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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351화


제 340 장 사중생로(3)

전신이 검에 난자당하기 직전,낙일방의 몸이 무섭게 선회했다. 양손에 검을 잡은 채 오른발을 축으로 해서 맹렬한 속도로 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 속도와 기세가 어찌나 강력했던 지,낙일방에게 검을 잡힌 두 명의 복면인들이 몇 차례 검을 뽑기 위해애를 쓰다가 회전하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손을 놓아 버렸다. 평생을 검과 함께 살아온 그들로서는 막상 검을 손에서 놓치고도 쉽게 믿어지지 않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강호에는 공수납백인이라고 하여 맨손으로 상대의 검날을 잡는 수법이 있기는 했다. 하나 그것도 한계가 명확하여,일정 수준이상의 검객에게는 별다른 효용을 볼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 수법은 단순히 검날을 손으로 잡는 것에 불과해서,지금처럼 검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하는 것과는 경우가 전혀 달랐다.

검객들이 검을 배우면서 가장 먼저신경을 쓰는 부분이 어떠한 상태에서도 검을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

팔담검객 같이 평생을 검과 함께 살아온 고수들이라면 그들의 수중에서 검을 빼앗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찰나의 사이에 그대로 맥없이 검을 손에서 놓쳐 버렸으니 그들이 황당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낙일방이 그들의 검을 맨손으로 잡은 것은 단순히 묵롱기를 절정으로 완성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천단신공의 흡자결과 묵룡기의 특이한 기운이 결합한 데다 얼마 전에 육천기에게서 전수받은 취공대산수 중의 호로불방 수법을 가미했던 것이다.

취공대산수는 기행으로 이름 높았던 취선 하정의의 절학답게 온갖 기이하고 절묘한 수법들이 많았는데,호로불방도 그중 하나였다. 술꾼은 일단 수중에 들어온 술병은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는 지극히 취선다운발상이 돋보이는 이 기발하고 절묘한 수법에 한 번 붙잡히면 잡힌 팔다리를 잘라 내거나 지금처럼 아예손을 놓아버리지 않는 한 절대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두 개의 검을 탈취한 상태에서도 낙일방의 선회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회전하는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는 것 같았다.

위위위윙!

곤지룡을 바탕으로 와선보에 천단신공 중의 전륜결까지 가미된 그 선회는 도저히 멈추지 않는 수레바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역팔괘의 방식으로 그의 몸을 칭칭옭아매었던 관혼팔담진의 진세를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관혼팔담진의 기본 원리는 가까이 다가오되 접하지 않고,물러서 되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상대로 하여금 수렁에 빠진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것도 관혼팔담진의 그러한 접근방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낙일방이 제자리에 선 채로 몸을 빠르게 선회하자 가까이 다가 서기도,그렇다고 뒤로 물러서기도 애매한 상황이 펼쳐졌으며,그것은 지금까지 톱니바퀴가 맞물린 듯 정교하게 움직였던 관혼팔담진의 운행에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선회하는 기세가 워낙 맹렬하기에 섣불리 접근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조금 전에 두 명의 검객이 얼떨결에 검을 빼앗기는 황당한 사태를 직접보았기에 가까이 다가가기가 더욱꺼려졌다.

그렇다고 상대가 선회를 그칠 때까지 무작정 지켜보고 있기도 힘들었다. 적절한 거리에서 끊이지 않는 움직임으로 상대의 공세를 제어하는것이 관혼팔담진의 묘리인데,발동하고 있는 진세룰 멈추고 우두커니 상대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손을 놓고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접근하기도, 물러서기도 애매한 상황에서 처음으로 관혼팔담진의 진세가 잠깐 멈추게 되었다. 서로 다가 서고 물러서는 과정에 약간의 머뭇거림이 발생하면서 순간적으로 톱니바퀴처럼 정교한 진법의 운용이 잠깐 어긋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거의 알아차리기도 힘든 아주 짧은 순간의 일이었으나,미친듯이 선회하면서도 일순간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낙일방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사실 그때 낙일방은 심지를 다한 촛불처럼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있었다. 무리한 진기의 운용으로 인해가뜩이나 텅텅 비어가던 진력은 고갈되기 직전이었고, 체력 또한 바닥이 나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스스로가 의문인 상황이었다.

그저 마지막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일원태극’만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한 점으로 삼아 힘이 다할 때까지 몸을 선회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한 선회야말로 태극의 무한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간절한 소망이 어긋나지 않았는지 그토록 한 치의 허점도 보이지 않던 관혼팔담진이 처음으로 아주 작은 틈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그것은 미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으나,낙일방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그 틈속으로 전신을 내던졌다. 제일 먼저그의 양손에 쥐어져 있던 두 개의 검이 그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가공할 경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산산이 박살이 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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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一I

뒤이어 마치 벌떼가 몰려오는 듯한 음향과 함께 그의 오른손과 왼손에서 각기 다른 경력들이 세차게 뿜어나왔다. 오른손에 실린 것은 종남파최고의 장공인 태인장, 왼손에 실린것은 낙뢰신권의 최절초인 일점천뢰의 기운이었다.

낙일방으로서는 그야말로 지금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을 일시에 뿜어낸 것이다. 낙일방은 미처 의식하지 못했으나,음유한 성질의 태인장과 양강(陽_)한 낙뢰신권은 그 자체로 완벽한 음양양의(陰陽兩儀)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가히 놀라웠다.

콰콰콰광!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이 주위를 뒤흔들며 거센 경기가 폭풍노도처럼 일대를 완전히 휩쓸어 버렸다. 폭풍의 여세는 그야말로 대단해서 반경오장 일대의 땅거죽이 송두리째 뒤집혔으며, 뿌연 먼지가 십 장 위의 허공까지 자욱하게 뒤덮어 버렸다.

그 어마어마한 폭풍 속에서 미약하게 울렸다가 사라져 가는 몇 개의 희미한 비명은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들 정도였다.

주위가 갑자기 고요해졌다.

사방을 폐허로 만들어 버린 거센경기의 소용돌이가 점차로 가라앉으면서 그 고요한 정적은 나직한 신음소리에 깨어져 버렸다.

“크으윽……!”

그토록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며 낙일방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관혼팔담진은 처참하게 깨어져 있었고, 관혼팔담진을 이루던 여덟 명의 복면인들은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들 중 세 명은 아예 숨이 끊어진 듯 전혀 움직임이 없었고, 두 명은 손발이 부러진 채 고통 어린 신음을 토하고 있었으며,나머지 세명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바닥에 누워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 높이 올라갔던 먼지들이 부서 진 돌조각들과 함께 그들의 몸 위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으나,그들 중 누구도 그것을 피하거나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휘익!

그때 어디선가 밤하늘을 가르고 나타난 누군가가 장내로 날아 내렸다.

유난히 노란 황의가 밤바람에 한차례 펄럭거렸다. 나타난 사람은 다름아닌 누산산이었다. 누산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놀랍구나. 이러한 위력의 장공이 다 있다니……

그녀의 시선이 이내 한 곳에 고정되었다.

폐허로 변해 버린 장내의 중앙에 유난히 커다란 구멍이 파여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그 구멍 안에 우뚝 서 있었다.

아니,지금의 그에게 우뚝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두 다리가 무릎까지 바닥을 파고 들어가 쓰러지고 싶어도 쓰러질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바닥에 두 다리가 박힌 채로 두눈을 부릅뜬 채 서 있는 그 사람의 행색은 가히 목불인견이었다. 코와 입을 비롯해 귀와 눈까지 칠공(七孔)에서 시커먼 핏물이 흘러나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입고 있는 옷은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부서진 데다 검붉은 핏자국과 먼지로 더럽혀져서 도저히 원래의 색깔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누산산은 한눈에 그 사람을 알아보았다.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유혈낭자 한 처참한 몰골임에도 한 줄기 고고 한 기상을 느낄 수 있는 천하의 미남자의 모습을.

“낙소협……

그녀의 입술을 뚫고 무거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느릿느릿 그가 서 있는 공터의 중앙으로 다가갔다.

부릅뜬 두 눈에 핏물이 가득 고여있고 반쯤 열린 입술에는 부서지도록 굳게 악다문 이빨이 살짝 드러나 보였다. 온 얼굴이 피투성이임에도 그에게서는 숨길 수 없는 분노와 패기, 그리고 웅혼한 기상이 느껴졌다.

누산산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목덜미에 손을 갖다 대었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가늘게 이어지고 있는 한 가닥의 맥을 확인하는 순간,비로소 그녀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휴우!”

가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안도의 한숨이었다.

사실 그녀는 낙일방의 숨이 이미끊어진 줄로만 알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던 것이다. 자신이 너무 지체하여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 같아 눈앞이 캄캄해질 지경이었다.

하나 기적적으로 낙일방은 목숨줄을 유지하고 있었다.

누산산은 그의 몸을 조심스럽게 구멍에서 꺼내어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늘 소지하고 있는 취영단을 꺼내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취영단은 천봉궁에서도 귀하게 여기는 내상약으로, 워낙 조제하기가 어려워서 천봉팔선자들도 일 인당 하나씩 밖에는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 취영단을 선뜻 꺼내 들 만큼낙일방의 상세는 위독해 보였다. 이대로 숨이 끊어져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누산산은 그의 맥문을 잡고 진기를 불어넣어 취영단의 약효가 그의 몸에 빨리 퍼지도록 했다.

한참 낙일방의 몸에 진기를 불어넣던 누산산의 눈이 번쩍 뜨여지며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조금씩 밝아오는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를 확인한 누산산의 눈가에 안도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성 대협!”

힘없는 걸음으로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성락중이었다.

언제나 청수하고 담담한 기세를 지니고 있던 그의 얼굴은 왠지 더할수 없이 피곤하고 힘들어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에게 예의를 잊지 않고 인사를 했다.

“누 소저였구려. 내 사질을 도와주어서 고맙소.”

“별말씀을. 제가 너무 늦게 온 게 아닌지 모르겠군요.”

“늦지 않았소. 낙 사질은 어떻소?”

“내외상이 너무 심해서 위독한 상황이에요. 그나마 다행히 한 줄기 기운이 심맥을 보호하고 있어서 숨이 끊어지지 않았지만,당장이라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 기운은 아마도 본 파의 천단신공 중 호심결의 진기일 거요. 그렇다면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거요.”

천단신공의 호심결은 단 한 숨의 진기만으로도 천하에서 가장 끈질긴생명력을 주는 상승절학이었다. 호심결로 보호하고 있다면 낙일방의 생명은 든든한 동아줄에 묶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성락중의 몸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그제야 누산산은 성락중의 몸에도 적지 않은 상처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까부터 왼손을 옆구리 쪽에 대고 있어서 이상하다 했더니 옆구리에 큰 부상을 입고 있었구나.’

자신의 옆구리를 만지는 성락중의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혈을 했음에도 피가 그치지 않는 것은 그 상처가 옆구리를 완전히 관통하여 등 뒤까지 뚫려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 대협의 그 상처는……

누산산이 성락중의 상처를 가리켜 보이자 성락중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오늘 강호의 하늘이 얼마나 높은 줄 알게 되었소. 강적을 만나서 정말 호된 꼴을 당할 뻔했는데, 운이 좋았는지 기적적으로 한목숨을 부지 할 수 있었소.”

누산산은 형산파의 오결검객도 어렵지 않게 꺾은바 있는 성락중이 목숨마저 위험했다고 하자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대체 누가 성 대협을 위협할수 있었던 거죠?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어요?”

성락중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창을 쓰는 고수였는데,내 강호경험이 그리 많지 않아 정체는 파악할 수 없었소. 워낙 창의 변화가 예리하고 기기묘묘해서 싸우는 내내수세에 몰리게 되었소. 특히 후반의 몇몇 절초들은 정말 무섭더구려.”

누산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악전고투 끝에 결국 옆구리에 그자의 창을 맞고 말았소. 다행히 거의 동시에 나도 운 좋게 그의 어깨에 일검을 격중 시킬 수 있었소. 그때 이곳에서 엄청난 굉음이 울리자 그자가 창을 거두고 물러나서 겨우한목숨 부지하게 된 것이오.”

성락중의 말인즉 자신이 계속 비세에 몰리다가 겨우 동수를 이루었고,이곳의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은 것에 실망한 상대가 스스로 물러나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누산산은 성락중 같은 훌륭한 검객을 수세로 몰아넣은 창의 고수가 누구인지 떠올려 보았다.

‘환상제일창 유 대협은 아닐 테고,그분 외에 그런 실력의 고수라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성락중이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근처에 본 파의 사손이 있을 텐데 보이지 않는구려. 그를 찾아봐야겠소.”

누산산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급히 입을 열었다.

“손풍이라면 조금 전에……

성락중의 얼굴에 한 줄기 어두운그림자가 떠올랐다.

“손가 녀석이 아니라 동중산을 말하는 거요. 그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고수들이 갔을 텐데,그의 모습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아 불안한 생각이 드는구려.”

바로 그때였다.

“동 사형! 내가 뭐랬어? 다들 무사할 거랬지?”

새벽의 공기를 찢을 듯한 요란한 환성과 함께 허겁지겁 달려오는 두인영이 있었다.

성락중은 밝아오는 여명 사이로 그들이 바로 걱정했던 동중산과 손풍임을 알아보고 얼굴빛이 환해졌다.

동중산은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모습이었으나,달려오는 모습으로 보아 심한 상태는 아님이 분명했다.

원래 동중산은 습격자들의 공세에 계속 몰리다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그들을 유인하여 싸움터를 바깥으로 이동했다. 정신없이 몰리고 쫓기는 와중에 때마침 객잔으로 돌아오던 손풍의 도움으로 간신히 그들을 물리치게 되었던 것이다.

손풍 또한 동중산을 구하는 와중에 왼쪽 빨에 검이 스쳐 핏자국이 완연했다. 밤새 오 리가 넘는 길을 두번이나 전력으로 왕복한 데다 생각지 않은 고수들과의 싸움으로 얼굴에 칼자국까지 남기게 된 손풍이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그의 얼굴 표정은 더할 수 없이 밝았고,입가에는 뿌듯한 미소마저 어려 있었다.

아마 속으로는 이제 비로소 자신도 완벽한 무림인의 얼굴이 되었다며 킬킬거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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