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6권 육합귀진(六合歸眞)편 : 7화
제 268 장 심야방객(深夜訪客)
구궁보를 떠나는 길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다.
종남파의 고수들은 서둘러 행장을 꾸리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그들을 제지하는 사람도 없었고, 왔을 때처럼 안내하는 자도 없었다. 어두운 밤길에 교교한 달빛만이 그들을 배웅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진산월이 갑자기 밤에 길을 떠나려는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누구도 묻지 않았고,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것은 그만큼 그들이 진산월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진산월이 아무런 목적 없이 즉흥적으로 일을 벌이는 성격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여정을 함께 했던 뇌일봉은 오늘 오후에 친우인 곽자령을 따라 유중악 일행과 함께 떠나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순수한 종남파의 인원들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진산월의 한 마디에 모두들 순순히 따를 수 있었다.
일행 중 가장 늦게 합류한 사람은 의외로 낙일방이었다.
진산월이 모용단죽을 만나는 동안 낙일방은 천봉궁의 처소를 방문했다. 그는 진산월이 돌아온 후에야 숙소로 왔는데, 그곳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표정이 몹시 무거웠다.
낙일방은 중인들이 행장을 꾸리는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해 하다가 동중산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자신도 서둘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낙일방을 마지막으로 숙소를 떠난 일행들은 소환로의 좁은 길을 통해 구궁보를 벗어났다.
구궁보를 나와 길을 걷다가 문득 돌아보니 괴괴한 어둠에 잠긴 구궁보의 높은 담벼락이 마치 거대한 암흑의 성(城)처럼 느껴졌다.
낙일방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탄식을 토해냈다.
“흐음.”
설레는 마음으로 왔다가 기대도 하지 않았던 많은 무림인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고, 피비린내 나는 살인사건을 목격한 날 밤에 도망치듯 구궁보를 떠나게 되니 그 모든 일들이 그야말로 하룻밤의 꿈과도 같았던 것이다.
동중산이 그의 그런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쉬우십니까?”
낙일방의 얼굴에 한 줄기 착잡한 빛이 떠올랐다.
“솔직히 그렇군요. 무언가 특별한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떠나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장문인께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을 겁니다.”
“장문 사형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에요.”
동중산의 외눈이 번쩍 빛났다.
“가신 일이 잘 안되셨습니까?”
낙일방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만나려고 했던 사람은 만나지도 못하고 엉뚱한 말만 듣고 말았어요.”
“그게 무언지 제가 알아도 되겠습니까?”
낙일방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에요. 하지만 조만간에 기회가 되면 제일 먼저 동 사질에게 말해주도록 하지요.”
“기다리겠습니다.”
동중산은 일전에 낙일방의 실종이 그에게 소홀했던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후로 낙일방에 대한 것이라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지금도 그의 솔직한 심정은 낙일방을 계속 채근해서라도 그가 왜 늦은 밤에 천봉궁의 숙소로 찾아갔으며, 그곳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알고 싶었다. 하나 낙일방의 굳게 다물어진 입술과 어두운 표정을 보고는 오늘 그의 입에서 말을 듣기에는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한 발 뒤로 물러난 것이다.
동중산은 짐짓 밝은 표정을 지으며 살짝 음성을 낮추었다.
“그래도 저로서는 무척이나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사고께서 돌아오신 것만으로도 이곳까지 온 성과가 충분히 있었다고 봅니다.”
낙일방의 얼굴도 눈에 띄게 밝아졌다.
“정말 그렇군요. 사저와 다시 함께 여행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늘 꿈으로만 그리고 있었는데…….”
그는 잠시 아련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도 모르게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진산월과 임영옥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자 낙일방은 언제 어두운 표정을 지었느냐는 듯 표정이 환해지며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두 사람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임영옥은 묵묵히 앞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고 있다가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진산월의 옆모습이 그녀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얼마 전 영하의 강변에서 보았을 때보다는 한결 살이 올라서 나아보였으나, 아직도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진산월이 아마도 그때의 모습으로는 영원히 되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왼쪽 뺨에 깊게 새겨진 칼자국은 더욱 도드라져 보였고, 짧게 자라난 수염이 턱밑과 뺨을 살짝 덮고 있었다. 무엇보다 눈빛이 예전보다 한층 더 깊어져서 그를 보고 있자니 아릿한 감정이 가슴 한 구석을 적셔왔다.
예전에는 그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에게서 낯설고 모를 구석이 많이 느껴졌다. 그를 변하게 한 세월이 원망스러웠고, 그런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서 이렇게 변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너무도 안쓰러웠다.
그때 문득 진산월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진산월은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사매가 그런 눈으로 나를 보고 있으니 내 가슴이 이상해지는군.”
임영옥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눈빛의 영롱함은 진산월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진산월은 잠시 임영옥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사 년 가까이 머물던 곳을 이렇게 불쑥 떠나게 되었으니 그녀의 심정이 무척이나 복잡할 것이라는 건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역시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이런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정리될 것이다. 그녀가 뜻하지 않게 그를 떠나 구궁보에 들어와야만 했던 사 년 전의 어느 날처럼.
한참 후에 임영옥은 진산월을 향해 물었다.
“사형은 이틀 후에 백대행과 비무를 하기로 약조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일단은 나루터 주변의 객잔에 머무를 생각이야.”
그럴 바에는 구궁보에 그때까지 머무르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하나 임영옥은 진산월에게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진산월은 단지 구궁보에서 단 한 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던 것 뿐이었을까?
“마침 이곳으로 올 때 마지막으로 들렸던 주루의 음식이 괜찮더군. 사매의 입에도 음식이 맞을 거야.”
임영옥은 예전에 늘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사형의 뜻대로 하세요.”
그들이 나루터의 객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삼경(三更)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막 잠이 들었었는지 한참동안 문을 두드린 후에야 겨우 문을 열고 나온 객잔 주인은 연신 하품을 하고 있었다.
“배가 끊긴지 한 시진이 넘었는데 어디서 오는 길이시오?”
주인의 물음에 동중산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구화산에 참배를 드리고 내려오는 길에 몇 군데 경치 좋은 곳을 둘러보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소. 인원이 제법 많아서 별채가 있으면 통째로 빌리려 하는데 가능하겠소?”
주인은 남녀가 섞인 열 명 가까이 되는 일행들을 대충 훑어보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별채는 없고, 후원에 빈 방 서너 개가 있는데 좀 부족할 것 같구려.”
동중산이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어쩌시겠습니까?”
“이 시간에 다른 곳으로 가기에는 너무 늦은 듯 하구나.”
“알겠습니다.”
동중산은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주인을 향해 말했다.
“방 하나만 더 비워서 다섯 개를 채워 주시오. 사례는 두둑하게 하리다.”
주인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내 아들 녀석이 쓰는 방이 제법 크고 널찍하오. 그 녀석을 내 방으로 불러들이면 얼추 맞을 것 같소. 하지만 방값으로 이할은 더 생각해 주셔야 하오.”
“그렇게 합시다.”
방 다섯 개가 비워지자 동중산은 재빨리 인원을 분배했다.
사문의 가장 어른인 성락중과 장문인인 진산월, 그리고 유일한 홍일점인 임영옥이 각기 방 하나씩을 사용하고, 배분이 같은 전흠과 낙일방이 하나, 그리고 제자들인 동중산과 유소응, 손풍이 마지막 하나를 함께 쓰게 되었다.
밤이 너무 늦어서 방의 분배가 끝나자마자 그들은 모두 각자의 방에 들어가 잠자리에 들었다.
사위가 조용해질 무렵, 진산월은 누워있던 침상에서 일어나 하나뿐인 탁자에 있는 촛불을 켰다. 그런 다음 탁자 앞의 의자에 앉았다.
“들어오시오.”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냉옥환이었다. 냉옥환은 한 차례 방안을 둘러보더니 진산월 외에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진산월이 앉은 의자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늦은 밤에 여인이 스스로 남자의 방에 들어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그녀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흔들리는 촛불 아래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냉옥환은 짤막한 물음을 던졌다.
“모용 대협을 만나셨나요?”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났소.”
“서풍에 날리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셨나요?”
“그렇소.”
냉옥환은 흔들림 없는 냉정한 눈으로 진산월을 바라보더니 물었다.
“무어라고 답하던가요?”
“바람에 날리는 건 여인의 치마가 적당하다고 했소.”
“……!”
“그리고 서풍이라면 녹색 치마가 어울릴 거라고 하더군.”
냉옥환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번쩍거렸다. 진산월은 촛불 아래 비치는 그녀의 얼굴을 묵묵히 보고 있다가 이번에는 자신이 물었다.
“원하는 대답이었소?”
냉옥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나 진산월은 차갑게 가라앉아서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릴 것 같지 않던 그녀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것을 알아보았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질문에 담긴 의미를 말해주셨으면 하오.”
진산월의 요구는 정당한 것이었다. 하나 이번에도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한동안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냉옥환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고, 진산월은 그녀가 입을 열기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마음을 굳힌 듯 그녀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진 장문인은 모용 대협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진산월은 그녀가 묻는 의도를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강호에 퍼진 소문을 귀동냥한 정도요.”
“정확히 모른다는 말이로군요.”
“남들이 알고 있는 정도라고 해야 정확할 거요.”
냉옥환은 잠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모용 대협의 본명은 모용청(慕容淸)이에요. 단죽은 원래 그 분의 가까운 사람들이 불렀던 애칭이었어요.”
“그건 처음 듣는 말이로군. 그런데 어떻게 애칭이 본명보다 더욱 알려지게 된 거요?”
“그건 그 분이 본명을 버렸으니까요.”
“어째서 그렇소?”
“자세한 속사정은 한낱 외인인 내가 말해줄 수 없어요. 아무튼 본명을 버린 뒤로 그 분은 스스로를 모용단죽이라고 자칭했고, 그 뒤로 사람들은 그 분을 그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어요.”
모용단죽의 본명이 따로 있다는 것은 확실히 흥미 있는 일이기는 했다.
하나 그것이 이번 일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모용 대협을 애칭으로 불렀던 사람 중에는 저의 사부님도 계셔요.”
냉옥환의 사부라면 자타가 공인하는 무림 최고의 여고수인 천수관음이었다.
천수관음이 모용 대협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는 것은 진산월도 정소소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정소소의 말로는 천수관음이 모용 대협에게 구애했다가 거절당했고, 그 실연의 충격으로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오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자신의 애제자인 냉옥환을 모용봉의 시비로 보낸 것도 제자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실연을 보상받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소소의 견해였다.
당시 진산월은 정소소의 말을 흔히 접할 수 있는 무림사(武林史)의 뒷이야기 정도로 생각하고 한쪽 귀로 흘려들었었는데, 막상 냉옥환에게서 직접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자 그리 단순한 내용이 아님을 깨달았다.
“사부님과 모용 대협은 사실 오래전에 정혼(定婚)을 약조한 사이였어요. 하나 뜻하지 않은 일로 두 분은 혼인을 할 수가 없게 되었지요.”
냉옥환의 말은 정소소가 말한 것과는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인 면에서는 조금 달랐다. 냉옥환의 말대로라면 단순히 천수관음이 일방적으로 모용 대협을 짝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결혼까지 약속할 정도로 두 사람 사이가 친밀했던 것이다.
“두 분이 혼인을 하지 않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진산월의 물음에 냉옥환은 고개를 저었다.
“그 안의 정확한 사정은 두 분 외에는 누구도 모를 거예요. 또한 제자인 저로서는 그분들의 내밀한 과거 일을 남에게 언급하고 싶지 않군요.”
“이해하오. 내가 너무 섣부른 질문을 한 것 같구려.”
“진 장문인으로서는 궁금할 법도 하겠지요. 아무튼 두 분은 그 뒤로도 서로의 친분을 다지는 정도로 관계를 유지해 오고 계셨었어요. 가끔 서신 왕래를 하면서 안부를 묻기도 했고, 명절이나 생일 때는 사람을 보내 선물을 주고받기도 했었지요.”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로 들리는구려.”
냉옥환은 진산월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몇 년 전부터 두 분 사이의 왕래가 없어졌어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용 대협 쪽에서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어요.”
“연락이 끊겼다는 건 무슨 뜻이오?”
“말 그대로에요. 서신을 보내도 답장이 없었고, 인편을 통해도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그래서 소저가 구궁보로 온 것이오?”
그녀의 고개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만큼 살짝 끄덕여졌다.
“사부님께서는 오랜 기간 동안 사귀어오면서 모용 대협을 잘 알고 계셨기에 갑자기 그 분에게서 연락이 끊긴 것에 상당한 의아함을 느끼셨어요. 그래서 나를 통해서라도 모용 대협이 연락을 끊은 이유를 알려고 하신 거예요.”
단순히 그 이유뿐이라면 천수관음의 제자가 다른 사람의 시비가 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냉옥환은 자신이 모용봉의 시비가 되어야만 했던 사정을 짤막하게 설명했다.
“구궁보에 와서야 나는 모용 대협을 만나는 일 자체가 그리 수월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어요. 모용 공자에게 부탁을 해도 모용 대협께서 외유중이라 연락을 할 수가 없다는 말만 들었어요. 언제까지고 구궁보에서 무작정 모용 대협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기에 나로서는 지속적으로 구궁보에 머물러있어야 할 당위성을 만들어야만 했지요.”
순간적으로 진산월의 머릿속에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구궁보에 머무르는 것이라면 식객(食客)으로 있어도 충분한 일이었다. 그녀는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고 했지만, 실제로 구궁보에는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는 손님들도 상당수 있었다. 더구나 모용 대협과 천수관음의 친분 관계를 고려해 본다면 그녀는 시비 보다는 식객으로 있는 것이 더 어울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옥환은 모용봉의 시비가 되는 굴욕적인 상황을 자처했다.
그것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진산월은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식객이라면 단순한 손님이기 때문에 구궁보의 자세한 속사정을 알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하지만 시비라면 외부에서는 알 수 없는 구궁보의 은밀한 일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구궁보의 깊숙한 곳까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냉옥환은 다른 사람의 시비가 되는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구궁보 내에서 반드시 알아내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일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진산월의 시선이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는 냉옥환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소저의 신분으로 남의 시비가 되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거요.”
냉옥환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리 편안한 자리는 아니었어요.”
“그래서 원하는 것을 얻으셨소?”
진산월의 직설적인 물음에 냉옥환은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진산월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눈빛은 한 점의 흔들림도 없어서 마치 석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냉옥환은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진산월의 두 눈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시선을 거둔 의미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문득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진 장문인은 정말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이군요. 진 장문인이 예상한 대로 나는 확실히 한 가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모용 공자의 시비가 되었어요.”
진산월은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다만 말없이 그녀의 입을 가만히 주시할 뿐이었다.
말없는 침묵은 때로는 다른 어떠한 추궁이나 독촉보다 사람을 더욱 재촉하게 만드는 법이다. 그녀도 또한 그런 것을 느꼈는지 살짝 그를 향해 원망하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모용 대협의 안위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어요.”
“……!”
“사부님께서는 모용 대협의 신상(身上)에 무슨 변고가 생긴 게 아닌가 염려하셨어요. 모용 대협을 직접 만날 수 없게 되자 그 염려는 의심으로 변했고, 모용 공자의 몇 가지 행동에서 어떤 위화감까지 느끼게 되시자 어떤 식으로든 그 일을 분명하게 확인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신 거지요.”
진산월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모용 공자의 어떤 행동에서 위화감을 느꼈다는 거요?”
“모용 대협에 대해 거론하는 것을 썩 내켜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내가 몇 차례나 모용 대협을 직접 만나야겠다고 했을 때는 난처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는데, 그것이 꼭 모용 대협을 누구와도 만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어요.”
“그래서 소저는 혹시 모용 공자가 일부러 모용 대협을 만나지 않게 하는 게 아닌가하고 의심한 것이구려.”
“솔직히 처음에는 그런 의심을 하기도 했지요. 나중에야 모용 대협이 진짜 구궁보에 없었고, 구궁보로 돌아오는 일도 극히 드물다는 것을 알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의심을 풀게 되었어요.”
“그러면 다른 점에서는 아직도 그에게 의혹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오?”
냉옥환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 공자가 모용 대협에 대해 숨기는 것이 있는 건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것이 꼭 모용 대협을 음해하거나 손해를 입히기 위한 의도라고 볼 수만은 없어서 무작정 모용 공자를 의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에요.”
“모용 공자가 모용 대협에 대해 외부에 밝히려 하지 않는 점이 있다는 건 확실히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것 같구려. 그런데 소저가 모용 공자의 시비가 된 것은 벌써 이삼 년이나 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그동안 모용 대협을 만나서 직접 확인해 보지 못했단 말이오?”
냉옥환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만일 확인했다면 내가 아직까지 구궁보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겠지요.”
“모용 대협이 일 년에 몇 번은 구궁보에 돌아왔을 텐데, 그때 만나면 되는 일 아니었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모용 대협이 가끔 구궁보에 오기는 하지만, 그 시기가 일정치 않기 때문에 그가 언제 왔다 갔는지는 거의 아는 사람이 없어요. 더구나 그는 구궁보에 왔을 때도 하루나 이틀 잠깐 머물다가 다시 홀연히 떠나기 일쑤여서 그를 직접 만나 본 사람은 모용 공자 외에는 아무도 없는 형편이에요.”
모용 대협을 자신의 거처인 구궁보에서도 보기 힘들다는 것은 확실히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멀리서도 본 적이 없었단 말이오?”
“우습겠지만, 사실이 그래요. 모용 대협이 구궁보에 왔다는 걸 알고 뒤늦게 면담을 요청한 적도 있었는데, 이미 다시 떠났다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거절당하곤 했어요.”
“그래서 나에게 그런 부탁을 했던 거요?”
“진 장문인이 모용 대협을 만나기로 했다는 걸 알고 무척 놀랐어요. 지난 삼 년간 모용 공자 외에 모용 대협을 만난 사람은 진 장문인이 처음이에요. 그래서 나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그 기회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내가 모용 대협을 만났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분의 안위가 무사하다는 게 증명이 되는 셈인데, 굳이 내게 그런 부탁을 했던 이유는 무엇이오?”
“확인해 봐야 했어요.”
“무엇을 말이오?”
냉옥환의 음성은 어느 때 보다 나직했으나, 진산월의 귀에는 너무도 크게 들렸다.
“모용 대협이 진짜 본인이 맞는지.”
그녀의 말을 보통 사람이 들었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놀랍게도 그녀는 천하제일고수의 진위(眞僞)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진산월은 쉽게 경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진산월은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눈을 빛내며 그녀의 냉정해 보이는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다가 반문했다.
“소저는 구궁보에 가끔씩 나타나는 모용 대협이 진짜 본인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구려.”
“내가 아니라 사부님의 생각이세요.”
“서풍에 날리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는 것도 소저의 사부님 생각이셨소?”
“그래요.”
“그래서 확인이 되었소?”
냉옥환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진산월은 그녀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녀는 한참 후에야 비로소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직은 무어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진산월은 오늘 저녁에 자신이 만났던 모용단죽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그에 대한 첫 인상은 오래된 고목(古木)과 같다는 것이었다. 말과 행동에서 깊은 세월의 연륜(年輪)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고, 무공의 경지는 자신의 눈으로도 섣불리 측량할 수 없었다.
아무리 강호에 기인이사가 구름처럼 많다고 해도 그런 사람이 또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만났던 사람은 모용단죽 본인이 확실한 것일까?
하나 그렇다고 선뜻 말하기에는 망설여지는 것이 진산월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지금까지 소문으로만 듣고 막연히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용 대협의 인상과 직접 만났을 때의 인상이 어딘지 조금 맞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하나 모용 대협을 처음 만난 그로서는 그 단순한 느낌만으로 그 사람이 진짜 모용 대협 본인인지 아닌지를 섣불리 속단할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이 만나본 그 사람이 진짜 모용 대협이든 아니든 절대로 자신의 아래가 아니며, 어쩌면 자신으로서는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올라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진산월은 오늘 그를 만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진산월은 오랫동안 숙고하다가 가장 묻고 싶었던 물음을 던졌다.
“그 질문이 의미하는 건 대체 무엇이오? ‘서풍에 휘날리는 녹색 치마’ 라는 구절은 오래된 시구의 한 부분 같은데.”
냉옥환의 답변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진 장문인의 말씀대로예요. 그것은 ‘거상’이라는 시의 한 구절로, 사부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싯구예요. 사부님의 함자가 바로 옥부용(玉芙蓉)이세요.”
강호에 별호로만 알려진 천수관음의 본명을 진산월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거상’은 ‘부용’의 다른 이름이었다. 누구라도 자기 이름과 같은 제목의 시가 있다면 호감을 갖게 될 것이다. 설사 무림에서 전설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최고의 여고수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냉옥환은 이내 짧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사부님은 늘 붉은 치마를 입고 다니세요.”
진산월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렇다면…….”
“그래서 그의 대답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고 한 거에요. 모용 대협은 사부님 앞에서만은 그 분을 ‘서풍취홍상(西風吹紅裳)이라고 불렀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