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8권 열한기공(熱寒奇功)편 : 7화
제 288장 불망만산(不忘萬山)
사여명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은 그의 거처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내실이었다. 외인은 절대로 들어올 수 없을 뿐 아니라 강북녹림맹의 고수라도 허락을 받기 전에는 함부로 출입을 할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가 외출준비를 마치고 차나 한잔 마시려고 들어왔더니 이미 한 사람이 방 안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무례하게도 방의 중앙에 있는 그의 전용 의자에 편한 자세로 앉은 채 시비가 가져다 놓은 차까지 따라 마시고 있었다.
사여명은 한동안 멀거니 그 사람을 쳐다보고 있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신은 언제 왔소?”
그 사람은 얄밉도록 맛있게 차 한 모금을 들이켜고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조금 되었네. 자네가 나갔으면 어쩌나 하고 서둘렀더니 조금 일찍 오게 되었네.”
“미리 알리지 그랬소.”
“이 얼굴로 말인가? 내가 이른 아침부터 강북녹림맹의 총표파자를 찾아왔다는 게 알려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은가?”
사여명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듯 입을 다물었으나 표정은 여전히 풀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은 다시 조용히 웃었다.
“방주인의 허락도 없이 미리 들어와 있다고 언짢아하지 말게. 내가 자네를 찾아온 이유를 알게 되면 자네는 오히려 나에게 고맙다고 절이라도 하게 될 걸세.”
“그 이유라는 게 뭔지 들어봅시다.”
“자네는 지금 신검무적을 만나러 나갈 계획이었지 않나?”
“그렇다고 해둡시다.”
“그럴 필요가 없네.”
사여명의 눈에 처음으로 예리한 섬광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자세히 말해 보시오. 내 허리는 워낙 단단해서 쉽게 구부러지지 않으니 말이오.”
그 사람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맛을 다셨다.
“정말 좋은 차로군. 이런 차를 혼자서만 마시다니 자네는 욕심이 많은 사람일세.”
“나갈 때 좀 싸드리겠소.”
“그러면 나야 고맙지.”
“이제 찻값을 좀 받아야겠소. 내가 신검무적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는 게 무슨 뜻이오?”
“찻값으로 절값을 대신하겠다고? 그건 내가 좀 손해 같지만 양보하기로 하지.”
그 사람은 손 안에 든 차를 모두 마신 후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말처럼 짤막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천살령주가 왔네.”
사여명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그가 이 근처에 왔다는 말이오?”
“그러네.”
“그는 자신의 거처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소? 당신이 몇 차례 부탁을 해도 들어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말을 들은 적이 있던 것 같은데.”
“그 말은 잊어버리게. 내가 부른다고 올 사람도 아니었는데, 일을 좀 편하게 할 욕심에 내가 무리를 했던 거지. 아무튼 그가 무거운 엉덩이를 털고 이쪽으로 움직였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그런 것이오?”
“영주가 움직이는 경우는 단 두 가지뿐일세. 첫째는 당주(黨主)의 부탁이 있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한 살인청부를 받았을 때겠지. 그렇다면 그는 살인청부를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란 말이오?”
“두 가지 모두일세. 그러지 않았다면 그가 직접 움직일 리가 없었겠지.”
“당주의 부탁이라면 그 물건에 대한 것이겠구려.”
“당주는 방산동의 힘으로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모양일세. 상황을 보니 그의 예측이 정확히 들어맞은 셈이더군.”
사여명은 냉소를 흘렸다.
“정말 그가 예측을 잘했다면 처음부터 방산동에게 그 일을 맡기지 않았을 거요.”
“그거야 방산동이 고집을 부린 것이고. 그가 고집 피우면 그걸 꺾을 수 있는 사람은 황충이 유일한데, 황충이 없으니 아무리 당주라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지 않겠나?”
사여명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살인청부의 대상이 누구냐는 것인데, 설마 그가 이곳으로 온 것이 신검무적을 상대하기 위함이란 말이오?”
“신검무적이 아니라면 특급살수들을 보냈겠지.”
“대체 누가 감히 신검무적을 대상으로 그런 청부를 한 거요?”
“자네가 예상하고 있는 그곳이라고 해두세.”
“내가 예상한 곳이 어디인 줄 알고…….”
“그렇게만 알고 있게. 다른 사람의 일에 필요이상의 관심을 두거나 관여하지 않는 게 우리 사이의 불문율 아닌가? 이 정도 말해주는 것도 자네이기 때문일세. 생각해 보니 찻값을 너무 과하게 치른 것 같군.”
“그가 먼저 내 일에 끼어든 건 아니고?”
“자네의 목적은 신검무적이 아니라 유중악 아니었나? 천살령주가 일을 마친 다음 자네가 그 건을 해결하면 아무 문제 없을 걸세.”
“천살령주가 신검무적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려.”
그 사람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천살령주도 그렇게 믿고 있을 걸세. 그러니 기꺼이 청부를 맡은 것이지.”
사여명은 그의 말에 갑자기 관심이 생긴 듯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일전에 신검무적을 상대한 적이 있다고 들었소. 신검무적이 정말 그렇게 대단한 고수요?”
그 사람의 얼굴에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이 떠올랐다.
“단순히 대단하다는 말로는 그를 제대로 묘사할 수가 없네. 그는 이제껏 내가 본 중에서 최고의 검객일세. 솔직히 그때 내가 본 실력을 다 발휘했다 하더라도 그를 당해내지는 못했을 걸세.”
사여명은 눈앞의 이 사람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의 실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그의 이런 모습이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당신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군. 그런데도 천살령주가 그를 상대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한단 말이오?”
“신검무적은 확실히 검으로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지만, 반면에 몇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네.”
“그게 뭐요?”
“당시에 그는 신기에 가까운 검술로 양천해를 물리쳤네. 하지만 뒤이어 펼쳐진 소수마후의 선녀호접표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지.”
사여명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암기 무공에 약점이 있군.”
“뿐만 아니라 쾌검술에 대한 대응도 서툰 편이네. 일정 수준 이상의 쾌검을 지닌 고수가 상대한다면 신검무적은 뜻밖의 낭패를 당할지도 모르네.”
“그리고 또 있소?”
“신검무적의 나이가 아직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니 강력한 내공의 고수를 만나면 밀릴 가능성도 있네.”
사여명은 그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의 내공도 심후하기로 정평이 나 있지 않소?”
그 사람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 정도로는 안 되네. 이미 내가 신검무적에게 어떤 꼴을 당했는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 아픈 곳을 들쑤실 텐가?”
“당신보다 심후한 내공의 소유자는 강호에도 몇 사람 없을 것 같아서 말이오.”
“많지야 않지. 하지만 나는 내공만으로 신검무적을 능히 상대해볼 만한 고수를 적어도 다섯 사람은 알고 있네.”
“그중 몇 사람은 나도 알겠군. 하지만 한두 명은…….”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신검무적은 비록 검으로는 강호제일을 논(論)할 만하지만 아직은 약점이 제법 있어서 충분히 공략 가능한 존재라는 것일세.”
“그리고 천살령주라면 능히 그 약점을 찌를 수 있을 테고 말이오.”
“그렇지. 그중에서도 가장 확연하게 드러난 약점이지. 내가 겪어본 바로는 신검무적은 절대로 천살령주를 당해낼 수 없네. 그러니 자네는 공연히 신검무적을 상대하느라 심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그걸 알려주려고 꼭두새벽부터 자네를 찾아온 것일세. 이제 왜 자네가 내게 고마움을 느껴야 하는지 알겠나?”
“그 값은 차로 치르기로 하지 않았소?”
“왠지 조금 아쉬워서 말일세. 자네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는데, 내가 너무 헐값에 판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지.”
“나중에 당신 일을 한 번 도와주겠소.”
그 사람은 반색을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조만간 자네에게 신세를 갚을 기회를 주겠네.”
“무당산에서 말이오?”
그 사람은 빙긋 웃었다.
“자네가 짐작한 대로라고 해두지.”
이어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부터 찾아왔는데 반겨주어 고맙네. 차는 잘 마셨네.”
사여명은 방의 한쪽에 있는 문갑을 열고 차 한 봉지를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소. 그나저나 그 얼굴로 나갈 생각이오?”
그 사람은 차를 품에 집어넣었다. 다시 꺼낸 손에는 복면 하나가 들려 있었다.
“구름 밖에서 잠깐 노닐었으니 다시 구름 속으로 들어가야지.”
그 사람은 능숙한 솜씨로 복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건장한 체구의 그가 검은 복면을 쓰자 왠지 모를 위압감이 풍겨 나왔다.
“어떤가? 내 모습이?”
사여명은 그와 농담을 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는지 심드렁한 음성으로 말했다.
“구름 속의 신룡 같다고 해둡시다.”
“하하. 자네 말이니 믿도록 하지.”
그 사람은 슬쩍 오른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방 한쪽의 창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한 차례 바람에 실내를 휩쓸고 지나가는 순간, 그의 신형은 어느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사여명은 한 마리 신룡처럼 신묘한 몸놀림으로 사라진 복면인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허공을 응시한 채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한동안 묵묵히 허공을 올려보던 그는 이내 몸을 돌려 방을 벗어났다.
☆ ☆ ☆
주루는 제법 깨끗했다.
아직 식사시간이 되기에는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손님은 몇 사람 되지 않았고, 점원들만이 탁자를 닦거나 한쪽에 모여 자기들끼리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불회는 주루 앞에서 한 차례 주루 안을 둘러보고는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잠시 쉬어가기에는 괜찮아 보이는데, 진 장문인 생각은 어떠시오?”
“그렇게 합시다.”
진산월이 선뜻 고개를 끄덕이자 여불회는 기아향과 함께 자신들이 먼저 주루 안으로 들어섰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그동안 여불회는 줄곧 진산월에게 많은 신경을 기울였다. 사소한 일에도 그의 의향을 묻고는 해서 어떤 때는 다소 성가실 정도였다. 여불회의 강호에서의 명성이나 그간의 행적을 생각해 보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진산월에 대한 예우가 극진해서 진산월은 몇 번이나 편하게 대하라고 말했다.
그때마다 여불회는 ‘진 장문인은 우리 부부의 생명의 은인이니 이런 대우는 당연하다’며 정색을 해서 진산월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자기보다 한참 연상의 선배고수가 격식을 차리는 것도 불편했지만, 그가 선사의 친우인 곽자령과 친분이 있는 사이여서 더욱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여불회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마 진산월이 일파의 존주가 아니었다면 여불회도 그를 친우의 아랫사람으로 대하며 편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당당한 한 문파의 우두머리이며, 지금 그들이 가는 곳은 무림의 큰 집회가 열리는 무당산이었다. 이곳에서 종남파는 이십여 년 전의 수치를 씻어야 하며, 구대문파로의 복귀를 매듭지어야 한다. 종남파로서는 실로 문파의 중흥을 결정짓는 중대한 무대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무대에서 자신부터 그를 존중해주어야만 다른 사람들도 진산월을 존중한다는 생각에 여불회는 나름대로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일행은 단지 네 명뿐으로, 여불회 부부와 진산월, 그리고 유중악이었다. 인원은 많지 않았으나 그들의 정체가 알려지면 주위가 온통 소란스러워질 정도로 그들 개개인의 면면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지금 주루 한쪽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는 그들을 특별히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불회는 이런 호젓한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지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웃었다.
“이 집의 국수가 그런대로 먹을 만하구려. 특히 국물이 마음에 드는데, 시간만 있었다면 마누라를 졸라서라도 만드는 방법을 배워오라고 시키고 싶을 정도요.”
기아향이 곱게 눈을 흘겼다.
“배우고 싶으면 당신이 배워요. 요새 누가 여자를 주방에 보내서 음식 배우게 해요?”
“왜? 내가 하라면 못할 것 같아? 나도 요리 잘해.”
“그럼 당신 혼자 남아서 국물 요리나 배우고 와요.”
여불회는 헛기침을 했다.
“나 혼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겠지만, 당신 혼자 청천을 데려가라고 할 수는 없지. 진 장문인도 계시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중악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난 괜찮으니 배우고 싶으면 얼마든지 남아 있다가 천천히 따라오게. 자네가 만든 국물요리를 맛볼 수 있다면 얼마쯤의 불편함은 충분히 참을 수 있네.”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다니까. 난 그냥 마누라가 해주는 음식이라면 뭐든 좋아.”
여불회가 질색을 하자 모두들 웃고 말았다.
유중악은 능자하가 억지로 먹인 영약 덕분인지 부쩍 상태가 좋아져서 혼자 거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어 있었다. 물론 아직 무공을 펼치거나 마음대로 운신하기는 힘들었으나, 반사(半死) 상태였던 예전에 비하면 기사회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다른 누구의 부축을 받지 않고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유중악 자신이 가장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실례하겠소.”
누군가가 그들이 있는 탁자로 다가왔다.
그는 이목구비가 제법 단정한 삼십 대 초반의 문사였다. 질 좋은 금의(錦衣)를 입고 머리에는 작은 관(冠)을 썼는데,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옷 입는 모양새가 뛰어나서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손에 작은 부채를 들고 있는 금의 문사는 습관적으로 부채를 접었다 펴며 여불회를 향해 빙긋 웃어보였다.
“여 대협 부부를 이곳에서 뵐 줄은 몰랐소. 두 분의 금슬은 여전히 좋아 보이는구려. 그동안 강녕하셨소?”
여불회는 그를 보더니 반색을 했다.
“아니 이게 누군가? 혁리 공자 아닌가?”
기아향도 그를 알고 있는지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다시 뵙는군요. 반가워요, 혁리 공자.”
“나는 두 분이 곽산으로 돌아가신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곳에 오신 걸 보니 무당산의 집회에 참석하실 의향인 것 같구려.”
여불회는 껄껄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하. 이번 집회는 비록 사 년 전의 무림대집회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 중요도는 오히려 더할지 모르는데, 이런 좋은 구경 기회를 우리가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나? 자네도 그래서 온 것이 아닌가?”
“맞는 말씀이오.”
금의 문사의 시선이 여불회 부부의 앞에 앉아 있는 유중악과 진산월을 차례로 향했다.
“앞에 계신 두 분은?”
여불회의 얼굴에 장난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자네가 한 번 맞혀보게. 자네는 제법 눈썰미가 좋다고 자신의 입으로도 말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거야 물건을 품평할 때나 그런 것이고, 여 대협의 친인 분들이시라면 강호의 명숙(名宿)들이실 텐데 내가 그런 분들께 실례를 범할 수야 있겠소?”
“어차피 소소한 도락일 뿐일세. 사람 몰라본다고 큰 흠이 되는 것도 아니니 주저하지 말고 실력을 발휘해 보게.”
“여 대협도 참 짓궂으시오. 그럼 염치불구하고 잠시 두 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소. 양해해 주시오.”
유중악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마음껏 보시오.”
금의 문사는 유중악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이윽고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강호 제일의 호한을 이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신창조화 의기천추’의 유 대협께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소주 혁리가의 혁리의(赫里蟻)라 합니다.”
금의 문사의 태도는 예의를 잃지 않으면서도 당당함이 어려 있어 은은한 격조마저 느낄 수 있었다. 유중악은 그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도 그를 향해 인사를 했다.
“이제 보니 혁리가의 이름 높은 대공자이셨구려. 그리고 ‘신창조화 의기천추’라는 말은 거두어 주었으면 하오. 신창은 부러지고 의기는 더렵혀졌으니, 그 말은 더 이상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소.”
말 못할 씁쓸함을 담고 있는 그의 음성에 금의 문사는 순간적으로 멈칫거렸으나 이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부러진 창은 다시 이으면 되는 것이고, 진정한 의기는 순간적으로 더럽혀질 수는 있어도 언젠가는 본연의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신창조화 의기천추’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유 대협을 꼭 뵙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뵙게 되니 아직도 유 대협에게는 그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군요.”
부드러운 가운데 진정이 담겨 있는 그 음성을 듣자 유중악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고마운 말씀이오. 혁리 공자가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장강의 홍수로 수재(水災)에 휩쓸린 난민들을 위해 거금을 풀어 그들을 구했다는 말을 듣고 나도 늘 한 번 공자를 만나고 싶었소.”
“모았던 용돈을 썼을 뿐입니다.”
“그게 은자 삼천 냥에 달해서, 덕분에 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구했다고 들었소.”
유중악이 거듭 칭송을 하자 금의 문사, 혁리의는 다소 계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어린 나이에 치기를 부렸을 뿐, 유 대협 같은 분께 칭찬을 들을 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때 혁리 공자가 가진 돈은 모두 삼백 냥에 불과했는데, 부친인 혁리 가주와 내기를 하여 모자란 돈을 벌었다고 하였소. 그 뒤로 사람들이 공자를 천금공자(千金公子)라고 불렀다고 하니, 어린아이의 치기치고는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니오?”
“그 일로 아버님에게 찍혀서 한 달 가까이 바깥출입을 금지당한 일만 기억에 남는군요.”
“겉으로 표현은 안 하셨어도 혁리 가주께서는 내심으로 흐뭇해하셨을 것이오.”
“아버님은 그렇게 마음이 넓은 분이 아니십니다.”
“내가 혁리 가주가 흐뭇해할 거라고 말한 건 혁리 공자가 남을 도와서가 아니라 자신을 이겼기 때문이오.”
혁리의는 유중악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버님을 잘 알고 계시는군요.”
“일전에 만난 적이 있었소. 그때 우연히 혁리가의 칠남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는데, 혁리 가주는 단 한 말씀만을 하셨을 뿐이오.”
“아버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첫째와 넷째 외에는 별 쓸모가 없다고 하셨소.”
혁리의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나, 중인들은 모두 그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밝아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혁리의는 혁리가의 대공자이고, 넷째 공자는 진산월이 일전에 만난 적이 있던 혁리공이었다. 강호에서 명성이 높은 용봉쌍이 중 반봉 혁리접은 둘째였고, 고룡 혁리당이 셋째였다. 그들 외에 세 사람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강호에 그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여불회가 신기한 표정으로 혁리의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참 재주가 용하군. 자네는 분명 청천을 처음 보았을 텐데도 어떻게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나?”
“유 대협이 여 대협과 비슷한 연배여서 당연히 두 분이 친구일 거라고 생각했소. 여 대협의 친구분들 중에서 저토록 고고한 기상을 풍기는 준수한 호남자는 언뜻 한 사람밖에는 생각나지 않더구려.”
여불회는 짐짓 우거지상을 지어 보였다.
“내 친구들이 하나같이 못생겼단 말이지? 내 친구들에게 꼭 전해주겠네.”
“하하. 모두 개성이 강한 분들이시니 그만큼 쉽게 알아볼 수 있다는 뜻이었소.”
“자, 이제 한 사람 남았네. 이분은 누구일 것 같은가?”
여불회가 진산월을 가리키자 혁리의의 표정도 한층 진지해졌다.
진산월은 그때까지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혁리의는 그를 볼 때부터 왠지 모를 중압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이를 보면 여 대협보다 한참 어림에도 불구하고 여 대협이 존칭을 한다? 전신에서 풍기는 기세나 여 대협의 행동을 보면 아무래도 일문(一門)의 존주이거나 일파의 우두머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정말 그란 말인가?’
혁리의는 진산월의 왼쪽 뺨에 나 있는 칼자국과 그의 허리춤에 매어진 용영검을 슬쩍 쳐다보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정체를 예상하자 자신도 모르게 절로 긴장이 되었던 것이다.
혁리의는 신중한 표정으로 진산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혹시 종남파의 장문인이신 신검무적 진 대협이 아니십니까?”
진산월은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혁리 공자의 안목이 놀랍구려. 내가 바로 진 모요.”
“강호제일검객을 뵐 수 있게 되니 정말 반갑습니다. 소주 혁리가의 혁리의입니다.”
혁리의는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여불회가 그 모습을 보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하, 나한테는 건성으로 인사를 하더니 지금은 아예 머리가 땅에 닿게 생겼군. 그렇게 사람 차별대우 하는 게 아니라네.”
혁리의는 진산월과 인사를 나누고는 빙긋 웃으며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새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는지 그의 행동에는 여유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차별대우가 아니라 그 사람에 맞게 대우해주는 것뿐이오. 여 대협과 나는 처음에 금전 관계로 만났으니 나도 거래처 사람을 상대하듯 편하게 대하는 것이고, 유 대협과 진 장문인은 여 대협의 소개로 알게 되었으니 좀 더 격식을 갖추었던 것이오.”
“그러니까 나는 거래처 사람이고 청천과 진 장문인은 고객이란 말이지? 이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여불회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기아향이 그의 팔을 슬쩍 꼬집었다.
“그냥 우리가 좋으니까 편하게 대한다는데 뭘 자꾸 파고들어요? 공연히 다른 사람 무안하게.”
“아얏! 이 마누라가 또 시작이네. 그만 좀 꼬집어. 그쪽 팔만 하도 꼬집혀서 옷 벗으면 그 부위만 시퍼렇다고.”
두 부부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미소 띤 얼굴로 보고 있던 혁리의가 돌연 정색을 했다.
“여 대협께서는 혹시 얼마 전에 넷째를 만나지 않으셨소?”
“그러네. 우연히 자네 아우를 만났는데, 모산도의 산장으로 초대를 해서 대접 잘 받았지. 그곳에서 진 장문인도 만나게 된 것일세.”
혁리의의 표정은 조금 전과는 달리 약간은 경직되어 있었다.
“넷째가 진 장문인도 초대를 했었단 말이오?”
“그러네. 나도 자네 아우의 재주가 참으로 용하다고 생각했지. 굉장한 분을 소개시켜주겠다고 해서 기대를 하기는 했는데, 설마 진 장문인까지 모셔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혁리의의 시선이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진 장문인께서는 넷째와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진산월은 혁리의의 태도가 조금 이상했으나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본 파와 남궁세가가 비무를 했을 때 혁리 공자가 남궁세가 쪽의 참관인을 했었소. 비무가 끝난 후 혁리 공자가 나를 찾아와 정식으로 초대를 하기에 산장으로 찾아간 것이오.”
“넷째가 먼저 진 장문인을 찾아갔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혁리의는 복잡한 표정이 담긴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불회는 그동안 혁리의를 몇 번이나 만났지만 이런 심각한 모습은 본 적이 없기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러나? 자네 아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여불회는 몇 년 전에 친구의 빚보증을 서느라 혁리의를 처음 만났었다. 당시 친구가 빌린 금액이 적지 않았지만 혁리의는 여불회를 믿고 순순히 돈을 지불했으며, 그 뒤로도 두 사람은 몇 차례 얼굴을 마주치면서 친분을 쌓게 되었다.
여불회는 혁리가의 대공자답지 않게 솔직담백하고 돈을 너무 밝히지 않는 그가 마음에 들었고, 혁리의 또한 강호인치고는 소탈하면서도 잔정이 많은 그를 좋게 보았다. 여불회가 혁리공의 초대를 순순히 응한 것도 혁리공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혁리의의 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혁리의는 한동안 상념에 잠겨 있더니 이윽고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여러분께 못난 꼴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이 일은 원래 말씀드리지 않으려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가 없군요.”
혁리의는 진산월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먼저 진 장문인께 사과와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 드릴 말씀에 너무 언짢아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한 마디도 듣지 않은 상태에서 무어라 말할 수는 없지만, 혁리 공자 본인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면 굳이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제 잘못이나 실수는 아니지만, 본 가에 얽힌 일이니 첫째인 저로서는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말씀해 보시오.”
“본 가의 가훈(家訓) 중에 ‘불망만산(不忘萬山)’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중인들은 혁리의가 갑자기 혁리가의 가훈을 이야기하자 어리둥절한 가운데 호기심이 일어났다.
혁리의는 ‘불망만산’의 가훈에 얽힌 사연을 말해주었다.
‘불망만산’의 ‘만산’은 심만산(沈萬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심만산은 명나라 초기의 강남제일 상인이었다. 그는 강서성 주장현(周莊縣)에 본거지를 두고 국내외에 무역업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하나 심만산의 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명 태조 주원장이 남경(南京)에 도읍을 정한 후 성벽을 쌓으려는 자금을 모집하게 되자, 사람들의 시선은 강남제일의 부자로 공인된 심만산에게 쏠렸다. 심만산은 통이 크게도 남경 전체 성벽의 삼분지 일을 쌓을 수 있는 홍무문(洪武門)에서 수서문(水西門)까지의 성벽건조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거금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 다음에 벌어진 일은 사람들의 예상을 더욱 빗나간 것이었다. 홍무제 주원장은 심만산의 거금 기부에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불같이 노해서 심만산을 머나먼 운남으로 귀양 보내 버렸던 것이다. 결국 심만산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변방의 유배지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죽을 때까지도 심만산은 자신이 왜 이런 벌을 받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 혁리가의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주원장은 일개 상인이 돈의 힘으로 자신의 앞에서 위세를 떠는 모습을 참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결국 상인의 한계였다.
그 이후 혁리가에는 하나의 불문율이 생겨났다.
-돈을 자랑 말며, 관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라.
혁리아는 종종 자식들에게 말하곤 했다.
“돈은 물과 같아서 너무 적으면 목이 말라 삶이 위태롭지만 반대로 너무 많으면 사람을 두렵게 한다. 또한 관은 불과 같아서 너무 멀면 추워서 얼어 죽지만, 너무 가까이해도 결국은 그 불에 타죽고 만다.”
혁리가의 사람들은 이 말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그것이 ‘불망만산’의 교훈이었다.
혁리의가 말도 꺼내기 전에 진산월에게 사과부터 하는 모습에 잔뜩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여불회는 의아함을 참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었다.
“자네의 말은 잘 들었네. 정말 인상 깊은 이야기로군. 그런데 그게 진 장문인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혁리의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본 가에게는 종남파가 곧 ‘관(官)’과 같소.”
“그게 무슨 말인가? 종남파가 관과 같다니?”
혁리의는 아직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묵묵히 앉아 있는 진산월을 힐끔 쳐다보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요. 종남파의 기세가 불과 같이 일어나고 있지만, 너무 가까이할 수도, 멀리할 수도 없는 존재라는 뜻이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혁리의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진산월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본 파의 기세가 대단하긴 하지만, 그만큼 주위에 강적들이 많으니 섣불리 다가갔다가는 그 여파에 휩쓸릴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말 아니겠소?”
혁리의의 얼굴에 한 줄기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진산월이 너무도 정확하게 그 의미를 꿰뚫어 본 것이다.
여불회는 그의 얼굴만 보아도 진산월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혀를 찼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될지 아닐지를 판단하고 사람을 사귄단 말인가? 이래서 상인들이란…….”
그의 얼굴에는 노여움의 빛이 가득했다.
“내가 자네를 잘못 본 모양일세. 나는 친구를 그런 식으로 사귀지 않네.”
여불회가 당장이라도 축객령(逐客令)을 내릴 듯하자 혁리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내 뜻이 아니라 본 가의 방침이었소. 그래서 내가 진 장문인께 미리 사과를 드린 것이고.”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이익의 유무로 사람을 사귀지 않는다는 건 여 대협도 잘 알고 있지 않소? 하지만 아무리 나라고 해도 아버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본 가의 방침을 멋대로 어길 수는 없소.”
그제야 여불회의 얼굴이 조금 풀리기는 했으나, 여전히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혁리공은 혁리 가주의 말을 어기고 나를 초대한 셈이구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거듭 진 장문인께 확인하려 했던 것입니다.”
혁리 세가에서 가주인 혁리아의 말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 철칙을 혁리공이 깼으니 혁리의로서도 쉽게 믿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왜 그런 일을 했다고 생각하시오?”
“넷째가 최근에 몇몇 강호인들과 너무 지나치게 가깝게 지내고 있어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들 중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을 겁니다. 아니라면…….”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그의 입을 향했다.
혁리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에게 무언가 다른 생각이 있었겠지요. 종남파나 진 장문인을 상대로 한…….”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느라 주위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한참 후에야 혁리의는 고개를 들고 진산월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진 장문인께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