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6권 육합귀진(六合歸眞)편 :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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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6권 육합귀진(六合歸眞)편 : 1화


제 262 장 극독살인(劇毒殺人)

삽시간에 주위가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놀란 사람들의 비명과 의원을 불러오라고 무작정 질러대는 고함소리 때문에 대청 안이 시장바닥보다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모용봉은 주위의 소란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현우 도장의 시신을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전신의 피부가 검게 변해 있었고, 아직 채 온기가 식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상한 악취 같은 것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건 누가 보아도 치명적인 맹독에 의한 독살(毒殺)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강호가 아무리 넓다 해도 이토록 지독한 극독(劇毒)은 결코 많지 않았다. 더구나 현우 도장 같은 내공의 절정고수가 운기조차 해보지 못하고 숨이 끊어질 정도로 빠른 효과를 나타내는 독은 오직 하나 뿐이다.

“귀화(龜火)……!”

모용봉의 입술을 뚫고 신음 같은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오자 지켜보고 있던 중인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귀화라면 천하삼대극독 중에서도 가장 무섭다는…….”

천하삼대극독은 세상의 모든 절독 중에서 가장 지독한 것으로, 앙천지독과 무형심인지독, 그리고 귀화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중 독 자체의 강력함은 앙천지독이 가장 강했고, 무형심인지독은 무취무형(無臭無形)의 은밀함에서 가장 뛰어났으며, 귀화는 혀에 살짝 닿기만 해도 즉시 숨이 끊어질 정도로 독성이 빠른 것으로 유명했다.

무림인들은 이중에서도 귀화를 가장 두려워했다. 앙천지독이나 무형심인지독은 중독된 상태라 할지라도 내공을 끌어올려 대항이라도 해 볼 수 있지만, 귀화는 그럴 여유조차 주지 않고 사람의 목숨을 앗아버리기 때문이었다.

귀화에 당하지 않으려면 항시 내공이 몸을 보호하고 있는 만공진류(滿空眞流)나 어떠한 독에도 쓰러지지 않는 백독불침, 금강불괴의 경지에 올라있어야 한다. 강호 무림에 고수가 장강의 모래알처럼 많다지만 그런 경지의 고수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나 천하삼대극독은 그 강력한 효과만큼이나 사용하기가 극히 까다로워서 무림에 나타난 횟수가 열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특히 귀화는 지난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출현한 적이 없었다.

평소 현우 도장과 친분이 두터웠던 비룡신군(飛龍神君) 위해동(威海動)이 무거운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귀화가 확실한 건가?”

위해동은 무당파와 가까운 대홍산(大洪山)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인물로, 과거 무림대집회 당시에는 무당파의 현령 장문인 대신에 화중지단의 단주로 선임되기도 했던 명숙(名宿)이었다. 현우 도장이 쓰러지자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다가와 그의 시신을 살폈는데, 친우의 갑작스런 죽음을 목격해서인지 그의 음성에는 경악과 분노의 빛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모용봉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 도장 같은 분이 자신이 중독된 걸 알고도 독이 전신으로 퍼지기 전에 막지 못할 정도로 즉효성이 뛰어난 극독은 오직 귀화 뿐입니다. 특히 귀화는 부식독(腐蝕毒)의 일종이라, 중독된 사람은 제일 먼저 내장 부위부터 썩는다고 하더군요.”

재차 현우 도장의 시신을 바라본 위해동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면 귀화가 확실하겠군.”

아닌 게 아니라 현우 도장의 시신은 이미 악취가 진동할 정도로 빠르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특히 내장 부위는 이미 진물이 흐를 정도로 썩어서 가슴이 움푹 꺼져 있었다. 그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뜩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현우 도장의 갑작스런 죽음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 사인(死因)이 무림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귀화에 의한 것이라고 하자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두려움의 빛이 떠올랐다.

침통한 표정으로 현우 도장의 시신을 보고 있던 무당파의 고수 두 사람 중 얼굴이 네모지고 나이를 조금 더 먹은 중년 도인이 위해동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무량수불. 위 대협, 저는 무당파의 청현(靑賢)이라 합니다. 일전에 본 파에서 뵌 적이 있었는데, 기억하시는지요.”

위해동은 그의 얼굴을 찬찬히 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현수(玄修) 도장의 고제(高弟)이자 무당십이검 중의 한 사람을 어찌 몰라 보겠는가? 그나저나 어찌된 영문인지, 자세한 사정을 말해줄 수 있겠나?”

무당십이검은 무당파의 일대제자 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검객들로, 소림사의 팔대신승에 비견되는 최고의 인재들이었다. 그들의 나이는 이십대부터 사십대까지 천차만별이었지만, 그들이 당대 무당파의 최고 기재들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다음 대의 무당파 장문인은 그들 중 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청현은 무당십이검 중에서도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하는 인물이었는데, 사람됨이 진솔하고 행동거지가 무거워서 무당파 내에서 상당한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 같은 무당십이검 중의 한 사람인 청명(靑冥)과 함께 사숙인 현우 도장을 보필하여 구궁보로 왔는데, 갑작스런 참변으로 모두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말씀드릴 것이 별로 없습니다. 모용 공자께서 제의하신 건배에 사숙께서 앞에 놓여 있던 술잔을 들고 화답하셨는데, 술을 드시자마자 안색이 변해 다급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이내 쓰러지시고 말았습니다.”

위해동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현우 도장의 시신 옆에 굴러다니고 있는 술잔으로 향했다. 술잔은 비어있었지만, 위해동은 그 안에 아직도 끔찍한 절독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아 절로 눈살이 찡그려졌다.

“저 술을 마시고 변을 당했단 말인가?”

청현은 신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해동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청현의 말이 판단 여하에 따라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의 시선이 청현과 청명을 차례로 훑고 지나갔다.

“자네들 두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았나?”

“사숙께서 계시는 자리인지라 저희는 술잔을 들기만 했을 뿐,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위해동의 시선이 자연스레 청현과 청명의 앞에 놓인 술잔으로 향했다. 과연, 그들의 술잔에는 아직도 술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위해동이 무심코 그 술잔들을 잡으려 하자 모용봉이 급히 그를 제지했다.

“위 대협. 잠시만.”

위해동은 내뻗었던 손을 거두며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는가?”

모용봉은 품에 손을 넣었다가 하나의 길다란 은침(銀針)을 꺼내 들었다.

“이것은 철면군자 노 신의께서 만드신 은형신침(銀衡神針)이란 것인데, 어떤 종류의 독이든 그 흔적을 알아볼 수 있으니 이걸 사용하십시오.”

철면군자 노방이 만든 침이라는 말을 듣자 위해동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노 신의가 그런 침을 만들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네. 이게 바로 소문의 그 물건이로군. 잠시 빌리겠네.”

위해동은 모용봉의 손에서 은형신침을 건네받고는 그것을 조심스레 술잔으로 가져갔다. 은형신침의 길이는 어른의 손바닥만 했는데, 여타의 침술에 쓰이는 침과는 달리 끝이 다소 뭉툭하고 중앙에 아주 가느다란 금색 실선이 그어져 있었다.

장내의 이목이 온통 집중된 가운데 위해동은 은형신침을 술이 담겨 있는 청현과 청명의 술잔에 집어넣었다. 하나 예상과는 달리 은형신침에서는 어떠한 이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술에는 독이 없는 것 같군.”

위해동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바닥을 구르고 있는 빈 술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술잔은 현우 도장이 마신 잔이었다. 은형신침을 그 술잔에 이리저리 갖다대보던 위해동이 다시 모용봉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은형신침도 독에 닿으면 다른 은침처럼 변색(變色)되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노 신의의 말씀으로는 아무리 적은 분량이라 할지라도 인체에 해로운 독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알아낼 수 있다고 하더군요. 독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 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어떤 독의 일종인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게.”

위해동은 은형신침을 쳐들었다. 은형신침은 전혀 색의 변화가 없었다.

모용봉도 의외였는지 눈을 번뜩이며 위해동의 손에 들린 은형신침과 현우 도장이 마신 술잔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상황을 보고 있던 청현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술잔이 비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모용봉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술잔이 비어 있다고 해도 그 전에 독이 든 술이 담겨 있었다면 은형신침의 색은 변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현우 도장께서 드신 술잔에는 독이 들어 있지 않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사숙께서는 분명히 술을 드신 직후에 쓰러지셨습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위해동이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반드시 독이 든 술을 마셔서 그렇게 되었다고 볼 수는 없네. 솔직히 조금 전부터 약간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네. 현우 도장 같은 사람이 자신이 마시는 술에 독이 들어있다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면 무형심인지독 같은 무색무취(無色無臭)의 절독이어야 하는데, 귀화는 즉효성이 뛰어난 대신에 약간의 독특한 냄새가 난다고 들어서 말일세.”

모용봉도 그 점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인지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저도 귀화는 냄새로 알 수 있고, 앙천지독은 색깔로 알 수 있으며, 무형심인지독은 당해야만 알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귀화가 술에 들어있었다면 마시기 전에 현우 도장께서 알아차리셨을 겁니다.”

청현이 의아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렇다면 대체 사숙께서는 어떻게 귀화에 중독되신 겁니까?”

“이제부터 알아봐야지요. 제가 잠시 현우 도장의 유해를 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모용봉이 앞으로 나설 듯 하자 위해동이 그에게 은형신침을 건네주고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무래도 사태가 당초 예상보다 복잡하게 흘러갈 조짐이 보이자 일의 주재를 오늘 생일연의 주인인 모용봉에게 맡기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모용봉은 은형신침을 현우 도장의 시신에 갖다 대었다. 살짝 닿기만 했는데도 은형신침은 검붉은 색으로 변해 버렸다. 그 광경을 본 모용봉이 재차 입을 열었다.

“원래 은형신침은 생물에서 추출한 독에 닿으면 붉게 변하고, 광물(鑛物)의 독에는 짙은 남색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혼합독에는 지금처럼 검붉은 색을 띄게 됩니다. 귀화는 특수한 몇 가지 독을 배합하여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전후 상황을 보면 현우 도장께서 당하신 것은 귀화가 맞는 것 같군요.”

장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모두의 시선은 모용봉에게 집중되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모용봉은 중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침착하고 차분한 태도로 현우 도장의 시신을 살펴보고 있었다.

현우 도장의 시신은 그동안 독기에 완전히 침식당해서 가슴과 배 부분이 움푹 꺼져 있었고, 검게 변색된 피부에서는 조금씩 진물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악취까지 풍기고 있어서 마음이 약한 사람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릴 정도로 끔찍한 형상이었다.

나무젓가락을 이용해 시신의 옷깃을 들추고 한동안 살펴보던 모용봉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나직한 침음성을 발했다.

“음…….”

위해동이 급히 물었다.

“사인을 알아냈나?”

모용봉은 말없이 현우 도장의 상반신 옷자락을 들춰보였다. 위해동은 물론이고 청현과 청명이 모두 바짝 다가와 안력을 돋우어 옷자락이 들춰진 부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위해동이 갑자기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렸다.

“엇? 여기 이 자국은……?”

청현과 청명의 안색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현우 도장의 목덜미 부분에 아주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그 구멍은 모공(毛孔)보다 조금 더 큰 정도에 불과할 만큼 미세해서 그들이 신경을 집중하지 않았다면 제대로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위해동은 그 구멍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물었다.

“자네는 이쪽으로 독이 들어왔다고 생각하는가?”

“유해의 세세한 곳까지 보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신체의 주요한 혈맥이 지나는 곳이기 때문에 흉수가 이쪽으로 귀화가 묻은 침을 찔렀다면 혈맥을 타고 바로 머리로 독기가 침투했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그렇다면 흉수는 현우 도장이 술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쳐든 순간에 침을 찔러 넣은 것이겠군.”

“당시에는 건배를 하기 위해서 주위가 상당히 어수선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주의가 소홀해지기 쉬웠을 겁니다. 그렇더라도 현우 도장 같은 분이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독침을 찌르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모용봉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위해동 또한 모용봉의 말을 듣고 보니 사태가 그렇게 단순한 것 같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술잔 속에 든 독을 이용한 독살로만 생각했었는데, 독침을 이용한 살인이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현우 도장 정도의 뛰어난 고수에게 독침을 찌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흉수는 가공할 암기 실력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나 아무리 장내가 소란스러운 상태였다고 해도 절세 고수의 눈을 피해 가느다란 침을 목표한 곳에 정확하게 명중시킬 정도의 암기 고수는 강호 무림에서도 흔치 않았다. 게다가 그런 고수가 주변에 있다면 현우 도장이 방비하지 않을 리 없었다.

무심코 생각을 굴리던 위해동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한쪽에 나란히 서 있는 청현과 청명에게 향했다.

‘아니면 그가 전혀 방비하지 않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는 누군가가 흉수이거나…….’

마침 모용봉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그의 시선도 청현과 청명 쪽으로 향해 있었다.

청현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가만히 있는데 비해 청명은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그것을 본 모용봉은 청명이 무척이나 눈치가 빠르고 총명한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청명은 모용봉과 위해동이 자신들에게 시선을 두는 의미를 너무도 쉽게 파악해버린 것이다.

청명은 약간 경직된 표정으로 그들을 마주 보았다.

“두 분께서는 저희에게 하교(下敎)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그가 직설적으로 물어오자 위해동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으나, 모용봉은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한 채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두 분께 현우 도장께서 변을 당한 전후의 상황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여쭙고 싶군요. 현우 도장의 죽음이 술에 의한 독살이 아님이 분명해진 이상 당시의 상황을 보다 면밀하게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제야 청현도 자신들이 의심을 받을만한 처지에 놓여있음을 깨달았는지 표정이 무겁게 굳어졌다. 청명과 청현은 서로를 힐끗 돌아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모용봉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모용 공자의 말씀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알고 싶으십니까? 저희가 아는 대로 소상하게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기꺼이 조사에 응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모용봉은 그들의 현명한 결정에 감사를 표한 후 자신이 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두 분께서는 이 연회장에서 줄곧 현우 도장의 곁을 지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두 분의 충정에 감복했습니다. 현우 도장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계신 분들이니 현우 도장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제일 먼저 아셨으리라 생각됩니다. 현우 도장께서 쓰러지기 전에 무언가 이상한 일은 없었습니까?”

모용봉의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그들 두 사람이 가장 의심스러울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에 청명의 안색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래도 청명은 평정을 잃지 않고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성심껏 답변해 주었다.

“특별히 눈에 띄는 일은 없었습니다. 사숙께서는 여느 때와 다름없으셨고, 누군가 거슬리는 몸짓이나 행동을 했던 사람도 없었습니다.”

“현우 도장께서 독침을 맞으셨다면 아무리 귀화의 독성이 빨리 퍼진다고 해도 어떤 식으로든 그 분에게 반응이 있었을 듯한데, 쓰러질 당시 그분의 표정이나 태도는 어떠했는지 기억나시는 게 있습니까?”

청명은 잠시 기억을 되새겨보려는 듯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신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시에는 워낙 주위가 소란스러웠고 저희도 사숙을 계속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분이 특이한 반응을 보이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쓰러지기 직전에 그 분의 얼굴이 몹시 과격하게 일그러졌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사숙께서는 건배를 하신 후 몇 차례인가 입맛을 다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표정이 변하시더니 안면근육이 크게 일그러지며 답답한 신음을 토하시고는 이내 바닥에 쓰러지시고 말았습니다.”

“…….”

“제가 당황하여 사숙께 다가갔을 때는 이미 사숙께서는 더 이상 숨을 쉬고 계시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그 후로 제일 먼저 위 대협께서 달려오셨고, 이어 모용 공자께서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오신 겁니다.”

모용봉은 다시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으나 청명도 더 이상은 생각나는 게 없는지 그 이상은 별달리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그런 다급한 상황에서 현우 도장의 표정이나 행동을 세세하게 살펴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에 그가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청명은 현우 도장의 옆쪽에 있었기에 쓰러질 때의 얼굴이라도 보았지만, 청현은 뒤에 있었는지라 현우 도장이 숨이 끊어질 때까지도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모용봉은 현우 도장이 독에 당해 쓰러질 때의 상황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아낼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이내 질문의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두 분께서는 무당에서부터 현우 도장과 동행(同行)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특별히 두 분이 선별된 이유가 있습니까?”

청명은 모용봉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리고 즉시 입을 열었다.

“모용 공자께서는 현우 사숙의 제자도 아니고 특별한 관계도 아닌 저희들이 현우 사숙을 모시게 된 것이 궁금하신 모양이군요. 별다른 이유는 없고, 현우 사숙께서 저희 두 사람을 지목해서 함께 산문을 나서게 된 것 뿐입니다.”

“그렇군요. 무당에서 본 보까지 오시는 길에 현우 도장께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별다른 일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나 변고(變故)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형께서는 어떠셨습니까?”

청명이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서 있는 청현을 돌아보며 묻자 청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별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네. 너무 조용하고 평안한 여행이라 조금 심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였지.”

하긴 무당파의 최고 고수 중 한 사람과 무당십이검의 두 사람이 동행하는데 시빗거리나 특별한 문제가 일어난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현우 도장께 개인적인 문제나 걱정거리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까?”

모용봉의 질문이 자신들이 아닌 현우 도장의 신상으로 넘어가자 청명의 반응은 부쩍 예민해졌다. 아무래도 존장(尊長)에 대한 일이라서 그만큼 신중해지고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건 저희로서는 감히 알 수도 없고, 말씀드릴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는군요.”

모용봉은 차분한 음성으로 그를 다독이듯 말했다.

“오늘 이곳에는 수많은 무림의 명숙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유독 현우 도장만이 변을 당하신 것이 단순히 그 분의 운이 나쁘기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두 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청명의 눈살이 살짝 찡그려졌다. 모용봉이 거론하는 내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무작정 부인하기에는 나름대로의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청명이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을 본 청현이 대신 입을 열었다.

“사실 사숙께서는 본 파를 떠나 이곳으로 오시면서 계속 무언가를 고민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모용봉의 눈이 번쩍 빛났다.

“현우 도장께서 무슨 일로 고민하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것까지는 제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분께서 미간을 찌푸리시면서 깊은 상념에 잠겨 계시는 모습을 몇 번 목격했을 뿐입니다.”

현우 도장은 혈수흑도라는 별호만큼이나 성정이 뜨겁고 과격한 인물이었다. 고민할 일이 생기면 어떤 식으로든 단숨에 해치워 버리지 그걸 안고 끙끙거릴 성격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런 현우 도장을 고민스럽게 하는 일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모용봉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청명이 어딘지 모르게 안절부절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고는 무언가를 느낀 듯 그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 청명 도장께서는 그 점에 대해 알고 계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청명은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한 가지 떠오르는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런 일은 우리 모두가 사정을 듣고 판단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모용봉의 말에 청명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사숙께서는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시면 제일 먼저 차를 드시는 습관이 있어서 늘 식전에 제가 차를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아침 일찍 차를 가져다 드리러 들어가 보니 사숙께서는 의자에 앉은 채 무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계셨었습니다. 그 분의 복장을 보니 밤새 주무시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계셨던 것 같았습니다.”

중인들은 모두 이목을 집중시킨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사숙께서 중얼거리신 말은 ‘그가 어찌 그럴 수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위해동이 참지 못하고 불쑥 물었다.

“현우 도장이 말한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청명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저로서도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들은 말은 그것이 전부였으니 말입니다. 사숙께서는 이내 제가 들어온 것을 아시고 더 이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위해동은 허탈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건 너무 막연한 말이로군.”

“죄송합니다. 제가 공연히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군요.”

“아닐세. 자네를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안타까웠을 뿐이네.”

위해동의 얼굴에는 한 줄기 착잡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명색이 그의 가장 오래된 친우라면서 그에게 밤을 꼬박 새울 정도로 큰 고민이 있다는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창피막심한 일일세. 진즉에 알았다면 그와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후회스러울 뿐이네.”

청명으로서는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모용봉이 다시 청명을 향해 물었다.

“두 분은 이곳에서도 계속 현우 도장과 함께 계셨지요?”

“그렇습니다.”

“현우 도장의 신분이나 명성으로 보면 이곳에 오신 후 현우 도장을 찾아온 분들이 적지 않았을 듯 싶군요.”

“맞습니다. 어제는 물론이고, 오늘 이 연회장에서도 상당히 많은 분들이 사숙께 인사를 드리러 오셨습니다.”

“그 분들을 대할 때 현우 도장께서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하시거나 특이한 반응을 보인 분은 없었는지 궁금하군요.”

청명도 이 질문의 의미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표정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청현을 돌아보았다.

“저는 특별하게 떠오르는 사람이 없는데, 사형은 어떠십니까?”

청현도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그렇……, 아니 조금 이상한 일이 있기는 했군.”

청명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엇입니까?”

“사제는 미처 몰랐을 수도 있겠군. 그때 유 대협의 일행분들이 인사 오셨을 때 말일세.”

“환상제일창 유중악, 유 대협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그때 마침 사숙을 찾아온 다른 손님들이 계셔서 자네가 그 분들을 상대하느라 유 대협과 친구분들은 내가 모셨지 않나?”

“확실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때 사숙께서 한 사람의 손을 잡고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네.”

청명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위해동이 급히 물었다.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나?”

청현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당시 두 분은 전음을 사용하셔서 저로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음. 아쉬운 일이군.”

위해동이 침음하는 사이 이번에는 모용봉이 입을 열었다.

“현우 도장 같은 분이 손까지 마주 잡고 인사를 나눌 정도라면 현우 도장과 상당히 친한 사이였던 모양이군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 분은 사숙과 생면부지여서 그때도 유 대협의 소개로 처음 사숙을 만나게 된 자리였습니다.”

그제야 모용봉도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은 듯 얼굴에 호기심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생전 처음 만난 사람을 현우 도장께서 손까지 붙잡고 오랫동안 전음을 나누었단 말입니까?”

“그래서 저도 기이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때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지금 기억을 되살려보면 확실히 조금 특이한 장면이었습니다. 사숙께서 누구를 보고 그렇게 정색을 하며 관심을 표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으니 말입니다.”

모용봉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유 대협과 함께 오신 다섯 분 중의 한 분이신데, 아쉽게도 저는 소개를 받지 못해서 흑삼객(黑衫客)이라는 명호 외에는 그 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모용봉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은 환상제일창 유중악이 자신의 친우들과 있는 자리로, 마침 유중악과 그 일행들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일행 중 한 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무래도 청현 도장의 말씀은 이 사람을 지칭하는 것 같소이다.”

검은 유삼(儒衫)을 입은 준수한 용모의 중년인이 다가와 모용봉을 향해 포권을 했다.

“안녕하시오. 내가 흑삼객이란 보잘 것 없는 명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오.”

모용봉도 그를 향해 마주 인사를 했다.

“보잘 것 없다니 당치 않소. 흑삼객이라면 강서와 복건(福建)에서는 일대기객(一大奇客)으로 적지 않은 명성을 날리고 있는 호걸이라고 알고 있소. 나는 모용봉이라 하오.”

자타가 공인하는 구궁보의 소주인인 모용봉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흑삼의 중년인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지 재차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했다.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소. 나는 흑삼객 임지홍이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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