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6권 육합귀진(六合歸眞)편 : 8화
제 269 장 수욕정이(樹欲靜而)
구강의 나루터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정오나 되어야 구화산으로 가는 사람들이 보이곤 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아침 해가 뜨기도 전부터 사람들이 하나둘씩 몰려오더니 사시(巳時)가 될 때는 나루터 주위의 모든 주루가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인파로 가득 메워졌다.
그들은 대부분이 병장기를 소유한 무림인들이었고, 특히 구궁보의 연회에 참석했던 인물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진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나루터 전체가 마치 잔치집이라도 되는 양 시끌벅적하고 소란스러워서 시장바닥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정오가 가까워 올 무렵, 구화산 방면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나 나루터로 다가왔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나루터 주변의 주루에서 연신 밖을 내다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시선을 집중시켰다.
“형산파 고수들이다!”
나직한 속삭임이 거대한 울림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고함을 지르거나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으나, 묘한 긴장감을 담은 웅성거림으로 인해 나루터 전체가 들썩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타난 사람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는데, 하나같이 청삼을 입고 청색 두건을 쓴 젊은이들이었다. 그들 중 유난히 키가 크고 행동거지가 자유분방해 보이는 청년이 주위의 시선을 끌었다.
나루터 주변에 있는 주루 중에서도 가장 끝 쪽의 주루의 창가에서 고개를 창문 밖으로 반쯤 내밀고 있던 사람이 그들의 모습을 유심히 보더니 일행을 향해 투덜거렸다.
“이런 제길. 자네 말대로 좌군풍은 오지 않았군.”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람이 히죽 웃었다.
“닷 냥짜리 내기였다는 걸 잊지 말게.”
먼저 말을 했던 사람은 연신 구시렁거리면서도 품속에서 다섯 냥을 꺼내 그에게 던져 주었다.
“잘 먹고 잘 살게.”
“고맙네. 자네 덕분에 오늘은 풍족한 식사를 할 수 있겠군.”
“그나저나 좌군풍이 오지 않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나?”
맞은편의 사람은 앞에 놓인 술을 얄밉도록 맛있게 들이킨 후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자네도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알걸세. 남들 골탕 먹이는 일에는 머리가 그렇게 잘 돌아가면서 이런 일에는 왜 그 비상한 머리를 굴리려 하지 않는 건가?”
먼저 입을 열었던 사람의 얼굴이 내다 버린 종잇조각처럼 구겨졌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내 말에 대답이나 하게.”
“오결검객은 형산파 내에서도 독보적인 지위에 있는 인물들일세. 다시 말해서 삼결이나 사결이 무슨 일을 당하든, 오결만 건재하다면 형산파는 전혀 흔들림 없이 문파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거지.”
“그래서?”
“그러니 형산파로서는 패배가 유력해 보이는 이런 비무에 굳이 오결이 모습을 드러낼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말일세. 백대행이 종남파와의 비무에서 패한다고 해도 사결제자 한 명의 패배로 그치고 만다는 말이지. 게다가 만에 하나라도 승리를 거둔다면…….”
“사결만으로도 종남파를 꺾었으니 오결은 나올 필요도 없다?”
“뭐 그런 식으로 소문이 퍼지겠지. 하지만 그건 별로 가망 없는 얘기이고, 형산파로서는 어디까지나 이번 비무를 백대행과 사결제자들의 일로 국한시키려 할 걸세.”
“듣고 보니 그럴 듯 하군.”
“게다가 좌군풍이 오지 않아야 할 결정적인 이유가 따로 있네.”
“자네가 귀신같은 구석이 있다는 건 나도 익히 알고 있네. 어서 말해 보게.”
“교활한 자네 입에서 칭찬을 듣게 되니 기분이 야릇해지는군. 자네는 좌군풍이 언제부터 강호에 명성을 떨쳤는지 아는가?”
먼저 입을 열었던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무척 오래되었다는 건 알겠는데, 정확한 건 기억이 나지 않는군.”
“이십여 년 전의 기산취악 때부터 일세.”
먼저 입을 열었던 사람은 손뼉을 탁 쳤다.
“아! 이제 알겠군. 그때 형산파에서 나온 네 명의 고수 중 하나였지?”
“그래. 그러니 그가 이곳에 나타난다면 종남파로서는 과거의 치욕을 씻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에게 시비를 걸었을 것이네.”
“당당한 형산파의 오결검객이 다른 문파의 도전이 무서워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말인가?”
“기산취악 같은 문파와 문파간의 정식 결전이라면 좌군풍도 피할 이유가 없지.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의 비무는 아무리 좌군풍이라도 껄끄러울 수밖에 없을 걸세. 더구나 오결검객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생각해 본다면 말일세.”
“그 상대가 신검무적이라면 더욱 그렇겠지.”
“그래. 아무래도 제대로 된 오결의 솜씨를 보려면 종남파가 형산파에 정식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때를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네.”
“그때가 언제 일까?”
“조만간 닥쳐올 걸세. 종남파가 괜히 비무행을 시작한 게 아닐 테니 말일세.”
두 사람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 형산파의 다섯 제자들은 나루터의 중앙에 있는 공터에 가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당당한 가운데 일견 비장함까지 풍기고 있어 보는 이의 가슴에 진한 인상을 남겨 주었다.
정오의 햇살이 공터에 서 있는 다섯 젊은이들의 어깨 위에 내리쬐었다. 그 햇살이 따가울지 자신들에게 쏠려 있는 수많은 중인들의 시선이 더 따가울지는 그들 외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우두커니 그들을 보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나직한 탄식을 토해냈다.
“젊음이 죄로군.”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생각해 보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도 모두 백대행이 한 순간의 혈기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일세.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신검무적이라 해도 모용 공자의 생일연에서 형산파를 먼저 도발하지는 않았을 걸세.”
“그도 그렇겠군.”
“어차피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종남파와 자웅을 겨루게 되었을 텐데, 순간적인 실수 때문에 문파가 떠맡아야 할 짐을 떠안게 되었으니 한편으로는 안쓰러우면서도 저렇게 물러서지 않고 달려드는 젊음이 부럽기도 하네.”
“그 말을 들으니 우리가 부쩍 늙어 보이는군.”
“나는 몰라도 자네는 확실히 늙었네. 원래 늙을수록 교활해 진다고 하지 않는가?”
“제길. 그 말은 그만 하라니까.”
듣고 있던 사람이 투덜거리자 말을 꺼냈던 자도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귀호나 교리나 그게 그거지. 이크. 나오는 것 같네.”
낮게 소곤거리던 두 사람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주루 안을 힐끔거렸다.
그들이 앉아 있는 주루의 내실에서 몇 사람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 주루 안에서 떠들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개중에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키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설마 자신들이 지금까지 입이 아프게 떠들어 댔던 종남파의 고수들이 자신들과 같은 객잔에 머무르고 있을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 귀호나 교리 같은 눈치 빠른 자들은 이미 이곳에 종남파 고수들이 있음을 알고 아침부터 이곳에서 죽치고 있었기에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들을 훔쳐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신검무적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릴 정도로 위엄이 있어 보였고, 옥면신권은 정말 강호제일의 미남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준수한 것 같았다. 외눈의 비천호리는 일견하는 것만으로도 그 비범함을 느낄 수 있었고, 무영검군은 별호 그대로 신비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 외에도 종남파 고수들의 누구 하나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신검무적의 제자라는 어린 소년조차도 중인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침착해 보였다.
그중에서도 신검무적의 옆에 서 있는 면사를 쓴 여인의 모습이 유독 중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면사 여인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살짝 드러난 자태만으로도 많은 남자들이 매혹당할 정도였다.
그들이 주루를 벗어나 공터로 향하자 그곳 주루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다른 주루에 있던 사람들도 일제히 밖으로 나와 공터 주위로 몰려들었다.
삽시간에 제법 넓었던 공터는 사람들로 뒤덮였으나 이상하게도 조금 전과는 달리 그렇게 소란스럽지 않았다.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굳게 다문 채 종남파와 형산파 고수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간혹 낮게 소곤거리는 자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앞으로 벌어질 모든 광경들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빛내며 장내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종남파 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형산파 고수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하나 그들 중 중앙에 서 있는 훤칠한 키의 청년만은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차분한 눈으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훑어보았다. 그들 중에는 구궁보에 오기 전 구화산 입구에서 잠깐 보았던 추풍비검 정일군도 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을 하고 있는 정일군은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입술을 질끈 깨문 채 피하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절대로 물러서거나 꽁무니를 빼지 않겠다는 결연한 모습이었다.
형산파 고수들을 한 사람씩 훑던 진산월의 시선이 이내 중앙의 훤칠한 키의 청년에게 고정되었다. 청년, 백대행은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했다.
“오셨군요.”
며칠 전에 볼 때와는 달리 호탕한 가운데 예의를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진산월도 격식에 어긋나지 않게 그의 인사를 받았다.
“일찍 온 모양인데,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날이 좋고 주위의 풍광이 마음에 들어서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진산월은 그 말에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한 점 구름이 떠 있는 파란 하늘 아래 보이는 강물이 넘실거리는 포구의 모습은 왠지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군. 정말 좋은 날씨로군. 오래된 일을 매듭짓기에 딱 어울리는 날씨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백대행도 그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고 나루터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정말 해원(解寃)에 좋은 날씨입니다.”
“우리 사이에 원한 같은 건 없소. 그저 케케묵었던 일 하나만이 있을 뿐이오.”
백대행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소. 말 한 마디로도 풀 수 있고, 행동 하나로도 풀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일이지.”
“제게 아량을 베푸시는 겁니까?”
진산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찌 보면 차갑고, 어찌 보면 냉정하며, 또 어찌 보면 유쾌한 듯한 미소였다.
“그런 게 아니라는 건 당신도 알고 있을 거요. 나는 다만 한 가지를 분명히 하고 싶었을 뿐이오.”
“그게 무엇입니까?”
“나는 당시에도 일파의 장문인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요. 당신도 그때나 지금이나 한 문파의 제자요. 우리의 신분은 그대로인데, 나를 대하는 당신의 자세나 행동은 많이 달라져 있소.”
“……!”
“당시에 당신은 마음대로 나를 재단하여 시비를 걸어오더니, 지금은 또 당신 마음대로 판단하여 내게 도전을 해 왔소. 당신의 태도나 동기는 달랐지만 결과는 마찬가지가 되었소. 다시 말해서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 형세요.”
담담함을 유지했던 백대행의 눈자위가 한 차례 실룩거렸다.
진산월은 그의 표정은 살피지도 않고 허공을 응시한 채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 일 이후로 더 이상은 나를 흔들려고 하지 마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다음에는 당신이 아닌 당신의 문파에 책임을 물을 거요.”
백대행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한참동안이나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더니 이윽고 굳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의 뜻을 알겠습니다. 오늘 이후 더 이상 진 장문인을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생각해 보면 한 문파의 제자가 다른 문파의 장문인에게 공개적으로 도전한 다는 것은 무림의 정서상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도 진산월은 그의 도전을 순순히 받아주었다. 그것으로 과거의 일에 대한 모든 아쉬움이나 미련을 접겠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문파의 우두머리로서 타 문파 제자의 도전을 피해야만 했던 당시의 그의 심정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진산월은 천천히 고개를 떨구어 백대행을 바라보았다.
“이번 일은 당신과 나의 비무로 종결지을 거요. 비무에서 나는 삼 초를 양보하겠으며, 십 초가 지나도 승부가 나지 않는다면 내가 패한 것으로 하겠소.”
백대행의 옆에 있던 형산파의 제자들은 정색을 했으나 백대행은 오히려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배려가 아니라 강호의 도의(道義)요.”
짤막한 말이었으나 형산파 고수들은 형산파 고수들대로, 종남파 사람들은 그들대로 각기 다른 감흥을 느껴야만 했다.
문파의 제자가 자신의 무공을 믿고 타문파의 장문인에게 도전하는 것은 확실히 강호의 도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산월은 그의 도전을 받아주었으며, 오히려 삼 초를 양보함으로서 일파의 지존으로서 당당함을 보인 것이다.
도의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이렇듯 서로 간에 지켜야 하는 무언의 약속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낮의 햇살은 제법 따가웠다. 진산월은 자신의 머리 위를 비추는 태양을 잠시 올려보더니 이내 고개를 내려 자신의 앞을 바라보았다.
백대행은 검을 뽑아들고 중단(中段)으로 세운 채 눈도 깜박이지 않고 검 끝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어깨를 약간 추켜올리고 검을 들지 않은 팔을 반쯤 벌리고 있는 다소 특이한 자세였다. 이것은 형산파의 예전초식(禮典招式) 중 하나인 포원수일(抱元守一)로, 상대에게 헛된 살심(殺心)을 품지 않음을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해 승부에 임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진산월의 자세는 그에 비하면 평범하다 할 정도로 아무런 특징이 없었다. 두 팔을 자연스레 늘어뜨리고 양 팔을 어깨 너비로 벌린 상태로 우뚝 서 있었는데, 담담한 가운데 진중함이 느껴지는 자세였다. 진산월은 슬쩍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고 왼손을 가슴 쪽으로 가져갔다가 다시 원래의 자세로 돌아왔다. 종남파의 예전초식인 조운일환을 펼쳐 보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주위는 아주 조용했고, 하늘은 유달리 쾌청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한 줄기 산들바람이 중인들의 머리를 흔들고 지나간다 싶은 순간, 비무가 시작되었다.
먼저 움직인 사람은 백대행이었다. 그의 건장한 어깨가 한 차례 흔들거림과 동시에 중단을 겨누고 있던 그의 검이 한 줄기 빛살처럼 진산월의 앞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백대행이 펼친 초식은 형산파의 구종(九種) 검법 중 유룡십이검(遊龍十二劍)의 천개유룡(天開遊龍)이었다. 유룡십이검은 구종 검법 내에서의 서열은 사위에 불과했으나, 검로가 자유분방하고 속도가 빨라서 상대의 반응을 유도하는 첫 출수의 초식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것이었다.
지금도 백대행의 검은 한 치의 거리낌도 없는 호탕한 기세로 유성처럼 진산월의 앞가슴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그의 깔끔한 자세와 검의 거침없는 기세에 여기저기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진산월은 슬쩍 몸을 옆으로 틀어 백대행의 검을 피했다. 그러자 백대행은 진산월의 행동을 미리 짐작이나 하고 있었다는 듯 주저하지 않고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양팔을 크게 휘둘렀다. 진산월의 옆을 스쳐 지나갈 듯 하던 그의 검이 허공에서 유연하게 움직이며 순식간에 진산월의 상반신 전체를 검세 속에 가두어 버렸다. 그야말로 멋들어진 용유대해(龍遊大海)의 일식이었다.
진산월은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백대행의 검이 지척까지 다가온 후에야 수중에 들고 있던 용영검을 검집에서 뽑지도 않은 채 앞으로 불쑥 내밀며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그토록 삼엄하게 다가들던 백대행의 검초 한 구석이 뻥 뚫리며 진산월의 몸이 그 속에서 빠져나왔다.
“아!”
사방에서 탄성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순간, 허공에 떠 있던 백대행의 몸의 뒤집히며 발이 위로, 머리가 아래인 상태로 진산월의 머리 위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와 함께 폭포수 같은 검기가 진산월의 몸을 뒤덮어 버렸다. 신기에 가까운 그 초식은 바로 유룡십이검 중의 최절초인 천룡번공(天龍飜空)이었다.
천개유룡에서 용유대해로, 다시 천룡번공으로 이어지는 삼 초의 연환식(連環式)은 치밀하게 짜인 비밀스런 수법으로, 이 유룡삼연식(遊龍三連式)이 이런 공개된 자리에서 펼쳐진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비록 어느 정도 살기가 억제되기는 했으나, 유룡삼연식의 위력은 멀리 떨어진 사람들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때문에 중인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않은 채 눈을 부릅뜨고 장내의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진산월의 몸이 미끄러지듯 가볍게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용영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어느 사이에 용영검이 검집을 벗어나 특유의 우윳빛 검광을 뿌리고 있었다.
파파파팍!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며 시퍼런 검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중인들은 장내를 휘감은 자욱한 먼지 때문에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어 답답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무언가를 발견한 듯 두 눈이 찢어지도록 부릅떴다.
먼지 속을 뚫고 무섭게 격돌하고 있는 두 사람의 신형을 발견한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격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한쪽은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붓고 있고, 다른 한쪽은 슬쩍슬쩍 몸을 움직이며 검초를 피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일방적인 공세를 취하고 있는 사람은 백대행이었고, 수세에 몰린 사람은 진산월이었다. 중인들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에 처음에는 다소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열렬한 환호를 터뜨렸다.
“와아!”
“과연 대로검이다!”
약자를 응원하는 것은 무림인의 보편적인 정서였다. 당대 제일 검객의 손에 일패도지할 줄 알았던 백대행이 오히려 우세를 보이는 듯 하자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성원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하나 자세한 사정을 알고 있는 몇몇 고수들은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백대행이 일방적으로 공세를 퍼붓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그다지 진산월에게 위협을 주지 못하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단지 그들로서도 알 수 없는 것은 왜 진산월이 반격 한 번 하지 않고 계속 백대행의 검을 피하고만 있느냐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몇 초가 훌쩍 지나갔다.
백대행은 이번 일전(一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사람처럼 수비는 전혀 도외시한 채 계속 수중의 검을 맹렬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그가 지금 펼치고 있는 것은 형산파가 천하에 자랑하는 독보적인 원공검법의 절초들이었다.
형산에 많이 서식하는 원숭이들의 행동을 보고 원공(猿公)이라는 희대의 기인이 창안했다고 하여 원공검법이라고 불렸으나, 진실한 내력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형산파에 있는 아홉 종의 검법 중에서도 그 특이한 형태와 뛰어난 위력으로 강호 무림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또 그만큼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검법이었다.
그래서 많은 무림인들은 원공검법이 형산파의 제일가는 검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 사실 원공검법은 형산파의 구종검법 중 삼위에 불과하며, 그보다 뛰어난 검법이 두 개나 있다는 것은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형산파의 당대 고수들 중 원공검법의 최고 고수는 오결검객 중 한 명인 절영검(絶影劍) 비성흔(費星痕)으로 알려져 있다. 비성흔은 이십 년 전의 기산취악에서 사결검객 신분으로 당시 종남파의 장문인이었던 천치검 하원지를 격파하여 천하에 명성을 떨쳤고, 그 공으로 오결검객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 후 십 년간 폐관수련하여 원공검법을 화경(化境)에 이르도록 연마하였고, 결국 오결검객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최고의 검객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 백대행이 펼치는 원공검법은 비성흔의 그것과 정확히 비교할 수 없으나, 중인들의 눈에는 가히 절정에 다다른 것처럼 보였다. 언뜻 보기에도 그 엄밀한 검영을 뚫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처럼 생각되었다.
백대행의 검이 어찌나 빠르고 매섭게 움직이는지 그 검이 정확히 어디를 노리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것이 원공검법의 가장 무서운 점이었다. 원숭이의 동작에서 유래했기 때문인지 원공검법의 검로는 종종 무림의 상궤(常軌)를 벗어나는 것이었고, 동작의 자유스러움과 검초의 기발함은 사람들을 당혹하게 하기 일쑤였다.
하나 눈이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움직이는 백대행의 검이 최종적으로 노리는 부위가 진산월의 오른손목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원공검법 중에서도 절초 중의 절초인 백원적과(白猿摘果)라는 초식으로, 원숭이가 나무에서 과일을 따는 동작을 모방하여 상대의 검을 든 손목이나 검 자체를 노리는 고도의 수법이었다.
하나 그 초식이 백대행이 펼친 아홉 번째 초식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중인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느 새 비무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백원적과의 무서움은 마땅히 피하거나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미친 듯이 휘몰아치던 검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느닷없이 검기 한 가닥이 튀어나와 손목을 노리고 날아들기 때문에 방비하기도 힘들고, 반격을 가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진산월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수중의 용영검을 슬쩍 앞으로 내밀었을 뿐이다.
땅!
귀청이 떨어질 듯 요란한 음향과 함께 백대행의 검끝이 정확하게 용영검의 검신에 가로막혔다.
검신으로 검을 막는 수법은 일정 수준 이상의 검객들 사이에서는 금기시 되는 행동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검을 타고 흐르는 상대의 검날에 치명적인 위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과연 백대행의 검이 용영검의 검신을 타고 진산월의 몸 쪽으로 빠르게 미끄러져왔다. 그것을 본 중인들이 놀란 외침을 토해냈다.
“아앗?”
누가 보기에도 진산월이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백대행의 검이 용영검을 지나 그의 가슴을 가르고 갈 것 같았던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원공검법의 가장 무서운 살초인 영원헌도(靈猿獻桃)였다. 백원적과로 상대의 손목을 노리고, 상대가 검을 틀어막을 때 그 검을 따라 가서 상대의 가슴을 베는 이 연환식은 형산파가 비장의 수법으로 자랑하는 최고의 절기 중 하나였다.
진산월의 가슴이 막 백대행의 검에 베어지려는 순간, 갑자기 눈부신 검광 한 가닥이 피어올랐다.
팟!
검광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너무도 홀연히 나타났다가 갑작스럽게 사라졌기 때문에 중인들 중 상당수는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여 눈을 껌벅여야만 했다.
진산월과 백대행은 어느 새 이 장의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일방적인 우세를 점하는 것 같았던 백대행은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검을 들고 있는 그의 손이 쉴 사이 없이 떨리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수세에 몰려 있는 듯 했던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용영검 또한 어느 새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집에 들어가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방금 전까지 살벌한 비무를 한 것이 아니라 산책이라도 나갔다 돌아온 것으로 오해했을 지도 몰랐다.
“으웩!”
갑자기 백대행이 한바탕 시커먼 피를 게워냈다.
피를 토하고 난 백대행의 표정은 오히려 개운해져 있었다.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모든 것들을 피와 함께 토해낸 듯한 모습이었다.
백대행은 떨리는 손을 몇 차례 쥐었다 폈다 하더니 이내 검을 거두고는 진산월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그의 인사를 받았다.
“좋은 승부였소.”
두 사람이 별다른 말도 없이 가벼운 인사를 하고는 서로의 일행에게로 돌아가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눈을 크게 뜨고 소곤거렸다. 하나 그들 중 몇몇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귀호와 교리라는 별호를 가진 자들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과연 대단하군.”
귀호의 말에 그와 함께 열심히 비무를 지켜보았던 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당대 제일검객의 명성이 헛것이 아니로군. 오늘 아주 좋은 눈요기를 했군 그래.”
“형산파의 저 쌍원참(雙猿斬) 수법을 저토록 수월하고 완벽하게 깨뜨리는 사람은 처음 보았군. 신검무적의 나이를 생각해 본다면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 아닌가?”
“그런데 신검무적이 마지막에 펼친 게 무슨 수법인지 아나? 오늘 그가 펼친 초식들은 하나같이 어딘지 모르게 눈에 많이 익은 것 같더군.”
“자네 말대로 특별한 초식은 하나도 없었네. 특히 마지막 초식은 삼재검법 중의 개창망월(開窓望月)인 것 같더군.”
삼재검법은 강호에 산재한 수많은 검법 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검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교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범한 개창망월 같지는 않던데.”
“그야 당연하지. 그랬다면 채 초식을 반도 펼치기 전에 먼저 가슴이 베어졌을 걸세. 단지 신검무적이 펼친 개창망월은 엄청나게 빨랐을 뿐이야.”
“먼저 발출한 백대행의 검이 채 다가오기도 전에 먼저 밀어낼 정도로 말이지.”
“그렇지. 저 정도 빠르기라면 강호제일의 쾌검이라는 분광검객 고심홍의 쾌검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듯 하네.”
“그 정도란 말이지? 하지만 단순히 빠르다고 해서 백대행의 쌍원참을 막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알기로는 형산파의 최고수법들에는 하나같이 괴상한 기운이 담겨 있어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검을 막아도 따라오는 검기에 낭패를 당하기 일쑤라고 하던데…….”
“그런 소문이 있기는 했지. 단순한 검기는 아니고 형산파의 독특한 내가진기를 이용한 유살검기(幽煞劍氣)의 일종이라고 들었네. 내 짐작에는 신검무적도 검에 특수한 기운을 불어 넣었던 것 같네. 조금 전에 보니 백대행의 검이 그의 검에 닿기도 전에 살짝 밀려나는 것 같더군. 아마 검기불혈진맥의 수법을 함께 사용한 모양일세.”
“그래서 백대행이 그렇게 손을 떨고 있었군. 그나저나 자네는 참 눈도 좋네. 이 멀리서 그걸 다 봤단 말인가?”
교리가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귀호는 싱겁게 웃었다.
“나 혼자 본 것처럼 말하는군. 자네도 뻔히 알면서 왜 그러나? 자꾸 그러니까 자네보고 교활하다고 하는 걸세.”
교리의 얼굴이 쓰다 버린 종잇조각처럼 구겨졌다.
“이런 귀신같은 친구. 아무튼 백대행은 비록 패하기는 했으나 날카로운 한 수를 선보여 자신이 호락호락 하지 않음을 입증해 보였고, 신검무적 또한 앞으로 상대할 형산파의 검법을 직접 겪어 보았으니 양 측 모두 불만스럽지는 않겠군.”
귀호는 고개를 저었다.
“엄밀히 따지면 이번 일은 무조건 종남파의 이득일세.”
“왜 그런가?”
귀호의 눈빛에 한 줄기 기광이 번뜩였다.
“백대행은 형산파의 비전검법 중 두 가지나 선보였지만, 신검무적은 종남파의 무공은 단 하나도 쓰지 않았네. 다시 말해서 오결검객이 아닌 한은 종남파 무공을 사용할 가치도 없다고 선포한 셈일세.”
교리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지금까지와는 달리 표정이 무거워졌다.
“무서운 도발이로군.”
“그렇지. 종남파가 형산파에 굳이 도전하지 않아도 형산파로서는 도저히 그냥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으니 말일세.”
“만약 그걸 의도한 것이라면 정말 무서운 심계라고 할 수 있겠군.”
귀호는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러니 정말 놀라운 일 아닌가? 이제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그만한 무공에 그런 심계까지 가지고 있으니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