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4권 모산지연(姆山之宴)편 : 1화

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24권 모산지연(姆山之宴)편 : 1화군림천하 24권 모산지연(姆山之宴)편 : 1화


제 240장 공간검도(空間劍道)

먼저 몸을 움직인 사람은 남궁연이었다. 움직였다고 해 봤자 수중에 들고 있는 장검을 슬쩍 앞으로 내뻗어서 가볍게 휘저었을 뿐이었다. 그 속도 또한 그리 빠르지 않아서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검이 움직이는 광경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성락중은 그 자리에 옆으로 훌쩍 뛰다시피 몸을 이동했다. 일견 호들갑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그 모습에 어떤 사람들은 실소를 터뜨리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의아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성을 발하는 것이었다.

“대단하군. 검기의 발출을 극도로 억제해서 완벽하게 한정된 공간만을 잘라 버렸어.”

백리장손이 감탄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자 혁리공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게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자네는 검을 배우지 않았다고 했지? 그렇다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군. 남궁연이 방금 펼친 건 굉장히 뛰어난 수법일세. 특정 공간을 검기로 완전히 봉쇄해 버렸으니 신검무적의 사숙이란 자가 그 공간에서 뛰쳐나오지 않았다면 상당히 난처한 일을 당했을 걸세.”

“어떻게 말입니까?”

“상대의 검기로 완전히 제압된 공간에 버텨봤자 좋은 꼴을 보이긴 힘들지. 팔다리가 잘렸거나 운이 좋다고 해도 심각한 내상을 입었을 거야.”

“저 가벼운 손동작을 그런 위력이 담겨 있단 말입니까?”

“동작은 별로 상관없네. 이미 그가 검을 앞으로 내뻗은 순간에 그의 손이 향한 공간은 완전히 그가 장악하고 있던 셈이었으니까.”

혁리공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섞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럴 수도 있는 겁니까?”

“공간검(空間劍)의 개념은 검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것일세.”

“진공검이란 말은 들었습니다만. 공간검은 처음 듣는군요.”

“약간 다르지. 진공검은 속도(涑度)에 의미를 둔 무공이고, 공간검은 범위에 관한 무공일세. 진공검은 공간과 공간 사이를 가로질러 상대를 단숨에 쓰러뜨리는 쾌검의 진화형인데 비해, 공간검은 일정 공간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어서 상대를 제압하는 중검(重劍)의 일종이네. 일단 공간을 장악당하면 상대는 그 공간을 피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지.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닐세.”

“왜 그렇습니까?”

“단순히 피한다고 해서 공간검을 막을 수 있다면 누가 힘들여 익히려 하겠나? 처음에는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 공간을 내어 주다 보면 종내에는 옴짝달싹도 못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버리게 되네. 결국 피하기만 하다가 반격 한 번 못 해 보고 제압당해 버리는 거지.”

“남궁세가의 대연검법이 공간검 계열이었던 겁니까?”

“공간검은 검법과는 상관이 없네. 그건 단지 하나의 개념일 뿐이지. 어떤 검법을 익혔든 한정된 공간을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공간검이 되는 걸세.”

혁리공은 알 듯 모를 듯하여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검의 세계는 실로 깊고 오묘하여 저 같은 사람은 도저히 예측할 수도 없군요.”

백리장손은 묘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검이 아무리 오묘하다 해도 사람보다 더하겠나? 인간이야말로 예측도 이해도 불가능한 존재가 아니겠는가?”

혁리공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히죽 웃었다.

“그도 그렇군요. 그래서 저는 애초부터 인간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두 사람이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남궁연은 두 번 더 검을 휘둘렀고, 그때마다 성락중은 메뚜기처럼 옆으로 훌쩍훌쩍 몸을 피했다. 얼핏 보기에는 장난스런 손짓에 과민 반응을 보이는 아이 같아서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남궁세가와 종남파의 마지막 비무이니 당연히 최고 수준의 고수들이 나와서 현란한 결투를 벌일 것이라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전혀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누구라도 황당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중에는 실망감 섞인 감정을 주위에 토로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지금 저자들은 뭐 하는 건가?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자들이 이런 자리에 나와서 애들처럼 장난이라도 치고 있는 건가?”

“글쎄. 그렇다고 보기에는 두 사람 모두 표정이 너무 진지하지 않은가?”

“표정만 보면 필생의 대적(大敵)이라도 상대하는 것 같은데, 하는 짓들은 영락없이 개구쟁이들의 숨바꼭질 같으니 영문을 모르겠군.”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게 아닐까?”

“그게 뭐든 저런 식이라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승부가 나지 않겠군.”

하나 그들의 예측과는 달리 세 번의 손짓 이후에 남궁연은 돌연 동작을 멈추었다. 그의 손짓만 보면 무조건 몸을 피하던 성락중이 처음으로 수중의 검을 중단으로 들어 올린 직후였다. 성락중이 단순히 올리기만 했는데도 남궁연은 자신이 통제하려 했던 공간이 자신의 마음대로 장악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놀랍군. 남궁연이 장악하려는 공간을 사전에 봉쇄해 버렸어.”

“그런 게 가능합니까?”

“쉽지 않은 일이지.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혁리공이 다시 비무대 위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으나 그들의 별반 움직임이 없었다. 그저 한 사람은 검을 앞으로 내뻗은 상태였고, 다른 한 사람은 검을 중단으로 들어서 막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백리장손은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두 사람을 주시하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서로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맹렬하게 기세를 일으키고 있는 중일세. 그들 사이의 중앙 부분에 아지랑이 같은 것이 보이지 않나?”

혁리공은 안력을 잔뜩 끌어 올린 다음에야 그런 현상을 발견했는지 희한한 것을 본 사람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군요. 저건 무엇입니까?”

“두 사람의 무형지기가 서로 맹렬하게 부딪치고 있기에 벌어지는 현상이지. 저 아지랑이 속에 들어간다면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산산이 부서지고 말 것이네.”

혁리공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절정 검객들의 싸움은 모두 저런 식입니까?”

“사람마다 방식이 다르고 기질이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싸움이 있을 수 있겠나? 저들 두 사람의 성격이나 싸우는 형태가 비슷하기에 저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세.”

“그렇다면 앞으로도 저들은 계속 저런 식으로 싸우게 될 거라는 말입니까?”

“그건 모르겠군. 두 사람의 기질이 서로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 다르니 말일세. 둘 중 누군가가 지금의 상황을 별로 재미없다고 생각한다면 앞으로는 조금 달라지지 않겠나?”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남궁연이 앞으로 성큼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성락중 또한 그와 똑같이 한 걸음 걸어 나왔다. 바람도 없는데 두 사람의 옷자락이 펄럭거리기 시작했다.

백리장손의 두 눈에서 날카로운 신광이 흘러 나왔고, 입꼬리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매 같은 성정의 그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흥에 겨운 미소였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남궁연이 공간을 장악하는 걸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기세의 싸움으로 나섰네. 겉으로 보면 단순히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을 뿐이지만, 실상은 사방으로 퍼져 있던 무형지기가 전면으로 집중되어 무섭게 압박하는 형상이지. 보통 이런 경우는 먼저 기세를 일으킨 자가 유리하기 때문에 일단 살짝 피하거나 상대의 기세를 막는 게 정상인데, 저 신검무적의 사숙은 전혀 엉뚱한 반응을 하는군.”

“똑같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온 게 그렇게 이상한 겁니까?”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무모한 거지.”

“왜 그렇습니까?”

“생각해 보게.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다는 건 자신도 똑같이 기세를 일으켜 맞서겠다는 것일세. 그런데 상대는 이미 앞으로 걸어나오면서 잔뜩 기세를 일으켜 전신을 압박해 오고 있는 상태였네. 그런 상대에게 뒤늦게 기세를 일으켜서 어쩌겠다는 건가?”

“그럼 저 신검무적의 사숙이라는 자는 최악의 선택을 한 셈이로군요.”

의외로 백리장손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아. 원래 저런 상태라면 뒤늦게 기세를 일으킨 자가 이미 집중되어 있는 상대의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쓰러져야 정상인데, 그를 보게. 멀쩡해 보이지 않나?”

혁리공은 성락중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옷자락이 펄럭거리는 것 외에는 표정도 달라지지 않았군요.”

“그래서 재미있다는 것일세. 저런 경우는 보통 둘 중에 하나거든.”

“그게 무엇입니까?”

“뒤늦게 기세를 일으키고도 상대의 집중된 기세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기세의 조절에 능숙하거나…..”

“아니면?”

“상대의 기세 정도는 언제라도 억누를 수 있을 만큼 월등한 기세를 가지고 있는 경우일세.”

“둘 중 어느 것이라고 보십니까?”

“남궁연이란 자의 기세는 본 파의 장로급에 못지않네. 그걸 압도할 기세를 지닌 자는 강호에서 일령삼성 정도겠지.”

백리장손은 돌려서 말했으나 혁리공은 그의 말뜻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구대문파의 장로급이라면 능히 강호 무림의 절정 검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점창파에 대한 자부심이 누구보다도 강한 백리장손이 자파 장로 수준에 못지않다고 한것은, 이미 기세로는 강호 무림의 정상 수준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였다.

그런 검객을 압도할 만한 기세의 보유자는 그야말로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아무리 신검무적의 사숙이 뛰어난 고수라 해도 일령삼성에 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기세의 조절에 상당히 능숙한 자라는 말씀이군요. 어디서 저런 자가 불쑥 튀어나왔을까요?”

“검의 길에 우연한 결과란 없네. 적지 않은 세월 동안 매진하지 않았다면 저런 실력은 절대로 배양될 수가 없지.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종남파가 나름대로 칼을 갈아 온 모양일세.”

그때 남궁연이 다시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성락중 또한 당연한 반응이라는 듯이 한 걸음 다가섰다. 두 사람의 옷자락이 더욱 세차게 펄럭거려서 흡사 태풍 속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누가 보아도 그들 사이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바람이 전혀 불고 있지 않은데도 그들 두 사람의 옷자락만 찢어질 듯 마구 펄럭거리고 있으니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이 움직인 것은 단지 두 걸음씩뿐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장내의 분위기는 일변해서 금시라도 폭발할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남궁연은 앞으로 내밀고 있던 검을 천천히 거두어들였다. 성락중 또한 중단으로 겨누었던 검을 자신의 가슴 앞으로 곧추세웠다. 그러더니 두 사람은 제각기 수중의 검을 한 차례 세차게 휘둘렀다.

중인들의 눈에 무언가 희끗한 것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그 섬광은 너무도 빨리 나타났다가 사라져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하고 몇 차례 눈을 껌벅였을 뿐이었다. 하나 백리장손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탄성을 토해 냈다.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저들의 경지가 저 정도에 올라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구나.”

“두 사람이 각기 일검씩 휘두른 건 알겠는데, 별로 대단할 건 없어 보이는군요.”

“일검이 아니라 삼검(三劍)일세.”

“예?”

혁리공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하자 백리장손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남궁연이 먼저 종남파 고수의 어깨를 향해 검기를 날리자 종남파 고수가 피하지 않고 오히려 남궁연의 앞가슴을 향해 검을 휘둘렀네. 그러자 남궁연이 상대의 어깨를 향하던 검기를 움직여 자신의 앞가슴을 보호함과 동시에 상대의 목덜미를 노렸고, 그에 대응해 종남파 고수 또한 같은 부위를 찔러 왔네.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겸비한 절묘한 한 수일세. 그러다 검이 부딪히기 직전에 남궁연의 검이 상대의 미간 쪽으로 이동했고, 종남파 고수의 검은 반대로 남궁연의 단전 부위로 향했지.”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되긴? 그대로 공격하면 서로 치명적인 상태로 빠진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 순간에 동시에 검을 거두어들였네. 결국 그 짧은 순간에 두 사람은 세 가지의 각기 다른 변초(變招)를 사용했고, 아무런 소득도 거두지 못한 채 검을 거두고 말았던 거지.”

“조금 전 검광이 번뜩이는 동안에 그런 일이 벌어졌단 말입니까?”

“그래서 놀랍다고 한 걸세. 저런 검초는 발출하는 것도 어렵지만 중도에 방향을 바꾸거나 거두어들이는 건 더욱 어렵지. 오랫동안 각고의 수련 끝에 수족처럼 쓸 수 있는 경지에 오르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는 일일세.”

“기세도 엇비슷한 데다 검을 다루는 솜씨까지 우열을 가리기 힘드니 자칫하면 두 사람의 승부가 무척 길어질지도 모르겠군요.”

하나 뜻밖에도 백리장손은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검을 사용하는 자들 간의 싸움은 여타 무공을 쓰는 자들과는 조금 다르네. 무공의 고하(高下)가 심한 상태에서도 상당히 오랫동안 백중세의 난투가 벌어지는 경우도 제법 있고, 거의 차이가 없는 상대임에도 의외로 간단하게 승부가 판가름 나기도 하지.”

“그건 왜 그렇습니까?”

“검이라는 병기가 가진 특성 때문이네. 검은 승패를 가르기에는 수월하지만, 상대를 쓰러뜨리기에는 지나치게 제약이 많은 병기일세.”

“그렇다면 백리 대협께서는 두 사람 사이의 승부가 곧 결정되리라고 보신단 말입니까?”

“그거야 노부로서도 알 수가 없네. 다만 승부가 아주 길어질 수도 있지만, 의외로 상당히 빠른 시간 내에 날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네.”

그때 비무대에서는 본격적인 검투(劍鬪)가 시작되고 있었다. 사실 두 사람 사이의 싸움은 진작부터 시작되었지만, 그들 간에 오갔던 치열한 내막을 전혀 모르는 중인들로서는 이제 비로소 제대로 된 비무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할 만도 했다.

남궁연의 검법은 호탕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남궁세가의 드높은 기상을 나타내듯 그의 거칠 것이 없어 보였고, 검초는 무한대로 자유로웠다. 그에 비해 성락중의 검은 지나치게 단조로웠다. 절묘한 변화도 눈에 뛰지 않았고, 검법의 빠르기나 기세 또한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나 언뜻 보기에는 남궁연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상황으로 생각되었다. 이곳이 남궁세가가 오랫동안 터줏대감으로 지내 온 회남이어서인지 심정적으로 남궁세가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그래서 장내는 곧 중인들의 함성 소리와 환호성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와아! 잘한다!”

“역시 남궁세가가 허무하게 패할 리 없지. 아무리 종남파라 해도 이번 비무는 이기지 못할 걸세.”

“남궁세가가 이번 비무에서 이기면 어떻게 되나? 그럼 일승 일 무 일 패이니 서로 비긴 것인가?”

“무림의 비무에서 그런 게 어디 있나? 양 파에서 각기 한 명씩 더 나와서 최후의 승자를 가리겠지.”

“그렇다면 종남파가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종남파에서는 신검무적이 나올 게 뻔한데, 남궁세가의 누가 그를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되나?”

사람들의 소곤거림이 점차로 커지는 광경을 보고 있던 혁리공이 빙긋 미소 지었다.

“백리 대협의 생각은 저들과 다르겠지요?”

이번에는 모처럼 백리장손이 그에게 되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번 비무의 승패 말입니까? 저로서는 예측할 수 없군요.”

“아니 이번 비무가 남궁세가의 승리로 돌아간다면 다음에 신검무적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느냔 말일세.”

“백리 대협께서는 이번 비무에서 남궁연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하신단 말씀입니까?”

백리장손은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냉랭한 음성을 내뱉었다.

“자네가 사람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는 걸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노부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하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닐세.”

혁리공은 자못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저는 그저 저들 두 사람 사이의 승패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저들 사이의 결과는 노부도 알지 못하네. 나는 다만 그 이후의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싶을 뿐이네.”

백리장손이 진중한 음성으로 말하자 혁리공도 지금까지의 다소 가벼워 보였던 모습을 자제하고 한층 진지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종남파 고수가 승리한다면 비무의 결과가 명확해지므로 더 거론할 것이 없을 겁니다. 반대로 남궁연이 승리한다면 일이 조금 복잡해지겠지요. 저는 어떤 경우에라도 더 이상의 비무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종남파에서 더 나올 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백리장손의 눈에서 한 줄기 날카로운 신광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신검무적이 출전할 수 없다는 말인가?”

“신검무적은 아직 양천해와 싸운 후유증이 있어서 당분간은 검을 들고 남과 싸울 수 없는 상태입니다.”

“검을 들 수 없다라…… 얼핏 손에 붕대를 감은 걸 보긴 했는데, 설마 검을 잡을 수도 없을 정도로 상세가 큰 줄은 미처 몰랐군.”

“손아귀가 찢어져 열흘 정도는 세상없다 해도 검을 잡을 수 없다 하더군요.”

“손아귀는 상당히 더디게 아무는 부위지. 그런데 용케도 그런 사실을 알아냈군. 신검무적이 부상을 당했다는 건 알려졌어도 자세한 부위나 그 부상 정도는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는데 말이지.”

혁리공의 입가에 다시 야릇한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

“제가 남들보다 귀가 좀 밝은 편입니다.”

백리장손은 단순히 귀가 밝다고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걸 굳이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저 두 사람의 승패에 상관없이 남궁세가와 종남파의 비무는 이것으로 끝날 거라고 판단한단 말이군.”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궁세가가 너무 손해를 보는 게 아닌가? 가문의 대공자가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고, 은밀하게 키웠던 숨겨진 검까지 드러내고도 얻은 게 없으니 말일세.”

“반대로 생각하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 왔던 대공자가 무공의 새로운 경지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간 숨겨 왔던 가문의 역량을 무림인들에게 선보이게 되었으니 무조건 손해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렇겠군. 하지만 과연 남궁가주가 그 정도로 만족을 하겠는가?”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오히려 종남파에서 비무를 더 하자고 할까 봐 전전긍긍해 하고 있을 겁니다.”

“왜 그런가?”

“신검무적이 남과 싸울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리장손은 아직도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혁리공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네가 말해 주지 않았나?”

“저에게 한 가지 철칙이 있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다는 그 괴상한 철칙 말인가?”

혁리공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렇습니다.”

“비무의 당사자인 남궁가주에게는 말할 수 없어도 노부에게는 말해도 괜찮다는 뜻인가?”

백리장손은 이번에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다만 그는 메마른 미소를 짓고 있는 혁리공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시선이 어색할 법도 한데, 혁리공은 전혀 표정의 변화 없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사실 남궁가주가 알아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검무적이 더 이상의 비무를 승낙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말입니다.”

백리장손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것이 혁리공의 말에 수긍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기이한 침묵이 감돌고 있을 때, 비무대 위에서 굉량(宏量)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꽝!

주위가 송두리째 뒤흔들리고 듣는 사람의 고막이 터져 나갈 것 같은 엄청난 폭음이었다. 대체 검과 검이 부딪치는 비무에서 어떻게 이런 폭음이 터져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비무대 위를 바라보니 조금 전까지도 서로 얽혀 있던 두 사람이 삼 장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그들 사이의 공간에는 아직도 세찬 경기가 휘몰아치고 있어, 조금 전의 격돌이 얼마나 가공스러운 것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다소 싱거운 것 같았던 두 사람의 싸움에서 단순히 검끼리 한 번 부딪쳤을 뿐인데도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자 중인들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나 백리장손은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기세끼리 충돌했군. 두 사람 중 누군가가 승부를 빨리 끝내기로 마음먹은 것 같네.”

그의 말을 증명이나 하듯이 떨어졌던 두 사람이 다시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남궁선과 전흠의 비무처럼 격렬하거나 처절한 싸움은 아니었다. 오히려 약간의 거리를 두고 검을 휘두르고 있어서 서로를 대상으로 시무(試武)라도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하나 일정 수준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은 그 안에 담긴 흉험함을 알아차리고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단순해 보이는 손짓이나 가벼운 일검 속에 세인들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가공할 힘과 오묘한 변화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자칫 방심하거나 한 번의 공격이라도 허용한다면 치명적인 상태에 빠지게 될 만큼 그들의 검법은 살인적인 위력을 담고 있었다.

지금도 성락중의 앞가슴을 향해 허공을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다가오는 남궁연의 검은 부드럽고 온유해 보였다. 하나 안력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그 검끝이 가늘게 요동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요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미약하기 그지없었으나, 일단 상대의 검과 닿는 순간 심맥(心脈)을 절단하고 숨통을 끊어 놓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과 어디로 움직일지 모르는 무궁무진한 변화가 함께 담겨져 있었다. 성락중은 상대의 검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담담한 눈으로 남궁연의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가공할 일검이 자신의 지척으로 다가오고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조용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러다 막 상대의 검이 자신의 가슴에 닿으려는 순간에 오른손을 살짝 내저어 자신의 검으로 상대의 검을 슬쩍 밀어냈다. 어린아이가 친구의 장난을 손짓으로 뿌리치는 것처럼 가벼운 동작이었다.

하나 그 여파는 실로 작지가 않았다.

끼이익!

사람의 귀청을 후벼 파는 듯한 괴이한 마찰음이 격하게 터져 나오며 세찬 경기가 사납게 휘몰아쳤다. 그리고 냉정한 신색을 유지하던 남궁연의 얼굴에도 처음으로 표정의 변화가 일어났다. 짙은 검미가 한 차례 꿈틀거렸던 것이다. 아주 사소한 변화였으나, 태산이 무너져도 꿈적하지 않을 것 같았던 무표정한 그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남궁연은 성락중의 검에 밀려난 자신의 검을 슬쩍 비틀어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쫘아악!

마치 비단 폭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시퍼런 검기가 성락중의 몸을 양단할 듯 폭포수처럼 퍼부어졌다.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정도로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백리장손이 나직하게 혀를 찼다.

“쯧!”

혁리공은 흥미진진하게 장내의 격전을 구경하고 있다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남궁연이 너무 서두르고 있군.”

“제가 볼 때는 그가 우세한 것 같은데요?”

“두 사람은 지금까지 기세를 완벽하게 갈무리한 채로 싸우고 있었네. 그런데 남궁연이 먼저 기세를 겉으로 드러냈으니, 그건 다시 말하면 그가 신속하게 결판을 내려고 마음먹었다는 뜻일세.”

혁리공은 아직도 그의 말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지 재차 물었다.

“남궁연이 상대에게서 약점을 발견했기에 그랬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검도의 고수가 기세를 갈무리하고 싸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군. 그 상태에서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약간의 우열이라도 발생한다면 순식간에 상대의 기세에 짓눌려 꼼짝도 못하고 쓰러지고 마네.”

“….!”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두 사람은 한 치의 우열도 보기 힘든 백중세였다는 말일세. 그런데 남궁연이 먼저 기세를 드러냈다는 것은 그가 무언가 초조함을 느꼈다는 말이지.”

백리장손은 잠깐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남들과 비무를 하지 않고 혼자 개인적인 공간에서 수련을 해왔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군.”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남궁연은 필시 자신과 필적할 정도로 강한 상대와 싸워 본 경험이 없을 걸세. 그래서 상대가 계속 자신과 대등하게 맞서 오자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던 거야. 자신의 실력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 거지.”

“그래서 빨리 승부를 볼 요량으로 기세를 드러낸 것이란 말입니까?”

“그렇지. 그리고 이런 백중세의 고수들 사이의 겨룸에서 성급함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 순간, 비무대 위의 상황이 일변했다. 가공할 기세로 성락중의 몸을 두 조각 내 버릴 듯했던 남궁연의 검이 허공에서 뒤흔들리며 그의 신형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반면에 성락중은 내뻗었던 검을 좌에서 우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백리장손은 그 광경을 보면서 말을 맺었다.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법이지.”

성락중의 검이 움직이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남궁연은 검을 피하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더니, 마침내 참지 못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그 순간 성락중은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우욱!”

남궁연은 뒤로 다섯 걸음이나 물러나더니, 이내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한바탕 검붉은 피를 토해 냈다. 그의 수중에 있던 장검 또한 어느새 절반으로 부러져 있었다. 순식간에 승부가 판가름 나며 우세해 보였던 남궁연이 패퇴하고 만 것이다. 중인들은 아직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서로를 쳐다본 채 웅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백리장손은 냉정한 눈으로 아직도 연신 입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남궁연을 응시했다.

“한순간의 흔들림으로 스스로 패배를 자초하다니. 검에 대한 자질은 뛰어날지 몰라도 승부에 대한 감각은 미흡하군. 아쉬운 일이야.”

혁리공은 아직도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백리 대협이 그들의 승부가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끝날지도 모른다고 하셔도 그다지 믿지 않았는데 정말 백리 대협의 말처럼 되고 말았군요. 그토록 팽팽했던 두 사람의 승부가 이렇게 되어버릴 줄은 정녕 몰랐습니다.”

“검도 고수들 간의 싸움은 그래서 무서운 걸세. 단 일순간의 방심이나 착오가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 내지. 두 사람의 실력은 서로 백중했네. 다만 강한 상대와 싸워 본 경험의 유무(有無)가 승패를 갈랐을 뿐이네.”

“그렇다면 남궁연이 앞으로 강한 자들과 충분한 경험을 쌓는다면 자신을 꺾은 종남파의 고수를 능가할 수도 있다는 말이로군요.”

“이론상으로야 그렇지. 다만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그가 지금의 충격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와 적지 않은 나이의 그가 과연 상대를 찾아다니며 비무행(比武行)을 벌일 수 있겠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지.”

“둘 다 쉽지 않은 문제들이로군요.”

“그러니 자네도 앞으로 검의 고수를 상대할 때는 조심하도록 하게. 단순한 무공의 고하만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게 그런 자들과의 싸움이네.”

혁리공은 다시 히죽 웃었다.

“제가 남들과 싸울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백리장손은 그를 힐끗 돌아보았으나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것으로 모든 무림인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남궁세가와 종남파의 비무는 종결되었다.

종남파는 이 승 일 무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남궁세가를 꺾었으며, 그들의 명성은 강호 전체를 송두리째 뒤흔들게 되었다. 더구나 종남파 최고의 고수들인 신검무적과 옥면신권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의 결과인지라 무림인들이 느끼는 경악은 한층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훗날 강호의 이름난 검객들만을 찾아다니며 비무에서 이기면 상대의 검을 부러뜨리고, 자신이 패하면 스스로의 검을 부러뜨리는 위험천만한 승부를 계속했던 절검자(切劍子)가 이때 패한 남궁연의 화신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누구도 확실한 것은 알지 못했다.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