손풍의 속셈에 넘어갈 리도 없을뿐더러 진산월이나 전흠은 남의 눈치나 살피면 자신이 해야 할 행동을 망설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뇌일봉은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지 연신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 한번 시원시원하게 하는구나. 노부의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느냐?”

뜻밖의 물음에 손풍은 자신도 모르게 멍청하게 되물었다.

“네? 어디서 들었느냐니요?”

“노부는 지난 삼 년간 병석에 누워 있느라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보아하니 너는 아직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신출내기 같은데 삼 년 동안 강호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노부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니 신기한 생각이 들어서 그런다. 노부에 대해 누가 무어라고 하더냐?”

손풍의 얼굴이 휴지 조각처럼 일그러졌다. 강호의 경험이라고는 전무에 가까운 그가 뇌일봉의 이름을 언제 들어 보기나 했겠는가? 그냥 남들이 그를 어른으로 대우하자 대충 넘겨짚어서 지껄인 것인데 그걸 꼬투리 잡아서 물어보고 있으니 손풍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지? 이 늙은이가 별 해괴한 일로 사람을 난처하게 하네.’

손풍은 홧김에 아예 눈을 딱 감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여 댔다.

“동 사형께서 이곳에 오기 전에 뇌 대협의 행적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주셨습니다. 당금 강호에서 보기 드문 철담협골의 기인이시라고 하더군요.”

동중산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반쯤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손풍은 넉살 좋게 계속 입을 놀려 댔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에 무공도 놀라워서 사마외도의 무리들이 뇌 대협의 모습만 봐도 꼬리를 말고 도망친다는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도 아직은 미천한 말단 제자에 불과하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뇌 대협처럼 말은 멸하고 의를 숭상하는 협객이 되겠습니다.”

청산유수처럼 늘어놓은 손풍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종남파의 고수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으나, 뇌일봉은 얼굴이 온통 주름살투성이가 되도록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아무래도 네 장문인이 너의 입심을 보고 제자로 받아들인 모양이구나. 오냐, 네가 말처럼 될 수 있는지 노부가 계속 관심을 가지고 보도록 하겠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손풍은 자신만만한 음성으로 말한 후 자리에 앉았다. 동중산이 멀거니 그를 쳐다보았으나 손풍은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뇌일봉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손풍을 응시하더니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유소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유소응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유소응이라 합니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뇌일봉은 유소응의 유난히 작은 체구와 광대뼈가 돌출되고 옆으로 찢어진 눈, 가무잡잡한 피부 등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그의 눈에 시선을 맞추었다.

유소응은 뇌일봉의 따가운 시선에도 전혀 주눅 들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차분한 모습에 뇌일봉은 부쩍 흥미가 이는지 그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나이는 몇 살이며 고향은 어디인지, 종남파에 입문한 것은 언제인지를 계속 물었다. 그러다 유소응이 몽고의 대초원에서 태어났으며, 부모가 없는 고아임을 알게 되자 속으로 혀를 찼다.

‘쯧. 괜한 걸 물어보았군.’

뇌일봉은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강호의 도산검림을 헤치며 살아왔다. 그러다 지난 삼 년 동안 혹독한 병고에 시달린 후로는 불현듯 가정이 그리워졌다. 자신이 왜 진즉에 남들처럼 가정을 꾸려 오붓한 행복한 맛보지 못했는지 아쉬운 생각에 늘 가슴 한 구석이 저려 왔다.

그런데 오늘 손자뻘밖에 되지 않는 어린 유소응을 보자 그런 마음속의 아쉬움이 더욱 진하게 느껴진 것이다. 자신도 정상적으로 가정을 꾸렸다면 지금쯤 유소응 같은 손자의 재롱을 보고 있을 거란 생각에 왠지 유소응이 남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뇌일봉이 유소응에게 관심을 보이는 동안 석지명은 진산월을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 잠시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습니까?”

“무슨 일이오?”

진산월이 묻자 석지명은 조심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은 부친께서 진 장문인을 뵈었으면 하십니다. 진 장문인의 의향은 어떠십니까?”

“어렵지 않은 일이오. 장주께선 언제 만나자고 하시오?”

“아무 때고 시간이 되면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진산월은 더 생각해 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금 만나도록 합시다. 남의 집에 왔으면 집주인에게 인사부터 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소?”

석지명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지요.”

그가 어색한 웃음을 흘린 것은 삼 년 전의 일 때문이었다. 당시 진산월은 석가장주를 만나기는 커녕 일언반구조차 듣지 못한 채 석가장을 떠나야만 했었다. 석지명은 지금 진산월이 당시의 일을 넌지시 빗대어 말한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가시지요”

석지명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자 옆에서 그들의 말을 유심히 듣고 있던 동중산도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석지명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동 대협. 부친께서는 진 장문인만을 뵙고자 하십니다.”

동중산이 무어라고 말하려 하자 진산월이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나 혼자 갔다 올 테니 다들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해라.”

동중산은 어쩔 수 없이 잘 다녀오시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동중산이 계속 바라보고 있자 낙일방이 빙긋 웃으며 그를 놀렸다.

“장문사형을 못 따라간 게 그렇게 억울합니까?”

동중산은 고소를 머금었다.

“이번 기회에 어쩌면 천하제일거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기대가 깨어져 아쉬워서 그렇습니다.”

낙일방은 짐짓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오! 동 사질이 석가장주에게 그토록 관심이 많을 줄은 미처 몰랐군요.”

“어찌 저뿐이겠습니까? 석곤이 석가장주가 된 후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열 번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먼발치에서나마 그를 한 번이라도 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그래요? 나는 석곤의 이름이 하도 널리 알려져 있기에 적어도 낙양 일대에서는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낙양 사람들이 석곤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무면공이라고 합니다. 아무도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이 없다는 뜻이지요.”

“그 정도였나여?”

고개를 갸웃거리던 낙일방은 문득 생각이 났는지 뇌일봉을 돌아보며 물었다.

“뇌 숙부께서는 석가장주를 보신 적이 있겠지요?”

뇌일봉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못 봤다.”

“이곳에 삼 년 동안이나 계셨는데 석가장주 얼굴 한 번 안 보셨단 말씀이십니까?”

“삼 년이라고 해봤자 거의 대부분의 기간을 방안에 쳐박혀 꼼짝도 못했는데 그 얼굴 보기 힘들다는 석가장주를 어느 결에 만날 수 있었겠느냐?”

“아무리 그래도…..”

뇌일봉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부가 비록 강호에서 조금 이름이 알려졌다고 하지만 석가장주 입장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강호의 무부 중 하나에 불과했겠지. 아마 석가장주는 노부가 이곳에서 삼 년 동안 병을 치료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할 것이다.”

낙일방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럴 리가요? 아마 뇌 숙부께서 병이 낫기를 기다리다가 만날 시기를 놓친 걸 겁니다.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일개 상인이 감히 진산수를 무시할 수 있습니까?”

뇌일봉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이 왠지 허탈해 보여 낙일방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뇌일봉은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일개 상인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석곤은 일개 상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

석가장의 아침은 언제나 분주하다.

오늘은 평상시보다 한층 더 분주했다. 아침 일찍부터 석가장의 하인들은 바닥을 쓸고 드넓은 장원의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석가장에 야채를 배달하는 곡노대가 마침 정문 앞을 쓸고 있는 마칠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오늘 무슨 중요한 손님이라도 오나? 아침부터 무척 번잡하군그래.”

마칠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가 오긴 온다고 하는 것 같소. 뭐래더라? 어디의 장문인이라고 했는데…”

“정문 앞까지 청소하는 걸 보니 구대문파 중 하나라도 되는 모양이군?”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종남파라던가? 아무튼 별로 관심 없어서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팔공자의 손님이라고 하오.”

곡노대는 야채를 배달하느라 여기저기 다닌 통에 제법 견문이 넓었는지 탄성을 터뜨렸다.

“허! 종남파의 장문인이 팔공자의 손님이라니… 그 별볼일 없을 것 같던 팔공자가 아주 제대로 봉을 잡았구나.”

마칠은 귀가 솔깃해졌는지 급히 물었다.

“종남파의 장문인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오?”

“이를 말인가? 자네는 신검무적이라는 이름도 듣지 못했나?”

마칠은 멋쩍게 웃었다.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솔직히 요새 다른 일에 신경 쓰느라 통 바깥 소식에 관심을 두지 못했소.”

“보나마나 그 애화년에 빠져서 정신이 없었겠지.”

“헤헤… 알면서 굳이 그렇게 말할 건 뭐요? 그나저나 신검무적이 엄청난 고수라도 되는 모양이구려?”

“말해서 무엇하나? 최근 들어 강호에서 가장 명성이 대단한 인물일세. 지난 백 년 동안 나타난 검객들 중 제일가는 솜씨를 지녔다고 하더군.”

마칠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이오? 내가 알기로는 강호제일검이 검봉이라고 불리는 화산파 장문인이라고 했는데. 그새 바뀌기라도 했단 말이오?”

곡노대는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고는 한층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네. 그런데 요즘 들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나?”

“뭐라고 하오?”

“봉시고단유운저(산봉우리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구름 아래 있을 뿐이다)”

“그게 무슨 뜻이오?”

“여기서 봉우리는 검봉, 즉 화산파 장문인을 뜻하네.”

“그럼 구름은?”

“당연히 신검무적이지. 일설에 의하면 신검무적이 일단 검을 휘두르면 구름 같은 검광이 일어나 장내를 완전히 뒤덮어 버린다고 하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를 일검운해라고 부르기도 한다네.”

“그럼 검봉이 아무리 뛰어난 검객이라고 해도 신검무적을 당해내지 못한다는 말이오?”

곡노대는 황급히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눈짓을 했다.

“쉿! 소리를 낮추게. 그런 말이 떠돈다는 것이지. 두 사람이 직접 검을 겨뤄 보지 않은 다음에야 누가 더 뛰어난 검객인지를 어느 누가 알겠는가?”

마칠도 덩달아 찔끔하여 주위를 둘러보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절세의 검객들이 섣불리 싸우려 하겠소? 패한 사람은 평생 쌓은 명성이 무너지고 말 텐데…”

“그런데 그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들어 보게. 종남파와 화산파는 수백 년 동안 서안 일대의 패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어 오고 있었네. 그러다 종남파가 몰락하여 지난 백여 년간 화산파가 서안은 물론이고 섬서성 전체를 쥐고 흔들었지. 그런데 이번에 종남파가 다시 부활했네. 자네 생각에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은가?”

마칠은 잠시 생각하다가 눈을 반짝거렸다.

“그럼 종남파와 화산파가 다시 격돌이라도 한단 말이오?”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있을 수 없으니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들 두 사람이 싸우게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마칠은 멍하니 곡노대의 말을 듣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짤막한 탄성을 토해냈다.

“아! 그렇다면 어쩌면 팔공자와 대공자가 다툴지도 모르겠구려.”

이번에는 곡노대가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마칠은 신이 나서 입을 놀렸다.

“대공자가 후원하는 문파가 바로…..”

그때 정문 안쪽에서 누군가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마칠은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고는 허겁지겁 빗자루를 들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곡노대는 멀어지는 마칠의 등을 바라보며 아쉬운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제길. 나 혼자 실컷 떠들고 정작 들어야 할 얘기는 하나도 못 들었군.”

그는 혼자서 무어라고 투덜거리더니 다시 야채를 운반하기 위해 수레로 다가갔다.


정오 무렵, 굳게 닫혀 있던 석가장의 정문이 나직한 굉음을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활짝 열린 정문 사이로 이십여 명의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 나와 양쪽으로 도열해 섰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여 호기심 어린 눈길로 쳐다보는 동안, 열려진 정문 앞으로 몇 명의 사람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들은 모두 여섯 명이었는데, 네 사람은 젊은 청년들이었고 한 사람은 나이 어린 소년, 또 한 사람은 애꾸눈의 중년인이었다. 그들 중 유달리 키가 크고 얼굴에 칼자국이 나 있는 청년이 특히 중인들의 시선을 끌었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놀란 외침을 토해냈다.

“앗? 저 사람은 신검무적이다!”

그 말이 퍼지자 장내는 시장바닥처럼 시끌벅적한 소리에 뒤덮여 버렸다.

“저 사람이 바로 대종남의 장문인인 진산월이다.”

“강호제일검이 낙양에 왔다!”

삽시간에 석가장의 정문 앞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서로 신검무적의 얼굴을 보려고 앞을 다투어 다가왔으나, 차마 그들의 앞까지 다가오지는 못했다. 행여라도 그들이 몸을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중인들의 따가운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진산월 일행은 하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석가장의 활짝 열린 정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모습이 석가장 안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 선 채로 떠날 줄을 몰랐다.

“아….. 신검무적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정말 꿈만 같구나.”

“누가 아니래나? 정말 당당한 풍모가 아닌가? 멀리서 보기만 해도 절세검객의 위엄이 생생하게 느껴지더군.”

“신검무적의 오른쪽에 있던 옥을 깎아 놓은 듯한 미남자는 누군가?”

“보고도 모르나? 옥면신군이 아니고 누구겠나?”

“그럼 그 옆의 애꾸가 바로 비천호리겠군?”

“그렇지. 오늘 우리는 강호의 전설들을 줄줄이 본 걸세.”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흥분된 목소리로 떠들어 댔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흩어질 때, 그들 중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이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공교롭군. 천룡궤의 행방이 밝혀지기 직전인 이런 미묘한 시기에 신검무적이 석가장을 방문하다니…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보라색 장삼을 걸친 그 중년인은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를 서성이고 있다가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삼 년 만에 다시 온 석가장은 별로 달라진 곳이 없어 보였다. 적어도 낙일방의 눈에 비친 모습은 그러했다.

끝없이 늘어서 있는 화려하고 웅장한 고루거각들도 그대로였고,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각양각색의 화원들도 여전히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시기상으로도 당시와 같은 계절이어서 더욱 그런 느낌이 강했는지 몰랐다.

낙일방이 석가장의 경내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자, 중인들을 안내하고 있던 석지명이 그 모습을 보았는지 낙일방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낙 소협은 예전에 오셨을 때도 화원을 한참이나 바라보시더니 지금도 그러시는군요. 화원이 마음에 드십니까?”

낙일방이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걸 지금까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하하… 그때 화원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던 낙 소협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상의 옥동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저렇게 잘생긴 소년도 다 있구나 하고 속으로 몹시 감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군요.”

당시의 일을 회상하듯 석지명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긴 했으나 낙일방은 자신의 용모가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부담스러워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때 우리를 안내했던 분이 계셨던 것 같은데 오늘은 안 보이는군요.”

“하 집사 말씀이군요.”

석지명의 얼굴에 왠지 씁쓸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 집사는 지금 본가에 없습니다.”

낙일방은 석지명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 말씀드리기에는 조금 복잡한 일이라서…..”

석지명이 별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하자 낙일방도 더 이상 물을 수는 없었다.

그러는 동안 일행은 화원을 지나 제법 커다란 누각 앞에 이르게 되었다. 누각은 단층이었으나, 그들이 석가장에서 본 어떤 건물보다도 크고 웅장해 보였다.

<정연각>이라고 쓰인 현판이 누각의 정중앙 높은 곳에 달려 있었다.

이곳은 석가장을 찾아온 손님들이 머무르는 객소로, 석가장에서 이러한 객소가 무려 열두 곳이나 존재했다. 정연각은 그 열두 개의 객소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곳 중 하나였다.

정연각 앞에는 여섯 명의 시비와 한 명의 중년인이 나란히 서 있다가 그들이 들어오자 공손히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석지명은 그들 중 중년인을 그들에게 소개했다.

“이 사람은 정연각을 맡고 있는 모일우라고 합니다. 진 장문인 일행께서 본가에 머무르시는 동안 이 사람이 시중을 담당하게 될 겁니다.”

삼 년 전과 비하면 확실히 달라진 대접이었다. 당시에 진산월 일행은 객소의 구경도 하지 못하고 석지명의 거처인 청운각에 머물렀으며, 시비나 시중을 드는 사람도 특별히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객소 중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곳으로 안내되었을 뿐 아니라, 여섯 명의 시비와 한 명의 안내인을 두게 되었으니 그때와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실감이 날 지경이었다.

진산월 일행의 안내를 모일우에게 넘긴 석지명은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며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모일우는 삼십 대 초반의 이목구비가 단정한 중년인이었다. 모일우는 진산월의 앞으로 다가와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모일우라 합니다.”

모일우의 안내로 정연각에 들어선 일행들은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연각의 내부는 그야말로 호화로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귀하디귀한 서역의 양탄자였고, 벽에는 대가들의 도서가 걸려 있었다. 높은 천장에는 기이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고, 기둥은 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실내의 화려함은 서안 제일의 부자를 아버지로 둔 손풍조차도 놀라게 할 정도였으니 종남파의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해서 무엇하랴.

모두들 입을 쩍 벌린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가운데 모일우의 조용한 음성이 중인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이 정연각은 본가의 열두 개 객소 중에서도 제일 귀빈을 모시는 곳입니다. 그래서 본가의 다른 곳보다도 조금 더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사실 석가장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보다는 내실의 실용적인 면을 더 중시하는 가풍이 있어서 대다수의 건물들은 그리 크지 않았고 오히려 아담하면서도 고아한 풍취를 풍기고 있었다.

다만 객소들은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기 때문에 일부러 사치스럽게 꾸민 모양이었다.

정연각에는 모두 열 개가 넘는 방과 세 개의 크고 작은 대청이 있어서 사오십 명의 손님도 충분히 묵을 수 있을 정도였다.

진산월 일행은 모두 하나씩의 방을 배정받았는데, 방 하나하나가 어찌나 크던지 어제 머물렀던 별실의 방을 모두 합친 것만 했다.

진산월의 방은 특히 거대해서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이 방은 거대 문파의 장문인이나 한 지방의 패주들만이 묵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 인물들이라면 당연히 가까운 거리에서 호위하는 인물들이 있을 터이니, 두 개의 작은 방은 그런 호위무사들을 위한 곳이었다.

진산월 일행이 여장을 풀고 정연각의 가운데 있는 넓은 대청에 모였을 때였다.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정연각의 문이 활짝 열리며 한 사람이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낙일방이 들어온 사람을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뇌 숙부님!”

들어온 사람은 종남파 고수들을 둘러보더니 눈자위를 실룩거리며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붉은색 장포를 걸친 오십 대 후반의 중늙은이였다. 노인답지 않게 키가 상당히 컸고, 넓은 어깨에 당당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 혈색이 좋지 않았고, 양쪽 뺨이 홀쭉해서 왠지 초췌해 보였다.

그 홍포노인은 다름 아닌 진산수 뇌일봉이었다.

뇌일봉은 종남파의 전대 장문인인 임장홍의 절친한 친구로, 진산월을 비롯한 종남파 고수들과도 친분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삼 년 전의 무림대집회가 끝난 후 그는 종남파 고수들과 함께 무림매의 집결지로 이동하다가 서장의 고수인 삼색귀파 호용의 암습을 받아 절독에 중독되어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진산월은 석지명에게 부탁하여 그를 석가장으로 데려가게 했는데, 뇌일봉의 독상이 예상보다 심각하여 삼년 가까이 병석에 누워 있다가 얼마 전에야 겨우 회복될 수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병고에 시달려서인지 그토록 혈기왕성하고 거칠 것 없던 뇌일봉이었건만 지금은 보는 사람이 안타까움을 느낄 정도로 수척해 있었다. 낙일방은 뇌일봉의 초라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는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뇌일봉 또한 종남파 고수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쉴 사이 없이 얼굴에 잔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특히 앙상하게 마른 진산월을 볼 때 뇌일봉의 얼굴에는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착잡한 빛이 감돌았다.

하나 뇌일봉은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종남파의 풋내기들이 이제 제법 강호인 냄새가 나는걸 보니 그동안 허송세월만 하고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구나.”

외모는 아직 병색을 완전히 씻지 못했으나 그 걸걸한 음성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제서야 낙일방의 얼굴에도 조금씩 미소가 떠올랐다.

“뇌 숙부도 그다지 늙지 않으셨네요. 흰머리도 별로 안 보이는걸 보니 사십대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뇌일봉은 짐짓 눈을 부라렸다.

“네 녀석이 요즘 쥐꼬리만한 명성을 날리고 있다고 감히 노부를 놀리려 드느 게냐? 그나저나 안 본 사이에 부쩍 커졌구나. 무얼 먹고 그리리 큰거냐?”

뇌일봉은 예전에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았던 낙일방이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한 모습에 자못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낙일방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덩치만 커졌지 아직 어설픈 구석이 많습니다. 뇌 숙부께서 예전처럼 잘 보살려 주셔야 합니다.”

뇌일봉은 껄껄 웃으며 그의 어깨를 탁 쳤다.

“하하…. 풋내만 가득하던 놈이 제법 남자다운 소리를 하는구나. 오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보가 너 하나 돌보지 못하겠느냐?”

“몸은 완전히 회복되신 겁니까?”

“물론이다. 지금도 네놈 정도는 한 손으로 상대할 수 있다. 시험해 보겠느냐?”

낙일방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뒤로 물러났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뇌 숙부를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한 손이 아니라 손가락 하나도 감당 못할 겁니다.”

“녀석. 엄살은 여전하구나.”

낙일방과 대화를 나누면서 뇌일봉은 부쩍 표정이 밝아지고 음성에 힘이 들어갔다. 그 동안의 고생으로 몸과 마음이 많이 쇠약해졌던 뇌일봉은 낙일방을 보면서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것 같았다.

진산월이 뇌일봉에게 다가와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진작 찾아오니 못해 죄송합니다. 그동안 별래무양하셨습니까?”

뇌일봉은 낙일방을 대할 때와는 달리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고 한참이나 진산월을 쳐다보더니 간신히 무거운 음성을 내뱉었다.

“보고도 모르느냐? 노부는 잘 있다. 그런데 몸은 어쩌다 그렇케 된 거냐? 아니 그보다 얼굴의 그 상처는…..”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강호인이 되는 과정에 벌어진 일입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너무도 평온한 그의 음성에 뇌일봉은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입을 다물고 말았다. 뇌일봉은 진산월의 깊게 가라앉은 두 눈을 보고서야 지난 세월 동안 그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눈은 강호의 무정함을 뼛속 깊숙이 새긴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뇌일봉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진산월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비록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진산월의 어깨를 두드리는 그의 이 작은 행동에는 그동안 가슴속에 쌓였던 많은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반가운 해후를 마치 일행은 대청에 커다란 탁자 주위에 동그렇게 둘러 앉았다.

“뇌 대협.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동중산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뇌일봉은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알고 있네. 자네는 동중산이 아닌가? 자네도 잘 있는 것 같군.”

동중산을 대하는 뇌일봉의 태도는 다소 냉랭한 것이었다.
과거에 뇌일봉은 동중산 때문에 진산월이 곤궁에 처한 광경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최근에는 동중산이 종남파의 부흥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머릿속의 깊숙이 박인 그에 대한 나쁜 인상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뇌일봉은 동중산이 순진하고 어수룩한 종남파 고수들의 눈을 속여 그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심정이 얼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으니 눈치 빠른 동중산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나 동중산은 조금도 화르 내거나 언짢아하지 않고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뇌 대협께서는 전대 장문인의 친구분이시니 제게는 사조뻘이 되십니다. 그러니 아랫사람 대하듯 편하게 대하셔도 됩니다.”

동중산의 나이가 강호에서의 명성으로 볼 때 뇌일봉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아랫사람을 자처할 만큼 미약한 존재도 아니었다. 하나 동중산은 뇌일봉을 종남파의 선배 고수와 같은 웃어른으로 인정을 했고, 그에 맞게 행동을 한 것뿐이다. 뇌일봉은 사양하지도 않고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말투를 바꾸었다.

“알았다. 앞으로 잘 지켜보도록 하마.”

뇌일봉의 말 속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으나 동중산은 담담한 얼굴로 그에게 머리를 숙인 후 자리에 앉았다. 뇌일봉은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달리 동중산이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자 다소 의외인 듯했으나, 여전히 그에게 날카로운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다 뇌일봉의 시선이 동중산의 옆에 있는 전흠과 손풍 등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다른 세 사람은 모두 처음 보는군. 이들도 종남파의 제자들이냐?”

진산월이 그들을 뇌일봉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본파의 사숙조이신 전풍개 어른의 손자로, 제게는 사제가 됩니다. 그리고 다들 두 사람들은 제가 새롭게 거두어들인 제자들입니다. 인사 올려라. 이분은 진산수 뇌일봉, 뇌 대협이시다. 나의 선사와 막역지우로, 오랫동안 본파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분이시다.”

전흠은 이곳에 오기 전에 뇌일봉에 대한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전흠입니다. 뇌 대협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뇌일봉은 전풍개의 손자라는 말에 놀란 빛을 감추지 못했다.

“오! 전 선배께서 종남파로 돌아오셨다는 말은 들었다만 네가 그분의 손자로구나. 선배님께서는 별고 없으시더냐?”

“예. 아직 정정하십니다. 지금도 단 하루도 손에서 검을 놓는 날이 없으십니다.”

“역시…..”

뇌일봉의 두 눈에 잠시 아련한 빛이 떠올랐다. 뇌일봉이 임장홍과 교분을 나누기 시작한 것은 벌써 이십 년도 더 된 오래전의 일이었다. 당시 임장홍은 종남파의 여러 제자들 중 한 사람에 불과했고, 자신이 장문인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 기산취악 이후 종남파의 많은 제자들이 종남파를 떠나면서 임장홍은 자연스레 종남파의 장문인이 되었다. 당시 임장홍이 무엇보다 아쉬워했던 것은 전풍개를 비롯한 종남삼검이 모두 종남파를 등진 것이었다. 그들의 행방을 수소문하느라 임장홍은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쉰 적이 없었다. 그토록 찾아 헤메던 종남삼검 중의 한 사람이 임장홍의 사후에야 비로소 종남파로 되돌아왔으니 뇌일봉으로서는 흐믓함과 착잡함이 교차하는 심정이었다.
친우의 소망을 생각한다면 늦게라도 돌아와 준 것이 한없이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었으나, 그토록 찾아도 보이지 않다가 친우가 죽은 다음에야 돌아온 것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마음이야 어쨌든 뇌일봉은 누구보다 거칠고 불같은 성격에 검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니고 있던 전풍개의 모습을 떠올리며 잠시 감회에 젖었다.
그 바람에 전흠의 뒤를 이어 인사를 하려던 손풍과 유소응은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유소응이야 침착한 성격답게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나, 손풍은 눈꼬리가 쭉 찢어지면서 두 눈에 못마땅한 표정이 가득했다.

‘제길. 어디서 다 죽게 생긴 노인네가 선배랍시고 어른 행세를 하려 하는군. 어째 이놈의 문파는 가면 갈수록 제대로 된 사람을 보기가 힘들단 말이냐?’

손풍은 자기 같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비정상적인 인물들로만 이루어진 종남파에 꼭 있어야 하는지 잠시 진지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대청의 문이 열리며 석지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석지명은 중인들 틈에 뇌일봉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뇌 대협을 모시려 가려 했는데 이미 와 계셨군요. 인사들은 잘 나누셨습니까?”

“이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좀이 쑤셔서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먼저 오고야 말았네.”

“잘하셨습니다.”

석지명은 빙긋 웃으며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외 대협의 독상이 생각보다 지독하여 침상에서 일어난지 불과 몇 달 되지도 않으십니다. 어제만 해도 기력이 없어 꼼짝도 안 하시던 분이 종남파 분들을 뵈자마자 이렇듯 활달해지셨으니 확실히 반가운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좋은 특효약은 없는 모양입니다.”

석지명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사실 뇌일봉을 치료하기 위해서 석지명은 적지 않은 무리를 해야만 했다. 당시 뇌일봉은 삼색귀파 호용이 자랑하는 삼색사 중에서도 가장 무섭다는 청설사에게 물려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석지명이 그를 데리고 석가장에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열흘 가까이 시간이 흐른 후였는데, 그 때문인지 청설사의 맹독이 골수까지 파고 들어 뇌일봉은 하마터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고 한줌 핏물로 녹아 버릴 뻔했다.

석지명은 낙양의 이름난 명의들을 불러들이느라 적지 않은 고생을 했고, 그 후에도 약값으로 만만치 않은 금액을 지출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그가 삼 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과는 특별한 관계도 없는 뇌일봉을 극진히 보살핀 것은 확실히 찬사를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뇌일봉은 비록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으나 석지명을 바라볼 때마다 그의 시선 속에는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진산월을 비롯한 종남파의 고수들 또한 석지명의 노고가 대단했다는 것을 새삼 절감할 수 있었다.

석지명은 장내의 분위기가 조금 무거운 것을 깨닫고는 짝 소리가 나도록 자신의 양손을 힘껏 움켜잡으며 활기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에는 종남파의 여러분들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조촐한 연회를 열 예정이니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해 주셨으면 합니다.”

연회라는 말에 손풍이 귀가 번쩍 뜨이더니 시무룩했던 얼굴이 급격히 밝아졌다.

“석가장에서 연회라면 기대가 되는군요. 어떤 일이 있어도 참석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이 난 손풍이 무심결에 큰소리를 내뱉고는 제풀에 놀라 찔끔거렸다. 하늘같은 장문인과 문파의 선배들이 있는 자리에서 제일 아래 서열의 손풍이 불쑥 말을 내뱉자 모두들 황당하다는 표정을 했다. 낙일방이나 동중산이야 으레 그러려니 하고 포기하는 모습이었으나 전흠은 금시라도 달려들 듯 험악한 눈으로 손풍을 사저없이 쏘아보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희한하게 생각한 사람은 뇌일봉이었다.

“허허…. 그놈 목소리 한번 우렁차구나. 네 이름은 무엇이냐?”

손풍은 즉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뇌일봉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저는 종남차의 이십이대 제자인 손풍이라 합니다.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뇌 대협을 직접 뵙게 되니 금생의 영광이 아닐까 합니다.”

손풍이 평상시와는 전혀 다르게 의젓하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하자 중인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나 동중산은 손풍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아마 뇌 대협에게 잘 보이면 장문인이나 전 사숙이 자신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사제, 자네는 정말 험한 길로만 가고 있군 그래.’

뇌일봉같이 강호에서 평생을 굴러먹은 노련한 인물이 손풍의 속셈에 넘어갈 리도 없을뿐더러 진산월이나 전흠은 남의 눈치나 살피면 자신이 해야 할 행동을 망설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뇌일봉은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지 연신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 한번 시원시원하게 하는구나. 노부의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느냐?”

뜻밖의 물음에 손풍은 자신도 모르게 멍청하게 되물었다.

“네? 어디서 들었느냐니요?”

“노부는 지난 삼 년간 병석에 누워 있느라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보아하니 너는 아직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신출내기 같은데 삼 년 동안 강호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노부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니 신기한 생각이 들어서 그런다. 노부에 대해 누가 무어라고 하더냐?”

손풍의 얼굴이 휴지 조각처럼 일그러졌다. 강호의 경험이라고는 전무에 가까운 그가 뇌일봉의 이름을 언제 들어 보기나 했겠는가? 그냥 남들이 그를 어른으로 대우하자 대충 넘겨짚어서 지껄인 것인데 그걸 꼬투리 잡아서 물어보고 있으니 손풍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지? 이 늙은이가 별 해괴한 일로 사람을 난처하게 하네.’

손풍은 홧김에 아예 눈을 딱 감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여 댔다.

“동 사형께서 이곳에 오기 전에 뇌 대협의 행적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주셨습니다. 당금 강호에서 보기 드문 철담협골의 기인이시라고 하더군요.”

동중산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반쯤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손풍은 넉살 좋게 계속 입을 놀려 댔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에 무공도 놀라워서 사마외도의 무리들이 뇌 대협의 모습만 봐도 꼬리를 말고 도망친다는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도 아직은 미천한 말단 제자에 불과하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뇌 대협처럼 말은 멸하고 의를 숭상하는 협객이 되겠습니다.”

청산유수처럼 늘어놓은 손풍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종남파의 고수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으나, 뇌일봉은 얼굴이 온통 주름살투성이가 되도록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아무래도 네 장문인이 너의 입심을 보고 제자로 받아들인 모양이구나. 오냐, 네가 말처럼 될 수 있는지 노부가 계속 관심을 가지고 보도록 하겠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손풍은 자신만만한 음성으로 말한 후 자리에 앉았다. 동중산이 멀거니 그를 쳐다보았으나 손풍은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뇌일봉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손풍을 응시하더니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유소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유소응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유소응이라 합니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뇌일봉은 유소응의 유난히 작은 체구와 광대뼈가 돌출되고 옆으로 찢어진 눈, 가무잡잡한 피부 등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그의 눈에 시선을 맞추었다.

유소응은 뇌일봉의 따가운 시선에도 전혀 주눅 들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차분한 모습에 뇌일봉은 부쩍 흥미가 이는지 그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나이는 몇 살이며 고향은 어디인지, 종남파에 입문한 것은 언제인지를 계속 물었다. 그러다 유소응이 몽고의 대초원에서 태어났으며, 부모가 없는 고아임을 알게 되자 속으로 혀를 찼다.

‘쯧. 괜한 걸 물어보았군.’

뇌일봉은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강호의 도산검림을 헤치며 살아왔다. 그러다 지난 삼 년 동안 혹독한 병고에 시달린 후로는 불현듯 가정이 그리워졌다. 자신이 왜 진즉에 남들처럼 가정을 꾸려 오붓한 행복한 맛보지 못했는지 아쉬운 생각에 늘 가슴 한 구석이 저려 왔다.

그런데 오늘 손자뻘밖에 되지 않는 어린 유소응을 보자 그런 마음속의 아쉬움이 더욱 진하게 느껴진 것이다. 자신도 정상적으로 가정을 꾸렸다면 지금쯤 유소응 같은 손자의 재롱을 보고 있을 거란 생각에 왠지 유소응이 남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뇌일봉이 유소응에게 관심을 보이는 동안 석지명은 진산월을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 잠시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습니까?”

“무슨 일이오?”

진산월이 묻자 석지명은 조심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은 부친께서 진 장문인을 뵈었으면 하십니다. 진 장문인의 의향은 어떠십니까?”

“어렵지 않은 일이오. 장주께선 언제 만나자고 하시오?”

“아무 때고 시간이 되면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진산월은 더 생각해 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금 만나도록 합시다. 남의 집에 왔으면 집주인에게 인사부터 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소?”

석지명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지요.”

그가 어색한 웃음을 흘린 것은 삼 년 전의 일 때문이었다. 당시 진산월은 석가장주를 만나기는 커녕 일언반구조차 듣지 못한 채 석가장을 떠나야만 했었다. 석지명은 지금 진산월이 당시의 일을 넌지시 빗대어 말한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가시지요”

석지명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자 옆에서 그들의 말을 유심히 듣고 있던 동중산도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석지명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동 대협. 부친께서는 진 장문인만을 뵙고자 하십니다.”

동중산이 무어라고 말하려 하자 진산월이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나 혼자 갔다 올 테니 다들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해라.”

동중산은 어쩔 수 없이 잘 다녀오시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동중산이 계속 바라보고 있자 낙일방이 빙긋 웃으며 그를 놀렸다.

“장문사형을 못 따라간 게 그렇게 억울합니까?”

동중산은 고소를 머금었다.

“이번 기회에 어쩌면 천하제일거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기대가 깨어져 아쉬워서 그렇습니다.”

낙일방은 짐짓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오! 동 사질이 석가장주에게 그토록 관심이 많을 줄은 미처 몰랐군요.”

“어찌 저뿐이겠습니까? 석곤이 석가장주가 된 후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열 번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먼발치에서나마 그를 한 번이라도 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그래요? 나는 석곤의 이름이 하도 널리 알려져 있기에 적어도 낙양 일대에서는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낙양 사람들이 석곤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무면공이라고 합니다. 아무도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이 없다는 뜻이지요.”

“그 정도였나여?”

고개를 갸웃거리던 낙일방은 문득 생각이 났는지 뇌일봉을 돌아보며 물었다.

“뇌 숙부께서는 석가장주를 보신 적이 있겠지요?”

뇌일봉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못 봤다.”

“이곳에 삼 년 동안이나 계셨는데 석가장주 얼굴 한 번 안 보셨단 말씀이십니까?”

“삼 년이라고 해봤자 거의 대부분의 기간을 방안에 쳐박혀 꼼짝도 못했는데 그 얼굴 보기 힘들다는 석가장주를 어느 결에 만날 수 있었겠느냐?”

“아무리 그래도…..”

뇌일봉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부가 비록 강호에서 조금 이름이 알려졌다고 하지만 석가장주 입장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강호의 무부 중 하나에 불과했겠지. 아마 석가장주는 노부가 이곳에서 삼 년 동안 병을 치료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할 것이다.”

낙일방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럴 리가요? 아마 뇌 숙부께서 병이 낫기를 기다리다가 만날 시기를 놓친 걸 겁니다.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일개 상인이 감히 진산수를 무시할 수 있습니까?”

뇌일봉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이 왠지 허탈해 보여 낙일방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뇌일봉은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일개 상인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석곤은 일개 상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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