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4권 모산지연(姆山之宴)편 :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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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4권 모산지연(姆山之宴)편 : 8화


제 247장 일견경심(一見傾心)

진산월은 누구보다도 침착하고 평정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표정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남궁선의 입에서 왜 이런 말이 나온단 말인가? 아니, 남궁선이 어떻게 임영옥을 알고 있단 말인가? 진산월은 한 차례 숨을 고르고 나서야 겨우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진산월은 조용한 눈으로 남궁선을 응시했다.

“남궁 공자는 내 사매를 알고 있소?”

남궁산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로. 지난 삼 년간 나는 줄곧 그녀를 지켜봐 왔소.”

그 말속에 담긴 의미를 진산월이 모를 리 없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묵묵히 남궁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선의 두 눈은 아직도 부상의 여파로 붉은 실핏줄이 여기저기 나 있어서 썩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하나 눈빛만큼은 더할 수 없이 맑고 투명했다. 진산월은 한참이나 그의 눈을 보고 있다가 담담한 음성을 내뱉었다.

“사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시오.”

조용한 음성. 참으로 조용한 음성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의 현재 심정을 더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남궁선은 그렇게 생각했다.

“말하리다. 내가 귀 사매를 처음 본 것은 삼 년 전의 어느 늦은 봄날이었소.”

                      *                 *               *  

그때는 남궁선이 부친과의 불화로 남궁세가를 훌쩍 떠난 지 두 달 정도 되었을 때였다. 막상 세가를 나왔으나 그는 특별하게 갈 곳이 없었다. 처음에는 강호를 주유하면서 세상의 다채로운 맛을 느껴 보자고 생각했으나, 그가 어디에 가든 남궁세가의 대공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게 되었고,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여지는 그만큼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에게 과도한 편의를 봐주거나 그를 향해 지나칠 정도의 친절을 베풀었고, 심지어는 그와 친해지려고 의도적인 접근을 하기도 했다.

불과 한 달도 안 되어서 남궁선은 그러한 강호인들의 거짓된 행동과 노골적인 접근에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것은 그가 꿈꾸었던 주유 강호(周遊江湖)와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처한 현실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얼마 동안 남궁선은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강호의 후미진 곳만을 돌아다니기도 했으나, 그래서는 자신이 세가를 나온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이내 그런 행동을 포기해 버렸다. 도망자도 아니고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남들의 시선을 피해 숨어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강남 일대를 이리저리 떠돌던 그의 발길이 우연히 닿은 곳이 바로 구궁보였다. 구궁보의 혁혁한 명성과 모용 대협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남궁선은 한동안 고민하다 구궁보의 대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이 바로 절정수사 권유현과 정검 부옥풍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기개가 헌앙하고 인물 됨됨이가 관옥(冠玉)같을 뿐 아니라 서로 비슷한 연배여서 통하는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경배하거나 자신에게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 남궁선으로 하여금 기꺼이 그들을 친구로 사귈 수 있게끔 했다.

그들과 몇 차례 어울리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강호삼정랑이라고 불렀다.
남궁선은 잠깐 인사만 하고 떠나려 했던 구궁보에 계속 머물며 다른 사람들과 조금씩 친분을 넓혀 가기 시작했다. 하나 어찌 된 일인지 구궁보의 실질적인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모용봉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의아해 했고, 모용봉 또한 한때는 남궁선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자신이 먼저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남궁선은 기꺼이 참석했으나, 모용봉과 일정 이상의 친분은 쌓으려 하지 않았다. 모용봉이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몇 달 후의 일이었다. 자신의 생일날에 축하해 주러 나온 임영옥을 남궁선이 아련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광경을 본 순간, 모용봉은 어째서 남궁선이 자신과 친해지려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남궁선이 임영옥을 처음 본 것은 구궁보에 온 지 보름쯤 지난 어느 늦은 저녁이었다.

그날따라 날씨는 선선했고, 노을은 유난히 붉었다. 구궁보에서 지내는 생활에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기는 했으나, 집을 떠나 타지(他地)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는 자신의 신세가 왠지 처량해서 남궁선은 구궁보의 후원을 이리저리 서성거리고 있었다. 세상을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여 놓은 노을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속의 울적함이 더욱 짙어져서 한없이 깊은 고독 속으로 침잠되어 갔다.
그는 저 붉은 노을 속에 풍덩 빠져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문득 누군가가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처럼 멍하니 노을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남궁선은 환상(幻想) 속의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이 늘 마음속으로 꿈꿔 왔던 가장 이상적인 여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린 듯 고운 자태에 우아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 무엇보다도 붉은 노을 속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깊은 눈빛이 그를 사로잡았다. 어이없게도 남궁선은 단 한 번 보는 것만으로 그녀에게 매혹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동안 남궁선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남궁선은 전신에 짜릿함을 느꼈다. 이 여자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 여자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노을에 물들어 붉게 빛나고 있는 남궁선의 얼굴을 한동안 묵묵히 응시하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처음 뵙는 분이군요. 후원에 머무르는 식객이신가요?”
남궁선은 그녀의 목소리마저 마음에 들었다. 이런 목소리로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그는 최대한 침착해지도록 노력하며 애써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내 이름은 남궁선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남궁 공자로군요.”

남궁선은 귀가 번쩍 뜨여 황급히 물었다.

“나를 알고 계십니까?”

그녀의 고개가 알 듯 모를 듯 살짝 끄덕여졌다.

“일전에 군 공자에게서 들은 적이 있어요. 모처럼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다고 하더군요.”

군 공자라면 필시 군유현을 가리키는 말이리라. 군유현은 이런 여자를 알고 있다는 걸 왜 자신에게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단 말인가?

남궁선은 나중에 군유현을 만나면 단단히 따지리라고 결심하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곳의 노을은 유달리 붉게 보이는군요. 아니면 오늘만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다시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나직한 음성으로 소곤거리듯 말하는 것이었다.

“남궁 공자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겠죠. 오늘의 노을도 평상시와 별로 다를 바가 없네요. 늘 볼 때마다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도 똑같고….”

그녀의 마지막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남궁선은 그녀의 음성을 듣는 순간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컥하는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아마도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눈빛이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보는 듯한 아련함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궁선은 말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후원의 작은 언덕에서 두 남녀는 세상을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이는 노을 속에 언제까지고 잠겨 있을 듯했다.

노을이 점차로 사라지며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져 올 때, 그녀는 뜻 모를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남궁선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그녀가 후원 뒤쪽으로 걸음을 옮길 때까지도 남궁선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그는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이 어둠 속에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그녀의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숙소로 돌아온 남궁선은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 해도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잠이 들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빛, 그녀의 음성, 그녀의 독특한 분위기가 잊히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마자 그는 군유현을 찾아갔다.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로군. 날이 훤히 밝은 다음에야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늦잠꾸러기가 이런 꼭두새벽에 나를 찾아오다니.”

군유현이 장난스럽게 말하는데도 남궁선은 전혀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군유현의 표정도 덩달아 굳었다.

“자네의 그런 표정은 처음 보는군. 대체 무슨 일인가?”

남궁선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얼굴로 군유현을 바라보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그녀가 누구인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군유현은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아침 일찍 불쑥 쳐들어와서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물어본다는 것이 그녀가 누구냐라니?

남궁선도 자신의 물음이 너무 성급했음을 깨달았는지 한 차례 숨을 고르고는 한결 침착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며칠 전에 서로가 가장 바라는 여인상(女人像)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기억하고 있나?”

군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나는 열정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 버릴 수 있는 정열적인 여자를 좋아한다고 했고, 옥풍은 지적이고 냉정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여자를 찾고 있다고 했지. 그리고 자네는…..”

“보는 순간에 내 영혼까지 앗아 갈 수 있는 여자….”

“그래. 조금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건 개인의 취향이니까 우리는 기꺼이 존중해 줬지.”

남궁선의 눈동자 속에는 불이 감겨 있었다.

“그런 여자를 보았네.”

군유현은 남궁선을 힐끔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눈속에 담긴 불길을 알아차렸다.

“어디서 보았나?”

“어제 후원의 언덕에서. 붉은 노을과 함께 서 있더군.”

군유현의 얼굴에 한 줄기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언덕? 어느 언덕 말인가?”

“후원 뒤쪽으로 걸어가면 작은 정자가 있지 않나? 그 정자를 뺑 돌아 화원 두 개를 지나치니 야트막한 담장에 둘러싸인 그림같이 아름다운 언덕이 나오더군.”

“자네가 그곳까지 갔는데도 아무도 말리지 않았단 말인가?”

남궁선의 얼굴에 한 줄기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나를 막는 사람은 없었네. 그곳은 내가 가서는 안 되는 곳인가?”

“그런 건 아니지만…..그 언덕은 내원(內院)의 특정한 사람들만 출입하는 곳이라, 식색들은 잘 가지 않는 곳이라네.”

남궁선은 고개를 겨웃거렸다.

“그런가? 후원에 있다 보니 가슴이 답답해서 무심코 좀 더 트인 곳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그곳까지 발길이 닿았네. 아무튼 그곳에서 그녀를 보았지. 처음 본 순간 영혼까지 앗아 가버리는 그런 여자를….”

어찌 된 일인지 군유현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남궁선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허공을 올려다보며 어제의 일을 회상하듯 아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솔직히 자네들에게 말을 해 놓고도 내 평생에 그런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들기는 했었지. 그런데 불과 며칠 되지도 않아 실제로 그런 여인을 눈앞에 보게 되었으니, 참으로 너무도 공료로운 일이 아닌가?

그런 여인이 실제로 존재할 줄은 상상도 못했네. 그것도 나와 같은 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그녀는 잊게.”

군유현의 서늘한 말에 남궁선은 퍼뜩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군유현은 입가에 웃음도 지우고 냉정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잊게. 그런 여자는 만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란 말일세. 이게 내가 자네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충고일세.”

남궁선은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아는가?”

“그 언덕이 있는 공간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곳일세. 그러니 자네가 그곳에서 보았다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지.”

“그녀가 누구인가?”

군유현은 냉엄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내 말을 듣지 못했나? 그녀에 대한 건 더 이상 떠올리지 말란 말일세. 자네가 나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반드시 지켜 줘야 하는 일일세.”

남궁선은 무어라고 말하려다 군유현의 차갑게 빛나는 눈을 보고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음성을 눌러 삼켰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군유현을 사귀어 오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냉랭한 시선이었다. 그 시선 속에는 분명한 경고의 빛이 담겨 있었다.

‘더 이상은 그녀에 대해 알려고 하지 마라.’

군유현의 눈은 남궁선을 향해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의 만남은 그렇게 어색하게 끝나 버렸다. 남궁선은 저녁이 되기를 초조히 기다려 주위에 조금씩 노을이 번지기 시작하자 다시 어제의 그 언덕으로 향했다.
하나 정자를 지나 작은 화원을 통과하려 할 때 제지를 받았다.

“이곳은 지나가실 수 없습니다.”

소리도 없이 나타난 백삼인 한 명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남궁선은 그가 모용봉의 수족과 같은 수하들인 창룡무사 중의 한 사람임을 알아보고 황급히 물었다.

“어제는 이곳을 지나갔는데 오늘은 왜 갈 수 없단 말이오?”

백삼인은 남궁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무감각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제 이곳을 지키던 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자는 합당한 처벌을 받을 테니 공자께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처벌이라는 말에 남궁선은 내심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을 막지 않았다고 누군가가 처벌을 받는다면 그로서는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말해 주시오. 이곳을 지나면 어느 분의 거처가 나오는 거요?”

백삼인의 두눈에는 아무런 감정의 빛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건 제가 알려 드릴 수 있는 사항이 아니군요. 죄송합니다.”

결국 남궁선은 허탈하게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그는 고민을 하다가 부옥풍을 찾아갔다. 군유현보다는 훨씬 유연하고 심성이 온화한 그에게서 언덕의 여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그의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

부옥풍은 열정적으로 어제 일을 설명하는 남궁선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자네는 정말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군, 세상에는 간혹 봐서는 안 될 일이 있고,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 있는 걸세. 자네도 그 정도는 알고 있지 않나?”

남궁선은 열기를 담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물론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지.”

누가 무어라 해도 내가 그녀를 만난 건 분명한 사실일세. 숨기고 피한다고 해서 그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일세.”

“그녀를 다시 만나지 않아도 좋네. 그 언덕에 찾아가지 말라면 그렇게 하지, 다만 그녀가 누구인지만 말해 주게. 명색이 내가 자네의 친구라면, 그 정도쯤은 말해 줘도 되지 않겠나.?”

부옥풍는 간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궁선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더니 다시 탄식을 토해 냈다.

“정불의(情不意)라더니…..정녕 그녀를 잊지 못하겠나?”

“내가 말했지 않나? 한 번 본 것만으로 내 영혼을 앗아 간 여인이라고. 자네라면 자신이 직접 눈으로 확인한 그런 여인을 만나지 못한 것으로 치고 깨끗이 잊어버릴 수 있겠나?”

“내가 그런 경우를 당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야겠지….”

부옥풍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남궁선을 쳐다보았다.
그때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고,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게.”

“말하게.”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되더라도 이후에는 절대 그 언덕으로 그녀를 찾아가서는 안 되네.”

“약속하겠네.”

부옥풍은 다시 한 차례 한숨을 내쉰 다음에야 비로소 그녀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임영옥. 모용봉이 자신의 배필로 생각하고 있는 여인일세.”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남궁선은 자신이 그녀에 대해 물었을 때 왜 군유현이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임영옥……이름마저 사랑스럽지 않은가?
그런데 그녀가 모용봉의 여인이라니…..
이 무슨 얄궂은 하늘의 장난이란 말인가?
부옥풍은 창백하게 굳어 있는 남궁선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다가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을 내뱉었다.

“그녀를 잊으라는 말은 하지 않겠네. 다만 앞으로 자네는 절대로 그녀에 대한 마음을 밖으로 표현해서는 안 되네. 그것이 자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일세.”

남궁선은 부옥풍의 충고를 충실히 따랐다. 적어도 겉으로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고, 후원의 그 언덕으로 그녀를 찾아가지도 않았다. 하나 언제부터인가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져 있었고, 입박으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남궁선은 구궁보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그녀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습게도 단 한번 만에 말 그대로 그는 자신의 영혼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두 달 후, 모용봉의 생일에 그는 또다시 그녀와 운명적인 재회(再會)를 하게 되었다.
모용봉의 생일 전부터 그는 혹시나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 기대가 실현되리라고는 그다지 믿지 않고 있었다.
하나 모용봉이 자신에게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다는 말을 했을 때부터 남궁선의 가슴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그림처럼 조용히 나타났을 때, 그는 첫사랑에 빠진 철부지 소년처럼 그녀에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녀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머리 모양은 어떠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오직 그녀의 한없이 영롱한 두 눈과 차분히 가라앉은 표정만이 뇌리에 가득 들어올 뿐이었다.

그녀가 그를 보고 살짝 머리를 숙여 아는 척을 했을 때, 그는 말 못할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가 모용봉의 옆으로 가서 앉았을 때, 그는 가슴이 메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껴야만 했다. 부옥풍이 몰래 그의 소매를 잡아끌지 않았다면 그는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리 앉게, 이 한심한 친구.”

부옥풍은 살짝 그를 꾸짖었으나, 화를 내거나 조롱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가에는 걱정스런 빛이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모용봉은 결코 마음이 넓거나 품성이 인자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것을 남이 넘보게끔 내버려 두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제 모용봉은 남궁선의 마음을 알았을 것이다. 모용봉이 아니라 장내에 있는 누구라도 남궁선이 임영옥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모용봉이 앞으로 남궁선을 어떻게 대할지 부옥풍으로서는 실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자리는 어색하기 그지없었고, 경직된 분위기로 인해 전혀 흥겹지 않았다.
연회가 끝날 때쯤, 모용봉은 좌중을 둘러보며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모임은 이쯤에서 그치는 게 좋겠군. 나는 내일부터 한달쯤 본가(本家)를 다녀와야겠는데, 나와 동행할 사람이 없소?”

말을 하면서도 모용봉의 시선은 곧장 남궁선에게 향해 있었다.
부옥풍이 남궁선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찔렀다. 따라 가겠다고 말하라는 무언(無言)의 독촉이었다.

남궁선 또한 이것이 모용봉이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임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그의 제안을 승낙한다면 그는 모용봉의 측근으로서 지금처럼 평온하고 안락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그녀에게는 추호도 불측한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며, 그녀는 영원히 잡을 수 없는 별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신의 인생은 지금보다 한결 험해질지 모르지만, 언제까지고 그녀를 마음속에 담아 둘 수 있을 것이다. 남궁선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째서 인생은 꼭 한 가지를 얻으면 다른 한 가지를 상실하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이런 결과라면 자신의 선택은 너무도 분명하지 않겠는가? 평온하고 안락한 삶을 원했다면 세가로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 대가가 자신의 영혼을 앗아 간 여인에 관한 것이라면 더 생각할 나위도 없었다. 남궁선은 부옥풍의 은밀한 부추김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없이 그 자리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군유현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꺼이 동행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부옥풍은 한참 후에야 남들이 알기 힘든 한숨을 내쉰 다음 자신도 동행하겠다고 말했다. 장내에 모은 사람들 중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따라갈 수 없음을 밝힌 몇몇 사람 외에 아무런 의사 표시도 하지 않은 자는 남궁선이 유일했다. 모용봉은 이내 남궁선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얼굴에는 특별한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지만, 남궁선은 따사롭게 내리쬐던 햇볕이 먹구름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용봉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임영옥에게로 향했다.

“임 소저의 의향은 어떻소?”

임영옥은 차분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받으며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나도 따라갈 수 있는 건가요?”

“물론이오. 임 소저를 위해서 특별한 마차를 준비해 두었소.”

임영옥은 한동안 깊은 시선으로 그의 두 눈을 바라보더니 문득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몸 상태가 완전하지 않아서 한 달이나 되는 여행은 어려울 것 같군요. 나는 이곳에 있겠어요.”

모용봉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의 대답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그는 담담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임 소저는 이제 겨우 신공(神功)에 임문한 단계라서 몸속의 후유증을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소. 소저는 한 달 동안 참을 수 있겠소?”

“한 달이라면.”

임영옥이 주저 없이 대답하자 모용봉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나 모용봉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떨렸음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마음이 흔들렸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잠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날의 연회는 그것으로 끝나 버렸다. 다음 날, 모용봉과 그의 일행들이 구궁보를 떠나자 구궁보는 텅 빈 절간처럼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남궁산은 그녀로부터 뜻밖의 초대를 받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후원의 화원으로 간 남궁선은 이번에는 아무의 제지도 받지 않고 화원을 지나 언덕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언덕의 노을은 그날처럼 붉었다. 그녀는 그날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 속의 그녀를 보는 순간, 남궁선은 왠지 모르게 풋내기 어린 소년처럼 왈칵 눈물을 쏟아 낼 뻔했다.

그가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것은, 그때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기 때문이었다. 남궁선은 필사적으로 흘러 내리려는 눈물을 참았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남궁 공자를 이곳까지 오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나로서는 남궁 공자를 뵙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남궁선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 않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나는 오히려 임 소저께서 초대해 주어 너무나 고마웠소.”

남궁선의 가슴이 온통 설렘과 기대감으로 떨리는 것과 달리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남궁 공자에게 한 가지 청(請)이 있습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남궁 공자 외에는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군요.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남궁 공자를 뵙자고 한 것입니다.”

그녀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남궁선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무언지 모를 아쉬움과 허전함이 짙은 상실감을 동반한 채 그의 가슴속을 마구 헤집고 있었다. 남궁선은 간신히 담담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임 소저께서 불초불민한 이 사람에게 청이 있다니 기쁘고 설레는 일입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녀는 그를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남궁 공자의 친절에 미리 감사를 드립니다.”

예의를 다하는 모습이었으나, 남궁선은 그만큼 서운한 감정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소저의 사례를 먼저 받으니 참으로 민망하군요. 어떤 일인지 말씀하십시오. 저는 기꺼이 경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강호로 나가셔서 한 곳의 소식을 알아 오신 후 저에게 알려 주시면 됩니다.”

“예상치 못했던 말에 남궁선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어느 곳의 소식 말입니까?”

그녀는 왠지 선뜻 입을 열지 않고 잠시 고개를 돌려 노을을 바라보았다. 붉은 노을에 비친 그녀의 옆모습은 누구라도 매혹당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남궁선은 순간적으로 갈증을 느끼고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갈증의 순간이 지나가자 조금은 냉정한 눈으로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지금까지 보아 온 최고의 미녀(美女)는 아니었다. 그는 그녀보다 아름다운 미녀를 적어도 세 명 이상은 떠올릴 수 있었다.
하나 그녀는 그가 지금까지 보아 온 최고의 여인(女人)이었다. 그 사실을 남궁선은 다시 한번 절감할 수 있었다.

‘내 영혼의 여인은 이 여자뿐이다. 이 여자가 아니면 안 된다…..’
남궁선이 속으로 다짐하고 있을 때 그녀가 다시금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그녀의 눈빛은 왜 그렇게 애처로워 보였는지…
그녀는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종남파의 소식을 알아봐 주세요.”

남궁선은 자신도 그녀처럼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섬서성의 종남파.”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표정을 남궁선은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한 사람의 얼굴에 그처럼 다양한 감정이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녀의 고운 얼굴에는 아련한 그리움과 애틋함, 원망과 후회, 서러움과 간절함, 기대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 설렘과 격정의 온갖 다채로운 감정들이 뒤섞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남궁선은 그녀의 얼굴을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너무 쉬운 일이라 부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로군요.”

종남파라면 지금은 비록 몰락했으나 한때는 구대문파에도 속해 있던 유명한 명문 정파였다. 비록 멀리 강북에 있기는 했으나, 그들의 소식을 듣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번화한 거리로 나가서 주루에 한나절만 앉아 있어도 되었고, 개방의 분타를 찾아가면 최근의 소식까지 상세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그녀는 이토록 왜 어렵사리 그에게 부탁하는 것일까?
구궁보의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을 낯선 자신에게 부탁하는 그녀의 마음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나 이내 그녀가 한 말 중 한 부분이 뇌리에 떠올랐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남궁 공자 외에는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궁선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꼈다. 그녀의 말에 담긴 의미를 채 깨닫기도 전에 그녀는 그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다시 한 번 남궁 공자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남궁선은 얼떨결에 자신도 그녀를 향해 포권을 했다.

“겨우 이런 일로 임소저의 인사를 두 번이나 받게 되니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녀는 담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게는 ‘겨우’가 아니랍니다.”

남궁선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 속에 담긴 깊은 의미가 그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남궁선이 구궁보 밖으로 나가서 장문인이 실종된 종남파에 대한 소식을 가지고 다시 그녀를 찾은 것은 그로부터 오일 후의 일이었다.

  • * *

“그때부터 나는 가끔씩 그녀를 만날 수 있었소. 열흘에 한 번 그녀는 나를 초대해서 강호의 소식을 물었고, 나는 그때마다 내가 조사해 온 것들을 알려 주었소. 하나 제일 마지막에 그녀가 묻는 질문은 언제나 한 가지뿐이었소.”

남궁선의 시선이 진산월의 두 눈에 못 박히듯 고정되었다.

“종남파의 장문인이 돌아왔냐는 것이었소.”

그녀가 같은 질문을 두 번째 하고 나서야 남궁선은 그녀가 종남파의 장문인과 각별한 사이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질문을 할 때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걱정과 근심, 그리움의 빛이 단순히 문파의 제자가 장문인을 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임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녀와의 만남은 모용봉이 구궁보로 돌아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모용봉이 돌아온 후 나는 한동안 그녀를 만나지 못했소.”

남궁선의 음성에는 씁쓸한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비록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것은 남궁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 한 달이 그에게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고, 또 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으며, 한없이 기다림과 아쉬움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임영옥이라는 한 여인을 어느 정도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구궁보에서 그녀의 처지는 실로 미묘했다.
구궁보의 실질적인 주인인 모용봉이 그녀를 아끼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모용봉을 비롯한 구궁보의 모든 식솔들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정중하기 그지없어서 영락없이 구궁보의 안주인을 대하는 것 같았다. 하나 그녀는 자기 마음대로 후원을 벗어나지도 못했고, 식솔들에게서 외부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도 없었으며, 내원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식객들조차 함부로 만날 수 없었다. 구궁보 밖을 벗어나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녀가 구궁보의 식솔들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만나는 사람이 남궁선이었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남궁선이 구궁보의 사람이 아니며, 모용봉과는 도저히 친구가 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남궁선은 몇 번이나 구궁보를 떠나려 했으나, 결국은 떠나지 못했다. 자신마저 없어지면 그녀가 더욱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것은 단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변명일 뿐이고, 이곳을 떠나면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진정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                  *                 *

남궁선이 그녀를 다시 본 것은 해가 넘어간 다음 해의 첫날 신년(新年)모임에서였다. 그때 구궁보는 모처럼 많은 하객(賀客)들로 붐비고 있었다. 구대문파의 이름난 고수들은 물론이고, 무림에서 좀처럼 모습을 보기 힘들었던 명숙(名宿)들도 상당수 참여해서 신년회는 그야말로 작은 무림의 대회를 방불케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남궁선은 구궁보의 식객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가 있는 자리는 모용봉의 친구들이라는 해천사우나 경천사객들과는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그에게 왜 저들과 함께 있지 않느냐고 물어보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남궁선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예전에 친하게 지냈던 군유현과는 이미 멀어진 지 오래였고, 부옥풍과도 다시 소원한 상태가 되어 간혹 안부 인사만 나눌 뿐이었다. 해천사우의 다른 두 사람과는 제대로 된 인사조차 한 적이 없었다.

모용봉이 나타나자 신년식의 분위기는 뜨거워져서 많은 사람들의 웃음과 고함 소리가 조용했던 구궁보를 모처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신년식이 절정에 달했을 즈음, 소리도 없이 그녀가 나타났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용봉의 옆에 앉아 있는 그녀를 의아한 눈으로 힐끔거리는 정도였으나, 일부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그녀가 소문으로만 나돌던 모용 공자의 여인임을 알아차리고 안광을 번뜩이며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남궁선은 그녀가 나타날 때부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몇 달 만에 다시 본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특유의 분위기 또한 그대로였다. 하나 남궁선은 그녀의 얼굴 한쪽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궁선은 그녀의 얼굴에서 그 그늘을 거두어 주고 싶었으나, 그것은 지금의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년회가 끝날 즈음, 숙소로 돌아가려던 남궁선에게 창룡무사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의 안내로 남궁선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구궁보의 내실을 들어설 수 있었다.

그곳에는 해천사우 네 사람이 미리 와서 앉아 있었다. 그들은 남궁선의 등장이 뜻밖인 듯 약간은 놀라고 약간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이곳에는 어찌 된 일인가? 모용봉을 찾아온 것이라면….”

그나마 아직까지도 친분이 있는 부옥풍이 그에게 다가오며 약간은 걱정된 음성으로 나직하게 묻자 남궁선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초대를 받았네. 그것밖에는 나도 아는 게 없네.”

“하긴…..그렇지 않았다면 이 망천정(望天亭)까지 들어올 수도 없었겠군.”

“이곳이 망천정인가?”

“그래. 자네는 처음 들어와 보겠군. 나도 이번이 세 번째라네.”

구궁보의 내실은 모두 세 개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각기 망천(望天), 조지(照地), 심인(尋人)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공간들은 모용봉의 처소로, 이중 망천정만이 그나마 외부인들이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나머지 두 개의 공간은 남궁선도 그저 어렴풋이 이름만 들어 보았을 뿐이었다. 망천정은 생각보다 화려하거나 크지 않았다. 십여 명이 삥 둘러앉으면 꽉 찰 정도로 작은 대청이 있고, 한쪽으로는 주렴이 쳐진 좁은 회랑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아마 그 회랑을 따라가면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청의 벽에는 별다른 장식도 달려 있지 않았고, 천장이나 바닥도 특별한 것이 없었다. 다만 사방으로 창문이 뚫려 있어 좁거나 답답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남궁선이 망천정을 찬찬히 둘러보고 있을 때, 주렴이 걷히며 모용봉의 모습이 나타났다. 모용봉은 중인들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중앙의 좌석으로 가서 앉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손님들을 배웅하느라 몸을 빨리 뺄 수가 없었네.”

부옥풍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빙긋 웃었다.

“조금 전에 보니 이번에도 자네에게 중매를 서려고 많은 사람들이 미녀들을 대동하고 왔던데, 그녀들을 구경하느라 늦은 건 아니었나?” 모용봉의 얼굴에도 약간은 난처한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그런 일에 취미가 없다는 건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물론 미녀들을 감상하는 게 싫다는 소리는 아닐세.”

“물론 그렇겠지. 다만 자네 취향의 여자가 없었을 뿐이겠지.”

” 하하 …..”

모용봉은 한 차례 나직하게 웃고는 이내 시선을 남궁선에게로 돌렸다.

“그러고 보니 남궁 공자는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소. 같은 공간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변변한 안부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으니, 주인 된 사람으로서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구려.”

남궁선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나야말로 오랫동안 신세를 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감사의 표시조차 하지 못했으니 송구스럽기 그지없소. 나 같은 사람을 마음 편히 머물 수 있게 해 주어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남궁 공자 같은 분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오.”

모용봉이 한 차례 손뼉을 치자 주렴이 열리며 한 명의 여인이 들어왔다. 눈부신 백의를 입은 그 여인은 안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가늘게 구부러진 두 눈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앗아갈 듯 독특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남궁선은 그녀가 모용봉의 시비 중 한 사람인 소국(笑菊) 백교운(白巧雲)임을 알아보았다. 백교운은 찻잔과 찻주전자를 들고 와서 나긋나긋한 동작으로 모용봉과 해천사우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마지막으로 남궁선에게 차를 따르면서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살짝 미소 지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미소였다.

백교운은 중인들에게 차를 따르고는 이내 주렴을 열고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남궁선이 차를 한 모금 마실 때, 모용봉의 음성이 들려왔다.
“남궁 공자에게 청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시겠소?”
남궁선은 움찔하여 절로 모용봉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모용봉의 입에서 남에게 부탁한다는 말을 들으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 당사자가 자신이리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남궁선은 절로 표정이 굳어져서 음성마저 딱딱해졌다.

“말씀하시오. 기꺼이 듣겠소.”

모용봉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니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소. 아니, 오히려 남궁 공자에게는 방가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군.”

남궁선은 더욱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 반가운 일이라니?”

모용봉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남궁선의 얼굴에 고정된 채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내가 없는 동안 남궁 공자가 그녀와 몇 번의 만남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소.”

뜻밖의 말에 남궁선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모용봉이 지칭한 여인이 누구인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하는 자신의 우려가 현실로 닥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이 뇌리를 엄습했다.
하나 모용봉의 다음 말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내가 온 뒤로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고 들었소. 앞으로 가끔은 예전처럼 그녀를 만나서 담소라도 나누어 주었으면 하오.”

남궁선은 자신의 잘못 들었나 싶어 모용봉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나 모용봉의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는 눈을 보는 순간, 남궁선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래도 되겠소?”

남궁선의 물음에 모용봉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물론이오. 임 소저가 요즘 혼자서 지내다 보니 외로움을 타는 모양이오. 남궁 공자가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그녀를 만나서 말동무가 되어 준다면 나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소.”

그제야 비로소 남궁선은 모용봉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모용봉은 임영옥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우고 싶어 했던 것이다. 덕분에 남궁선은 다시 또 임영옥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오직 한 달에 한 번뿐인 기회였으나 그로서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모용봉은 남궁선의 그런 마음을 훤히 짐작한다는 듯 가만히 그의 두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 청을 수락하시겠소?”

남궁선은 한숨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억누르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소.”

모용봉의 의도에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으면서도 전혀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의외의 기회에 기뻐하는 자신이 너무도 한심스럽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남궁선은 정확히 한 달에 딱 한 번 임영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활은 이 년 넘게 계속되었다.


“올봄에 나는 실종되었던 장문인이 다시 돌아왔으며, 종남파가 재건되었다는 소식을 그녀에게 전했소. 그녀는 내 말을 듣고도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더군.”

오랫동안 말하는 것이 무척 힘든지 남궁선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남궁선은 소맷자락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진산월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 소식을 전할 때의 내 마음을 진 장문인은 짐작도 못할 거요. 그때, 사실 나는 그 소식을 그녀에게 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무척이나 진지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오.”

진산월은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남궁선은 그의 깊게 가라앉은 눈과 움푹 파인 왼쪽 뺨의 흉터, 그리고 굳게 다물어진 입술을 차례로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고민했는지는 진 장문인도 짐작할 수 있을 거요. 하지만 결국은 그녀에게 말해야만 했소. 지난 삼 년간 그녀가 얼마나 애타게 그 소식을 기다려 왔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

“그날 내가 돌아갈 때까지도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있었소. 하나 내가 막 방문을 벗어나려는 순간,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더군.

‘다음에 오실 때는 그 소식을 좀 더 자세하게 알아오셨으면 좋겠군요.’ 라고 말이오. 나는 바보처럼 싫없이 웃으며 그렇겠다 말하고 밖으로 나왔소. 그리고는 내 방으로 돌아와서 밤새도록 혼자서 술을 마셨지. 그 술맛은 …… 내 평생 처음 맛보는 쓰디쓴 것이었소.”

남궁선은 다시 한 차례 이마의 땀을 닦고는 돌연 실성한 사람처럼 히죽 웃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서 내 넋두리가 되고 말았군. 아무튼 나는 한 달 후에 다시 그녀에게 가서 내가 그동안 알아낸 종남파 부흥과 세칭 ‘종남혈사’ 라 불리는 그 사건에 대해 상세하게 말해 주었소. 그리고 강호인들이 종남파의 장문인을 신검무적이라 부른다고 말해 주었지. 그
후의 일은 진 장문인도 짐작하고 있을 거요.”
진산월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진산월을 만나기 위해서 구궁보를 나왔으며, 그 뒤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 속의 파란만장한 사연들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남궁선은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진산월을 한동안 지켜보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가 진 장문인을 만나기 위해 구궁보를 벗어난 지 며칠 후에 나도 그곳을 떠나고 말았소. 더 이상은 그곳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오.”

남궁선은 그녀의 마음에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전혀 없다는 것을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구궁보를 떠나는 것뿐이었다.

하나 막상 구궁보를 나온 그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그의 발길은 집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그토록 만나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피하고 싶었던 그녀의 남자를 보게 된 것이다.
남궁선의 긴 이야기가 끝나도록 진산월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 깊은 인내력에 남궁선은 내심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 강철 같은 평정심과 냉정함을 넘어선 무심한 표정을 송두리째 깨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한결 냉랭해진 음성으로 물었다.

“진 장문인은 궁금하지 않소? 그녀가 외인을 만나는 것조차 철저하게 통제하던 모용봉이 어째서 그녀의 외출을 순순히 허락했는지 말이오.”

진산월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남궁선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씹어뱉듯이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 바로 그녀가 모용봉과 한 가지 흥정을 했기 때문이오.”

처음으로 진산월이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무슨 흥정이오?”

“모용봉이 무슨 부탁을 하든 한 가지를 들어주기로 한 것이오. 모용봉이 그녀에게 무엇을 부탁했는지 알겠소?”

진산월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남궁선의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분노에 찬 눈동자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청혼을 거절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소. 그것은….그것은 정말 그답지 않은 치졸한 행동이었소.”

그녀가 그 부탁을 수락했는지 아닌지는 그녀가 구궁보를 나온 것만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모용봉은 구궁보를 처음으로 나서는 그녀를 위해 자신의 여의신거를 내주었을 뿐 아니라, 친우인 군유현과 수하들로 하여금 그녀를 호위토록 했다. 그 모든 상황이 가리키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대체 그녀는 모용봉의 청혼을 수락하면서까지 왜 그토록 간절히 진산월을 만나려 한 것일까? 그런 어려움 끝에 만난 진산월에게 그녀는 왜 자신은 종남파로 돌아갈 수 없다는 한마디의 말만을 남겨야 했던 것일까?
남궁선은 자신의 말을 들은 진산월이 필시 고통스러워하거나 분노에 가득 차서 평정심을 깰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산월은 담담한 얼굴로 짤막하게 말했을 뿐이었다.

“사매의 소식을 전해 주어서 고맙소.”

하마터면 남궁선은 그의 멱살을 잡고 버럭 노성을 터뜨릴 뻔했다.

당신 사매가 그런 대접을 받고 그런 곤경에 처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쩌면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느냐고, 그녀가 당신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짐작이라도 했을 텐데 어떻게 이런 평정을 유지할 수가 있느냐고. 하나 남궁선은 그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때 자신을 향해서 더할 수없이 정중하게 포권을 하는 진산월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당금 무림의 최정상에 서 있는 신검무적이 그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있다. 대(大)종남파의 장문인이며 누구나가 인정하는 강호 제일 검객이 마치 구명지은(救命之恩)의 은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자신을 향해 극도의 공경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남궁선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깊은 바다는 소리를 내지 않고 흐른다. 너무나 깊은 고통과 분노는 오히려 인간에게 냉정함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긴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을 때부터 진산월은 이미 마음속으로 온갖 감정의 회오리를 겪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 감정의 깊이가 무척이나 깊고 광활해서 자신이 미처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포권을 마치고 고개를 쳐든 진산월의 두 눈에 흐르는 눈빛을 본 남궁선은 얼굴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은 예전에 자신이 보았던 임영옥의 그것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수없이 많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그녀의 눈빛과.

남궁선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 관한 마지막 비밀 한 가지를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느꼈다. 언제고 그 비밀을 말할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다. 어쩌면 그 순간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남궁선은 그 순간이 영원히 오지 않기를 정말 간절히 빌었다. 그것이 자신이 영혼을 바쳐 사랑했던 한 여인과 그녀가 목숨보다 사랑하는 한 남자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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