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4권 회인거인 편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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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4권 회인거인 편 : 2화


제 332 장 선반출정(1)

선반의 첫 모임은 비신대의 외곽에서 열렸다. 공교롭게도 비신대는 며칠 전 진산월이 혁리공의 암습을 받아 서장 무림의 고수들과 혈전을 벌였던 바로 그 장소였다.

이곳에서 진산월은 야율척의 둘째제자를 제거하고 서장의 고수들을 연거푸 쓰러뜨렸으니,어찌 생각하면 서장 무림과의 선봉에 서게 되는 선반이 출정하는 장소로는 나름의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도 있었다.

진산월은 묵묵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선반의 인원은 반주인 진산월을 제외하고는 정확히 서른세 명이었다.

형산파를 제외한 구파일방에서 두명씩의 제자들을 보냈고, 그 외에 나머지는 명문세가나 군소방파의 인물들이었다. 모두 각 문파나 세가에서 신원을 보장해서인지 한눈에 둘러보아도 하나같이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들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개중에는 눈에 익은 자들도 몇몇보였다.

소림사의 소신승 정화와 정선,무당파의 청운도장,점창파의 사인기,포검산장의 마종의 등이 그들이었다. 그들 모두는 자파의 촉망받는 후기지수들이었고,종남파와 크고 작은 인연을 맺은 인물들이었다.

정화와 정선은 장안 이씨세가의 가주인 이세적의 장례식에서 만난 적이 있었고,청운도장은 무당집회 내내 종남파의 안내를 맡은 인연이 있었다. 그리고 사인기는 낙양의 석가 장에서 처음 만난 후 낙일방과 줄곧친분을 나누는 사이였고, 마종의는 구궁보에서 벌어졌던 모용봉의 생일연에서 잠깐 인사를 나누었던 포검산장의 소주인이었다.

그들 외에도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젊고 유능한 고수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었고,그만큼 전체적인 나이는 상당히 젊은 편이었다.

서른셋은 적다면 적고,많다면 많은 숫자지만 진산월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이들이 과연 얼마나 자신의 말에 잘 따르고,일사불란한 조직력을 발휘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그중 유난히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이정문을 슬쩍 바라보고는 그들 앞으로 성큼 나섰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뜨거운 열망과 경의,부러움과 두려움,선망과 질시가 혼합된 복잡한 시선들이었다.

“선반의 반주를 맡게 된 종남의 진산월이라 하오.”

주위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만큼 조용한 가운데,잔잔한 그의 음성만이 장내에 울려 퍼지고 있을 뿐이었다.

“선반의 의미나 목적 같은 건 굳이 말하지 않겠소. 여러분 대부분이 선반에 자원한 이상 그 역할이 무언지는 모두 잘 알고 있을 거요.”

진산월의 말마따나 이곳에 모인 선반의 고수들은 모두 스스로가 자원한 것이었다. 무림맹의 선봉으로 선반이란 조직이 만들어지고 그 수장에 신검무적이 임명되었음이 알려지 자 너무도 많은 제자들이 선반에 자원하여 각파의 수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결국 그중에서 고르고 고른 인원들만이 선반에 올수 있었는데,그래서인지 모두의 얼굴에는 자부심과 패기가 가득 담겨있었다.

“우선 선반의 체계적인 활동을 위해서 조직을 천지현황의 네 개 조로 나누고,군사(軍師) 역할을 할 부반주를 둘 생각이오. 부반주에는 재사로 이름 높은 산수재 이정문 소협을 선임하려 하오.”

진산월이 이정문에게 눈짓을 하자 이정문은 도살장에 끌려오는 소처럼 얼굴을 구긴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앞으로 걸어 나왔다.

“반갑소. 이정문이라 하오. 변변찮은 사람에게 너무 중책이 주어진 것 같아 마음이 무겁구려. 잘 부탁드리겠소.”

중인들은 이미 이정문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지라 그가 부반주가 된 것에 특별한 거부감을 표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들 대부분은 신검무적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장의 고수들을 상대한다는 것에 가장 큰 의미를 두고 있기에 반주를 옆에서 보필하고 머리를 굴려야 하는 부반주의 지위에는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진산월은 그들을 서로의 친분 정도 와 문파의 비중에 따라 네 개 조로 나누었고, 각 조에서 알아서 한 사람씩 조장을 뽑도록 했다.

그런데 의외로 이 조장의 자리에는 욕심을 내는 자들이 적지 않아서 상당히 열띤 분위기 속에서 꽤나 진통을 겪은 후에야 겨우 인선을 마칠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선발된 각 조의 조장들은 소림사의 소신승 정화,청성파의 창천신룡 남해일,하북팽가의 복호도(伏虎刀) 팽철영,그리고 포검산장의 마종의였다. 그들은 각기 명문정파에서도 특출난 인재들일 뿐 아니라 강호에서의 명성도 뛰어나서 다른 고수들의 견제와 경쟁을 뚫고 조장에 선출될 수 있었다.

인선이 확정되자 진산월은 부반주인 이정문과 네 명의 조장들만을 따로 자신의 거처로 불러들였다.

네 명의 조장들 중 지조의 조장인 남해일과 현조의 조장인 팽철영은 진산월도 처음 대면하는 인물들이었고,다른 사람들은 모두 면식이 있었다. 서로의 소개와 간단한 인사말이 오간 후,진산월은 즉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짐작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선반에서 공략대상으로 삼은 곳은 강북의 흑도를 장악하고 있는 흑갈방이오.”

흑갈방이란 이름이 나오자 남해일과 마종의는 별반 표정이 없는데 비해 정화와 팽철영은 모두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해일과 마종의는 주로 강남지방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이어서 흑갈방의 이름만 들었지,그들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에 비해정화와 팽철영은 흑갈방의 위세를 익히 알고 있었고,특히 팽철영은 하북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흑갈방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있는 형편인지라 다른 누구보다도 바짝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이었다.

“흑갈방에 대해서는 부반주께서 조사하신 것이 있으니,우선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합시다.”

진산월의 말에 이정문은 한 차례헛기침을 하고는 특유의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흠. 흑갈방은 서장 무림에서 중원을 공략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힘을 투사한 최초의 세력이오. 그전에도 몇몇 방파의 배후에 서장 세력의 입김이 닿아 있다는 의문이 제기된 적이 있었지만, 그 방파들의 주축은 강호인들이어서 단순한 의혹만으로 끝난 경우가 많았소. 하지만 흑갈방은 수뇌인물들이 대부분 서장 무림의 고수들로 이루어져 있고,그들의 방주 또한 서장인이어서 실질적으로 서장 세력 그 자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요.”

이정문은 자신이 파악한 흑갈방에 대해 자세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네 조장들의 표정은 점점 더 심각해졌고,종내에는 마종의가 참지 못하고 깊은 탄식을 토해내고야 말았다.

“후우. 서장의 고수들이 그토록 강호에 깊숙하게 침투해 있을 줄은 미처 몰랐소. 최근에 흑갈방이란 이름이 자주 귀에 들어온다 싶었는데,그런 내막이 있었구려. 어쩌다 일이 그렇게 될 때까지 방치되었던 거검에 관한 한은 강북의 검보와 함께 북보남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손꼽히는 강남 포검산장의 소주인인그로서는 서장의 고수들이 중원으로 들어와 그렇게까지 활개를 치도록내버려둔 강북의 무림세력들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가뜩이나 강퍅한 이정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보이지 않은 강호의 물밑에서 서장 무림과 치열한 암투를 벌여온 그로서는 강남에서 귀하게만 자라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아온 귀공자의 말이 귀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재빠르게 알아차린 정화가 그를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그들의 성장세가 워낙빨랐던 데다 흑도의 무리라는 생각에 다소 방심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그들의 본령이 드러난 다음에는 강북의 모든 방파들이 그들을 예의 주시한 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정화의 말을 듣고서야 마종의는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듣기에 따라서는 상대에 대한 모욕이나 조롱으로 들릴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이정문과 정화를 향해 사과를 했다.

“그렇구려. 불초가 워낙 좁은 산장에만 머물러 있다 보니 강호의 정세에 대해 어두워서 본의 아니게 실례를 저지를 때가 있소. 두 분께서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라오.”

“별말씀을. 마 소장주께서 포검사수 중에서도 단연 으뜸가는 실력을 지녀 옥검랑군이라는 별호로 불린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흑갈방의 발호를 막지 못한 건 본사를 비롯한 강북 무림의 정파에 일단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두 사람 덕분에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마종의는 준수한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낙천적이고 구김살이 없어서 보는 이의 호감을 사는 인물이었다.

강호삼정랑에 못지않은 풍류재사의 소질이 엿보인다는 우스갯소리도 들을 정도로 인품이 좋아서,앞으로의 장래가 더욱 기대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마종의를 비롯해 이번에 조장에 선출된 자들은 모두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성격이 좋기로 소문난 인물들이었다. 정화와 마종의는 말할 것도 없고,남해일 또한 임풍옥수 같은 외모에 행동거지가 비범해서 청성파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고,팽철영은 워낙 신중하고 생각이 깊어서 다소 성급하고 직선적인 가풍이 있는 하복팽가의 고수답지 않다는 말까지 듣고 있는 형편이었다.

아마 그렇기에 이들은 제법 치열한 눈치 경쟁을 뚫고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조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성격이 모나고 성정이 거친 자를 자신의 윗자리에 앉히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조장을 자체적으로 선별하게 한 진산월의 선택은 무척이나 좋은 방법인 셈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반발이나 거부감을 없애면서 성품이 좋은 조장들을 고르게 되었으니,처음부터 이를 의도한 것이었다면 상당히 탁월한 안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정문이 흑갈방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자 장내의 분위기는 한층 더 뜨거워졌다. 흑갈방의 세력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해서 이번 일이 생각보다 훨씬 더 험난하고 어려운 일이 될 것이 분명해졌음에도 누구도 실망하거나 겁을 집어먹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모두 젊기 때문일것이다.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팽철영조차도 이제 겨우 갓 서른에 접어들었을 뿐이었다. 명문세가의 촉망받는 인재로서 자신들의 역량을 선보일 기회를 얻은 것에 흥분과 설렘,그리고 투지가 일어나는 모습들이었다.

진산월은 일단 그들이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에 만족했다.

이 자리에 오기 전에 진산월은 이정문에게 흑갈방의 세력과 수뇌부들의 면면을 그들에게 솔직하게 공개하라고 당부했었다. 이정문은 처음에는 그것에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었는데,결과적으로 본다면 진산월의 판단이 옳은 셈이었다.

그 점에 대해 이정문은 진산월의 혜안에 새삼 감탄하는 한편 약간의 씁쓸함을 느끼기도 했다. 자신이 진산월에 비해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것이 누구보다 뛰어난 두뇌와 인간의 심리에 정통하다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머리를 굴리거나 사람의 마음을 예측하는 면에서도 점차 뒤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었던 것이다.

네 명의 조장 중 가장 연장자이면서 성격적으로도 가장 신중한 팽철영이 조심스런 표정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진 장문인께서 흑갈방을 첫 목표로 정하신 것은 솔직히 저로서는 무척이나 반가운 일입니다만,지금까지 보여준 그들의 위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진 장문인께서는 그들을 상대할 특별한 복안이 있으신지요.”

팽철영이 우려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팽철영은 하북팽가의 인물답게 흑갈방이 하북성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미 검보와 몇 차례의 충돌을 벌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바로 며칠 전에는 가문에서 전해온소식통에 의해 검보에서 적지 않은 손해를 입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과연 선반의 힘만으로 흑갈방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 순간적인 회의감이 들었던 것이다.

팽철영은 선반이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이미 흑갈방과 충돌이 있는 검보와 힘을 합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판단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가문에 연락하여 하북팽가도 합류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아무리 흑갈방의 세력이 강력하다고 해도 선반과 검보,하복팽가가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선반을 이끄는 자는 다름 아닌 강호제일검객 신검무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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