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4권 회인거인 편 :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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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4권 회인거인 편 : 8화


제 334 장 고검출세(2)

검단현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위층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누군가가 삼 층으로 향하는 계단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수염을 기르고 눈빛이 서늘한 흑의 중년인이 무심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이는 오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잔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뺨은 유달리 홀쭉했고,입술이 얄팍해서 어딘지 모르게 차갑고 냉정해 보였다.

은은한 청광이 살짝 어른거리는 흑의 중년인의 눈빛은 수정처럼 맑고 깨끗했으나,보는 이의 마음을 섬뜩하게 만드는 기이한 힘을 담고 있었다. 흑의 중년인의 옆구리에 걸려있는 고색창연한 보검이 유달리 시선을 끌었다.

그 중년인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검단현은 북풍한설이 휘몰아치는 차가운 얼음봉우리 위에 알몸으로 서 있는 듯한 오싹함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심신이 오그라들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을 텐데,검단현은 오히려 굳어졌던 얼굴을 풀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빙긋 웃었다.

“이런 정도의 무형지기를 본 건 정말 오랜만이군. 종남파에 신검무적말고 이런 수준의 무형지기를 발출할 수 있는 고수가 있었던가?”

흑의 중년인의 음성은 눈빛만큼이나 무덤덤하고 차가웠다.

“나는 종남파의 고수가 아닐세.”

“그렇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어느 파의 고인이시오?”

“나는 나력지라는 사람일세.”

나력지라는 말에 검단현의 눈빛에 기광이 번뜩였다.

“황성고검?”

“예전에는 그렇게 부르는 자들도 있더군.”

검단현은 새삼스런 눈으로 흑의 중년인의 전신을 찬찬히 훌어보았다.

“이십 년 가까이 강호에 모습을 보이지 않던 장성제일검객(長城第一劍客)께서 이곳에는 웬일이시오?”

“옛 친구를 보러 왔네.”

“옛 친구라면?”

그때 다른 한 사람이 계단 앞에 나타났다.

“노부다.”

나타난 사람을 본 검단현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는 다름 아닌전풍개였던 것이다.

검단현이 종남삼검 중의 한 사람인전풍개를 몰라볼 리가 없었다. 예전부터 전풍개는 검단현을 상종도 못할 놈처럼 여겼으며,검단현 또한 종남파의 고수들 중 그를 가장 경계하고 있었다.

성격이 직선적이면서도 무공이 고강한 전풍개는 종남파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수 있는 인물인지라 언제든지 화산파를 향한 날카로운 비수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가 종남파의 본산을 나와 노해광에게 합류했다는 소식에 경각심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장성제일검객인 황성고검 나력지와 오랜 친구 사이라는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나력지가 이런 민감한 시기에 그를 만나러 산해루에 와 있다는 것은 더더욱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나력지와 전풍개가 산해루의 삼 층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곳으로 올라갔던 두 명의 장로와 네 명의 일대제자들은 왜 아직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일까?

상황이 자신에게 극도로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았을 텐데도 검단현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전풍개를 향해 포권을 해 보였다.

“전 대협,오랜만이오. 여전히 정정하시구려.”

전풍개는 냉랭한 코웃음을 쳤다.

“흥.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는구나. 네가 보낸 선물은 잘 받았다.”

전풍개가 말한 선물이란 수세관에서 자신을 암습하기 위해 살수를 보낸 것을 빗댄 표현이었다. 검단현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담담한 모습이었다.

“전 대협께서 모처럼 종남산을 내려오셨다기에 가벼운 문안 인사를 드렸을 뿐이외다. 선물이 너무 약소했다고 서운해하지 마시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제대로 된 선물을 주려고 직접 찾아온 것이냐?”

“그럴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소.”

전풍개의 송충이같이 짙은 눈썹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제멋대로 쳐들어와 놓고는 이제와서 꼬리를 빼고 물러날 셈이냐?”

검단현은 피식 웃었다. 눈은 전혀웃지 않고 입꼬리만 살짝 비틀어진 차가운 조소였다.

“흐흐. 전 대협의 눈에는 내가 일이 불리해진다고 꼬리를 뺕 사람으로 보인단 말이오? 이거 정말 실망스럽군.”

전풍개는 기이한 광망이 이글거리는 검단현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비록 찢어 죽일 놈이긴 하지만,철혈매화가 겁쟁이는 아니지. 하지만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나를 죽일 자신은 있는 거요?”

전풍개의 주름진 두 눈에 얼핏 진득한 살광이 어른거렸다.

자신이 아니라 확신이다. 오늘 네놈은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것이다.”

전풍개의 장담과는 달리 검단현은 조금도 기가 죽거나 낙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말씀은 그럴듯한데,전 대협의 실력으로 그게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소.”

“곧 알게 될 거다.”

전풍개가 금시라도 계단 아래로 몸을 날려 자신을 향해 달려들 듯하자 검단현이 급히 입을 열었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한 가지만 말해 주시오.”

“무엇이냐?”

“삼 층에 올라갔던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그들은 어찌 되었소?”

전풍개의 얼굴에 냉랭한 미소가 떠올랐다.

“해가(美家)와 평가 말이냐?”

“그렇소.”

“해가는 나노제와 일검의 격돌 후에 의식을 잃었다. 그걸 본평가가 흥분해서 덤비다가 노부 손에 몇 초 버티지도 못하고 쓰러져버리더군.”

검단현의 눈이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살짝 찌푸려졌다가 이내 원상을 회복했다.

‘평 장로의 성격이 결국 일을 그르치게 만들었군.’

전풍개가 말한 해가와 평가는 모두 화산파의 장로들이었다. 해가는 십대장로 중의 난매신검 해정설을 가리켰고,평가는 철장비응평수형 (平守蓋) 이었다.

해정설은 침착하고 냉정했으나 무공이 여타 장로들에 비해 뒤처지는 편이었고,평수형은 장공과 신법으로는 누구보다 뛰어난 고수였으나성격이 화급하고 흥분을 잘하는 인물이 었다.

해정설이 나력지의 일검에 쓰러진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해정설의 검법은 화려하고 중후한 맛이 있었으나, 강맹함이 부족하고 속도도 빠른 편이 아니었다. 그에 비해 나력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장성 일대에서 첫 손가락으로 꼽히는 절세의 검객으로 누구보다도 빠르고 날카로운 검을 구사하는 인물이었으니, 그야말로 해정설과는 상극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해정설이 그의 일검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것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반면에 평수형은 무공 실력만 따진다면 종남삼검의 누구와도 충분히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실력자였다.

그럼에도 전풍개에게 맥없이 제압당한 것은 해정설이 쓰러진 것에 분노하여 앞뒤를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평수형은 그 불같은 성격과 화가 나면 극도로 시야가 좁아지는 치명적인 단점 때문에 강력한 장법과 뛰어난 신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강호에서 별다른 명성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좀 더 냉정하고 차분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면 십대장로 중에서도 상위의 서열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검단현은 두 사람이라면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살릴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여 그들을 함께 보냈는데, 전풍개의 말을 들어보면 오히려 각자의 단점 때문에 제대로 실력발휘도 해보지 못하고 제압당한 게 분명했다. 그야말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벌어진 셈이었다.

“그들 외에 몇 사람이 더 있을 텐데……

“네 명의 애송이들 말이냐? 그들에게는 따로 손을 쓰지 않았다. 쓸 필요도 없더군.”

검단현은 굳이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전풍개의 말만으로도 어떤 상황이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네 명의 일대제자들 중 세 사람은 해정설의 제자였고,다른 한 명은 평수형의 제자였다. 사부들이 상대의 손에 쓰러졌는데 제자들이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준비한 회심의 한 수가 너무도 어이없게 허물어졌으나,검단현은 실망하지도,그렇다고 흥분하거나 좌절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얼굴의 표정이 점차 사라지며 가면을 씌운 듯 무심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철혈의 매화’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정을 알고 나니 마음이 편하군.

그런데 전 대협은 나를 감당할 자신이 있으시오?”

전풍개의 노안이 살기로 가득 차서 간담이 약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풍겼다.

“네놈이 예전에 본 파를 멸살시켜야 한다고 떠들고 다닐 때부터 언제고 네놈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고야 말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네놈이야말로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늙어서 햇골이 삭아가는 전 대협혼자 나를 감당하는 건 힘들 테니,숨겨둔 수가 있으면 모두 꺼내보도록 하시오.”

전풍개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찢어진 주둥아리라고 정말 함부로 놀리는구나. 네놈이 비록 한천검C恨天食lj)의 제자라고 해도 아직 노부눈에는 새파란 애송이로 보일 뿐이다.”

한천검 한세일!

그는 화산파의 전대 장문인이었던 검중선 사마원의 사제로,당시 검법은 사마원보다 오히려 고강하다고 인정받았던 실질적인 화산제일검이었다. 하나 그의 심정이 너무 표독하고 아량이 좁은 것 때문에 결국장문인이 되지 못하고 장로에 머무르고 말았다.

원래 한세일의 별호는 정천검(頂天劍) 이었다.

이십여 년 전 한세일의 제자 중한 사람이 소림사의 승려와 다툼이 벌어졌는데,사소한 시비로 그쳤어야 할 그 일이 한세일의 거친 성정때문에 크나큰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다. 당시 소림사에서는 나한당의 당주인 굉수가 중재자로 참석했었는 데,제자를 따라 나왔던 한세일이 돌연 그에게 공식적으로 비무를 신청했던 것이다.

“비무에서 진 문파의 제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으로 합시다.”

그의 안하무인격인 제안에 굉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한참 후에야 굉수는 그의 제안을 승낙했고, 제자들 간의 사소한 시비는 두 문파의 최고 고수들 사이의 대결로 격화되어 버렸다.

당시 굉수의 실력은 강호에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소림사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나한당을 맡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의 무공이 소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거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굉수는 특이하게도 한 자루의 장검을 들고 비무에 임했는데,처음 한 세일은 그가 자신을 우습게 본다고 생각하고 발연대노 했으나 그와 일검을 겨룬 후에는 어느 때보다 진지 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두 사람의 격전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굉수로 돌아갔다. 굉수는 살벌하리만치 사납고 맹렬한 한세일의 검법을 웅혼하기 그지없는 검법으로 격파했는데,그때 그가 마지막 순간에 사용한 것이 바로 달마십삼검 중의 최절초인 달마삼절초였다.

검법에 관한 한 천하의 어떤 문파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하던 화산파의 제일검객이 검으로 소림사의 고수에게 패했으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세일은 정천검이라는 자신의 외호를 한천검으로 바꾸었고,화산파의 깊숙한 곳에 칩거한 후 두 번다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검단현은 그런 한세일이 가장 아끼는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한세일은 그 표독한 심정만큼이나 제자의 복도 없어서 몇 명뿐인 제자들이 모두 비명횡사하고 결국은 검단현 혼자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런 한세일이 직접 열과 성을 다해 가르친 만큼 검단현의 무공은 다른 화산파의 제자들 중에서도 단연돋보이는 것이었고,특히 검법에 있어서는 화산파의 당대 장문인인 용진산조차도 경계심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독보적으로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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