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9권 절대암류(絶代暗流)편 :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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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9권 절대암류(絶代暗流)편 : 6화


제 297장 속문입파(俗門入派)

종남파가 머무르고 있는 청연각의 별실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먼동이 트자마자 한 떼의 사람들이 종남파로 찾아왔던 것이다. 그들은 다름 아닌 육천기를 비롯한 경요궁의 인물들이었다.

어제저녁에 진산월에게 미리 언질을 받았기에 동중산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들을 별실의 중앙에 있는 대청으로 안내했다. 덕분에 덩달아 이른 아침부터 바빠진 손풍은 연신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아니 이자들은 잠도 없나? 느긋하게 와도 될 걸 꼭두새벽부터 찾아오고 난리네. 그런데 이번에는 내 밑으로 새로 사제나 예쁜 사매라도 생기는 걸까?’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눈을 빛내며 들어온 인물들을 차례로 훑어보던 손풍의 얼굴이 이내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들어온 자들은 대부분이 삼십 대 이상의 칙칙한 남자들이었고, 심지어 자기보다 어린 사람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여인이 두 명 있기는 한데, 한 사람은 펑퍼짐한 체구의 중년 여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얼굴에 면사를 쓰고 있어서 알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전신에서 풍기는 기세가 만만치 않아 보여 말 한 마디 건넬 수조차 없었다.

입이 툭 튀어나온 손풍이 심통 사나운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을 때, 경요궁의 인물들 중 그나마 가장 나이가 젊어 보이는 청년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손풍은 그 모습이 못마땅해서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뭘 봐?”

그 청년은 손풍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생긴 걸 보니 옥면신권은 아닌 것 같고, 성격이 거칠다는 폭뢰검객인가?”

“뭐라고?”

손풍이 계속 반말로 지껄이자 청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소문대로 입이 거친 자로군. 아직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은 초면에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손풍이 무어라고 대꾸하려 할 때 동중산이 재빨리 나타났다.

“손 사제, 말을 함부로 하지 말게.”

손풍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동중산을 본 청년의 얼굴이 이내 얼음장처럼 냉랭하게 굳어졌다.

“귀하는 비천호리로군. 귀하의 사제라면 이자는 폭뢰검객이 아니라 그의 사질이오?”

“그렇다. 이 몸이 바로…….”

동중산이 다급히 손풍의 입을 막으며 청년을 향해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했다.

“육천기 사숙조의 제자이신 길도명(吉道明) 사숙이시지요? 이십이 대 제자인 동중산이 인사드립니다. 장문인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안으로 드시지요.”

청년은 날카로운 눈으로 손풍을 쏘아보더니 동중산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반갑소. 귀하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환대해 주어 고맙소.”

그의 태도는 잘 배운 명문정파의 제자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예의가 바르고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것이었다.

동중산이 그를 조심스레 안내하여 안으로 사라지자 손풍은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저자도 사숙이냐? 어째 젊은 놈부터 늙은이까지 몽땅 내 위로만 들어오는 거냐? 새로 속문이 생겼다기에 이제는 막내 신세를 면하나 보다 했더니…….”

손풍이 투덜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아침부터 혼자서 무슨 헛소리를 중얼거리고 있는 거냐?”

손풍이 돌아보니 공교롭게도 전흠이 그를 쳐다보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절로 찔끔하여 손풍은 손사래를 쳤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침부터 사람이 많이 찾아와서 제가 조금 정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어제저녁에 듣지 못했느냐? 본 파의 영역이 그만큼 넓어지는 것이니 다소의 번거로움이 있더라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물론이지요.”

손풍이 넉살좋게 대답하자 전흠은 그의 얼굴을 한동안 가만히 주시하더니 조금은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말했다.

“요즘 들어 네가 무공 수련에 매진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 수련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내게 와서 묻도록 해라. 괜히 장문인을 귀찮게 하지 말고.”

전흠은 그의 어깨를 툭 치더니 이내 앞으로 걸어가 버렸다. 손풍은 그의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저 인간이 내 흉을 안 보고 그냥 가버리다니 이상하구나.”

손풍은 공연히 계면쩍은 생각이 들어 전흠이 건드리고 간 어깨 부위를 벅벅 문질렀다.

확실히 최근에는 그 깐깐한 전흠은 물론이고 종남파의 다른 고수들도 자신을 대하는 태도나 말투가 상당히 부드러워진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손풍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이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비로소 모두들 나의 잠재력을 인정해주는 것 같군. 확실히 사람은 잘나고 볼 일이야.”

마침 그때 아침 수련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오는 유소응을 발견한 손풍은 경쾌한 동작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같이 갑시다, 꼬마 사형.”

손풍은 유소응의 작은 어깨를 팔로 감싸 안은 채 내실로 들어섰다.

내실에는 이미 진산월을 비롯한 종남파의 고수들과 경요궁의 인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경요궁을 속문으로 받아들이는 행사 준비가 갖추어진 것이다.

원래 속문을 받아들이는 행사는 본산의 조사전에서 조사들의 명패를 앞에 두고 자세한 내용을 고한 다음 모든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약식으로 진행하려는 것이다.

행사의 절차는 비교적 간단했다.

먼저 육천기가 그간의 사정을 적은 글을 진산월에게 올렸고, 진산월은 그들의 배분을 인정하고 속문을 허(許)함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육천기는 경요궁의 신물을 진산월에게 바치는 것으로 경요궁이 타의나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뜻으로 종남파의 속문이 된 것임을 확인해 주었고, 진산월은 그 신물에 <보본(報本)>이라는 글자를 새겨서 다시 육천기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래서 경요궁의 신물은 정식으로 ‘보본령(報本令)’이라 불리게 되었다. 보본은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다음 모든 제자들이 일제히 종남파의 본산이 있는 북서쪽을 향해 구배(九拜)를 올려 오늘의 일을 선조들께 고하는 것으로 행사는 끝이 났다. 물론 그 후에 육천기를 비롯한 경요궁의 인물들과 종남파의 제자들이 서로의 배분에 따라 웃어른들에게 배례를 올리는 일이 남아 있었으나, 그것은 다분히 요식적인 절차일 뿐 필수적인 행사는 아니었다.

경요궁의 인물들 중 정식으로 종남파의 제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모두 네 명이었다.

궁주인 육천기는 이십 대 제자가 되었고, 그의 유일한 적전제자(嫡傳弟子)인 길도명은 자연히 이십일 대가 되었다. 그리고 육천기에게 취선삼학의 일부를 전수받았던 삼궁주 희인몽도 육천기와의 사승(師承) 관계로 인정되어 이십일 대 제자가 될 수 있었다.

그들 외에 비류문의 후인이며 경요궁의 외총관인 색명수사 단후명 또한 정식으로 이십일 대로 인정받았다. 비류문의 조사인 우정산이 종남파의 십육 대 제자였으며, 단후명은 그의 오대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육천기의 의제이며 경요궁의 이궁주인 신풍도(神風刀) 장손담(張孫譚)과 내총관인 설초홍(薛初紅)을 비롯한 경요궁의 주요 인물들은 취선삼학의 절학들을 배우지 않았기에 빈객의 신분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배분이 정해지고 서로의 위치가 분명해지자 다소의 희비가 엇갈렸다.

육천기는 종남파 장문인의 사숙 신분이 되었고, 하룻밤 사이에 세 명의 사형제와 여덟 명의 사질을 두게 되어 더할 수 없이 흡족한 심정이었다. 길도명과 희인몽, 단후명도 당대 무림의 제일검객인 신검무적와 같은 항렬이 되었으니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성락중 또한 뛰어난 실력의 절정고수가 자신과 동배로 들어오게 된 것에 전혀 불만이 없을 뿐 아니라 종남의 성세(盛勢)를 나타내는 것 같다며 오히려 크게 기꺼워했다. 그것은 임영옥과 낙일방을 비롯한 다른 사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손풍은 엉겁결에 모셔야 할 웃어른이 네 명이나 생겨나서 울상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조금 전에 시비가 붙었던 길도명이 자신을 유독 눈여겨보는 것 같아 배례 자리가 그야말로 가시방석과도 같았다.

가장 압권은 각 대의 제자들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이십 대와 이십일 대가 차례로 소개되고 제일 마지막으로 이십이 대 제자인 동중산과 유소응, 손풍의 차례가 되었을 때 대부분의 중인들의 시선은 동중산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중산은 비천호리라는 외호로 강호에 적지 않은 명성을 날리고 있는 유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길도명만은 제일 끝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손풍을 주시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동중산이 앞으로 나섰다.

“이십이 대 제자인 동중산이라 합니다. 복건성 우계 태생이며, 올해 마흔입니다.”

동중산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나자 이어 유소응이 작은 몸을 숙이며 맑고 당찬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이십이 대 제자인 유소응입니다. 몽고의 대초원에서 자랐으며, 장문인을 사사(師事)하고 있습니다.”

육천기를 비롯한 중인들의 시선이 유소응에게 향했다. 특히 육천기의 눈이 유달리 번쩍거렸다.

“네가 바로 신검무적의 제자라는 그 아이로구나. 올해 나이가 몇 살이냐?”

유소응은 중인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올해 열한 살입니다.”

육천기는 유소응의 나이답지 않게 차분한 눈빛과 올곧은 자세를 보더니 모처럼 얼굴에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좋구나, 좋아. 너를 보니 장문인의 안목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겠구나.”

유소응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동중산의 옆으로 가서 어깨를 펴고 우뚝 섰다. 그 의젓한 모습에 중인들은 모두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손풍의 차례였다.

손풍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 나와 허리를 숙였다.

“이십이 대 제자인 손풍입니다. 섬서성 서안 태생이며, 올해 스무 살입니다.”

“약관의 나이라. 좋은 시절이군. 네가 본산의 막내 제자냐?”

손풍은 길도명에게로 시선이 가지 않도록 유의하며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몸에 활력이 넘치고 두 눈에 힘이 가득한 걸 보니 너도 좋은 인재로구나. 앞으로 계속 지켜보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육천기로부터 뜻밖의 칭찬을 받자 금세 마음이 풀어진 손풍은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억누르며 짐짓 의젓하게 자리로 돌아갔다.

서로간의 소개와 인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다과를 즐기며 대화를 나누었다. 웃고 떠들거나 소란을 부리는 사람은 없었다. 은연중에 내일의 일에 대해 누구도 거론하거나 화제로 삼지 않았지만, 모두의 마음속에 그 일이 무거운 중압감으로 자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가까이 붙어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사람들은 성락중과 육천기였다. 성락중은 모처럼 자기와 동배의 사형제가 생긴 것에 흥겨워하는 것 같았고, 육천기 또한 성락중의 탈속한 듯한 외모와 고매한 인품에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몇 마디의 말을 나누자마자 이내 수십 년을 사귄 지기(知己)처럼 가까워졌다. 성락중은 사십 대 중반이고 육천기는 오십 대 초반이어서 두 사람이 나이 차이는 여덟 살 가까이 났으나, 그들은 나이를 의식하지 않은 듯 서로 친밀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기에 여념이 없었다.

“경요궁의 인물들은 강호에서의 명성에 비해 사람 수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군요.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지요?”

성락중의 물음에 육천기는 모처럼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 조사께서 경요궁을 세울 때 두 가지의 금령(禁令)을 내리셨네. 첫째로 경요궁의 궁주는 오직 한 사람의 적전제자만을 둘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로 궁주는 절대로 혼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성락중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그건 너무 가혹한 금령 같군요.”

“마 조사께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본 산을 등진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속죄를 하고 싶으셨던 것일세. 때문에 대대로 경요궁의 궁주들은 단승일맥(單承一脈)으로 이어져 왔네.”

“문파를 유지하는 데는 너무나 위험한 방법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일세. 우리 나름대로는 소수정예라도 유지하려고 애를 썼지만, 본 궁의 세를 키우는 것에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선사 때부터는 마음에 맞는 자들을 불러들여 이궁주나 삼궁주에 삼기도 했다네. 나도 또한 두 명의 의제(義弟)들을 두게 되었지.”

육천기의 시선이 한쪽에 그림처럼 조용히 앉아 있는 희인몽에게 향했다.

“아쉽게도 몇 년 전에 셋째가 불의의 변을 당하는 바람에 그 자리를 의제의 부인에게 넘겨주었네. 그때 위로와 격려의 의미로 그녀에게 본 궁의 비전인 천절뢰 수법을 알려 주었는데, 그 때문에 그녀가 본 파의 제자로 인정받게 되었으니 세상일이란 참으로 묘한 것일세.”

천절뢰는 취선삼학의 하나인 취선호의 변형이므로 넓은 의미에서 종남파의 무공이나 마찬가지였다. 희인몽이 그것을 익힌 이상 종남파의 제자가 되든지 아니면 스스로의 무공을 폐하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명문정파의 무공 하나하나에는 뛰어난 위력만큼이나 분명한 책임소재와 철저한 제약이 가해지는 법이었다.

결국 육천기의 선의가 이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으나, 희인몽이 종남파의 제자가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기에 육천기로서도 큰 부담을 덜게 된 셈이었다. 그와 희인몽은 부녀지간이라고 해도 될 만큼 나이 차이도 많았고, 실제로 육천기는 그녀를 의제의 부인이 아닌 딸처럼 여기고 있었기에 두 사람이 사부와 제자 관계가 된 것이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았다.

다만 육천기의 제자인 길도명으로서는 숙모라 부르던 희인몽이 갑자기 사저가 되었으니 한동안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산월이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 금령은 오늘부로 해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육천기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지난 백 년 동안 지켜온 것인데…….”

“경요궁이 본 파의 속문이 되고 취선삼학이 본 파로 돌아온 이상 금령의 의미는 이미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지하에 계신 마일보 조사께서도 기꺼이 승낙하실 겁니다.”

육천기는 이내 마음을 결심한 듯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정식으로 명(命)으로 내려주게.”

진산월은 주저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장문인으로서 명을 내리겠다.”

진산월의 말에 종남파의 제자들이 모두 부복을 했다. 육천기 또한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엎드렸다.

“하명하십시오.”

“경요궁에 전해지는 두 가지의 금령을 이 시간부로 해제할 것을 명한다.”

“삼가 명을 받겠습니다.”

육천기는 진산월을 향해 두 번의 절을 한 후 비로소 홀가분한 표정이 되었다.

진산월은 따뜻한 말로 그를 위로해 주었다.

“그동안 심려가 많으셨습니다.”

“나야 어차피 다 늙은 나이이니 상관없지만 제자 녀석에게는 가끔 미안할 때가 있었는데, 이제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군.”

육천기의 시선이 한쪽에 있는 길도명에게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길도명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길도명을 바라보는 육천기의 눈에는 따뜻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고아로 떠돌던 녀석을 십여 년 전에 제자로 거두어들였네. 다행히 무재(武才)가 괜찮아서 선사께 누를 끼치지 않게 되어 한숨 돌릴 수 있었지. 다만 멀쩡한 녀석을 내 욕심에 평생 홀몸으로 살게 만든 것이 늘 마음에 걸렸었는데, 장문인 덕분에 큰 걱정을 덜게 되었네.”

이어 그는 길도명을 손짓해 불렀다.

“도명아, 이리 오너라.”

길도명은 급히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부르셨습니까, 사부님.”

“그래. 네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던 장문인을 보게 되었는데 왜 다가와서 인사드리지 못하고 한쪽에 처박혀 있는 게냐?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인사 올리거라.”

길도명은 안색이 약간 상기된 채 진산월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길도명이 장문인을 뵙니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사형이라고 부르게.”

길도명의 어깨가 한 차례 가늘게 떨렸다.

“장문 사형…….”

“반갑네, 사제.”

길도명은 눈자위를 실룩거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저도 반갑습니다, 장문 사형.”

사실 길도명은 좁은 경요궁 안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방황하다 사부를 만나 경요궁에 들어온 이래 그의 삶은 단조로움의 연속이었다. 또래의 친구도 없고 인원도 그다지 많지 않은 경요궁에서의 생활이 때로는 갑갑하고 때로는 외롭게 느껴졌으나, 그로서는 달리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불과 하룻밤 사이에 주변의 모든 여건이 너무나 달라져 버렸다.

자신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일어나는 종남파의 정식 제자가 되었고, 수십 명의 동문들이 생겼으며, 그 유명한 신검무적을 사형으로 두게 된 것이다. 그러니 어찌 가슴 한구석이 복받쳐 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육천기는 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지라 무어라 말도 못 하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다시 한 사람을 불렀다.

“내 정신 좀 보게. 장손 아우, 이쪽으로 좀 오게.”

그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비쩍 마른 체구에 유난히 큰 키의 중년인이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중년인의 허리춤에는 그의 키만큼이나 기다란 장도(長刀)가 매달려 있었다. 그가 바로 경요궁의 둘째 궁주인 신풍도 장손담이었다. 알려진 바로는 그는 쾌도(快刀)의 달인으로, 한때는 사천제일쾌도(四川第一快刀)라고까지 불렸던 절세의 도객이라고 했다.

십여 년 전에 장손담은 우연히 대파산을 지나다가 사소한 시비로 육천기와 싸우게 되었다. 결국 장손담은 육천기의 고강한 무공에 패하고 말았으나, 그의 호탕한 성격에 감복되어 스스로 아우가 되기를 자처했다. 그 후에 다시 천수검 좌일군이 가세하여 그들 세 사람은 결의(結義)를 맺고 의형제가 되었다.

삼 년 전 좌일군이 죽을 때까지 그들의 우정은 누구보다 굳건했고, 그들의 가세로 경요궁은 적어도 사천과 호북 일대에서는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강력한 방파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육천기는 믿음직한 눈으로 장손담을 바라보았다.

“아까 잠깐 소개했지만, 내 의제인 장손담일세. 언제라도 기꺼이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지.”

단순한 말이었으나, 그 말속에 담긴 진한 신뢰의 의미를 누구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진산월은 그를 빈객 이전에 사숙의 친구인 선배 고수로서 대우해 주었다.

“장손 대협의 명성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연을 맺게 되니 반갑습니다.”

장손담 또한 진산월을 대하는 데 한 점의 흐트러짐이 없이 예의를 다하는 모습이었다.

“단순한 허명에 불과하오. 나야말로 종남파와 인연을 맺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소.”

신검무적의 명성은 이미 중원을 넘어 강호 전역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특히 장손담은 희인몽에게서 그가 우내사마의 일인인 음양신마 복양수를 격파한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에 대한 흠모와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대제일의 검객을 넘어 어쩌면 강호 무림의 제일고수를 바라볼지도 모를 절세의 인물을 직접 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비록 빈객의 자리라고 할망정 그와 같은 문파에 속하게 되었으니, 장손담으로서도 마치 허공을 걷고 있는 듯 마음이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소문으로만 듣던 종남파의 여러 고수들을 만나고 보니 소문이 오히려 모자람을 알겠소. 장문인은 물론이고 어린 제자들까지 누구 하나 뛰어나지 않은 인물이 없으니 종남파의 명성이 천하를 진동케 하는 이유를 능히 이해할 수 있겠구려.”

그의 말 속에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감탄의 빛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하나 워낙 신중하고 침착한 성격인지라 겉으로 드러난 그의 모습은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짙은 의미가 담긴 진산월의 말에 장손담은 새삼스런 눈으로 그와 종남파의 고수들을 둘러보았다.

강호를 온통 뒤흔들다시피 하고 있는 혁혁한 명성답지 않게 종남파의 고수들은 소탈했으며, 누구도 자존심을 앞세우거나 자만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장문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의 빛을 보이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종남파가 오랫동안 질곡의 세월들을 보내왔다고 하더니 마음속에 맺힌 것이 많은 모양이구나. 이들은 과연 어디까지 가려는 것일까?’

직접 만나본 신검무적은 강호에 퍼진 소문처럼 삼두육비(三頭六臂)의 괴물도 아니었고, 보기만 해도 심장이 떨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세를 흘리고 있지도 않았다. 차분한 눈빛에 단정한 태도를 지닌 젊은이의 모습이었다.

다만 그에게서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깊게 가라앉은 두 눈에는 나이답지 않은 진한 무게감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결코 이십 대 젊은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그를 대하는 종남파의 다른 고수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이 장문인을 볼 때마다 그들의 눈에는 극도의 존경과 신뢰가 담겨 있었다. 십 대의 어린 소년부터 사십 대의 중년인까지 나이와 배분을 불문하고 모두들 장문인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이와 같은 경의를 받을 수 있다면 그자의 인생은 그것만으로도 능히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장손담은 종남파가 마음에 들었다. 믿음직한 장문인과 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 충실한 제자들이 함께 뜻을 뭉친다면 어떠한 어려운 길이라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의 끝에서 그들은 과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장손담은 언제고 그 결과를 꼭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다.

육천기는 경요궁의 내총관을 맡고 있는 설초홍을 진산월에게 인사시키는 것으로 경요궁 인물들의 소개를 마쳤다. 설초홍은 사십 대 중반의 중년 여인으로, 다소 통통한 체구에 온화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 그녀는 젊었을 적에 무산마녀(巫山魔女)라고 불렸던 숨은 실력자로, 누구보다 냉정하고 손속이 매서운 여인이었다. 나이를 먹어서 성정이 부드러워지기는 했으나 지금도 많은 경요궁의 인물들은 궁주인 육천기보다도 그녀를 더 두려워할 정도였다.

육천기는 호탕한 성격에 사소한 일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대범한 인물이어서 그녀가 안살림을 알뜰하게 챙기지 않았다면 경요궁의 살림살이가 곤궁해졌을지도 몰랐다. 항간에는 두 사람이 한때 정분이 있는 사이였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도록 결혼을 하지 않아서 소문 자체가 흐지부지되어 버리기도 했다.

진산월은 별다른 말이 없이 조용하게 앉아 있는 설초홍이 육천기와 몰래 시선을 마주치며 살짝 미소 짓는 모습을 보고, 어쩌면 머지않아 새로운 사숙모가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경요궁의 금령을 해제했을 때 육천기가 유난히 기뻐했던 것이 단순히 제자인 길도명 때문만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잠시 바깥으로 사라졌던 동중산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동중산은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진산월은 자연스런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습니다.”

“다녀오시게.”

진산월이 문 쪽으로 걸어가자 동중산이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우측 두 번째 방입니다. 다녀오십시오.”

진산월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후 대청을 벗어났다.

무심코 진산월을 주시하고 있던 육천기가 이 광경을 보고 약간 의아해하는 기색이었으나, 동중산은 눈치 빠르게 근처에 있는 희인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사고께서는 장문인과 음양신마가 싸우는 광경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희인몽에게로 향했다. 진산월이 음양신마를 쓰러뜨렸다는 것은 종남파 고수들도 어제부터 퍼진 소문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기에 그에 대한 호기심이 누구보다도 클 수밖에 없었다.

희인몽은 중인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말문을 열었다.

“그 일은 며칠 전에 한수의 강변에서 일어났어요. 그때 나는…….”

대청을 벗어난 진산월은 별실의 우측에 붙어 있는 작은 회랑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쪽은 이정문과 육난음이 숙소로 쓰는 두 개의 방이 나란히 붙어 있었는데, 진산월이 방 근처로 다가가자 두 번째 방문이 열리며 이정문과 육난음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산월은 그들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했다.

“내 부탁을 들어주어 고맙소.”

육난음은 살짝 미소 지었다.

“다행히 사부님께서 무당파의 집회에 참석하시기 위해 무당산 근처에 계시느라 어렵지 않게 연락이 닿았어요. 사부님께서도 기꺼이 수락하셨고요.”

“그분은 안에 계시오?”

“예. 들어가 보세요.”

“당신들은?”

육난음은 옆에 멀거니 서 있는 이정문의 팔짱을 꼈다.

“우리는 잠시 바깥바람 좀 쐬고 올 거예요.”

진산월은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숨을 고르고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 크지 않은 방은 창문에 차양이 쳐져 있어 어두컴컴해 보였다. 그 어두운 방안의 한쪽에 한 여인이 그림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짙은 남색 저고리에 유난히 붉은 치마가 시선을 끌었다.

반백의 머리칼에 수정처럼 맑고 고요한 눈을 가진 여인이었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용모였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카락으로 보아 적지 않은 나이 같았지만, 피부의 탄력이 아직도 살아 있었고 얼굴 전체에 잔주름 하나 없이 백옥(白玉) 같은 살결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목구비는 단정했으며, 이지적이고 차분한 인상이었다.

여인은 방문을 열고 들어온 진산월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동안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던 진산월은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종남의 진산월이 무림의 대선배를 뵙습니다.”

여인의 얼굴에 그린 듯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드디어 만나게 되었군. 반갑네. 내가 바로 천수관음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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