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3권 무림세가(武林世家)편 :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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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3권 무림세가(武林世家)편 : 6화


제 234장 다정군자(多情君子)

-종남파가 남궁세가에 비무첩을 보냈다!

한 가지 소문이 대강남북을 온통 뒤흔들었다. 얼마 전부터 돌연 비무행을 시작하여 모든 무림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종남파가 드디어 강호의 명문세가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 중의 남궁세가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지금 까지 종남파가 비무를 벌였던 문파들 중 이름 없는 약소문파는 한곳도 없었지만, 남궁세가는 그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구궁보와 구대문파를 위시한 극소수의 몇몇 문파를 제외하고는 어느 곳도 감히 넘볼 수 없는 명문세가의 상징과도 같은 가문이었다. 그런 남궁세가에 마침내 종남파의 비무첩이 당도한 것이다. 그동안 종남파의 비무행은 많은 강호인들의 관심과 호응을 받아 왔다. 삼 년 전의 무림대집회 이후 강호무림은 피아(彼我)를 식별하기 어려운 혼돈의 상태에 빠져들어 있었다. 무수한 고수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여 하루에도 수십 개의 문파가 새로 생겨나는가 하면 상당한 전통을 자랑하던 명문정파가 순식간에 몰락의 길을 걷기도 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혈겁이 벌어지기도 했고, 의문의 피살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한 혼탁한 강호에서 오랜 역사와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던 종남파의 화려한 부활과 뒤이은 비무행은 무림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무림인들은 종남파가 강호의 혼란을 잠재우고 명문정파다운 위엄을 보여 줄 것을 은연중에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종남파가 비무에 승리할수록 점점 더 커져서 종내에는 강호의 모든 이목을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시키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더구나 얼마 전부터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한 종남파 장문인 신검무적과 무림구봉 중의 도봉인 금도무적 양천해와의 격돌에 대한 소문은 무림인들을 광분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기산취악 이후 이 십년 넘게 절치부심해 오던 종남파가 배출해 낸 희대의 검객, 신검무적이 마침내 무림 구봉마저 꺽어 버린 것이다. 무림구봉은 오랜 세월 동안 강호무림의 최정상을 군림하던 절대적인 존재들이었다. 그런 무림구봉 중에서도 도(刀)의 절대자가 새롭게 나타난 신검(神劍)과 처절한 격투 끝에 패사(敗死)하고 말았으니 강호인들이 경악과 흥분에 휩싸이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 신검무적이 이끄는 종남파가 남궁세가에 공개적인 비무첩을 발송했고, 그들의 대결이 코앞으로 닥쳐왔다는 소식은 많은 무림인들의 발길을 회남으로 이끌었다. 검을 찬 무인들은 그들대로, 강호의 소식을 듣기 좋아하는 일반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각기 다른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끊임없이 회남으로 몰려들었다.

“이거 재미있게 되어 가는군.”

한 사람이 허공을 올려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정말 준수한 사람이었다. 나이는 이십대 후반쯤 되었을까? 짙은 청색 장삼을 걸치고 이마에 하얀 문사건(文士巾)을 두른 그 미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자 주변이 온통 환해지는 것 같았다. 지나가던 여인들이 그 미남자를 보고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남자들도 그를 지나칠 때마다 연신 힐끔거렸다. 그런데도 청삼 미남자는 주위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듯 계속 입가에 미소를 매단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 것일까?

‘그녀를 잊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건만 이곳에서 그녀의 남자를 만 나게 되었으니… 인연이라면 참으로 얄궂고, 악연이라면 징글맞도록 질기구나.’

청삼 미남자는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묘한 재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잊으려고 하지만 잊을 수 없는 것처럼 멀어지려고 하지만 오히려 가까워지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정녕 잊을 수도 없고 멀어질 수도 없다면 정면으로 부딪쳐 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청삼 미남자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한 떼의 사람들이 그의 앞에 우르르 나타났다.

“대공자님!”

그들을 보자 청삼 미남자를 힐끔거리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사방으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새하얀 백의를 입고 청색 허리띠에 검을 찬 그들은 다름 아닌 남궁세가의 고수들이었던 것이다. 특히 가슴 한쪽에 금색 실로 작게 새겨진 <검(劍)>이라는 문양은 그들이 남궁세가에서도 가장 정예로 알려진 신검당의 고수들임을 짐작케 했다.

“대공자님, 마침내 돌아오셨군요.”

그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듯한 삼십대 장한이 감격에 찬 얼굴로 미남자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다른 칠팔 명의 젊은이들 또한 일제히 그를 향해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대공자님을 뵈옵니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가 주위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듯했다.
청삼 미남자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삼십대 장한을 바라보았다.

“운중(雲重), 당신과 당신 부하들은 여전히 목소리가 크군. 당신이 팔수(八秀)에 속한 것은 필시 그러지 않았다면 당신이 큰 목소리로 항의할 것을 사람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오.”

신검당을 지탱하는 여덟 명의 우두머리 중 하나인 전뢰검(電雷劍) 남궁운중(南宮雲重)은 흥분과 기쁨으로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활짝 웃어 보였다.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진정으로 두려워할 것은 제 목소리가 아니라 저의 검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말겠습니다.”

“하하… 여전히 입담이 대단하군, 그런데 내가 온다는 것은 어떻게 알고 마중을 나왔나?”

그 말에 남궁운중은 오히려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풍기(風起)가 공자님을 모시러 갔는데, 만나지 못하셨습니까?”

“아니. 나는 그냥 내 발로 돌아온 거야. 아마 길이 엇갈렸나 보군.”

“풍기, 이 자식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니까. 그나저나 정말 잘 오셨습니다. 가주남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청삼 미남자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귀찮게 되었다며 성가셔 하실지도 모르지.”

남궁운중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으나, 이내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럴 리가요. 이번에 풍기를 보낸 것만 보아도 가주님께서도 대공자님의 귀환을 기다리고 계셨던 게 분명합니다.”

“신명당의 한상 숙부가 지시한 일이겠지.”

“가주님의 동의가 없었다면 아무리 신명당주라 해도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우리 팔수 중 한 사람을 심부름꾼으로 쓰지는 못했을 겁니다.”

남궁운중이 평소와는 달리 진중하게 말하자 청삼 미남자도 더 이상은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환영검(幻影劍) 남궁풍기(南宮風起)는 신검팔수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재여서 가주의 지시가 아니라면 남궁세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게 분명했던 것이다.

“이번 일에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모양이군. 그만큼 종남파가 두려운 상대라는 뜻이겠지.”

청삼 미남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남궁운중은 공력이 뛰어난 인물답게 그의 중얼거림을 모두 알아들었으나 전혀 내색하지 않고 밝은 표정으로 손을 들어 앞으로 펼쳐 보였다.

“자, 가시지요. 본가의 모든 사람들이 대공자님의 귀환을 반기고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청삼 미남자는 퍼뜩 고개를 들어 그의 손이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 회남의 거리 너머로 고루거각이 즐비한 거대한 성채 같은 장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높은 담벼락과 처처히 솟아 있는 누각의 지붕들을 보는 순간, 담담했던 청삼 미남자의 얼굴에도 엷은 격동의 빛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마침내 돌아왔구나.’

무림 제일의 풍류남아들이라는 강호삼정랑(江湖三情郞) 중의 일인이며 남궁세가의 대공자인 다정군자(多情君子) 남궁선(南宮琁)은 잠시 아련한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고 있다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형님!”

남궁선이 세가로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그를 반겨 준 것은 옥기린 남궁기였다.

남궁선은 자신의 품속으로 뛰어든 남궁기의 등을 두드리며 빙긋 웃었다.

“이 녀석, 어째 그동안 어리광만 늘은 것 같구나.”

남궁기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그의 몸을 꼭 끌어안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쳐들고 남궁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에는 상대에 대한 흠모와 동경의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다친 곳은 없는 거지요? 어디 불편한 데는?”

남궁선은 피식 웃었다.

“네가 금방 주물러 놓고도 모르겠느냐? 털끝 하나 다친 곳 없이 멀쩡하다.”

남궁기는 얼굴을 붉게 상기시키며 따라 웃었다.

“여자들 꽁무니만 따라다닌 줄 알았더니 몸이 더 좋아진 것 같아요. 그래도 그동안 수련을 빼먹지는 않은 모양이지요?”

“네 녀석이 내 뒤를 바짝 쫓아오는데. 게으름 부렸다가 뒤처지기라도 하면 네 녀석 잔소리를 내가 어찌 감당하겠느냐?”

“하하… 그렇지 않아도 형님이 돌아오시면 삼 일 밤낮을 두고 싸워 보려고 했어요.”

“이제 제법 실력에 자신이 붙은 모양이지?”

남궁기는 양쪽 팔뚝을 들어 보였다.

“이 팔에 근육이 붙은 거 안 보이세요? 이제는 예전처럼 십 초도 못 받고 허덕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남궁선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알았다. 잠시 후에 큰소리칠 만큼 실력이 늘었는지 확인해 보자꾸나.”

그들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다시 한 사람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오라버니…”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한 채 떨리는 눈으로 남궁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옥비연 남궁경이었다.

남궁경을 보자 남궁선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하하… 남들이 하도 옥비연이 회하 일대에서 제일가는 미녀라고 하길래 코찔찔이 어린애한테 너무 과분한 칭호가 붙은 게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정말 아름다운 미녀가 되었구나.”

남궁선의 농 섞인 말에 남궁경의 복사꽃 같은 얼굴에 짙은 홍조가 어렸다.

그녀는 남궁탄의 동생인 철검서생 남궁조의 외동딸로, 남궁선과는 사촌지간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친누이처럼 그를 따랐었다. 형제자매가 없던 그녀에게 남궁기는 한없이 귀여운 남동생이었고, 남궁선은 친오빠보다 더욱 소중한 존재이자 마음속으로 꿈꾸었던 가장 이상적인 남성상이었다.

남궁조에게 아들이 없자 남궁탄은 자신의 둘째 아들인 남궁기를 보내 남궁조로 하여금 양자로 삼게 했는데, 그 바람에 남궁기는 친아버지를 백부로 불러야 하는 다소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하나 그 때문인지 그와 남궁선의 사이는 오히려 여느 형제들보다도 더욱 각별해졌다, 삼 년 전에 남궁선은 아버지인 남궁탄과의 불화와 세가 내의 갑갑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임의로 세가를 빠져 나왔다. 남궁세가 같은 명문세가에서 대공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주변 어른들의 승낙도 받지 않고 무단으로 가문을 벗어난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남궁선의 재지가 뛰어나고 세가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진즉에 남궁선은 대공자라는 지위에서 쫓겨났을지도 몰랐다. 하나 다정군자라는 외호처럼 매사에 잔정이 많고 인품이 뛰어난 남궁선은 어려서부터 주위 사람들의 사랑과 흠모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게다가 무공에 대한 재질 또한 천부적이어서 그에 대한 남궁세가의 기대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러한 중압감이 그를 견디지 못하게 했다. 더구나 가주인 남궁탄은 남궁세가를 강호제일세가로 올려놓기 위해 나름대로 여러 가지 정책을 추진했는데. 그 때문에 가풍(家風)이 점차로 패도(覇道)로 물들어 가는 것에 남궁선은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있었지만, 결국 남궁선은 좁은 남궁세가를 뛰쳐나가 강호무림에 뛰어들었고, 단시일 내에 강호삼정랑 중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절정(絶情)은 매섭고, 정검(情劍)은 부드러우며, 다정(多情)은 한숨 짓는다’

라는 노랫소리는 적어도 강남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누구보다 준수하고 배경도 뛰어난 그가 왜 자주 한숨을 짓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다. 대공자인 남궁선이 삼 년 만에 돌아오자 남궁세가는 종남파와의 비무라는 커다란 현안을 앞에 두고도 마치 잔칫집처럼 들뜨고 흥분된 분위기로 시끌벅적했다. 남궁탄은 이내 세가의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녀석이 돌아왔구나.”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여인네들의 나직한 웃음소리와 사람들의 흥분 섞인 속삭임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곧이어 남궁한상의 음성이 들려왔다.

“접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남궁탄은 항상 냉정하고 침착하던 남궁한상의 음성도 약간 들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못마땅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제멋대로 집을 나갔던 놈 하나가 돌아왔다고 왜들 이리 수선을 피우는지….”

남궁탄이 들어오라고 하자 남궁한상이 곧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인가?”

남궁탄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태연히 묻자 남궁한상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그려졌다. 세가의 누구보다 높은 내공을 지닌 남궁탄이 주위의 소란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짐짓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는 것이 우스웠던 것이다. 하나 이내 그는 정색을 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선아가 왔습니다.”

“풍기가 늦지 않게 찾아갔던 모양이군.”

“풍기는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냥 스스로 오겠다는 말을 하고 돌아왔다고 하더군요.”

남궁탄의 두 눈이 날카롭게 번뜩거렸다.

“갑자기 사고방식이 바뀌었을 리는 없고,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런 마음을 먹었다고 하던가?”

“저도 자세한 건 묻지 못했습니다. 잠시 후에 직접 들어보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남궁탄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표정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그놈은 뭐 하느라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있는 건가?”

“먼 길을 오느라 행색이 추레하여 의관을 정제하고 인사드리겠다고 하더군요. 지금 한참 시비들이 새로운 옷을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못난 놈. 갈아입을 의복조차 가지고 다니지 않았단 말인가?”

“집으로 오는데 그런 걸 소지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보다 한 가지 긴히 상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남궁한상이 재빨리 화제를 바꾸자 남궁탄도 못 이기는 척 그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무엇인가?”

“참관인이 되겠다며 찾아오는 강호의 명숙들이 너무 많습니다. 더 늦기 전에 참관인부터 선정해야 할 듯싶습니다.”

“지금까지 온 자들은 누구인가?”

“황산형가(黃山邢家)의 가주인 혈호(血虎) 형일명(邢逸明), 악가장(岳家臟)의 주인인 관일창(貫日槍) 악진화(岳鎭華), 파양어은(파陽漁隱) 전무기(展無忌), 구화산의 괴걸들인 권포사절(捲抛四絶) 포씨형제(包氏兄弟). 황보세가의 황보웅(皇甫雄) 등이 왔고, 특히 황산파(黃山派)에서는 장문인을 비롯한 문파의 최고 고수 여섯 명이 모두 참석하겠다는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그 외에….”

남궁탄은 남궁한상이 거명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듣고는 절로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 중 강호에 명성을 떨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몇 명은 자신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을 지닌 절정고수들이었다. 일파의 주인인 자들의 수만 해도 열 명이 넘어서 그들 중 누구를 참관인으로 삼아야 할지 잠시 난감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통상적인 비무에서 참관인의 숫자는 세 명에서 다섯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아직 비무가 벌어지기 이틀 전인데도 남궁세가로 찾아온 강호 명숙들의 숫자는 수십 명이 넘었다. 은근히 종남파와의 비무에 대한 소문이 더 퍼지기를 바랐던 남궁탄조차도 이와 같은 무림인들의 뜨거운 반응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 오는 자들까지 포함한다면 참관인이 되겠다며 신청을 해오는 숫자는 백 여 명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그러니 더 일이 커지기 전에 정리를 해야 할 듯싶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어제 비무첩을 가져온 동중산과는 양측에서 각기 세 명씩의 참관인을 두기로 약조했습니다. 그러니 아예 지금 미리 참관인을 발표해 버린다면, 다른 사람들의 성화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전에 참관인이 정해졌다고 공포(公布)를 하자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참관인으로 선정되지 않았다고 본 가에 서운한 감정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남궁탄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게 하는 것이 잡음을 없앨 수 있겠군.”

“문제는 누구를 참관인으로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모두 수긍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제 머리로는 선뜻 떠오르는 사람이 없군요.”

“고민할 게 무어 있겠나? 세 사람이라면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인데.”

“예? 염두에 두신 분이 계십니까?”

남궁탄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입을 열었다.

“소주 혁리가의 젊은 공자와 점창파의 장로. 그리고 구궁보의 고수라면 누구라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네.”

남궁한상의 얼굴이 환해졌다.

“구궁보에서 사람이 왔습니까?”

“모용 공자의 전언(傳言)이 있었네. 비매(飛梅)를 보내겠다고 하더군.”

“비매라면 모용 공저의 최측근인 매란국죽(梅蘭菊竹) 사대신녀(四大神女) 중 하나 아입니까?”

“그렇네. 그러니 어찌 대우해 주지 않을 수 있겠나?”

남궁한상의 머리가 어느 때보다 정신없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모용 공자가 좀처럼 밖으로 내보내가 않는 사대신녀 중 한 사람을 보내 올 정도라면 모용 공자도 종남파를 그리 탐탁지 않아 한다는 뜻이로군요.”

“그것보다는 그만큼 신경이 쓰인다는 말이겠지. 그러니 이번 기회에 반드시 종남파를 꺾어야 하네. 그래야 우리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생길 것이네.”

남궁한상은 남궁탄의 말에 수긍을 한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온 강호가 주목하고 있는 이번 비무에서 종남파에 승리한다면 어느 누구도 감히 본 가를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점창파의 장로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조금 전에 혁리공이 인사를 오면서 한 사람과 동행을 했더군.”

“그가 누구입니까?”

“백리장손일세”

남궁한상은 짤막한 탄성을 터뜨렸다.

“아! 점창파의 사나운 늙은 매라는 독검취옹 말이군요. 혁리공의 손길이 그에게도 미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남들은 용봉쌍이(龍鳳雙二) 중의 고룡(枯龍) 혁리당(赫里幢)을 혁리가의 유력한 후계자로 보고 있지만,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혁리공이 더욱 가증성이 높을 것 같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혁리공은 정말 나이답지 않게 만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가끔 그와 대화를 나누고 보면 저도 모르게 등골에 식은땀이 흐를 때가 있습니다.”

“심기가 깊어서 속을 알 수 없고,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혁리공의 무서운 점이지.”

남궁한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그전부터 궁금한 것이 있는데. 혁리가에서는 왜 그들 형제들의 이름에 하나같이 ‘벌레충(?)’자를 붙였을까요? 원래 사람 이름에는 잘 안 쓰는 단어이지 않습니까?”

남궁탄의 얼굴에 모처럼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건 나도 예전에 들은 바가 있지. 원래 혁리가에서는 본 가처럼 직계들의 이름에 같은 자를 돌림으로 넣는다고 하더군. 혁리가의 가주인 혁리아(赫里鴉)의 형제들은 모두 ‘세조(鳥)’자를 쓴다고 하네.”

“그런데요?”

“새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가 무엇인가? 바로 벌레가 아닌가? 그래서 혁리아가 자기 자식들의 이름에 모두 ‘벌레 충’자를 넣었다고 하네.”

남궁한상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자식들을 자기의 먹잇감으로 보고 있다는 뜻입니까?”

“그만큼 애지중지한다는 의미겠지. 아무려면 부모가 자식을 한낱 먹이로 생각하겠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남궁탄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혁리가의 당대 가주인 혁리아는 돈에 관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밖에서 누군가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자 선이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남궁한상이 반색을 하며 남궁탄을 바라보았다.

“선아가 온 모양입니다. 저는 이만 나가 보겠으니 부자간에 모처럼 회포를 풀어 보십시오.”

“회포는 무슨. 들어오라고 이르게.”

“알겠습니다.”

남궁한상이 밖으로 나간 후 곧이어 말끔하게 새 옷으로 갈아입은 남궁선의 수려한 모습이 나타났다.

“불초자식이 아버님을 뵙옵니다.”

남궁선이 공손하게 절을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남궁탄이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떠나더니 무슨 마음을 먹었기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냐?”

남궁선은 몸을 일으킨 다음 담담한 눈으로 남궁탄을 응시했다. 차분한 가운데 힘을 느끼게 하는 눈빛이었다.

“강호의 바람도 생각만큼 따사롭지는 않더군요. 차가운 바람에 몇 차례 휩쓸리고 났더니 갑자기 집이 그리워졌습니다.”

남궁탄은 그의 전신을 쓰윽 훑어보았다.

“찬바람을 맞은 것치고는 몸 상태는 괜찮아 보이는구나.”

“바람은 몸이 아니라 가슴으로 불어오더군요.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가슴은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가슴이 상처투성이라고? 그게 삼 년 만에 보는 아비에게 할 소리냐?”

남궁탄이 질책했으나 남궁선은 조용하게 대꾸했다.

“그만큼 단단하게 여물어졌다고 생각하십시오.”

남궁탄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런 무슨 의미냐?”

“들으신 대로입니다. 이런저런 시련을 겪고 났더니 이제는 어지간한 일로는 마음이 흔들리거나 상처를 받지 않게 되더군요.”

남궁탄은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 보았으나 남궁선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동안 남궁선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남궁탄은 다소 표정이 풀어지며 한결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에 종남파와 비무를 벌이기로 한 것은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세가에 가까이 온 다음에야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런 중대한 시기에 네가 돌아올 생각을 한 것도 운(運)이라면 운일 것이다. 종남파와는 세 번의 비무를 하기로 했다. 그중 한 번은 네가 책임져 줘야겠다.”

“어떤 식으로 비무를 하기로 했습니까?”

“소년과 청년, 중년층에서 한 명씩 나와 겨루기로 했다.”

언뜻 남궁선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그런 식의 방식은 친선(親善)을 위한 비무에나 사용하는 것인데, 종남파에서 그런 방식을 제안했단 말입니까?”

“종남파가 아니라 우리가 제안을 했고, 종남파에서 승낙을 한 것이다.”

“왜 그런 식의 제안을 하신 겁니까?”

남궁탄은 잠시 침음하다가 마음을 결정한 듯 남궁선을 향해 순순히 그 안의 내막을 말해 주었다.

“이번에 종남파에서 온 인물들 중 우리가 경계해야 할 자는 두 명뿐이다. 바로 옥면신권과….”

“신검무적이지요.”

“바로 그렇다. 하지만 옥면신권은 갑자기 사정이 생겨 이번 비무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더구나.”

남궁선의 눈가에 희미한 의구심이 떠올랐다.

하나 그는 옥면신권에게 사정이 생긴 것에 남궁탄의 의도가 개입했는지를 차마 묻지 못했다. 아무리 남궁선이라고 해도 아버지의 명성에 치명적인 누를 끼칠 수도 있는 의심을 감히 자신의 입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경을 쓸 자는 신검무적 한 사람밖에 없지. 문파 간의 비무에서 한 사람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길은 질 때까지 계속 싸울 수 있는 연승식 외에는 없다. 그러니 우리가 연승식만 피하게 되면 충분히 그들에게서 승산이 있다는 말이다.”

남궁선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남궁탄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마침 이번에 온 종남파 고수들의 면면을 보면 신검무적의 제자인 어린 소년이 한 명 있고, 신검무적의 사제인 폭뢰검이란 친구와 비천호리 동중산 외에 중년의 고수 한 사람이 섞여 있다. 그들의 진용을 감안해서 양측 모두 가장 합당한 방법을 제안한 것이다.”

양측 모두에게 합당한 제안이라고 했지만 남궁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본 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방식이다.’

비무에 참가할 수 있는 종남파 고수들은 정해져 있는 반면에 남궁세가에서는 얼마든지 새로운 고수들을 출전시킬 수가 있다.

더구나 가뜩이나 얼마 되지 않는 종남파 고수들 중 가장 유력한 인물인 옥면신권마저 빠져 버린다면 종남파에서 내세울 수 있는 패는 극도로 제한되어 버리는 것이다.

특히 소년과 청년, 중년으로 나이 제한을 두었다는 것에 더욱 큰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소년이라고 하면 종남파에서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신검무적의 어린 제자뿐일 것이다. 그에 비해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온 남궁세가의 소년 기재들은 수십 명이 넘었다. 고르고 고른 인재들 중에서 그 소년을 능가할 사람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중년층의 비무라면 더욱 뻔했다.

종남파에서는 기껏해야 비천호리 동중산이 나오거나 아직 종남파의 소속인지 확인되지도 않은 중년의 고수가 나올 텐데. 그들 중 누구라고 해도 남궁세가의 최고 고수들에게는 미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결국 종남파에서 승산을 가져 볼 수 있는 것은 신검무적과 폭뢰검이 있는 청년층의 비무인데, 그래 보았자 세 번의 비무에서 겨우 일승(一勝)을 올릴 수 있을 뿐이다.

남궁선은 잠시 상념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종남파에서 그 방식이 자기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승낙한 것이 놀랍군요. 종남파에서 비무 방식을 상의하러 온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비천호리 동중산이다.”

“듣기로는 동중산은 비록 무공은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누구보다도 강호 경험이 풍부하고 두뇌가 뛰어난 인물이라고 하던데,그런 방식을 선뜻 수용했다니 강호의 소문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군요.”

“그거야 종남파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옥면신권이 있다면 그들도 다른 방식을 선택했을 것이다.아무튼 그 방식은 양측에서 합의한 것이니 누구도 그에 대해서는 다른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남궁탄이 더 이상 그 문제는 재론하지 말라는 듯 단호하게 말하자 남궁선은 화제를 바꾸었다.

“본 가에서는 누구를 출전 시킬 생각이십니까?”

“소년층에서는 기아가 나가고,청년층에서는 너를 내보낼 생각이다.”

“중년층에서는 누구를 생각하십니까?”

“그건 상황을 보아 결정할 것이다.”

“상황을 보다니요?”

“기아는 당연히 승리할 것이다. 문제는 청년층인데, 종남파에서 신검무적이 나오지 않는다면 네가 승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럴 경우에는 중년층의 비무는 형식적인 것이 될 테니 누구를 내보내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남궁선은 절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종남파에서 신검무적이 나온다면?”

그런 상황을 생각하자 아무리 침착한 성격의 남궁선이라도 절로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며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던 것이다.

남궁선은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이 세상에서 신검무적과 겨루어 자신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남궁탄은 처음부터 그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재차 말을 이었다.

“너의 승리가 불확실하다면 승부는 중년층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때는…..”

남궁선의 시선이 남궁탄의 입으로 향했다.

남궁탄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때는 별수 없이 형님에게 신세를 져야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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