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2권 용왕대전(龍王大戰)편 : 2화
제 220장 천면묘객(千面妙客)
어둠에 싸인 서안의 뒷골목은 인적이 끊긴 지 오래였다.
달도 뜨지 않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치달려가는 하나의 인영이 있었다. 인영의 몸놀림은 표효하면서도 은밀했고, 속도 또한 빨라서 어지간한 시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눈을 크게 뜨고 유심히 보지 않는 한 인영의 모습을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인영은 검은색 장포를 걸친 삼십 대의 중년인이었는데, 가끔씩 내비치는 눈빛이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인영은 뒷골목의 지리에 익숙한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복잡한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 하나의 장원으로 다가갔다.
장원은 골목의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현판도 없었고 담벼락의 군데군데가 금이 가거나 부서져 있어 퇴락해 보였으나 규모 자체는 제법 큰 편이었다. 흑포인은 굳게 닫힌 장문의 대문으로 다가가더니 일정한 박자를 맞춰 대문을 몇 차례 두드렸다.
그러자 장원 안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누구요?”
“종 형(宗兄). 나요.”
곧이어 대문이 살짝 열리자 흑포인은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고는 열려진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 뒤에는 짙은 청색 무복을 입은 삼십 대 중반의 인물이 대기하고 있다가 흑포인이 들어오자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주시했다.
“이 시간에 이곳에는 무슨 일이요? 가급적이면 이곳에 오지 말라고 했지 않소?”
“미안하오. 사정이 워낙 긴박해서 어쩔 수 없었소.”
“긴박한 사정이란 게 뭐요?”
“오늘 임철형(任鐵炯)과 장대봉(章大奉)이 모두 철면호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갔소.”
청의인의 눈살이 살짝 찡그려졌다.
“둘 모두 말이오?”
“그렇소. 임철형은 오늘 새벽에 동생 집에서 습격당했고, 장대봉은 은밀히 사귀고 있던 여자의 집에 피신해 있었는데도 조금 전에 끌려가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보았소.”
“아니, 어쩌다가…….”
청의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차자 흑포인은 초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무래도 노가 놈이 우리의 비선(秘線)을 알아낸 것 같소. 더 지체하다가는 나에게까지 손이 미칠지 몰라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소.”
청의인의 얼굴도 심각하게 굳어졌다. 임철형은 몰라도 장대봉은 눈치가 비상하고 조심성이 많은 인물이어서 종적이 드러나 상대에게 잡혔다는 게 선뜻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둘 중 이곳의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흑포인은 청의인을 바라보며 조심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그런데 유 대인(劉大人)은 안에 계시오?”
“잠시만 기다리시오.”
청의인은 열려진 대문을 닫기 위해 몸을 돌렸다.
장원은 대문 밖에서 본 것과는 달리 제법 깨끗했고 손질도 잘되어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잘 가꾸어진 정원과 먼지 한 톨 없는 바닥을 보건대 사람의 손길이 구석구석까지 세심하게 닿아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제법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작은 월동문을 지나자 한 채의 전각이 나타났다. 전각 앞에는 호위무사인 듯한 네 명의 사내들이 서 있었으나, 전각 안으로 들어가는 청의인과 흑포인을 제지하지 않았다.
전각 안으로 들어서니 커다란 팔선탁이 놓인 널따란 대청이 나왔다. 팔선탁 주위에 몇 명의 인물들이 앉아 있다가 안으로 들어서는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가장 중앙에 있는 인물은 흰색 유삼을 걸친 준수한 용모의 사십 대 중년인이었고, 그 옆으로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미모의 궁장 여인과 얼굴이 길쭉하고 눈빛이 차가운 황삼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청의인이 재빨리 흰색 유삼의 중년인에게 다가가 무어라고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흰색 유삼의 중년인은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조용한 시선으로 흑포인을 쳐다보았다.
흑포인은 무심결에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움찔하여 고개를 숙였다.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흰색 유삼의 중년인은 빙그레 웃었다.
“아닐세. 오히려 사태가 그렇게 급박하게 진행되었는데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곳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내고 있었느니 내 불찰이 크네.”
“아닙니다. 대인.”
“오늘 노해광에게 끌려간 자들은 모두 자네와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왔던 자들이지?”
“그렇습니다.”
“가슴이 아프겠군.”
흑포인은 무어라 할 말이 없는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흰색 유삼의 중년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의 모친께선 안녕하신가?”
“사실은 그 때문에 급히 대인을 뵈려고 한 겁니다.”
“자당(慈堂)께 무슨 변고라도 생겼나?”
“그게 아니라, 어머님께서 아무래도 아버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자네의 부친은 자네 문파의 일로 지금 안휘성(安徽省) 쪽에 계시는 걸로 아는데…..”
“어머님은 사조님께 부탁을 해서라도 아버님을 이쪽으로 모셔오셨으면 하십니다.”
흰색 유삼의 중년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집안의 일이니 자네가 알아서 하는 게 좋겠지.”
“그래서 사조님을 급히 뵈어야 할 듯싶습니다. 그런데 사조님의 행방은 대인밖에 모르는지라….”
흰색 유삼의 중년인은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방립. 자네가 나와 함께 일한 지 얼마나 되었나?”
흑포인, 방립은 잠시 생각하더니 신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 년쯤 됩니다.”
“짧지 않은 기간이군.”
“그렇습니다.”
“그런데 나는 왜 자네가 낯설게 느껴지지?”
뜻밖의 말에 방립은 움찔하여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제가 아직 대인의 신임을 얻기에 미흡했나 봅니다.”
“아닐세. 자네 가문은 정말 충심으로 나를 도왔네.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늘 마음속으로 고마워하고 있지.”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흰색 유삼의 중년인의 입가에 의미를 알기 힘든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동안 나를 위해 전력을 기울여왔던 자네가 오늘은 낯선 타인처럼 느껴져서 말이지. 정말 이상한 일 아닌가? 지난 이 년 동안 그처럼 믿음직하고 충실했던 자네가 왠지 서먹해 보인단 말일세.”
방립은 대꾸할 말이 없는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흰색 유삼의 중년인은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앉아 있는 궁장여인을 돌아보았다.
“제 말이 틀린 것 같습니까?”
궁장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나에게도 저자는 무척 낯설어 보이는군.”
그녀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이상하게도 방립은 그녀의 음성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분하면서도 매혹적인 음성이었으나 무언지 모를 한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방립이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흰색 유삼의 중년인과 궁장여인은 계속 말을 주고받았다.
“제가 엉뚱한 생각을 한 건 아니군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겉으로는 전혀 이상한 점을 발견해 낼 수 없으니 제 눈이 잘못된 것인가요?”
“그렇지 않네. 나도 분간할 수 없었으니 말일세.”
“그렇다면 제 눈이 특별히 잘못된 것도 아니었군요.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궁장여인의 나이는 아무리 보아도 이십 대 중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흰색 유삼의 중년인은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궁장여인을 대하는 태도가 몹시 정중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강호에서는 종종 남을 놀라게 하는 재주를 지닌 자들이 나타나고는 하지.”
“그 말씀을 듣고 보니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군요.”
“그가 누구인가?”
“요즘 서안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정보통이라는 철면호의 수족 중에는 아주 기이한 재주를 지닌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을 삼묘(三妙)라고 부르는데, 그중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똑같이 모방할 뿐 아니라 변장에 능하고 관찰력이 뛰어나서 화신술(化身術)의 대가라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나도 얼핏 그런 소문을 들었던 것 같군. 천 가지 얼굴로 바꿀 수 있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천면묘객(千面妙客)이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요.”
“그런 재주를 지닌 자라면 만나보고 싶군.”
흰색 유삼의 중년인은 빙그레 웃었다.
“곧 만나게 되실 겁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방립에게로 향했다. 방립은 그때까지도 한쪽에 우두커니 선 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흰색 유삼의 중년인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나?”
방립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다 알면서 굳이 그렇게 물어보는 심보는 뭐요? 유화상단에서 유현상(劉玄翔)의 두뇌가 가장 비상하지만, 사람을 골탕 먹이기 좋아하고 술수에 능해서 독심낭군(毒心郎君)이라고 불린다고 하더니 틀린 말은 아니었구려.”
지금까지 흰색 유삼의 중년인을 대하던 방립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흰색 유삼의 중년인은 유화상단의 주인인 유방현의 큰아들로, 유현상이라는 인물이었다.
유방현이 나이를 먹어 거의 반 은퇴 상태인지라 현재 유화상단은 유현상이 실제로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과는 달리 심계가 깊고 냉혹한 성격이어서 그를 아는 사람 중에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방립의 날카로운 말에도 유현상은 여전히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은 채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럼 자네는 자신이 천면묘객 하응(夏鷹)임을 순순히 인정한단 말인가?”
“그렇소. 내가 바로 하응이오.”
막상 방립이 선선히 시인을 하자 유현상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정말 대단한 실력이군. 진실을 알고 나서도 전혀 분간이 안 되니 천면묘객이라는 외호가 이제야 실감이 나는군 그래.”
하응은 고소를 머금었다.
“나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묘객이라는 이름에 자신이 없어졌소.”
“우리가 너무 쉽게 자네의 변장을 알아차려서 말인가?”
“그렇소.”
“자네는 실망할 필요 없네. 자네의 변장 자체는 완벽했네. 방금 전에도 듣지 않았나? 우리는 자네의 외형에서 아무런 문제점도 찾을 수 없었네. 단지 자네의 실수는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이지.”
유현상의 말에 하응의 시선이 절로 궁장여인에게로 향했다. 궁장여인은 처음의 자세 그대로 단정하게 앉아 있었으나 그녀를 쳐다보는 하응의 얼굴 표정은 진지하게 굳어 있었다.
유현상이 공대를 하는 장면을 본 이상 하응이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녕 상상도 못했소. 당대의 여고수들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광동원앙문의 문주인 쌍비경혼(雙飛驚魂) 천희방이 설마 이토록 젊은 여인의 모습일 줄은……”
하응의 놀라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천희방은 이미 오래전부터 강호무림에서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여고수였다.
하응이 기억하기로도 자신이 강호에 출도했을 때 이미 그녀의 명성은 무림을 진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강남의 유수한 명문인 광동원앙문의 당대 문주일 뿐만 아니라 방립의 어머니인 임유화의 사부였다.
얼핏 계산해 보아도 그녀의 나이는 적어도 육십을 훨씬 넘은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겉으로 드러난 그녀의 모습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삼십이 넘지 않아 보였으니, 아무리 눈치가 빠르고 관찰력이 뛰어난 하응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눈앞에 있는 미모의 궁장여인이 천희방 본인이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껏 천희방의 사손(師孫)인 방립으로 분장해놓고는 천희방을 앞에 두고도 유현상에게 그녀의 행방을 물었으니 그의 정체가 드러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응이 방립으로 변장을 하면서까지 이곳에 단신으로 침입한 이유는 바로 천희방이 서안에 직접 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그만큼 천희방이 부담스러운 존재라는 뜻이기도 했다.
이제 하응은 천희방의 행방을 알았을 뿐 아니라 그녀를 직접 마주하게 되었다.
하응으로서는 맡겨진 임무를 완수한 격이 되었으나 그의 얼굴 표정은 오히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을 이곳까지 안내했던 청의인이 살기등등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청의인은 유현상의 오래된 측근으로, 혈수표(血手彪) 종효(宗曉)라는 인물이었다.
사실 하응의 변장술은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뛰어나지만 무공은 그리 강한 편이 못 되었다.
하응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보고는 장내에서 그나마 자기가 덤벼볼 수 있는 사람이 유현상뿐임을 깨달았다.
하나 그가 유현상에게로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천희방의 나직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자극하는 그윽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 같으면 허튼 수작을 부리다 팔병신이 되느니 순순히 잡히는 쪽을 택할 텐데, 묘객이라 불리는 너는 생각이 다르겠지?”
하응은 움찔하여 천희방을 슬쩍 돌아보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천희방의 고운 손에 아이들 장난감 같은 작은 손도끼가 쥐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한 뼘 남짓 되는 작은 손도끼는 손잡이 부근에 홀실 매듭까지 묶여 있어서 앙증맞아 보이기조차 했다.
하나 그 손도끼야말로 천희방을 누구나가 두려워 마지않는 강호의 절정고수로 만들어준 비천원앙월(飛天鴛鴦鉞)이었다.
대부분의 원앙월이 두 개의 월아(鉞牙)로 이루어진 데 비해, 그녀의 손에 들린 원앙월은 일반적인 도끼 모양에 양쪽으로 날이 있고 그 가운데에 여인의 섬섬옥수로 간신히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짧은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전체적인 크기에 비해 도끼의 날이 무척 큰 편이어서 손잡이를 잡고 있으면 도끼의 양날이 손등을 거의 뒤덮을 정도였다.
알려지기로는 이 원앙월은 원래 청홍(靑紅) 수실의 한 쌍이 있었는데, 젊은 시절에 천희방이 자신의 정인(情人)에게 청실 원앙월을 정표로 주고 홍실 원앙월을 자신의 신물(信物)로 삼았다고 한다.
일단 그녀의 손에서 비천원앙월이 발출되면 핏빛 선혈이 뿌려지며 누군가의 목숨이 사라진다고 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비천원앙월의 붉은색 수실이 사람의 피로 물들여진 것이라고 떠들기도 했다.
그 유명한 무기가 천희방의 손에 쥐어져 있는 걸 본 하응으로서는 감히 허튼수작을 부릴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다.
하응이 대항하는 것을 포기하자 그제야 유현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왔다.
“자네가 이곳에 온 것을 보니 방립과 그의 모친은 이미 자네들 수중에 넘어갔겠군.”
“그렇소.”
유현상은 한숨 섞인 탄성을 토해냈다.
“허,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 내가 알기로는 철면호가 서안에 온 것은 불과 삼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어찌 서안의 암흑가를 이토록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었을까?”
하응이 움찔하여 무어라고 말하려 하자 유현상은 고개를 내저었다.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네. 방립은 몰라도 그의 모친인 임유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안의 뒷골목에 나름대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네. 그런데 철면호와 자네 조직은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그녀의 수족을 몽땅 잘라내고 그녀를 제거한 것일세. 서안의 암흑가를 자신의 손바닥 보듯 환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지.”
하응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유현상은 하응이 듣든 말든 혼잣말처럼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쯤이면 이번 일의 배후에 내가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겠군. 손노태야를 직접 상대하는 게 껄끄러워서 철면호를 찔렀더니 이런 낭패를 당하게 되다니… 늑대를 피하려다 범을 만난 격이 된 셈인가?”
손노태야였다면 설사 임유화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할지라도 그녀와 그녀의 수하들을 이토록 빠른 시간 내에 모조리 제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임유화와 방립. 그리고 그들의 수하인 임철형과 장대봉은 결코 만만한 실력의 소유자들이 아니었다.
특히 임유화는 천희방의 수제자로서, 비록 여자의 몸이라고 해도 능히 강호의 일류 고수로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노해광은 임유화의 정체를 파악하자마자 전광석화와도 같은 기세로 그들을 모두 사로잡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수하를 방립으로 위장시켜 이곳에까지 침투시켰으니 그 방식의 대담함과 일을 추진하는 능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현상은 하응을 앞에 두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대청 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방안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유현상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하나 그의 이런 모습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거푸 들려왔던 것이다.
유현상은 별로 당황하거나 놀라지도 않고 담담한 음성을 내뱉었다.
“철면호는 생각보다 성격이 급한 사람이로군. 하응이 들어온 지 이제 겨우 일각(日刻)밖에 안 되었는데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쳐들어오다니……”
유현상의 말마따나 노해광은 하응에게서 아무런 신호가 없자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직접 수하들을 이끌고 이곳을 습격한 모양이었다.
지금도 밖에서는 욕설과 비명 소리, 병장기의 마찰음 소리가 거푸 들려왔으나, 장내의 누구도 다급해하거나 불안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유현상은 물론이고 천희방과 그녀의 옆에 앉아 있는 황삼인 또한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것을 본 하응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들이 이런 순간에도 침착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자신들의 실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천희방이 비록 광동원앙문의 고수로 자타가 공인하는 강호무림의 절정고수라 해도 노해광이 그녀의 존재를 안 이상 그녀에 대한 대비책도 없이 쳐들어왔을 리는 없었다.
노해광은 언뜻 보기에는 호쾌한 것 같아도 사실은 몹시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이어서 그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습격해왔다는 것은 이미 어떤 일이 벌어져도 감당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응은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유현상의 태연자약한 모습에 무언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들어왔다.
그러다 무심결에 그의 시선이 지금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천희방의 옆자리에 병풍처럼 앉아 있는 황삼인을 향했다.
‘혹시 저자를 믿고 있는 건가?’
하응은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언뜻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황삼인은 눈빛이 차갑고 예리해서 만만치 않은 실력의 소유자 같기는 했으나 천희방보다 뛰어난 고수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응이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져 있을 때 유현상이 그를 보더니 빙긋 웃으며 뜻밖의 말을 던졌다.
“자네 말고 삼묘 중 한 사람은 상당한 미녀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하응은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왜 유현상이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몰라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우리 중에 이쁜 여자가 한 명 있기는 하오.”
“얼굴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남자를 유혹하는 솜씨도 탁월해서 그녀가 마음먹으면 넘어가지 않는 남자가 없다고 하던데 그 말도 사실인가?”
“내가 알기로 그녀가 유혹해서 넘어가지 않은 남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소.”
“그게 누군가?”
“대형(大兄)이시오.”
유현상은 짐짓 눈을 크게 떴다.
“철면호 노해광 말인가? 소문으로는 그는 무척 풍류를 즐기는 인물이라고 하던데…..”
“물론 대형께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풍류남아이긴 하지만, 절제를 아는 분이오. 그녀는 세 번이나 대형을 유혹하려다 실패하고는 대형에게 심복(心服)하게 되었다고 하오.”
“오! 그 말을 들으니 더욱 철면호를 만나고 싶어지는군.”
그때 한 사람이 껄껄 웃으며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하하…… 하는 그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낯부끄럽게도 너무 치켜세워 주는구려.”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당당한 걸음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노해광이었다.
그의 뒤에는 서너 명의 인물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이 나타남과 동시에 밖에서 들려오던 소란스러운 소리가 급속도로 사그라들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그것은 노해광의 세력이 주변을 완전히 장악했음을 나타내는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유현상은 노해광의 뜻밖의 등장에도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시오. 초면이지만 요새 하도 당신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왠지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 같구려.”
노해광 또한 안면이 일그러지도록 활짝 웃으며 그에게 포권을 했다.
“하하…. 나 또한 서안에 왔을 때부터 귀하의 명성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서 늘 만나고 싶었소. 오늘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소.”
두 사람은 마치 오래된 지인(知人)을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그들이 서로를 제거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부리는 대적(大敵)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죽마고우라도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노해광이야 철면호라는 외호처럼 넉살이 좋고 대인 관계가 능수능란한 인물이었지만, 독심낭군이라 불릴 정도로 성격이 차갑다고 소문난 유현상이 노해광을 대하는 모습은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노 형이 짧은 시간에 서안에서 완벽하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을 늦게나마 축하드리오.
일전에 큰 포목점을 내셨다고 들었는데 개업식에 가지 못한 것을 사과드리오.”
“별말씀을. 그저 데리고 있는 사람들 입에 풀칠이라도 하게 하려고 뒷골목에 작은 가게 하나를 냈을 뿐이오. 솔직히 개업식에 모시려고 유화상단에 초청장을 보냈는데 아무도 오시지 않아서 조금 서운했었소.”
“하하…. 그때는 본가에 좋지 않은 일이 있어 초청에 응할 겨를이 없었소. 그런데 만화원이 작은 뒷골목 가게라니 겸손이 지나치구려. 내가 듣기로는 벌써 취급하는 물량이 서안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큰 상회가 되었다고 하던데, 짧은 시간에 그토록 빨리 성장한 비결이 무엇인지 노 형을 만나면 늘 한번 묻고 싶었소.”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오. 그나마도 얼마 전에 창고에 도둑이 들어 제대로 시작도 해보기 전에 거덜나게 생겨서 걱정이오.”
유현상은 나직이 혀를 찼다.
“허, 그런 일이 있었구려. 범인은 잡으셨소?”
“잔챙이 몇 마리는 잡았는데, 물건은 이미 처분해버렸는지 찾을 수 없었소.”
“쯧, 손해가 막심했겠구려.”
노해광은 히죽 웃었다.
“다행히 그들을 부린 몸통의 행방을 알았으니 그 손해는 몇 배로 되돌려 받을 생각이오.”
유현상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어느새 차갑게 변해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오. 몸통을 잡아내기만 하면 그 정도 손해쯤이야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으니 말이오.”
“정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물론이오. 상대가 누구든 그건 변함이 없소.”
단호한 노해광의 말에 유현상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어느새 씻은 듯이 사라졌다.
“철면호는 신중한 성격이라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소문이 잘못된 거요, 아니면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거요?”
노해광은 빙글거리며 유현상의 두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한번 확인해보시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치며 장내에 아연 긴장감이 감돌았다. 종효가 유현상의 뒤에 바짝 다가섰고, 노해광의 부하들 또한 금시라도 덤벼들 듯 전신에 기세를 일으켰다.
그때 지금까지 의자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던 천희방이 천천히 붉은 입술을 떼었다.
“내 아이들은 자네가 데리고 있나?”
노해광은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선배님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귀파의 제자들은 안전한 곳에 잘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십 대 중반의 노해광이 이십 대로 보이는 미모의 여인에게 존대를 하는 것은 왠지 어색해 보였다.
하나 두 사람의 나이와 배분을 따져 본다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천희방은 노해광보다 적어도 스무 살은 더 나이를 먹었고, 노해광의 사숙인 천풍개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전대 고수였다.
“그 아이들은 놓아주게. 자네의 목표는 내가 아닌가?”
노해광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지만 아쉽게도 선배님의 말씀을 따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천희방의 고요한 눈빛이 점차로 싸늘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 아이들을 잡고 있으면 나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을 것 같은가?”
“천만에요. 아무리 제 얼굴이 두꺼워도 그런 후안무치한 생각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선배님께서 잘못 아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노해광은 여전히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목표는 애초부터 선배님이 아니었다는 거지요. 다시 말씀드려서 선배님이 어떤 생각을 하시든 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천희방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광망이 흘러나왔다.
“네가 감히…..”
그 순간, 노해광의 뒤에 조용히 서 있던 두 명의 장한이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오며 그녀를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그것은 낚시바늘이 잔뜩 달린 쇠그물이었는데, 펼쳐지는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무언가가 눈앞에 희끗거린다고 느낀 순간 이미 쇠그물은 그녀와 그녀의 주위를 온통 에워싸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꼼짝없이 쇠그물에 휘감겨버리려 할 때 지금까지 그녀의 옆에 묵묵히 앉아 있던 황삼인이 갑자기 바닥을 구르며 양손을 휘둘렀다.
파팡!!
압축된 공기가 폭발하는 듯한 음향이 연거푸 터져 나오며 세찬 경력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그러자 황삼인이 펼쳐낸 강력한 장력에 장통으로 격중된 쇠그물이 한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때까지도 미동도 않고 앉아 있던 천희방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섬에 따라 그녀의 손에 들린 원앙월이 차가운 한광을 뿌리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데 막 노해광을 향해 원앙월을 발출하려던 천희방이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
뿐만 아니라 금시라도 앞으로 달려들 듯하던 황삼인 또한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두 사람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어느 한 곳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들이 바라보는 사람은 유현상이었다. 유현상은 조금 전과는 달리 낯빛이 조금 창백해져 있었는데, 서 있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안력이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이러한 모습이 마혈(痲穴)을 제압당한 전형적인 증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천희방의 시선이 창백하게 굳어 있는 유현상을 지나 그의 뒤에 바짝 다가서 있는 종효를 향했다.
종효는 유현상을 보호하려는 듯 그의 등 뒤에 가까이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살짝 내뻗은 오른손이 유현상의 뒤쪽 목덜미를 지그시 누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곳은 천주혈(天柱穴)이 위치해 있는 자리여서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고, 세게 누르면 혼절하거나 사망에까지 이르게 되는 치명적인 부위였다.
놀랍게도 유현상의 가장 오래된 측근이며 믿을 수 있는 부하인 종효가 결정적인 순간에 유현상을 제압해 버린 것이었다.
천희방은 한동안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종효를 응시하더니 무언가를 느낀 듯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너는…….. 종효가 아니구나.”
종효는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종효는 특이한 열양공(熱陽功)을 익혀서 눈동자에 붉은색 반점이 있다. 그런데 너는 그렇지 않으니 당연한 일 아니냐?”
종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요? 전혀 몰랐던 사실이군요.”
천희방은 종효의 능청스러운 모습에 눈빛이 싸늘해졌다.
“너는 누구냐?”
종효는 유현상의 혈도를 제압한 다음 어깨를 으쓱거리며 오히려 되물었다.
“내가 누구일 것 같습니까?”
“흥, 네가 치졸한 수를 부려 그를 제압했다고 위세를 떠는구나. 네 겉모습과 음성이 종효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흡사한 걸 보니 필시 화신술의 고수겠구나. 유현상과 내가 깜빡 속을 정도로 정교한 화신술의 소유자라면…..”
천희방의 안색이 야릇하게 변했다.
“철면호의 수하 중에 그런 자는 한 명밖에 없을 텐데….”
종효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가 누구입니까?”
“천면묘객…..”
종효가 턱으로 한쪽에 서 있는 하응을 가리켰다.
“천면묘객은 저 자가 아닙니까?”
천희방은 잠시 혼란스러운 듯 몇 차례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성난 표정이 되었다.
“이제 보니 네놈이 바로 진짜 천면묘객이로구나!”
“내가 진짜 천면묘객이라면 저 자는 누구란 말입니까?”
천희방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분노를 참기 어려운 듯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는 바로 방립 본인이다. 그러면서 천면묘객이 변장한 것처럼 행세했던 것이다.”
종효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하하…. 과연 대단한 안목이십니다.”
하응, 아니 방립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멀거니 서서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천희방은 방립의 그 모습을 보고 분기탱천하여 소리쳤다.
“네놈들이 무슨 수를 써서 방립의 이지(理智)를 흔들어 멀쩡한 아이를 저런 꼴로 만들어놓았는지 모르겠구나. 그렇지….. 삼묘 중에 미혼술(迷魂術)의 고수가 있다고 하던데, 그놈의 수작이로구나!”
노해광의 뒤에 서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이 몸을 부르셨소?”
천희방의 성난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비쩍 마른 얼굴에 하관이 유난히 긴 말상의 중노인이었다. 눈빛이 탁하고 흐려서 그냥 보고 지나가면 제대로 인상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볼품없고 평범한 모습이었다. 하나 그를 보는 천희방의 눈빛은 불구대천지 원수를 만난 것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네가 바로 삼묘 중의 우두머리라는 섭혼묘군(攝魂妙君) 가휘(賈諱)로구나?”
중노인은 별반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몸이 바로 가휘요.”
“네놈이 방립을 섭혼술로 조종한 게로구나.”
“바로 보셨소.”
가휘가 선뜻 시인을 하자 천희방은 갑자기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짜놓은 안배가 얼마나 치밀한 것인지를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가휘는 방립을 제압한 다음 섭혼술로 심령을 조종해 방립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하응의 분신이라고 믿게 했다. 자신이 방립 본인이 아닌 방립으로 변장한 하응이라고 세뇌당한 방립은 유현상의 비밀 거처인 이곳으로 찾아왔고, 입구를 지키던 종효가 대문을 닫기 위해 몸을 돌린 사이에 그를 제압했다.
그러자 미리 근처에 잠복해 있던 진짜 천면묘객 하응이 종효로 변장한 다음 태연히 방립을 안내하여 유현상이 있는 전각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유현상은 두뇌가 비상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지만,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방립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그를 안내해 온 종효에게는 미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방립의 겉모습에서는 아무런 이상한 점도 찾을 수 없었으나 그가 천희방을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유현상은 그에 대한 의구심이 더욱 커졌다.
그래서 방립이 스스로를 천면묘객이라고 주장하자 그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렸던 것이다.
그 바람에 그는 종효로 변장한 진짜 천면묘객에게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너무도 어이없이 그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항상 막후에서만 일을 지휘하던 노해광이 선뜻 모습을 드러낸 것도 유현상의 관심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응이 비록 종효로 변장했다 해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준비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유현상에게 발각당할 위험이 있었다.
노해광의 계산대로 유현상은 갑자기 나타난 노해광에게 신경을 집중시키느라 종효가 다른 사람의 분장임을 전혀 간파하지 못했다.
또한 노해광의 부하들이 천희방에게 쇠그물을 던진 것도 그 쇠그물로 그녀를 사로잡으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시선을 이쪽으로 쏠리게 하여 만에 하나라도 종효로 변장한 하응이 유현상을 제압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사람의 심리(心理)를 교묘하게 이용한 함정으로, 천희방조차도 몇 번이나 생각해 본 다음에야 그 안에 숨어있는 정교한 술수와 놀라운 계략을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유현상이 두뇌가 명석하고 자신의 머리에 대해 확실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제야 그녀는 서안 일대에 퍼진 철면호와 삼묘의 소문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으며, 자신들이 그들을 너무 과소평가했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일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처해 있었다.
“유현상이 사로잡힌 이상 설사 그녀가 스스로의 힘으로 이곳을 벗어난다 해도 이번 일은 완전히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화상단에서는 실질적인 후계자인 유현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철면호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필코 유현상을 돌려받으려 할 것이다.”
그녀가 복잡한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노해광이 담담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사실 선배님과 나는 그동안 원한 맺은 일이 전혀 없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입니다.”
천희방은 그의 말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선배님께 한 가지 제안을 하려 합니다.”
“말해보아라.”
“선배님께서 이번 일에 더 이상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신다면 오늘 일을 잊고 선배님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천희방은 노해광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무슨 속셈을 부리려는 거냐?”
노해광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양손을 벌려 보였다.
“말씀 그대로입니다. 선배님과는 더 이상 척을 지고 싶지 않다는 뜻이지요. 뿐만 아니라 제가 잠시 데리고 있는 귀파의 인물들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선배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광동으로 돌아가시면 되는 거지요.”
천희방은 엷은 웃음마저 담고 있는 노해광의 얼굴을 밉상스러운 듯 쏘아보더니 냉랭한 음성으로 물었다.
“내 말 한마디면 된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아주 간단한 일이지요.”
“그렇구나. 확실히 간단한 일이긴 하지.”
“그렇다면 약속하시는 겁니까?”
노해광은 그녀가 승낙하리라고 확신을 하고 물었으나 그녀는 의외로 고개를 내저었다.
“네 제의는 확실히 귀가 솔깃하지만 나는 그런 약속을 할 수가 없구나.”
노해광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왜 그렇습니까?”
천희방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두 눈에 기광을 반짝였다.
“오늘 일은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창문이 부서지며 무언가 검은 물체가 실내로 날아들었다.
펑!
물체가 터지며 시커먼 연기가 장내에 퍼져 나갔다.
“독연(毒煙)이다. 숨을 들이마시지 마라!”
누군가의 놀란 경호성이 터져 나오며 장내가 아수라장처럼 변했다. 자욱한 연기가 삽시간에 대청 안을 완전히 뒤덮어 한 치 앞도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연기가 독연이라고 하자 사람들은 대청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입구를 제대로 찾기도 어려웠다.
그때 노해광의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그냥 단순한 연막탄일 뿐이다. 호들갑을 떨지 말고 자기 자리를 지켜라!”
그러자 소란스럽던 실내가 확연하게 조용해지며 잠시 고요한 정적이 감돌았다. 연기는 한참 후에야 잦아들었다.
노해광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더니 담담한 음성을 내뱉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당했군.”
한쪽에 제압당해 있던 유현상은 물론이고 천희방과 황삼인, 심지어는 아직 세뇌가 풀리지 않았던 방립까지 모두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가휘가 연기에 쏘여 두 눈이 붉게 충혈된 채로 그에게 다가왔다.
“연막탄인 것은 어찌 아셨습니까?”
“실내에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닌데 그들이 독연을 쓸 리가 없지 않은가?”
가휘가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렇군요. 천희방은 몰라도 유현상은 혈도가 제압당해 꼼짝도 못하는 상태였으니 독연이었다면 그가 제일 먼저 쓰러졌을 겁니다. 그렇다면 처음에 독연이라고 소리친 자가 바로 연막탄을 던진 인물이겠군요?”
“그럴 걸세.”
한쪽에 있던 하응이 콜록거리며 다가오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자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는데, 대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력을 사용해 목소리를 변성(變聲)한 것 같다.”
“왜 그자는 굳이 목소리를 바꿔야 했을까요?”
노해광의 얼굴에 한 줄기 냉소가 떠올랐다.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이었던 모양이지.”
하응은 물론 가휘의 눈이 번쩍 빛났다.
“대형께선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노해광은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이미 이 장원 일대는 우리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데도 그자는 태연히 안으로 들어와서 연막탄을 날리고 사람을 빼내어갔다. 밖에서 지키고 있는 놈들이 장님이 아니라면 우리 측이 아닌 외인(外人)이 이 근처를 활보하도록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다.”
가휘와 하응의 안색이 확 변했다.
“우리 편 중에서 그럴 능력과 기회를 가진 사람을 따져보면 나를 비롯하여 넷뿐인데, 그중 세 사람은 지금 이곳에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공교롭게도 오늘 오전에 급한 일이 있다며 모습을 감추었지.”
하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형의 말씀은…..”
“그자가 목소리를 변성한 것은 자신이 여자임을 숨기기 위해서다. 연막탄을 던지고 유현상을 구해간 사람은 바로 초희(楚喜)일 것이다.”
하응과 가휘는 입을 벌린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노해광이 말한 초희란 바로 그들 삼묘의 셋째인 소혼묘랑(消魂妙娘)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