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0권 소림기변(少林奇變)편 : 7화
제 205장 진공검도
점창파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인물은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비쩍 마른 체구의 인물이었다. 나이로 보아 조빙심과도 별 차이가 나지 않는데, 그는 자신을 일대제자라고 했다.
“곽희요.”
짤막한 말과 함께 낙일방의 전면에 우뚝 선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검을 뽑아드는 동작은 별로 대단할 게 없어 보였으나 의외로 그 것을 본 진산월의 표정이 무겁게 굳어졌다.
‘고수구나!’
진산월의 눈에는 곽희의 검을 잡는 자세와 출검하는 동작, 그리고 손의 위치까지 모든 것이 그야말로 완벽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자세가 검객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절정의 검객은 누구나가 완벽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
진산월은 점창파의 마지막 비무자인 곽희가 지금까지 나왔던 모든 고수들보다 오히려 더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점창파에서 마음을 단단히 먹은 모양이군. 조빙심은 비록 성격이 냉정해도 이 정도로 혹독한 인물이 아닌데 의외로구나.’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공증인석에 앉아 있는 백리장손을 향했다. 백리장손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으나, 그의 눈빛 속에는 무언가 냉혹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진산월은 그 눈빛을 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꼈다.
‘이제 보니 이번 비무를 지시한 자는 조빙심이 아니라 백리장손이구나. 그의 성정으로 보아 단순히 친선을 위한 비무로 그칠 것 같지 않으니 걱정이 되는군.’
하나 이미 비무는 벌어지기 직전이었고, 진산월이 어찌해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진산월로서는 낙일방이 상대를 경시하지 않고 자신의 실력을 펼쳐 온전히 비무를 끝내기만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검을 뽑아든 곽희가 낙일방을 향해 의외의 말을 했다.
“듣자하니 낙 소협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무언가 특이한 장갑을 낀 상태여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낙 소협의 본신 실력을 보고 싶소.”
낙일방의 눈이 번쩍 빛났다.
“묵령갑을 사용하란 말이오?”
곽희는 무덤덤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이오.”
낙일방은 한동안 곽희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품속에서 묵령갑을 꺼내어 양손에 끼었다. 몇 차례 손가락을 꼼지락거려본 낙일방은 두 팔을 자연스레 늘어뜨린 채 허리를 쭉 펴고 당당한 자세로 우뚝 섰다.
“나는 준비가 됐소.”
“그럼 시작하겠소.”
곽희는 주저하지 않고 수중의 장검을 휘둘렀다. 아니 그어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검은 찌르거나 휘두르는 용도의 병기였다. 그런데 지금 곽희는 마치 날카로운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검법을 펼치고 있었다. 그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허공의 한 부분이 베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 기경할 광경에 중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방선사 또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다소 격앙된 음성을 토해냈다.
“저건 진공검이구나. 진공검까지 보게 되다니 오늘 정말 눈이 호강하는구나!”
일정 수준 이상 검을 익힌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검에 진기를 주입시킬 수 있게 된다. 그 상태에서 더욱 발전하면 검에 주입된 진기를 검 밖으로 표출할 수 있는데, 그 방식에 따라 검경이나 검강으로 나뉜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거에 주입된 진기를 밖으로 내뿜기보다는 오히려 검 속에서 더욱 압축시키는 방법을 선택한 자들도 있었다. 검 속의 진기를 압축하고 또 압축하여 어느 순간이 지나가면 검 자체가 진기와 하나가 되어버린다. 그 상태에서 검이 움직이게 되면 검은 무형의 진기처럼 공간과 공간을 그대로 가르고 지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공검의 원리였다.
하나 실제로 강호에서 진공검을 보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진공검을 익히는 사람도 드물뿐더러 실제로 남과의 싸움에서 사용할만큼 숙달되기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원래 진기를 검 밖으로 발출하는 것보다는 검 속에서 압축하는 것이 훨씬 더 힘들도 난해한 법이다. 생사가 오가는 긴박한 상황에서 엄청난 집중력을 요하는 진공검을 펼친다는 것은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직 강호에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점창파의 일대제자가 대뜸 진공검을 펼쳤으니 대방선사를 비롯한 중인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나 달리 생각해보면 오늘과 같은 친선비무야말로 진공검을 펼쳐 보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자리가 아니겠는가?
작일방은 생전처음 보는 상대의 기이한 검법에 마땅한 대응법을 찾지 못하고 계속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그렇게 빠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변화가 무쌍하거나 질식시킬 듯한 위력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공간과 공간 사이를 자연스럽게 파고들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낙일방이 상대했던 어떤 고수의 검법보다도 더욱 상대하기 까다로워 보였다. 특히 지금처럼 낙일방이 펼친 권영과 권영 사이를 아무런 제지도 없다는 듯이 미끄러져 들어올 때면 흡사 유령의 손길을 보는 것 같아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낙일방 같은 수준의 권법의 고수가 펼치는 주먹 사이의 공간은 그야말로 가공할 압력이 휘몰아치고 있어서 검은 커녕 바늘 하나도 뚫고 들어오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마치 무풍지대를 통과하는 것처럼 공간을 가르며 검이 파고들고 있으니 낙일방으로서는 당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낙일방은 장괘장권구식만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낙뢰신권을 펼치려 했으나 선뜻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상대의 괴의한 검에 대한 대비책이 없이 무작정 낙뢰신권을 펼쳤다가는 자칫 별다른 성과도 없이 낙뢰신권의 허실만을 드러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낙일방은 수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뒤로 몰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대방선사의 입에서 아쉬움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정말 좋은 재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얼 망설이고 있는 건가? 역시 대전 경험이 많지 않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구나.”
대현이 조심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낙 시주가 패하리라고 보십니까?”
“지금 상태라면 그렇다. 진공검에 대한 대응책을 찾지 못한다면 지금처럼 허우적거리다가 제대로 실력 발휘도 해보지 못하고 패하고 말 것이다.”
“하지막 낙 시주는 아직 장괘장권구식 외에는 특별한 무공을 선보이지 않았습니다. 강호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번개를 무색케 하는 빠르고 강력한 권법을 지니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대방선사의 부리부리한 눈에서 한 줄기 예리한 광망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아마도 무작정 절학을 펼친다고 상대의 진공검을 깰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이다.”
“예? 잘못된 것이라니요?”
“강호에서 기이한 무공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 무공을 만날 때마다 허실을 탐색한답시고 자신의 절학을 아낀다면 아마 태반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고 말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단은 무조건 자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공으로 맞대응을 해야 한다. 그런 무공들은 직접 몸으로 부딪쳐 봐야 비로소 장단점들을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대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너무 위험한 대응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 다른 건 몰라도 강호에서의 싸움은 일단 부딪쳐봐야 한다. 무작정 피하거나 도망만 다녀서는 결코 진학을 얻을 수 없을뿐더러 상대 무공의 파해법도 찾아낼 수 없다.”
대현이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듯하자 대방선사는 빙긋 웃음을 매달았다.
“사제의 나쁜 버릇이 또 한 가지 나왔구나. 매사에 너무 신중하면 때를 놓치는 법이다.”
대현은 조용히 따라 웃었다.
“저의 단점이 어디 한두 가지 뿐이겠습니까?”
“그래도 현명하다는 단 한 가지 장점이 모든 단점들을 상쇄하니 정말 다행한 일이 아니겠느냐?”
“저는 점점 장문사형이 두려워집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본 채 엷은 미소를 교환했다. 그러다 대현이 정색을 하며 비무가 벌어지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장문사형의 말씀대로라면 지금 낙 시주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있는 거로군요.”
“그렇다. 그는 무작정 머리로만 돌파구를 찾을 궁리를 할 게 아니라 숨기고 있는 절학을 아낌없이 펼쳐 직접 몸으로 돌파구를 만들어냈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지금처럼 수세에 몰리는 일도 없었을뿐더러 무공에 대해 얻는 바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대현은 준수하고 기개가 헌앙한 낙일방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안타깝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쉬운 일이군요. 낙 시주 본인을 위해서나 종남파를 위해서나 말입니다.”
“그런 건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런데 그들의 대화를 듣기라도 한 것인지 낙일방의 동작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 낙일방의 상황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좋지 못했다. 곽희의 검은 단순히 공간을 가르고 들어오는 것뿐이 아니고 검법 자체에 기이한 기운이 담겨 있어 낙일방은 이런 상태로 계속 가다가는 낙뢰신권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 신세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전력을 다해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대 그가 선택한 것은 위력이 강맹하고 빠른 낙뢰신권이 아니라 구반장법이었다. 구반장법은 낙일방이 해조림에게서 배운 우일기의 칠종절학 중 하나로, 낙일방은 아직까지 이 무공을 남들 앞에서 제대로 펼쳐본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구반장법이 너무나 복잡하고 변초가 무궁무진해서 완벽하기 익히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석년에 우일기도 이 구반장법은 십이성으로 익히지 못했다.
그만큼 난해한 무공이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낙일방은 이 구반장법으로 곽희의 기이한 검을 상대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자신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 구반장법의 복잡한 변초라면 곽희의 공간을 가르는 검도 제대로 뚫고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의 생각은 절반만 맞았다.
곽희의 검은 여전히 구반장법의 변초 속을 수월하게 가르고 들어왔다. 대신에 그 속도는 조금 전에 비해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낙일방은 구반장법으로도 곽희의 검을 막지 못해 초조한 생각이 들었으나, 한편으로는 그의 검이 느려진 것이 의아함을 느끼기도 했다.
‘혹시….’
낙일방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구반장법의 절초들을 연거푸 펼쳐 곽희의 하반신을 집중적으로 노리고 들어갔다. 그러자 곽희의 검이 급격하게 흔들리며 공간을 가르고 들어오는 속도가 더욱 느려졌다.
그리고 마침내 낙일방이 질풍노도 같은 십이장을 거푸 갈겨대자 곽희가 처음으로 검을 펼치지 못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었다. 비록 단 한 걸음에 불과했으나 낙일방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깨닫고 용기백배하여 곽희의 전면으로 온몸을 내던지다시피 뛰어들었다.
묵령갑을 착용한 그의 오른손이 반쯤 말아 쥔 주먹의 형태로 변하며 우레와 같은 굉음과 함께 곽희의 아랫배 쪽으로 쏘아져 갔다. 마침내 낙일방이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낙뢰신권을 펼친 것이다. 낙뢰신권 중에서도 강맹한 위력을 자랑하는 일점천뢰의 식이었다.
곽희는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수중의 장검을 마치 채찍질하듯 앞으로 세차게 찔러댔다.
쐐액!
공간을 가르고 낙일방의 미간을 향해 날아드는 그의 검은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하나 이를 본 중인들은 모두 표정이 변했다. 곽희가 낙일방의 공격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공세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수비는 도외시한 채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가장 무식하고 살벌한 대응이었다. 명문장파간의 친선비무에서는 좀처럼 보기힘든 장면으로, 그동안의 대결이 치열하기는 했으나 살기가 별로 보이지 않았던 일반적은 비무임을 생각해볼 때 정말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낙일방이 주먹을 거두고 물러난다면 모처럼 잡은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계속 주먹을 내지르면 비록 곽희의 아랫배를 뭉갤 수는 있겠지만, 자신의 미간도 그대로 검에 꿰뚫리고 말 것이다.
물러설 수도 없고 계속 나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낙일방은 가장 그다운 선택을 했다. 오른 주먹을 계속 내지르면서 왼손으로 자신의 미간을 향해 날아오는 곽희의 검을 그대로 움켜잡은 것이다.
“저런 무식한….”
대방선사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경호성을 토해냈다. 대방선사뿐 아니라 구경하고 있던 모든 중인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굳어졌다.
하나 피가 난무하고 처절한 비명이 장내를 뒤흔들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연무장 안은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중인들은 모두 눈을 부릅뜨고 장내를 주시했다.
연무장 중앙에는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본 채 바짝 다가서 있었다. 낙일방의 오른 주먹은 곽희의 아랫배에 닿아 있었고, 왼손은 자신의 이마를 찔러온 곽희의 검을 이마 바로 앞에서 잡고 있었다.
뚝…. 뚝….
검을 움켜잡은 낙일방의 왼손에서 핏물이 떨어져 내렸다. 비록 묵령갑을 끼고 있어 손바닥이 꿰뚫리지는 않았으나 밖으로 노출된 손가락이 베어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다.
낙일방은 여전히 오른 주먹을 곽희의 아랫배에 대고 왼손으로는 검을 잡은 자세로 곽희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곽희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조금 창백하게 변한 것도 같았다.
낙일방은 묵묵히 그의 얼굴을 쏘아보다가 왼손에 잡고 있던 검을 놓고 내밀었던 주먹도 거두어 들였다.
“좋은 비무였소.”
곽희는 수중에 들고 있는 검을 거두지도 않고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낙일방이 포권을 하고 뒤로 물러나자 그제서야 자신도 몸을 돌려 돌아갔다.
중인들은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공증인석에 있던 세 명의 공증인이 서로 무어라고 상담을 한 후 곧 이어 백리장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비무는 종남파의 승리요.”
그는 선언하듯 짤막하게 말한 후 이내 자리에 앉아버렸다. 하나 다소 딱딱하게 굳어진 그의 모습을 볼 때 심기가 편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의 긴박한 상황에서 낙일방이 마지막 순간에 공력을 거두어들인 덕분에 곽희는 전혀 부상을 입지 않았다.
하나 그와는 반대로 곽희는 끝까지 낙일방의 이마를 향해 전력으로 검을 찔러왔다. 낙일방이 왼손으로 막지 않았다면 친선비무에 유혈참극이 벌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전후사정을 모두 판단한 공증인들이 낙일방의 승리를 선언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낙일방이 돌아오자 동중산은 황급히 다가가서 그의 손을 살펴보았다. 묵령갑을 끼고 있는 상태에서도 낙일방의 왼손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동중산은 상처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손가락이 잘리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그정도가 아니라….”
동중산의 외눈이 조금 커졌다.
“피부가 베어져 피가 제법 나왔지만 상처 자체는 그리 심하지 않군요.”
그는 낙일방을 쳐다보며 다소 열띤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 감탄했습니다, 낙 사숙. 검기가 가득 실린 장검을 맨손으로 잡고도 피육의 상처에 그치다니 저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낙일방은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묵룡기가 완벽했다면 이런 상처도 입지 않았을 겁니다. 이제는 제법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많이 부족하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낙 사숙과 비슷한 나이에 이 정도의 강기무공을 터득한 자는 거의 없을 겁니다.”
옆에서 다가와 낙일방의 상세를 살피던 진산월도 그 말에 동조를 했다.
“중산의 말이 맞다. 석년의 우일기 조사께서 묵룡기를 완성한 것은 마흔이 넘어서였다. 지금의 너는 스스로의 공부에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낙일방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장문사형도 제가 그자의 검법에 당황해서 쩔쩔매는 것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강호는 넓고 기인이사는 구름처럼 많다. 그들 중 네가 접해보지 못한 특이한 무공을 익힌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으냐?”
낙일방은 조금 자신 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무수히 많겠지요?”
“그렇다. 그리고 그런 무공을 만날 때마다 마땅히 대응할 방법을 못 찾아 어려움에 처하거나 낭패를 보게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 할 것이다. 그것은 강호를 행도하는 고수라면 누구나가 경험하게 되는 일이다.”
“그걸 방지하는 방법이 없습니까?”
“한 가지뿐이다.”
낙일방은 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많이 부딪쳐보고 많이 겪어보는 것이다.”
낙일방은 조금 인상을 찡그렸다가 이내 표정을 풀었다.
“결국 남들과 많이 싸워봐야 한다는 것이로군요.”
“그렇다. 경험만큼 좋은 스승은 없다. 다채로운 경험을 할수록 낯설고 이질적인 무공에 당황하는 일이 적어지게 된다. 조금 전에도 너는 비록 고전하기는 했지만 결국 나름대로의 파해법을 찾지 않았느냐?”
낙일방은 방금 전의 상황이 생각나자 약간은 계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운이 좋았습니다. 상대의 검에 어떻게 대항할지 몰라 허둥대다가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구반장법을 펼쳤는데 그게 먹혀들었던 겁니다.”
“구반장법이 아니라도 변화가 다양한 무공이었다면 어떤 것이든 비슷한 효과를 봤을 것이다.”
낙일방이 눈을 번쩍 빛내며 다소 활기찬 음성으로 말했다.
“확실히 그렇군요. 구반장법을 펼쳐도 그자의 검을 막을 수는 없었으나 이상하게도 검의 속도가 확연히 느려지더군요. 변화와 변화 사이의 빈 공간을 파고들어오느라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제가 제대로 본 건가요?”
“옳게 봤다. 그자가 펼친 것은 진공검의 일종으로, 그중에서도 파형 계열일 것이다.”
“진공검이 대체 뭡니까?”
낙일방이 의아한 듯 묻자 종남파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진산월을 주시했다. 진산월은 차분하게 진공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진공검은 검에 주입된 진기를 압축시켜 검을 진기화한 것이다. 물론 원리가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 진공검의 효과는 아무리 강력한 공격이라도 그 속의 빈틈을 거침없이 뚫고 들어간다는데 있다. 즉, 검 자체가 무형의 진기처럼 움직인다는 것이다.”
“아! 그래서 제 공격이 그토록 형편없이 뚫렸군요?”
“진공검은 검이 움직이는 유형에 따라서 다시 세 가지 계열로 나뉜다. 파형, 선형, 그리고 점형이다.”
중인들은 모두 그의 말에 정신없이 귀를 기울였다.
“파형은 이름 그대로 물결처럼 검을 움직이는 것이다. 상대의 공격 속을 물결이 일렁이듯 타고 넘어 들어가는 것이지. 진공검의 대부분이 이런 파형 계열이다.”
“선형 진공검은 어떤 것입니까?”
“자신의 검과 상대의 공격 속에 있는 빈틈을 선으로 연결해서 이동하는 수법이다. 그래서 파형보다 익히기도 어려울뿐더러 그 속도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빠르지.”
낙일방은 자신의 공세 속을 아무 제약도 없이 가르고 들어오는 검이 일직선으로 곧장 쏘아져 온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섬뜩해졌다. 직접 진공검을 겪어본 그로서는 상상만으로도 그 위력이 생생하게 느껴진 것이다.
“그건 정말 무서운 검법이겠군요.”
“강호의 전설적인 쾌검수들 중 상당수가 바로 이 선형 진공검 계열의 검법을 익힌 자들이다.”
“점형은 또 어떤 것입니까? 이름만으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군요.”
진산월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점형이야말로 진정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검법이다. 이건 오직 살인만을 위한 검법이다.”
“예? 살인만을 위한 검법이라뇨?”
“점형 진공검은 상대의 몸의 특정 부위를 점으로 보고 오직 그 점을 향해 검을 움직이는 수법이다. 일단 점형 진공검에 몸이 노출되게 되면 절대로 피할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공간을 압축해서 목표로 했던 점으로 파고들어오기 때문이지.”
낙일방의 얼굴도 덩달아 굳어졌다.
“말만 들어도 무시무시하군요. 그렇다면 거의 무적이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않다. 점형 진공검으로 자신이 목표한 점을 지정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시간을 주지 않으면 점형 진공검에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게다가 점형 진공검은 익히기가 까다로워서 강호무림 전체를 놓고 보아도 한 세대에 한두 명이 나올까 말까 할 정도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군요. 그런데 상대가 점형 진공검을 익히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압니까? 점형 진공검을 펼치기 위한 사전 동작 같은게 있습니까?”
“그런 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 참 난감하군요. 알아야 상대가 진공검을 펼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든 대비를 하든 할 게 아닙니까?”
“점형 진공검을 익히게 되면 신체 중 한 부분에 이상이 생기게된다. 과도한 정신집중과 신경조직의 비대한 발달로 인한 현상이지.”
낙일방은 반색을 했다.
“어느 부위입니까?”
“검법마다 다르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얼굴 부위라고 한다. 마도제일의 살인수법인 탈흔검이 대표적인 점형 진공검의 일종인데, 탈흔검의 경우 미간에 푸른 선이 나타는 증상이 있다.”
“탈흔검이라면 취미사 혈겁의 흉수가 익힌 무공이 아닙니까?”
“그렇다.”
낙일방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 정도만으로 점형 진공검을 익힌 사람을 파악하기는 힘들 것 같군요. 앞으로 얼굴에 이상한 부위가 있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조심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진산월은 다소 의기소침해진 낙일방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엄격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한 말을 벌써 잊은 거냐? 아무리 상대가 특이한 무공을 익히고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실력에 믿음을 가지고 풍부한 경험을 쌓는다면 충분히 대적할 수 있다.”
낙일방은 진산월의 질책에 몸을 움질했다가 이내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진공검에 놀라 너무 겁을 먹은 것 같군요. 장문사형 말씀대로 좀 더 자신의 실력을 키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앞으로 곽희와 같은 파형 진공검을 사용하는 자에게는 무조건 변화가 심한 무공으로 맞서야겠군요.”
“곽희의 진공검은 아직은 초보 수준에 불과하다. 만약 그의 수준이 좀 더 높았다면 변화가 많은 정도로는 파형 진공검을 막을 수 없다.”
“그럼 어떻게 상대해야 합니까?”
“파형이란 말에 해답이 있다.”
낙일방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파형은 곧 물결이다. 그걸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진산월은 그 말만 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낙일방은 궁금함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파형 진공검에 대한 파해법은 자신이 고민하여 해결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낙일방이 복잡한 상념에 잠겨 있자 동중산이 진산월에게 다가와서 소곤거렸다.
“낙 사숙이 저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모처럼 보는 것 같습니다.”
“이번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한다면 일방의 무공은 한 단계 더 진보할 것이다.”
“그나저나 점창파에서 진공검을 익힌 고수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진공검은 검법을 익히는 고수들에게는 누가나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다. 완벽하게 익힌 사람은 극히 드물지만 입문만 한 자들은 적지 않지. 그런 면에서 일방은 아주 적당한 시기에 진공검을 겪어보게 되었으니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진공검을 실전에서 사용할 정도라면 상당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점창파에는 곽희보다 더욱 뛰어난 진공검의 고수들이 분명히 있겠지요?”
“그럴 것이다.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저 정도의 진공검을 익히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동중산의 표정도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오늘의 비무는 낙 사숙 덕분에 삼파가 공평하게 승리를 나누어 가졌습니다. 더 이상의 문제는 없어야 할 텐데, 조금 전에 백리장손의 표정을 보니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이던데 걱정이 됩니다.”
“이곳에 우리와 점창파만 있다면 반드시 또 다른 시비가 생겼을 것이다. 다행히 소림사가 중간에 있으니 아무리 백리장손이 본 파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더 이상 문제를 확대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때마침 조빙심이 점창파의 고수들을 이끌고 진산월에게로 왔다.
“진 장문인 덕분에 본 파의 제자들이 좋은 경험을 하게 된 것 같소.”
“그건 오히려 내가 해야 할 말인 듯하오.”
조빙심과 인사를 나눈 진산월이 둘러보니 조빙심이 데리고 온 점창파 제자들 중 유독 곽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전에 인상적인 검법을 펼쳤던 분은 먼저 돌아가셨소?”
조빙심의 청수한 얼굴에 한 줄기 당혹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곽 사질은 백리 사형과 함게 먼저 숙소로 돌아갔소. 낙 소협고의 비무로 심력을 많이 소모하여 피곤했던 모양이오.”
“백리 사형이라면 백리장손 대협을 말하는 거요?”
“그렇소. 솔직히 나이로 따지면 내가 그분의 아들뻘인데, 운이 좋게도 같은 스승을 모시게 되었소.”
“그렇구려. 그럼 곽희라는 분은….”
“곽 사질은 백리 사형의 제자요.”
“그래서 그렇게 뛰어난 검법을 지니고 있었구려.”
조빙심은 씁쓸하게 웃더니 이내 정색을 했다.
“사실은 낙 소협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일부러 들렀소.”
옆에서 별생각 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낙일방이 움찔하여 조빙심을 쳐다보았다.
“예? 고맙다니요?”
조빙심은 낙일방을 돌아보며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낙 소협이 조금 전의 비무에서 손끝에 인정을 베푼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오.”
낙일방은 강호의 명성이 자신에게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대단한 조빙심이 진지한 표정으로 사의를 표하자 절로 당황해서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서로의 실력을 보이고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비무에서 그런 일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히려 제가 너무 무식한 방법을 사용하여 곽 대협을 모욕한 게 아닐까 걱정이 되는군요.”
조빙심은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에 떠올라 있는 순진한 표정을 보고는 그의 성품을 어느 정도 짐작했는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매달았다.
“낙 소협의 말대로 비무란 의당 그래야 하오. 그래도 나는 낙 소협에게 고맙다는 말은 꼭 하고 싶었소.”
조빙심은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진산월은 충분히 그 안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곽희의 검은 단순히 비무의 승패를 가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낙일방을 살상하기 위한 목적을 담고 있었다. 낙일방의 대처가 조금만 늦었거나 적절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큰 부상을 면키 어려웠고, 상황에 따라서는 이마를 관통당한 채 비명횡사했을지도 몰랐다.
진공검은 그런 점에서 비무를 가장한 살인을 저지르기에 적합한 무공이었다. 아직 강호 경험이 충분치 않은 낙일방으로서는 제대로 대응도 해보지 못하고 당할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이었다.
곽희가 처음부터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진산월은 곽희의 그런 행동에 배후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조빙심의 말은 그의 짐작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조빙심이 떠나간 후 이번에는 대방선사가 종남파 일행들에게로 걸어왔다.
“허허…. 오늘 빈승은 크게 안계를 넓혔소이다. 특히 낙 소협은 두 번이나 빈승을 놀라게 했소.”
낙일방은 대방선사의 말에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제가 무슨 일로 방장 스님을 놀라게 했습니까?”
대방선사는 낙일방의 옥을 깎아놓은 듯한 수려한 얼굴을 웃음기가 가득 담긴 눈으로 쳐다보았다.
“본사의 정명을 상대할 때는 낙 소협의 정교하면서도 자유분방한 초식 운용에 놀랐고, 곽 시주와의 비무에서는 그 과격함과 기발함에 거듭 놀랐소이다. 준수한 낙 소협의 몸 어디에 그런 과격한 승부사의 기질이 담겨 있는지 모르겠소.”
낙일방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방장 스님도 농을 하시는군요. 저로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허허…. 빈승의 말은 사실이오. 빈승은 가끔 실없는 소리를 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기는 하지만 무공에 관해서는 아직 허튼소리를 내뱉은 적이 없소.”
낙일방은 여전히 멋쩍은 미소를 지었지만,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소림사의 장문인이 의외로 쾌활한 서역을 지닌 것을 알고는 무척이나 흥미 있어 했다.
대방선사는 한 번 더 각별한 눈으로 낙일방을 응시한 후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비무의 결과가 삼파 중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아 만족스럽소이다. 진 장문인 생각은 어떠시오?”
진산월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저로서는 그저 방장님의 배려에 감사할 뿐입니다.”
“허허…. 빈승이 한 게 무엇이 있다고 그러시오? 그나저나 잠시 후에 시간을 낼 수 있겠소?”
진산월은 대방선사가 이제야 자신을 소림사로 초대한 이유를 밝히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자들을 숙소로 보낸 다음 찾아뵙겠습니다.”
“아미타불. 그럼 반 시진 후에 사미승을 보내겠소.”
대방선사가 나직하게 불호를 오니 후 멀어져가자 낙일방이 그의 뒷 모습을 보고 있다가 싱겁게 웃었다.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다른 분이군요. 굉장히 엄격하고 냉정한 분인 줄 알았는데….”
“소림사 같은 거대문파의 장문인이라면 당연히 자기 자신에게 엄격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아야 하니 틀린 소문은 아니지. 대방선사의 저런 모습은 일파를 이끄는 우두머리로서의 중압감을 해소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해결책일 것이다.”
낙일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이란 말씀입니까?”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행동이란 것이지.”
낙일방은 진산월의 말이 알쏭달쏭한지 동중산에게 물었다.
“동 사질은 장문사형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동중산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숙의 의문에 대답해주었다.
“장문인의 말씀은 대방선사가 장문인이 되면서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지 못하는 불만을 그런 식으로 해소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낙일방은 처음 듣는 말인 듯 눈을 크게 떴다.
“대방선사가 장문인이 되는 걸 싫어했나요?”
“제가 듣기로는 대방선사는 어려서부터 무학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을 뿐 아니라 자신도 무공에 미쳐서 불과를 드리는 일조차 등한시할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래의 천하제일인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낙일방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장문인의 지위에 오르면서 무학의 길을 포기해야만 했겠군요. 그래서 그 아쉬움을 해학적인 성격과 털털한 웃음으로 풀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낙일방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동중산이 그를 향해 물었다.
“낙 사숙께서는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장문인이란 지위와 무공이란 것이 그렇게 병행하기 힘든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림사는 이 넓은 강호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거대한 문파입니다. 이런 문파를 이끌기 위해서는 자신을 위한 시간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어느 순간에 갑자기 무공에 깨달음이 와도 그걸 얻기 위한 폐관수련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무공으로 천하제일인이 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요.”
“소림사의 장문인이 된 것은 대방선사 개인으로서는 무척이나 불행한 일이겠군요.”
“그렇습니다. 무림의 역사를 되돌아보아도 거대문파의 우두머리가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오른 적은 거의 없습니다. 역사가 유구한 문파일수록 그 문파의 제일고수는 장문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낙일방은 힐끗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본 파를 제외하고는 말이지요.”
동중산은 낙일방의 그런 모습에 미소를 금치 못했다.
“본 파는 사정이 다르지요. ㅜㄴ파의 부흥을 위해서 장문인의 개인적인 역량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본 파의 과거 전성기 시절을 보면 장문인이 제일고수였던 시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낙일방은 다시 침음했다. 그의 표정이 왠지 심각해 보여서 동중산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 말이 공감이 가지 않으십니까?”
낙일방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씁쓸함이 담긴 미소였다.
“그게 아니라 장문사형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장문사형은 우두머리와 무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좇고 있잖아요. 대방선사 같은 사람도 장문인의 지위를 저렇게 힘들어 하는데, 장문사형이 느끼고 있을 그 엄청난 부담감과 막중한 책임감을 떠올려보면 가슴이 답답해지는군요. 장문사형도 본인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동중산의 시선도 자연스레 진산월을 향했다. 그때 진산월은 유소응과 손풍에게 이번 비무에 대한 설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멍하니 진산월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는 어색한 미소를 나누었다.
“장문사형은 괜찮겠지요?”
낙일방의 물음에 동중산은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낮게 가라앉으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장문인께선 지금까지 남들이 상상도 못할 고초와 난관들을 무수히 겪어왔습니다. 결코 부담감에 짓눌리거나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동중산은 마지막 말을 마음속으로 삼켰다.
‘하지만 장문인이 행복한지는 저도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