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8권 열한기공(熱寒奇功)편 :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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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8권 열한기공(熱寒奇功)편 : 6화


제 287장 선수자익(善水者溺)

“이제 마흔 두 대다. 이 빌어먹을 자식!”

손풍은 넋두리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다시 오른 주먹을 앞으로 내뻗었다. 장괘장권구식 중의 천전만권이었으나, 너무 손이 느리고 변화가 별로 없어 뒷골목 파락호의 주먹질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채석도는 그토록 얻어맞고도 아직도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손풍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장난삼아 몇 차례 가지고 놀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때려죽일 생각에 손에 상당한 공력을 실었음에도 여전히 그를 쓰러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놈은 대체 무얼 처먹었기에 몸뚱이가 이리도 단단하단 말이냐?’

채석도가 병기를 휘둘렀으면 아무리 손풍이라도 진즉에 싸늘한 시신이 되었을 것이나, 손풍으로서는 천만다행으로 채석도의 장기는 맨손 무공이었다. 채석도는 때려도 때려도 버티고 서 있는 손풍에게 슬슬 질려가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끝장을 내주마.’

채석도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던 흑살수(黑煞手)를 펼치기 위해 오른손에 잔뜩 공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그의 손이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살짝 검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흑살수는 채석도가 비장의 절기로 생각하는 강력한 무공이어서, 그 손에 격중 된다면 아무리 손풍의 몸이 강인하다고 해도 절대로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채석도가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막 손풍의 머리통을 향해 흑살수를 휘두르려는 순간, 한 사람이 불쑥 그와 손풍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채석도는 자신이 펼친 흑살수가 난데없이 나타난 백의 사나이에게 가로막히자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옥면신권!”

낙일방은 무표정한 얼굴로 소맷자락을 휘둘러 채석도의 흑살수를 어렵지 않게 틀어막은 다음 그의 앞가슴을 향해 빠른 주먹을 내질렀다.

“이게 무엇인지 알아보겠느냐?”

손풍은 또 얻어맞는구나 하고 반쯤 체념하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낙일방이 눈에 익숙한 초식으로 채석도의 공격을 막고 반격을 가하자 눈을 크게 치켜떴다.

“금강서벽……, 그리고 낙성연적!”

낙일방이 펼친 것은 손풍도 잘 알고 있는 장괘장권구식 중의 금강서벽과 낙성연적이었다. 손풍도 오늘 몇 번이나 이 두 초식을 펼친 적이 있었으나, 별반 효과를 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낙일방의 손에 펼쳐지자 채석도의 날카로운 공격이 봉쇄당하며 오히려 매서운 반격을 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채석도는 눈앞의 상대가 강호의 명성이 자자한 옥면신권임을 알게 되자 더 이상 방심하지 못하고 몸을 옆으로 비틀어 주먹을 피한 다음 틀었던 허리를 되돌리며 팔꿈치를 휘둘렀다. 손풍과 싸울 때는 보여주지 않던 무섭도록 살벌한 공격이었다.

낙일방은 내뻗었던 주먹을 슬쩍 거두어들이며 손바닥을 활짝 폈다.

채석도의 무서운 팔꿈치 공격이 손바닥에 가로막히자 낙일방의 손이 가볍게 흔들렸다. 여섯 번의 미묘한 움직임이 이어지며 채석도가 뒤로 몇 걸음 격퇴되었다.

“조운육환…….”

손풍이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조운육환에 저런 오묘한 변화가 있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된 손풍이었다. 손풍이 멍하니 보고 있는 동안에 두 사람은 다시 맹렬하게 초식을 교환했다.

채석도는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무섭도록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을 펼쳤으나, 낙일방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쩔쩔매며 뒤로 몰리고 있었다. 낙일방이 사용하는 초식들은 모두 장괘장권구식 상의 무공들이었는데, 그 단순했던 초식들이 그의 손에 펼쳐지자 세상에 둘도 없는 절학으로 탈바꿈되었다.

지금도 채석도가 전력을 다해 펼친 흑살수의 절초인 투살망혼(透煞亡魂)을 낙일방은 삼환투일로 봉쇄하며 오히려 오강감계의 식으로 반격을 가해 채석도를 다시 두 걸음 물러서게 했다.

채석도는 사력을 다해 낙일방에 대항했으나 초식을 교환할 때마다 조금씩 후퇴하여 종내에는 배의 가장 구석진 곳까지 물러서게 되었다.

등 뒤로 몇 걸음만 물러서면 배에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달은 채석도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갈등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옥면신권을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안 채석도가 이대로 배에서 뛰어내려 몸을 피할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그의 고민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 낙일방의 초식이 갑자기 변화되어 빠르고 맹렬한 주먹으로 아랫배를 찔러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섭도록 빠른 공격이었다.

그것이 오늘 몇 번이나 보았던 손풍의 천성탈두와 같은 초식임을 깨닫기도 전에 채석도는 양 손을 교차하여 자신의 아랫배에 갖다 대었다.

팡!

덕분에 간신히 아랫배를 가격당하는 참변은 면할 수 있었으나 주먹이 손등을 강타하는 충격에 그의 몸이 살짝 허공에 뜨고 말았다. 공중에 몸이 떠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낙일방의 손이 기묘한 각도에서 휘어져 그의 앞가슴으로 다가왔다. 채석도로서는 그저 멍하니 그 손이 다가오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쾅!

“크악!”

정면으로 가슴 부위를 강타당한 채석도가 입으로 폭포수 같은 피를 흘리며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이것이 바로 장괘장권구식 중의 단봉조양이다.”

낙일방의 조용한 음성이 채석도가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손풍은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던 채석도의 처참한 모습에 입을 반쯤 벌린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장괘장권구식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펼쳤는데도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공격을 격중 시키지 못해 장괘장권구식에 대한 회의감에 사로잡혀 있던 손풍으로서는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커다란 놀라움과 함께 어떤 뿌듯함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익힌 무공이 이런 것이었구나.’

퉁퉁 부어올라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낙일방을 바라보던 손풍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정말 잘 보았습니다, 낙 사숙.”

낙일방은 손풍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노력하면 머지않아 너도 장괘장권구식의 묘용을 제대로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낙일방은 그의 어깨를 한 차례 두드려준 후 몸을 돌렸다. 존경에 가득 찬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손풍은 이내 채석도가 쓰러진 곳으로 다가갔다.

채석도는 가슴뼈가 움푹 꺼져 들어간 비참한 몰골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손풍은 그를 내려다보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예전이었다면 네놈 시체에라도 분풀이를 했겠지만, 그건 나중에 좀 더 제대로 된 놈들에게 써먹도록 하겠다. 난 당당한 종남파의 제자이니 말이다.”

손풍은 아무도 안 보는 틈에 자신을 그토록 두들겨 팼던 채석도의 오른손을 지그시 눌러 밟고는 이내 대범한 모습으로 몸을 돌렸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낙일방은 동중산을 향해 물었다.

“사저의 모습이 안 보이군요.”

동중산의 얼굴에는 평소의 그답지 않은 난처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사고께선 전 사숙을 도와주러 가셨습니다.”

“전 사형을 도와주러 가다니? 어디로?”

묻던 낙일방이 묘한 표정으로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 강물 위를 한 마리 제비처럼 표표히 질주하고 있는 한 명의 여인을 발견한 것이다.

수상비(水上飛)는 흔히 볼 수 없는 상승의 경공(輕功)이지만, 그렇다고 천하에 다시없는 개세절학도 아니었다. 하나 지금 낙일방이 보고 있는 것처럼 물 위를 마음대로 달릴 수 있는 것은 수상비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무공이라도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낙일방은 안력을 돋우어서야 그 여인이 신형을 날릴 때마다 강물 위에 둥근 원반 같은 물체를 던져서 그 물체를 밟고 지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물체는 기이하게도 밟고 지나간 다음에 다시 그 여인에게로 되돌아와서 몇 번이고 재차 사용할 수 있었다.

“사저가 사용하는 게 뭐죠?”

대답은 동중산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나왔다.

“연자귀소방(燕子歸巢方)이라는 것이오. 예전에 수전을 연구했을 때 심심풀이삼아 만들어본 것인데, 물 위를 달리기에는 제법 효용이 있는 것 같아서 임 소저께 전해 드렸소.”

말을 한 사람은 이정문이었다.

낙일방은 그를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물 위를 질주하는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주 신기한 걸 만드셨구려.”

“별로 대단한 건 아니오. 물의 부력과 밟고 지나갈 때의 반동을 이용해서 다시 되돌아오게 만든 것인데, 보기에는 그럴듯해도 이론 자체는 단순한 것이오.”

하나 그의 말과는 달리 낙일방은 연자귀소방이 그리 단순한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강호상에서 아직도 그런 물건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과연 재주가 놀랍소. 그런데 사저께서 왜 갑자기 배 밖으로 나가실 생각을 하게 된 거요?”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소. 다만 임 소저께서 한동안 강물을 물끄러미 쳐다보시더니 나에게 물 위를 움직일 수 있는 기물이 있느냐고 물으셨소.”

“그래서 사저께 그걸 드린 거요?”

“그렇소. 제법 쓰임새가 있을 것 같아 강을 건널 때면 늘 소지하고 있었소.”

“사저께서 어떻게 알고…….”

이정문의 메마른 얼굴에 한 줄기 웃음이 떠올랐다.

“아마 내가 제법 재주가 있는 놈이니 그 정도 대책은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 게 아닌가 하오.”

낙일방의 얼굴에도 쓴웃음이 떠올랐다. 자신 같아도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때 낙일방이 무엇을 보았는지 눈을 빛내며 나직한 신음성을 흘렸다.

“음……!”

중인들 또한 하나같이 눈을 크게 뜬 채 경호성을 터뜨렸다.

그들이 본 것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물 위를 그림처럼 질주하던 여인이 섬섬옥수를 들어 아래로 내려치는 광경이었다.

전흠은 심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물속에 들어온 지도 상당한 시간이 경과되었다. 제아무리 수공의 달인이라고 해도 아주 숨을 안 쉬고 물속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물 위로 올라가서 숨을 가다듬어야 하는데, 지금의 그에게는 그럴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숨을 쉰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상황이 예상한 대로 흘러갔었다. 예전 위수에서 흑갈방의 무리들과 싸웠을 때는 자기 혼자였고, 지금은 이정문의 수하 두 명이 함께 하고 있다는 점 외에는 별다른 차이점이 없어 보였다.

이정문의 수하들은 자신에 별반 뒤지지 않는 수공의 고수들이어서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고, 은근히 염려했던 장강십팔채 무리들의 수공도 눈에 번쩍 뜨일 만큼 대단하지는 않아서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자신에 못지않은 수공을 지닌 자들이 하나 둘씩 가세하더니 나중에는 제대로 숨 쉴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거센 공격이 몰아치고 있었다. 전흠은 몰랐지만 뒤늦게 합류한 자들은 혈염조의 일조(一組) 고수들로, 방산동이 직접 수공을 가르친 실력자들이었다. 아마 이정문의 수하들이 때맞춰 돕지 않았다면 전흠으로서도 상당히 힘든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그럭저럭 견뎌내던 전흠이 감당하기 힘들다고 느낀 것은 웃통을 벗은 채 짧은 반바지만을 걸친 사내가 나타나면서부터였다. 그자의 수공은 어려서부터 물을 벗 삼아 살아온 자신으로서도 처음 보는 뛰어난 것이었다.

‘이자가 바로 방산동이구나!’

전흠은 직감적으로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방산동이 아니고서야 물속에서 이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자가 존재할 리 없었다. 그의 움직임은 정말로 매끄럽고 유연해서 물 밖에서 행동하는 것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 물속의 압력과 물의 저항을 어찌 그리 자연스럽게 헤치고 나아갈 수 있는지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수중에 팔뚝만 한 길이의 칼 한 자루만을 지닌 그의 공세가 다른 어떤 고수들의 합공보다도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그자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전흠을 거의 농락하다시피 했는데, 전흠은 사력을 다해 그의 공세를 막으려 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세 군데에나 상처를 입고 말았다. 뻔히 날아드는 칼날을 보면서도 제대로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해남에서도 수공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전흠으로서는 그야말로 치욕스러운 일이었으나, 그는 상대의 수공이 자신의 그것보다 훨씬 뛰어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의 도법은 비록 날카로웠으나 육지에서라면 충분히 싸워볼 만한 수준이었다. 하나 물속에서의 싸움은 무공의 고하(高下)보다는 수공의 우열로 판가름 나는 법이기에 전흠은 점점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차례 칼날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전흠은 사력을 다해 몸을 비틀어 간신히 치명적인 일격은 벗어났으나 옆구리가 베어져 또다시 핏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의 몸 주위에는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핏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칼날도 무서웠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점점 숨이 차올라 숨쉬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이었다. 상대도 이를 알고 있는지 전흠이 위로 몸을 움직이려는 것을 교묘하게 막고 있어서 전흠은 도저히 물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점점 숨이 가빠지자 몸은 느려질 수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상대의 공세를 막아내기가 힘들어졌다. 그의 위기를 알아차린 이정문의 수하들이 도와주기 위해 무리해서 접근하려다 오히려 혈염조의 고수들에게 상처를 입고 쫓기고 있었다.

어디를 봐도 전흠이 살아날 곳은 보이지 않았다.

전흠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암담한 절망감이 떠올랐다.

‘아! 물을 좋아하는 자가 물에 빠져 죽고, 말을 잘 타는 자가 말에서 떨어진다(善水者溺, 善騎者墮)고 하더니 내가 바로 그 짝이군. 수공을 믿고 설치다가 물속에 빠져죽게 될 줄이야…….’

차라리 마음껏 검을 휘두르다 상대에게 패해 쓰러진다면 억울하지도 않을 것이다. 방산동이 무림 최고의 수공 고수였던 수룡신군 황충의 제자라는 말은 들었지만, 자신의 수공이 그와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은 추호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무리 방산동이라도 수공이라면 한 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고, 무공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자신이 있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는데 완전히 예상과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방산동의 얼굴에 살기 어린 빛이 떠오르더니 그의 칼이 묘한 회전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물속에서 칼날이 저렇게 회전하면 물의 압력 때문에 느려질 수밖에 없는데, 어찌 된 일인지 방산동의 칼은 육지에서와 전혀 다름없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을 본 전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그 일도(一刀)를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절감한 것이다.

‘이대로 죽지는 않겠다!’

전흠은 상대의 팔 한쪽이라도 잘라낼 생각으로 수비를 도외시한 채 상대의 왼팔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바로 그때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거대한 압력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물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는 느낌만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 느낌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전흠은 물론이고 방산동 또한 내밀던 손을 거두어들이며 황급히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콰아아아……

그들 사이의 공간이 무섭게 회오리치는 소용돌이로 변해 버렸다. 그들의 움직임이 조금만 늦었어도 그 소용돌이 속에 갇혀 버렸을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전흠이 놀란 눈을 부릅뜰 때, 방산동이 무언가를 느낀 듯 압력이 가해진 위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물 밖으로 나온 방산동이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명의 여인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물 위를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풍성하게 틀어 올린 머리 한쪽에 꽂혀 있는 봉황 문양의 비녀 하나가 양광을 받아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방산동의 눈에 괴이한 광망이 이글거렸다.

“흐흐. 나를 유인하겠다고? 그것도 좋지.”

방산동은 전흠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그녀가 달려가는 곳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뒤늦게 물 밖으로 올라온 전흠은 몇 차례나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이 광경을 보고 눈에 불을 켰다.

“저놈이 감히…….”

그도 곧 방산동을 따라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하나 물속에서의 움직임은 그가 도저히 방산동을 따라갈 수 없었다. 방산동의 속도는 물 위에서 신형을 날리는 임영옥과 비슷한 정도였다.

전흠이 채 반도 따라가기 전에 두 사람의 신형은 강변에 도착하더니 이내 차례로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전흠은 이를 부드득 갈며 전력을 다해 그쪽으로 헤엄쳐갔다.

강변에 도착했을 때는 천하의 전흠도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릴 수밖에 없었다.

“후읍…… 후읍!”

몇 차례 심호흡을 한 전흠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그들이 들어간 숲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숲은 의외로 깊어서 무작정 안으로 뛰어든 전흠은 곧 종적을 잃고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숲으로 뛰어들 때만 해도 쉽게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디에도 인기척은 보이지 않았고 울창한 수림만이 눈앞에 가득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전흠은 눈에 불을 켜고 풀잎이 누운 곳이나 나뭇가지가 부러진 곳이라도 있지 않을까 찾아보았으나, 우거진 수풀 속에서 그런 것을 찾는다는 것은 전문적으로 추적술을 배운 고수 외에는 힘든 일이었다.

전흠의 얼굴에 걱정스런 빛이 가득 떠올랐다. 임영옥이 어떻게 자신의 위급함을 알아차리고 방산동을 유인해 갔는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방산동의 추적을 쉽게 뿌리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방산동의 수공도 무서웠지만, 물속에서 상대해본 그의 도법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흠이 임영옥을 처음 본 것은 구궁보에서였다. 그동안 주위 사람들에게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에 전흠은 내심 기대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녀가 장문인보다 더 뛰어난 고수였다는 말에 호기심과 기대감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직접 만나본 그녀는 차분하고 조용한 미녀일 뿐이었다. 전흠이 막연하게 기대했던 뛰어난 여고수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쩌면 종남파에도 비로소 제대로 된 여고수를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이 깨어지자 전흠은 그녀에 대한 관심을 접어버렸다.

그 뒤로 구궁보를 떠나 이곳까지 여행하는 동안 그녀는 전혀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그녀가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작은 희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전흠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생각조차 거두어들이게 되었다.

다만 그녀로 인해 장문인의 마음이 안정되고 얼굴에 간혹 웃음기가 감돌게 된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녀의 존재가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서 그녀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으니, 지금 전흠의 심정은 그 자신도 알지 못할 정도로 복잡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물속에서 느꼈던 그 강력한 압력이 그녀의 솜씨라면 그녀는 실로 가공할 실력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리라.

그런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왜 그동안 단 한 번도 무공을 펼치지 않았을까? 심지어 계마구에서 습격을 당했을 때도 그녀는 뒤에서 수수방관하다시피 하고 있지 않았는가? 그리고 구궁보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다던 그녀는 어떻게 그런 뛰어난 무공을 익히게 된 것일까?

여러 가지 의문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와중에도 전흠은 그녀와 방산동의 행적을 찾아 숲속을 미친 듯이 뒤지고 다녔다.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방산동에게 변이라도 당한다면 자신이 무슨 얼굴로 장문인을 볼 수 있겠는가?

정신없이 숲을 헤치고 나아가던 전흠의 귀에 문득 나직한 폭음이 들렸다.

쿠웅!

폭음은 둔중했으며 그리 크지 않아서 전흠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았다면 그냥 스쳐지나갔을지도 몰랐다. 전흠은 정신이 번쩍 들어 황급히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유난히 우거진 두 개의 커다란 나무 사이를 지나자 시야가 탁 트이며 눈앞에 공터가 펼쳐졌다. 그 공터의 한쪽에 한 여인이 그림처럼 고운 자태로 조용히 서 있었다. 전흠은 그 여인을 보고는 전력을 다해 그쪽으로 달려갔다.

“임 사저!”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반가움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동안 그녀 앞에서 사저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는데, 멀쩡한 모습으로 있는 그녀를 보니 너무도 기쁜 마음에 절로 입 밖으로 사저라는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 상념에 잠겨 있다가 그가 나타난 것을 알고는 몸을 돌렸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전흠은 그녀의 몸부터 살폈다.

그녀는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해준 덕분에 무사해요.”

“다행입니다. 방산동은……?”

“그는 두 번 다시 수적질을 할 수 없게 되었어요.”

“예?”

임영옥은 슬쩍 한 쪽을 쳐다보았다. 무심코 그녀가 바라본 곳으로 시선을 돌린 전흠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오 장쯤 떨어진 바닥에 한 사람이 비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것이다.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전흠은 그자가 바로 방산동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무시무시한 수공의 고수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누워 있는 광경은 눈으로 보고도 쉽게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방산동은 웃통을 벗고 기름 바지를 입은 상태에서 한 손에는 여전히 기형도를 굳게 쥐고 있었다. 눈만 감지 않았다면 잠시 쉬고 있거나 잠을 자고 있다고 착각할지도 몰랐을 것이다.

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전신에서는 단 한 줌의 온기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가슴은 마치 불에 그슬린 것처럼 거무스름한 빛을 띠고 있어서 조금 괴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장강 일대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던 장강의 패자치고는 너무도 허무한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전흠은 몇 번이나 그의 시신을 확인하고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지 눈을 치켜뜨며 임영옥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사저께서 방산동을…….”

“그는 너무 방심했어요.”

“하지만…….”

“피곤하군요. 그만 돌아가도록 하지요.”

그녀가 교구(嬌軀)를 돌리자 전흠은 한동안 멀거니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아무리 방심했다고는 하나 방산동 같은 고수가 그토록 짧은 순간에 이런 꼴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 하나 그렇다고 굳이 말하지 않으려는 그녀에게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없지 않은가? 많은 의문이 떠올랐으나 전흠은 우아한 동작으로 몸을 날리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나 방산동의 시신을 돌아보던 전흠이 그녀와 함께 사라지자 텅 빈 장내에는 차갑게 식은 한 구의 시신만이 남게 되었다.

휘잉!

한 차례 서늘한 강바람이 불자 다시 장내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두 사람 모두 여인이었는데, 한 명은 눈부신 백의를 입은 미녀였고, 다른 한 명은 노란 옷을 입은 깜찍한 용모의 젊은 여인이었다. 두 여인은 날렵한 동작으로 방산동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아!”

방산동의 시신을 확인한 황의 미녀의 입에서 짤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백의 미녀는 그보다는 훨씬 침착한 모습으로 방산동의 시신을 가만히 살펴보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손을 내밀어 방산동의 검게 타들어간 가슴 부위 피부를 만져 보았다. 유독 그 부분에서 유난히 차가운 기운이 손끝에 느껴지자 그녀는 가벼운 탄식을 토해냈다.

“그녀는 결국 그 무공을 사용하고 말았구나.”

황의 미녀가 황급히 물었다.

“정말이에요? 하긴 그렇지 않으면 방산동을 이런 꼴로 만들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요?”

백의 미녀는 복잡한 표정으로 허공을 올려보았다.

“언젠가는 이렇게 되리라는 걸 너도 알고 있지 않았느냐? 다만 그 시기가 너무 빠르구나. 그녀는 과연 감당할 자신이 있는 것일까?”

“이미 벌어진 일인데 어쩌겠어요? 그나저나 여섯째와 일곱째 언니는 어디서 만나기로 했어요?”

“왜? 옆에 있을 때는 그렇게 싸우더니 보고 싶은 거냐?”

황의 미녀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착한 여섯째 언니야 보고 싶지만, 그 성질머리 사나운 일곱째 언니는……. 흥! 그동안 무공 익힌다고 좁은 연공실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필시 사나운 암호랑이같이 되어 있을 텐데 만나고 싶겠어요?”

백의 미녀의 고운 얼굴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도 근 일 년 만의 만남이니 나는 기대가 되는구나.”

“사저야 그녀를 귀여워했으니 그렇지만 다들 그녀와의 재회를 꺼려할 거예요. 그나저나 여섯째 언니는 이번에 틀림없이 그 멀겋게 생긴 놈을 만나게 되겠지요?”

황의 미녀가 무언가 재미있는 일을 생각해 낸 것처럼 두 눈을 유난히 반짝거리며 입을 조잘거리자 백의 미녀는 그녀의 머리를 살짝 두드렸다.

“말 함부로 하지 마라. 그는 당금 무림에서 제일가는 신성(新星)으로 인정받는 절정 고수다.”

“피! 그래봤자 예전에는 내 손에 두들겨 맞던 놈이었는데…….”

“그 일을 그가 앙갚음하겠다고 나서면 감당할 자신이라도 있는 거냐?”

황의 미녀는 혀를 날름거렸다.

“그 허우대만 멀쩡한 녀석이 그럴 리도 없겠지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여섯째 언니 뒤에 숨으면 제깟 놈이 어쩌겠어요?”

백의 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심보를 그렇게 쓰다가는 언제고 한 번 호되게 당할 날이 있을 것이다.”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다고요.”

“어련하겠느냐? 그나저나 걱정이로구나.”

백의 미녀의 얼굴에 수심이 깃들자 황의 미녀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큰언니는 둘째 언니의 일을 염려하는 거죠? 하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해요. 그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백의 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게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겠지.”

그녀들은 한동안 이런저런 말을 나누다가 이내 몸을 날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두 여인이 떠난 후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다시 한 사람이 장내에 나타났다.

이번에 나타난 사람은 이마에 하얀 두건을 쓰고 짙은 청삼을 입은 반백의 노인이었다. 주름살 가득한 노인의 두 눈에는 날카로운 빛이 번쩍거렸고, 두 팔이 유난히 길어서 허리 아래까지 늘어져 있었다.

청삼 노인은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천천히 공터를 둘러보더니 이내 방산동의 시신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방산동의 싸늘하게 식은 얼굴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청삼 노인은 가볍게 혀를 찼다.

“이놈은 늘 물속에서는 적수가 없다고 큰소리치더니 결국 이렇게 됐군. 자신이 물 밖에 끌려나온 물고기 신세가 되어 죽게 되리란 걸 상상이나 했을까?”

그의 시선은 방산동의 얼굴에서 검게 그을린 가슴팍으로 향했다. 그 흔적을 본 청삼 노인의 시선이 유난히 강렬하게 반짝거렸다.

청삼 노인은 쭈그려 앉은 채 시신의 가슴 부위를 유심히 살피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묘하군. 흔적을 보면 강력한 열양공(熱陽功) 같은데 오히려 음한지기에 심맥이 얼어붙은 것이 직접적인 사인(死因)이라니……. 이놈은 방심하고 있다가 제대로 칼도 휘둘러보지 못하고 당한 것 같은데, 강호에 이토록 상반된 기운을 담을 수 있는 무공이 존재했던가?”

청삼 노인은 한동안 생각에 골몰해 있다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왠지 쉽지 않은 일이 될 것 같군. 어쩐지 이놈이 일을 맡겠다고 나설 때부터 내키지가 않더라니. 혹시나 하여 이쪽으로 와 본 게 그나마 다행이구나.”

청삼 노인은 방산동의 시신을 한 손에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구인 방산동이지만 청삼 노인은 전혀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지 가벼운 몸놀림으로 숲속을 벗어나 한수 강변으로 갔다.

청삼 노인은 방산동의 시신을 강물로 떠내려 보냈다.

“물을 좋아하는 놈이니 물고기 밥이 되어 물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최후겠지. 지옥에서 네 사부를 만나면 전해라. 다음 생(生)에는 물 밖으로 나와서 사람답게 살라고 말이다.”

청삼 노인은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 조금씩 물속으로 가라앉는 방산동의 시신을 지켜보다가 그의 몸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나저나 둘 중 어느 걸 먼저 해결해야 하나? 한쪽을 따라가다 보면 둘 다 자연히 만나게 되려나.”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청삼 노인의 신형은 허공을 훌훌 날아 수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유난히 푸른 한수의 물살만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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