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5권 취와미인(醉臥美人)편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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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5권 취와미인(醉臥美人)편 : 3화


제 253장 입구궁보(入九宮堡)

구궁보가 세워진 것은 사십여 년 전이었다. 당시 혜성처럼 나타나 강호 무림의 절대적인 존재로 추앙받던 모용단죽은 천하의 명승(名勝)으로 소문난 구화산의 산자락에 몇 채의 건물을 짓고 구궁보라 이름 지었다. 그가 왜 자신의 본가인 모용세가에 살지 않고 멀리 떨어진 구화산에 따로 거처를 정했는지, 그리고 왜 자신의 거처에 구궁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억측과 온갖 해괴한 소문들이 나돌았으나, 점차로 시일이 흐르면서 그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사라지고 구궁보의 찬란한 명성만이 신화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당금 강호의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가 살고 있는 곳이라는 상징적인 의미 하나만으로도 구궁보는 모든 무림인들의 흠모와 경외를 받는 장소가 되었고, 심지어는 검성이 사는 곳이라고 하여 ‘구궁성보(九宮聖堡)’라고 부르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무림인들은 먼발치에서나마 구궁보를 보기를 원했으며, 단 한 번이라도 구궁보의 안을 둘러보거나 모용 대협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갈망했다. 하나 구궁보는 특별한 초대를 받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었고, 백 리 안은 은연중에 무림의 금지(禁地)처럼 되어 버려 쉽사리 접근할 수도 없었다. 일 년에 딱 한 번, 구궁보가 세워진 원단(元旦)에만 초청받은 무림인들의 방문으로 소란스러울 뿐, 구궁보는 일 년 내내 조용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인적을 보기 힘들었던 구궁보의 입구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산월과 부옥풍 일행이었다. 부옥풍과 담중호는 이미 구궁보에 자주 왔었기 때문에 별반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나, 종남파의 고수들은 구궁보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부터 모두들 설레고 상기된 모습들이었다. 심지어는 항상 침착하고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있던 성락중마저 눈을 빛내며 주위를 둘러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진산월 또한 전혀 마음이 격동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그것은 이곳이 천하제일고수의 거처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는 그녀가 있는 이곳에 왔다. 그녀와 약속한 이 년을 훌쩍 지나 삼 년 육 개월이라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그녀를 데려오기 위한 기나긴 여정의 종착지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냉정한 그일지라도 한 줄기 감흥에 휩싸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구궁보의 입보(入堡) 과정은 너무나 간단해서 오히려 허탈할 지경이었다. 부옥풍이 정문에 서서 자신의 이름과 다른 사람들의 신분을 말하는 것만으로 굳게 닫혀 있던 정문이 소리도 없이 열려 버렸던 것이다. 정문을 지키는 호위 무사도 없고 문을 열고 마중 오는 사람도 없는 다소 황량한 광경이었으나, 누구도 그 점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사전에 입보가 허락된 부옥풍이 아니었다면 은밀히 잠복해 있는 고수들에게 제지당하거나 상당히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구궁보의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장대하게 펼쳐진 넓은 화원이었다. 화원은 정문과 담벼락을 제외한 사방에 펼쳐져 있었는데, 그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화원 사이에 위치한 소로(小路)를 지나쳐야만 했다. 부옥풍은 손을 들어 중앙에 나 있는 소로를 가리켰다.

“저 길은 소환로(小環路)라고 하는데, 아마도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길 중 하나일 거요. 진 장문인도 틀림없이 마음에 들어 하실 거라고 장담할 수 있소.”

아닌 게 아니라 소환로는 넓다란 화원을 가로질러 청옥(靑玉)을 깔아 만들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청옥의 바닥과 형형색색의 꽃들, 그리고 군데군데 자리 잡은 가산(假山)들이 어울려 흡사 선경(仙境)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 꽃들과 가산 사이로 붉은 색 건물의 지붕들이 살짝 보이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진한 선홍빛 노을이 사방을 붉게 물들이고 있을 때여서인지 화원 속의 소환로를 걸으니 몽환적인 느낌마저 일어날 정도였다. 종남파 사람들의 얼굴에 감탄성이 가득한 것을 본 부옥풍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 맘 때의 소환로는 일 년 중 가장 아름답소. 특히 안개가 자욱하게 끼는 새벽에는 그야말로 꿈길을 걷는 것 같아서 우리들은 이곳을 몽환로(夢幻路)라고 부르기도 하오.”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그 꿈이 악몽(惡夢)이 될 수도 있겠군.”

부옥풍은 감탄어린 표정을 지었다.

“진 장문인의 눈을 속일 수는 없구려. 확실히 이 소환로 주위에는 수없이 많은 절진(絶陣)이 펼쳐져 있어서 다른 뜻을 품고 구궁보에 침입한 자들은 혹독한 꼴을 면치 못할 거요. 하지만 우리처럼 정식으로 초대된 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요. 설사 길을 잘못 들어 소환로를 벗어난다 할지라도 절진에 빠지는 경우는 없을 거요.”

부옥풍의 말을 들었는지 동중산이 외눈을 유난히 예리하게 반짝이며 한참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의 안목으로는 화원에서 전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몇 번이나 살펴보아도 다른 어떤 꽃길보다 아름답다는 것 외에는 특이한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여타의 절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커다란 나무나 바위도 없었고, 함정을 장치할 만한 석등(石燈)이나 연못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온갖 종류의 꽃들이 천채만홍(千彩萬紅)을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부옥풍이 그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동중산을 돌아보며 웃었다.

“이 소환로에 있는 절진들을 파악하는 건 아무리 동 대협이라고 해도 쉽지 않을 거요. 나도 처음에 구궁보에 왔을 때는 호기심 때문에 며칠을 꼬박 살펴보았으나 전혀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소. 나중에야 이곳에 절진을 만든 사람이 장손추(張孫樞)라는 말을 듣고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소.”

그 말에 동중산의 입에서 짤막한 경호성이 흘러나왔다.

“아……! 장손추라면 예전에 천하제일의 기관진식(機關陣式)의 대가(大家)라 불렸던 묘수곤륜(妙手崑崙)……!”

부옥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분이오.”

그제야 동중산은 어째서 자신의 눈으로 이 소로에서 전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원래 기관진식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一)에서 이(二)나 삼(三)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즉,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걸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설비나 시설을 변형시켜 보다 많은 함정이나 장치를 설치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기관진식에 대한 안목이 있는 자라면 비록 정확한 건 알지 못해도 어떤 종류의 기관장치나 진식이 설치되어 있는지 대략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쪽으로 제법 재주가 있는 동중산이 전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것은 이 소환로 주위의 절진이 무림 최고의 기관진식의 대가의 솜씨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묘수곤륜 장손추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누구나가 인정하는 기관진식의 제일인자(第一人者)였다. 당시 그의 솜씨가 어찌나 탁월했던지 그가 만든 기관진식에 갇히면 제아무리 무공의 고수라 해도 빠져나올 수 없을 거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그는 이미 이십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명성은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장손추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곳이 바로 이 구궁보였소. 그래서 구궁보의 건물들에는 크고 작은 기관장치가 셀 수 없이 많이 있다고 하오. 이 소환로는 장손추가 특히 신경을 많이 쓴 곳이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운 화원이지만 일단 진식이 발동되면 무서운 용담호혈이 되어버린다고 하오.”

동중산은 새삼스런 눈으로 소환로를 둘러보았다. 전설적인 인물인 장손추의 손길이 닿았다고 생각하니 길 자체가 더욱 신묘한 듯했고, 무언지 모를 현기(玄機)가 느껴지기도 했다. 석양에 물들어가는 소환로의 아름다움에 취해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 새 화원을 지나 한 채의 고풍스러운 전각 앞에 도달하게 되었다. <취몽(聚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전각은 제법 컸으며, 이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취몽전(聚夢殿)은 구궁보에서 제일 큰 건물로, 현재 구궁보에서는 객청(客廳)으로 사용하고 있소. 아마 진 장문인 일행의 숙소도 이곳일 거요.”

부옥풍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취몽전의 앞에 한 명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다름 아닌 회남에서 진산월을 찾아왔던 비매 냉옥환이었다. 냉옥환은 부옥풍과 담중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아는 척을 하고는 진산월의 앞으로 다가왔다.

“진 장문인이 본 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아무리 이곳에서의 신분이 모용봉의 시비라고 해도 천수관음의 제자인 그녀가 직접 진산월 일행을 안내하러 나왔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넓은 구궁보에 시비가 사대신녀만 있는 것이 아닐 텐데도 그녀가 직접 마중을 나온 것이다. 부옥풍과 담중호 또한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부옥풍이 진산월을 향해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대신녀가 다른 사람의 마중을 나온 것은 나로서도 처음 보는 일이오. 이것만 보아도 모용봉이 진 장문인의 방문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소.”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부 대협이나 담 가주가 방문할 때는 이런 일이 없었단 말이오?”

“물론이오. 사대신녀가 어떤 여인들인데 우리 같은 사람들을 시중들려 하겠소? 그만큼 진 장문인은 특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오. 이거 말해 놓고 보니 괜히 심술이 나는구려. 하하……!”

부옥풍이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자 냉옥환이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두 분은 공자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망천정으로 들어가 보시지요.”

“누구 말씀인데 거역을 하겠소? 당장 그렇게 하리다.”

부옥풍이 장난스럽게 대꾸했으나, 냉옥환은 이내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진 장문인과 일행분들의 숙소로 모시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진산월은 부옥풍과 담중호, 여씨 형제들과 작별을 하고 그녀의 뒤를 따라 취몽전으로 들어갔다. 부옥풍은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담중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떤가? 직접 보니 정말 대단한 것 같지 않나?”

“신검무적 말인가?”

부옥풍은 약간은 흥분되고 약간은 들뜬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하는 모습이나 태도,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 어느 걸 보아도 진중하면서도 위엄이 서려 있어서 감탄을 금치 못하겠더군. 나보다 몇 살이나 어릴 텐데도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가 않았네. 아무튼 이번 모용봉의 생일연은 어느 때보다 기대가 되는군 그래.”

담중호는 어린아이처럼 흥분되어 붉게 상기된 부옥풍의 준수한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빙긋 미소 지었다.

“나도 무척 기대하고 있네. 두 사람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말일세.”

☆ ☆ ☆

이곳은 하나의 작은 언덕이었다. 언덕 아래에는 형형색색의 꽃들로 뒤덮인 화원이 있었고, 화원 너머에는 한 채의 아담한 전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좀 더 시선을 들어 멀리 내다보면 크고 작은 건물들과 병풍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수십 개의 봉우리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 지금 가장 크게 보이는 것은 세상을 점차로 붉게 물들이고 있는 석양(夕陽)이었다. 이상하게도 이 화원 위에서 바라보는 석양의 모습은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붉고 거대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언덕의 주위는 온통 붉은 색 물감을 칠해 놓은 것 같았고,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세상이었다.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여인에게는 이곳이 오롯이 존재하는 자신만의 붉은 세상일 것이다. 두 눈 가득 석양을 담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는 말로 형용키 어려운 독특한 분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동안 하염없이 석양을 바라보고 있던 여인이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눈부신 백의를 입은 미녀가 단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녀를 응시하는 백의 미녀의 두 눈에는 진한 안타까움과 씁쓸함이 감돌고 있었다. 여인은 백의 미녀의 눈빛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언제 왔어요?”

백의 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방금 왔어요. 임 소저는 이 시간에는 늘 이곳에 나와 있는군요.”

여인, 임영옥은 고개를 돌려 다시 석양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니까요.”

백의 미녀도 그녀를 따라 세상을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석양으로 시선을 향했다. 잠시 그녀는 묵묵히 붉은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곳에서 보는 노을은 정말 슬프도록 아름답군요. 왜 임 소저가 이곳을 좋아하는지 알 것도 같네요.”

임영옥은 말없이 노을 속에 서 있었다. 백의 미녀 또한 한동안 그녀 옆에 나란히 선 채 노을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 때, 백의 미녀는 석양빛을 받아 유난히 붉어 보이는 입술을 살짝 열었다.

“진 장문인이 왔어요.”

석상처럼 석양을 응시하고 있던 임영옥의 어깨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살짝 떨렸다. 미세한 떨림이었으나, 백의 미녀는 그녀의 감정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음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조금 전에 종남파 고수들과 함께 구궁보로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백의 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진 장문인이 모용 공자의 생일을 알고 찾아왔을 리는 없을 테고, 일전에 사대신녀 중의 비매가 회남의 남궁세가에 나타난 것이 아마도 모용 공자의 지시를 받고 진 장문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던 것 같군요. 모용 공자가 자신의 생일날에 진 장문인을 초대한 것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이번 기회에 임 소저에 대한 일을 마무리 지으려는 결심을 한 것일 거예요.”

“…….”

“임 소저는 진 장문인을 대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나요?”

그녀의 물음에 임영옥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백의 미녀를 쳐다보았다. 백의 미녀 또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백의 미녀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임영 두 눈을 들여다보았으나, 붉은 노을에 비추인 임영옥의 눈빛에서 어떠한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백의 미녀였다. 그녀는 알 듯 모를 듯한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임 소저도 그렇고 진 장문인도 그렇고……. 나로서는 참으로 예측하기 힘든 사람들이군요.”

“…….”

“이번 모용 공자의 생일연(生日宴)에는 가까운 지인들만 참석했던 예년과 달리 적지 않은 고수들이 초대되었다고 하더군요. 모용 공자의 의도가 무엇이든 이번 생일연에서는 다른 어느 때보다 예측 불허의 상황이 많이 벌어질지 몰라요. 공주님께서도 그 점을 염려하고 계시더군요.”

백의 미녀는 임영옥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진 장문인과 모용 공자는 현 강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무당산 집회가 코앞으로 닥쳐온 지금 두 사람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닥친다면 중원 무림 전체의 안위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또한 그게 공주님께서 가장 우려하시는 상황이기도 해요.”

말없이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던 임영옥이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단봉공주의 의향은 무엇인가요?”

백의 미녀는 천봉팔선자 중의 맏이인 백봉 정소소였다. 정소소는 웬일인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잠시 후에 흘러나오는 그녀의 음성은 어느 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공주님께서는 더 늦기 전에 이제는 진 장문인도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면 나중에는 도저히 메울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에요.”

임영옥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그럴 시기가 아니에요.”

“하지만…….”

“나는 사형을 잘 알아요. 사형이 진실을 알게 되면 오히려 단봉공주가 우려하던 상황이 더 빨리 닥치게 될 거예요. 사형은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이번에는 정소소가 입을 다물었다. 임영옥의 말이 사실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진 장문인이라면 그녀를 포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녀를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손을 놓고 있자니 앞으로 벌어질 일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진산월은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인간이었다. 예전에 별 볼일 없는 무공을 지닌 애송이 장문인 시절에도 겉으로는 늘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의 속마음에는 강철 같은 강인한 면이 있었다. 수많은 시련을 겪고 이제 강호의 정상에 우뚝 서게 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에 비해 모용봉은 처음부터 홀로 정상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었다. 그의 성격은 한없이 고고(孤高)했고,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는 철탑과 같이 확고했다. 하나 사 년 전에 야율척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후 그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자부심이 강했던 만큼이나 그것이 깨어졌을 때의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겉모습은 그대로일지라도 그의 마음속에는 야율척에 대한 복수심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지난 세월 동안 야율척을 향해 갈고 닦아온 마음속의 칼날은 세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리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의 마음을 자극한다면 그 무섭게 벼려진 칼날은 서슴없이 그 누군가를 향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임영옥은 정소소의 침울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단봉공주나 정 소저가 우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지도 몰라요.”

정소소는 그녀의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임 소저에게 다른 복안(腹案)이 있나요?”

“모용 공자가 사형과 정면으로 부딪힐 생각이었다면 자신의 생일연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오히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일을 진행시켰겠지요.”

“……!”

“모용 공자는 이미 한 번의 패배를 경험했기 때문에 확고한 자신이 없다면 남들 앞에 나서려 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정 소저도 알다시피 지금의 사형에게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자는 당금 무림에서 아무도 없을 거예요.”

정소소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였다. 현(現) 강호의 어느 누가 신검무적을 상대로 승리를 자신할 수 있겠는가? 영하의 강변에서 천하제일의 독인(毒人)과 도객(刀客)을 연거푸 격파하면서 신검무적은 자신의 무공이 충분히 당대제일(當代第一)을 논(論)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와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당시 금도무적 양천해와 신검무적의 결투는 적지 않은 고수들이 직접 목격했기에 그 싸움 과정이 상당히 자세하게 강호 무림에 퍼져 있었다. 특히 그녀는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 중 몇 명에게서 세세한 부분까지 전해 들었기 때문에 진산월이 적어도 양천해보다 반 수 이상은 앞서는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모용봉이라고 해도 그런 진산월에게 선뜻 승산이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임 소저께서는 모용 공자가 이번 생일연에 진 장문인을 초대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정소소의 물음에 임영옥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아마도 모용 공자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 거예요. 사형이 어떤 사람인지…….”

정소소는 그녀의 말뜻을 알 듯 모를 듯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소소는 사실 모용봉을 여러 차례 보기는 했으나, 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는 못했다. 그녀가 보고 들은 건 모두 피상적인 것이었고, 직접 모용봉과 대화를 나눠본 적도 극히 드물었다. 천봉궁에서 모용봉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단봉공주였으나, 그녀 또한 모용봉에 대한 이야기는 극도로 자제하는 편이었기에 무림인들의 예측과는 달리 천봉팔선자의 맏이인 정소소조차도 모용봉에 대해 아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렇게 본다면 모용봉과 지척에서 삼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내온 임영옥이 훨씬 더 모용봉의 성격이나 의중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정소소의 머릿속으로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으나 그녀는 그런 생각들을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임 소저의 말씀대로 되었으면 좋겠네요. 단봉공주의 말씀으로는 모용 공자가 무척이나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그런 사람일수록 진 장문인 같은 강한 개성의 소유자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극도로 갈리게 되지요.”

임영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것이 정소소의 말을 찬성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상념에 사로잡혀 무심결에 한 행동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때 언덕 아래에서 다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청삼을 걸친 이십 대 초반의 여인은 다름 아닌 모용연이었다. 모용연은 한 마리 제비같이 날렵한 신법으로 언덕 위로 올라오다가 정소소가 임영옥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표정이 냉랭하게 굳어졌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그녀의 도발적인 언사에도 정소소는 전혀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차분한 모습을 유지했다.

“이곳의 석조(夕照)가 너무 아름답다고 해서 잠시 노을을 감상하고 있었어요.”

모용연이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으나, 정소소는 단정한 태도로 임영옥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한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모용연은 멀어지는 정소소의 뒷모습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다가 이내 임영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요새 그녀가 언니를 자주 찾아오더군요. 천봉궁의 여자들은 모두 겉과 속이 다른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으니 언니는 너무 그녀에게 마음을 주지 마세요.”

임영옥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웃기만 했다. 노을 속에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모용연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퍼뜩 생각이 난 듯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참, 지금 누가 왔는지 알아요? 언니가 들으면 깜짝 놀랄 사람이 본 보에 왔어요. 어서 가요. 내가 자세히 말해 줄 테니.”

두 여인의 모습은 곧 짙은 노을을 등지고 언덕 아래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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