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4권 모산지연(姆山之宴)편 : 5화
제 244장 종남신객(終南新客)
종남산의 봄은 무한한 정취가 있다. 특히 온 산이 신록(新綠)으로 물들고 사방에서 꽃들이 천채만홍(千彩萬紅)을 이룰 때면 그 정취는 절정에 다다라 사람들의 마음을 취하게 만들어 버린다. 서문연상은 그 정취에 취했는지 양쪽 무릎에 턱을 고인 채 하염없이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은 종남파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구릉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였다. 예전에 서문연상은 종남파의 고수들을 따라 종남산을 오르다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종남파의 본산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 느꼈던 감흥이 상당히 컸던지 그 뒤로도 심심하면 이곳에 올라와서 본 산을 내려다보고는 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종남의 풍광은 너무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방해도 받지 않고 조용히 사색에 잠길 수 있어서 서문연상은 이 장소를 다른 어느 곳보다도 좋아했다.
“흐음…..”
한동안 멍하니 주위의 경치를 보고 있던 서문연상이 돌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발랄하고 활력에 가득 차 있던 그녀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무거운 한숨이었다. 그녀는 복잡한 눈으로 멍하니 하공을 응시하다가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녀가 한숨을 내쉬는 까닭은 자신의 처지가 너무 답답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얼마 전부터 월녀검법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깊은 산중과도 같은 종남파에 파묻혀 하루 종일 월녀검법의 수련에만 매달려 있으니 그녀가 아무리 무공을 좋아하고 종남파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 해도 지루함과 갑갑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더구나 오늘처럼 화창한 날이면 소녀다운 감상(感傷)마저 겹쳐서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다. 종남파가 비록 부활했다고 하지만 평상시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고, 문파의 고수라고 해도 자기 나이 또래의 젊은 사람은 오직 방화뿐이었다. 그런 방화마저도 요즘에는 무공 수련에 단단히 맛이 들렸는지 하루 종일 연무장에만 처박혀 있어서 식사 때에나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방화를 제외하면 한 배분이나 차이 나는 사숙들과 나이 많은 식객들뿐이니 그녀가 마음을 터놓고 사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요즘 들어 종남파에 입문하겠다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제법 되었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부모 손에 이끌려온 꼬맹이들이어서 오히려 귀찮기만 한 존재들이었다.
서문연상은 한창 나이의 자신이 종남산의 깊은 산자락에 묻혀서 시들어 간다는 생각에 울적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종남파의 부활을 위해 목숨을 걸고 위험천만한 싸움을 할 때가 오히려 그리워질 정도였다. 그때는 적어도 지금 같은 지루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고, 자신이 살아 있다는 생생한 감정을 듬뿍 맛볼 수 있었다.
“아…..억지로 졸라서라도 장문인을 따라갔어야 했는데…… 손풍, 그 자식을 몰래 두들겨 패 버렸으면 내가 대신 갈 수 있었는데 그때는 왜 미처 그 생각을 못했는지 몰라.”
그녀는 손풍이 들었으면 질색을 할 소리를 내뱉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 급히 얼굴을 펴며 손으로 자신의 이마와 눈자위를 문질렀다.
“주름살 생길라…….이러다 정말 폭삭 늙어 버리는 거 아냐?”
그녀는 검보로 돌아갈까 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모처럼 부모님을 뵈러 간다고 하면 아무리 깐깐한 방취아라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 달 후가 아버지 생신이네? 정말 검보 구경이나 갔다 올까?”
자신의 집을 생각하자 그녀의 얼굴에 조금씩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지금쯤은 검보 뒷산에 행화(杏花)가 절경을 이루고 있을 텐데…. 이맘때쯤이면 그 행화 속에서 술판을 벌이고는 했는데, 올해도 다들 신나게 즐기고 있겠지?”
“풋 …..작년에는 막 숙부(莫叔父)와 방 숙부(方叔父)가 술 내기를 하다가 모두 뻗어 버리고 오히려 위 숙부가 끝까지 남아 있었는데 어떻게 되었으려나? 무당산에 간 방아(方兒)는 집에 돌아왔는지 궁금하네.”
중얼거릴수록 그녀의 눈이 반짝거리며 얼굴에 엷은 홍조마저 어렸다. 그러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다. 사고의 치마폭을 붙잡고 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에 본가에 갔다 와야겠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 산 아래로 몸을 날리려던 그녀가 무엇을 보았는지 몸을 멈춘 채 한곳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종남파의 본산이 있는 방향으로, 그중에서도 정문과 멀지 않은 숲 속이었다. 정문이 빤히 보이는 숲 속의 한쪽 구릉 위에 두명의 인물이 잠복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소 사숙께서 요즘 본산 일대를 지켜보는 자들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는데, 저놈들이 바로 그들이로구나.”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서문연상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며 표정에 생기가 감돌았다.
“감히 본 파의 정문을 얼쩡거리며 염탐하려 하다니…… 본 낭자가 오늘 네놈들의 정체를 낱낱이 밝혀 주마.”
그녀는 경쾌한 동작으로 그 인물들이 숨어 있는 곳을 향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두 사람의 얼굴이 확연히 드러나 보였다. 둘 모두 삼십 대 초반의 장한들이었는데, 태양혈이 불룩하고 체격이 단단한 것으로 보아 내외공(내외공)을 겸비한 상당한 실력의 고수들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절로 바짝 긴장하여 한결 조심스런 동작으로 그들에게 접근해 갔다. 두 사람은 무언가를 서로 나직하게 상의하고 있더니, 그중 한 사람이 이내 다른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서문연상은 남아 있는 사람을 계속 지켜야 하나 아니면 지금 이동하고 있는 자를 쫓아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마음을 결정하고는 이동하는 자의 뒤를 조심스레 쫓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자가 본거지로 돌아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자는 제법 빠른 몸놀림으로 숲 속을 이리저리 돌아가더니, 이내 어느 이름 모를 협곡으로 들어섰다. 그 협곡의 한쪽에 작은 통나무집이 있었는데, 그자는 익숙한 동작으로 그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옳지, 저곳이 놈들의 본거지로구나.’
서문연상은 눈을 반짝이며 그 통나무집 쪽으로 다가갔다. 통나무집은 외견상으로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으나, 가까이서 보니 의외로 제법 큰 편이어서 당초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데 그녀가 미처 통나무집 근처로 접근하기도 전에 통나무집에서 서너 개의 인영이 뛰어나오더니, 순식간에 그녀의 주위를 에워싸 버리는 것이 아닌가? 매우 창졸간의 일인지라 그녀는 꼼짝도 못하고 그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아! 내가 쫓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나를 유인한 것이었구나.’
그녀는 뒤늦게 자신의 조심성이 부족함을 자책했으나 때늦은 후회일 뿐이었다. 그녀 딴에는 신중을 기한다고 조심을 하긴 했는데, 고수들의 이목을 속이기에는 턱없이 미흡했던 모양이었다.
그녀를 에워싼 인물들은 모두 네 명인데, 그들 중 한 명은 그녀가 뒤를 쫓던 바로 그 장한이었다. 그녀는 그 장한을 쏘아보며 냉랭한 음성을 내뱉었다.
“흥. 치사하게 여자를 속여 함정에 빠뜨리다니, 이러고도 당신이 당당한 무림인이라고 할 수 있나요?”
장한은 자신의 뒤를 몰래 밟던 그녀가 오히려 기세등등하게 자신을 노려보며 소리를 지르자 어이가 없는지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대신 다른 한 사람이 낭랑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말에 대꾸를 했다.
“하하, 맹랑한 소저로군. 소저를 속인 게 아니라 소저가 부주의하여 우리의 꼬임에 넘어간 거요.”
앞으로 나선 사람은 네 명의 장한들 중 가장 나이를 먹은 사십대 초반의 중년인이었다. 탄탄하고 날렵한 체구에 눈빛이 유난히 형형해서, 한눈에 보기에도 만만한 인물이 아님을 느끼게 했다.
서문연상은 여전히 성난 눈빛을 번뜩이며 그 중년인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당신들이 본 파를 몰래 감시할 때부터 좋은 자들이 아님은 알고 있었지만, 나를 속이고 이곳으로 유인해 왔다고 희희낙락할 정도로 후안무치한 자들일 줄은 미처 몰랐군요. 이제는 본격적으로 본 파를 향해 마각을 드러낼 생각인가요?”
중년인은 네 명의 건장한 사내들에게 포위되어 있으면서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큰 소리를 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는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정말 기백이 대단한 소저로군. 그런데 본 파라고 하는 걸 보니 종남파의 문하인 모양이구려.”
“본 낭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유인해 왔다는 말인가요?”
“내 수하는 그저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쫓아오자 정체를 알기 위해 이쪽으로 모셔 왔을 뿐이었소.”
서문연상은 가느다란 허리에 양손을 턱 얹고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귓구멍을 활짝 열고 잘 듣도록 해요. 본 낭자는 대종남파의 이십이 대 제자인 태을옥녀(太乙玉女)서문연상이에요.”
중년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종남파에 무영낭랑이라는 유명한 여고수가 있다는 건 알아도 태을옥녀라는 명호를 가진 여고수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는데…”
서문연상은 이마를 치켜뜨며 당당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건 당신의 견문이 형편없기 때문이에요. 종남혈사 때부터 내가 얼마나 열심히 활동했는데…. 앞으로는 세 살 어린아이라도 알게 될 유명한 이름이니 지금부터라도 똑똑히 새겨 두도록 해요.”
중년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서문연상은 그가 자신을 비웃으면 호되게 야단을 치려 준비하고 있었는데, 중년인은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알겠소. 소저의 명호를 필히 기억해 두도록 하겠소.”
서문연상은 한편으로는 김이 빠지면서도 한편으로는 흡족한 생각이 들어 절로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이제 보니 당신은 제법 강호의 도리를 아는 사람이로군요. 그럼 이제 도리를 아는 무림인답게 솔직하게 털어놓아 보아요. 대체 무슨 이유로 본 파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던 거죠?”
“감시라니. 당치 않소. 우리는 그저 한 가지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거요.”
서문연상은 절로 궁금해져서 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요?”
중년인은 선뜻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답답해진 그녀는 다시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내질렀다.
“어서 빨리 말해요! 당신들이 본 파에서 확인하려는 사실이 무언지.”
그래서 중년인은 여전히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중년인뿐 아니라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다른 장한들 또한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을 바꾸어 한결 나긋나긋해진 목소리로 중년인을 달랬다.
“내가 이래 봬도 본 파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에요. 내 말 한마디면 본 파에서 껌벅 죽지 않는 사람이 없다구요. 못된 사고 한 사람만 빼고…..그러니 내게 순순히 털어놓아 보아요. 본 파에서 확인하려는 게 대체 무엇이에요?”
중년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음을 결심한 듯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서문연상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느낌은 이내 사라졌으나 그녀는 내심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보니 무서운 실력을 지닌 고수였잖아? 이거 조심해야 되겠는데…’
그녀는 무림 세가 중에서도 명문으로 손꼽히는 검보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수많은 고수들을 접해 왔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무공 실력을 알아차리는 능력은 누구보다도 탁월하다고 할 수 있었다. 중년인은 그녀의 아버지인 서문장천이나 종남파의 장문인인 진산월 같은 절대의 고수는 아닐지 몰라도, 검보의 친위대장인 노호검 포천성이나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비룡검 위소룡에 못지않는 실력자였던 것이다.
그녀가 절로 긴장하여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중년인은 엷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경계할 것 없소. 내가 알고 싶은 건 한 사람의 행방이오.”
“초화(焦華), 아니 방화라는 이름의 사람이오.”
중년인의 말에 서문연상은 얼굴의 표정이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곳에서 방화의 이름을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의 행방을 알려고 하는 거죠?”
서문연상이 묻자 중년인의 눈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피어올랐다. 그 섬광은 이내 사라졌으나 서문연상은 순간적으로 몰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었다.
“소저는 그를 알고 있구려.”
“아니에요. 난 그런 이름 몰라요.”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으나 중년인은 냉랭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면 먼저 그에 대해 물었을 거요. 그런데 소저는 우리가 그를 찾는 목적을 먼저 물었소. 그것은 곧, 소저가 이미 그를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거요.”
그녀는 마구 도리질을 했다.
“난 그렇게 복잡한 말은 못 알아들으니 자꾸 넘겨짚어 봤자 소용없어요. 어서 말해요. 방화의 행방은 알아서 무엇하려는 거죠?”
중년인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녀를 더 추궁하지 않고 순순히 자신들의 목적을 말해 주었다.
“우리는 그의 아버지의 부탁으로 그를 찾고 있소.”
서문연상은 의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방화의 아버지가 누구인데요?”
“방룡이란 분이오.”
그녀는 머릿속을 재빨리 뒤져 보았으나 방화의 아버지에 대한 말은 누구에게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보니 비단 아버지뿐 아니라 방화의 가족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한솥밥을 먹고 있는 동문이 많은 것도 아닌데, 그에 대해 자신이 너무 무심했다고 자책하면서도 여전히 서문연상은 의심의 빛을 거두지 않았다.
“그런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어요.”
“방화에게 물어보면 확인할 수 있을 거요.”
“그런 소년은 모른다고 했잖아요.”
“방화가 소년이라는 말은 한 적이 없는데….”
그녀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럼 아버지가 아들을 찾는다는데, 그 아들이 나이 많은 꼬부랑 노인네겠어요? 그런데 당신들은 왜 방화를 본 파에서 찾는 거예요?”
“방화는 서안에서 모습을 감추었소. 분명 서안 일대를 떠나지 않은 건 확실한데, 지난 몇 달간 아무리 뒤져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해 초조해 하고 있었소. 그런데 얼마 전에 누군가에게서 그와 비슷한 모습의 소년을 종남파에서 보았다는 말을 들었소.”
그녀는 즉시 도리질을 했다.
“그럴 리 없어요.”
이번에는 중년인이 물었다.
“왜 그렇소?”
서문연상은 엉겁결에 마음속에 떠오른 의문을 밖으로 내뱉었다.
“그는 본 파의 깊숙한 곳에 쳐박혀 외인을 만나지도 않고 밖으로 나간 적도 없는데, 대체 누가 그를 볼 수 있단 말인가요? 그러니 당신 말은 모두 거짓이에요.”
중년인의 얼굴에 한 차례 격동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과연 방화는 종남파에 있구려.”
그녀는 아차 싶어 주책맞은 자신의 입을 한 대 치고 싶었으나,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방화를 모른다는 발뺌하지 않기로 작정했는지 이내 당당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요. 방화는 본 파에 있어요. 그는 내 사제……같은 사형이에요.”
중년인은 그녀의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눈가에 희미한 경련이 일어나며 두 눈에서 실로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빛이 감돌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방룡 형님, 마침내 형님과의 마지막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은 나직하기 그지없었으나, 그 음성을 듣자 서문연상은 왠지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그 음성 속에 담긴 간절함과 짙은 염원이 절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던 중년인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떨구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은 언제 격동에 파 있었냐는 듯 차분하고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 말은 거짓이 아니오. 방화를 보았다고 증언한 사람은 종남파에 입문하기 위해 자기 자식을 데려갔다고 하오. 그러다 종남파의 후원에서 검법을 수련하고 있는 소년을 얼핏 보았는데, 그 모습이 우리가 애타게 찾고 있던 사람과 유사한 것을 보고 알려 온 것이오.”
서문연상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들어 무작정 자식들의 손을 잡고 종남파에 입문시켜 달라며 찾아오는 자들의 숫자가 제법 많았던 것이다. 그들 중 나름대로 가문의 위세가 대단한 자들은 종남파의 이곳저곳을 안내받기도 했는데, 그때 먼발치에서 방화를 보았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녀의 미심쩍은 생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직접 본 파로 와서 방화에 대해 물어보면 되었을 텐데, 무엇 때문에 수상하게 본 파 주위를 얼쩡거리고 있었던 거예요?”
중년인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우리에게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고 해 둡시다.”
서문연상은 굳이 그 사정이란 것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는 약간은 걱정스럽고 약간은 불안한 눈으로 중년인을 바라보며 신중한 질문을 던졌다.
“방화가 본 파의 제자인 걸 알았으니……이제 당신들은 어떻게 할 건가요?”
중년인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종남파로 가서 그를 만나야지.”
이어 그는 서문연상을 지그시 응시하며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소저의 이름이 귀에 익고 소저의 낮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소저가 누구인지 이제 생각이 났소. 그래서 소저에게 한 가지 도움을 청하려 하오.”
노해광은 계속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그는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눈살마저 살짝 찡그린 채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안 돼. 좀 더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해.”
그때 한 사람이 안으로 불쑥 들어오며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대체 아까부터 뭘 그렇게 투덜거리거 있는 거요? 며칠 전에 나하고 술 내기해서 진 걸 가지고 지금까지 불평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노해광은 그를 힐끔 쳐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사는 저런 한심한 종자를 데리고 강호 최고의 거대 문파와 싸울 생각을 하니 아득해지는군. 쓸 만한 자들은 모두 떠나 버리고 저런 쭉정이만 남았으니, 나같이 사형제 복이 지지리도 없는 놈은 없을 거야.”
“내가 뭐 어때서? 나같이 술 잘 마시고 화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시오.”
노해광은 아직도 주독이 가시지 않아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한심스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밤새 또 그 장승표라는 자와 퍼마신 모양이구나. 이제는 승부가 가려졌느냐?”
그 사람은 장승표 이야기가 나오자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흥에 겨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장 형은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 제일가는 진정한 남자이며, 위대한 술꾼이오. 그런 인재가 이 퀴퀴한 종남파의 한구석에 쳐박혀 있을 줄이야 내가 어찌 알았으리…..해남 제일의 술꾼과 섬서성 제일의 술꾼이 만났으니 어찌 하루 이틀로 승부가 판가름 날 수 있겠소? 우리는 앞으로도 칠 일 밤낮을 두고 필사의 대전을 치르기로 술동이를 앞에 두고 굳은 약속을 했소.”
노해광은 그와 언쟁을 벌이고 싶은 마음도 없는지 그냥 도리질만 했다. 그 사람, 종남파가 배출한 사상 최고의 술꾼이라고 자처하는 하동원은 히죽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노 사형. 노 사형이 며칠째 화산파 문제로 끙끙 앓고 있다는 건 알고 있소만, 그런 일은 그저 순리로 풀어야지 억지로 머리를 쥐어짠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오.”
제법 의젓한 하동원의 말에 노해광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순리로 풀다니. 어떻게 말이냐?”
“화산파가 정식으로 본 파에 도전장을 내민 것도 아니고, 그런다고 노골적으로 문하 고수들을 풀어 시비를 걸어오는 것도 아니지 않소? 그저 자파의 장로와 일대 제자 몇 명을 유화상단에 파견한 것에 불과한데 그렇게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소? 우리도 그저 몇 사람을 서안에 있는 노 사형의 상회로 내보내면 그만이오.”
노해광은 제법 그럴듯한 하동원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재차 물었다.
“본 파의 고수라고 해 봤자 몇 명 되지도 않는데 누구를 내보낸단 말이냐?”
“본 파의 장로급인 나와 장문인의 사매인 방취아가 가면 될 거요. 듣자 하니 정해라는 녀석도 노 사형과 함께 있다고 하니 수적으로는 결코 화산파에 꿇리지 않을 게 아니오?”
“그러다 화산파에서 본격적으로 고수들을 투입하면?”
“그때는 우리도 전력을 다해 실력을 발휘하면 그만이오. 강호에서의 방식대로 피에는 피로, 이에는 이로 맞서는 거지. 그러다 우리 힘이 달려서 뒤로 밀리면 장문인이 돌아오실 때까지 그들과 정면 대걸을 피하면 되는 거고. 노 사형이 그렇게 혼자 노심초사할 일이 아니란 말이오.”
듣고 보니 노해광은 며칠 동안 골머리를 싸안고 있던 자신이 우습게 생각되었다.
‘그렇다. 모든 일은 순리로 풀어야 한다. 그들이 창으로 찌르면 방패로 막고, 칼을 휘두르면 같이 칼로 맞서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힘이 부치면 잠시 몸을 피하면 되는 것을……’
노해광은 이제 겨우 본산을 안정시키고 힘을 키우고 있는 종남파가 자신으로 인해 화산파 같은 강력한 상대와 싸우게 되었다는 부담감 때문에 시야가 좁아져서 좀 더 대국적으로 사태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고민을 떠안은 사람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노해광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지며 두 눈이 다시 활력으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네 말이 맞다. 내가 괜한 고민을 했구나.”
그는 새삼스런 눈으로 하동원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그동안 술만 늘은 게 아니라 배포도 제법 늘은 모양이구나.”
“어떻소? 그럼 오늘부터 노 사형도 우리 술판에 끼는 거요?”
막 환하게 웃음 지으려던 노해광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
‘이 자식이….장승표와 술 내기를 계속 벌이려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 소리나 지껄인 거 아냐?’
노해광이 수상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자 하동원은 껄껄 웃으며 그의 어깨를 다시 두드렸다.
“하하….노 사형은 다 좋은데, 매사를 너무 꼼꼼하게 신경 쓰는 게 흠이라니까. 참 어서 나오시오.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말이오.”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하동원은 혀를 찼다.
“서문연상, 그 여우 같은 계집애가 또 무슨 사고를 쳤는지 아까부터 문파 어른들을 모두 모셔 오라며 호들갑을 떨고 있소.”
노해광의 얼굴에 냉엄한 빛이 떠올랐다.
“그래서 감히 사숙조인 너를 부려 사람을 오라 가라 했단 말이냐?”
하동원은 찔끔하여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럴 리 있소? 그냥 내가 미침 사형을 보러 오는 길이니 사형을 모시고 오겠다고 한 거지. 아무려면 내 체면에 그런 말괄량이계집의 말 한마디에 쪼르르 달려왔겠소?”
하동원이 서문연상에게 푹 빠져 그녀의 말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노해광은 의심쩍은 눈으로 그를 쏘아보다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너도 이제 어엿한 본 파의 존장이니 존장다운 체통을 지켜야한다.”
“알겠소. 잔소리는 사부님께 듣는 걸로도 충분하니 그만하고 어서 갑시다.”
하동원은 노해광이 다시 무어라고 하기 전에 재빨리 노해광의 팔을 잡아끌었다.
노해광이 하동원의 팔에 이끌려 태화각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적지 않은 인원들이 태화각의 대청에 모여 있었다. 종남파의 최고 어른인 전풍개를 제외한 대부분의 문하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서문연상은 장승표를 향해 한참 무어라고 열심히 떠들어 대고 있다가 노해광의 모습을 보자 입을 다물고 얌전한 얼굴로 앉아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앙큼해 보였는지 노해광은 그녀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려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주위를 둘러본 노해광은 이내 낮선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중년인이 한쪽에 단정한 자세로 않아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소지산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번거롭게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사숙.”
소지산은 과묵하고 책임감이 강해서 노해광도 그에게는 신심(信心)이 컷다. 자연히 그를 대하는 음성도 부드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너를 만나 할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데 데체 무슨 일이냐?”
“사질녀에게 직접 들으시는 게 더 나을 듯싶습니다.”
서문연상이 새침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노해광 앞으로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연상이 사숙조를 뵙니다.”
“그래, 대체 무슨 일로 제자 신분에 사문의 어른들을 몽땅 부른거냐?”
서문연상은 그를 향해 예쁘게 웃어 보였다.
“제자가 이번에 밖에 잠깐 나갔다가 반가운 사람을 만났습니다. 검보에 있을 때 안면이 있던 분인데, 알고 보니 방화 사형의 가까운 친척이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모시고 왔습니다.”
노해광의 시선이 예의 그 중년인에게로 향했다. 중년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난주(蘭州)출신의 문옥립(文玉立)이라고 하오.”
“종남의 노해광이오.”
노해광은 간단하게 그와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지그시 그를 쳐다보았다.
“방화의 친척이라 하셧소?”
“친혈육은 아니지만 그의 아버님을 오랫동안 형님으로 모시고 있어서 그에게는 숙부와도 같다고 할 수 있소. 방화의 행적을 찾느라 제법 오랫동안 서안 일대를 뒤지고 다니다가, 이번에 방화가 종남파의 문하가 되었음을 알고 찾아오게 된 것이오.”
노해광은 문득 생각난 듯 소지산을 돌아보았다.
“방화는 어디에 있느냐?”
“수련하느라 땀을 많이 흘려서 옷을 갈아입고 오느라 조금 지체되는 모양입니다.”
노해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옥립을 행해 말했다.
“방화를 만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듯싶소.”
문옥립이 신중한 표정으로 노해광을 바라보았다.
“그 점에 대해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소.”
“말씀해 보시오.”
“방화를 조용한 곳에서 단둘이 만났으면 하오.”
“이유를 알 수 있겠소?”
문옥립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방화에게 형님의 마지막 말씀과 유품(遺品)을 전해 주려 하오.”
그 말에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듣고 있던 주위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굳어졌다. 심지어 서문연상마저도 전혀 예상치 못했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무 말도 못해고 있었다.
방화는 좀처럼 자신의 신상(身上)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종남파에서는 아무도 그의 가족 관계나 출신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모처럼 그의 친척이 찾아왔다고 해서 모두들 기뻐하고 있었는데, 그 친척이 전하는 소식이란 게 방화의 아버지의 죽음이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방화를 자신의 친조카처럼 아끼고 있던 장승표는 눈알까지 빨개져서 금시라도 울음보를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알겠소. 두 사람을 위해 따로 방을 내드리겠소. 방 사질, 네가 수고를 해 줘야겠구나.”
노해광은 제일 아래 배분인 서문연상이 있음에도 굳이 방취아에게 부탁을 했다.
“예, 사숙.”
방취아는 그가 서문연상에게 따로 물어볼 말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공손하게 대답을 한 후 문옥립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했다.
문옥립은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방취아의 뒤를 따라 대청을 벗어났다.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노해광은 서문연상을 불렀다.
“저자를 검보에서 본 적이 있다고?”
추호의 거짓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노해광이 두 눈을 날카롭게 번뜩이며 물어보자, 서문연상은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거렸으나 이내 자신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숙조님.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었는데, 확실히 삼 년여 전에 저의 할아버님의 칠순 잔치에서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확인해 보니 그때 방화 사형과 함께 검보에 왔었다고 하더군요.”
“그의 이름이 정말 문옥립이냐?”
노해광은 추상과도 같은 위엄 어린 눈으로 서문연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계속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정체도 확실치 않은 사람을 본 파로 데려왔단 말이냐? 그것도 모자라 문파의 어른들을 네 마음대로 불러 모으기까지 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이냐?”
노해광의 추궁이 어찌나 매서웠던지 서문연상의 커다란 눈에 살짝 눈물이 고였다. 하나 그녀는 입술을 꼬옥 깨물더니 한결 당당해진 표정으로 다부진 음성을 내뱉었다.
“제자는 그가 방화 사형의 친척이 확실하다면 기꺼이 본 파의 손님으로 맞이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어른들을 모시려고 한 건 그의 입을 통해 강호로 나간 장문인과 본 파 고수들의 상황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그걸 알려 드리려고 한 것입니다.”
의외로 조리 있는 서문연상의 대답에 노해광은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한결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비무행을 하고 있다는 장문인과 제자들의 최근 소식을 들었단 말이지?”
무섭게 자신을 질책하던 노해광의 기세가 한풀 꺽인 듯하자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제자는 그 소식을 듣자 본 파의 모든 분들에게 어서 빨리 그 소식을 알려 기쁨을 모두와 함께 누리려고 한 것입니다.”
중원으로 간 진산월과 다른 사람들의 소식을 알 수 있다고 하자 모두들 정색을 하고 귀를 쫑긋 세우는 모습이었다.
노해광은 가끔 경솔하고 천방지축으로 행동하는 그녀를 따끔하게 혼내려고 했는데, 이미 기회가 지나가 버렸음을 알아차리고 속으로 쓴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이 여우 같은 계집애가 약점을 파고드는 건 귀신같구나. 오늘만 날이 아니니….’
서문연상을 단단히 벼르고 있으면서도 노해광 자신도 그녀의 입에서 나올 소식이 궁금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자가 말한 소식이란 게 무엇이냐? 소상히 밝혀 보아라.”
서문연상은 중인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었음을 확인하고는 이내 입가에 예전의 활기찬 미소를 지어 보였다.
“놀라지 마십시오 장문인께서 무림구봉 중의 한 사람을 꺾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비무행을 벌이고 있는 본 파의 다음 상대는 유명한 명문인 남궁세가였는데, 장문인께서 나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어 지금 중원 무림 전체가 그 일로 온통 들끓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중인들의 얼굴이 모두 활짝 펴지며 여기저기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노해광은 중인들의 환호성을 뒤로한 채 급히 물었다.
“장문인이 무림구봉 중 누구와 싸웠다고 하더냐?”
“도봉인 금도무적 양천해와 싸웠는데, 지난 십 년간 강호에서 벌어진 싸움들 중 가장 무시무시한 격전이었다고 하더군요. 그 결과 양천해는 장문인의 검에 죽고, 장문인은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노해광조차도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양천해는 무림구봉 중에서도 순수한 무공 실력만으로는 상위권에 드는 절대 고수이며, 특히 도에 관한 한은 그야말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무공광(武功狂)으로 유명한 그와 진산월이 어떻게 시비가 붙어 싸우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정당한 승부에서 그를 쓰러뜨렸다는 건 진산월의 검법이 어떤 경지에 올라와 있는지를 만천하에 똑똑히 보여 준 일대 쾌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문연상은 중인들의 들뜬 반응에 고무되었는지 신이 난 얼굴로 계속 입을 조잘거렸다.
“또한 본 파는 남궁세가와 비무를 벌였는데, 장문인과 낙 사숙은 나오지도 않고 꼬마 사형과 전 사숙, 그리고 새로운 고수 한 분이 차례로 나와서 남궁세가에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더군요. 꼬마 사형도 비기기는 했지만 사실상 이긴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어서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고 합니다.”
“성씨 성을 쓰는 분이라고 하는데, 제자는 처음 듣는 이름이라서….그분이 남궁세가의 최고 고수를 꺾었다고 하더군요.”
서문연상이 쭈삣거리며 말하자 노해광은 하동원을 힐끔 쳐다 보았다.
하동원은 입을 반쯤 벌린 채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가 노해광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이내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 사형이 장문인 일행에 합류한 모양이군요.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성 사형의 실력이라면 무림구봉을 제외한 누구라도 상대할 만하다고.”
노해광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성락중이 남궁세가의 최고수를 이길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고?”
하동원은 입가에 비실비실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예전에 백 사형이나 노 사형에게 한 수 지고 들어가던 성 사형이 아닙니다. 그동안 이십 년 넘게 미친 사람처럼 검만 파고들었는데 그 정도 실력이 되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검귀(劍鬼)나 마찮가지였다니까요.”
노해광은 잠시 침음하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때도 백동일은 몰라도 나보다 약한 실력은 아니었다. 다만 성락중의 성격이 너무 온화하고 부드러워서 나에게 양보했던 것이지. 그런 성격으로 용케도 그 정도 실력을 키웠구나.”
“그런 성격이라서 가능했던 걸지도 모릅니다. 온화한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서운 법 아닙니까?”
그러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종남파 사람들은 서문연상의 주위에 모여들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서문연상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열심히 입을 놀리고 있었다.
자신이 종남파에 머무른 며칠 사이에 그런 큰일이 있었다는 것도 뜻밖이었지만, 화산파와 격돌할지도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이런 소식이 들려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노해광은 기쁨과 뿌듯함, 그리고 중원행을 나가 있는 장문인과 제자들에 대한 대견함으로 가슴이 충만해졌다. 화산파와 어떤 일이 벌어져도 능히 감당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본 파는 더 이상 예전의 나약한 문파가 아니다. 화산파가 아니라 그 어떤 곳이라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곳이다. 본 파는 ……강하다!’
이럴 때 문득 종남파의 부흥을 위해 홀로 모진 고생을 하던 임장홍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노해광은 한동안 마음속의 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몸을 가늘게 떨고 있다가 한 차례 깊은 심호흡을 하고는 슬쩍 소지산을 눈짓해 불렀다.
소지산은 이내 그의 눈짓을 알아차리고 조용히 다가왔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사숙?”
소지산은 표정은 여전히 덤덤해서 환호작약하는 중인들의 모습과는 전혀 달라 보였다. 하나 그를 오래 보았던 사람이라면 좀처럼 표정 없는 소지산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노해광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오히려 민음직스러운지 그를 한동안 부드럽게 바라보더니 이내 목소리를 낮추었다.
“조금 전에 서문연상이 데려온 문옥립이란 자 말이다.”
“예, 사숙.”
“일전에 그와 비슷한 자의 용모파기를 본 적이 있다.”
소지산은 조용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몇 달 전 일이라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는 데 제법 애를 먹기는 했지만, 곧 확실하게 떠올릴 수 있었지. 내 기억이 맞다면 그의 본 명은 문옥립이 아니다.”
노해광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본 용모파기는 초가보의 수뇌급 인물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때 그 인물화의 밑에 적힌 이름은 ‘혈화창 우문화룡(宇文花龍)’이었다.”
방화는 무심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있다는 소지산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선 방화는 이내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오랜많이구나, 화아야.”
그 사람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하는 모습을 방화는 우두커니 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머리를 강하게 맞은 사람처럼 그는 두눈을 크게 뜬 채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그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음성을 내뱉었다.
“어…..어떻게 숙부가 이곳에…..”
방화는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에게 손짓했다.
“어서 가세요. 그리고 다신 이곳에 오지 마세요. 숙부는 자신이 어떤 신분이었는지 잊었단 말입니까?”
그의 얼굴에는 다급한 표정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우문화룡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그렇게 불안해 할 필요 없다. 나는 어떠한 일이 닥치든 기꺼이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말이다. 이라 앉아라. 너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
방화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우문화룡의 말에 따라 그의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우문화룡은 한동안 그를 가만히 살펴보다가, 이내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키가 무척 커졌고, 체구도 많이 건장해졌구나. 남자다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형님이 너를 보셧다면 얼마나 기뻐하셧을지 그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방화의 얼굴 표정이 더할 수 없이 무겁게 굳어졌다.
우문화룡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너를 찾아 지난 몇달간 서안 일대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형수님의 무덤에 네가 왔다 간 흔적이 없었다면 어쩌면 네가 서안을 떠났다 생각하고 너를 찾는 걸 포기했을지도 모르지.”
방화는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우문화룡은 방화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네가 종남파의 제자가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솔직히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서안 일대를 그토록 돌아다녔어도 종남파 쪽으로는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네가 설마 종남파에 몸을 담고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구나.”
“……”
“네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너도 이제는 스스로의 인생을 결정할 수 있는 나이이며,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기에 종남파의 제자가 된 것이겠지. 그 점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우문화룡은 품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 방화에게 내밀었다.
“받아라.”
그 물건을 본 방화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것은 푸른빛이 감도는 작은 옥패였다. 그 옥패는 진귀한 청옥(靑玉)으로 만든 것이어서, 몸에 지니고 있으면 머리가 맑아질뿐 아니라 몸의 잔병을 없애고 진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효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옥패의 한쪽에는 ‘행복안강(幸福安康)’이라는 글귀가 음각되어 있고, 그 밑으로 조그맣게 ‘위부(爲父)라고 쓰여 있었다. 반대 편에는 ‘붕정만리(鵬程萬里)’라는 문구와 ‘차생(此生)’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이 옥패는 방화의 열두 번째 생일날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준것으로, 방화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었다. 하나 어머니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뜬 후 방화는 이 물건을 방 안에 던져 놓고 훌쩍 집을 떠났던 것이다.
방화는 옥패를 받아 든 채 멍하니 그 옥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문화룡은 하염없이 옥패만 바라보고 있는 방화를 측은한 눈으로 응시하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형님께서는 네 방에서 그 옥패를 발견한 후 돌아가실 때까지도 품에 간직한 채 한시도 떼어 놓지 않으셧다. 네가 가지고 나가는 것을 깜박 잊었을 거라며 언제고 돌아올 때까지 대신 보관하고 있겠다고 하셨지.”
“….”
“형님이 어떻게 돌아가셧는지 묻지도 않을 생각이냐?”
방화의 어깨가 크게 흔들렸다. 하나 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문화룡은 한동안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뜻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초가보가 무너지는 것을 직접 본 형님은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기력이 없으셨다. 그분에게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였으니까. 결국 생(生)의 유일한 기회마저 놓치고 만 형님은 스스로의 인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분의 시신은 내가 좋은 곳으로 모셨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방화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유난히 기다란 그의 속눈썹이 끊임없이 떨리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무거운 침묵이 방 안의 공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방화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않고 있었고, 우문화룡도 더 이상은 말을 잇지 못한 채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침묵을 깬 사람은 의외로 방화였다. 그는 거의 알아차릴 수도 없을 만큼 조그만 목소리로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다행히 우문화룡은 누구보다도 귀가 예민한 사람이어서 그의 웅얼거리는 듯한 말을 용케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긴 말은 없었느냐는 물음이었다.
우문화룡은 짤막하게 답변했다.
“두 마디뿐이었다.”
방화가 감았던 눈을 뜨고 자신을 쳐다보자 우문화룡은 천천히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뇌리에는 공허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한 채 눈물짓고 있던 방룡의 마지막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벌써 몇 달 전의 일이건만 마치 어제의 일처럼 모든 것이 너무도 분명히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때의 떨림, 그때의 허탈함, 그때의 깊은 슬픔과 고독, 그 모든 감정들이…..
우문화룡은 그 모든 기억들을 방화에게 전해 주고 싶었지만, 그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방룡이 남긴 마지막 말뿐이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그의 음성은 깊은 울림을 담고 밤 안을 한동안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방화의 두 눈에 촉촉한 물기가 배어 나왔다. 그 물기는 이내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되어 그의 뺨을 적셨다. 한 번 흘러내린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방화는 두 손을 입에 대고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흐느낌만큼은 들리지 않게 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불가항력인 것이었다.
이제는 제법 건장해진 그의 어깨가 끊임없이 흔들리며 나직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우문화룡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거두고 말았다. 이럴 때의 위로란 불필요한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방화 일가는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가 고향이었다.
방룡은 어려서부터 난주의 후미진 뒷골목에서 어렵게 자라났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넓고 해활(海闊)했다. 그는 지금은 한없이 비루하고 초라한 자신이지만, 언젠가는 저 넓은 중원을 호령하는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날품팔이를 하여 조금씩 모은 돈으로 작은 무관(武館)을 다녔고, 거기에서 배운 것을 필사적으로 연습했다. 그러다 실력이 늘어나고 돈을 모으면 좀 더 큰 무관으로 옮기는 생활을 몇 년이고 계속했다.
그의 노력과 재질이 빛을 발한 건 그가 세 번째로 무관을 옮겼을 때였다.
난주 제일의 무관인 백룡관(白龍館)의 관주인 청천백룡(靑天白龍) 채만익(菜萬익)은 방룡의 재질이 범상치 않은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일개 문하생인 그를 자신이 직전 제자(直傳弟子)로 받아들였다.
처음으로 채만익의 정식 제자가 되는 날, 방룡은 채만익의 무남독녀인 채소하(蔡小霞)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조용한 성품의 아름다운 아가씨였고, 방룡은 야망에 불타는 투지 넘치는 젊은이였다. 두 사람은 처음 본 순간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고, 곧 자신들만의 사랑을 가꿔 가기 시작했다.
우문화룡이 방룡을 만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채만익과 가장 친한 사이인 난화신창(蘭花神槍)탕효(蕩梟)의 수제자였던 우문화룡은 남몰래 채소화를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다른 사람과 사귄다는 말에 불같이 화를 내고 방룡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방룡은 서슴치 않고 그의 도전을 받아 주었으며, 불과 오초도되지 않아 무수히 얻어 맞고 말았다. 나중에야 우문화룡은 방룡이 채만익의 정식 제자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며, 제대로 무공을 배운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신출내기임을 알고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실력으로 겁도 없이 자신의 도전을 선뜻 받아들였던 것이다.
‘내 여자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결코 피하지 않는다.’는 방룡의 대답에 우문화룡은 쓸쓸히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우문화룡이 방룡을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오 년 후였다. 그때 방룡은 전혀 다른 고수가 되어 있었다. 예전에 자신의 창을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고 두들겨 맞던 애송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표범처럼 날카롭고 매처럼 사나운 한 명의 강호인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방룡이 그에게 먼저 도전을 해 왔다. 그리고 우문화룡은 백여 초 만에 그의 손에 처참하게 패하고 말았다. 그때 우문화룡은 평생 그를 따를 것을 결심했고, 지금까지 그 결심을 단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방룡이 채소하와 결혼한 것은 그다음 해였다. 두 사람의 신혼 생활은 무척 단란했으며, 일 년 후에 행복의 결실인 방화가 태어났다. 아마 그때가 방룡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기였을 것이다.
하나 그 행복은 이내 어두운 그림자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도 방룡의 사부이자 장인인 청천백룡 채만익의 죽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채만익은 난주 제일의 무관을 운영하기는 했지만 무공 실력은 난주 최고라고 하기에는 미흡했다. 실제로 그는 친구인 탕효보다도 아래 수준의 고수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화산파의 속가 제자인 장진원(張進遠)이란 자가 난주에 무관을 차린 것이다. 더구나 그가 백룡관의 바로 길 건너편에 쌍룡무관(雙龍武館)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으니 채만익으로서는 어이가 없다 못해 분통이 터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항의하는 채만익에게 장진원은 공개 비무를 제안했고, 채만익으로서는 그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난주의 대로 한복판에서 비무를 벌인 끝에 채만익은 장진원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그때 방룡은 우문화룡과 함께 산서 지방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가 소식을 듣고 난주로 급히 돌아왔을 때는 이미 채만익이 비무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에 화병까지 겹쳐 세상을 떠나 버린 후였다. 방룡은 대노하여 장진원에게 도전장을 냈으나 장진원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다. 명목상으로는 채만익이 비명에 갔는데 그의 제자마저 그렇게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었으나, 이미 방룡의 무공이 채만익을 능가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장진원이 의도적으로 그를 피해 버린 것이다.
방룡은 갖은 방법을 다해 장진원과 싸우려 했으나 그를 만날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때마침 화산파의 장로와 제자 몇 사람이 찾아와 쌍룡무관에 머무르는 바람에 쌍룡무관은 난주에서 일종의 성역처럼 되어 버렸다. 그때 방룡은 자신의 미약함과 명성의 힘을 절감할 수 있었다. 화산파라는 이름은 난주에서 평생을 살아온 채만익의 비극적인 죽음에 누구도 불만을 표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막강한 위력이 있었다.
방룡이 자신만의 세를 불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방룡은 우문화룡과 함께 감숙성은 물론이고 산서성과 섬서성까지 돌아다니며 마음에 맞는 고수들을 찾아 수하로 받아 들이기 시작했다. 하나 그 성과는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뚜렷한 명성도 없고, 뒤를 받쳐 줄 후원 세력도 없는 그를 따르려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내인 채소하는 그런 그를 몇 번이나 만류해 보았으나 그는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의 애원도 뿌리치고 미친 사람처럼 세력을 모으기 위해 사방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그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그의 휘하에 고수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채소하는 자신의 남편 곁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머무르는 광경을 그저 걱정스럽고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으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력이 일정 수준이 되자 방룡은 난주를 떠나 섬서성 서안 근처로 거처를 옮겼으며, 이름 또한 초관으로 바꾸어 자신의 신분을 탈바꿈했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를 완전히 버리겠다는 의미였으며, 강호에 새로운 실력자가 등장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방룡, 아니 초관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난 고수들의 숫자는 어느새 백 명을 넘었으며, 초관은 서안 일대를 장악하는 무시무시한 인물이 되어 버렸다. 하나 그럴수록 채소하와 그의 사이에는 두꺼운 벽이 생겨났고, 그 벽은 갈수록 높고 커져서 그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뚫을 수 없는 거대한 철벽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늘 난주로 돌아갈 것을 꿈꾸었고, 과거의 생활을 그리워했다. 하나 초관의 주위에 있는 자들은 그녀가 과거로 귀환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초관이 철처히 신비한 인물로 남기를 원했고, 그가 자신들의 뜻대로 앞을 향해 나아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 그녀는 한없이 불편하고 거슬리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난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그때마다 그들에게 제지를 당했다. 그리고 마침내 비극이 일어났다. 다섯 번째로 가출을 실행했던 그녀가 벼랑에서 떨어진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그녀가 실제로 남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위험천만한 벼랑으로 가다가 실족(失足)했는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불의의 변(變)을 당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한 사람, 그녀의 아들인 방화만이 비통과 절망에 차서 울부짖었을 뿐이었다.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어요!”
방화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매정한 아버지를 향해 고래고래 악을 썼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후, 방화는 애지중지하던 청옥패를 침상 위에 던져 놓은 채 모습을 감추어 버렸던 것이다.
“형님은 언제나 너와 형수님께 미안해 하셧다. 하지만 그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때론 멈추거나 내릴 수 없는 마차도 있는 법이다. 형님은 이미 오래전에 그런 마차에 타고 있었던 거야.”
묵묵히 우문화룡의 말을 듣고만 있던 방화가 번쩍 고개를 쳐들고 그를 쳐다보더니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그 마차가 한 번 타면 다시는 내릴 수 없는 마차라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우문화룡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분명하게 알고 계셨다.”
“그런데도 그 마차를 타셨단 말입니까?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우문화룡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꿈을 위해서다.”
“꿈? 무슨 꿈을 말입니까?”
“어떤 문파, 어떤 고수에게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을 갖기를 원했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강호에 오롯이 설 수 있기를 정말 간절히 원했던 거야.”
“…….!”
“화산파의 속가 제자에게 당하고도 복수조차 하지 못하는 비참한 신세는 절대로 되지 말자고 다짐했지. 그 다짐이 점차로 커져서 하나의 소망이 되고, 마침내는 평생 이루어야 할 커다란 꿈이 되어 버린 것이다. 방화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꿈이 자신의 가족을 버리고 스스로의 인생에 족쇄를 채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까?”
우문화룡은 성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방화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한 차례 나직한 탄식을 토해 냈다.
“그것은 가치 이전에 생존의 문제였다. 그 꿈조차 꾸지 못했다면 형님은 무림인으로서 더 이상 살아갈 아무런 의욕도 없었을 테니까.”
방화는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내팽개쳤냐고 소리치려 했다. 하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자신 또한 그런 꿈을 위해 살아온 사람들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몰락한 문파를 일으켜 세우고 언젠가는 반드시 군림천하 하겠다는 꿈 하나로 모진 세월을 견뎌 온 사람들이 바로 종남파의 고수들 아닌가? 남들이 볼 때는 너무도 터무니없고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 해도 그들은 절실하게 그 꿈을 갈망해 왔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던져 왔다.
방화 자신도 기꺼이 그 꿈에 동참하여 지금까지 달려오지 않았던가? 종남파가 꾸었던 꿈과 아버지인 방룡이 꾸었던 꿈은 다를 게 없었다. 단지 종남파는 지금도 그 꿈을 향해 착실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고, 방룡은 처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는 차이뿐이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던졌다가 실패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머니의 허무한 죽음과 자신의 비참한 소년 시절은 누가 보상해 준단 말인가?
방화는 복잡한 심정이 되어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우문화룡은 무거운 얼굴로 수시로 변하는 방화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방화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더 이상의 어떤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그것은 순전히 방화 혼자의 힘으로 극복해야 할 일이었다.
장내가 한없이 무거운 침묵에 휘감겨 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두 사람이 있었다. 노해광과 소지산이었다. 그들의 표정 또한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방화가 초가보주 초관의 아들이었을 줄은 미처 몰랐군.”
노해광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소지산은 고개를 숙였다.
“제자의 신상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니 모두 사부인 저의 불찰입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신분도 확실치 않은 자를 문하로 받아들인 장문인의 잘못이겠지. 네가 자책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불가항력적인 일도 있는 법이다. 초가보주의 하나뿐인 아들이 초가보와 싸우고 있는 본 파의 제자로 들어오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느냐?”
소지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표정은 여전히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노해광은 아직도 입을 굳게 다문 채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혈화창 우문화룡이라니, 의외의 변수로구나, 그와 그가 이끄는 수신대는 초가보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전력이었는데,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군.”
“초가보가 본 파에 의해 무너졌으니 그들이 본 파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일반적인 생각인데, 만약 그랬다면 우문화룡이 정체가 드러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발로 본 파를 찾아오지는 않았을 게다.”
“사숙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노해광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어떤 일은 직접 부딪쳐 보는 것이 올바른 해답일 때가 있다. 잠시 후에 우문화룡을 만나서 그의 입으로 직접 답을 들어 보는 게 좋을 듯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