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1권 악산대전(嶽山大戰)편 : 7화
제 319 장 대전서막(大戰序幕)
낙일방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눈을 붙인 시간은 채 한 시진도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도 정신은 더할 수 없이 또렷했고, 머릿속은 명경지수처럼 맑았다.
새벽에 장문사형을 찾으러 갔던 성락중 사숙이 돌아와서 장문사형이 곧 올 거라는 말을 듣고 난 후에는 줄곧 지금처럼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운공조식이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으나, 오늘밤은 그냥 이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고 싶었다.
한동안은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처음 종남파에 입문했을 때의 기억도 떠올랐고, 장문사형을 따라 강호에 출도했을 때의 모습도 생각이 났다. 그때의 자신은 어쩌면 그리도 철이 없고 충동적이었는지…….
그런 자신을 단 한 번도 꾸짖지 않고 늘 뒤에서 듬직하게 지켜주던 장문사형과 언제나 온화한 미소로 자신을 맞아주던 친 누이 같은 사저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형제보다도 더욱 혈육(血肉)같았던 사형 사매들……. 그들 중 일부는 비록 지금 함께 할 수 없지만, 마음만은 늘 자신들과 함께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스러웠던 몇 년간의 기억과 장문사형을 따라 두 번째로 나선 무림행에서 강호가 좁다하고 누비며 종횡하던 기억이 교차로 떠올라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많은 땀과 많은 눈물을 흘린 고난의 세월이었다.
이제 몇 시진 후면 그동안 흘렸던 그 많은 땀과 눈물에 대한 결과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과연 수십 년간 누대(累代)에 걸친 한(恨)을 풀고 형산파에 설욕하게 될지, 아니면 또 다시 치욕 속에서 비통하게 주저앉고 말지 판가름 나게 될 것이다.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단지 낙일방은 이러한 중대한 일에 자신의 미력한 힘이나마 보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문득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니…….’
낙일방은 떠오를 듯 떠오를 듯 하면서도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는 어머니의 얼굴을 몇 번이나 되새겨 본 후에야 비로소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었다.
선이 고운 얼굴에 유난히 눈물이 많았던 어머니는 낙일방의 나이 일곱 살 때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병에 걸려 누웠을 때부터 그녀는 낙일방을 보며 계속 눈물을 흘렸는데, 막상 병세가 악화되어 숨이 끊어질 즈음에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때 그녀의 텅 비어버린 듯한 공허한 눈동자는 오랫동안 낙일방을 괴롭게 했다.
그래서 낙일방은 그동안 의식적으로라도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저 멍하니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소리도 없이 숨을 멈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어머니의 눈 속에 담긴 것은 깊고 깊은 절망이었다. 어머니는 성질 급하고 참을성 없는 낙일방이 홀로 남겨진 세상에서 도저히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절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와 계모 밑에서 계속 있었다면 어쩌면 낙일방은 그렇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하나 그는 집을 뛰쳐나왔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종남파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길고도 험난한 여정 끝에 비로소 한 명의 남자로서 온전히 선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잘 계시죠? 이제 걱정 마세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잠깐이라도 잠들 수 있었다.
방 밖으로 들리는 소란스런 소리에 낙일방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은 맑았고, 기분은 고양되어 있었다. 몇 차례 몸을 움직여보자 어디 한 군데 막힌 곳이 없이 부드럽게 돌아갔고, 기의 흐름도 순조로웠다. 이런 상태라면 어떤 상대라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시릴 듯 푸른 하늘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명산(名山) 특유의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차갑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던 낙일방은 자신의 앞으로 걸어오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전 사형.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전흠은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특유의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넌 잠이 오더냐?”
“사실은 생각할 게 많아서 한 시진 밖에 못잤습니다. 사형께선 어떠셨습니까?”
전흠은 무언가 못마땅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눈살을 찌푸리고 있더니 별다른 대답도 없이 휑하니 몸을 돌렸다.
낙일방은 전흠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그의 심정을 알 것 같아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다시 한 사람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한 시진밖에 못잤다고?”
낙일방은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밝은 웃음을 지었다.
“장문사형. 일어나셨습니까?”
그곳에는 진산월이 당당한 자세로 서 있었다.
진산월의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고 있던 동중산은 준수한 얼굴이 활짝 펴지도록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낙일방을 보고는 속으로 살짝 웃고 말았다.
‘낙 사숙은 정말 여전하구나. 장문인이 저리도 좋은가?’
진산월은 낙일방의 전신을 빠르게 훑어보고는 이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한 시진을 잔 것 치고는 얼굴이 좋아 보이는군. 그동안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는 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낙일방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진지했고, 일견 비장해 보이기도 했다.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너는 네 할 일만 다하면 되는 것이다. 나머지는 두 분 사숙과 나를 믿도록 해라.”
“예, 장문사형.”
진산월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마침 사숙들께 문안인사를 드리려던 참이었다. 같이 가겠느냐?”
“그러지요.”
두 사형제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동중산은 그들을 따라가려다 한쪽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오고 있는 손풍을 발견했다.
“손 사제. 이제 일어났는가?”
손풍은 까치집같이 헝클어진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있는 대로 인상을 찡그렸다.
“일어나긴? 아예 한 잠도 못잤소.”
“왜? 자네가 비무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긴장되었단 말인가?”
손풍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부릅 뜨고 동중산을 쏘아보았다.
“긴장은 무슨. 내 옆방이 전 사숙의 방이 아니오?”
“그런데?”
“그 양반이 뭘 잘못 먹었는지 밤새 끙끙거리다가 갑자기 밖으로 뛰어나가 한바탕 검을 휘두르고 들어오는 게 아니겠소? 잠이 들만 하면 그러는 통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단 말이오.”
“전 사숙께서?”
“하도 그런 행동을 반복하기에 나중에는 몇 번이나 그러는지 세어보기까지 했소. 여덟 번인가 헤아리다가 그 짓도 지겨워서 그만 두었지만 말이오.”
동중산은 약간 걱정스럽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이제 와서 자신이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미 밤은 지나갔고, 아침 해가 훤히 떠오른 상태였다.
“전 사숙께서 결전을 앞두고 마음을 다스리는데 고생하신 모양이군. 하지만 덕분에 검은 더욱 날카로워 졌을 테니 너무 걱정 말게.”
손풍은 입을 삐죽거렸다.
“내가 왜 전 사숙을 걱정한단 말이오? 괜히 방을 잘못 잡은 바람에 잠도 제대로 못잔 나 자신을 걱정해야지. 아무튼 나는 아침 먹고 잠깐 눈이라도 붙일 테니 시간이 되면 깨워주시오.”
동중산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손풍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다시 자겠단 말인가?”
“그럼 어쩌겠소? 너무 졸려서 이러다가는 막상 형산파와의 비무를 보는 도중에 잠들지도 모르겠는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아무튼 난 주린 배 좀 채운다음 내 방에 들어가서 잘 테니 사시가 지날 때쯤 깨워주시오. 사형만 믿겠소.”
손풍은 동중산이 무어라고 할 사이도 없이 재빨리 식당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동중산은 손풍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좀 나아졌나 했더니 아직도 옛 버릇을 버리지 못했군. 그나저나 오늘 같은 날에도 저런 행동을 하다니 생각이 없는 건지, 배짱이 좋은 건지…….”
동중산은 씁쓸하게 웃으면서도 이 정도라면 결전당일의 아침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은 분위기라고 생각했다.
너무 긴장되거나 딱딱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풀어져서 방심한 상태도 아니었다. 적당한 긴장감과 가벼운 흥분이 감돌고 있는 종남파의 아침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우적지 일대는 이른 아침부터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평소에도 절경으로 유명해서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도 없이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무당파의 도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무림인들이었다.
우적지는 물론이고 우적지를 가로지르는 우적교의 돌다리 위에도 사람들로 가득 뒤덮여서 혹시라도 다리가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길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적지 중앙에 있는 정자와 그 앞의 공터는 비어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왔다!”
웅성거림이 더욱 커져서 소란스런 함성이 되었고, 고함과 박수소리, 웃음소리가 뒤섞여 장내는 그야말로 혼잡스러웠다.
인파의 한쪽이 갈라지며 일단의 무리들이 장내로 들어왔다.
“종남파다!”
“신검무적이다!”
주위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옥면신권과 무영검군도 있다!”
“와아!”
종남파의 고수들은 자신들을 향해 열띤 함성을 보내는 군웅들을 다소는 놀라고 다소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자신들이 이런 환호를 받게 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모습들이었다.
서장무림과의 중요한 싸움이 코앞으로 닥친 상황에서 이미 구대문파의 한 자리를 굳건히 차지하고 있는 형산파와 비무를 벌인다는 점 때문에 어쩌면 무림인들의 외면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눈자위가 다소 부어 있는 손풍이 동중산을 향해 소리치듯 물었다.
“이 사람들 왜 이래요? 왜 이렇게 박수와 함성을 내지르는 거죠?”
동중산 또한 엄청난 환호에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나 이미 몇 번의 유사한 경험으로 무림인들의 종남파에 대한 기대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짐짓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만큼 본 파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지.”
“그래도 이건…….”
“본 파에 대한 무림인들의 성원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제 알겠지? 그러니 무릇 본 파의 제자라면 행동 하나하나에도 신중해야 하네.”
“어이구. 주위가 너무 시끄러워서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안들리네.”
동중산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잔소리를 할 듯 하자 손풍이 천연덕스럽게 귓전을 후벼 파며 앞으로 훌쩍 이동해 버렸다. 그 경망스러운 모습에 동중산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여기서 무어라고 해봤자 소 귀에 경 읽기 임을 깨달은 것이다.
종남파의 고수들이 정자 앞으로 다가가자 정자 안에서 몇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바로 오늘의 비무에 공증을 서게 될 공증인들이었다.
그들의 면면은 놀라운 것이었다. 소림사의 장문인인 대방선사와 무당파의 장교인 현령진인, 그리고 무림맹의 맹주인 일장개천지 위지립이 바로 그들이었던 것이다.
그것만 보아도 무림인들이 이번 형산파와 종남파의 비무에 대해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대방선사가 먼저 진산월을 반갑게 맞았다.
“진 장문인. 오셨구려.”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오. 오히려 이런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소.”
진산월은 대방선사에게 공증인을 부탁했고, 대방선사는 선뜻 그 제안을 수락했다. 형산파에서는 현령진인을 공증인으로 내세웠고, 위지립은 중립된 입장에서 이번 비무에 대한 공증을 맡기로 했던 것이다.
진산월과 종남파의 고수들이 세 명의 공증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우와! 형산파다!”
사람들의 함성과 함께 한 떼의 인물들이 장내로 들어섰다.
그들의 용모와 나이는 서로 달랐지만,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다. 청삼에 청건, 그리고 허리춤에 매달린 푸른 색 수실의 장검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을 보자 동중산은 절로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형산파의 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비무에 대한 규칙은 단순했다.
양 파에서 각기 한 명의 고수가 나와서 모두 다섯 차례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승패는 어느 한 쪽이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부상을 입었거나, 기권을 하는 경우가 아니면 공증인 세 사람이 모두 합의하에 결정하기로 했다.
출전 방식은 조금 특이했다.
첫 번째 비무는 종남파의 고수가 먼저 나오고, 이어서 두 번 째의 비무는 형산파에서 먼저 출전하는 식으로 순서를 정했는데, 얼핏 보기에는 상당히 공정한 것 같아도 조금만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방식이 형산파에 상당히 유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에서 나오는 고수를 보고 얼마든지 출전자를 바꿀 수 있기 때문에 비무에 출전할 고수의 수가 한정되어 있는 종남파보다는 형산파에서 좀 더 선택의 폭을 넓게 활용할 수가 있었다.
더구나 형산파에서는 세 번이나 종남파의 출전자를 보고 고수를 내보낼 수 있는 반면에 종남파는 두 번에 불과했다. 단 한 번의 차이였지만, 충분히 전체의 승부에 영향력을 끼칠 수도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종남파에서도 이 점을 알고 있었으나, 그들이 형산파에 도전하는 형국이었기에 약간의 불리함은 감수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태양이 점점 중천(中天)에 가까워올수록 주위의 소란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정확히 정오가 되자 그토록 시끄럽던 우적지 일대가 적막강산처럼 조용해졌다.
그리고 한 사람이 천천히 종남파의 진영에서 걸어 나왔다.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구, 별빛처럼 반짝이는 두 눈에 우뚝 솟은 콧날과 여인의 그것처럼 붉은 입술을 지닌 천하에 보기 드문 미남자였다. 눈부신 백의를 차려 입고 이마에 영웅건을 두른 그 미남자를 보자 고요함이 감돌았던 장내가 삽시간에 터져나갈 듯한 함성에 휩싸여 버렸다.
“와아! 옥면신권이다!”
“종남파에서 처음부터 세게 나오는구나. 후기지수 중의 제일권사(第一拳士)라는 옥면신권을 가장 먼저 내보낼 줄이야!”
모두들 환호하는 와중에도 적지 않은 놀라움을 느꼈다.
신검무적에 이은 종남파의 이인자로 인정받고 있는 옥면신권이 비무의 첫 번째 출전자가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번 비무에 종남파가 얼마나 결연한 마음으로 임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그들의 비장한 각오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귀청이 찢어질 듯한 군웅들의 엄청난 환호를 받으면서도 낙일방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 담담한 얼굴로 우적지의 공터 중앙으로 가서 우뚝 섰다. 때마침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한바탕 휘감고 지나가자 ‘임풍옥수(臨風玉樹)!’라는 탄성이 절로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주위의 시선이 점차로 형산파에 쏠리기 시작했다. 종남파에서는 처음부터 옥면신권을 내보내는 강수를 두었는데, 형산파에서는 어떻게 대응할지 귀추가 주목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형산파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본 순간, 중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용선생이라니…….”
그는 다름 아닌 형산파의 수석장로이며 최고 어른인 용선생이었던 것이다.
옥면신권의 상대로 등장한 인물이 용선생임을 확인하자 사방이 온통 끓는 주전자뚜껑처럼 요란스러워졌다.
용선생은 형산파는 물론이고 강호 무림 전체를 놓고 보아도 가장 윗대에 속할 만큼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형산파가 자랑하는 오결검객 보다도 한 배(輩)가 높았고, 환우삼성과 동년배의 고수였다.
이미 팔십이 훨씬 넘은 그가 이제 약관을 갓 넘어선 옥면신권을 상대하기 위해 나섰으니 중인들이 경악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이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두 사람 사이에는 어머어마한 간극이 있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종남파 만큼이나 형산파도 이번 비무에 승리하기 위해 필사적임을 깨닫게 되었다. 강호에서의 예의나 염치를 따지기에는 그들도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용선생은 느릿한 걸음으로 낙일방의 삼 장 앞까지 다가갔다. 낙일방 또한 자신의 상대가 용선생이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던지 준수한 얼굴이 순간적으로 살짝 굳어져 있었다.
용선생은 눈이 부실 듯 빛나는 낙일방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고는 한숨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젊구나. 너무 젊어. 막상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마주 서고 보니 정말 젊은 나이로구나.”
그 음성에는 무어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낙일방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강호에서 나이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용선생의 얼굴에는 여전히 씁쓸한 빛이 어른거렸다.
“그렇지. 하지만 자네는…….”
“저는 종남파를 대표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형산파를 대표하는 선배님과 한 수 겨룰 수 있게 되어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도발적이고 어찌 보면 패기가 물씬 나오는 그 음성에 용선생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낙일방은 천천히 양 손을 들어 올려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종남파 이십일대 제자 낙일방입니다.”
그리 크지 않으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낭랑하고 힘 있는 음성이었다. 주위가 제법 시끄러웠음에도 그 음성은 아주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용선생 또한 울적했던 빛을 지우고 차분한 표정으로 답례를 했다.
“형산파의 십일대 제자인 용성음이라 하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본 채 나란히 서자 장내가 금시라도 터져나갈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쪽은 오랫동안 강호 무림의 거목으로 군림해온 무림구봉 중의 일인이며 지법(指法)에 관한한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는 전설적인 무인.
다른 한쪽은 혜성같이 나타나 뭇 고수들을 연파하여 일약 강호후기지수 중의 제일인자로 인정받으며 강호제일권사를 꿈꾸고 있는 신성.
나이를 비롯한 모든 것이 너무도 판이한 두 사람이 첫 번째 비무에서 맞서게 되자 중인들은 세차게 뛰는 가슴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종남파 고수들의 심정도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낙일방의 상대로 용선생이라는 예상 밖의 거물이 나오자 크게 긴장하는 모습들이었다.
동중산은 형산파에 한 방 맞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용선생은 누가 무어라 해도 형산파의 최고 어른이었다. 동중산은 그의 연배나 비중으로 보아 이번 비무에 그가 나오지 않을 가능성도 제법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아랫 항렬인 오결검객만 해도 종남파의 장문인인 진산월보다 한 배가 높은 상황에서, 굳이 그가 아랫 사람들의 대결에 끼어들어 일신의 영명을 어지럽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그가 출전한다 해도 마지막 비무에서 진산월의 상대로 나오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그런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용선생은 손자뻘 밖에 되지 않는 낙일방을 상대하기 위해 형산파의 첫 번째 출전자로 등장한 것이다.
낙일방이 비록 후기지수 중의 제일고수이며 임독양맥을 타통한 막강한 실력의 소유자라고 해도 과연 무림구봉 중의 한 사람인 용선생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 동중산은 도저히 자신할 수가 없었다.
동중산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진산월을 돌아보았으나, 진산월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다만 장내를 응시하는 그의 두 눈이 유난히 깊게 침잠되어 있다는 것이 동중산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쾅!
갑자기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엄청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동중산은 깜짝 놀라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낙일방과 용선생이 마주 보고 서있던 공간이 세찬 경기에 휩싸이며 뿌연 먼지와 부서진 돌가루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자욱한 흙먼지 사이로 두 개의 인영이 어른거리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동중산이 안력을 돋우어 보니 희끗한 두 인영이 서로 맹렬하게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조금 전의 폭음은 그들이 처음으로 격돌하면서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신형이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동중산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누가 우세한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점차로 먼지가 걷히고 장내의 광경이 한 눈에 들어왔으나, 여전히 보이는 것이라고는 희끗한 두 개의 그림자 뿐이었다.
그러다 다시 두 그림자가 정면으로 부딪히며 또 한 차례 거센 폭음이 들려왔다.
콰앙!
이번의 폭음은 처음보다 더욱 커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조차 인상을 찡그리며 귀를 틀어막을 정도였다.
거센 경기가 부서진 돌가루들과 함께 자욱하게 몰아쳐왔다.
동중산이 눈을 부릅뜨고 피하려 할 때, 진산월이 한 차례 소매를 내저었다.
그러자 그토록 세찬 기세로 닥쳐오던 경기와 돌가루들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동중산은 진산월에게 고마움을 표할 겨를도 없이 미친 사람처럼 장내에 집중했다.
낙일방과 용선생은 처음의 위치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은 상태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 그러다 낙일방의 몸이 한 차례 휘청이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에 비해 용선생의 몸은 철탑처럼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종남파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어두워졌다. 임독양맥을 타통하여 절정에 다다른 낙일방이었지만, 내공으로는 여전히 용선생에게 한 수 뒤진 다는 게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용선생은 문득 자신의 왼손을 살펴보았다. 주름이 거의 없어서 젊은이의 손을 보는 듯 깨끗한 그의 손등에 시커먼 멍자국이 나 있었다.
한동안 자신의 손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용선생이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무거운 주먹이로군.”
낙일방은 슬쩍 왼쪽 소맷자락을 들어보였다. 깨알만한 구멍 두 개가 뚫려 있었다.
“선배님의 손가락도 아주 매섭군요.”
조금 전의 일전에서 두 사람은 두 번의 정면 격돌과 다섯 번의 공수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결과 수법의 겨룸은 막상막하였고, 내공은 낙일방이 아주 미세하게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용선생은 새삼스런 눈으로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자네 나이에 이와 같은 공력과 권법을 익히기란 정말 쉽지가 않을 텐데 대단하군. 어느 분을 사사했는지 알 수 있겠나?”
낙일방은 굳이 숨기지 않았다.
“선사는 전대 장문인이셨던 태평검객 이시며, 권법은 따로 해조림 사조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오, 그렇군.”
용선생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태평검객과 낙일검이라면 검법은 몰라도 권법에 관해서는 별다른 실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을 텐데 이상한 일이군.’
몇 수 겨루지 않았으나, 그가 겪어본 낙일방의 무공은 결코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나이답지 않은 정순하고 심후한 내공도 놀라웠지만, 권법의 강력함은 그 이상이었다.
절정고수란 결코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동안의 고련(苦練)은 물론이고, 충실한 지도와 본인 자신의 특출한 재질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익히고 있는 무공 자체의 뛰어남도 중요하다.
그런 모든 걸 이룬다 해도 절정에 이르기 위해서는 또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
단계를 극복한다는 것은 그만큼 지난(至難)한 일이다. 평생을 도검과 함께 살아온 무림인들이 즐비한 강호무림에서 절정고수를 보기 힘든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용선생은 평생 동안 무공을 수련해 왔지만, 절정의 경지에 이른 것은 육십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지법으로 하나의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절정에 이르고 나서야 용선생은 ‘산은 끝없이 높고, 바다는 끝없이 넓다’라는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무림구봉의 일인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약간의 세월이 흐른 후였으며, 누구도 그를 지봉(指峯)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게 된 것은 그때부터 또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모두가 인정하는 당대 무림 지법의 최고봉!
용선생은 그런 명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실력을 닦는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검법으로 유명한 형산파의 최고 어른이면서도 단 하나의 검법도 익히지 않았지만, 그만큼 지법과 수공에 관한 그의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형산파에는 모두 아홉 종의 검법과 일곱 종의 수예(手藝), 그리고 다섯 종의 신공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중 일곱 종의 수예를 모두 완성하고, 두 종의 신공을 완벽히 터득한 인물이 바로 용선생이었다.
지금 그는 자신이 팔십 년 가까운 세월동안 고련한 증거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파파팍!
그의 양손이 가볍게 움직일 때마다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칼날 같은 경기가 낙일방의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그 경기 한 가닥 한 가닥에 실린 힘은 금석이라도 두부처럼 뚫어버릴 정도로 막강한 것이었다.
낙일방은 낙뢰신권과 구반장법을 번갈아가며 펼쳐 용선생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섰다. 용선생의 무시무시한 경기를 두 주먹과 장력만으로 파해하며 중단 없이 앞으로 돌진하는 그의 공세는 한없이 거친 듯 하면서도 정교하고 치밀해서 좀처럼 틈이 보이지 않았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맹렬한 공방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결전은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송두리째 집중시켰다. 온갖 절묘한 절기들이 줄지어 펼쳐졌고,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한 수법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중인들은 탄성을 내지르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천동지할 격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용선생의 손이 막강한 권풍의 소용돌이 속을 교묘하게 뚫고 들어가면 금시라도 낙일방의 몸에 핏구멍이 생겨날 것 같았고, 뇌전처럼 빠른 낙일방의 주먹이 번쩍일 때면 용선생의 주름진 얼굴이 산산이 박살나 버릴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전혀 승부를 예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싸움이 계속되자 주위는 그들이 내뻗는 경기와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 외에는 죽음과도 같은 적막감이 감돌았다.
현격한 나이와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무공은 그야말로 백중지세(伯仲之勢)여서 누가 승리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문득 넋을 잃고 두 노소(老少)의 싸움을 보고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작은 목소리로 옆 사람에게 물었다.
“누가 이길 것 같은가? 난 아무리 봐도 모르겠군.”
옆 사람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장내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짤막하게 대꾸했다.
“자네도 모르는 걸 난들 알겠나?”
“짐작이라도 해보게. 아무래도 무공을 보는 안목은 자네가 나보다 더 좋지 않겠나?”
“단순히 짐작만 가지고 이런 승부를 어떻게 예측한단 말인가?”
옆 사람이 계속 거절을 하자 그 사람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길. 말 한 번 듣기 힘들군. 그래도 나이와 경력이 있는데, 용선생이 조금 더 유리하겠지?”
“나이라면 오히려 저 젊은 친구가 유리하지. 젊음이 가장 큰 재산이라는 말도 모르나?”
“그러면 자네는 옥면신권이 이길 거라고 본단 말이지?”
“누가 그가 더 유리하다고 했나? 자네가 나이 얘기를 꺼내니까 한 말이지. 솔직히 젊으면 장기전으로 갈수록 체력적으로 유리하기는 하겠지.”
“그럼…….”
“속단하지 말게. 절정 고수들간의 싸움에서 체력은 여러 가지 요소들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네.”
“그럼 뭐가 또 중요한가?”
“대적(對敵)경험도 무시할 수 없지. 특히 지금처럼 비슷한 실력을 가진 절정 고수들 간의 싸움을 한 번이라도 경험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는 무척 중요하네.”
그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라면 용선생이 훨씬 더 유리하지 않겠나? 그 분이 강호에서 활동한 세월을 생각해 본다면 말일세.”
“문제는 용선생의 명성일세.”
“명성이 어때서?”
“용선생 같이 수십 년간 강호무림의 최고고수로 군림해오며 혁혁한 명성을 쌓은 사람이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고수들과 다툴 일이 어디 있겠나?”
“하긴. 최근 몇 년간 용선생이 누구와 싸웠다는 말은 나도 들어본 적이 없군. 그렇다면 옥면신권은?”
“그에 비해 옥면신권은 종남혈사를 비롯해서 최근까지도 제법 치열한 싸움을 많이 겪었다고 하더군.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대적경험은 결코 적지 않을 거야.”
“나이도 유리하고 대적경험도 유리하단 말이지? 자네는 옥면신권이 승리할 거라고 보는군?”
의외로 옆 사람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 정도로는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지. 난 오히려 승부를 건다면 용선생이 조금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네.”
“그건 왜 그런가?”
“절정 고수들간의 승부에서 체력이나 대적 경험보다 더욱 중요한 요소가 있네.”
“그게 무엇인가?”
옆 사람의 눈빛이 여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났다.
“무공에 대한 깊이일세.”
“깊이?”
“다시 말해서 자신이 익힌 무공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 용선생은 수십 년간 지법과 수공에 대해서만 일로매진해 온 사람일세. 그러니 자신의 무공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봐야지. 그에 비해 저 젊은 친구는…….”
“아무래도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완벽할 수는 없겠지. 절정무공일수록 그것을 완벽하게 터득하는데 오랜 시일이 소요되니 말일세.”
“바로 그렇다네. 저 젊은 친구는 비록 뛰어난 재질로 어린 나이에 높은 성취를 이루었지만, 아직 무공의 깊이면에서는 용선생에 견줄 수 없네. 적어도 몇 년의 고련을 더 거쳤다면 몰라도 말이지.”
그 사람은 용선생과 치열하게 맞서는 낙일방을 한동안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군. 정말 아쉬운 일이야. 왜 하필이면 지금 용선생을 만나서…….”
“그게 운(運)이란 거겠지.”
그 말을 끝으로 그들 두 사람, 귀호와 교리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을 지킨 채 장내의 격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용선생과 낙일방의 싸움은 그야말로 절정을 향해 치달려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은 이미 흐르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의복은 몇 군데가 찢기거나 바스러져 맨 살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항상 단정히 묶여있던 용선생의 머리카락도 약간은 흐트러져 있었고, 준수했던 낙일방의 얼굴도 군데군데 피멍이 들어 있었다.
하나 두 사람은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은 채 상대를 향해 더욱 매섭게 손을 휘두르고 있었다.
낙일방은 자신의 공력이 점차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았다. 임독양맥을 타통한 뒤로 마르지 않은 샘물처럼 끝없이 솟아올라왔던 내공의 흐름이 가끔씩 멈추거나 끊겨 곤란을 겪을 때가 있었다. 그에 비해 용선생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경기의 위력은 처음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낙일방은 이제 승부를 내야할 시간이 다가옴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내공의 부족으로 낭패를 당할 게 분명했다. 새삼 용선생의 대해(大海)와 같은 내공에 경의심이 느껴졌다.
지금 낙일방은 낙뢰신권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구반장법의 절초들로 용선생의 서설지(瑞雪指)와 유혼십이수(遊魂十二手), 용음조(龍音爪)의 삼대절학에 맞서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듯한 가벼운 손가락 짓에 가공할 경력이 담긴 서설지, 허깨비처럼 자유자재로 허공을 유영하며 날아드는 유혼수, 그리고 용의 울부짖음을 연상케하는 파공음을 동반한 무시무시한 용음조는 오랫동안 용선생의 명성을 강호 최고의 지법 고수로 인정받게 한 최고의 절학들이었다.
낙뢰신권이 비록 파괴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지만, 낙뢰신권만으로 그 삼대절학을 막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낙일방은 변화무쌍한 구반장법을 펼친 후에야 용선생과 팽팽하게 맞설 수 있었으나,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초식이 꼬이거나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난맥상을 보이고 있었다.
용선생의 오른손이 유령의 손짓처럼 유연하게 머리 쪽으로 날아들자 낙일방은 양손을 번쩍 쳐들어 구반장법 중의 서우망월(犀牛望月)을 펼쳤다. 용선생의 손이 다가올 때처럼 소리도 없이 물러났다. 진퇴의 수발이 너무 부드러워서 마치 떠도는 혼백을 보는 듯 한 것이 유혼십이수의 특징이었다.
낙일방은 양손을 쳐든 자세로 재빠르게 몸을 회전시켰다. 그러자 용선생의 손이 물러나는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낙일방의 등이 용선생 앞으로 다가들었다. 용선생이 자신의 코앞으로 무섭게 다가오는 낙일방의 등을 향해 손을 내뻗는 순간, 낙일방의 몸이 다시 무섭게 회전하며 쳐들었던 양 손이 폭풍노도와 같은 기세로 휘둘러졌다. 양손을 쳐드는 서우망월에서 몸을 회전시키는 마면배심(馬面背深), 그리고 회전하는 탄력을 이용해 양 손을 휘두르는 낭아선륜(狼牙旋輪)으로 이루어지는 이 초식이 바로 구반장법 중의 최절초인 삼전(三轉)이었다.
구반장법에는 삼수와 삼벽, 삼전의 세 가지 연환수법이 있는데, 낙일방은 그동안의 수련으로 삼수와 삼벽만을 익혀낸 상태였다가 얼마 전에야 비로소 구반장법의 가장 무서운 수법이라는 삼전을 수박 겉햝기 식으로라도 펼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완벽한 형태의 삼전은 아니었으나, 그 위력은 가히 놀라워서 지금까지 줄곧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용선생의 표정도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낙일방의 양손이 휘몰아쳐 다가오는 기세가 어찌나 강력하던지 마치 거대한 톱니바퀴가 자신의 몸을 잘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회전하는 속도가 그대로 살아있어 뒤로 피할 수도 없었다.
용선생은 양 팔을 활짝 벌렸다. 낙일방의 손이 무방비로 드러난 그의 머리와 가슴을 그대로 강타하려는 순간, 벌려졌던 용선생의 두 팔이 빠르게 합쳐졌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두 팔이 벌려졌다 합쳐지는 동작이 동시에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쾅!
손과 손이 마주치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주위의 공기가 폭발하는 듯한 거센 경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부서진 돌조각과 먼지들이 허공을 자욱히 수놓았다.
낙일방은 휘청거리며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얼굴에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해진 그의 입가에는 시뻘건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용선생의 모습도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용선생의 머리를 묶고 있던 두건이 풀려 백발성성한 머리카락이 어깨위로 폭포수처럼 흘러내렸고, 정기로 가득했던 눈빛 또한 순간적으로 탁해져 있었다.
하나 다음 순간,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빠르게 몸을 날렸다.
낙일방은 입으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두 눈을 무섭게 번뜩인 채 오른손을 앞으로 쭈욱 내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상상도 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기운이 그의 장심을 중심으로 휘몰아치고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종남파가 자랑하는 최고의 장공(掌功)인 태인장임을 알아본 사람은 종남파의 몇몇 고수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용선생 또한 산발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오른손을 빠르게 흔들었다. 그에 따라 그의 다섯 손가락이 마치 탄주(彈奏)를 하듯 교묘하게 튕겼다.
고오오오……
태인장의 가공할 장세가 구름처럼 용선생의 몸을 휩쓸어 버릴 듯한 기세로 몰아쳐왔다. 압축된 공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무시무시한 경기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광경에 중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장력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면 제아무리 단단한 몸뚱이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산산이 박살나 버릴 게 분명해 보였다.
파파팍!
몇 줄기의 섬광이 그 소용돌이 속을 번뜩이고 지나간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그것은 마치 검은 하늘을 비추는 달빛을 연상케 했다.
쿠르르릉!
우적지 일대가 지진이라도 만난 듯 뒤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모두 멈추었을 때 장내에 서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 뿐이었다.
용선생은 연신 휘청거리면서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우욱!”
한 차례 피를 토하면서도 용선생은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입가로 흐르는 피를 소맷자락으로 대충 닦은 용선생은 무거운 눈빛으로 삼 장 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백의를 입은 한 사람이 길게 쓰러져 있었다. 그 백의는 그가 보고 있는 와중에도 점차 혈의(血衣)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낙일방이었다. 낙일방의 옆구리와 어깨에는 몇 개의 피구멍이 뚫려 있어, 그곳에서 흐르는 피로 몸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종남파 진영에서 동중산이 빠르게 달려가 낙일방을 끌어안았다.
잠시 그의 상세를 살피던 동중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옆구리와 어깨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기는 했으나,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동중산은 낙일방의 몸을 지혈한 후에 그의 몸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종남파의 진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