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9권 절대암류(絶代暗流)편 : 8화
제 299장 십팔비보(十八秘步)
밤은 길고, 젊음은 짧다.
밤이 깊어가는데도 잠들지 못하는 일단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이것 참, 일이 이렇게 되는 수도 있군.”
혁리공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그의 앞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던 구양현성이 피식 웃었다.
“자네를 한숨 짓게 하는 일이 있다니 재미있군.”
혁리공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내가 만사무불통지(萬事無不通知)도 아니고,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법이지. 다만 시기가 너무 공교롭단 말이야.”
“자네 말대로 공교롭긴 하군. 내일이 실행일인데, 바로 전날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단순히 우연 같지는 않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확실히 신검무적은 만만한 인물이 아니야. 무언가 종남파를 향한 움직임이 있을 것에 대비해서 경요궁이 합류한 시기를 앞당긴 게 분명해. 그래서 서둘러 입파식을 약식으로 해치우고 경요궁의 인물들을 받아들인 거야.”
구양현성은 혁리공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종남파 같은 명문정파에서 새로운 문파를 속문으로 받아들이는데 본산에서 수천 리 떨어진 객잔의 별실에서 참관인도 없이 약식으로 입파식을 진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원래 입파식은 문파의 위세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뿐 아니라, 속문으로 들어오는 문파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가급적이면 크고 성대하게 치르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종남파는 다른 문파를 초청하거나 주위에 알리지도 않고 객잔의 별실 한쪽에서 후다닥 행사를 치러 버렸다. 때문에 행사가 끝난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그에 대한 소식이 조금씩 주위에 퍼지고 있는 판국이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모두 영문을 몰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부하들을 시켜 종남파의 주위를 계속 감시하고 있던 혁리공조차도 뒤늦게 그 소식을 접하고는 어안이 벙벙해서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할 정도였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 셈인가? 계획을 포기할 텐가?”
구양현성의 물음에 혁리공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긴 조금 이르지. 경요궁의 인물들이 가세했다고 해도 그들 중 신경 써야 할 정도의 고수는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에 불과할 뿐이야. 문제는 경요궁주를 상대할 마땅한 인물이 없다는 것이지.”
“경요궁주가 그렇게 대단한 고수인가?”
“그것도 그렇지만, 이곳에 온 오결 검객들 대부분이 그와 크고 작은 친분관계가 있어서 직접 그에게 손을 쓰는 걸 꺼려하고 있단 말이야. 참 공교롭게 됐어. 시기상으로도 그렇고, 하필이면 그 대상이 경요궁이라는 것도 그렇고.”
혁리공은 ‘공교롭다’는 말을 거듭 반복했다. 그만큼 이번 경요궁의 종남파 속문 입파는 그의 계획에 심각한 차질을 불러오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자네라면 이미 마땅한 방법을 생각해 두었을 텐데, 이제 그만 엄살 피우고 솔직히 말해 보지 그러나?”
혁리공은 피식 웃었다.
“나에 대해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군.”
“자네와 몇 번 일을 하면서 자네 성격이 어떤지는 충분히 파악해 두었지. 내가 이번 일에 선뜻 끼어든 것도 자네와 함께라면 어떤 일이 닥쳐도 능히 해치울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네.”
혁리공은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 나를 그토록 신임하다니, 그것 참 놀라운 일인걸.”
구양현성의 얼굴에도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믿고 있지. 이제 그 능력을 보여주게.”
“능력만 믿는단 말이지? 거참…….”
“우리 같은 사이에 그거면 됐지.”
“하긴, 장사꾼에게 뭘 더 바라겠나? 아무튼 그래서 한 번 더 당 늙은이의 신세를 지기로 했네.”
대수롭지 않은 듯한 혁리공의 말에 구양현성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그가 선뜻 응해주던가?”
“그도 노리는 게 있어서 말이지. 어차피 그걸 얻기 위해서는 그도 한 번 정도는 더 소매를 걷어야 하네.”
구양현성은 혁리공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는 쾌의당의 인물들을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 그는 예외인 것 같군.”
“그는 쾌의당에 들어와서 자신이 원하는 걸 이미 얻었지. 하나 다른 자들은 아직 그러지 못해서인지 다들 욕심이 너무 많아. 난 자기 주제를 모르고 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자들을 싫어하거든.”
“그건 나에 대한 경고처럼 들리는군.”
“자네 주제가 어떤데?”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혁리공은 구양현성의 전신을 쓰윽 훑더니 싱겁게 웃었다.
“미끈하게 잘 빠졌군. 여자들이 좋아하겠어.”
구양현성은 그 말이 못마땅한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투덜거렸다.
“생긴 게 이런데 어쩌란 말인가? 그보다 나는 약속한 것만 얻으면 되네. 그 이상의 욕심은 내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걱정 같은 건 안 하네. 이번 일로 자네가 얻는 것만으로도 배가 터져 죽을 지경일 테니.”
“그 정도는 아닐세.”
“자네가 형산파의 용선생뿐 아니라 화산파에도 한 발 걸쳐 놓은 걸 내가 모르는 줄 아나?”
“난 그냥 강북에 교두보만 마련하면 그것으로 만족하네. 정말일세. 믿어주게.”
구양현성이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혁리공은 이내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구양현성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산수재는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 그가 종남파와 같이 있으니 영 신경 쓰이는군.”
“그거야 일을 할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혁리공의 시선이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한쪽에 조용히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세 번째 젊은이에게로 향했다.
“내일 움직일 준비는 다 끝난 건가?”
세 번째 젊은이는 조용히 웃었다. 단순히 살짝 미소 지었을 뿐인데도 주위가 훤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준비야 늘 갖춰놓고 있지. 나도 원하는 건 오직 한 가지밖에 없으니, 욕심 운운하는 말은 하지 말아주게.”
“그거야 믿고 있지. 그런데 그녀에게 너무 목을 매는 거 아닌가? 아무리 그녀가 인중보물(人中寶物)이라고 해도 자네가 여자에게 이토록 욕심을 내는 건 처음 보는 것 같군.”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 법일세.”
“그녀가 자네 취향이란 말인가?”
“말을 잘못했군. 생각이 다른 법이라고 해두지.”
혁리공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다시 물었다.
“선 소저가 알면 무척이나 속상해할 텐데.”
“그녀와는 예전에 끝난 사이일세.”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던데.”
“감정의 잔재일 뿐이지. 그녀도 나에 대한 애착은 없을 걸세.”
“여자에 대해 너무 확신하지 말게.”
그는 빙긋 웃었다. 같은 남자가 보아도 정신이 멍해질 만큼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확신은 안 하네. 다만 알고 있을 뿐이지.”
“어련하겠나? 하지만 인간의 감정이란 절대 함부로 측량할 수 없다는 것만 알아두게. 특히 여자의 감정은 더욱 예측하기 힘들지.”
“그래서 공략하는 재미가 있는 것일세.”
혁리공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튼 물건은 당 늙은이가 가져가기로 했으니 그렇게 알게.”
“난 그녀의 몸만 얻으면 충분하네. 그런데 그 물건이 그의 손에 들어가도 되는 건가?”
혁리공의 표정이 처음으로 조금 굳어졌다.
“사부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일일세.”
혁리공의 입에서 사부라는 말이 나오자 젊은이, 백석기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깨끗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필히 그가 가져가도록 해야겠군.”
“그렇게 될 걸세. 특별한 일만 없다면.”
“특별한 일이라. 자네가 걱정하는 건 뭔가?”
혁리공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을 때 짓는 그만의 독특한 습관이었다.
“신검무적에 관련된 일은 내 예상을 벗어나는 경우가 제법 있었네. 그래서인지 이번 일도 어쩐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자꾸 든단 말이야.”
“그런 걸…….”
“기우라고 하지. 나도 아네. 이번에는 정말 기우이길 바라야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혁리공의 표정은 여전히 활짝 펴지지 않고 있었다.
☆ ☆ ☆
잠들지 못하는 한 쌍의 젊음은 여기에도 있었다.
이정문은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더니 돌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정말 모르겠군.”
그러더니 다시 또 허공을 쏘아보는 것이었다.
육난음은 양손으로 턱을 괸 채 그의 그런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 노인네처럼 걱정이 많군요. 또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걱정이 안 되게 생겼어? 날짜는 코앞으로 닥쳐왔는데 아직도 혁리공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위치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잖아.”
“혁리공이 꼭 내일 일을 벌이리라는 법도 없잖아요.”
“아니야. 그가 바보가 아니라면 내일의 기회를 그냥 보낼 리 없어. 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그는 절대로 바보가 아니야.”
“당신도 바보는 아니죠.”
이정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아무리 봐도 나는 바보 같아. 그러니 아무 대책도 못 세우고 이렇게 한숨만 쉬고 있잖아. 틀림없이 나는 혁리공도 놓치고 이번 일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거야.”
“또 당신의 그 비관병(悲觀病)이 도졌군요. 당신은 잘해낼 테니 너무 걱정 말아요. 혁리공이 아직까지 형산파와 전혀 접촉이 없다는 건 확실해요?”
“형산파 고수들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코앞에 진을 치고 있는데 내가 그런 걸 놓치겠어? 어제부터 오늘까지 형산파의 숙소에 출입하는 모든 자들을 철저히 감시했지만 그들 중 혁리공이나 그의 수하로 보이는 자들은 없었어.”
“하지만 수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형산파에서 새롭게 보강되는 고수들의 존재를 파악했다면서요?”
“형산파에서 오결검객을 두 사람이나 더 내려보낼 줄은 나도 미처 몰랐지. 더구나 그들이 종남파와 악연이 있는 비응검과 절영검이었으니 솔직히 조금 당혹스럽기는 했어. 아직은 형산파에서 종남파에 본격적으로 이를 드러낼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예상이 어긋난 거지.”
“그래서 더 걱정하는 거로군요.”
“비응검과 절영검까지 왔다는 건 형산파에서 종남파를 향해 본격적으로 손을 쓰려고 결심했다는 의미야. 그래서 더욱 내일 일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지.”
육난음은 잔뜩 찡그려진 이정문의 얼굴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고 있더니 다시 물었다.
“그들 외에 다른 특별한 자는 없었어요?”
“형산파의 오결 검객에게 눈도장을 찍으려는 군소문파의 고수들이 뻔질나게 드나들더군. 상인들도 여럿 보이고.”
“상인들은 왜요?”
“형산파는 장사 구양가와 대부분의 상거래를 취급하지만, 그래도 그 외의 거래에서 떨어지는 떡고물들이 제법 많거든. 그러고 보니 장사 구양가의 공자도 한 사람 찾아왔다고 했지?”
이정문은 자신의 앞에 놓인 수북한 종이들을 뒤적거리다가 그중에서 한 장을 꺼내들었다.
“여기 있군. 구양가의 셋째 공자가 왔었군.”
“그 소심하기로 유명한 구양현성 말인가요? 돌다리도 꼭 두들겨 보고 건넌다는.”
“소심한 게 아니라 신중한 거지. 그건 상인으로서 꼭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야.”
“아무튼 무림에 퍼진 소문은 그렇잖아요. 너무 소심해서 눈앞에 보이는 확실한 일이 아니면 절대로 끼어들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만큼 계산이 철저하고 치밀하다는 뜻이지. 가만…….”
이정문의 시선이 허공의 한 점에 딱 고정되었다.
“아직 종남파와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가 형산파를 찾아왔다? 그건 조금 이상한데?”
“형산파는 원래 장사 구양가와 대부분의 거래를 한다면서요?”
“그 거래를 맡은 자는 구양가의 오래된 가신 중 하나야. 그리고 그는 구양현성의 형인 구양전월의 심복이지. 다시 말해서 형산파와의 거래를 담당하는 것은 구양전월의 몫이란 말이야.”
“구양현성이 자신도 그 거래에 끼어들고 싶었나 보죠.”
“그래. 반드시 형산파와의 거래가 이루어질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말이지.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 형산파가 종남파와의 결전을 코앞에 둔 상태에서 자신과 새로운 상거래를 할 거라고 어떻게 확신한 거지?”
이정문의 말은 육난음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이정문만의 독특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런 경우 이정문의 머리는 어느 때보다 영활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육난음은 잘 알고 있었다.
“구양현성이 형산파를 찾아왔다는 건 형산파와 종남파 사이의 일이 어떤 식으로든 형산파에 이로운 쪽으로 마무리될 것으로 알고 있다는 의미야.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렇게 되리라는 확신을 얻었을까? 단순히 신검무적이 천수나타에게 패할 거라는 예감 때문에? 하지만 강호인들은 오히려 신검무적에게 더욱 승산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그건 다시 말해서 신검무적이 무조건 천수나타에게 패한다는 확신이 없으면 하기 힘든 행동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누가 그에게 그런 확신을 심어 주었을까?”
육난음은 혼잣말처럼 정신없이 중얼거리는 이정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구양현성에게 그런 확신을 심어준 자는 천수나타가 반드시 신검무적을 이기리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그는 신검무적이 암기 무공에 취약하다는 약점을 알고 있는 자이고, 또한 천수나타가 신검무적에게 공개비무를 청할 것이라고 이전부터 알고 있던 자이기도 하지. 그래서 구양현성은 적절한 시기에 형산파를 찾아올 수 있었던 거야. 그렇다면 그자는 바로…….”
육난음은 이정문의 얼굴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보고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비로소 혁리공의 꼬리를 잡았군요.”
이정문은 다시 서류더미를 뒤적거렸다.
“구양현성의 숙소가 적힌 서류가 어디에 있을 텐데…….”
이내 그는 한 장의 종이를 꺼내들고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정신없이 읽었다.
“석화가(石花街) 보성객잔(保聖客棧). 이곳이군.”
“거봐요. 당신은 할 수 있을 거라고 했죠?”
육난음이 배시시 웃으며 그의 뺨을 살짝 두드렸다. 이정문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보성객잔이라. 운이 좋으면 이곳에서 혁리공을 볼 수도 있겠군. 그렇지 않더라도 그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디서 듣던 이름 같은데?”
육난음이 갑자기 눈을 크게 치켜떴다.
“보성객잔이라면 천봉궁의 단봉공주 일행이 머물러 있는 곳 아니에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정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당신 말이 맞아.”
육난음이 깜짝 놀라 외쳤다.
“그럼 그들이 같은 숙소를 이용한다는 말이에요?”
“소리 죽여. 다들 잠들어 있을 시간이야.”
“아니, 그게…….”
이정문은 한 손으로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서류를 흔들어 보였다.
“흥분할 거 없어. 이건 다만 그들이 같은 객잔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따지고 보면 종남파와 형산파도 모두 같은 객잔에 있는 셈이잖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육난음은 겨우 평정을 되찾았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확실히 내가 너무 성급했네요.”
이정문은 갑자기 자기의 머리를 스스로의 손으로 후려쳤다.
“이런 바보!”
“왜 그래요?”
“천봉궁과 합류한 유중악의 일행 중에 혁리가의 대공자가 있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있어. 혁리공은 아마 자기의 형을 만나러 그쪽에 갔었을 거야.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니.”
“그럼 지금 그는 보성객잔에 있겠군요. 어서 가 봐요.”
“내가 혁리공이라면 천봉궁 때문에 사람들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객잔에 오래 머물러 있지는 않을 거야. 아마 그는 지금쯤은 전혀 다른 곳에 있을걸.”
이정문의 냉정한 말에 육난음은 발을 동동 굴렀다.
“우리가 너무 늦게 알아버린 거군요.”
“그건 아니지. 일단 혁리공의 꼬리가 그곳에 있는 걸 알았으니 그곳부터 차차 좁혀 가면 되는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내일이면 그가 어떤 식으로든 움직임을 보일 테니 그의 꼬리를 잡기는 더욱 수월해질 거야.”
육난음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당신은 내일 어떨 것 같아요?”
“뭐가?”
“진 장문인이 천수나타를 이길 것 같아요?”
“그거야 모르지. 내가 무공에는 거의 문외한이라는 걸 당신도 알고 있잖아.”
육난음은 그를 예쁘게 흘겨보았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요? 그래도 당신 생각을 말해 봐요.”
이정문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곤란한 질문이군. 다만 내일 나는 혁리공의 꼬리를 단단히 움켜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에둘러 말한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육난음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당신은 진 장문인이 이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군요. 그래서 혁리공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종남파 고수들에게 수작을 부려오는 걸 노리려고 하는 것이고요.”
“그럴 가능성에 대비하자는 거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준비하는 게 내 방식이잖아.”
육난음의 눈이 한 줄기 기대감으로 반짝 빛났다.
“그럼 만약 진 장문인이 승리한다면? 그럴 때는 어떻게 되는 거죠?”
“혁리공은 다시 몸을 꼭꼭 숨기겠지. 그리고 무당파의 집회에서 다시 기회를 노리려 할 거야.”
“그럼…….”
이정문의 음성은 평상시와는 달리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와의 무척이나 길고 험난한 줄다리기가 시작된다는 뜻이지.”
☆ ☆ ☆
여기 잠들지 못하는 또 다른 젊은이가 있었다.
진산월은 깊은 밤에 홀로 후원에 나와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신형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끊임없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금시라도 꺼질 듯, 혹은 날아갈 듯 미묘하게 움직이는 그 동작이 단지 열두 개의 발자국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일 뿐이라는 건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한동안 끝없이 이어질 듯하던 그의 몸이 어느 순간에 딱 멈춰버렸다.
진산월의 눈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살짝 찡그려져 있었다.
‘역시 안 되는군. 무엇이 문제인가?’
진산월이 이 열두 걸음의 보법을 처음 본 것은 몇 달 전의 어느 한적한 봄날 오후였고, 장소는 낙양 석가장의 후원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너무도 자유롭고 현기로 가득 찬 여인의 몸놀림을 보게 되었다.
그 여인은 다름 아닌 철혈홍안 조여홍이었다. 그때 그녀가 펼친 동작은 그야말로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흐르는 동안 진산월은 당시의 기억을 되살리며 열두 걸음의 비밀을 연구해 왔다. 하나 익히면 익힐수록 보법이 가지고 있는 신묘함에 매료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미흡한 무언가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사실을 너무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서 몇 걸음만 더 내딛는다면 자신의 몸은 무한의 공간 속을 마음껏 질주할 수 있을 텐데, 그 몇 걸음이 나아가지지 않는 것이다.
진산월이 밤이 늦도록 정체도 모르는 열두 걸음을 수련하고 있는 이유는 내일 있을 당각과의 비무에 대한 해답이 바로 그 열두 걸음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천수관음이 알려준 암기 무공의 여섯 가지 계율 중 진산월이 주목한 것은 ‘불착불출(不捉不出)’이었다. 상대의 위치를 포착하지 못하면 출수하지 말라는 그 계율은 진산월에게 당각을 상대할 새로운 방법을 알려주었다.
당각의 암기는 무음경을 넘어 무적경에 근접한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지금의 진산월로서는 일단 당각이 암기를 발출하면 도저히 피할 자신이 없었다.
그동안 진산월은 어떻게 하면 당각의 암기를 피하거나 막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 왔으나, 천수관음과의 대화로 전혀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당각이 아예 암기를 발출하지 못한다면 굳이 피하거나 막을 필요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 당각을 자신의 검세에 둘 때까지 당각에게 정확한 위치를 발각당하지 않고 접근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그와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종남파에 남아 있는 무공들 중 쓸 만한 보법은 이어룡과 어운보, 와선보 정도였다. 하나 어운보는 접근전에서만 묘용이 있는 보법이었고, 와선보는 위급한 상황에서 잠시 몸을 피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하는 것이어서 내일 같은 상황에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나마 이어룡이 가능성이 있는데,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짧은 데다 결정적으로 움직임이 단조롭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별수 없이 진산월은 아직 명칭조차 모르는 열두 걸음의 보법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천수관음이 떠난 후 진산월이 깊은 상념에서 깨어난 것은 늦은 저녁이었다. 그때부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진산월을 찾아왔었다. 물론 대부분은 종남파의 제자들이었다. 종남파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으나, 누구도 내일의 일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고 그저 그의 안부를 묻고는 이내 물러나 버렸다.
오히려 경요궁주인 육천기가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남아서 진산월과 밀담을 주고받았다.
끝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은 사람은 임영옥뿐이었다. 진산월은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그녀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믿고 싶었던 것이다. 진산월이 무사히 당각과의 비무를 마치고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서로 웃으며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섣부른 위로나 격려의 말을 전하기보다는 이 정도 도전쯤은 능히 물리칠 수 있을 거라는 굳건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성원이었다.
그래서 진산월은 더욱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것은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지독한 갈증이었다.
그가 밤이 깊은 시각까지 열두 걸음의 보법에 더욱 매달리고 있는 것도 그러한 갈증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다시 한 차례 진산월은 열두 걸음을 내디뎠다. 이제는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물 흐르듯 그의 몸이 허공을 유영해갔다. 하나 이내 다시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진산월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후원 한편의 유난히 짙은 어둠 속에 한 사람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짙은 청삼을 입은 준수한 용모의 중년인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번쩍거리는 중년인의 빛나는 눈빛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중년인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멋진 보법이군. 다만 여섯 걸음이 부족한 것이 아쉽지만 말이지.”
진산월은 그 중년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어느 파의 고인이시오?”
“잠이 오지 않아서 밤길을 서성이다 들른 야행객이라고 해두게.”
진산월은 방만한 듯 서 있는 그의 자세가 무척이나 표홀하면서도 비범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조금 전의 말씀은 무슨 뜻이오?”
“말 그대로일세. 자네의 움직임은 훌륭했지만, 몇 걸음이 부족한 것 같았네. 게다가…….”
그의 시선은 진산월의 두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동작이 너무 크군. 불필요한 허세가 들어가 있는 것 같아 조금 아쉬웠네.”
진산월은 느닷없이 나타난 그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그의 말 속에 숨은 의미가 더욱 궁금해졌다.
“불필요한 허세라. 내 동작에 그런 게 보였단 말이오?”
“굳이 그렇게 거창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충분히 효과적일 텐데 말이지. 자기 보법이 대단하다고 누구에게 뽐낼 필요라도 있나?”
진산월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내가 뽐낸단 말이오?”
“그렇게 정색할 필요 없네. 내 눈에 그렇게 느껴졌단 말이니, 신경이 쓰이면 그저 지나가는 야행객의 넋두리라고 생각하게.”
“여섯 걸음이 부족하다는 말은 무슨 의미요?”
“말 그대로일세. 자네의 움직임은 아직 미완(未完) 같아 보이네. 적어도 여섯 걸음 정도 더 내디뎌야 비로소 제대로 된 하나의 동작으로 완성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그것도 당신 눈에 그렇게 느껴진 것이오?”
청삼 중년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고 해두세.”
진산월은 한동안 그의 말을 가만히 되새기고 있다가 물었다.
“내게 이런 말을 해주는 이유가 무엇이오?”
“잠들지 못하는 밤을 잠깐이나마 함께 보내게 된 인연이라고 알고 있게.”
“그 말을 내가 믿으리라고 보시오?”
“믿고 안 믿고는 자네 마음이니 내가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이지.”
진산월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으나, 엷은 미소만 머금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는 전혀 아무것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진산월은 그를 향해 포권을 했다.
“늦게나마 인사드리겠소. 종남의 진산월이오.”
청의 중년인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듣던 대로 영리한 친구로군. 나는 심야(深夜)의 불면객(不眠客)일세.”
정체를 밝히라는 뜻에서 통성명을 시도했으나, 청의 중년인은 엉뚱한 가명으로 이를 넘겨 버렸다. 진산월은 한 번 더 그를 건드려 보았다.
“내 동작을 한 번 본 것만으로 이런저런 지적을 하면서, 자신의 이름은 밝힐 용기가 없는 거요?”
“자네답지 않게 서툰 격장지계(激將之計)로군.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지. 솔직히 나는 남에게 내 이름을 밝힐 용기가 없는 사람일세.”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회한(悔恨) 때문이라고 해두지. 아니면 끊지 못한 미련이든지.”
그 말을 할 때의 청삼 중년인의 얼굴에는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묘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하나 그 빛은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졌고, 청삼 중년인은 다시 처음의 표정을 되찾았다.
진산월은 그의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심야의 불면객께서 나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오?”
“말했지 않나? 밤길을 서성이다 우연히 들렀다고.”
“그렇게 엉뚱한 이유를 댈 거면 굳이 내 보법의 단점을 말해줄 필요도 없지 않소?”
“혹시나 해서 말이지.”
“혹시나라니?”
“혹시라도 자네와의 인연이 이것으로 그치지 않게 되면 그때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이네.”
“무슨 이야기를 하겠다는 거요?”
“여러 가지. 종남파에 관한 옛 이야기나 보법에 얽힌 사연 같은 거 말이지.”
청삼 중년인에게서 종남파라는 단어가 나오자 진산월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번뜩거렸다.
“본 파에 대해 잘 아시오?”
청삼 중년인은 다시 묘한 미소를 지었다.
“듣고 싶으면 살아남게.”
“무슨 말이오?”
“아직 자네는 자격이 없네. 내일 비무에서 살아남는다면 그때 비로소 나와 이야기를 나눌 자격이 생길 걸세. 그 전에는 들어도 아무 쓸모없는 일이지.”
“그게 무슨 말이오?”
“궁금하면 살아남아 보라니까. 종남파의 젊은 장문인 친구,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말게.”
청삼 중년인은 슬쩍 손을 흔들더니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 빠르지 않은 것 같았는데도 일단 신형이 움직이자 순식간에 한 줄기 연기처럼 장내에서 모습을 감춰 버렸다. 진산월이 눈을 빛내고 그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보았을 때는 이미 그의 몸이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 후였다.
진산월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그의 신형이 서 있던 곳을 한동안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청의 중년인이 떠날 때의 움직임이 이상하게도 마음에 걸렸다. 어딘지 익숙한 듯하면서도 현묘한 무언가가 느껴졌던 것이다.
그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과 그가 내뱉은 말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진산월의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 복잡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특히 자신의 동작에 불필요한 허세가 들어 있다는 말과 여섯 걸음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무엇보다 신경 쓰였다.
“허세라? 뽐내지 말라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무심코 중얼거리던 진산월의 눈에서 갑자기 번쩍하는 신광이 흘러나왔다. 뒤이어 그의 몸이 무언가 거대한 벼락에 관통당한 듯 세차게 흔들렸다.
“뽐내지 마라…… 뽐내지 않는다(無艶)……?”
그리고 열두 걸음에 부족한 여섯 걸음을 합치면 모두 열여덟 걸음이다.
뽐내지 않는 열여덟 걸음!
그것은 한때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보법이며, 종남파의 자랑이었던 한 무공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무염십팔보(無艶十八步).
줄여서 무염보라고 부르기도 하고, 누구는 십팔무염(十八無艶)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백 년 전에 비선 조심향을 강호무림 최고의 신법고수로 만들었던 전설적인 무학!
이제 비로소 진산월은 진실의 한 자락을 알게 되었다.
철혈홍안이 알려준 열두 걸음은 바로 무염십팔보의 전반부와 중반부였다. 후반부 여섯 걸음이 없었기에 진산월은 계속 무언가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체 철혈홍안은 어떻게 이미 오래전에 실전되었던 무염보를 알고 있는 것일까?
그녀가 자신에게 무염보의 열두 걸음을 알려준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그리고 무염보의 모자란 여섯 걸음을 알고 있는 청삼 중년인의 정체는?
그가 당각과의 생사를 다투는 결전 전날에 자신을 찾아와 그 사실을 알려준 진정한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한동안 복잡한 상념에 잠겨 있던 진산월이 갑자기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은 조금 전에 청삼 중년인이 서 있던 곳에 못 박히듯 고정되어 있었다.
청삼 중년인이 머물러 있다가 홀연히 떠난 바닥에 몇 개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흡사 진흙더미를 세게 밟은 것처럼 바닥을 움푹 파고 들어간 선명한 발자국들.
그 수는 정확히 여섯 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