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2권 용왕대전(龍王大戰)편 : 1화
제219장 일검승부(一劍勝負)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져서 안력을 집중시키지 않으면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멀리 펼쳐진 짙은 수림과 병풍처럼 늘어선 산들이 마치 검은 장막을 뒤집어쓴 거대한 석상같아 보였다.
진산월은 용영검을 든 채 조용한 시선으로 운중용왕을 응시하고 있었다.
단순히 손에 검 한자루가 쥐어졌을 뿐인데, 그는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마치 몸 전체가 하나의 예리한 보검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한동안 묵묵히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던 운중용왕의 입에서 나직한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정말 굉장한 무형지기로군, 검이 일정 수준에 오르면 사람이 곧 검이고, 검이 곧 사람인 경지에 오른다고 하는데, 이제 약관을 조금 넘은 네가 그런 경지에 올라 있는 줄은 몰랐다.”
두 사람 모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무정구도수나 한쪽에 서 있는 소조림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들이었다.
“내가 이들을 쓰러뜨리면 당신의 솜씨를 보여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운중용왕은 전혀 당황하거나 꺼려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뒷짐을 진 채 당당한 음성을 내뱉었다.
“내 솜씨를 보고 싶다고? 그럼 무얼 망설이는 거냐?”
진산월은 운중용왕이 좀처럼 먼저 손을 쓸 기색이 없는 듯하자 천천히 그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그가 막 두 번째 걸음을 떼어놓으려 할 때였다.
파아아……..
기척도 없이 그의 발밑에서 하나의 인영이 튀어 올라왔다.
인영의 손에 쥐어진 기형검에서 뿜어나오는 시퍼런 검광이 그의 몸을 그대로 양단해버리는 것 같았다.
천하의 진산월도 이 순간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인영의 검이 땅을 뚫고 솟아오를 때까지도 전혀 아무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인영의 검이 자신의 몸을 갈라오는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피부에 무언가 오싹함을 느꼈을 때는 이미 땅속에서 나온 검이 거의 옷자락에 닿아 있었다.
옷이 베어지며 피부가 막 검광에 갈라지려는 순간에 진산월은 기적적으로 용영검으로 검을 막을 수 있었다.
깡!
귀청을 찢어발길 듯한 격렬한 음향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진산월은 한 걸음 물러난 채 자신의 옷자락을 내려다보았다.
무릎 부분에서 아랫배를 지나 가슴에 이르는 부위가 그대로 갈라져 맨살이 훤히 드러나 보였고, 피부에 일직선으로 가느다란 혈선(血線)이 그어져 한두 방울씩 피가 흘러내렸다.
아랫배에서 이어진 혈선은 정확히 심장 부위를 향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그는 하마터면 땅에서 솟구쳐 올라온 검에 심장이 그대로 잘려질 뻔했던 것이다.
진산월이 그 살인적인 암습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첫째로 오랜 시간 심력을 다해 수련을 해오면서 숙성된 초인적인 반사신경 때문이었고, 둘째로 암습자의 검이 다른 부위가 아닌 그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암습자가 다리나 단전을 목표로 했다면 진산월은 도저히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검이 아랫배를 지나 가슴으로 다가오는 그 짧은 순간에 검을 막은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완벽하게 막지 못하고 피부가 일직선으로 베어지고 말았다.
진산월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앞에는 전신에 갈삼을 입은 평범한 체구의 인영이 서 있었다.
인영의 손에는 시퍼런 빛을 발하는 송곳 모양의 기형검이 쥐어져 있었는데, 안력이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그 기형검의 끝이 한 치쯤 부러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갈삼인은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돌연 시커먼 핏덩이를 토해냈다.
“우웩!”
갈삼인의 이마에 매었던 두건이 풀어져 머리가 봉두난발처럼 풀어헤쳐졌고,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갈삼인은 거의 한 사발이나 피를 토해내고서야 간신히 신형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후…..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그 거리에서 내 교탈혼(巧奪魂)을 막아낼 줄은 정녕 상상도 못했소.”
갈삼인의 입에서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산월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풍도라고 했던가?”
갈삼인은 피범벅이 된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용케도 나를 기억하고 있구려.”
갈삼인은 장안대호 이세적의 회갑연에서 보았던 풍도라는 인물이었다.
당시 진산월은 이존휘의 소개로 그를 만났으며, 나중에 그가 바로 공료의 지시로 이세적을 죽인 흉수임을 알게 되었으나 그 뒤로 행방이 묘연해져서 아직도 진실한 정체를 알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진산월은 이존휘에게서 그가 쾌의당주의 제자라는 사실을 들었기에 교탈혼이라는 말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방금 전의 그것이 탈혼검의 수법인가?”
“탈혼검의 두 번째 초식이지. 마지막 초식인 색탈혼(穡奪魂)이었다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피하지 못했을 거요.”
진산월은 왼손으로 자신의 가슴 부위를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랬을 것 같군. 하지만 아쉽게도 당신이 펼친 건 두 번째 초식이었지.”
풍도의 얼굴에 한 줄기 쓴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그 초식 밖에는 배우지 못했소. 지금까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왠지 억울한 생각이 드는군.”
마도 최강의 살인수법이라는 탈혼검은 세 개의 초식이 있었다.
첫째는 측탈혼(側奪魂)으로, 이것은 전문적으로 사람의 인후혈을 노리는 초식이었다.
두 번째가 바로 풍도가 익힌 교탈혼으로, 오직 심장만을 노렸다.
그리고 마지막인 색탈혼은 상대의 미간을 가르는 수법으로, 사실 이 색탈혼이야말로 진정한 탈혼검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었다.
익히면 가히 죽음의 신이 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만큼 익히기가 어려워서 지난 백 년간 강호상에는 색탈혼의 수법이 나타난 적이 없었다.
풍도는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다가 그 끝이 부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정말 처량한 꼴이 됐군. 이래서 영롱비를 쓰려고 했던 건데…..”
영롱비라는 말에 진산월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그런데 왜 쓰지 않았나?”
풍도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왠지 흥겨움보다는 씁쓸함과 일말의 허탈감이 짙게 배어 있는 미소였다.
“그건 내 대사형이 가지고 있소. 이번 일에 쓰려고 잠시 빌리려고 했는데, 생각대로 안 됐지. 만약 그랬다면 결과 또한 지금과 달라졌을 거요.”
영롱비는 천봉궁주가 아끼던 기병(奇兵)으로, 날카롭기가 천하에서 으뜸간다고 알려져 있었다. 취미사의 혈겁 때 흉수가 사용한 후로 아무도 그 종적을 알지 못했는데, 풍도의 입으로 비로소 그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풍도는 풀어헤쳐져 어깨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러운지 머리를 쓸어 뒤로 넘겼다. 진산월은 훤히 드러난 그의 양미간 위쪽에 유난히 푸른 힘줄 한 가닥이 돋아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진산월의 시선이 자신의 미간에 고정되어 있자 풍도는 그 부위를 쓰다듬었다.
“우리들은 이걸 인혼선(引魂線)이라고 부르지. 이걸 없애는 게 탈혼검을 익힌 사람들의 평생의 숙원이오.”
“그렇다면 당신들 사형제는 모두 두건을 쓰고 다니겠군?”
“그렇소. 하지만 너무 믿지는 마시오. 내가 아는 자들 중 적어도 두 사람은 인혼선을 없앴으니까.”
“어떻게 말인가?”
“색탈혼을 어느 수준 이상 익히면 사라진다고 하더군.”
“그 두 사람은 혹시 쾌의당주와 당신의 그 대사형이란 자인가?”
풍도는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끝이 부러진 기형검을 천천히 쳐들어 그 부러진 단면에 자신의 손가락을 슬쩍 갖다 대었다. 손가락 끝이 갈라지며 한 방울의 핏물이 흘러나왔다.
풍도는 기형검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줄기를 바라보고 있더니 손을 흔들어 기형검에 묻은 핏방울을 떨쳐냈다.
“부러지긴 했지만 내 봉미검(蜂尾劍)은 아직도 충분히 예리하오. 사실 교탈혼을 제대로 펼치기에는 땅속은 별로 좋은 장소가 아니었소. 이제 진짜 교탈혼의 맛을 보여주겠소.”
두 발을 가볍게 벌린 채 기형검을 든 손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있는 풍도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허허로워 보였다. 두 눈을 반개한 채 가만히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는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아 마치 가면을 쓴 꼭두각시를 보는 것 같았다.
생사(生死)를 초월한 듯한 그 모습에 진산월은 내심 마음이 무거워졌다.
단 일검에 승부를 판가름 내겠다는 상대의 의도를 읽었던 것이다. 원래 이러한 일검(一劍)의 승부는 쾌검을 익힌 자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법이었다. 전력을 다해 자신이 펼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강력한 일격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고래로 쾌검수들의 전유물과도 같았다.
이러한 쾌검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자신 또한 단 일검에 모든 것을 내걸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이 알고 있는 가장 빠른 초식은 유운검범 중의 추운축전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이 추운축전으로 강호의 전설적인 살인수법인 탈혼검의 초식을 이길 수 있을지 선뜻 장담할 수 없었다.
단순히 무공을 겨루거나 정상적인 대결이었다면 풍도는 결코 진산월의 십초지적이 되지 못한다.
하나 지금과 같은 일초의 승부는 누구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금시라도 터질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장내에 감돌면서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운중용왕은 물론이고 소조림 또한 침묵을 지킨 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누구도 검을 뽑지 않았지만 이미 주위는 온통 삼엄한 기운에 휩싸여 질식할 듯한 압박감이 장내의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소조림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며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것은 진짜로 기온이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그들 두 사람이 뿜어내는 기운이 가공스러운 탓이었다.
사방은 이미 짙은 어둠에 가려 두 사람의 모습조차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녀는 좀 더 안력을 돋우어 두 사람을 자세히 보려고 했다.
그녀가 서 있는 위치에서는 풍도의 뒷등과 진산월의 정면을 볼 수 있었다.
풍도의 뒷모습에서는 별다른 것을 느낄 수 없었지만, 마주 보이는 진산월의 얼굴은 의외로 평온해 보였다.
생사를 건 무시무시한 결전을 하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담담하고 조용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면 그 순간 그의 모습이 어딘가로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듯.
그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풍도를 주시하고 있던 진산월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던 것이다.
일검의 승부를 하는 사람이 상대에게서 고개를 돌리다니……..
그것은 그야말로 스스로 승부를 포기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아연해져서 입을 딱 벌리고 있을 때,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진산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순간, 풍도의 몸이 움직였다.
검이 발출되는 광경은 그녀의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그녀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무언가 희끗한 것이 두 사람 사이에 번뜩였다가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장내를 주시했으나, 도무지 어찌된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무심결에 그녀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서 한쪽에 있는 운중용왕에게로 향했다.
운중용왕이라면 장내의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운중용왕의 모습은 처음과 전혀 변함이 없었으나, 자세히 보니 흑포 사이로 빛나는 그의 눈이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복면 사이로 그의 중얼거리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검술에 심기까지………… 정말 보통 놈이 아니로군.”
소조림은 떠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다시 진산월과 풍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위치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에는 풍도의 등과 진산월의 얼굴이 보였으나, 지금은 두 사람의 몸이 조금 틀어져 그들의 옆모습이 드러나 보였다. 풍도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것은 경악과 고통, 그리고 한 줄기의 미소 어린 표정이었다.
그녀는 처음의 두 표정은 이해할 것도 같았으나, 마지막의 표정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목덜미가 갈라진 사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풍도의 목에 가느다란 혈선이 그어지더니 점차로 시뻘건 핏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풍도는 그런 상태에서도 여전히 괴이한 표정을 지은 채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쿵!!
그의 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와 함께 그의 손에 들려져 있던 봉미검도 빛을 잃고 땅에 떨어졌다.
소조림의 시선은 자신이 흘린 피에 잠겨 있는 풍도의 싸늘히 식어가는 시선에서 진산월에게로 향해졌다.
진산월은 문득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더니 예의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맙소.”
무엇이 고맙다는 것일까?
그녀는 알 듯 모를 듯해서 야릇한 표정으로 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소저 덕분에 그의 평정심을 흔들 수 있었소.”
진산월의 이어지는 말에 비로소 그녀는 일의 내막을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 전의 대결에서 진산월은 풍도에 비해 결코 우세한 입장이 아니었다. 쾌검의 결투에서 그가 익힌 어떤 검법도 탈혼검의 초식보다 속도 면에서 빠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탈혼검의 교탈혼은 단 한 가지의 단점을 제외하고는 정말 완벽한 쾌검식이었다.
그 한 가지 단점이란, 교탈혼이 노리는 부위가 오직 상대의 심장뿐이라는 것이었다.
풍도가 교탈혼을 익히고 있다는 걸 모르는 상태였다면 진산월은 어쩌면 쾌검의 승부에서 패했을지도 몰랐다. 하나 풍도는 스스로의 입으로 교탈혼을 이야기했고, 자신이 그 초식 하나만을 익혔음을 밝혔다.
별다른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으나, 그것이 결국 승부를 결정짓고 말았다.
서로 기세를 끌어올리는 대치 상태에서 진산월은 철저하게 자신의 심장 부위를 보호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풍도는 교탈혼을 발출할 기회를 찾느라 한참 동안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발출할 수 있는 교탈혼의 특성상 그것은 그야말로 막대한 심력을 소비하는 일이었다.
그런 교착 상태에서 진산월은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소조림이야 진산월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이는 위치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대결에 관심을 집중시키느라 무심결에 진산월을 바라본 것이었으나, 그 순간 진산월은 교착 상태를 깰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그는 풍도의 교탈혼을 방비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그녀를 향해 미소지었다.
그것은 풍도에게는 커다란 기회를 줌과 동시에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의 평정심을 산산히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풍도는 진산월이 자신의 등 뒤를 보며 미소짓자 처음에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교탈혼을 전개하다가 문득 덜컥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자신의 등 뒤에는 자신과 같은 편밖에 없을 텐데 진산월이 가슴을 꿰뚫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쪽을 보며 미소를 지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속의 흔들림이 순간적으로 그의 손길을 늦추었다.
그것은 실로 거의 느낄 수도 없을 만큼 미약한 차이였으나, 진산월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풍도가 발출한 교탈혼이 채 가슴에 와 닿기도 전에 진산월의 용영검이 그의 목을 가르고 지나가 버렸던 것이다.
풍도가 마지막에 지었던 표정은 진산월의 심기에 너무도 쉽게 빠져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긴 조소(嘲笑)였다.
하나 풍도를 쓰러뜨린 진산월의 마음도 결코 편하지는 않았다.
평정이 흔들린 상태에서도 풍도의 교탈혼은 그의 검보다 확실히 빨랐던 것이다.
그런데도 풍도가 쓰러진 것은 진산월이 그의 교탈혼을 한 번 경험하여 검이 움직이는 노선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산월은 풍도의 검이 움직이는 순간에 몸을 옆으로 비틀어 봉미검에서 자신의 심장으로 이어지는 검의 노선을 최대한 멀어지게 함과 동시에 자신은 추운축전에서 숨어 있는 변식을 제거하여 최고의 속도를 가진 검초를 펼쳤던 것이다.
그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하여 풍도의 교탈혼이 미처 그의 심장에 도달하기도 전에 거의 용영검이 풍도의 목덜미를 자를 수 있었다.
숨 막히는 결전이었으나 어쨌든 승부는 분명하게 판가름이 났다.
진산월은 여전히 쾌검에 대한 숙제를 가진 셈이었으나, 그 점에 대해서는 차차 고민해보기로 했다.
아직 상황은 종료된 것이 아니었다.
풍도마저 쓰러뜨린 진산월이 다시 용영검을 든 채로 운중용왕에게 다가갔다.
운중용왕은 여전히 석상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진산월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진산월이 막 오 장 이내로 다가왔을 때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나는 어떤 일을 진행할 때 늘 세 가지 수(手)를 준비하지. 설마 네가 나로 하여금 세 번째 수까지 꺼내게 할 줄은 몰랐다.”
진산월은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짤막하게 물었다.
“남은 한 가지 수가 뭐요?”
무정구도수와 풍도가 운중용왕이 준비한 두 가지 수였다면, 그의 두 수는 무척 효과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검을 빼앗긴 상태에서 진산월은 무정구도수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으며, 풍도의 암습은 그를 거의 죽음으로 몰고 갈 뻔했다.
그렇다면 남은 마지막 한 수는 더욱 치명적일 게 분명했다.
“나는 네 검법의 유일한 약점이 쾌검이라고 생각해서 탈혼검을 익힌 풍도를 준비한 것인데, 네가 풍도를 꺾은 이상 검으로 너를 상대하는 것은 가장 미련한 짓임을 알았다. 그러니 이제 방법을 달리해 볼 생각이다.”
“어떻게 말이요?”
“강공책이 실패했으니 유화책을 쓰는 게 순리겠지. 나는 너와 한 가지 흥정을 하고 싶구나.”
진산월은 멀거니 운중용왕을 쳐다보았다. 금시라도 목숨을 건 무서운 결전이라도 벌일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을 태연히 내뱉고 있으니 그의 의중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사이에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보시오?”
“물론이지. 세상에 흥정하지 못할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방금 전까지 칼을 맞대고 싸웠던 사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지.”
운중용왕의 확신에 가득 찬 음성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자극하는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진산월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무슨 흥정을 하자는 거요?”
“사람 하나와 물건 하나를 바꾸는 것이다.”
“나를 살려줄 테니 물건을 내놓으라는 말이요?”
“네가 나에게 물건 하나를 내주면 나도 너에게 사람 하나를 건네주겠다는 말이다.”
진산월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운중용왕의 말에 무언가 불길한 상상이 떠오른 것이다.
“물건은 천룡궤를 가리키는 것일 테고,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거요?”
운중용왕은 흑포 사이로 나직하게 웃었다.
“한번 상상해 보거라.”
마치 함정에 빠진 상대를 조롱하는 것 같은 그의 음성에 진산월의 마음은 한층 더 무거워졌다. 불길한 마음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진산월은 여기서 자신이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대로 계속 운중용왕과 대화를 나누든지 아니면 당초 결심했던 대로 그와 생사를 가름하는 싸움을 벌이든지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다.
싸움을 벌인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상대의 의중에 끌려가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상황을 타파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마음 한구석에는 운중용왕이 말한 대상에 대한 의구심을 언제까지나 갖고 있게 될 것이다.
반면에 대화를 계속한다면 필연적으로 운중용왕이 말한 흥정을 하게 될 것이고, 결과야 어찌 되었건 그의 의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화를 하느냐, 싸우느냐?
선택의 기로에서 진산월이 자신의 마음을 막 결정하려 할 때였다.
그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운중용왕이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가 건네려는 자는 네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이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니, 그녀라고 해야 맞겠군.”
진산월은 하마터면 무거운 한숨을 내쉴 뻔했다.
왜 꼭 불길한 상상은 늘 들어맞는 것일까?
사실 처음부터 그는 그 점이 불안했었다.
쾌의당에서는 자신을 유인하기 위해 그녀의 마차를 이용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마차의 주인까지 이용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겠는가?
진산월이 운중용왕을 향해 선뜻 검을 휘두르지 못한 이유도 마음 한구석에 그녀의 안위에 대한 우려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운중용왕은 줄곧 진산월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하나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어떠한 변화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운중용왕은 한 번 더 찔러보기로 했다.
“그녀의 행방을 알기 위해 나는 무척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마침내 성공할 수 있었지.”
운중용왕은 턱으로 부서진 마차의 잔해를 슬쩍 가리켰다.
“너도 이미 짐작했겠지만 저 마차는 네 사매가 타고 있던 바로 그 여의신거(如意神車)다. 다른 건 위조할 수 있어도 저 마차에 달려 있는 여의천둔렴은 절대로 모방할 수 없는 것이지.”
진산월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운중용왕은 그의 그런 모습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오히려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해할까 봐 미리 밝혀두는데, 여의신거를 저렇게 만든 것은 내 솜씨가 아니다. 나 같으면 저런 귀한 물건은 어떤 식으로든 잘 보존시켜 내 것으로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저런 귀물(貴物)을 파괴해버리다니 정말 무식한 짓이지… 쯧.”
운중용왕은 짐짓 혀를 차더니 한층 무거워진 음성을 내뱉었다.
“그녀의 행방을 알고 싶다면 내게 물건을 넘겨라. 그녀에게는 그리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진산월이 그 말에 눈을 빛내며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는 무사하오?”
“아직까지는. 그녀를 보호하는 자들 중 몇 사람은 실력이 좋은 고수들이어서 당분간은 누구도 그녀를 헤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내일 아침 해가 뜰 때까지는 말이지.”
“아침 해가 뜨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들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인물이 그녀를 찾아갈 것이다.”
“그가 누구요?”
운중용왕의 입가에 떠오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죽지 못해 사는 노독물(老毒物)이지.”
진산월은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선뜻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조금 더 밝혀보시오.”
“네가 나와의 흥정을 승낙하면 그녀를 찾아가게 될 테고, 그러면 그와는 자연스레 만나게 될 테니 그가 누구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흥정이 깨어진다면 그가 누구이든 신경 쓸 게 없지 않겠느냐?”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그는 쾌의당의 인물이오?”
운중용왕은 한차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것도 그를 만나면 알게 될 것이다. 아무튼 나는 오늘 오후에 그 노독물이 이곳에서 백 리쯤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노독물의 성격상 아마도 늦어도 내일 아침이면 그녀가 있는 곳에 도착할 것이다.”
“그가 왜 그녀를 뒤쫓는단 말이오?”
운중용왕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만 내저었다. 궁금하면 직접 알아보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진산월은 그녀의 마차를 습격하고 지금 그녀를 추격하고 있는 무리들이 누구인지 물으려다 포기해버렸다.
운중용왕의 태도로 보아 더 이상의 어떤 대답도 듣기 힘들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진산월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내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이유가 뭐요?”
이번에는 운중용왕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어차피 내 목표는 네가 아니라 천룡궤다. 네가 본 당의 고수들을 죽이고 몇몇 용왕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너와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다. 그러니 힘들게 너와 투닥거리느니 보다 쉬운 방법이 있으면 그걸 따라가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
운중용왕은 차갑게 번뜩이는 눈으로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이제 더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서로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흥정을 수락하겠느냐?”
진산월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는 주저 없이 품속으로 손을 넣어 하나의 상자를 꺼내들었다.
상자는 어른의 주먹보다 조금 컸는데, 아무런 문양도 없이 거무튀튀한 광택을 뿌려내고 있었다.
그 상자를 보는 순간 운중용왕의 두 눈에서는 확연히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날카로운 신광이 뿜어져 나왔다.
심지어는 한쪽에서 말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소조림조차도 얼굴이 살짝 상기된 채 상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재질도 알 수 없는 이 초라한 상자가 무엇이기에 이들이 이토록 관심을 기울이는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은 상자를 손에 든 채 물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이것이오?”
“그걸 두드려 보아라.”
진산월은 왼손으로 상자를 가볍게 두들겼다.
그러자 쇳소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도 아닌 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물속에 잠긴 종이 울리는 듯한 나직한 울림이었다.
운중용왕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불괴신목(不壞神木)으로 만들어진 천룡궤가 확실하군. 그걸 나에게 주면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겠다.”
진산월은 의외로 고개를 내저었다. 뿐만 아니라 들고 있던 천룡궤를 다시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운중용왕의 음성이 처음으로 냉랭하게 굳어졌다.
“그건 무슨 뜻이냐? 설마 내 흥정을 거절하겠다는 것이냐?”
진산월은 특유의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 흥정은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소. 대신에 내가 다른 흥정을 제안하겠소.”
“무슨 흥정을 말이냐?”
“사람과 사람을 교환하는 거요. 사람과 물건을 바꾸자는 당신의 흥정보다는 한결 공정한 것 같지 않소?”
운중용왕은 신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진산월의 얼굴을 쏘아보며 딱딱한 음성을 내뱉었다.
“누구와 누구를 바꾸자는 말이냐?”
“엄밀히 말하면 한 사람의 행방과 한 사람의 목숨이오.”
운중용왕은 코웃음을 쳤다.
“설마 그녀의 행방과 네 목숨을 바꾸겠다는 말이냐?”
“내가 아니라 당신이오.”
그 말에 운중용왕의 전신에서 맹렬한 기세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네가 감히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협박이 아니라 제안이오. 그녀의 행방을 알려주면 당신을 살려주겠소.”
운중용왕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아무 대꾸도 없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진산월을 노려보았다.
진산월은 천천히 용영검을 뽑아들었다.
“당신의 흥정과 내 흥정은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소.”
“…!”
“당신의 흥정은 내게 선택권이 있지만, 내가 제안한 흥정은 당신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는 거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진산월의 신형은 맹렬한 검광을 뿌리며 운중용왕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무도 없는 황량한 벌판은 삽시간에 섬뜩한 검광에 휩싸여 살벌하기 이를 데 없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일단 손을 쓰기 시작하자 진산월의 검은 정말 무서웠다.
운중용왕은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진산월의 검이 밖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욱 가공스럽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파파파팍!
서릿발 같은 검광이 공간을 갈가리 찢어놓을 듯 무서운 기세로 폭풍처럼 사방을 휘몰아쳤다.
그러다 갑자기 검광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운중용왕은 처음의 자리에서 십여 장 쯤 뒤로 물러난 곳에 서 있었는데, 입고 있는 흑포의 옆구리가 찢어져 맨살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더구나 머리에 뒤집어쓴 복면의 일부가 잘라지는 바람에 반백의 머리카락 일부가 어깨 위로 흘러내려 낭패스러운 모습이었다.
그의 손에는 언제 뽑아들었는지 두 자쯤 되어 보이는 철필(鐵筆)이 쥐어져 있었는데, 철필을 든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그의 마음속 격동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진산월은 검을 뽑기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수중에 들려 있는 용영검이 우윳빛 검광을 흘리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표정을 알 수 없는 담담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문득 자신의 왼쪽 소맷자락을 내려다보았다.
소맷자락 한 부분에 깨알 같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이 한 치만 더 위로 올라갔어도 손등을 꿰뚫리고 말았을 것이다.
진산월의 시선이 천천히 운중용왕의 손에 들린 철필로 향했다.
거무튀튀한 철필은 시중의 병기점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을 것처럼 평범해 보였다.
진산월은 그 철필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일전에 강호에 괴이한 기문병기(奇門兵器)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소. 그 중에 호신강기를 두부처럼 뚫고 들어가 사람의 몸에 피구멍을 내는 병기가 있는데, 혈공필(血孔筆)이라고도 하고 줄여서 혈필(血筆)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더군.”
운중용왕은 이내 냉정을 되찾았는지 손에 든 철필을 장난처럼 가볍게 흔들었다.
“안목이 놀랍군. 이게 바로 혈필이다.”
운중용왕의 손에 들린 혈필은 처음에는 가볍게 흔들리더니 점차로 움직임이 커져서 이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그의 손안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금시라도 그의 손을 뛰쳐나와 허공을 날아오를 것 같은 혈필의 움직임은 운중용왕의 기(氣)에 대한 운용이 가히 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있음을 생생하게 나타내는 것이었다.
“너는 번번이 내 예상을 깨는구나. 네가 내 제안을 거절한 것은 확실히 뜻밖이다. 네 검 또한 생각보다 날카로웠다. 하지만 내 손에서 병기를 꺼내게 했으니 너는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음성이 미처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의 몸은 어느 새 진산월의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와 함께 그의 손에서 움직이고 있던 혈필이 한 가닥 광선처럼 진산월의 목덜미를 향해 쏘아져 왔다.
진산월은 피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용영검을 앞으로 찔렀다.
땅!
귀청이 떨어질 듯한 마찰음과 함께 운중용왕의 혈필과 용영검이 허공에서 맹렬하게 맞부딪쳤다.
용영검을 든 진산월의 손끝이 짜릿하게 저려왔다.
그때 용영검과 부딪친 혈필의 뾰족한 끝부분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날카로운 쇠침이 튀어나왔다.
쇠침은 거의 알아차릴 수도 없을 만큼 순식간에 진산월의 미간으로 쇄도해 들어왔다.
진산월은 간신히 머리를 옆으로 비틀어 쇠침을 피했으나 그 바람에 목덜미를 찔러오는 혈필의 공세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렸다.
진산월이 용영검으로 혈필을 막으려 할 때 이번에는 운중용왕의 왼손 소맷자락이 살짝 흔들리더니 무언가 시커먼 것이 튀어나와 진산월의 아랫배를 찔러왔다.
그때 진산월은 막 용영검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찔러오는 혈필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그 암습을 피하거나 막을 길이 보이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순간, 진산월의 신형이 한차례 흔들리며 앞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
양어깨는 가만히 있는데 몸통 자체만 흔들리더니 운중용왕의 공세에서 벗어나 오히려 공격을 펼치기 좋은 위치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운중용왕의 눈이 크게 뜨여지는 순간, 어느새 진산월의 용영검이 그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운중용왕은 방금 전의 일이 믿어지지 않는지 한동안 두 눈에 괴이한 빛을 이글거리며 진산월을 쏘아보았다.
운중용왕이 조금 전에 사용한 수법은 이신수미(二神須彌)라는 것으로, 무형사(無型絲)와 혈필을 이용해서 순식간에 상대를 제압하는 최절정의 상승무학이었다.
그런데도 진산월은 가벼운 동작만으로 이신수미를 피하고 오히려 자신을 제압해버렸으니 운중용왕은 놀라움을 넘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방근 네가 펼친 보법이 무엇이냐?”
한참 후에야 운중용왕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으나 진산월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진산월이 다급한 상황에서 펼친 것은 철혈홍안이 알려준 열두 걸음의 동작 중 하나였다.
그로서도 이름을 모르고 있으니 알려주고 싶어도 알려줄 수가 없는 상태였다.
다만, 진산월은 철혈홍안의 그 보법이 당초의 예상보다 훨씬 더 신묘한 것임을 다시 한 번 절실하게 느꼈을 뿐이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오. 당신은 패했고, 이제 다른 선택의 길은 남아있지 않다는 거요.”
진산월이 조용한 음성으로 마하자 복면 밖으로 내배치는 운중용왕의 눈빛이 한차례 크게 흔들렸다.
자신이 진산월의 손에 제압당했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한 듯한 모습이었다.
운중용왕의 목덜미에 닿아있는 용영검에서 점차 삼엄한 검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묻겠소. 흥정을 수락하겠소?”
운중용왕은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더니 짤막한 음성을 내뱉었다.
“이곳에서 이십 리 북쪽의 영하(嶺河) 강변 부근에 있는 야산이다.”
“너무 막연한 말이로군.”
“내가 한 시진 전에 받은 보고로는 그녀는 분명 그곳에 있었다.”
“지금은 그곳에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로군.”
“그거야 네가 확인해봐야 할 일이겠지.”
그 말을 듣자 진산월은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한시라도 빨리 그 곳에 가지 않으면 그나마 알게 된 그녀의 행방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들었던 것이다.
“흥정은 성립되었소. 다음에는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거요.”
운중용왕의 목을 억압하고 있던 용영검이 어느 새 스르르 사라지며 진산월의 신형이 허공을 날아가기 시작했다.
운중용왕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는 진산월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산월의 훤칠한 신형은 순식간에 짙은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운중용왕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종남파에 그와 같은 보법이 있었던가? 소림의 금강부동보(金剛不動步)보다 더 현묘하고, 무당의 세류표(細柳慓)보다 더 은밀해 보이니…. 어쨌든 예상한 대로 일이 흘러가기는 했지만 너무 맥없이 당하니 기분이 묘하군.”
운중용왕이 용영검이 닿아 있던 자신의 목덜미를 주무르고 있을 때 지금까지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소조림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운중용왕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진산월에게 맥없이 제압당하는 낭패스러운 상황을 맞았으면서도 그런 사실을 전혀 개의치 않는지 태도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신검무적의 검이 절세의 검이라고 하더니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살짝 닿았을 뿐인데도 기이한 한기가 몸으로 침입해 아직도 얼얼하구나.”
오히려 엄살을 떠는 듯한 그의 모습에 소조림은 순간적으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운중용왕은 결코 도량이 넓거나 마음이 호활(浩闊)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구나. 그는 신검무적에게 패한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구나. 혹시…….’
그녀는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으나 자신의 입으로는 대놓고 물어볼 수가 없는 것이어서 슬쩍 다른 일을 먼저 거론했다.
“신검무적이 저렇게 쉽게 물러날 줄은 몰랐네요. 풍도를 죽일 때만해도 한바탕 혈겁이라도 저지를 것 같더니 이상하군요.”
“냉철한 심기에 결단력까지 갖추었으니 정말 상대하기 만만치 않은 녀석이다.”
운중용왕이 진산월의 무공 대신 다른 부분을 칭찬하자 소조림은 다시금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다.
운중용왕은 쾌의당의 칠대용왕 중에서 정확한 신분이 드러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소조림조차도 그가 강호를 막후에서 좌지우지하는 거물 중 하나일 거라는 심증만 있을뿐 그의 정확한 정체는 모르는 상태였다.
그동안 소조림이 지켜본 바로는 운중용왕은 치밀한 두뇌와 절대적인 능력의 소유자였고,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자신을 꺾은 상대에 대한 칭찬이 나오니 소조림으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조림이 계속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운중용왕이 힐끗 쳐다보더니 묵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그가 왜 나를 제압하고도 순순히 놓아주고 그렇게 급하게 돌아갔는지 아느냐?”
“신검무적은 일파의 장문인이니 그의 신분으로 자신이 입 밖에 내뱉은 말을 어길 수는 없었겠지요.”
“흐흐….. 순진한 말을 하는군. 분명 진검무적은 거래 조건으로 나를 살려주겠다고 했지. 그렇다면 내 목숨을 놓아주더라도 무공을 봉쇄하거나 팔다리를 불구로 만들 수도 있었다. 자신의 말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나를 억제할 방법은 무궁무진하단 말이지. 그런데도 신검무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듣고보니 정말 그렇군요. 신검무적은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요?”
운중용왕의 안광이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게 번뜩였다.
“둘 중에 하나겠지. 나 정도는 언제든지 다시 제압할 자신이 있든지….”
“설마 그럴 리가요?”
소조림은 운중용왕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으나 운중용왕은 전혀 웃지 않고 냉정한 음성을 내뱉었다.
“아니면 내가 멀쩡한 것이 자신에게 더 이롭다고 생각했든지….”
그 말에 소조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신검무적이 용왕님을 적으로 보지 않았단 말인가요?”
“내가 노리는 것이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물건임을 알았으니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굳이 원한을 맺을 필요는 없다고 했겠지/”
소조림은 그의 말이 선뜻 믿어지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굳이 부인하지도 않았다.
운중용왕이 자신의 속마음을 쉽사리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용왕께서도 굳이 그녀의 행방을 숨기지 않고 선선히 알려주신 것이로군요.”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돌려 말하자 운중용왕은 냉소를 터뜨렸다.
“너는 내가 임영옥의 행방을 너무 쉽게 발설했다고 생각하느냐?”
“용왕께 무언가 깊은 심려(深慮)가 있는 건 알겠는데 그 자세한 내막은 전혀 짐작도 가지 않는군요.”
“너는 영리한 여자아이다. 잔꾀도 많고 임기응변도 뛰어나지. 하지만 아직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데 미흡함이 보이는구나.”
운중용왕의 말에 소조림은 몸을 움찔거리더니 이내 어색하게 웃었다.
“저를 칭찬해주시는 건 고마운데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네요.”
“화중용왕이 이번 일을 나에게 맡겼지만, 지금도 너와 수시로 연락을 취하면서 이번 일에 뛰어들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준비한 수가 무엇인지도 이미 짐작하고 있을 텐데 시치미를 떼다니 너답지 않은 어리석은 모습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소조림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어색한 미소가 그래도 굳어졌다. 그녀는 억지로 웃으려고 했으나 혹포 사이로 번뜩이는 운중용왕의 차가운 눈을 보자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내 앞에서 잔꾀를 부리려 하지 마라. 나는 여인을 존중해주는 사람이지만, 내 눈에 네가 여자가 아닌 잔머리를 굴리는 모략가라고 보여진다면 너에게 결코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소조림은 한차레 전신을 가늘게 떨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조아렸다.
“사과드리겠어요. 용왕님을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단지 제가 용왕님의 수를 알고 있다는 걸 들키기 싫었을 뿐이에요.”
운중용왕은 나직학 웃었다.
“흐흐….. 너는 정말 네가 내 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소조림의 얼굴에 한 줄기 당혹감이 스쳤다.
“신검무적이 독에 강한 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독공의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신검무적을 함정에 끌어들이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잘못 알았나요?”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됐다.”
운중용왕이 시인도 부인도 아닌 이상한 대답을 하고 입을 다물자 소조림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비록 두뇌가 뛰어나고 영특하여 화중용왕의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강호에서 평생 동안 숱한 음모와 계략의 소용돌이를 헤쳐 온 운중용왕의 심모(深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운중용왕은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전에 약조한 대로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내 몫이다. 네 사부에게 정히 끼어들고 싶으면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다고 전해라.”
소조림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대가라면……”
“예전에 네 사부가 산서철혈문을 초토화시켰을 때 산서철혈문에서 가지고 나온 게 있다.”
소조림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철혈무해(鐵血武解)…….”
운중용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아쉬운 대로 내가 수용할 수 있지.”
“하지만 철혈무해는…….”
“선택은 어디까지나 네 사부의 몫이다. 너는 가서 그 말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운중용왕의 칼을 자르듯 단호한 말에 소조림은 무거운 음성을 토해낼 수 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번 일은 늦어도 내일 안에 결판이 난다. 그러니 서두르지 않으면 네 사부는 선택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운중용왕의 신형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떠나갔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신묘한 몸놀림이었다. 소조림은 허깨비처럼 없어져버린 그의 모습을 찾을 생각도 없이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 하는군. 이번 일에도 도중용왕(刀中龍王)의 부하들과 당주의 제자만 허비하고 자기의 수족들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어. 사부님께서 왜 그를 그토록 싫어하는지 알 것고 같구나.”
그녀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자신도 이내 몸을 날려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