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43화
제 338 장 음모지야(1)
해가 뉘엿뉘엿 관도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낙일방은 누런 황톳길 저편으로 기울어가는 붉은 석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황량한 풍경이었지만,그만큼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뒤흔드는 광경이기도 했다.
뒤편을 돌아보면 지금까지 걸어온길이 긴 그림자와 함께 구불구불 펼쳐져 있고,앞을 바라보면 그 길이 이어져 마치 석양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석양을 바라보고 있자니 불현듯 누군가가 그리워졌다. 헤어진 지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벌써 장문사형이 보고 싶어졌다.
전홈이 선반에 가입하겠다며 진산월을 따라간다고 했을 때,낙일방은 솔직히 자신도 그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하나 그에게는 더욱 큰일이 주어져 있었다. 몸이 성치 않은 임영옥과 다른 제자들을 본산까지 무사히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이다.
부상이 워낙 심해 아직 제대로 운신할 수 없는 육천기가 경요궁의 고수들과 함께 무당산에 남기로 했기 에,실제로 종남산으로 가는 일행은 여섯 명에 불과했다.
강호에서는 언제 무슨 일이 닥쳐올지 알 수가 없는 법이다. 절정의 무공을 지닌 성락중과 강호 경험이 풍부한 동중산이 동행한다고 해도 쉽지 않은 여정일 게 뻔했다.
그래서일까? 황량한 관도 위에 서서 주위를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는 석양을 보자 아름답다기보다는 무언지 모를 불안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때 동중산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벌써 하루가 저물어가는군요. 오늘은 어디에서 묵을 계획인가요?”
“조금만 더 가면 마안이라는 마을이 나오는데,그곳에 제법 괜찮은 객잔이 있습니다. 예전에 들린 적이 있었는데,하루를 쉬었다 가기에 적당한 곳입니다.”
낙일방은 다시 한 차례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좀처럼 관도를 지나가는 사람을 볼 수가 없네요.
관도가 제법 넓은 데도 아까부터 우리 일행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더군요. 예전에도 이랬나요?”
“그러고 보니 확실히 오늘은 사람구경하기 힘들군요. 제가 지났을 때는 제법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조금 특이한 일이긴 합니다.”
“흠. 본산까지 가는 동안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말이죠.”
“제가 좀 더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낙일방은 동중산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너무 혼자 고생할 필요는 없어요.
나도 신경을 쓸 테니 무언가 이상한 일이 있다 싶으면 언제든지 나에게 알려줘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을 하는 낙일방도,대답하는 동중산도 종남산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아무런 변고가 없기를 정말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언제나 믿음직했던 진산월도 없고,임영옥의 몸도 정상이 아니었다. 게 다가 아직 무공이 변변치 않은 제자도 두 사람이나 동행하는 판국이었다. 불의의 사건으로 그들 중 누군가의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 다는 것은 만에 하나라도 생각하기 싫은 끔찍한 일이었다.
동중산의 말마따나 객잔은 상당히 좋았다. 크기도 상당했고 위치도 좋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후원에 각기 분리된 별실들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별실 하나를 독채로 얻으면 주위의 소란이나 번잡함을 피해 마음 편하게 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행이 별실에 자리를 잡고 여장을 풀었을 때,누군가가 그들을 찾아왔다.
찾아온 사람을 본 동중산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그걸 보고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그 표정은 뭐죠? 무언가 귀찮고 성가신 일이 생겼다는 뜻인가요?”
동중산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이런 곳에서 누 소저를 만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기에 잠깐 놀랐을 뿐이오.”
“단순히 놀란 게 아니라 질색을 하는 듯한 모습이군요. 내가 여기 온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그게 아니라는 건 누 소저도 잘알고 있지 않소?”
“흥.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는군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누산산이었다.
천봉궁의 인물들은 종남파보다 하루 먼저 무당산을 떠났는데,별다른 작별 인사도 없이 아침 일찍 모습을 감추어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떠났던 천봉궁의 인물 중 한 사람이 이곳으로 그들을 찾아왔으니 확실히 의외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누 소저께서 여기에는 어인 일이시오?”
“당신 때문에 온 건 아니니 안심해요. 난 그저 낙 소협에게 용건이 있을 뿐이에요.”
때마침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던 낙일방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낙일방은 그녀를 보고도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담담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러한 모습은 나이답지 않은 중후함과 침착함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아직도 그의 예전 풋풋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누산산으로서는 내심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 바낄 수도 있구나.
무공만 강해진 줄 알았더니 이제는 겉으로도 제법 강호를 호령하는 고수의 풍모가 나오는걸.’
낙일방은 그녀를 향해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엄 소저의 전언을 가져오셨소?”
누산산은 그의 덤덤한 반응에 은근히 배알이 꼴려 한 마디 쏘아붙이려다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했던 엄쌍쌍의 얼굴이 떠올라 간신히 억눌러참았다.
“그래요. 언니는 본 궁의 급한 일로 낙 소협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못하고 무당산을 떠난 것 때문에 몹시 걱정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보다못한 내가 소식이라도 전할까 하고 중도에 살짝 빠져나와 당신들 뒤를 쫓아온 거예요.”
그녀의 말 속에는 두 사람을 위해동분서주하는 자신의 노고를 알아줬으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낙일방은 별다른 표정 없이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누산산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고운 아미를 살짝 찡그리더니 이내소매에서 곱게 접은 한 장의 서신을 꺼내 들었다.
“언니가 낙 소협에게 보내는 편지예요.”
그녀는 서신을 전하면서 낙일방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으나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어서 그가 지금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쳇. 설마 명성이 좀 높아졌다고 언니를 무시하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랬다가는 네놈의 잘난 얼굴을 박박 긁어버릴 테다.’
그녀는 속으로는 별의별 생각을 다하면서도 겉으로는 다소곳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곳에서 서쪽으로 오 리쯤떨어진 만강루에 머물러 있으니 언니에게 답장을 보내려거든 그쪽으로 연락해요. 이삼일 정도는 그곳에 있을 테니 말이에요.”
“알겠소. 서신을 전해주어 고맙소.”
다행히 낙일방도 이번에는 그녀를 향해 사례를 해서 그녀도 더 이상마음속으로 그를 난도질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떠난 후 낙일방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아 있는 그의 손에는 누산산에게서 받은 서 신이 펼쳐지지도 않은 채 처음의 상태 그대로 쥐어져 있었다.
낙일방도 무당산에서 연락도 없이 훌쩍 헤어져야 했던 엄쌍쌍의 서신이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 한편으로는 크고 작은 일로 종남파의 분위기가 여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지금, 한낱 여인과의 치정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 왠지 부담스럽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무사히 본 파로 돌아가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런데 여정을 시작하자마자 갑작스레 헤어진 연인의 연락을 받게 되었으니,복잡하게 헝클어진 현재의 심정을 낙일방 자신도 분명하게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그녀의 서신이 예전처럼 무작정 반갑지만은 않다는 것은 확실했다.
“후우.”
낙일방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서신을 펼쳐보았다.
서신에는 예상 그대로의 말이 적혀있었다.
갑작스레 단봉공주의 지시로 급하게 무당산을 떠나게 된 것에 대한 사과와 낙일방을 향한 걱정과 우려, 그리고 그를 그리워하는 은근한 연심(機心)이 그녀 특유의 정갈한 글씨체로 절절하게 쓰여 있었다. 궁의 일 때문에 몸을 빼기는 어렵지만 언제고 다시 만날 날을 앙망한다는 구절을 마지막으로 서신은 끝이 났다.
낙일방은 서신을 재독하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엄쌍쌍의 가녀리면서도 고운 자태가 선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천봉선자 중의 한 사람이면서도 여느 선자들과는 달리 마음이 선량하고 부끄러움이 많았다.
낙일방이 천봉선자들에게 그다지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은 그녀의 그러한 착하고 순수한 심성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용선생과의 비무로 적지 않은 부상을 당한 그를 몰래 찾아와 하염없이 눈물을 홀리던 며칠 전 그녀의 모습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강호에서의 삶이란 원래 기약이 없는 것이었다. 남녀 사이의 만남은 더욱 그러했다. 한없이 넓고 광활한 강호에서 별다른 약조 없이 헤어진 두 남녀가 다시 만나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맺어진다는 것은 결코쉬운 일이 아니었다.
엄쌍쌍이 사매인 누산산을 재촉하여 서신을 보낸 것은 평소 그녀의 행실을 생각해 보면 정말 커다란 용기를 낸 것이었다.
여인의 몸으로 남자에게 먼저 이런서신을 보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리 남녀관계에 둔한 낙일방이라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는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서 확실한 약조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헤어지더라도 홋날을 기약할수 있는 분명한 다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자칫하면 이대로 영영 그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부끄럼많은 그녀에게 지필묵을 들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다.
낙일방은 그녀의 요구에 응해주고 싶었다. 불안함에 몸을 떠는 그녀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하나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아마 다른 때,다른 장소였다면 낙일방도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밝히면서 보다 구체적인 언질을 주는 편지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시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지금은 본 파의 제자들과 함께 무사히 종남파로 돌아가는 일에만 매진해야 한다. 만에 하나 다른 엉뚱한 일에 정신이 팔려 종남파로의 여정에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면 장문사형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을 볼면목이 없어질 것이다.
몇 번이나 붓을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는 동안에 밤이 깊어 버렸다.
낙일방은 마침내 들었던 붓을 내려놓았다. 애타게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 그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답장은 종남산으로 돌아간 후에 작성할 생각이었다.
낙일방은 그게 순리라고 생각했다.
낙일방이 지필묵을 정리하고 다시 자리에 앉으려 할 때였다.
팍!
별실 주위를 밝히던 등이 거의 동시에 꺼져 버렸다. 칠흑같이 짙은 어둠이 별실 전체를 휘감았다.
그리고 습격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