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3권 무림세가(武林世家)편 : 1화
제 229장 득도형제
노해광의 거처인 취영루의 삼층에서 조촐한 모임이 벌어졌다. 이번 모임은 지금까지 진행되었던 일련의 사건에 대한 분석과 평가, 그리고 일의 완벽한 마무리를 위한 차후 계획을 검토하기 위한 자리였다.
어떤 일이건 계획이 일단락되면 노해광은 꼭 이런 모임을 갖곤 했다. 계획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반드시 계획 전반에 대한 세세한 검토를 하는 것이 바로 노해광 조직 운영의 가장 큰 비결이었다.
이번 일은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생각보다 피해도 적었고 일도 잘 마무리되어 사람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은 편이었다. 유화상단뿐 아니라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수룡신군 황충은 정말 감당하기 힘든 상대였는데, 그를 쓰러뜨리고 유화상단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유현상마저 제거했으니 이번 싸움의 가장 큰 고비는 넘긴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 중인들을 둘러보는 노해광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오늘도 아까운 수하 둘을 잃었다. 특히 주표영(周彪影)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녀석인데 이번에 비명에 가고 말았으니, 그의 어머니에게 어떻게 소식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노해광이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을 내뱉자 중인들의 표정이 굳어지며 장내에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쌍수마의 강물 속에서 황충의 손에 비명횡사한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지금까지 일을 해오면서 노해광의 부하들 중 목숨을 잃은 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 희생당한 두 사람은 상당한 기간 동안 노해광을 따르던 자들이었다.
이번 일은 워낙 중차대한 것이어서 한 치의 착오도 용납할 수 없기에 가급적 손발이 맞는 인원을 고르다 보니 필연적으로 오랫동안 데리고 있던 부하들이 선별될 수밖에 없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물속에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도 못해 보고 황충에 의해 숨이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물속에서의 황충은 정말 죽음의 신과도 같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를 생각하기만 해도 중인들은 황충에게 쫓기던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이 떠올라 손에 식은땀이 고이면서 몸에 한기가 돋았다. 황충 같은 절대의 고수를 단지 두 명의 희생만으로 제거했다는 것이 신기하게 생각될 지경이었다.
가휘가 가느다란 탄식을 토해냈다.
“솔직히 수룡신군은 우리가 잡기에는 너무 커다란 상대였습니다. 자신들의 희생으로 수룡신군을 제거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들도 여한은 없을 겁니다.”
“죽은 자야 말이 없으니 그들에게 여한이 있을지 없을지 어찌 알겠나? 서안에 함께 왔던 녀석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것이 아쉬울 뿐이네.”
노해광은 물론이고 가휘와 하웅의 얼굴에도 모두 착잡한 빛이 감돌았다.
노해광이 서안으로 올 때 데리고 왔던 인물들은 모두 그를 따라 오랜 여정을 함께해 온 자들이었다. 삼 년이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노해광이 서안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역량이 그만큼 탁월했기 때문이었지만, 그들이 노해광의 수족이 되어 온갖 궂은일들을 깔끔하게 처리해 온 것도 상당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덕분에 노해광은 적어도 서안 일대에서는 누구도 부럽지 않은 확고한 세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반면에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수하들을 잃어야 했다. 특히 이번에 유화상단과의 싸움이 시작되면서 부하들의 희생이 급속도로 늘어나서 노해광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런 수하들은 구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쓸 만할 정도로 키우는 것에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기 때문에 쉽게 보충할 수도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니 노해광으로서는 수하들의 희생이 더욱 뼈아프게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아마 평상시였다면 노해광도 수하들의 희생이 뻔히 보이는 이런 식의 계획은 실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해광은 원래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가는 신중한 성격이어서 결코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는 법이 없었다. 하나, 이번에는 워낙 사안 자체가 중대했을 뿐 아니라 달리 피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일이 급박하고 위태롭게 전개되어서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신속하게 해치워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노해광은 이내 씁쓸한 표정을 지우고 짐짓 쾌활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옛사람은 가고 새로운 사람이 오는 게 세상의 이치겠지. 주표영과 낙호가 비록 불행한 일을 당해 우리의 곁을 떠났지만, 대신 이번에 두 명의 새로운 형제를 받기로 했다.”
그 말에 중인들의 시선이 한쪽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지일환과 마정기에게로 향했다. 마정기가 여전히 주뼛거리고 있는 반면에 약삭빠른 지일환이 그의 어깨를 살짝 치고는 재빨리 중인들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지일환과 마정기가 형님들께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마정기도 그를 따라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지일환과 마정기가 노해광의 밑으로 들어온 지는 제법 되었지만 지금까지는 단순히 그의 지시를 받는 일방적인 관계였을 뿐이다. 하나, 이번에 수룡신군을 제거하는 일에 일정 부분의 공을 세우면서 노해광은 정식으로 그들 두 사람을 자신의 형제로 인정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단순히 명령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닌 보다 긴밀하고 신뢰받는 관계가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두 사람이 비로소 노해광의 무리에 완벽하게 합류되었다는 의미였다.
가휘와 하웅은 사심 없이 그들을 축하해 주었다.
“나는 늘 자네들이 언제 내 아우가 될지 궁금했었지. 정말 모처럼 만에 아우가 생겼는데 형님이 된 입장에서 그냥 있을 수는 없군.”
가휘가 조용히 웃으며 품에서 작은 함 두 개를 꺼내 그들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받게.”
지일환과 마정기가 함을 받아 열어보니 은은한 약향과 함께 단약이 하나씩 들어 있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지일환이 기대에 찬 눈빛을 반짝이며 묻자 가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양환이라는 것인데 무슨 희대의 영약 같은 건 아니니 너무 그렇게 설레어할 필요는 없네. 그냥 단순히 몸을 보하고 혈도를 튼튼하게 해서 내력을 운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도에 불과하네.”
가휘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으나 지일환과 마정기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실망하기는커녕 오히려 감격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재차 사례를 했다.
“이런 귀한 것을 받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거절하지 못하겠군요. 잘 사용하겠습니다.”
정양환은 소림사의 대환단이나 무당파의 자소단같이 내공을 폭발적으로 증진시키는 정세의 영약은 아니지만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되는 기물이었다.
피를 맑게 하고 기를 보충시킬 뿐 아니라 내공 증진에도 적지 않은 효능이 있어서 지일환도 이름만 들었을 뿐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일환과 마정기가 강호에서 제법 오랜 기간 동안 활동했어도 이런 영약을 얻을 기회를 잡지 못했는데, 뜻하지 않게도 이곳에서 선물을 받게 되었으니 그들로서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정양환을 자신들의 품속에 소중히 간직하는 광경을 보고 있던 하웅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제길. 형님이 그런 선물을 해버리니 나도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게 되지 않았소? 난 재주가 없어서 그런 영약은 구하지도 못하는데…….”
말과는 달리 하웅은 이내 소맷자락에서 두 권의 얄팍한 책자를 꺼내 들었다.
“이건 내가 장성에서 돌아다닐 때 우연히 구한 무공들인데. 나와는 상성이 맞지 않아서 그냥 버릴까 생각했던 것들이네. 자네들에게는 대충 맞을 것 같은데, 관심 있으면 한 번씩 들춰보기라도 하게.”
그 말에 지일환과 마정기는 눈이 번쩍 뜨여서 황급히 책자들을 받아 살펴보았다.
무림인에게 무공 비급은 세상의 어떤 귀중품보다도 귀한 게 아니겠는가?
두 비급 중 하나는 착영보라는 보법을 적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탐랑조라는 조법을 기록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갈증이라도 난 듯이 번갈아 가며 두 개의 비급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이내 의견이 일치한 듯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지일환은 착영보를, 마정기는 탐랑조의 비급을 각기 골라잡았다.
신법에 일가견이 있던 지일환으로서는 자신의 신법 실력을 배가할 수 있는 착영보에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었고, 비도 실력을 제외하고는 뚜렷하게 내세울 만한 절기가 없었던 마정기는 늑대의 발톱을 연상시키는 탐랑조의 날카로운 조공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그들 두 사람은 이 비급들이 아무렇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 두 사람을 위해서 세밀하게 준비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감격한 얼굴로 하웅을 향해 인사를 했다.
“하 형님께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거절할 염치도 없으니 이 은혜는 두고두고 갚도록 하겠습니다.”
하웅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형제지간에 은혜는 무슨…. 쓰지도 않고 남아 있던 것들이었으니 너무 크게 생각할 것 없네.”
지일환은 마치 신주단지 모시듯 착영보의 비급을 품속에 소중하게 간직하고는 싱글벙글하고 있다가 슬쩍 노해광을 돌아보았다.
가휘와 하웅도 선물을 주었으니 대형인 노해광도 무언가를 내놓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노해광은 그런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본 듯 피식 웃었다.
“이놈들이 막내로 들어와서는 공짜만 바라는구나. 영약이나 비급이나 난 아예 가진 것이 없으니 기대하지 마라.”
지일환은 찔끔하고 있다가 이내 계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저희가 어찌 감히 이 이상의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부족한 저희 두 사람을 형제로 받아주신 것만으로도 저희에게는 무엇보다 큰 선물입니다.”
“말 한번 잘하는구나. 너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북문대로(北門大路) 부근이지?”
“그렇습니다.”
“그 끝 쪽에 유하루라는 조그만 주루가 있는데, 알고 있느냐?”
“예, 제가 사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주루 이름이 조금 특이해서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약간 외진 구석에 있고 그리 크지 않지만, 음식이 정갈하고 맛있어서 그쪽에서는 제법 유명한 곳입니다.”
“너희가 한 번 잘 운영해 보거라.”
뜻밖의 말에 지일환과 마정기의 눈이 부릅떠졌다.
“예? 그 말씀은….”
“싫으면 취소하고.”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지일환은 얼마나 다급했던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지고 말았다.
하나 이내 자신의 실책을 알고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노해광은 조금 전보다는 한결 냉정해진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유하루의 한 달 수입은 은자 삼백 냥 정도다. 그중에 육할은 유하루의 점원들과 주방장의 몫이고 나머지가 너희들의 것이다. 혹여 그 이상을 욕심낸다면 각오해야 할 것이다.”
지일환은 다부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희들에게는 그 정도로도 차고 넘칩니다. 그리고 저희가 비록 강호의 이름난 무부(武夫)는 아닙니다만, 형제들의 돈을 탐낼 정도로 형편없는 소인배도 아닙니다.”
“그래, 믿겠다. 유하루의 점원들 중 상당수는 나와 함께 일을 하다 희생된 자들의 가족들이다.”
그제야 지일환은 왜 주루의 이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유하’라는 명칭이 붙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남겨진 자들을 위한 공간이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지일환의 얼굴에 숙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을 제 가족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노해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그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지일환과 마정기는 정식으로 노해광의 형제가 되면서 무림인으로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무공 비급과 영약을 얻었을 뿐 아니라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는 자금원까지 생겨났으니 절로 신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희희낙락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있다가 흥분이 가라앉자 이내 표정이 진지해졌다.
받은 만큼 베풀어야 하는 것이 강호의 진리이다.
노해광이 형제가 된 그들을 위해 베푼 만큼 그들 또한 노해광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새삼 각오를 다지고 있던 지일환이 갑자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형,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처음 꺼내는 대형이라는 단어가 어색할 만도 한데 지일환은 넉살 좋게 노해광을 대형이라고 불렀다.
노해광은 그런 호칭이 당연하다는 듯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무엇이냐?”
“대형께서 황충을 잡기 위한 장소로 쌍수마를 선택하셨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황충이 그곳에 오리라는 것은 대체 어떻게 알고 계셨던 겁니까?”
노해광은 피식 웃었다.
“그게 그렇게 궁금했느냐?”
지일환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저도 나름대로는 이번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제법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황충을 어떻게 쌍수마로 유인할 수 있었는지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더군요.”
“황충이 아니라 유현상이다.”
“예?”
“내가 유인한 건 유현상이다. 황충은 그저 유현상을 따라왔을 뿐이지.”
지일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은 말이 아닙니까?”
“조금 다르지. 황충은 유현상의 뒤에 숨어 있어 종적을 알 수 없었다. 직접적으로 그를 유인하려 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의도를 들켜서 오히려 그들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현상으로 하여금 우리의 꼬리를 잡았다고 확신하게 한다면, 그리고 그 장소가 황충이 가장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지일환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굴에 숨어 있는지 모를 두더지를 제 발로 나오게 만든다는 것이로군요.”
두더지를 연상케 하는 외모의 지일환이 자신의 입으로 그런 말을 하자 우스꽝스러웠는지 옆에서 듣고 있던 하웅이 히죽 웃었으나, 노해광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문제는 어떻게 유현상으로 하여금 오판하게 만드느냐는 거지. 그는 두뇌가 민첩할 뿐 아니라 의심이 많고 신중한 성격이라 그를 오판하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지.”
“그녀라니요?”
지일환이 의아한 듯 물었을 때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나예요.”
들어온 사람은 짙은 남색 치마에 붉은색 저고리를 입은 미모의 여인이었다.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가서 차가워 보였으나, 도톰한 입술에 야릇하게 지어진 미소가 보는 이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할 만큼 미묘한 색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 지일환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성을 흘렸다.
“소혼묘랑……”
여인은 지일환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붉은 입술 사이로 살짝 내비치는 새하얀 치아가 그렇게 매혹적일 수 없었다.
“내가 바로 초희예요.”
지일환이 노해광의 밑으로 들어온 지는 제법 되었으나 그동안 그녀를 정식으로 소개받은 적은 없었다. 다만 먼발치에서 스쳐 지나가듯 그녀를 한두 번 보았을 뿐이다.
가까이에서 직접 본 그녀는 과연 소문처럼 남자들의 마음을 묘하게 뒤흔드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직하게 가라앉아 있으면서도 울림이 좋은 목소리가 지일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일환은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붉어졌다.
“처음 뵙습니다. 초 소저. 저는 지일환이라고 합니다.”
초희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이 바로 그 지일환이로군요.”
“저에 대해 잘 아십니까?”
“무어라고 들으셨는지…..”
그녀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말해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지일환은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에 대한 소문이라면 그다지 좋을 게 없지 않겠는가? 그는 한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나는 소문이란 걸 그다지 믿지 않는 편이라……”
때마침 초희 뒤에서 한 사람이 다시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지일환은 난처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들어온 사람은 하관이 길고 날카로운 인상의 황삼인이었다.
황삼인은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더니 이내 노해광의 앞으로 다가가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초력이 노 대협을 뵙습니다.”
노해광은 그가 가까이 오기도 전에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대협은 무슨…. 초희의 오빠라면 내겐 가족이나 마찬가지일세. 대형이라고 부르게.”
“감사합니다, 대형.”
황삼인은 오래전에 실종되었던 초희의 오빠인 초력이었다. 초희는 느닷없이 나타난 초력의 회유에 노해광을 배반했는데, 뜻밖에도 이 자리에서 그들 남매를 보게 되자 전후 사정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좀이 쑤셨다.
그의 그런 마음을 훤히 알고 있다는 듯이 노해광이 중인들을 돌아보며 그간의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초희가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고 싶어 한다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기회를 주었고, 그녀는 자신뿐만 아니라 오빠인 초력까지 설득하여 우리 편으로 돌아선 것이다.”
지일환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녀는 우리와 방보당의 거래를 맡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방보당의 고옥기와 그녀가 양쪽의 거래를 총괄하는 실질적인 책임자들이었지. 고옥기와 오랫동안 거래를 해온 만큼 고옥기에 대해 그녀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때는 두 사람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었지.”
지일환과 마정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소문이 정말입니까?”
노해광은 피식 웃었다.
“궁금하면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러느냐?”
지일환은 슬쩍 초희를 돌아보았으나 초희가 쌀쌀맞은 표정으로 쏘아보자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런 헛소문을 믿을 만큼 제 귀가 얇지는 않습니다.”
“그게 헛소문이라고 확신할 수 있느냐?”
“예? 그럼 정말로 초 소저가 그자와….”
노해광이 대답을 하지 않고 빙글거리기만 하자 답답해진 지일환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다시 초희에게로 향했다. 초희는 매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이 어찌나 싸늘했던지 지일환은 절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지일환이 어쩔 줄 몰라 쩔쩔매고 있을 때 가휘가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하하….. 초 누이. 그는 이제 갓 형제가 된 사람이니 너무 심하게 놀리지 말게. 그리고 지 아우.”
지일환은 그가 자신을 부르자 정신이 번쩍 들어 큰소리로 대답했다.
“예, 가형님.”
“자네가 초 누이에 대해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게.”
“말씀하십시오. 세이경청하겠습니다.”
“초 누이는 자기보다 무공이 약한 자는 남자로 여기지도 않는다네.
다시 말해서 그녀가 유혹해서 안 넘어올 남자가 없다는 강호의 소문은 약간 잘못된 것이네. 그녀가 자기보다 고수가 아니라면 유혹할 생각도 하지 않으니 말일세.”
“그렇군요, 흐음….. 그럼 역시 고옥기와의 일은 헛소문이 확실한 거로군요.”
지일환이 안도했다는 듯 한숨까지 내쉬며 말하자 가휘는 그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다는 듯이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남자로 생각도 하지 않는 자와 염문이 퍼졌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나? 더구나 형제라는 자가 그런 소문에 솔깃하고 있으니 화가 날 만도 하지 않겠나?”
지일환은 질끈하여 한결 기가 죽은 표정으로 초희를 바라보았다.
“초 소저, 그러니까 나는….”
그가 채 뭐라고 하기도 전에 초희가 그의 말을 잘랐다.
“사과하지 마세요. 별것도 아닌 일로 형제의 사과를 받고 싶지는 않으니까.”
지일환은 우물쭈물하며 제대로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예…..”
옆에서 듣고 있던 하웅이 싱겁게 웃었다.
“사내놈이 뭐 그런 일로 기가 죽어서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는가? 초 누이에게 잘 보이려면 실력을 바짝 키우라구. 그러면 혹시 아나? 어느 야심한 밤에 초 누이가 얇은 나삼 하나만 걸치고 술 한잔하자며 불쑥 찾아올지.”
초희의 눈빛이 표독스러워지며 얼굴에 냉기가 드리워지자 노해광이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자, 실없는 농담은 이쯤에서 멈추도록 하자. 아무튼 중요한 건 초희가 고옥기라는 인간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야. 그러니 고옥기가 방보당의 주인인 방태동을 죽였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그녀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세 가지뿐이었지.”
지일환은 어색한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반가웠던지 반색을 하며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녀는 고옥기가 방태동을 자신의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 더구나 고옥기는 평생 사람을 다치게 하기는커녕 닭 한 마리 잡은 적도 없는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야. 그러니 그가 방태동을 죽였다는 건 철저한 거짓이고, 유현상을 유인하기 위한 우리의 수작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을 것이네.”
“그렇겠군요.”
“그녀가 진정으로 우리를 배반했다면 그 사실을 유현상에게 알리고 오히려 우리를 옭아매기 위한 계획을 세웠겠지. 반면에 그녀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생각이라면 그 사실을 숨긴 채 유현상의 지시에만 따랐을 게야. 그리고 그녀가 우리에게 돌아올지 돌아오지 않을지를 망설이는 상태였다면……”
노해광은 여기서 갑자기 말문을 닫더니 이내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랬다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했을 것 같으냐?”
지금까지 한쪽 구석에 묵묵히 앉아 있던 정해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녀는 유현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녀는 그것이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선택의 순간이라는 걸 깨달았을 겁니다. 선택의 순간에 인간은 좋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본능이 강해지지요. 배신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겁니다. 고통스러운 길과 다시 좋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자신의 앞에 놓여졌다면 그녀가 둘 중 어느 길을 선택할지는 너무도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노해광은 정해의 대답이 맘에 든 듯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과연 그녀는 한 가지 길을 선택했지. 나는 그녀가 어느 길을 선택했는지를 방태동의 장례식에서 알 수 있었다. 그날 방태동의 시신이 담긴 관이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그것은 사실 인부로 변한 유현상의 부하가 관이 떨어진 사이에 방태동의 사인을 조사하기 위해 벌인 일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우리를 배반할 생각이었다면 그날 방태동의 사인을 조사할 것이 아니라 그 시신이 방태동 본인의 것이 맞는지를 먼저 확인했을 것이다. 시신이 방태동의 것이 아니라면 그 일이 유현상을 옭아매기 위한 우리의 계략임을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을 테고, 만에 하나 방태동 본인의 것이 맞다면 우리가 후환을 염려해 그를 제거한 것이니 어떤 식으로든 고옥기의 행방을 수소문할 필요가 있으니 말이다.”
방태동은 젊은 시절 풍류를 즐긴답시고 뒷골목을 전전하다 파락호들의 싸움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옆구리를 칼에 찔리는 큰 상처를 입었는데, 그때 그 싸움에서 그를 구해 준 사람이 다름 아닌 노해광이었다.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친해진 것은 바로 그 이후부터였다.
행실이 점잖고 무골호인 같은 방태동의 몸에 칼자국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노해광과 그의 친형제 같은 수하들인 삼묘뿐이었다. 그러니 인부로 변한 유현상의 수하가 방태동의 시신에서 칼자국을 찾아내기만 하면 시신이 방태동 본인의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 인부는 방태동의 목에 있는 검흔만을 살펴보았을 뿐, 옆구리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지일환은 아직도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시신이 방태동 본인의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노해광은 담담하게 웃었다.
“어떨 것 같으냐?”
지일환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사실대로 말해 주지. 그건 방태동 본인의 것이 맞다.”
지일환은 영문을 몰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시신이 방태동 본인의 것인지 아닌지를 유현상 측에서 확인하든 하지 않든 마찬가지 상황이 아닙니까?”
“너는 아직 그 일에 담긴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구나. 시신이 방태동 본인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 확인했는지 안 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초희가 우리를 배반할 생각이었다면 이번 일이 우리의 음모임을 분명하게 증명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시신이 방태동 본인의 것임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제야 지일환은 무언가 느낀 듯 탄성을 터뜨렸다.
“아! 이제야 알겠습니다. 초 소저로서는 유현상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도 단순한 몇 마디의 말보다는 보다 확실한 증거를 잡아야 했던 거로군요.”
“그렇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으니 그건 초희가 굳이 유현상에게 이번 일에 대한 의문점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나는 비로소 그녀의 마음이 완전하게 우리에게 돌아섰음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일환은 대수롭지 않은 듯한 사건 속에 숨겨진 복잡한 내막을 알고 혀를 내두르다 다시 물었다.
“그런데 시신이 방태동 본인의 것이라면 정말 방태동을 죽이신 것인지……”
노해광은 다시 웃었다.
“이번에도 말해 보아라. 어떨 것 같으냐?”
“그것이…….”
지일환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다. 남들보다 제법 두뇌가 영민하고 눈치가 빠른 그였지만 이번 일의 내막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을 알았기에 선뜻 대답을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네 머리가 얼마나 쓸 만한지 알고 싶어서 묻는 것이니 너무 걱정 말고 말해 보거라.”
지일환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섣부른 예측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노 대형께서 방태동을 죽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제가 노 대형을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제가 본 노 대형은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 오래된 친구를 함부로 죽이는 사람이 결코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노해광의 눈이 번쩍 빛났다.
“확신할 수 있느냐?”
지일환은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한 가지 말해 주지. 강호에서는 어떤 것도 확신하지 마라.”
뜻밖의 말에 지일환의 몸이 움찔거렸다.
“예? 그 말씀은…”
“네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내가 너에게 보여 주는 모습뿐이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인간을 판단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지.”
“그럼….”
살벌하게 굳어졌던 노해광의 얼굴에 다시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 일은 용케도 맞혔군. 이런 걸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를 잡은 격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일환이 아직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할 때 한사람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허허….. 형제로 받은 사람을 그렇게 놀리면 쓰나? 자네가 짓궂은 건 정말 알아줘야겠네.”
들어온 사람을 본 지일환은 가뜩이나 작은 눈을 부릅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름 아닌 의문의 살수에게 참변을 당해 장례식까지 치러 무덤 속에 누워 있어야 할 방태동이었던 것이다.
지일환과 마정기는 놀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보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의 출현을 짐작이나 한 듯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방 대인 그동안 꼼짝도 못하고 계셔서 많이 지루하셨을 겁니다.”
가휘가 그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방태동은 마주 인사를 하며 웃었다.
“허허….. 일의 결말이 어찌 진행될지 몰라 달달 떨었던 기억은 나는데 지루한 기억은 전혀 없구려.”
“방 대인께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표정이 변하지 않으셨던 분인데 떨었을 리가요. 반면에 갑갑하거나 지루한 건 참지 못하시지 않습니까?”
“허허….. 이거 가대협이 나보다도 더 나를 잘 아는 것 같소.”
지일환은 서로 반갑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더니 노해광을 향해 물었다.
“대형께서 방 대인을 직접 죽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멀쩡하게 계실 줄은… 조금 전에 저에게 신신이 방 대인 본인의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어떻게…..”
“그 시신은 방태동이 직접 분한 것이다. 만약 초희가 우리를 진정으로 배반한 것이라면 반드시 시신을 직접 확인하려고 했을 테니 가짜를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가휘가 힘을 좀 썼지.”
지일환의 시선이 가휘에게로 향했다. 가휘는 늙수그레한 얼굴에 조용한 웃음을 매달았다.
“내 특기가 무엇인지 잊었나? 살아 있는 사람의 숨을 잠깐 멎게 하고 잠시 동안 시신으로 만드는 것은 내 재주 중 극히 일부일세.”
“아!”
그제야 지일환은 가휘의 호가 섭혼묘군이라는 것이 떠올라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방태동이 다시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 그런데 멀쩡한 몸으로 시신이 되는 경험은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네. 기분이 썩 좋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어서 말이지.”
노해광이 지일환과 마정기에게 정식으로 방태동을 소개했다.
“인사드려라. 몇 남지 않은 나의 오랜 지기이자 방보당의 당대 주인이시다.”
지일환과 마정기는 황급히 그에게 다가가 머리를 조아렸다.
“지일환과 마정기가 방 대인을 뵙습니다. 미숙한 구석이 많은 놈들이니 어여삐 보아주십시오.”
방태동은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의 손을 차례로 붙잡았다.
“해광의 형제는 내 형제나 마찬가지일세. 앞으로 잘 지내보세.”
고개를 든 지일환과 마정기의 얼굴에 엷은 흥분의 기색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안의 뒷골목을 헤매고 다니던 그들이 서안에서도 손꼽히는 거부이자 명망이 높은 방태동을 알게 되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일환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노해광을 돌아보았다.
“노 대형께서는 처음부터 방 대인을 활용할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계셨던 거로군요.”
“그다지 치밀한 계획은 아니었다. 워낙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다소 즉흥적으로 세운 것이었지. 따지고 보면 의심스러운 구석이 없지 않았지,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고옥기의 핵적을 노출시킬 필요성이 있었던 거야.”
“유현상의 관심을 고옥기에게로 옮겨야 했군요.”
“그렇지. 그래서 고옥기가 자신의 집으로 가서 노모를 모시고 모습을 감추었을 때, 용케도 옆집에 사는 이웃이 그를 발견할 수 있었던 거다.”
“아! 그렇다면 그 이웃은 혹시….”
“그 자야말로 내가 숨겨 둔 가장 큰 패였지.”
노해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안에 숨은 복잡한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초희가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가장 중요한 문제는 유현상을 어디로 유인할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너에게 서안 일대의 지명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유현상과 그 뒤에 숨은 황충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적당한 장소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지. 또 한 가지 문제는 어떻게 그 장소를 초희에게 알려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그 장소를 알아야만 그들을 그쪽으로 유인할 수 있는데, 유현상이 감시의 눈을 번뜩이고 있는 상태에서 그녀와 접촉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
고옥기가 노모를 모시고 사라졌다는 말을 듣자 초희는 고옥기가 몸을 숨기는 노모의 고향인 임동의 창호현은 절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정말로 고옥기가 창호현으로 숨을 생각이었다면 오히려 노모를 모시지 않고 혼자 움직였을 것이다.
문제는 고옥기가 숨은 장소,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해광이 유현상과 황충을 유인하기 위해 고옥기가 움직였을 장소가 어디인지를 그녀가 추측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 장소로 유현상과 황충이 가야만 비로소 노해광의 모든 계획이 완성되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알 수 있도록 노해광이 어떤 식으로든 그 장소에 대한 단서를 남겨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단서는?
그때 그녀는 고옥기가 노모와 모습을 감춘 장면을 남에게 들켰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고옥기는 소심한 사람이었지만 반면에 그만큼 치밀하고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가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고 해도 노모와 자신이 몸을 숨기는 위험천만한 장면을 남에게 쉽사리 발각당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모습을 들킨 것 또한 계획의 일환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자 그녀는 주저 없이 고옥기를 마지막으로 보았다는 이웃의 주민을 만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주민은 처음에 쏟아졌던 주위의 관심에 반쯤 넋이 나가 있었으나, 이내 자신에게 주어진 눈길이 거두어진 것을 알고는 허탈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 주민을 찾아간 초희는 그에게서 고옥기의 실종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주민은 하도 여러 사람에게 해서 달달 외워 버린 이야기를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그녀에게도 똑같이 해주었다.
그 이야기에 고옥기에 대한 특이한 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나 거의 이야기가 끝나가는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결정적인 단서를 잡을 수 있었다.
“아무튼 고옥기, 그 청년은 참 건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는데 말이오.
어려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온갖 힘들고 험한 일을 하면서도 근면하고 성실해서 나도 딸이 있으면 줄까 하고 관심을 기울였을 정도였단 말이지.”
주민의 넋두리 삼아 주절거렸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객사하자 홀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서 날품을 팔다가 뱃사공을 하고, 거기서 약간의 돈을 모아 이곳 서안까지 와서 점원으로 있다가 방 대인의 눈에 들어 방보당에 서기로 들어갔으니 정말 지렁이에서 용이 된 셈이지, 그런데 이제는 부모 같은 방 대인을 죽인 살인자로 몰려 쫓기고 있으니 젊은 나이치고는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 아니오?”
그의 말 중 한 단어에 그녀는 귀가 번쩍 뜨였다.
“고옥기가 뱃사공을 했었다구요?”
주민은 지금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다소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들었소. 고옥기가 사라진 후 예전에 고옥기를 알던 사람들이 와서 짐을 뒤적거릴 때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그가 어디에서 뱃사공을 했었다고 하던가요?”
“글쎄…….워낙 여러명이 떠드는 가운데 어렴풋이 들은 거라……. 쌍수마던가? 쌍수탄이던가… 아무튼 뭐 그런 이름이었을거요.”
그 말을 듣자 그녀는 즉시 노해광이 목표로 한 장소가 바로 그곳임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고옥기는 천성적으로 물을 무서워하는 사람이라 절대로 뱃사공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태연히 거처로 돌아온 후 유현상이 고옥기의 행방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그녀를 불렀고, 그녀가 고옥기의 행방을 추측하는 척하면서 은연중에 유현상으로 하여금 쌍수마로 향하게끔 한 것은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정해진 수순이었다. 지일환은 노해광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야 겉으로 드러난 것에 비해 이 안에 숨겨진 내막이 얼마나 복잡하며, 단순한 것 같았던 계획이 얼마나 치밀하고 정교하게 짜여진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한동안 헐클어진 머릿속을 비우려는 듯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지일환이 문득 생각난 듯 지금보다는 한결 차분해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할 때는 대형의 계획에 한 가지 요소가 더 숨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해광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엇이냐”
“왜 유현상이 그토록 집요하게 고옥기를 쫓으려고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고옥기는 방 대인을 살해한 진범도 아니고, 특별할 것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유현상은 자신의 부하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배후에 있는 황충을 모셔오면서까지 고옥기의 뒤를 쫓아 왔습니다.”
“너는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유현상은 고옥기에게 대형과 방보당 사이의 거래에 관한 비밀장부가 있고, 그 비밀장부를 회수하기 위해 대형께서 반드시 고옥기를 추적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형도 아시다시피 고옥기는 비밀장부와는 관계가 없는 인물입니다. 유현상은 왜 그런 어이 없는 착각을 했을까요?”
“글쎄……..왜 그랬을까?”
노해광이 장난하듯 빙글거리며 되묻자 지일환은 유난히 작은 눈을 반짝이며 힘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 누군가가 그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노해광은 계속 입가를 엷은 미소로 지으며 물었다.
“그게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만…..”
“다만?”
“저는 대형께서 저에게 소개시켜 줄 사람이 아직도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노해광은 이를 드러내며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환한 웃음이었다.
“하하… 너는 머리 굴리는 건 아직 정해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눈치 하나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비상하구나.”
마정기만이 아직도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뿐, 방태동을 비롯한 가휘와 하웅, 정해, 심지어는 초희까지 모두 웃고 있었다.
한참을 웃던 노해광이 손뼉을 탁 쳤다.
“너희들을 형제로 받은 것이 잘못된 판단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럼 이제 우리의 또 다른 형제를 소개하지.”
손뼉 소리가 그치자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위아래로 검은 무복을 입고 눈빛이 날카로운 삼십대 후반의 장한이었다. 얼굴이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칼자국이 나있어 험상궂게 생긴 데다 체구가 당당해서 소심한 사람은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사나운 기운을 품기는 인물이었다.
지일환과 마정기는 그 흑의인을 보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서안의 뒷골목을 전전하던 두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지옥의 사신보다도 무섭고 공포스러운 존재가 그들의 앞에 있는 것이다.
두 사람과 시선이 마주치자 흑의인은 험상궂은 얼굴에 좀처럼 보기 힘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했다.
“표정을 보니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 같구려, 반갑소, 형제들. 내가 바로 흑선방을 맡고 있는 흑선방주 최동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