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3권 회람연회편 :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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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3권 회람연회편 : 4화


제 328 장 심야밀담 (2)

진산월은 다소 불편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 이정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유 대협과 대엽진인의 행방은 어떻게 됐소?”

이정문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휴우. 실은 그 건 때문에 이 야밤에 진 장문인을 급히 만나려고 온거요.”

이어서 이정문은 육난음이 자신에게 한 말을 그대로 전해 주었다.

육난음은 이정문의 지시로 어제 오전부터 유중악을 은밀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유중악은 자신의 거처에서 머물러 있었다. 중간에 차를 가져다주는 시동이 한 번출입한 것 외에는 그를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그도 또한 외부로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변고가 발생한 것은 사시(E時) 무렵이었다. 숙소의 자기 방에서 마음을 가다듬으려는 듯 꼼짝도 않고 있던 유중악이 돌연 방을 벗어나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몰래 숨어서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육난음은 유중악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방을 벗어날 때 유중악의 얼굴 표정은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것이다.

유중악은 ‘신창조화 의기춘추’라는 말로 유명한 강호 제일의 호한답게 어떤 일이 있어도 늘 침착했고,쉽게 일희일비하거나 경동하지 않았다. 그의 그런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더 그를 믿고 따랐을지도 몰랐다.

그런 유중악이 지금은 부모를 죽인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경직된 표정을 보이고 있으니 육난음이 놀라는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유중악의 행동이 워낙 갑작스러웠기에 그녀는 미처 이정문이나 성숙해의 고수들에게 연락할 겨를도 없이 황급히 유중악의 뒤를 밟았다.

방을 나온 유중악은 빠른 몸놀림으로 무당파의 경내를 벗어나 산 아래로 움직였다. 그의 발길은 근처의 가까운 봉우리로 향하고 있었다.

봉우리의 이름은 육난음도 알지 못했다. 제법 높은 봉우리는 크고 작은 암석들로 뒤덮여 있었는데, 유중악은 봉우리 정상 부근에 있는 커다란 암석의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육난음은 한참동안이나 유중악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일각이 가까워 오도록 그가 나오지 않자 암석으로 다가가 보았다.

암석 뒤편에는 제법 커다란 동굴이 뚫려 있었다. 육난음은 용기를 내어그 동굴로 들어갔다. 그리고 채 몇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의 암습을 받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의 일이었다. 그녀는 이내 자신의 몸이 완벽하게 제압당해 있음을 알았다.

‘휴우. 무언가 이상한 줄 알면서도 동굴 속으로 들어오다니,나답지 않게 한심한 짓이었어.’

속으로 한숨짓고 있던 그녀의 시야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난생처음 본다 싶을 정도로 준수한 남자가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자신을 암습한 자가 유중악인 줄로만 알고 있다가 미남자를 보고는 의아한 듯 눈을 살짝치 켜 떴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미남자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여자라면 누구라도 방심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인 미소였다.

“나는 임조몽이라 하오. 소호리의 명성을 듣고 언제고 육 소저를 꼭만나고 싶었는데,이런 자리에서 보게 되어 아쉽구려.”

그의 음성은 외모만큼이나 부드럽고 달콤해서 목소리만으로도 어떤 여인이든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육난음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솔한 여인은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은 바짝 긴장해 있는 상태이기에 그의 야릇한 눈빛이나 음성에도 전혀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 수 있었다.

육난음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물었다.

“유 대협은 어디에 있지요?”

임조몽은 그녀의 앙칼진 말에도 빙긋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건 유 대협 본인에게 물어봐야지 내가 그걸 어찌 알 수 있겠소?”

“당신이 나를 암습한 것이 아니란말인가요?”

“난 그저 이곳에 와서 육 소저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오.”

육난음은 그 말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은 왜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요?”

“소저를 한 사람에게 데려가기 위해서요.”

“그가 누군가요?”

“혁리공이란 사람이오.”

육난음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다시 임조몽을 향해 물었다.

“혁리가의 공자가 왜 나를 보려고하는 거지요?”

“한 가지 얻고 싶은 게 있다고 하더구려.”

“나는 혁리공을 알지도 못하는데,그가 내게서 얻고자 하는 게 대체무언가요?”

“간단한 거요. 소저를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이오.”

“나를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이라뇨?”

“보기만 하면 누구라도 소저의 것임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그런 물건 말이오.”

그녀의 눈썹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 물건이 왜 필요한 거죠?”

임조몽은 다시 웃었다.

“그건 내가 혁리공이 아니라서 모르겠소.”

그녀는 얄미운 생각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무작정 임조몽에게 화를 낼수는 없었다.

“만약 그런 물건이 없다면? 그럼나를 고문할 건가요?”

“내가 어찌 육 소저에게 그런 야만 적인 짓을 할 수 있겠소? 믿지 못할지 모르지만,나는 아직까지 여인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소.”

육소저는 그의 맑고 투명한 두 눈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믿겠어요.”

“처음 보는 나를 선뜻 믿어주니 정말 고마운 일이오. 하지만 문제는 혁리공이오.”

“그가 왜요?”

“나는 육 소저가 그런 물건이 없다는 말에 순순히 물러나겠지만,혁리공은 절대로 그렇지 않을 거요. 이대로 육 소저가 혁리공에게 가면 혁리공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 육 소저에게 모진 일을 할 거요. 그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오.”

그것은 육난음이 누구보다 더 잘알고 있었다. 이정문과 함께 혁리공의 뒤를 추적하면서 혁리공이 어떠한 성격의 인물인지를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난음의 마음은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임조몽은 이내 예의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를 다독거렸다.

“나는 육 소저를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오. 그러니 내가 육 소저를 도울 수 있도록 육 소저도 내게 아량을 베풀어 주시오.”

“내가 어떻게 아량을 베풀라는 거죠?”

“육 소저를 나타낼 수 있는 물건을 건네주시오. 그러면 이번 일이 끝날때까지 육 소저의 신상에 털끝만 한 위험도 없다는 것을 보장하겠소.”

육난음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계속 부인하면 임조몽은 자신의 말대로 그녀에게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고 혁리공에게로 그녀를 데려갈 것이다. 일단 혁리공의 수중에 넘어가게 되면 그녀가 무슨 꼴을 당하게 될지 충분히 상상이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신물을 넘긴다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두려웠으나,자신에게 다른 선택의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육난음의 원앙패가 혁리공의 손을 거쳐 이정문에게 전해지게 된 내력이었다.

원앙패를 넘긴 후 육난음은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혁리공이 원앙패를 원했던 이유는 자신의 정인인 이정문을 유인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이정문이 단순히 원앙패 하나만으로 함정에 빠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자기 때문에 그가 곤경에 처하게 되었으니 그녀로서는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런 신세가 되었나 몇 번이고 되짚어 보았고,그결과 한 가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 모든 원인은 유 대협이 갑자기 무당파를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처 가가에게 연락을 취할 겨룰도 없이 허겁지겁 이곳으로 유인된 것이다. 그렇다면 유 대협은 왜그토록 다급히 자신의 방을 나선 것일까?’

유중악이 단순히 그녀를 유인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유중악을 지켜보게 된것은 오늘 아침에 이정문에게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며,그전에는 자신조차도 유중악을 지척에서 관찰하게 되리라고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중악이 갑자기 방을 벗어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며,그의 표정으로 보아 그것은 그 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심각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침부터 내내 방에만 머물러 있던 유중악이 갑자기 놀라 방을 뛰쳐나올 정도의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녀가 지켜보는 동안에는 유중악을 찾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직 단 한 사람 외에는.

‘그 시동…….,

유중악에게 차를 가져다주러 온 시동만이 유중악과 접촉한 유일한 사람이 었다.

이정문에게 구출되어진 후 그녀는 자신이 느낀 의혹을 은밀히 그에게 밝혔고,이정문은 즉시 그 수하들을 풀어 시동의 행방을 추적했다.

시동의 이름은 온주명. 나이는 십육 세. 무당파의 속가제자인청풍객 온추림(溫秋林)의 아들로,이번 집회에서 유중악 일행의 처소를 담당하는 세 사람 중의 하나였다.

수하들이 온주명을 데려오자 이정문은 직접 그를 만났다.

온주명은 피부가 허옇고 나이답지 않게 키가 큰 소년이었다. 그는 주위의 삼엄한 기세에 기가 죽어 있었으며, 자신이 왜 끌려왔는지 영문을 몰라 하는 눈치였다.

이정문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네가 유 대협의 방을 관리하고 있느냐?”

온주명은 머뭇거리다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예. 저 말고도 두 사람이 더 있습니다.”

이정문은 그의 대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물음을 던졌다.

“어제 오전에 유 대협의 방에 차를 가지고 갔었느냐?”

“예. 맞습니다.”

“차만 가져다주었느냐?”

온주명은 찔끔거리며 이정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차 외에 다른 것을 가져다주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온주명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제가 유대협의 방으로 가져간 것은 찻잔과 차주전자뿐이 었습니 다.”

이정문은 그의 속을 훤히 꿰뚫어보려는 듯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느냐?”

온주명은 당황하여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예,정말 아무것도…….,,

“편지나 쪽지를 전하지 않았단 말이냐?”

이정문이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쳐다보며 중얼거리듯 묻자 온주명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조심스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편지라면……. 제가 전한 것은 아니지만 서신 하나가 있기는 했었습니다.”

“어떤 서신이냐?”

“제가 차를 가지고 들어가려고 유대협의 방문 앞으로 갔을 때 바닥에 놓여 있었습니다.”

뜻밖의 말에 이정문의 눈꼬리가 꿈틀거 렸다.

“방문 앞?”

“예.〈유중악 대협 친전〉이라고 적힌 서신이 바닥 한쪽에 놓여있기에 유 대협께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군가가 놓고 간 것이라고 생각해서 유 대협의 찻잔 옆에 올려놓았습니다.”

이정문은 그 후로 온주명에게 몇마디 더 물어보고는 그를 돌려보냈다. 온주명이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알아차렸던 것이다.

짐작대로 유중악은 누군가의 서신을 받고 얼굴이 굳어진 채 다급히 무당파를 벗어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가 동굴로 간 것은 서 신에 적힌 글 때문일까? 그곳에서 육난음을 암습한 사람은 과연 누구이며,그곳에서 유중악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정문은 곧장 그녀가 암습을 받은 동굴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을 샅살이 수색했다.

동굴은 제법 길었으며 한쪽이 막혀있었다. 하나 이정문은 곧 그 벽면이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내 특유의 예리한 눈썰미로 은밀하게 숨겨 있는 기관장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기관장치를 건드리자 막혀 있던 동굴 벽이 움직이며 반대쪽 출구가 드러났다.

조심스럽게 출구를 나온 이정문의 눈에 보인 것은 전혀 의외의 광경이었다.

“그 출구는 무당파의 동쪽 경내에 있는 울창한 수림으로 이어져 있었소. 그 수림을 벗어나면 곧바로 한 채의 건물을 볼 수 있소.”

묵묵히 이정문의 말을 듣고 있던 진산월은 짤막하게 물었다.

“그 건물이 어디요?”

이정문의 음성은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로 남암궁이오.”

줄곧 침착함을 유지했던 진산월도 이때만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천봉궁의 인물들이 머물러 있는 남암궁 말이오?”

“그렇소.”

잠시 두 사람 사이에 기이한 침묵이 감돌았다.

유중악이 사라진 동굴 너머의 암도가 천봉궁 인물들의 숙소인 남암궁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정문은 복잡한 상념에 잠겨 있는 진산월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가 심중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유 대협의 행적이 이어지는 곳도 천봉궁이고,대엽진인의 행방에 열쇠를 쥐고 있는 것도 천봉궁이오.

이번 두 사람의 실종은 어떤 식으로든 모두 천봉궁에 끈이 닿아 있는것이 분명하오.”

진산월은 이정문의 단호한 음성을 듣자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게 바라는 거라도 있소?”

이정문이 이 야심한 시각에 진산월을 찾아온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정문의 다음 말은 그의 예상이 맞았음을 확실하게 증명해주었다.

“진 장문인께서 해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소. 그 일은 오직 진 장문인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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