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0권 소림기변(少林奇變)편 : 10화
제 208장 비무행로
허창의 밤거리는 유달리 아름다웠다. 허창은 하남성의 중부에 있는 도시로, 소림사에서 남쪽으로 삼백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후한말에는 한때 국도가 되기도 했으나 ,지금은 조용한 여느 도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나 밤거리만큼은 다른 어떤 대도시라도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특히 주루들이 밀집해 있는 동성로 일대는 해만 떨어지면 불야성을 이루고 있어 일부러라도 야경을 보려고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화화루는 동성로에서도 가장 크고 번창한 주루였다.
모두 오층으로 이루어진 화화루는 겉으로 보기에도 웅장해 보일 뿐 아니라, 매층마다 각기 다른 색의 등불을 내걸어놓아서 밤에는 그야말로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화화루의 이층은 오늘따라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원래 일층보다 음식 값이 두 배 가량 비싸서 특별한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꽉 찬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만석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막 이층의 계단을 올라온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이 지나왔던 일층도 이미 사라들로 꽉 차 있었던 것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때마침 주위를 지나가는 점소이를 손짓해 불렀다.
“이보게, 빈자리가 있는가?”
점소이의 얼굴에도 난처한 표정이 떠올랐다.
“보시다시피 빈자리는 커녕 합석하시려 해도 마땅한 자리를 찾기 어렵군요.”
“삼층은 어떠한가?”
“삼층부터 오층까지는 특실로 이루어져 있어서 예약하신 분들만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예약은 모두 찬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일행을 돌아보며 울상을 지었다.
“어쩌지요? 지금 시간에 다른 주루를 가도 사정은 비슷할 텐데…..”
일행 중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한 중년인이 점소이를 향해 물었다.
“특실 중 예약이 취소된 것이 있는지 알아봐 주겠나?”
그러면서 슬쩍 점소이의 손에 동전을 쥐어주었다. 점소이는 그것이 은화임을 알고는 이내 밝은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으니 제가 가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점소이가 삼층으로 올라가자 먼저 점소이에게 말을 건넸던 청년 우거지상을 했다.
“사람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뭐야, 이거? 내 돈 주고 음식점에서 음식 먹겠다는데 왜 이리 힘드는 거야?”
외눈의 중년인이 빙긋 웃으며 그를 달랬다.
“지금 시간에는 이런 호화로운 주루보다는 작고 허름한 주루가 더 자리를 잡기 쉬운 법이지. 손 사제가 이곳을 고집하지 않았다면 자리를 못 잡아 쩔쩔매는 어려움은 없었을 걸세.”
그들은 소림사를 떠나온 진산월 일행이었다.
멀리서 보이는 화려한 주루에 혹해 큰 소리를 치며 중인들을 이곳으로 안내해왔던 손풍은 체면이 구기는지 영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장문인을 어찌 구석에 처박힌 초라한 곳으로 모신단 말이오? 동 사형은 너무 자기 수준만 생각하는 것 같소.”
동중산은 손풍의 심통이 가득 찬 얼굴을 보고 그저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옆에서 보고 있던 뇌일봉이 손풍의 두통수를 쳤다.
“이 녀석아,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떠들지 마라. 중산이 비록 너와 같은 항렬이라고 해도 너한테는 삼촌뻘이 되지 않느냐?”
손풍은 뒤통수를 싸맨 채 쭈그리고 앉았다가 간신히 일어서며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삼촌은 무슨….. 나한테 저런 삼촌이 있다면 진작에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어버렸을 거야….”
뇌일봉이 눈을 부라렸다.
“뭐라고 지껄이는 게냐?”
손풍은 찔끔하여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제길. 다 죽어가던 노인네가 귀 한번 밝네.’
때마침 삼층으로 올라갔던 저소이가 내려왔다.
“잘됐습니다, 손님. 마침 예약을 취소한 분이 계셔서 특실 하나가 비어 있더군요.”
동중산은 반색을 했다.
“다행이군. 수고했네.”
그가 다시 은화 하나를 건네자 점소이는 그들이 마치 황제의 칙사라도 되는 양 정중하게 삼층으로 안내했다.
삼층으로 올라서자 실내장식부터 아래층과는 완연하게 차이가 났다. 게다가 바닥에는 발목을 덮을 정도로 두툼한 양탄자가 깔려 있어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점소이는 그들을 특실 중 한곳으로 안내하고는 그들의 주문을 주방에 전하기 위해 아래로 사라졌다.
동중산은 실내를 둘러보고는 그 호화로움에 혀를 내둘렀다.
“정말 사치스럽군요. 소박했던 소림사의 선실과 비교해보니 전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습니다.”
뇌일봉은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소림사야 강호에서도 건물이 투박하기로 이름난 곳이니 이런 곳과 비할수는 없지. 솔직히 말해서 소림사에서 지낸 며칠은 너무 심심해서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눈치를 보고 있던 손풍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어르신도 그러셨습니까? 저도 관절에 이끼가 끼지 않았나 걱정 했습니다.”
“이끼가 끼다니?”
“너무 풀만 먹고 지내서 뱃속에서 풀이 자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니까요.”
손풍의 넉살좋은 말에 뇌일봉은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하하… 이 녀석, 말 한번 재미있게 하는구나. 대체 그런 말은 어디에서 배운 거냐?”
손풍은 뇌일봉이 자신의 농지거리를 받아주자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제가 소싯적에 서안의 뒷골목을 제법 휘젓고 다녔지 않았겠습니까? 그대 어울렸던 친구들 중 마달이라는 녀석이 있었는데, 이놈이 워낙 육식을 좋아해서 이놈의 부친이 육식을 금지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열흘간 고기를 먹지 못한 마달은 사람들 앞을 지날 대마다 말처럼 히히힝! 거리며 울어댔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창피함을 느끼고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마달을 꾸짖자 마달이 뭐라고 대답한 줄 아십니까?”
뇌일봉은 호기심이 일었는지 급히 물었다.
“무어라고 했느냐?”
“뱃속에 풀이 자라서 입을 열면 말 울음소리만 나오는데 대체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히히힝!”
“크하하! 정말 괴짜로구나.”
뇌일봉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뇌일봉뿐 아니라 못마땅한 얼굴로 손풍을 쏘아보고 있던 전흠마저 한쪽 입술을 꿈틀대며 피식거렸다.
동중산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그 후로 마달의 부친께서는 육식을 금하지 않으셨겠군?”
그런데 의외로 손풍은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 것이었다.
“아니오. 마달의 아버지는 자식이 말인데 부모인 내가 사람일 리가 있느냐며 자신도 육식을 하지 않으셨소. 결국 그 뒤로 마달의 집안에서는 채식만 먹게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요.”
“하하…. 정말 재미있는 부자로군. 손 사제의 친구들 중에는 그런 괴짜들이 많은가 보군그래.”
“뭐 다 비슷한 종자들끼리 어울리는 법이라서 말이오. 개중에 좀 특이한 놈이라면 창을 기가 막히게 잘 부르는 녀석이 있었소.”
동중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창을 잘 부른다는 건 그다지 특이할 게 없는 것 같은데…..”
“들어보시오. 그 녀석 이름은 종화라고 하는데, 옛날에 소리를 잘 듣는 명인이었던 종자기의 직계 후손이라고 떠벌리고 다녔소. 그런데 그 녀석이 창을 부를 때면 꼭 여자의 음성이 나온단 말이오. 보통 때의 목소리는 나자 중에서도 굵직한 편인데, 창만 부르면 간드러지고 녹아내릴 듯한 아리따운 여자의 음성이니 어찌 신기하지 않겠소?”
“듣고 보니 그렇군.”
“그래서 우리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종화를 골방에 처박아놓고 노래를 부르게 했소. 골방 문을 닫고 밖에서 들으면 절세미인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말이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영롱하고 감칠맛 나던지 종화를 앞에 두고도 조금 전에 노래불렀던 여자를 찾아내라고 떠들어대는 주객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소.”
“정말 기이한 사람이군. 그런 자들과 어울렸다면 손 사제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겠군.”
화제가 자신에게로 넘어오자 왠일인지 손풍은 말을 아꼈다.
“나야 잘난 아버지를 둔 것 외에는 내세울 게 없는 인간이라는 건 사형이 더 잘 알지 않소?”
중인들은 손풍이 갑자기 철이 들었나 하여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손풍의 눈빛이 왠지 쓸쓸하게 보였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그대 내가 사귀었던 녀석들은 비록 술친구로 만났지만 제법 쓸 만한 놈들이었소. 적어도 남을 등쳐먹거나 친한 척하며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놈들은 아니었지. 그런 놈들은 진즉에 다 떨어져 나갔거든.”
“그들이 보고 싶은가 보군.”
“보고 싶기는. 종남파로 들어오면서 다 떨구어버렸소. 아버지가 한 번만 더 그놈들과 어울리면 아예 호적에서 파버린다고 해서 말이오. 아버지 눈에는 그들이 아무 하는 일 없고 한심하기 그지없는 파락호들로 보였겠지만, 그들도 다 나름대로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이오. 파락호에게는 파락호만의 인생이 있단 말이오.”
넋두리를 하듯 중얼거리는 손풍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동중산은 한동안 그런 손풍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언젠가는 자네의 부친께서도 자네를 인정하게 될 날이 있을 걸세.”
손풍은 피식 웃었다.
“그런 건 바라지도 않소. 그저 내 한 몸 성하게 종남팔 돌아갔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소.”
“왜 그런 말을 하는가?”
“솔직히 처음에는 그저 유람이라도 가자는 마음으로 따라나섰는데, 몇 번의 싸움을 코앞에서 보게 되니 심정이 복잡해졌소.”
“어떻게 복잡해졌나?”
손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두렵기도 하고 가슴이 떨리기도 했소. 저런 상황이 나에게 닥치면 끔찍할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은근히 그런 상황을 멋지게 헤쳐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든단 말이오. 동 사형이 그때 했던 말 기억하시오?”
“어떤 말 말인가?”
“그 강호인의 삶 어쩌구 했던 말 말이오.”
“물론 기억하고 있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욕구가 불쑥 치밀어 올랐단 말이오. 집에서도 내놓은 자식인 서안의 일개 파락호가 강호인을 꿈꾸다니 우스운 일 아니오?”
동중산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절대 우스운 일이 아닐세.”
손풍은 다시 웃었으나 그의 눈자위는 약간 붉게 충혈되었다.
“정말 나 같은 놈도 강호인이 될 수 있는 거요?”
“그렇네.”
손풍은 갑자기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진산월은 조용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손풍은 진산월을 향해 물었다.
“장문인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진산월은 묵묵히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담담하면서도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강호인이 되고 싶다고 느꼈다면 그 순간부터 너는 이미 강호인이다.”
손풍의 몸이 한차례 부르르 떨렸다. 그는 눈자위를 실룩거리더니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이미 강호인이라고?”
손풍은 갑자기 고개를 푹 떨구었다. 중인들은 모두 말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 후에 고개를 쳐든 손풍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배고파 죽겠는데 도대체 음식은 왜 안 나오는 거야? 점소이! 여기 음식 언제 나와?”
그는 누가 뭐라 할 사이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특실 밖으로 휑하니 사라져버렸다. 중인들은 그저 어안이 벙벙한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동중산은 조용히 웃으며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정말 특이한 사제지요?”
“네가 잘 지켜보려무나.”
“알겠습니다.”
뇌일봉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힘든 놈이로군. 문파에 저런 놈 하나쯤 있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그나저나 허창에서부터 시작할 셈이냐?”
“그렇습니다.”
“허창 부근에는 쓸 만한 문파가 별로 없을 텐데 좀 더 큰 도시를 택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쓸 만한 문파는 없지만 쓸 만한 인물은 있습니다.”
“그가 누구냐?”
“뇌력쌍절 만씨형제입니다.”
뇌일봉은 눈을 번쩍 빛냈다.
“만혼, 만경 형제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 근처에 살고 있느냐?”
“허창의 동문 밖에 만가보라는 것을 세워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만씨형제라면 첫 비무행의 상대로 부족함이 없는 자들이다. 오히려 조금 벅찰지도 모르겠구나.”
진산월은 낙일방과 전흠을 차례로 돌아보던 이내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사제들은 잘해낼 겁니다.”
뇌일봉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물었다.
“대방선사의 제의는 확실히 파격적이다만, 너희들만으로 무당파까지의 비무행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대방선사는 확실한 실력을 지닌 고수 세 명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 그렇느냐? 숫자가 더 많은 게 좋지 않겠느냐?”
“숫자가 많으면 일정 규모 이상의 세력을 지니지 못한 문파는 비무에 응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세 명 뿐이라면 웬만한 문파는 모두 비무에 응할 겁니다.”
뇌일봉은 잠시 생각하다가 수긍하는 빛을 띠었다.
“그렇군. 아무리 작은 문파라도 내세울 만한 고수 세 명쯤은 있을테니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비무의 규모가 커지면 사상자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것은 피해를 최소로 줄여야 하는 본 파로서는 절대로 피해야 할 일입니다.”
“음. 확실히 그런 면이 있겠군. 우선은 첫 단추를 잘 꿰어야겠지. 만씨형제는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니 그들에 대해 사전에 잘 알려줘서 낭패를 당하지 않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음식 독촉하러 간 녀석은 왜 아직도 감감무소식인 거야? 주방까지 달려가서 무슨 사고라도 친 게 아닐까?”
뇌일봉의 말에 중인들은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모두 표정이 변했다.
다행히 그때 손풍이 방안으로 훌쩍 들어왔다.
“음식이 왔습니다.”
그의 뒤에는 서너 명의 점원들이 양손 가득 음식 접시를 든 채 낑낑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중인들은 그 광경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뒤늦게 들어온 손풍만이 중인들의 웃는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강호가 술렁이고 있었다.
그 시발점은 하남성 중부에 있는 작고 아름다운 도시, 허창이었다.
허창의 동쪽 외곽에 있는 만가보는 뇌력쌍절 만씨형제가 세운 것으로, 비록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만씨형제의 명성 덕분에 하남성 전체에서 제법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만시형제는 뇌정신공과 패력권이라는 두 가지의 상승절학으로 수십 년 동안 강호에 혁혁한 명성을 떨쳤으며, 하남성 전체를 통틀어도 능히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실력자라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만가보의 정문에 몇 명의 인물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내민 배첩을 본 만씨형제는 안색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비무첩. 종남파의 무공으로 귀파의 역량을 판단하고자 하오. 종남파 이십일대 장문인 진산월 배상.>
짤막하게 적힌 글귀는 그 광오함으로 보는 이들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종남파의 무공으로 역량을 판단한다니….. 상대방을 무시하는 듯한 그 문구에 격노한 만씨형제는 그 아래에 적힌 종남파 장문인이라는 서명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대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상대가 누구든 이런 문구를 보고 참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만씨형제를 맞이한 종남파의 고수들은 장문인인 신검무적이 아닌 그의 두 사제들이었다. 그 점이 만씨형제를 더욱 분노케 하여 만씨형제는 거의 물불을 안 가리고 그들에게 덤벼들었다.
그리고 정확히 일각 후에 만씨형제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등을 돌린 채 떠나는 종남파 일행들의 뒷모습을 쳐다보아야만 했다.
형인 만혼이 전흠이라는 무명의 고수에게 백여 초 만에 패했고, 동생인 만경은 이제 막 무명이 알려지기 시작한 옥면신권이라는 새파란 애송이에게 불과 삼십여 초 만에 무참히 패하고 만 것이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강호인들은 종남파가 드디어 과거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거보를 내디뎠다고 찬사를 보내는가 하면, 종남파가 구대문파로의 복귀를 위해 너무 무모한 일을 벌였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비무첩에 적힌 문구를 트집 잡아 종남파가 자신들의 역량도 모르고 강호를 우습게 보고 있다고 질책하는 자들도 있었다.
어쨌든 종남파가 비무행을 하고 있다는 소식은 무서운 속도로 주위로 퍼져 나가 강호인들의 피를 들끓게 했다. 아직은 하남성 일대에서 발생한 작은 파문에 불과했으나, 조만간 이 파문이 강호 전체로 확산될 것임을 눈치 빠른 자들은 직감할 수 있었다.
종남파의 웅비를 위한 첫 단계인 비무행!
그것은 과연 어떤 결과를 맞게 될 것인지…..
야심한 밤이었다.
계절은 봄의 정점을 지나고 있건만 밤공기는 제법 차가웠다. 진산월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일점편월을 바라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검은 하늘에 의롭게 걸려 있는 조각달은 금시라도 스러질 듯 아슬아슬해 보였다.
이곳은 하남성의 남부인 여남에 있는 한 객잔이었다.
비무행을 시작한 지 오늘로 오 일째.
그동안 종남파는 모두 세 번의 비무를 했으며, 전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비무행은 이제 겨우 시작이며 조만간에 크나큰 고비를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당장 내일 방문하게 될 청의방만 해도 하남성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문파일뿐더러 청의방주인 청의신 곽존해는 강북무림 전체에서 명성을 날리고 잇는 절정고수였다.
그의 휘하에는 그에 못지않은 고수들도 구름처럼 몰려 있다고 하니 그들 중 낙일방이나 전흠을 꺾을 만한 고수들이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하나 진산월이 내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천하를 향해 비무행을 하기로 결심한 이상 청의방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문파와의 싸움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진산월이 잠을 못 이루는 것은 조각달을 보자 누군가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이유였다.
달빛… 그리고 여인…. 그녀의 음성과 숨결이 지금도 지척에서 들리는 듯했다. 그녀의 향기가 옆에서 풍겨오는 것 같았고, 그녀의 영롱한 눈빛과 그윽한 눈망울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러니 어찌 잠들 수 있겠는가?
눈을 감았다 뜨면 그녀가 옆에 누워 있을 것만 같았다.
“후우….”
진산월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마음속의 괴로움이 가시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짙어져서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진산월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 창문에서 빛살 같은 광채 하나가 날아들었다.
쐐액!
파공음과 함께 날카로운 빛을 뿌리며 날아드는 비수 하나!
진산월은 비수를 잡아챘다. 비수 끝에 작은 쪽지가 매달려 있었다.
쪽지를 펴자 낯익은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이 사람을 따라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무런 서명도 없이 짤막하게 쓰여 있는 글귀였다.
하나 그것을 본 진산월의 눈빛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여인의 고운 필치로 정성을 다해 쓴 듯한 글씨. 섬세하게 뻗은 획과 한 점 흐트러짐이 없이 그어진 선, 그리고 곱게 구부린 마무리까지 모두 한 사람의 솜씨였다.
그녀, 임영옥의 글씨인 것이다.
진산월은 비수에서 쪽지만 따로 떼내어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 용영검을 집어들고는 주저 없이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창문을 빠져 나오자 멀지 않은 지붕 위에 흑의인 한 명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 흑의인은 전신에 야행복을 입고 머리에는 검은 두건까지 써서 그야말로 두 눈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었다.
진산월이 자신을 쳐다보자 흑의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이내 신형을 날렸다. 진산월은 그의 뒤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흑의인의 신형은 표홀했으며, 자세 또한 부드럽고 유연했다. 진산월은 흑의인의 엉덩이가 약간 풍만한 것을 보고는 흑의인이 여인이 아닐까 추측했다.
혹시 임영옥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임영옥이라면 자신이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아무리 전신을 야행복으로 감추었다 해도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흑의인은 여남의 도시를 빠져 나가 여하강변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희미하게 내비치는 달빛 사이로 유성처럼 질주하는 흑의인의 모습은 웬지 이질적으로 보였다.
흑의인은 강변을 한참이나 더 달려서야 짙은 수림을 앞에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진산월은 소리 없이 흑의인의 앞에 내려섰다.
흑의인은 묵묵히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답답함을 느낀 진산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어디 있소?”
흑의인은 한참 동안이나 진산월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고 있더니 이윽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있어요.”
진산월은 안도와 불안의 심정이 마구 교차되었다. 그녀의 음성을 듣자 그녀가 임영옥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어서 안심이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임영옥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을 듣자 임영옥을 곧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진산월은 좀처럼 냉정을 잃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지금은 마음속의 격동을 참기 힘들었다. 진산월이 평정을 되찾은 것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 난 진산월은 흑의인을 향해 짤막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에게 안내해주시오.”
흑의인은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복잡한 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그러다 진산월이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려 할 때 돌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진정으로 그녀를 만나고 싶은가요?”
너무도 당연한 물음에 진산월은 오히려 허탈해질 지경이었다.
“물론이오.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그녀를 기다려왔소.”
흑의인은 진산월의 말에 냉랭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기다려온 건 당신이 아니라 그녀에요. 당신은 약속을 어겼어요.”
진산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년지약. 그것은 자신과 임영옥만의 약속이었다. 그 약속을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게 되니 가슴 한구석에 형용 못할 감정이 휘몰아쳤다.
진산월은 간신히 떨리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서 더욱 그녀를 만나야 하오.”
흑의인은 여전히 냉소를 금치 못했다.
“그녀가 당신을 기다리다 지쳐 다른 사람의 여인이 되었어도 말인가요?”
진산월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는 떨지 말자고 생각했다. 아직은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자신의 귀로 직접 듣기 전에는 어떠한 상상도 해서는 안되고, 어떠한 추측도 배제해야 한다.
“나는 그저 그녀를 만나고 싶을 뿐이오. 그 외의 모든 건 그 뒤에 해야 할 일이오.”
두건 사이로 내보이는 흑의인의 눈에 심술궂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가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진산월은 어느새 평소의 담담함을 되찾았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나를 불러내지는 않았겠지.”
흑의인은 말문이 막히는지 자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특유의 톡 쏘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법 눈치는 비상하군요.”
“이제 심술은 그만 부리고 그녀를 만나게 해주시오.”
흑의인의 눈빛이 앙칼지게 변했다.
“지금 내가 심술을 부리고 있다고 했어요? 정말 심술 부리는 게 어떤 건지 보여줄까요?”
“그녀가 나를 만나기 싫다는 둥 다른 사람의 여인이 되었다는 둥의 말로 나를 현혹시킨 게 심술이 아니고 뭐요?”
“당신은 그녀가 다른 사람의 여인이 되었다는 말을 믿지 않고 있군요.”
“나는 그녀가 나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그럴 리는 없다고 믿고 있소.”
그녀의 음성이 다시 냉랭해졌다.
“그녀가 당신의 허락을 받아야만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단 말인가요?”
“이건 누가 허락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과 신뢰의 문제요. 그리고 다른 사람은 결코 우리 사이의 신뢰에 대해 알 수가 없소.”
진산월의 음성은 비록 그리 크지 않았으나 흑의인에 귀에는 천둥이 치는 것처럼 들렸다. 흑의인은 한 차례 어깨를 부르르 떨다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어쩜 당신은 그녀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요.”
진산월은 급히 물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소?”
“그녀도 당신처럼 믿음과 신뢰에 대해 말했어요. 당신이 이년지약을 지키지 못한 것은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런 당신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언제가지고 기다릴 수 있다고.”
진산월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손을 꽉 쥐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가 핏물이 내비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진산월은 어떠한 통증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달콤함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녀가 나를 기다린다고 했다….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 말만을 뇌까리고 또 뇌까렸다.
흑의인은 미동도 않은 채 서 있는 진산월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머리에 쓴 두건을 벗었다.
치렁치렁한 흑발이 폭포수처럼 어깨 위로 흘러내리며 보기 드문 미모의 얼굴이 나타났다.
진산월이 처음 보는 여자였다. 나이는 갓 이십 세쯤 되어 보였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한 피부에 단정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어 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미녀였다. 눈썹이 짙고 코가 오똑한 것이 자기 주관이 분명한 성격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별처럼 빛나는 눈으로 진산월을 바라보다가 붉은 입술을 살짝 열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요?”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모용연이에요.”
진산월이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녀는 몇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구궁보에서 왔어요. 그리고 내 오빠가 바로 모용봉이에요.”
그 말에도 진산월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녀의 고운 이마가 찌푸려졌다.
“내 말을 듣고 있는 거에요?”
“듣고 있소.”
“그런데도 왜 아무 대꾸도 없어요?”
“그녀를 만나는 것만이 지금 나의 유일한 관심사이기 때문이오.”
한마디로 말해서 그녀가 누구이든 관심 없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고운 얼굴에 붉은 홍조가 떠올랐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화가 치밀어 올라서 그런 것이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솟구쳐 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눌렀다.
‘언니가 말해준 이자의 성격에는 사람의 속을 뒤집어놓는다는 말이 없었는데….’
그녀는 몇 아례 심호흡을 하고 난 후에야 처음의 신색을 되찾았다. 그때까지도 진산월은 묵묵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후우…. 당신을 그녀와 만나게 해주겠어요.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말하시오.”
“당신은 그녀의 몸에 손을 대서는 안 돼요. 어떤 일이 있어도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진산월은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있소?”
모용연의 입가에 싸늘한 조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내 오빠와 결혼할 사이에요. 그런데 외간남자와 살을 맞대면 되겠어요?”
그녀는 말을 하고도 얼굴이 잠시 붉어졌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막상 말을 내뱉고 나니 몹시도 야한 의미로 들렸던 것이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녀가 그와의 결혼을 승낙했소?”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아직 오빠는 정식으로 청혼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그녀가 대답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요.”
그녀는 그가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하지만 중추절이 지나면 오빠는 그녀에게 청혼을 할 거에요. 그리고 그녀도 그것을 거절하지 않을 거에요.”
“그건 당신의 생각이오?”
그녀는 다시 화가 솟구치는지 눈빛이 험악해졌으나 이내 휑하니 몸을 돌렸다.
“당신과는 더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를 보고 싶으면 아무 말 말고 나를 따라와요.”
진산월은 다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는 손이 떨리고 있지 않다는 걸 확인했다. 그는 몇 차례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는 천천히 저만치 앞서가는 모용연의 뒤를 따라갔다.
멀지 않은 곳에 짙은 송림이 우거져 있었다. 그 송림 사이로 작은 오솔길이 나 있었는데, 모용연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오솔길로 걸음을 옮겼다.
오솔길로 들어서자 소나무 특유의 향기가 밤공기에 섞여 폐 속으로 들어왔다. 진산월은 가슴 가득 그 향기를 들이마시고서야 비로소 마음속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오솔길을 십여 장 들어서니 갑자기 길이 넓어지면서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의 한편에 두 마리의 말이 이끄는 화려한 마차가 서 있었다. 그 마차의 주렴 사이로 한 사람의 인영이 희미하게 보였다.
진산월은 그 마차를 발견하는 순간부터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가 마차를 향해 걸음을 옮기자 모용연이 제지하려다 이내 포기해 버렸다.
그녀는 호기심과 기대감, 불안감이 뒤섞인 눈으로 마차로 다가가는 진산월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마차 앞에 우뚝 서게 된 진산월은 안력을 돋우어 주렴 안을 들여다보려 했다. 하나 주렴은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그의 가공할 안력으로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진산월이 주렴 안의 인물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주렴 안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오랫만이군요, 사형.”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진산월은 하마터면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낮게 가라앉아 있으면서도 한없이 영롱함을 느끼게 하는 그 음성… 꿈에서도 듣고 싶어 밤잠을 설치게 했던 바로 그 음성….
임영옥의 음성이었다.
<21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