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4권 모산지연(姆山之宴)편 : 7화
제 246장 우중조우(雨中漕遇)
비가 내리고 있었다. 봄비는 소리 없이 온다고 했는데, 이번 비는 폭우에 가까운 것이어서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진산월 일행은 회남을 떠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아 좀처럼 보기 힘든 세찬 봄비에 가로막혀 버렸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주루를 발견하고 몸을 피할 수 있었으나 더 이상 길을 떠나기는 힘들어 보였다.
동중산은 먹물이라도 뿌린 듯 검게 변해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금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쉽게 그칠 비가 아니로군. 적어서 내일까지는 계속 내릴 듯한데….”
그가 걱정하는 것은 진산월 일행이 이틀 이내로 소호까지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늦지 않게 출발했다고 생각했는데 뜻하지않은 폭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을 지체하게 생겼으니, 일정을 책임지고 있는 그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장풍(長豊)이란 곳으로, 아직도 소호까지는 상당히 먼 길을 가야 했다. 당초 계획은 오늘 저녁까지 합비(合肥)에 도착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하루를 지체해 버리면 일정 자체가 상당히 빡빡해지게 된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퍼붓고 있는 폭우 속을 뚫고 갈 수도 없는 일이라 동중산은 검게 변한 하늘을 원망스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마침 그때 진산월이 그를 불렀다.
“중산, 오늘은 길을 떠나기 힘들 것 같으니 이곳에서 여장을 풀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장문인.”
동중산은 힘차게 대답하고는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주루의 장방에게로 다가갔다. 동중산이 장방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진산월에게 성락중이 다가왔다.
“내일까지 소호에 도착하지 못할지도 모르겠군.”
성락중 또한 이 폭우가 쉽게 그칠 비가 아님을 직감하고 있었다. 의외로 진산월은 별로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하루쯤은 늦어도 괜찮을 겁니다. 우리만 지체되는 건 아닐 테니 말입니다.”
진산월의 말에 성락중은 이내 무언가를 떠올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혁리가의 공자도 이 빗속에 갇혀 있겠군. 그래도 그는 하루 먼저 출발했을 테니 우리보다는 사정이 낫지 않겠나?”
“오늘 아침에 출발했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우리보다 겨우 몇 시진 앞섰을 뿐이니, 지금쯤이면 아마도 이곳과 합비의 중간지점에 머무르고 있을 겁니다.”
성락중은 신통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걸 어찌 아는가?”
“회남을 떠나기 전에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개방의 분타주를 잠깐 만났습니다. 그에게서 혁리공이 오늘 묘시(卯時)경에 머물러 있던 남궁세가에서 나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진산월 일행이 회남을 출발한 것은 사시(巳時)경이니 겨우 두 시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제야 마음을 놓게 된 성락중은 다소 느긋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는 편히 쉴 수 있겠군. 이 주루는 제법 오래된 듯한데, 우중(雨中)에 이런 곳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도 운치있는 일이겠군.”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가볍게 한 잔만 하도록 하지.”
저녁에는 다시 손풍의 십이경맥을 뚫기 위해 힘을 써야 하므로 마음 놓고 술에 취할 수는 없었다. 진산월은 뇌일봉까지 모셔와 세 사람이 함께 내리는 비를 벗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안주는 산채나물 몇 가지에 불과했지만, 모처럼 내리는 폭우 속에서 고색이 완연한 오래된 주루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성락중의 말마따나 상당히 운치 있는 일이었다.
멀찌감치 앉은 송풍이 이쪽을 바라보며 침만 꼴까닥 삼키고 있자 동중산이 슬며시 그를 잡아끌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마 그들도 자신들끼리 한잔하려는 것일 게다.
뇌일봉이 그 광경을 봤는지 술을 한 잔 훌쩍 들이켜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흐흐, 참새가 방앗간을 보고 그냥 지나치진 못하겠지. 그나저나 저놈이 무척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요상한 무공을 익히기에 그렇게 야단법석인 게냐?”
“무공 때문이 아니라 손풍의 몸속에 있는 기운을 다스리려고 하다 보니 예상보다 어려움이 많더군요. 손 노태야가 그에게 특별한 영약이라도 먹인 것 같습니다.”
“몸속에 그런 기운을 지니고 있으니 저놈이 사고를 치고 다녔던 것도 당연하지. 용케도 큰 사고를 터뜨리지 않고 지금까지 참고 있었구나.”
뇌일봉은 자신도 높은 내공을 지닌 무림인이기 때문에 몸속에 막대한 기운을 지니고 있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솟구치는 기운 때문에 성질이 급해지고 난폭해져서 함부로 사람에게 주먹을 휘두르기도 하고, 때로는 폭급함을 이기지 못하고 흉기를 휘둘러 인명(人命)을 살상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다 어설프게 무공을 배우면 살인귀가 되거나 악명을 떨치는 마인(魔人)이 되기 십상인데, 그런 점에서 손풍은 매우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진산월은 뇌일봉의 비어 있는 잔에 새롭게 술을 따르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마 그의 본성이 그리 나쁘지 않은 데다 친구를 잘 만났기 때문일 겁니다.”
말을 들어 보면 파락호 생활을 하면서도 나름대로 괜찮은 친구들을 사귀었더군요. 그래서 나쁜 길로 빠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건 정말 중요하지. 문제는 그런 친구를 만나기가 정말 힘들다는 거야.”
말을 하는 뇌일봉의 얼굴에 잠시 아련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자신의 절친한 친우였던 임장홍이 생각나는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강호를 행도하면서 제법 많은 사람을 만난 것 같은데, 막상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에 불과하지. 그렇게 어렵게 만난 좋은 친구는 대개가 일찍 세상을 떠나더군.”
뇌일봉의 음성에는 씁쓸함과 아련함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뇌일봉은 손안에 들고 있던 술잔을 만지작거리더니, 다시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고는 무거운 얼굴로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너는 제발 오래 살아라. 친구를 놔두고 일찍 죽는 건 정말 몹쓸 짓인 거야.”
“알겠습니다. 그래도 뇌 대협께는 아직 친한 친구분이 남아 계시지 않습니까?”
뇌일봉의 얼굴에 그제야 밝은 빛이 감돌았다.
“그래. 곽자령, 그 녀석이 있지. 그런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얼굴 본 지가 오 년도 넘은 것 같군. 친구라고 이제 달랑 하나 남은 녀석 만나기가 그렇게 힘드니, 이게 진짜 친구인지 아닌지 가끔은 의아한 생각이 든다니까.”
말과는 달리 그를 생각하기만 해도 마음이 기쁜지 뇌일봉의 입가에는 살짝 미소가 어려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뇌일봉과 곽자령은 임장홍의 가장 친한 친구들인데, 막상 임장홍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뇌일봉만이 장례식이 끝난 후 뒤늦게 왔다 갔을 뿐 곽자령은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전에도 그들이 만나는 경우란 몇 년에 한 번씩 서로 방문하거나 강호에서 우연히 조우할 때 외에는 거의 없었으니, 남들의 눈으로 볼 때 친구라고 하기에는 영 미흡한 수준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사정을 알고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뇌일봉은 집이 산서성 태악산(太岳山) 인근에 있는지라 대부분의 생활을 산서성에서 보내고 있었다. 반면에 곽자령은 절강성의 안탕산이 주 활동 무대였다. 서로 거주하는 곳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왕래하기가 무척 힘이 들는 것이다.
그나마 뇌일봉은 태악산에서 종남산까지의 거리가 가까운 편이라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종남파에 들르고는 했는데, 곽자령은 머나먼 절강에서 섬서까지 오기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임장홍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뇌일봉은 미친 듯이 달려서 장례식 직후에라도 도착할 수 있었으나 곽자령은 올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 곽자령이 임장홍의 사망 소식을 들은 것은 장례식이 지나고 나서도 한참 후였을 것이다.
그렇게도 멀리 떨어진 세 사람이 서로 막역지우가 된 것은 정말 하늘의 운이 닿았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십여 년 전, 당시 종남파의 일 대 제자였던 임장홍은 우연히 강호를 행도하다가 하남성의 정주(鄭州)에서 우연히 시비에 휘말리게 되었다. 주루에서 식사를 하던 중에 어떤 젊은 남자가 부녀자를 희롱하는 광경을 본 임장홍은 그 남자를 제지하다가 그 남자의 얼굴에 손이 닿고 말았다. 뺨을 맞았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손이 슬짝 스친 것에 불과했으나, 젊은 남자는 자신이 폭행을 당했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곧이어 젊은 남자의 일행인 듯한 세 명의 남자들이 나타나 임장홍을 에워싸고 시비를 걸어왔다.
나중에야 임장홍은 그들이 정주의 유명한 망나니들인 낙화사랑(落花四郞)임을 알았으나, 당시에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담담한 얼굴로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며 그들을 이해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다 낙화사랑 중의 한 명이 느닷없이 휘두른 칼에 옆구리를 찔리고 말았다. 사실 낙화사랑의 무공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닌지라 임장홍이 주의만 기울렸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으나, 사람이 좋은 임장홍은 그들이 사정을 몰라 흥분한 것으로 착각하고 그들을 납득시키려고 애를 쓰다 불의의 일격을 맞고 만 것이다.
아무리 사람 좋은 임장홍이라도 자신이 칼을 맞자 발연대노하여 두 주먹을 휘둘러 그들을 쓰러뜨리고 말았다. 낙화사랑 중 세명은 임장홍의 손에 턱과 옆구리를 맞고 쓰러지고, 처음에 사달을 일으켰던 젊은 남자만이 두고 보자는 욕설을 내뱉으며 도망쳐 버렸다. 임장홍이 칼에 찔린 옆구리를 부여잡고 어이가 없는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을 때 누군가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어서 정주를 떠나시오. 방금 도망친 자의 아버지는 정주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혈자문(血字門)의 문주인 냉혈진군(冷血眞君)마천봉(馬天奉)이라오.”
임장홍도 혈자문에 대한 소문은 들은 적이 있었다. 정주 일대에서 제일 큰 문파이면서도 평판이 그리 좋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하나 문주인 마천봉의 실력이 워낙 뛰어나 아무도 그들의 면전에서 그들을 욕하진 못한다는 것이다.
어쩐지 사람이 많은 백주 대낮에 함부로 아녀자를 희롱해도 아무도 말리는 자가 없다고 했더니, 그 망나니가 마천봉의 아들이기에 그런 모양이었다. 그래도 임장홍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천봉이 두려워 그런 일을 보고도 눈을 감았다면 크게 부끄러워했을 것이나, 자신은 마음이 떳떳하여 추호도 거리낌이 없었다. 설사 이번 일로 마천봉의 분노를 사서 그와 싸우게 된다 할지라도 임장홍은 이번 일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옆구리를 지혈하고 당당한 얼굴로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자 지켜보고 있던 주위 사람들이 오히려 호들갑을 떨었다.
“어서 떠나라니까. 마천봉은 아들놈에게 맹목적인 인간이라 자기 아들이 맞고 들어왔다고 하면 만사를 제처 두고 뛰어올 거란 말이오.”
그래도 임장홍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이 몰락한 문파의 제자라고 해도 상대가 무서워서 꼬리를 말 수는 없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중인들은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닦달했으나 그가 떠날 기미를 안 보이자 이내 포기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러다 큰 변을 당해야 정신을 차리지.”
“놔두게. 마천봉이 어떤 인간인지 모르니 저런 게지.”
“생긴 걸로 보나 말하는 걸로 보나 참으로 점찮은 사람인데 안타까운 일이로군.”
“저놈이에요, 아버지. 저놈이 나와 내 친구들에게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아들이 손가락으로 임장홍을 가리키자 마천봉은 불문곡직하고 임장홍에게 덤벼들어서 정주의 길러리 한복판에서 난데없는 무림인들 간의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마천봉의 무공은 듣던 대로 과연 뛰어난 것이어서 임장홍은 정신없이 몰리게 되었다. 아마 그때 누군가가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임장홍은 마천봉의 손에 처참한 꼴을 당했을 것이다.
“멈추시오!”
굉량한 음성과 함께 세찬 경풍이 그들 사이로 날아오자 두 사람은 서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임장홍은 이미 어깨와 가슴에 일장(一掌)씩을 맞은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마천봉은 살기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방해한 자를 노려보았다.
“왠 놈이냐?”
그들 사이에 끼어든 인물은 당당한 체구의 삼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장한이었다.
“나는 산서의 뇌일봉이라 하오.”
마천봉의 몸이 잠깐 멈칫거렸다.
“이제 보니 요즘 들어 진산수라는 명칭으로 제법 이름을 날리고 있는 자로군. 그런데 무슨 일로 내 일을 방해하는 건가?”
마천봉은 오십 대 초반인 자신이 나이도 더 많고 강호에서의 명성도 더 높다고 생각하여 서슴없이 하대를 했다. 그러자 뇌일봉이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이번 일을 계속 지켜보았소.”
“그래서?”
“이번 일은 애초에 마 문주의 망나니 아들이 아녀자를 희롱했기에 벌어진 일이었소. 저 사람은 예의를 갖추어 그러지 말라고 했을 뿐인데, 마 문주의 아들은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일행까지 가세해서 말리는 사람을 칼로 찌르기까지 하는 만행을 서슴없이 저질러, 보고 있던 나조차도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소.”
“…..!”
“그런데 마 문주가 그런 무뢰배들을 혼내기는커녕 자신의 아들이 있다고 그들의 편을 들어 불문곡직하고 살수를 휘두르고 있으니, 강호인들이 이를 알면 무어라고 할지 걱정이 드는구려.”
마천봉의 두 눈에 냉혹한 빛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그래서 나를 말렸단 말인가?”
뇌일봉은 마천봉의 살기등등한 눈초리에도 전혀 두려운 기색없이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렇소. 아무리 마 문주가 정주 최고 문파의 주인이라고 해도 이런 식의 일 처리는 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오.”
마천봉은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뇌일봉을 쏘아보더니 곧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이자의 말이 사실이냐? 내 아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앞으로 나서라. 만약 이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들 녀석에게 엄한 벌을 내리겠다.”
그의 음성에는 진득한 살기가 잔뜩 묻어 있어서 심약한 사람은 제자리에 서 있지도 못할 만큼 무시무시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뒤로 주춤 물러서더니, 이내 하나둘씩 꼬리를 말고는 등을 돌렸다.
“난 아무것도 못 봤어. 자네는 봤나?”
“아니. 자네도 알지 않아? 내가 금방 여기에 온걸. 무슨 일이 있었나?”
“그러고 보니 할 일이 있었는데 깜빡 잊었네. 늦기 전에 어서 가봐야지.”
이내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거리는 한산해졌다. 뇌일봉은 사람들의 반응을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정주에서 마천봉이 얼마나 무서운 명성을 떨치고 있는지 미처 알지 못했던 그의 실수였다. 사람들은 공연히 마천봉의 눈 밖에 나서 혹독한 보복을 당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마천봉의 얼굴은 득의만면함과 냉혹한 살기로 뒤덮여 있었다.
“흐흐…. 어떤가? 이래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가?”
뇌일봉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사람들의 작태가 한심스럽기도 해서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용히 한쪽으로 물러나 있게. 이놈은 감히 내 아들을 폭행하고 정주의 대로 한복판에서 행패를 부렸으니 정주를 책임지고 있는 나로서는 응징하지 않을 수 없네.”
뇌일봉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앞으로 성큼 나서며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정말 눈꼴 시려서 도저히 그냥 못 지나가겠군. 아들놈은 천하의 후례자식이고, 그 아버지란 작자는 강압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는 천하의 무뢰한이니 그야말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로구나.”
난데없는 독설에 마천봉의 얼굴이 푸르뎅뎅하게 굳어졌다.
“어떤 미친놈이냐?”
마천봉이 살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돌아보니 죽립을 깊게 눌러쓴 호리호리한 체구의 사나이가 앞으로 걸어 나와 뇌일봉의 옆에 나랑히 섰다.
“내가 누구인지는 알 것 없고, 이 사람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은 사실이니 공연히 멀쩡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생각 하지 말고 너의 그 색에 발광하는 미친 아들놈이나 두들겨 패든지 해라.”
거침없는 말을 내뱉은 죽립인의 기도는 날카롭기 그지없어서 마천봉은 내심 껄끄러운 생각이 들었으나, 중인환시(衆人環視)리에 이런 말을 듣고도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도 거리의 곳곳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골목이나 건물 뒤에 숨어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놈이로군. 누구냐? 무명 잡배가 아니라면 떳떳하게 이름을 밝혀라.”
“내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다. 네 아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자는 나오라고 해서 나왔는데 왜 엉뚱한 소리만 지껄이느냐? 저못된 후레자식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 똑똑하게 지켜보도록 하마.”
“죽일 놈! 입이 찢어진 다음에도 아가리를 놀릴 수 있는지 한번 보겠다.”
마천봉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노성을 터뜨리며 죽립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것이 냉혈진군 마천봉의 최후였다. 놀랍게도 죽립인은 불과 삼십여 초 만에 마천봉을 자신이 흘린 피바다 속에 눕게 만들었던 것이다.
정중 일대를 장악한 채 옷갖 패악을 일삼던 혈자문이 멸문한것은 그날 저녁이었으며, 강호에 팔비신살 곽자령의 명성이 퍼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 * *
“그때 마천봉을 쓰러뜨린 죽립인이 바로 곽자령이었다. 우리는 마천봉의 시신 앞에서 서로 통성명을 나누고는 함께 힘을 합쳐서 혈자문을 때려 부수었지. 솔직히 그때 나와 임장홍은 별로 한 것이 없었고, 대부분 곽자령의 솜씨였다. 당시의 곽자령은 정말 손속이 매서워서 일단 손을 쓰면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말았다. 그의 별호에 ‘살(煞)’자가 들어간 것도 다 그때의 영향 때문이지.”
진산월은 곽자령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어 묵묵히 뇌일봉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곽자령을 본 것은 두 번뿐이었고, 그나마도 사부인 임장홍에게 소개를 받은 것에 불과해서 제대로 이야기조차 나눠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혈자문을 무너뜨린 다음 정주의 구석에 있는 한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였는데, 몇 마디 나누지 않아 서로의 마음이 잘 맞는다는 것을 알고 곧 의기투합하여 그다음 날까지 꼬박밤을 새우며 그 술집의 술을 모두 비우다시피 했다. 그때가 벌써 이십삼 년 전이었으니 정말 오래된 이야기지.”
뇌일봉은 당시가 생각나는 듯 눈가에 아련한 빛이 감돌았다.
“그로부터 삼 년이 지났을 때, 우리는 우연히 용문산(龍門山) 부근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세 사람이 약속도 하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었지.”
당시의 일은 진산월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때 임장홍은 장문인의 자리에 오른 후 종남파를 재건하기 위해 땀을 쏟고 있었다. 하나 이 년 전에 벌어진 기산취악으로 인해 문파의 고수들이 대부분 종남파를 떠나 버렸고, 그나마 남아 있던 제자들마저 하나둘씩 모습을 감추어서 그야말로 이름만 남은 유명무실한 문파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져 가는 문파를 힘겹게 지탱하고 있던 임장홍에게 다시 한 가지 큰 불행이 닥쳤다. 아내인 두란향이 병을 얻어 쓰러져 버린 것이다. 문파 재건에 정신이 없는 임장홍을 뒷수발해 주다 가뜩이나 허약한 몸이 무리를 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아내의 병에 발을 동동 구르던 임장홍은 때마침 산서성의 용문산 계곡에서 화리(火鯉)가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아내의 병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그것을 구하기 위해 종남산을 내려가게 되었다.
용문산에는 원래 잉어가 많아서 그 잉어 떼들이 계곡을 거슬러 오르는 장면이 마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다 하여 ‘용문(龍門)’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간혹 그 잉어들 중 화기(火氣)를 품은 붉은색 잉어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것이 바로 화리였다. 화리는 발견하기도 힘들뿐더러 잡기는 더욱 힘들어서 십 년에 겨우 한두 마리 정도 잡을 수 있을 뿐이었다. 용문산에 도착해 보니 이미 그 일대는 모처럼 나타난 화리를 잡으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려서 임장홍은 은근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중에는 상당한 수준의 고수들도 눈에 띄었기에 그들을 제치고 화리를 잡는다는 것이 수월치 않아 보였던 것이다. 그곳에서 임장홍은 뜻밖에도 뇌일봉과 곽자령을 보게 되었다. 뇌일봉은 자신의 거처인 태악산에서 멀지 않은 용문산에 화리가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동해서 온 것이고, 곽자령은 장성쪽으로 가던 중 우연히 용문산을 지나게 되었던 것이다.
삼 년 만에 우연히 다시 만난 세 사람은 놀라움과 반가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임장홍의 사정을 알게 된 두 사람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임장홍은 여러 고수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화리를 잡을 수 있었다. 임장홍은 그들에게 정식으로 교우 관계를 제의했고, 두 사람이 선뜻 승낙하여 세 사람은 한 잔의 술을 나누어 마시며 서로 간의 우의를 다짐했다. 하나 아내 때문에 마음이 급한 임장홍은 그들에게 조만간 반드시 종남파로 찾아오라는 부탁의 말만 남기고 황급히 종남산으로 돌아왔다.
어렵게 구해 온 화리 덕분인지 두란향은 한동안 병세가 나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결국 허약해진 몸이 병마(病魔)를 이기지 못해 다시 시름시름 앓다가 일 년 후에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뇌일봉과 곽자령이 종남파를 찾아온 것은 두란향이 죽은 지 두 달 후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세 사람은 이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누구보다 두터운 친구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뇌일봉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꼭 종남파로 임장홍을 찾아왔고, 곽자령은 거리가 멀어서 뇌일봉만큼 자주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사오 년에 한 번씩은 임장홍을 만나기 위해 종남산에 들르고는 했던 것이다.
“우리가 좀 더 일찍 찾아왔다면 장홍의 처(妻)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쉽더구나.”
진산월은 묵묵히 뇌일봉의 말을 듣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곽 대협은 어떤 분이십니까?”
뇌일봉은 눈을 살짝 크게 뜨고 진산월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너는 곽자령을 만난 게 몇 번 되지 않으니 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겠구나.”
“두 번 봐었지만 그때마다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 말아서 그분에 대한 기억이 거의 남은 게 없군요.”
“그럴 것이다. 그때 이후 그가 종남파에 온 것도 모두 세 번뿐이고, 그중 한 번은 네가 입문하기도 전이었을 테니 말이다.”
뇌일봉은 잠시 손에 든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생각을 정리하더니, 술잔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고는 말문을 열었다.
“내가 곽자령을 알게 된 것은 이십 년도 넘었지만, 그를 만난 것은 열 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처음 그를 본 순간부터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었지.”
진산월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옆에서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성락중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가슴이 뜨겁고 행동은 과격한 남자다. 좋게 보면 열혈남아(熱血男兒)라고 할 수 있지만, 그를 난폭하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제법 있는 편이지. 젊었을 때는 이런 성향이 더욱 심해 무림에서 상당한 살명(殺名)을 날리기도 했다.”
곽자령이란 이름은 해남에만 처박혀 있던 성락중도 곧잘 들어본 이름이었다. 비륜(飛輪)의 고수이고, 안탕산뿐 아니라 절강성 전체를 통틀어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무서운 실력의 소유자라고 했다. 일단 그의 손에서 비륜이 날게 되면 누군가는 반드시 피를 뿌리며 쓰러진다는 소문이 강남 일대에 자자하게 퍼져 있었다. 그의 비륜을 날리는 솜씨가 어찌나 빠르고 매섭던지, 마치 여덟 개의 팔을 가진 것 같다고 하여 붙은 별호가 팔비신살이다.
“사실 강호에는 곽자령의 손속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여 그를 사도(邪道)의 고수로 오해하는 자들도 있으나, 곽자령은 냉혹한 솜씨만큼이나 뜨거운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이다. 단지 그가 사용하는 암기의 위력이 너무 날카로워서, 일단 격중되면 사람의 팔다리가 무 토막처럼 잘라지기 때문에 그런 악명을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도 나이를 먹으면서 살수를 쓰는 것을 많이 자중하고 있다. 하더구나.”
뇌일봉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우를 회상하듯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행동은 거칠고 말도 투박하지만, 그래도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를 좋아하고 있다. 너무 직설적이어서 종종 사람을 당혹스럽게 하기도 하지만, 그건 그만큼 그가 순박하고 솔직한 성격이란 뜻이기도 하지, 그가 환상제일창 유중악과 친한 사이가 된 것도 유중악이 그의 그런 점을 높이 샀기 때문일 것이다.”
진산월은 곽자령에 대해 들을수록 사부인 임장홍과 너무 다른 성격임을 알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판이한 셩격의 두 사람이 뜻하지 않은 일로 알게 되어 오랜 세월 동안 각별한 우정을 쌓게 되었으니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이 곽자령을 처음 본 것은 종남파에 입문한 다음 해였다. 그때만 해도 아직 사람 대하는 것이 서툴렀던 진산월은 난데없이 불쑥 종남파를 찾아온 곽자령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두 번째로 곽자령이 왔을 때는 그가 종남파의 대제자가 되어 다음 대 장문인으로 내정받은 후였다.
그제야 비로소 진산월은 임장홍에게서 정식으로 곽자령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나이가 어렸던 그로서는 그들 간의 대화에 끼어들거나 술 한 잔 같이 나눌 수 없었다. 곽자령은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왔다가 밤새도록 임장홍과 술을 마시고는 간다는 말도 없이 훌쩍 떠나 버려서 임장홍조차도 ‘참으로 정신없는 친구로군.’ 하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서안의 명문 호족인 이씨세가에서 곽자령이 임장홍과 친분이 있음을 알고 임장홍을 초대해 곽자령과 안면을 트려고 했다. 결국 그 일은 곽자령이 임장홍의 서신을 가지고 찾아온 이씨세가의 고수를 홀대해 쫓아 버림으로써 흐지부지 되었지만, 곽자령의 친우라는 사실 때문에 한동안 임장홍의 이름이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었다. 그만큼 강남을 넘어 강북에까지 곽자령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뇌일봉은 표정에 한 줄기 어두운 빛이 떠오르더니, 문득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틀림없이 종남파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텐데,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도 보내 오지 않고 있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겉으로 내색은 안 해도 장홍을 누구보다 좋아하던 친구인데, 그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드는구나.”
“곽 대협의 강호에서의 명성으로 보아 그분 신상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필시 강호에 소문이 났을 겁니다. 이번 여정이 끝나면 절강성에 한번 들러 보시지요.”
“그렇지 않아도 그럴까 생각하고 있었다. 옥아(玉兒)가 구궁보에 있다고 하니 구궁보까지만 동행하고, 옥아를 본 후에는 안탕산으로 가 볼 생각이다.”
구궁보가 있는 구화산에서 절강성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그들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주루의 문이 열리며 우의(雨衣)를 입은 한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잠깐 열린 문 사이로 세찬 폭우가 물방울을 튀기며 쏟아지는 광경이 세세하게 보였다.
기름 먹인 피풍의를 뒤집어쓴 그 사람은 안으로 들어오자 주루안에 먼저 온 손님들이 있음을 알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이내 한 사람을 발견하고는 눈을 빛내며 앞으로 성큼 걸어왔다. 그가 일행의 앞으로 다가와서 피풍의를 벗자 중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파리한 안색에 초췌한 몰골의 그 사람은 뜻밖에도 남궁세가의 대공자인 다정군자 남궁선이었던 것이다.
불과 며칠 전에 전흠과의 비무로 사경을 해매던 그가 이런 폭우 속을 뚫고 나타난 것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핼쑥하여, 아직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진 장문인, 과연 이곳에 계셨구려.”
그의 시선은 줄곧 진산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진산월은 그의 느닷없는 등장에 놀라움과 약간의 당혹감을 느꼈다. 남궁세가에서 의원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그가 대체 이곳에는 무슨 일로 나타난 것일까? 그의 태도로 보아 자신에게 용건이 있는 것 같았기에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남궁 공자가 아니오? 이 빗속에 어인 일이오?”
남궁선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진산월을 응시하며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이 오늘 회남을 떠났다는 걸 뒤늦게 알고 진 장문인을 뵈러 달려오던 길이었소. 비 때문에 진 장문인이 멀리 가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다행히 이곳에서 만날 수 있었구려.”
진산월은 아직 그와 정식으로 인사조차 나눈 적이 없었는데, 그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일부러 이 폭우 속을 뚫고 왔다는 말에 마음속의 의구심이 더욱 커졌다.
“남궁 공자의 상세가 위중한 것으로 아는데, 성치 않은 몸으로 나를 만나러 이곳까지 왔단 말이오?”
남궁선의 창백한 얼굴에 한 줄기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사실 지금 서 있기도 힘이 들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달려오지 않을 수 없었소.”
과연 그의 얼굴에는 힘겨운 기색이 역력했다. 자세히 보니 비에 젖은 줄로만 알았던 그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어서 이쪽으로 앉으시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몸을 녹인 후에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진산월은 그를 의자에 앉게 한 후 따듯한 차를 건네주었다.
봄이라고는 해도 지나치게 내리는 폭우 때문인지 기온은 서늘함을 느낄 정도였다. 비에 젖은 상태라면 서늘함을 넘어 상당한 추위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남궁선은 차를 세 잔이나 거푸 마신 다음에야 겨우 조금씩 혈색을 되찾아갔다.
“후우…..이제야 살 것 같군, 솔직히 이 주루까지만 둘러보고 진 장문인을 만나지 못하면 포기하려고 했었소. 다음 주루는 최소 한 칠팔십 리 밖에서나 볼 수 있는데, 더 이상은 도저히 달려갈 기운이 없었기 때문이오.”
이런 폭우 속을 뚫고 온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도 힘이 드는법인데, 하물며 며칠 전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졌던 사람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남궁선이 강호의 고수이며 높은 내공의 소유자라 해도 이런 몸 상태로 무리를 하게 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도 몰랐다.
“남궁세가에서는 남궁 공자가 이런 날씨에 길을 나서도록 내버려 두었단 말이오?”
진산월의 물음에 남궁선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세가에서는 아직 아무도 모르오. 아마 지금쯤은 알고 있겠지만 말이오.”
진산월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런 무리를 하면서까지 나를 만나려고 했단 말이오?”
남궁선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흥미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뇌일봉과 성락중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렸는지 성락중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뇌 대협과 함께 후원에 가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겠네.”
뇌일봉은 일어나기 싫은 눈치였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한 차례 으쓱하고는 몸을 일으켜 성락중과 함께 후원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제야 남궁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께 송구스런 짓을 했소.”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걱정 마시오 두 분 모두 이런 일로 마음 상하실 분들이 아니오. 내가 나중에 두 분께 잘 말씀드리겠소.”
“그렇다면 다행이오.”
진산월은 눈을 빛내며 남궁선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창백한 남궁선의 얼굴은 그래서 더욱 준수해 보이기도 했다.
“자, 이제 말씀해 보시오. 남궁 공자가 나를 만나려고 한 이유가 무엇이오?”
남궁선은 선뜻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마치 진산월이 어떤 사람이란 말인지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는 듯 한참 동안이나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은 귀 사매가 구궁보에서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알고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