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1권 철혈행로(鐵血行路)편 :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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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1권 철혈행로(鐵血行路)편 : 1화


제 209장 복수불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주위는 고요했고, 이따금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멀리서 강물 흐르는 소리만이 꿈결처럼 아련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진산월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다가 마차를 향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막 주렴을 걷으려고 했을 때 마차 안에서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형, 그곳에 계세요.”

주렴에 거의 닿아 있던 진산월의 손이 멈춰졌다. 진산월은 손을 내민 상태 그대로 몸이 굳어진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주렴 속의 인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리 안력을 돋구어 보아도 앉아 있는 여인의 흐릿한 모습만 보일 뿐,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때 다시 주렴 속에서 그녀의 조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연 매,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겠니?”

한쪽에서 눈을 반짝인 채 진산월과 마차를 번갈아 응시하고 있던 모용연이 움찔 놀라더니 까닭 모를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한동안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검은 하늘에 떠있는 한 점의 편월만이 석상처럼 서 있는 한 남자와 마차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진산월은 묵묵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도 이랬군. 조각달이 내걸린 강변에서 사매를 마지막으로 보았지.”

조용하면서도 담담했지만 묘한 고적감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정말 그랬다. 삼 년 전의 그날, 당가타의 이름 모를 강변에서 보낸 짧은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되었다. 그때 그는 스스로의 입으로 이년지약을 말했었다. 그리고 이제 삼 년 만에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 그의 심정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까?
진산월은 슬펐다. 그리고 기뻤다. 슬픈 이유는 수십 가지나 댈 수 있지만, 기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만나러 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를 기다려 주었다…. 철석같이 약속한 이년지약을 어기고, 삼 년간이나 그녀를 외롭게 내버려두었는데도 그를 만나기 위해 천리 먼 길을 달려와 주었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했다. 만족하기로 했다. 더 이상의 욕심을 낸다면 그것은 아집이며 이기심을 뿐이었다. 그래서 진산월은 웃으려고 했다. 삼 년 만에 다시 만난 그녀에게 환한 웃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괜찮다고, 종남파도 무사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나 그는 웃을 수 없었다. 웃으려고 입을 벌렸다가는 목구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를 것만 같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최대한의 담담함을 유지해야만 했다.
진산월은 천천히 주렴으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그녀도 제지하지 않았다.
촤르르….
주렴이 걷히는 소리가 마음 한편에 드리워진 무거운 장막을 걷어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마차 안은 어두웠다. 어스름한 달빛 때문에 더욱 어두워 보였다. 그녀는 마차의 한쪽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흐릿한 달빛이 그녀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우게 했다.
진산월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엷은 망사가 씌워져 있었다. 망사 사이로 내비치는 그녀의 눈빛은 예전과 변함이 없건만, 진산월은 왠지 그녀와 자신 사이에 도저히 뚫을 수 없는 두터운 막이 쳐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차는 좁았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 안의 공간이 한없이 넓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진산월은 그녀의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녀의 독특한 사라옥정향의 향기가 코끝에 감돌자 잠시 아련한 느낌이 전신을 적셔 왔다. 진산월은 삼 년 전의 어느 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날로 돌아가고 싶었다.
한참 동안이나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한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둘 중 누구도 먼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입을 열면 지그의 정적이 깨어져 날카로운 파편이 몸을 찌르기라도 할 것처럼.
하나 끝나지 않는 시간은 없었다.
진산월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몸은 어때?”

그녀는 특유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제 몸은 다 나았어요. 사형은 어떻게 지냈어요?”

“나야 잘 지냈지.”

망사 사이로 내비치는 그녀의 시선이 유달리 음울하게 반짝였다.

“너무 많이 말랐어요.”

“삼 년 동안 벽곡단만 먹었더니 이렇게 되더군. 하지만 요새 다시 살이 찌고 있는 중이야. 곧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진산월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으나 그녀는 한참이나 아무 대꾸도 없었다. 다시 들려온 그녀의 음성은 조금 전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꼭 그렇게 될 수 있을 거에요.”

진산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들은 어때요?”

“일방은 제법 남자다워졌어. 실력도 많이 좋아졌지.”

“낙 사제가 절정고수가 되었다는 소문은 들었어요. 처음에 그 소식을 듣고는 믿기지 않았는데, 정말 고수가 된 모양이군요.”

“그래서 이제는 혼자 내놓아도 불안하지 않아. 일방 말대로 어디 가서 남에게 맞고 다닐 걱정은 할 필요가 없으니까.”

“다행이군요. 낙 사제가 얼마나 늠름해졌을지 정말 기대가 돼요.”

“정해는 그대 우리와 동행했던 상 대협의 딸과 혼인을 했어. 지금 본산 밑에 신혼집을 꾸렸지.”

“그렇군요. 상 소저는 낙 사제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정 사제가 용케도 그녀의 마음을 움켜잡았군요.”

“그럴 일이 있었지. 두 사람은 뇌 숙부의 치료를 위해 석가장에 머물렀는데, 그때 연분이 생긴 모양이야.”

“옹 사제는요?”

“계성은 고생을 좀 했어. 지금은 서안의 손노태야 밑에서 일을 배우고 있지.”

“다친 곳은 없나요?”

“험한 꼴을 당하긴 했지만 잘 견디고 있어. 한쪽 다리가 불편한데, 취아가 그를 위해서 특별한 보법을 연구하고 있지.”

“그러고 보니 취아는 잘 있어요?”

“그래. 이제는 완연한 여인이 되었지. 무공도 많이 늘었고, 성격도 차분해져서 옛날같이 천방지축 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워.”

그녀는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 싶군요.”

“지산과 취아는 결혼하기로 했어. 올해가 가기 전에 식을 올릴 수 있을 거야.”

“정말 잘 되었네요. 그런데 취아가 소 사제와 결혼할 생각을 하다니 뜻밖이로군요. 그 아이는 사형을 무척 좋아했었는데….”

진산월의 메마른 얼굴에 모처럼 엷은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소녀가 여인이 되면 남자 보는 눈이 달라지나 보지.”

그녀는 망사 사이로 그를 한동안 가만히 쳐다보더니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아이는 틀림없이 외로웠을 거에요. 주위가 너무 외로워서 혼자 견디기 힘들 때 여자는 멀리 있는 이상 보다는 가까이에서 자신을 보듬어줄 누군가를 더 원하게 되지요.”

“그런 것도 같군.”

“매 사형은….”

“매상은 무당으로 갔어. 나름대로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가기로 한 것 같아.”

그녀는 예상치 못한 말을 들어서인지 잠시 말문을 멈추었다가 한숨 섞인 음성을 토해냈다.

“매 사형은 항상 좀 더 높은 경지의 검술을 익히기를 갈망했었죠. 하지만 그래도 계속 본 파에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많은 일들이 있었지. 매상으로서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할 상황이었을 거야.”

진산월은 그녀가 매상이 견디지 못해했던 그 상황에 대해 물어볼까 걱정스러웠으나 다행히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동 사질은 어때요?”

“중산은 이제 본 파의 어엿한 일원이 되었어. 초가보와 싸울 때 한쪽 눈을 잃었는데, 그 뒤로 더욱 침착하고 생각이 깊어져서 본 파에 큰 도움이 되고 있지.”

“초가보… 무척 힘든 싸움이었다고 들었어요.”

“그랬지.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았어. 다친 사람은 제법 있었지만 아무도 죽지 않았지. 정말 운이 좋았어.”

임영옥은 다시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에 입을 연 그녀의 음성에는 간절한 염원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나도 그 자리에 있고 싶었어요, 사형. 정말로 그곳에서 함께 싸우고 싶었어요.”

진산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모두들 알고 있었지. 사매뿐 아니라 떠나간 모든 사람들이 우리와 그 자리에 함께 있고 싶었다는 걸. 그래서 더욱 힘이 났지.”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옛날과 같은 부드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두 사람은 낮게 소곤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엷은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진산월이 종남삼검 중의 유일한 생존자인 전풍개와 사숙인 노해광이 돌아온 사실을 말해주었을 때 임영옥은 특히 기뻐하며 망사 너머로도 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노해광 사숙이 돌아오셨다니 정말 다행이군요. 아버님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늘 그분을 염려하셨는데, 이 사실을 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노 사숙은 지금 서안의 유력한 실력자 중 한 사람이 되었어. 그래서 본 파가 서안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큰 힘이 되고 있지.”

임영옥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노 사숙은 어떤 분인가요?”

“고집이 세고 까다로운 사람이야. 하지만 아랫사람을 잘 부리고 처세술에 능해서 인맥이 무척 넓지.”

“본 파에는 꼭 필요한 사람이로군요.”

“그래.”

“성격은 어때요? 예전에 얼핏 아버지에게 듣기로는 속을 잘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그런 면이 있지. 자신의 속마음이 남에게 알려지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더군. 자기 주관이 확고하고 인정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 편이야. 그만큼 책임감도 강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이지. 나는 마음에 들어.”

“사형이 마음에 들었다면 좋은 사람이겠군요.”

진산월은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망사 사이로 내비치는 그녀의 눈빛은 마치 두 개의 찬란한 보석처럼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사형은 겉으로는 두루뭉술하고 대범한 것 같아도 사실은 사람을 사귀는 데 무척 엄격하고 까다로운 성격이에요. 그래서 사형이 웃으면서 대하는 사람은 많아도 흉금을 터놓거나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지요.”

진산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까다로운 성격이었던가? 잘 모르겠는걸.”

“사형이 지금까지 친구로 사귄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보세요. 조일평 소협 한 사람밖에 없잖아요.”

“그건 사매가 몰라서 그래. 나도 요즘 새롭게 사귄 친구가 있다구.”

“그래요? 그 행운아가 누군가요?”

“자칭 풍류남아이면서 사실은 전형적인 파락호인 인물이지.”

이어 진산월은 자신이 손검당을 사귄 경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임영옥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더니 입을 가리고 나직하게 웃었다.

“호호… 말만 들어도 어떤 사람인지 머릿속으로 그려지는군요. 그는 틀림없이 평소에는 별로 말이 없는 인물일 거에요.”

“어째서?”

“사형은 예전에도 번지르르하게 말을 잘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입에 발린 몇 마디의 말보다는 단순한 눈빛이나 몸짓으로 느낄 수 있는 마음의 교류를 더 소중하게 생각했죠. 그 손검당이라는 사람이 말 잘하고 입이 가벼운 사람이었다면 웃으며 안면을 틀 수는 있어도 친구로 사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겠죠.”

진산월은 망사로 비치는 그녀의 두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사매는 나를 너무 잘 알아. 사매야말로 나의 유일한 지기야.”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래서 나도 안심했어요.”

“무얼 안심했는데?”

“사형의 외모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지만 적어도 속마음만큼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내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어?”

임영옥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지 않을 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알고 나니 안심이 되었어요.”

“인간은 원래 쉽게 변하지 않는 존재지. 내 외양이 달라졌다고 해도 내 본질은 그대로야. 그런 점에서 본다면 사매도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지.”

임영옥은 가만히 그를 쳐다보고 있더니 이윽고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사형이 잘못 생각한 거에요.”

“내가 잘못 생각했다니?”

“사형은 나도 사형처럼 변하지 않을 사람이니 안심할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예전과 달라졌어요.”

진산월의 낯빛이 자신도 모르게 굳어졌다.

“그건 무슨 의미지?”

임영옥의 음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조용했다.

“나는 사형과 함께 종남파로 돌아갈 수 없어요.”

진산월은 묵묵히 그녀를 응시했다. 마치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모든 게 너무 많이 변해버렸어요. 나는 지난 세월 동안 사형을 기다려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사형과 같은 꿈을 꿀 수 없게 되었어요.”

죽음 같은 적막이 내려앉은 마차 안에는 그녀의 나직한 음성만이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사형에 대한 제 마음이 변했다고 해도 좋아요.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든지….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나는 더 이상 종남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뿐이에요.”

이번에는 진산월이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진산월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를 향하고 있었지만, 그 눈 속에 담겨 있는 것은 그녀와 그 사이에 있는 텅 빈 공간이었다.
한참 후에야 진산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전의 굳어진 모습과는 다른 담담한 음성이었다.

“나는 사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겠어. 내가 이년지약을 어긴 이유를 사매가 묻지 않았듯이. 어떤 강요도 하지 않겠어. 사매의 선택을 존중하니까. 다만 나도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게 있지.”

진산월은 그녀의 망사 너머로 비치는 두 눈을 쳐다보며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을 내뱉었다.

“사매는 반드시 본 파로 돌아오게 될 거야. 언제가 되었든 말이지.”

임영옥의 몸이 한 차례 가늘게 떨렸다. 속삭이는 듯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었으나 그 안에 담겨 있는 절실한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사형은 운명을 믿나요?”

“난 내가 정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

“….!”

“사매는 나의 가장 가까운 곁에서 우리가 꿔왔던 꿈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보게 될 거야. 그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확신할 수 있는 운명이지.”

임영옥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지 않고서는 당장이라도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게 될 것 같았던 것이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목덜미는 한없이 처연해 보였다.
한순간 두 사람 사이로 마른 갈증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다음에 남은 것은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운 침묵뿐이었다.
진산월은 이런 침묵이 싫었다.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간절히 그녀를 만나기를 기다려왔던가? 그런데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그녀와 자신 사이에는 넓은 간극이 존재해 있었던것이다.
그 사실을 진산월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산월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 막 서로의 손이 닿으려는 순간, 그녀는 슬그머니 손을 거두어들였다. 진산월은 텅 빈 허공을 움켜쥔 채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때 그녀의 눈빛은 어쩌면 그렇게 슬퍼 보이는지….
진산월은 몸을 돌렸다. 더 이상은 그로서도 견딜 수가 없었다.
주렴을 걷고 마차 밖을 나오니 검은 하늘이 그를 반겼다.
주위는 고요했고, 밤공기는 차가웠다. 진산월은 문득 고개를 들어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한구석에 떠 있는 일점편월이 시야에 들어왔다. 진산월은 그 편월을 응시하며 마음속으로 끝없이 중얼거렸다.

‘나는 참을 수 있다…. 나는 참을 수 있다….’

얼마나 그 자리에 선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니 사라졌던 모용연이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대 진산월이 느낀 허탈감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모용연은 진산월의 고적감이 감도는 두 눈과 약간은 파리한 얼굴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붉은 입술을 살짝 열었다.

“그녀는 떠났어요. 당신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찾아서는 안돼요.”

진산월은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얼굴에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어서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모용연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할 말만을 계속했다.

“당신과 그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진정으로 그녀를 생각한다면 더 이상 그녀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돼요. 그녀를 잊어주는 게 지금의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에요.”

진산월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모용연은 기광이 번쩍이는 눈으로 그를 빤히 응시하더니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다.
그때 갑자기 진산월이 휑하니 몸을 돌리더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모용연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찌푸려지며 날카로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 말을 무시하는 건가요?”

진산월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계속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자가 점점….’

모용연은 순간적으로 분기가 치밀어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 간신히 억눌러 참았다. 얼핏 진산월의 심정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누구와도 말하기 싫은 거겠지.’

모용연은 멀어져 가는 진산월의 뒷모습을 한동안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자 무언지 모를 외로움과 쓸쓸함이 느껴졌다. 큰 키에 마른 몸매치고는 유난히 넓은 어깨를 지닌 그의 뒷등은 강인해 보였는데도 지금은 그 어개 위에 무거운 무언가가 올려져 있는 것 같았다.
모용연은 진산월이라는 사람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으나, 순전히 인간적인 동정심에서 그의 어깨 위에 지워져 있는 무거운 그림자가 걷히기를 바랐다. 언젠가는 칼자국이 나 있는 진산월의 차가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다.
하나 그것이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그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돌아간다면 그는 과연 웃을 수 있을까?’

그녀는 심란한 마음에 한동안 그 자리에 선 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너무 늦었네.”

그녀는 나직하게 혀를 차고는 황급히 신형을 날려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강변의 밤바람은 유난히 차가웠다.
진산월은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으며 강둑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하의 강물이 어둠 속을 도도히 흘러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으나 어떤 풍취도 느낄 수 없었다. 가슴속에 세찬 격랑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며 휘돌고 있는데 강물 흐르는 광경이 시야에 제대로 들어올 리 없었다.
지금 그의 마음은 그 자신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평생을 가꾸어왔던 소중한 무언가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온몸을 휘감는 기분이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임영옥을 처음 만난 것은 그의 나이 열세 살 때였다. 그로부터 십 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임영옥은 그의 가장 친한 지기였고, 믿을 수 있는 동료였으며, 유일한 여인이었다.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피붙이 하나 없는 천애고아인 그에게 그녀는 누이이고, 누나이며, 어머니였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는 가장 큰 힘이자 삶의 원동력이었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 때도 그를 지켜주는 버팀목이었다.
그 버팀목이 부서져 버린 것이다.
진산월은 아무 생각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마치 생각이란 놈이 어디론가로 사라져 꽁꽁 몸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 후에야 진산월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그녀를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 무언가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하나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스스로의 입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을 했는데…..
그녀의 결심이 굳건하다면 자신의 어떠한 행동도 부질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정신이 들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강물 흐르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진산월은 불룩 튀어나온 구릉의 유달리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어느 한 부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나오시오.”

어둠 속에서 하나의 인영이 허깨비처럼 유연한 동작으로 앞으로 걸어 나왔다.
흑색 유삼을 입은 다소 마른 체구의 청년이었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에 짙은 눈썹과 오똑한 콧날을 지닌 미남자였다. 그의 허리춤에 한 자루 옥색 섭선이 장난감처럼 매달려 있는 모습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흑삼청년은 건들거리는 자세로 진산월의 이 장 앞까지 다가오더니 이내 입가에 엷은 미소를 그려 보였다.

“안녕하시오.”

그의 음성은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이나 가벼워 보이는 행동과는 달리 묵직한 저음이었다. 특히 말꼬리에 묘한 울림이 담겨 있어 듣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었다.
진산월은 흑삼청년이 처음 보는 얼굴임을 확인하고는 이내 담담한 음성을 내뱉었다.

“나를 아시오?”

흑삼청년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지며 박속같이 고른 치아가 살짝 드러났다.

“물론이오. 당신은 요즘 중원땅에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종남파의 장문인 신검무적 진산월 아니오?”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소?”

“물론 초면이오.”

“그런데 어떻게 나를 알고 있소?”

흑삼청년은 금시라도 대소를 터뜨릴 듯했으나 소리 내어 웃지는 않고 계속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찌 모를 리 있겠소? 당신을 만날 기대를 가지고 먼 길을 달려왔는데….”

진산월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시선으로 흑삼청년의 준수한 얼굴을 응시했다.

“생면부지의 나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다니 필연적인 곡절이 있겠구려.”

“그렇소.”

“그 곡절이 어떤 것이든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이만 돌아가시오.”

진산월이 금시라도 몸을 돌리려 하자 흑삼청년의 미소 띤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하나 이내 그는 다시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잘못 짚었소, 진 장문인. 내가 당신을 만나러 온 것은 그녀 때문이오. 그런데도 당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단 말이오?”

“그녀라니, 누구를 말하는 거요?”

“물론 당신이 조금 전에 마차 안에서 만났던 여자 말이오. 임영옥. 그녀 때문이 아니었다면 내가 천 리가 너는 길을 먼지를 뒤집어쓰며 달려왔을 것 같소?”

진산월은 물끄러미 흑삼청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흑삼청년은 마치 진산월의 주시를 즐기기라도 하는 듯 느긋한 표정으로 진산월의 시선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는 상대를 조롱하는 조소로도 보였고, 득의만면한 웃음으로도 보였다. 아니면 그저 아무 의미 없이 습관적으로 웃고 있는 것도 같았다.
어떤 의미이든 진산월은 그 미소가 탐탁지 않게 생각되었다. 아니 미소 자체가 아니라 그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남자의 입에서 임영옥의 이름이 거론되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았다면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의 미소 짓는 얼굴에 불쾌함을 느낄 까닭이 없었다.
진산월이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자 흑삼청년은 한 차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인데, 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실언 따위를 하는 성격이 아니니 그 점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믿어도 좋소.”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군유현이라고 하오. 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소?”

진산월은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명호 하나를 내뱉었다.

“절정수사.”

흑삼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나요.”

절정수사 군유현은 세 가지 면에서 강호상에 유명한 인물이었다.
첫째는 그가 낙화수사 조옥린 이후 강호에서 제일가는 풍류남아들이라는 강호삼정랑 중의 일인이라는 것이며, 둘째는 그가 한 자루 부채만으로 동정십팔채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성세를 자랑하는 대하보의 최고 고수를 격파한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하나 무엇보다도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가 구궁보의 모용봉과 가장 친한 친구 사이인 해천사우의 일인이라는 점이었다.
모용봉은 자타가 공인하는 당금 강호의 제일고수였다.
그리고 해천사우의 면면 또한 그의 친구로서 부족함이 없는 대단한 실력의 인물들이었다. 절정수사 군유현 외에 그와 함께 강호삼정랑에 속해 있는 정검 부옥풍, 강호제일의 쾌검객이라는 분광검객 고심흥, 그리고 강남에서 손꼽히는 도객인 강남절품도 담중호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개개인이 강호무림의 정상을 달리는 절정고수들일 뿐 아니라 하나같이 기개가 헌앙하고 인품이 준수해서 누구나가 선망해 마지않는 절세의 기남들이었다.
진산월은 절정수사라는 명호보다는 군유현이 모용봉과 절친한 친구 사이라는 것에 더 흥미를 느꼈다. 모용봉의 친구가 임영옥 때문에 자신을 만나려고 찾아온 것이다.

“당신 말이 옳소. 나는 생각이 바뀌었소.”

진산월이 불쑥 말을 내뱉자 군유현은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생각이 바뀌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이 나를 만나려고 찾아온 곡절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다는 뜻이오.”

군유현은 다시 예의 의미 모를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 비로소 대화를 나눌 분위기가 된 것 같군. 내가 진 장문인을 찾아온 것은 한 가지 충고를 하기 위해서요.”

“충고라…. 정말 모처럼 들어보는 말이군.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충고를 하기 위해 천 리 길을 달려왔다니 듣지 않을 수 없구려.”

“충고라는 단어가 마음에 안 든다면 단순히 조언이라고 생각해도 좋소. 내가 해줄 말은 오직 하나, ‘낙화난상지 복수불반분’ 이라는 단어요.”

-낙화난상지, 복수불반분.

떨어진 꽃은 가지로 되돌릴 수 없고,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이는 태공망 대부터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
태공망은 주공 단과 함께 주나라를 세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로, 본명은 여상이었다. 그는 오랜 세월을 초야에 묻혀 살았는데, 그의 부인 마씨는 남편이 가정을 돌보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자 집을 나가고 말았다.
나중에 문왕에게 중용되어 그가 금의환향하자 마씨는 태공망의 앞에 나타나 다시 거두어줄 것을 청했다. 그대 태공망은 물이 담긴 그릇을 가지고 나와서는 마당에 부으며 천천히 말했다.

“이 물을 도로 그릇에 담아보시오.”

그녀는 물을 담으려고 했지만 물은 이미 땅에 스며든 뒤였다.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마씨를 보며 태공망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이별했다가 다시 합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도로 그릇에 담을 수 없는 법이오.”

마씨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복수불반분’의 유래였다.
군유현은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한 자 한 자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한번 엎질러진 물은 도로 그릇에 담을 수 없듯이, 한번 떠난 사람과는 다시 합칠 수 없는 법이오. 그러니 진 장문인은 그녀에게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말고 조용히 물러나기 바라오.”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다 담담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내게 그 말을 해주는 이유가 무엇이오?”

군유현의 송충이처럼 짙은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진 장문인이 그녀를 힘들게 하기 때문이오.”

“내가 그녀를 힘들게 한다고?”

“그렇소. 진 장문인이 그녀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녀에게 접근한다면 그녀는 괴로움에 휩싸일 수 밖에 없소. 지난 삼 년 간 그녀는 충분히 고통을 받았으므로 이제는 행복을 찾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오.”

진산월은 한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군유현의 눈빛에 날카로운 섬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진 장문인, 다시 한번 말하겠소. 앞으로 그녀를 만나지 마시오.”

유달리 낮게 가라앉은 그의 음성에는 분명한 경고의 빛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진산월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하하하 … !”

허공을 올려본 채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세상에 보기드문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목격한 사람 같았다. 군유현은 조금 전과는 달리 냉기가 감도는 차가운 시선으로 진산월을 쏘아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웃어젖히던 진산월이 문득 고개를 떨구어 군유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엷은 미소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이보시오, 군 소협. 당신은 그녀와 나 사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소?”

군유현의 준수한 얼굴에 잠시 못마땅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의 실력에 누구보다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로서는 자신보다 몇 살 어려 보이는 진산월이 자신을 소협이라고 부르는 것에 불만을 느꼈던 것이다.
자연히 그의 음성은 냉랭해질 수밖에 없었다.

“남들만큼은 알고 있지.”

진산월은 여전히 빙글거리며 웃었다.

“말해보시오.”

“그녀와 종남파에서 십 년 정도 동문수학했다는 것, 그녀와 제법 좋은 사이를 유지해왔으며 삼 년 전에 함께 소림사의 대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종남파를 내려왔다는 것, 그녀를 지키지 못해 악적들의 손에 넘어가게 했다는 것….”

진산월은 계속하라는 듯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군유현은 냉엄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더욱 낮아진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를 삼 년 동안이나 팽개쳐둔 채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가 그녀의 혼인설이 나돌자 황급히 그녀를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것…. 이 정도로도 부족한가?”

어느새 그의 말투는 조금 전과는 달리 거칠어져 있었다.
진산월은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지 여전히 웃음기가 감도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니, 충분하오. 충분하다 못해 넘치기까지 하는군.”

군유현의 얼굴이 점차로 철갑을 씌운 듯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자신의 여인조차 지키지 못한 얼간이가 감히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절정수사를 놀린단 말이오? 농담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소?”

진산월이 계속 웃으며 말하자 군유현의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것은 그가 극도의 분노에 사로잡혔을 때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진산월은 그가 분기를 참지 못하고 덤벼들 거라고 생각했으나 의외로 군유현은 몇 차례 심호흡을 하더니 예의 묵직한 저음을 토해냈다.

“신검무적, 강호에 퍼진 소문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경망스럽거나 남을 비아냥거리는 성격이 아니라고 들었소. 명문정파의 장문인다운 처신을 보여주기 바라오.”

진산월은 그가 심호흡 몇 번만으로 다시 냉정을 되찾자 자신도 얼굴의 미소를 거두었다.

“당신을 놀리려 했던 건 아니오. 단지 어떤 생각이 떠올라 웃음을 참을 수 없었을 뿐이오.”

“그게 무엇이오?”

“나는 그녀를 만난 지 십삼 년이나 되어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불과 하룻밤 사이에 나보다 더 그녀를 위해주는 사람을 두 명이나 만났으니 어찌 놀랍지 않겠소? 더구나 그중 한 사람은 나보다 더 그녀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니 그녀와의 지난 세월이 그토록 무의미했었나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었소.”

“되짚어본 결과가 어떻소?”

진산월은 처음의 담담한 신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담담하면서도 조용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알고 싶소?”

군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두 가지를 알겠더군. 첫째로 나는 그녀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가장 중요한 그녀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는 거요.”

“둘째는?”

“그녀가 지금 무척이나 힘들 거라는 것.”

군유현은 그것 보라는 듯 즉시 대꾸했다.

“그러니 당신은 더 이상 그녀를 만나서는 안 되오.”

진산월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힘든 건 나 때문이 아니오.”

“끄게 무슨 말이오?”

“그녀의 주위에 십 년이 넘게 함께 생활해온 나보다 더 신경써주는 사람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으니 그녀가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겠소? 더구나 그 사람들이 그녀의 모든 행동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있다면 아무리 심성이 곱고 온화한 그녀라도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거요.”

군유현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진산월은 그의 얼굴이 냉랭하게 변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할 말을 했다.

“그러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소? 세상의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이해하고 아껴줘야 할 내가 막상 그녀의 어려움을 전혀 알지 못하고 혼자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엉뚱한 고민을 하고 있었으니 정말 한심한 일이 아니오?”

군유현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철갑처럼 굳은 얼굴로 그를 응시하더니 예의 묵직한 저음을 토해냈다.

“당신은 현명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정말 실망이 크군. 충분히 알아듣게 설명을 하고 기회를 주었는데도 굳이 벌주를 마시려 하다니 당신은 정말 어리석은 인물이오.”

진산월은 선뜻 시인을 했다.

“그렇소. 나는 어리석은 짓을 했소. 그러니 이제 그 어리석음을 다시 되돌릴 생각이오.”

군유현은 천천히 허리춤에 매달린 섭선을 움켜잡았다.

“강호는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소. 당신은 자신의 검에 확실한 믿음이 있겠지만, 그 믿음만으로 강호를 마음먹은 대로 행도할 수는 없소.”

진산월은 군유현이 섭선을 펼치는 광경을 보면서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나도 그 정도는알고 있소. 그리고 당신 정도로 내 믿음을 깰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소.”

군유현은 오른손으로 섭선을 만지작거리며 느릿느릿 앞으로 다가왔다.

“강호의 소문은 확실히 믿을 게 못되는군. 신검무적은 심기가 깊고 판단력이 뛰어나다고 했는데 사실은 자신의 주제도 정확히 모르고 콧대만 높은 하룻강아지일 뿐이었군.”

“누구나 그런 시기가 있지. 다행히 나는 그런 시기가 지나갔소. 제법 혹독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말이오.”

“소문 한 가지는 맞는 것 같군. 확실히 말솜씨가 뛰어나다는 건 인정해주겠소.”

“검을 쓰는 솜씨는 그보다 더 낫다는 것도 알게 될 거요.”

“기대해보지.”

군유현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섭선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아니 들려들려 했다.
삐익!
바로 그때 멀리서 희미한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그 경적음을 듣자 막 진산월을 향해 달려들려던 군유현의 신형이 우뚝 멈춰 섰다.
휘잉!
세찬 바람 한 줄기가 회오리치며 그의 전신을 한 차례 휘감고 지나갔다. 그것만 보아도 조금 전에 그가 달려들려던 기세가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얼마나 맹렬하고 가공스러운 것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군유현은 경적음이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진산월을 힐끗 돌아보았다.

“당신의 검 솜씨는 다음에 보도록 하지.”

진산월은 담담한 신색으로 대꾸했다.

“기꺼이.”

군유현은 다시 한 차례 진산월의 칼자국이 나 있는 얼굴을 응시하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충고하겠소. 더이상 그녀를 만날 생각은 하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나 그녀에게….”

그의 끝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의 신형은 어느새 허공을 훌훌 날아 어둠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 신형은 진산월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랐다. 심지어 진산월이 지금까지 만났던 인물들 중 최고의 신법대가인 매신 종리궁도의 움직임에 조금도 못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진산월은 마지막에 군유현이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았으나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진산월이 임영옥을 만난다면 그들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그들의 만남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었을까?
진산월은 어느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마음을 결정했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마음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분명히 알았다.
멀리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밝아오는 여명에 온몸을 내맡기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새로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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