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4권 모산지연(姆山之宴)편 : 10화
제 249장 현시천분(顯示天分)
들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여인이었다. 여인답지 않은 훨씬 높은 키에 엷은 하늘색 저고리와 짙은 남색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미모가 상당히 뛰어남을 알 수 있었다. 특히 풍성한 머리를 묶지 않고 자연스레 어깨 위로 풀어 내린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남색 치마의 여인은 장내에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전혀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연회석으로 걸어왔다. 그 당당한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거나 남들의 시선에 하등 꺼리는 것이 없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모습이었다. 혁리공은 이번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여인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담 소저(譚小姐). 잘 쉬셨습니까?”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목욕 시설은 상당히 뛰어나군요. 덕분에 몸이 아주 개운해졌어요.”
그녀의 음성은 표정만큼이나 자신에 찬 것이었다. 젊은 여자의 입으로 많은 남자들 앞에서 목욕 운운하는 것은 다소 민망한 일이었으나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어색하지 않게 그녀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머리카락은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듯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그녀의 뺨은 유난히 윤기가 흐르는 데다 붉은 기운을 머금고 있어서 더욱 매혹적으로 보였다. 혁리공은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에 도취된 듯 잠시 가만히 그녀를 보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그녀를 자리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오늘 귀한 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힐끔 견동을 향했다. 견동은 웬일인지 그녀가 나타날 때부터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견 대협이라면 이미 조금 전에 질리도록 상대해 봤어요.”
그녀에게 세상 사람은 두 종류 중의 하나였다.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견동의 솜씨는 이미 겪어 보았으니 자연스레 그녀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이다.
“담 소저의 기대를 충족시켜 드리지요.”
혁리공은 과장스런 동작으로 진산월을 소개했다.
“이분은 당금 강호의 제일 검객인 신검무적 진산월, 진 장문인 이십니다.”
여인의 시선이 못 박히듯 진산월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진산월은 그녀의 따가울 정도로 강렬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담담한 표정으로 포권을 했다.
“종남의 진산월이오.”
궁장 미녀는 마치 탐색이라도 하듯 진산월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있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금릉 담가(譚家)의 담옥교(譚玉嬌)예요.”
차분한 음성이었으나,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중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진산월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봉황(刀鳳凰)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소. 오늘 담 소저를 만나게 되니 소문이 거짓이 아님을 알겠구려.”
도봉황 담옥교는 강남에서 첫 손가락에 꼽는 최고의 명문(名門)인 담씨세가의 가주 강남절풍도 담중호의 유일한 여동생이었다. 담씨세가는 대대로 도법(刀法)으로 명성을 떨쳐 왔거니와, 전대가주인 도군(刀君) 담형업(譚瑩業)의 대에 이르러서는 강호성을 넘어 강남 무림 전체에서 제일가는 명문 세가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담형업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후 약관을 갓 넘긴 나이에 담씨세가의 가주에 오른 담중호는 짧은 시간 내에 가문을 정비하여 더욱 발전시켰다. 당금에 이르러서 담씨세가는 누구도 부인 못할 강남 최고의 명문 세가가 되었고, 담중호 본인은 젊은 층의 고수들 중 강호 무림 제일의 도객(刀客)으로 불리고 있었다.
담옥교는 그런 담중호가 가장 아끼는 여동생으로, 여인답지 않게 도법에 관한 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불과 열여섯의 나이에 처음으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순식간에 강남 무림의 이름난 도객 세 명을 거푸 격파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나, 그녀의 명성이 강호를 진동시킨 것은 그로부터 삼 년 후, 그녀가 열아홉의 생일을 맞이한 날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당시 그녀는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앞에서 봉명십팔도(鳳鳴十八刀)를 선보였는데, 그녀의 칼이 뿜어내는 위력에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도저히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젊은 여인의 몸으로 펼치는 것이라곤 볼 수 없는 놀라운 수준의 도법이었다. 그녀의 도법이 마치 한 마리 봉황이 춤을 추는 것 같다고 하여 그때부터 모두들 그녀를 도봉황이라고 불렀다. 그날 이후 그녀는 일 년 동안 강남 일대의 도객들을 찾아다니며 비무를 했는데, 열한 번의 비무에서 모두 승리하여 다시 한 번 천하를 경동케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십 년 내로 여중 제일 고수(女中第一高手)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고, 적어도 도법에 관한 한은 이미 여자들 중 최고의 실력자라 믿고 있었다.
그 찬란한 명성의 담옥교가 이토록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이라고는 누구도 선뜻 믿지 못할 것이다. 그제야 중인들은 조금 전에 견동이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는 사람이 담옥교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 진산월의 생각은 중인들과는 조금 달랐다. 견동은 강호에 알려진 대로 쾌도의 달인이었다. 더구나 그의 쾌도는 일단 발출되면 반드시 피를 본다고 할 정도로 살기가 짙은 무공이었다. 하나 견동으로서는 담옥교와의 승부에서 여느 때처럼 전력을 다해 상대를 죽이거나 피를 볼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녀를 자신의 목숨처럼 아낀다는 담중호의 가혹한 보복을 받을 게 분명했다. 아무리 견동이 강호 제일의 쾌도라 해도 강남 제일 세가 가주의 분노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터였다.
결국 견동으로서는 그녀의 뒤에 있는 담중호 때문에 한쪽 팔을 묶고 싸운 것이나 마찬가지인 처지가 된 것이다. 견동이 화를 낸 것은 그녀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일 거라는 게 진산월의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이 맞는지는 견동 본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담옥교가 자리에 앉자 비로소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풍악을 울리는 악사나 춤추고 노래하는 가기(歌妓)는 없었으나 장내의 분위기는 제법 흥겨웠다. 누구보다 발이 넓다는 세간의 평가답게 여불회는 아는 것이 많고 말도 잘해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그의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던 기아향도 술이 몇 잔 들어가자 그의 말에 장단을 맞추며 중인들의 호응을 이끌었다. 뜻밖에도 여불회 부부의 말 상대가 되어 장내의 분위기를 주도한 사람은 동방야였다. 운남에만 있어서 강호의 견문이 얕을 줄 알았던 동방야는 의외로 장내의 누구보다도 강호의 구석구석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여불회와 죽이 잘 맞았다. 그들 세 사람의 주고받는 이야기가 어찌나 재미있었던지,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견동마저 몇 차례나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을 정도였다. 진산월이 담담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동중산이 그에게 술을 따르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행히 이번 연회는 별문제가 없을 듯싶습니다.”
진산월은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그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동중산의 눈이 재빨리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았다. 아무도 자신들을 특별히 주시하는 사람이 없는 듯하자, 그는 이내 다시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 특별히 위험한 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설사 혁리공이 무언가 일을 꾸미려 한다 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으로는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겁니다.”
그의 음성 속에는 자신들의 실력에 대한 강한 자신감과 진산월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비록 이들 중 고수가 아닌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는 강호 제일 쾌도와 무림 최고의 여고수 중 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는 자신들의 힘으로 능히 그들을 감당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진산월은 조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동중산은 순간적으로 움찔하다가 한결 신중해진 표정으로 머리를 숙였다.
“장문인께서 다른 생각이 있으시면 어리석은 제자에게 하교해주십시오.”
“보이는 칼날은 무섭지 않다. 정말로 무섭고 경계해야 할 것은 보이지 않는 칼날이다.”
선문답(禪問答) 같은 말이었으나, 동중산은 누구보다 총명한 사람이라 단번에 진산월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그렇다. 우리에게 공개적인 위협을 할 생각이었다면 혁리공이 단순히 이자들만을 불러들였을 리가 없다. 그가 노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무엇일 것이다.’
동중산은 곰곰히 생각해 보았으나 지금 당장은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때 무심코 고개를 돌린 동중산의 눈에 혁리공의 얼굴이 들어왔다. 혁리공은 친구의 화옥과 무언가 대화를 나누다가 우연히 듯 진산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그의 얼굴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야릇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 미소는 이내 사라져 버렸으나, 동중산은 그 미소에 담긴 짙은 악의와 조롱 섞인 비릿함에 가슴 한구석이 섬뜩해졌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이번 연회가 결코 순탄하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즈음, 동방야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오늘 이곳에는 강호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분들이 많이 계시오. 이 넓은 강호에서 오늘 헤어지면 언제 또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는데, 어렵게 만난 이런 기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않겠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그와 어느 정도 안면을 익히게 된 여불회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하하,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려고 그렇게 거창한 말을 꺼내는 거요?”
동방야도 따라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여 형도 내 말을 들으면 쌍수를 들고 환영을 할 거요. 내가 장담하겠소.”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해지는군. 어서 말해 보시오.”
동방야는 중인들을 둘러보고는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 입을 열었다. “이곳에는 강호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검객도 있고. 눈부신 쾌도의 달인도 있으며, 천하에서 가장 칼을 잘 쓰는 여인도 있소. 뿐만 아니라 입담 좋은 부부도 있고, 강남에서 가장 부귀한 집안의 공자도 있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거요?”
“잠시 내 말을 들어 보시오. 이렇게 다양한 실력을 지닌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 모처럼 만난 김에 서로의 실력을 감상하는 자리를 만들어 보자는 말이오.”
동방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불회가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질렀다.
“야호!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오. 난 무조건 찬성이오. 당신도 그렇지?”
여불회가 옆에 앉은 기아향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며 묻자 기아향은 그를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좋은면 당신이나 찬성하면 되지 왜 나는 끌고 가려는 거예요?”
“그래서 반대한단 말이야?”
기아향은 배시시 웃었다.
“그럴 리가요. 나도 이런 일은 대찬성이에요. 정말 재미있겠네요.”
“그렇지? 역시 우리는 일심동체라니까.”
여불회가 활짝 웃으며 당장이라도 그녀를 끌어안을 듯하자 동방야가 손사래를 쳤다.
“그런 짓은 나중에 숙소에 들어가면 하도록 하고, 다른 분들의 의견도 들어 보겠소. 우선 오늘 연회의 주인공인 혁리 공자의 생각은 어떠시오?”
혁리궁은 난처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다른 분들이야 모두 무공의 고수들이니 내세울 게 있겠지만, 저는 그렇지 못하니 보여 드릴 게 없군요.”
“각자가 자신이 잘하는 걸 하면 되는 걸세. 검법에 자신 있는 사람은 검법을 선보이면 되는 것이고, 말솜씨가 뛰어난 사람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되는 것이고, 돈 버는 재주가 비상한 사람은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라도 말해 주면 좋지. 단…”
동방야는 제법 단호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는 이야기를 해야 하네. 다시 말해서, 어딘가 다른 곳에서 들었거나 누군가가 한 이야기를 되풀이하면 안 된다는 말일세. 어떤가?”
혁리궁은 씁쓸하게 웃었다.
“동방 대협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저도 찬성을 하겠습니다.”
동방야의 시선이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진 장문인과 종남파의 고수분들은 내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진산월은 먼저 성락중에게 의향을 물었다.
“사숙께선….”
성락중은 의외로 선뜻 승낙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술만 마시는 연회라 약간 지루했던 참인데, 제법 흥미로운 시간이 되겠군. 나도 참여하겠소.”
진산월의 시선이 전흠에게 향했다. 전흠은 혼자 붕어처럼 한쪽에서 술만 마시고 있던 터라 이미 불쾌하게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담옥교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 사람들은 솜씨 자랑을 어떻게 하는지 알아보는 것도 좋겠지. 나도 찬성입니다.”
하지만 동중산은 진산월이 묻기도 전에 고개를 내저었다.
“제 실력으로는 공연히 다른 분들의 눈만 어지럽힐 것 같으니 저는 그저 조용히 구경만 하겠습니다.”
“그럼 본 파에서는 모두 세 명이 나가는 것으로 하겠소.”
진산월의 말에 동방야는 반색을 했다.
“진 장문인께서도 나서 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소. 견동이야 당연히 찬성할 테고, 화 공자와 담 소저께선?”
견동은 동방야가 자신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넘어가는데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화옥과 담옥교 또한 주저하는 기색이 없이 승낙을 하여 연회장은 난데없이 솜씨를 자랑하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동방야가 중인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 일을 주창한 사람이 먼저 나서는 게 순리일 것 같소. 이후에는 나이순으로 나오는 게 어떻겠소?”
여불회가 들뜬 음성으로 대꾸했다.
“순서야 아무려면 어떻소? 아무튼 난 상관없으니 동방 형이 알아서 정하시오.”
“하하, 그럼 반대가 없는 것으로 알고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소.
내 무공 실력이야 여기 계신 몇몇 고수들의 눈에는 차지도 않을 만큼 변변치 않은 것이고, 다만 예전에 그럭저럭 쓸 만한 눈요깃거리 한 가지를 배운 게 있으니 그걸 보여 드리도록 하겠소.”
동방야는 연회장의 중앙으로 걸어 나와서 몸을 멈춰 세우더니 한 차례 깊은 심호흡을 했다. 그런 다음 양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고 마보(馬步)를 취한 후, 왼손을 옆구리에 대고 천천히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흐흡.”
신음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와 함께 그가 눈을 부릅뜨자 내뻗은 오른손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기공(氣功)을 체외로 발출하는 이러한 수법은 상당히 고명한 것이기는 했으나, 이곳에 모인 고수들이라면 대부분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중인들의 얼굴에는 희미한 실망감이 감돌고 있었다.
하나 그런 중인들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동방야가 채자 기합을 내지르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흐합!”
분명 푸르스름한 기운이 흘러나왔던 그의 손에서 이번에는 붉은색 기운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한 사람의 몸에서 전혀 다른색의 두 가지 기운이 발출된다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혀 다른 두 개의 기공을 익히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반된 기공을 유형화(有形化)시켜 체외로 발출할 정도의 경지에 오른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놀라운 일이 시작에 불과했다.
“이얍!”
동방야가 다시 한 차례 고함을 내지르자 그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붉은색 기운이 노란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인들은 이 기경(奇驚)할 광경에 모두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 사람이 한 가지도 아니고 세 가지의 전혀 다른 기공을 유형화시킬 수 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동방야가 기합을 지를 때마다 기운은 계속 색이 바뀌고 있었다.
모두 세어보니 색깔이 바뀐 것이 일곱 번이나 있었다.
그것은 실로 무림의 상식을 초월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누구도 한 사람이 몸 안에 일곱 개의 각기 다른 공력을 유형화시킬 정도로 익힐 수 없었다. 서로 다른 성질의 기운이라면 두 개만 모여도 상충(相衝)하여 오히려 치명적인 상태에 빠지기 쉬웠고, 같은 성질의 기운은 합치려고 해서 종내에는 결국 한 가지 기운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동방야는 기합 일곱 개의 색을 띤 기운을 발출했으니 중인들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후우….!”
동방야가 깊은 숨을 내쉬자 그제야 그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와아! 대단하다!”
여불회 부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동방야는 멀쩡한 이마의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중인들에 포권을 해 보였다.
“변변치 않은 잔재주에 이토록 환호를 보내 주시니 실로 고맙기 그지없소.”
여불회가 신통한 사람을 보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전신을 살펴보았다.
“대체 동방 형은 몇 가지 공력을 익히고 있는 거요?”
동방야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한 가지 뿐이오.”
여불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데 어찌 각기 다른 색의 기운을 발출할 수 있단 말이오?”
“내가 익힌 건 칠채변환기공(七彩變幻氣功)이라는 것인데, 진기가 유통되는 혈도 몇 군데를 바꾸는 것만으로 진기의 색깔을 변화시킬 수가 있소.”
“아니 세상에 그런 무공도 다 있단 말이오?”
“강호가 얼마나 넓고 얼마나 많은 무공들이 있는데 그런 거 하나쯤 없겠소? 다만 보기와 달리 위력 자체는 그리 대단하지 않아서 신공(神功)이라 하기에는 손색이 있소. 그래서 단순한 눈요깃 거리라고 한 거요.”
“그 정도라면 눈요깃거리가 아니라 놀라운 기공(奇功)이라고 할 수 있을 거요. 아무튼 나로서는 모처럼 개안(開眼)한 듯한 충격을 느꼈소이다.”
“좋게 봐 주었다니 고맙소”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본 채 친근한 웃음을 교환했다.
동방야가 다시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미약한 내 재주는 이것으로 그치고,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도록 하겠소. 조금 전에 말한 대로 나이순으로 하게 되면, 아무래도 종남파의 성 대협께서 먼저 수고해 주셔야겠소.”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성락중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옆구리에 장검 한 자루를 찬 채 대청의 중앙으로 가서 우뚝 섰다.
“이 사람은 아직 동방 대협같이 희한한 무공은 익히지 못했소. 평생을 검을 벗 삼아 살아왔으니, 오늘 모처럼의 흥겨움을 한바탕 춤사위로 풀고자 하오.”
이어서 성락중은 느릿느릿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을 든 채 대청 한가운데 조용히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고고한 학과 같았다. 청수한 이목의 그가 오늘따라 한층 더 헌앙해 보였다.
그러던 한 순간, 그의 손에 들린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는 이의 넋을 앗아 버릴 듯한 아름다운 검무(劍舞)가 시작되었다.
어느 것이 손이고 어느 것이 검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유연하게 움직이며 허공을 가르고 있는 검광이 눈부시다고 느낀 순간 검로는 손짓으로 변해 버렸고, 힘차게 내뻗은 손동작이 경쾌하다고 생각되는 찰나 어느새 한 자루 검이 그 공간을 꿰뚫고 있었다.
번쩍이는 검광과 부드러운 손짓이 물 흐르듯 섬세한 동작과 결합하여 때로는 성난 파도처럼, 때로는 고요한 미풍처럼 장내의 공간을 휘돌다가 사라져 갔다.
중인들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화려한 검무에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정신없이 몰두했다.
“아!”
누군가의 짧은 탄성이 흘러나오자 그제야 중인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언제 검무가 끝났는지 성락중은 처음의 위치에 단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수중에 검 또한 검집 안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정말 대단하다….!”
여불회가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더니 성락중을 향해 마구 찬사를 토해 냈다.
“성 대협 덕분에 오늘 이 못난 사람이 검의 새로운 경지를 맛보게 되었소.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성락중은 담담하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별말씀을. 변변치 않은 솜씨로 공연히 눈만 어지럽혀 드린 것 같아 민망할 따름이오.”
“무슨 그런 겸손한 말씀을. 오늘 성 대협이 보여준 검무는 나로서도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이었소. 정말 환상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검무였소.”
“과찬에 감사드리오.”
성락중은 주위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진산월이 그를 맞으며 웃어 보였다.
“멋진 장괘장권구식과 천하삼십육검이었습니다. 사숙 덕분에 본 파 무공의 새로운 경지를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뜻깊은 저녁이로군요.”
그의 말을 들은 동중산이 외눈을 크게 떴다.
“어쩐지 동작이 너무나 아름다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다고 생각했었는데, 장괘장권구식과 천하삼십육검이었군요.”
그에 성락중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문득 흥취가 돋아 본 파 무공의 기초라 할 수 있는 두 가지 무공을 섞어 보았네. 몇 가지 변초(變超)를 임의로 바꾸었는데,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로군.”
진산월은 그의 노력에 경의를 표했다.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당장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숙께서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본 파의 무공을 수련해 왔는지 여실히 알 수 있겠더군요. 장문인으로서 사숙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별말을. 문파의 제자로서 당연한 일이 아닌가?”
성락중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그가 조금 전에 보여 준 검무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절학(絶學)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장괘장권구식에 바탕을 둔 손짓은 힘차고 위력적이었으며, 천하삼십육검을 부드럽게 풀어내어 변화를 준 검초는 경쾌하고 한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성락중이 공력을 끌어 올리지 않았기에 단순히 아름답게만 보였으나, 공력을 사용한다면 전혀 다른 무서운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다. 즉흥적인 생각으로 두 가지의 무공을 섞어 새로운 무공을 만든다는 것은 두 무공에 대한 완벽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진산월은 성락중에게 진심으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대청의 중앙에는 어느새 여불회가 서 있었다. 여불회는 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워낙 놀라운 무공을 본 직후라서 내가 무얼 펼쳐도 대단치 않아 보일 테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소. 그렇다고 명색이 무인 된 몸으로 그냥 있을 수는 없어서 옛날이야기나 하나 하려고 하오.”
중인들은 그가 난데없이 만담꾼처럼 옛날이야기를 한다고 하자 일부는 실망하기도 하고, 일부는 흥미로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여불회는 사람들의 반응이야 어떤지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내가 워낙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 좋아하고 사람 사귀는 걸 좋아한다는 건 모두들 알고 있을 거요. 내가 사귄 친우 중 한 명에게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소. 나보다 몇 살 많기는 했지만, 만나면 둘이 술만 죽어라고 마시는 사이였소.”
말을 하며 여불회는 술 마시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자 그에게서 제법 멀리 떨어진 탁자 위의 술잔 하나가 허공을 날아 그의 손안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마침 여불회가 술잔을 들고 술을 들이켜는 자세를 취하고 있을 때라 그 술잔은 정확히 그의 입술에 닿아 술잔 속의 술이 그의 입으로 흘러들어 갔다. 단순한 시늉이 진짜 행동이 된 것이다.
“와 하하!”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모두 웃었다. 하나 일부 사람들은 여불회의 정교한 공력 운용에 감탄하는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술잔 하나를 공력으로 끌어오는 건 공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나, 지금처럼 자연스런 동작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술 한 잔을 맛있게 마신 여불회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 술 좋아하는 친구가 어느 날 말하기를, 자기는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을 알고 있다는 거요. 대체 얼마나 미련하기에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묻자, 그는 탁자를 탁! 치면서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소. 술부터 더 가져오게!”
여불회가 탁자를 내리치는 시늉을 하자 멀리 있는 탁자가 흔들리며 그 위에 놓인 술병이 그에게로 날아왔다. 여불회는 그 술병을 자연스럽게 잡으며 자신이 들고 있는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래서 내가 말했지. ‘그래, 원 없이 마시도록 해 주겠네. 어서 마시고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게.’ 내 친구는 내가 따라 준 술을 단숨에 들이켜더니 ‘끄윽!’하고 트림을 토하더군. 지독한 술 냄새가 사방으로 풍기는 바람에 나는 코를 막고 숨을 멈춰야만 했소.”
술잔을 든 여불회가 끄윽 하고 트림하는 시늉을 하자 그의 손에 들린 술잔의 술이 마치 안개처럼 자욱하게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와 함께 진한 주향(酒香)이 대청 안을 가득 메웠다. 한 잔의 술을 호흡 한 번에 안개처럼 작은 물방울로 만든다는 것은 어지간히 공력이 심후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공력의 깊이와 운용의 능숙함에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그의 이야기에 빠져 들어갔다.
“그 친구가 말하기를, ‘아내가 죽을병에 걸려 앓아누운 남자가 있었네. 그 남자에게는 어린 딸도 하나 있었지.’ 그래서 내가 말했소. ‘불쌍한 부녀로군.’ 그러자 그는 ‘아니야, 불쌍한 건 여자지. 몸도 아픈 데다 자신이 죽으면 자신 없이 살아가야 할 남편과 자식 걱정까지 해야 하니 말일세.’ 라고 했소. 듣고 보니 옳은 말인지라, ‘그럼 불쌍한 여자로군.’ 이라고 했더니, ‘진짜 불쌍한 건 그 남자지. 여자야 죽으면 그만이지만, 어린 딸과 함께 살아가려면 얼마나 힘들겠나?’ 라는 게 아니겠소? 나는 화도 나고 어이도 없어서 그 친구에게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소. ‘대체 불쌍한 건 여자인가, 남자인가?’ 그러자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여불회는 중인들에게 묻는 듯 양손을 활짝 벌렸다. 그러자 술병이 있던 탁자가 그의 앞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여불회는 탁자 위로 훌쩍 뛰어올라 앉으며 말했다.
“제일 불쌍한 건 그 딸아이지. 엄마가 죽고 홀아비인 아빠와 함께 살아가야 하니 말일세.’ 나는 너무 화가 나서 그의 턱을 한 대 치고 싶었지만, 그의 무공이 나보다 강한지라 간신히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소. 대신 애꿎은 탁자만 박살 내고 말았지.”
그가 바닥을 후려치는 자세를 취하자 그가 올라앉은 탁자가 부서져 내렸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탁자의 상판은 부서졌으나 네 개의 기둥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여불회는 두 팔과 두 다리를 활짝 펴서 네 개의 기둥 위에 엎어지듯 엎드려 버렸다.
그 모습이 너무도 우스꽝스러워서 중인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여불회는 두 손으로 잡고 있던 나무 기둥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생각 같아서는 나무 몽둥이로 그의 다리라도 부러뜨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내 몸이 벌집이 될 것 같아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물었소. ‘그래, 자네 말대로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가족들이라고 하세. 그런데 미련한 사람 이야기는 언제 나오나?’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했소.’지금 하고 있지 않나?’ ‘그럼 그 불쌍한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남자란 말인가?’ ‘그렇지.’ ‘왜 그런가?’ ‘아내를 살리려면 살릴 수도 있었네. 그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람의 목숨도 살릴 만한 절세의 영약이 있었거든.’ ‘그런데?’ ‘목이 마르군.’ ‘이런 제기랄.'”
여불회는 네 기둥 위에 엎드린 채로 양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술잔과 술병이 동시에 날아왔다. 여불회는 양 손에 들고 있던 두 개의 막대를 바닥에 나란히 꽂고 몸을 뒤집었다. 자연스레 그의 뒤통수가 바닥에 꽂힌 두 개의 막대에 닿았고, 두 다리도 두 개의 기둥 위에 올려졌다. 엎드린 자세에서 하늘을 보고 누운 자세가 된 것이다. 그런 상태로 여불회는 자유로워진 양손으로 술병과 술잔을 잡은 다음 술잔에 가득 술을 따라서 허공으로 번쩍 쳐들었다.
“자, 어서 마시고 빨리 뒷이야기를 해 주게. 대체 근처에 아내를 살릴 영약이 있는데 왜 그자는 달려가서 영약을 구하지 않은 건가?’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나?’ ‘그랬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이라고 했을 게 아닌가?’ ‘내가 언제?’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럼 그 남자가 아내를 살릴 영약을 구했단 말인가?’ ‘아니.’ 난 너무 화가 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술잔을 들어 그의 얼굴에 부어 버렸소.”
여불회는 술잔을 바닥에 던졌다. 그런데 술잔이 깨어지기는커녕 원래의 모양 그대로 바닥을 뚫고 들어가 버렸다.
“그 친구는 머리에 술을 뒤집어쓴 채로 멍하니 나를 쳐다보더군. 대체 내가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소. 그 얼굴을 보자 나는 더 화가 나서 이번에는 아예 술병을 집어 던졌소.”
여불회는 술병을 내던졌다. 술병은 술잔이 박힌 옆자리에 똑같은 모양으로 바닥에 박혔다. 작은 술잔이야 공력을 주입하면 어렵지 않게 바닥에 박을 수 있다 해도 굴곡이 심하고 커다란 술병을 단순한 손동작으로 바닥에 박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여불회는 네 개의 기둥 위에 아슬아슬하게 누운 채 장난감을 던지듯 가벼운 동작으로 그런 일을 했으니 지켜보는 사람들로서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는 날쌘 동작으로 술병을 피하더니 소리치는 것이었소. ‘대체 왜 화를 내는 건가?’ 나도 지지 않고 소리쳤지. ‘대체 그 남자가 영약을 구했다는 건가, 못 구했다는 건가?’ ‘당연히 못 구했지.”그래서 여자는 죽었나?’ ‘죽었지.’ ‘그럼 대체 그 남자가 왜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들어 보게. 그 남자는 영약을 구하러 달려가긴 했지. 그런데 영약의 주인이 영약을 주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네.’ ‘그게 뭔데?’ ‘아내의 목숨에 비하면 아주 하잘것없는 거였네.’ ‘그게 뭐냐니까?’ ‘그의 사제(師弟) 한 사람을 달라고 했네.”뭐라고?’ ‘그에게 사제 한 명이 있었는데, 나름대로 상재(商材)가 있었던 모양일세. 그래서 그가 탐이 나서 달라고 한 걸세.’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고?’ ‘그래.’ ‘그래서 결국 아내가 죽었단 말이지?’ ‘그런 걸세.’ 나는 버럭 소리를 내지르지 않을 수 없었소. ‘그건 미련한 게 아니라 정신이 나간 거야. 대체 그 미친 작자가 누구인가?’ 그러자 내 친구는 정말 모처럼 보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소. ‘미친 게 아니라 현명했던 걸세. 그 사제가 없으면 그가 있는 문파는 제대로 운영될 수가 없거든. 그는 결국 문파와 아내를 바꾼 셈이지.’ 나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소. ‘그런 어리석은 짓을……’ ‘그래, 그래서 내가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이라고 한 걸세. 더 웃긴 게 뭔지 아나?’ ‘아직도 그 이야기에 끝나지 않은 사연이 남아 있단 말인가?’ ‘그래. 그의 아내가 죽자 그의 아내를 남몰래 짝사랑했던 사제가 그를 원망하며 떠나 버린 걸세. 결국 그 남자는 아내와 사제를 모두 잃고 말았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이제 알겠지? 내가 왜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이라고 했는지를.'”
여불회의 말이 끝났으나 주위는 조금 전과 달리 아주 조용했다. 중인들은 무언지 모를 숙연한 분위기에 젖어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있었다. 여불회는 누워 있던 나무 막대 위에서 내려와 양손을 슬쩍 휘둘렀다. 그러자 바닥에 박혀 있던 술병과 술잔이 그의 손으로 날아왔다.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른 여불회는 단숨에 한 잔 마시고는 빙긋 웃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소. ‘이 이야기의 교훈이 무언지 아나? 일은 해치울 수 있을 때 해치워야 한다는 걸세. 그래서 나는 눈앞에 술이 있으면 결코 머뭇거리지 않고 단숨에 들이켜지.’ 그러면서 그는 앞에 놓인 술잔의 술을 마시는 것이었소. 바로 이렇게 말이오.”
그 말에 굳어졌던 중인들의 표정이 비로소 활짝 펴지며 무거웠던 분위기가 원래대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