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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382화


제 353 장 모옥괴인(茅屋怪人) (2)

진산월은 누구보다 침착하고 어떤 일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용단죽이라니?

눈앞의 노인이 천하제일의 고수이며 구궁보의 주인인 모용단죽이란 말인가?

일전에 진산월은 구궁보에서 모용봉의 소개로 모용단죽이라고 자처하는 인물을 만난 적이 있었다. 나중에야 자신이 만난 사람이 진짜 모용단죽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분신일 거라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그에 대한 어떠한 확신도 없었다.

강호의 전설적인 고수인 천수관음에게서 언질을 받고서도 자신이 만났던 자가 가짜 모용단죽이라고 쉽게 확신하지 못했던 것은 그만큼 그때 만났던 인물에 대한 인상이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그자는 진산월이 처음 만나는 놀라운 수준의 고수였으며, 진정한 신분이 무엇이든 절대로 잊혀질 수 없는 강한 개성의 소유자였다.

나중에 크고 작은 일이 거듭되면서 진짜 모용단죽의 행방에 대해 여러 가지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렇게 직접 당사자를 만나게 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천봉궁의 총관인 차복승의 부탁을 받고 무심결에 찾아온 북망산의 이름 모를 계곡에 그동안 아무도 행방을 몰랐던 모용단죽이 기거하고 있을 줄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진산월은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더니 이내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일전에 모용 공자의 초대를 받고 그의 생일연에 참석하기 위해 안휘성의 구궁보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모용단죽이라고 밝힌 노인은 조용히 진산월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곳에서 모용 공자의 안내를 받고 후원의 작은 뜨락에 있는 초막으로 가서 누군가를 만났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모용 대협이라고 자처하더군요. 그와 한 시진 가깝게 담소를 나누고 헤어졌지만, 저는 그에게서 어떠한 이상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노인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중에 천수관음 옥 선배님이 찾아와 여러 가지 정황을 들며 제가 만난 그 사람이 가짜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런데 지금 노인장께서 모용 대협 본인이라고 하시니 상당히 당혹스럽습니다. 단순히 말씀만으로 누가 옳고 그른지 정확하게 판단 내릴 수가 없다는 게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노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주어 고맙네. 자네로서는 당연히 가질 법한 의문이겠지.”

담담한 듯한 음성이었으나, 그 안에는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자네가 이미 구궁보에서 그자를 만났을 뿐 아니라 천수관음까지 만나서 나에 대한 논의를 했을 줄은 몰랐네. 덕분에 이야기하기가 오히려 편해졌군. 참, 그녀는 잘 있는가?”

노인이 묻는 사람이 천수관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진산월은 신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서풍에 휘날리는 치마를 입고 계시는 분이라면 확실히 잘 계십니다.”

언뜻 노인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진산월의 의중을 훤히 알고 있다는 의미 같기도 했고, 아련한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미소 같기도 했다.

“그래, 서풍에 휘날리는 붉은 치마(西風吹紅裳). 젊은 시절의 그녀는 붉은 치마에 어울리는 너무도 하얀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주름 하나 없는 팽팽한 모습이었는데, 그 얼굴에도 이제는 제법 잔주름이 생겼겠군.”

진산월은 눈앞의 노인이 적어도 천수관음 옥부용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천수관음의 제자인 냉옥환은 모용단죽만이 천수관음을 ‘서풍취홍상’으로 부른다고 했는데,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노인은 자신이 말한 대로 모용단죽 본인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직도 그분은 주름 없이 고운 얼굴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허헛. 다행스런 일이군.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아직 남아있으니 말일세.”

노인, 모용단죽은 한 차례 나직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진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구궁보에서 만난 사람은 백발에 눈가에 주름이 많은 노인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자는 조익현이라는 인물일세. 혹시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모용단죽은 다시 물었다.

“그 이름을 누구에게서 들었나?”

진산월은 그 점에 대해서는 별로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순순히 대답했다.

“제게 조익현에 대해 말해준 사람은 천봉궁의 소궁주인 단봉공주였습니다.”

모용단죽의 얼굴에 한 줄기 야릇한 기색이 떠올랐다. 딱 꼬집어 무어라고 말하기 어려운 기이한 표정이었으나, 그것은 너무도 순식간에 사라져 진산월조차도 그의 얼굴을 계속 주시하고 있지 않았다면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익현의 이름을 단봉공주가 거론한 것에 대해 왜 모용단죽은 저런 표정을 지었던 것일까?

진산월의 뇌리에 의문이 떠오르기도 전에 모용단죽은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녀가 조익현에 대해 무어라고 했는지 말해 줄 수 있나?”

진산월은 자신이 기억하는 바를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조익현이 철혈홍안의 오빠이며, 천룡궤를 두고 철혈홍안의 남편인 천룡객 석동과 크나큰 싸움을 했다는 것. 그 싸움의 여파가 그 후의 무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결국 그것은 그들의 후손인 모용단죽과 아난대활불을 거쳐 당금 무림에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천룡궤를 노린 조익현이 구궁보에서 모용단죽 행세를 하고 있으며, 그것을 알아차린 철혈홍안이 특별한 의도를 품고 진산월을 통해 천룡궤를 구궁보로 보낸 것까지.

그녀가 밝힌 일들을 말하면서 진산월은 그녀가 말한 내용 하나하나가 정말 중요하고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진산월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모용단죽은 석동이 조익현과의 싸움으로 심한 부상을 입고 강호로 돌아왔다가 소림사 인근에서 실종된 후 아직까지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는 부분에서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나 그의 말이 모두 끝날 때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말을 마친 진산월이 가만히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키자 모용단죽은 문득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그녀의 말은 상당 부분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군. 확실히 나는 천룡객 석동이란 분에게 무공을 배웠으며, 아난대활불과의 싸움에서는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으나 야율척을 만난 후로 내 자신의 한계에 대해 절감했지. 나뿐 아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한 점을 절실히 깨달았을 것일세.”

진산월은 모용단죽의 말에 몇 군데 묘한 구석이 있음을 깨달았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지난 백 년간 무림의 모든 일이 두 사람의 싸움의 여파로 인한 것이라는 그녀의 말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닐세. 그 싸움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결국 내가 구궁보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이곳에 있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모용단죽의 입가에 한 줄기 고졸(古拙)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사실 조익현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일세. 엄밀히 말하면 그가 두려워 이곳에 모습을 감춘 채 꼭꼭 숨어 있는 것이지.”

그의 음성에는 무어라 형용 못 할 씁쓸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부님과 조익현은 세 번에 걸친 싸움 끝에 모두 커다란 부상을 입게 되었네. 두 사람의 상처가 너무 깊어서 그들의 싸움은 오랫동안 중지될 수밖에 없었네. 결국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정상적인 몸으로 돌아오느냐가 그들 사이의 승부에서 결정적인 핵심사안이 되어 버렸지. 만약 사부께서 먼저 몸을 회복했다면 바로 서장으로 조익현을 찾아갔을 것이고, 두 사람 사이의 승부는 그걸로 끝이 났을 걸세.”

“…….”

“반대로 조익현이 먼저 상세를 회복한다면 그가 중원으로 사부님을 찾아왔겠지. 두 사람 사이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모용단죽의 물음에 진산월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조익현이 먼저 중원으로 온 것이로군요.”

“그렇다네. 조익현은 중원으로 오자마자 사부님의 행방을 알기 위해 나를 찾았고, 나는 그 사실을 알자 그를 피해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네.”

천하제일의 고수로 추앙받는 인물답지 않은 부끄러운 일이었음에도 모용단죽은 수치심보다는 착잡함이 더 짙게 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단순히 겁이 나기 때문은 아니었네. 이미 강호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살 만큼 다 산 내가 그의 손에 죽을 것이 무서웠겠나? 다만 나로서는 내 목숨보다 더 귀중한 한 가지 사명을 지켜야 했네. 그 사명을 이루기 전에는 결코 그의 손에 죽거나 사로잡혀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 그게 바로 내가 그를 피해 잠적하게 된 진정한 이유일세.”

진산월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명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모용단죽의 시선이 진산월을 똑바로 향했다. 지금까지의 담담한 눈빛과는 달리 강한 힘과 염원이 담긴 뜨거운 시선이었다.

“한 사람을 찾는 것일세. 그래서 그에게 한 가지 무공과 한 가지 수법을 전해야 하네.”

“그가 누구입니까?”

“특별한 재질을 가진 사람이지. 그 무공과 수법을 익힐 만한 아주 특별한 재질 말일세.”

무공에 대한 재질을 따지자면 강호의 누구나가 모용단죽의 손자인 모용봉을 첫손가락에 꼽을 것이다. 그런데 왜 모용단죽은 바로 지척에 있는 모용봉을 두고 스스로 잠적해 버린 것일까?

모용단죽은 진산월의 그러한 생각을 훤히 꿰뚫은 듯 즉시 입을 열었다.

“봉아(峯兒)는 안되네. 그는 이미 다른 무공을 익혀서 체질이 변했기에 그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 되었네.”

대체 어떤 무공이기에 체질까지 거론된단 말인가?

진산월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다시 물었다.

“모용 공자가 구궁보의 천양신공을 익혔기 때문입니까?”

모용단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천양신공을 익힌 자는 결코 그 무공을 익힐 수 없네.”

그렇다면 왜 모용단죽은 처음부터 모용봉에게 그 무공을 가르치지 않은 것일까?

“그 무공은 사부께서 몸을 회복하는 틈틈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 복원한 것일세.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는 이미 봉아가 천양신공에 입문한 후였지.”

모용봉이 익힐 수 없다면 모용단죽은 물론이고 그의 사부인 석동 또한 익힐 수 없을 것이다.

대체 석동은 무엇 때문에 자신이 익히지도 못할 무공을 오랜 세월에 걸쳐 되살린 것일까? 그가 복원했다는 무공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모용단죽은 왜 자신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모용단죽을 찾아가라고 부탁한 차복승은 모용단죽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 것일까?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의문이 진산월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가운데, 모용단죽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나는 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곳에서 오직 한 사람이 오기만을 기다려왔네.”

“그 사람이 바로 저란 말씀입니까?”

모용단죽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자네야말로 내가 기다려온 바로 그 사람일세. ‘결정했다’는 차 대협의 말은 바로 그런 의미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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