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97화
제 359 장 오장풍운(吳莊風雲) (2)
그 말에 오히려 옆에서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중노인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십이비성?”
십이비성은 강호 제일의 정보조직이라는 성숙해의 핵심으로, 그 인원들은 철저한 비밀에 싸여 누구도 정확한 신분을 알지 못했다.
형수의 한쪽 구석에 있는 작은 장원의 주인이 천하에 이름 높은 십이비성의 일인이라고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오가장의 주인인 오윤은 과거에 명판관으로 명성을 날리던 인물이었다. 무림인들이 관(官)을 가급적 멀리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고관이었던 오윤이 십이비성 중의 일인이라는 것은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제야 중노인은 왜 명정 대사가 오윤에게 바로 손을 쓰지 않고 쓸데없는 담론을 주고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명정 대사는 예의 괴이한 미소를 머금으며 오윤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 시주가 무언가 내력을 지니고 있다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런 신분을 숨기고 있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빈승은 언제까지고 오 시주의 정확한 신분을 알지 못했을 겁니다.”
오윤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동안 완벽히 신분을 세탁했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거요?”
“이 공자는 두뇌가 비상하고 잔꾀가 많아서 천하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런 이 공자가 머무르고 있는 곳이 평범한 곳일 리가 없지요. 자연히 오 시주에 대해서도 의문이 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 시주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던 중에 문득 빈승의 뇌리에 오래전부터 형수 일대에서 은밀하게 떠돌던 소문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오가장의 후원에는 기이한 기관진식이 설치되어 있어서 아무나 들어갔다가는 큰 봉변을 당한다는 것이었지요. 크게 알려진 것도 아니었고, 잠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다 사라져서 뜬소문으로 여겨졌지만 빈승은 이번 일과 연관시켜서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공자와 관련된 사람들 중 기관진식에 달통한 인물이 누가 있을까 잠시 고민해 보았죠. 빈승은 이내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
“십이비성 중에서도 가장 종적이 신비로워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신비의 고수일 뿐 아니라 검보쌍기 중의 척천수사 공야망과 함께 당금 무림 최고의 기관진식의 달인으로 손꼽히는 자, 바로 금우좌의 주인인 금우신군입니다.”
오윤은 허탈한 표정으로 허공을 올려보더니 이윽고 무거운 탄식을 토해냈다.
“허어! 예전에 후원을 지을 때 공사를 맡던 인부들 중 몇 명이 진식에 빠져 낭패를 볼 뻔한 걸 구하는 과정에서 잠시 소란이 있기는 했었소. 당시에는 잘 대처하여 그에 대한 소문이 나려는 걸 완벽하게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기억하고 내 숨겨진 신분마저 추측해 내다니 대사의 탁월한 안목과 혜안에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구려.”
“강호에 드높은 명성을 가진 금우신군의 칭찬에 빈승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명정 대사는 밝게 웃고 있지만, 그의 음성에는 은근한 비아냥의 뜻이 담겨 있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윤은 여전히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대사의 안목이나 식견으로 보아 중원무림의 고인(高人)이 분명한데 그걸 눈치채지 못했으니 내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구려.”
“고인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그럼 중원이 아닌 서장의 고인이시구려. 미안하지만 대사의 높은 이름을 알려줄 수 있겠소?”
“허허. 오 시주야말로 심기가 대단하십니다. 간단한 몇 마디 말로 빈승의 정체를 알아내려 하시다니. 빈승의 속가명은 탁세호라 합니다.”
그 말에 오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이제 보니 흑갈방의 태상호법이며 서장십이기 중의 한 분이신 혼천마군이셨구려. 미처 몰라뵈어 죄송하오.”
“별말씀을.”
오윤의 눈이 한쪽에 서 있는 중노인에게로 향했다.
“그럼 저분도 서장의 고수이시오?”
중노인이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내가 비일염이오.”
오윤은 다시 탄성을 터뜨렸다.
“십육사 중의 무영천자가 당신이구려. 고명한 이름은 익히 들었소.”
비일염은 탁세호를 대할 때와는 조금 다른 듯한 오윤의 반응이 못마땅한지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비일염의 뒤에 시립하듯 서 있는 세 명의 죽립인을 바라보다가 그들에게서 별다른 기세를 느낄 수 없자 이내 다시 탁세호에게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대로 형수의 구석구석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서장의 고인들이 지척에 살고 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참으로 창피 막심한 노릇이오.”
정체를 드러낸 탁세호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투 또한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귀하의 명성이 워낙 드높아서 내가 먼저 알아차린 것일 뿐이니 너무 스스로를 자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보아하니 후원을 제외한 본 장의 모든 곳은 이미 탁 대협의 수하들 손에 완전히 점거된 듯한데, 이런 상황에서 그깟 강호의 명성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제 나는 꼼짝없이 탁 대협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구려.”
“말은 그렇게 해도 은근히 후원의 이정문이 무슨 수를 써오리라고 기대하고 있음을 알고 있소. 하나 너무 걱정 마시오. 후원은 철통같이 잘 보호되어 누구도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을 거요. 그러니 이제 당신에게 남은 일은 오직 한 가지뿐이오.”
“후원도 완전히 봉쇄했다면서 아직도 내게 남은 용무가 있다니 놀랍구려.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탁세호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어렵지 않은 일이오. 후원의 진식을 해체하고 이정문으로 하여금 제 발로 나오도록 하면 되는 거요.”
오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지금 나보고 스스로 이 공자를 당신들 손에 넘기라는 말이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도 있소.”
“그게 무엇이오?”
“기관진식이 아무리 뛰어나도 사람이 만든 이상 허점이 있기 마련이오. 특히 안에 있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힘들지 몰라도, 그 안의 사람을 없애기 위해서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소. 굳이 힘들게 기관진식을 제거할 필요도 없는 일이오.”
무언가를 느낀 듯 오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하게 굳어졌다.
탁세호의 시선이 잠깐 대청 밖을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바로 화공(火攻)이오. 마침 비도 그쳐서 그 방법을 쓰기에 아주 적당할 듯하오. 물기 있는 나무는 연기가 많이 난다는데, 후원에 꼭꼭 모습을 숨기고 있는 이정문이 그 연기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구려.”
“멀쩡한 사람이 있는 곳에 불을 지르겠다는 거요?”
오윤이 날카롭게 소리쳤으나, 탁세호는 온화한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이정문이 스스로 걸어 나온다면 굳이 애꿎은 장작들을 허비할 필요가 없는 일 아니겠소? 그게 아니라면 당신이 데리고 나와도 좋겠지. 선택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린 일이오.”
오윤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자신이 공들여 설치한 후원을 자기 손으로 파괴한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탁세호의 말대로 그들이 화공을 펼친다면 아무리 후원에 설치한 기관진식이 뛰어나다 해도 감당할 수 없다는 건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적어도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절대로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이대로 후원이 불바다로 변하는 꼴을 보고 있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적들의 손에 이정문을 넘겨줄 것인가? 어느 것이든 어렵고 고통스러운 길이었으나, 오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뿐이었다.
이윽고 오윤은 땅이 꺼져라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후우! 탁 대협은 참으로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구려. 탁 대협이 이렇듯 나를 핍박하니 나로서는 원치 않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소.”
“허허. 핍박이라니 당치 않소. 나는 그저 당신이 시류를 잘 파악하여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랄 뿐이오.”
“그러니 모쪼록 탁 대협께서는 나를 탓하지 말아주길 바라오.”
“그건…….”
무심코 오윤의 말에 대답하려던 탁세호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오윤의 오른손이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의 한 부분을 살짝 눌렀다.
그으응! 쿵!
그러자 대청이 미약하게 흔들리더니 돌연 부서진 대청의 입구에 새로운 문이 나타나 빠르게 닫히기 시작했다. 탁세호를 비롯한 중인들이 흠칫 놀라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대청의 입구는 검게 칠해진 문으로 굳게 닫힌 후였다.
다시 시선을 돌린 탁세호의 입에서 무거운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음!”
중인들의 시선이 문으로 향한 그 짧은 사이에 방금 전만 해도 의자에 앉아 있던 오윤의 모습이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비일염이 단숨에 신형을 날리며 오윤이 앉아 있던 의자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콰앙!
의자가 박살이 남과 동시에 그 밑으로 시커먼 구멍이 입을 벌렸다.
“제길! 암도를 만들어놨구나.”
비일염이 이를 갈며 당장이라도 그 구멍 속으로 뛰어들 듯하자 탁세호가 황급히 그를 제지했다.
“잠깐 멈추게.”
비일염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돌아보며 싸늘한 음성을 내뱉었다.
“탁 형이 너무 여유를 부리는 바람에 그놈이 수작을 부릴 기회를 준 거 아니오?”
탁세호는 여전히 침착함을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금우신군에게 이런 한 수라도 없었으면 강호에 퍼진 명성이 거짓이란 말이겠지. 너무 조급해하지 말게. 어차피 그가 갈 곳은 뻔하니 말일세.”
“뻔하다니? 후원으로 갔단 말이오?”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의 목적은 우리 손에서 이정문을 무사히 구출하는 걸세. 암도를 따라가 봤자 함정이나 각종 기관으로 도배가 되어 있을 게 분명한데, 굳이 그쪽으로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럼 어서 후원으로 갑시다.”
비일염은 탁세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대청의 입구로 날아갔다.
콰앙!
굳게 닫힌 문을 향해 세찬 일장을 날린 비일염이 인상을 찡그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제길. 쇠로 만든 문이로군.”
검은색 문 한 부분의 색칠이 벗겨지며 드러난 것은 두꺼운 철문이었다. 철문 한가운데 손바닥 문양이 선명히 찍힌 것으로 보아 조금 전 비일염의 장력이 얼마나 무서운 위력을 지녔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철문은 끄떡도 하지 않고 완강하게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비켜보게.”
탁세호가 비일염의 앞으로 성큼 나섰다. 비일염은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이었으나, 아무 말 하지 않고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탁세호는 문의 이곳저곳을 눈으로 쓰윽 훑더니 이내 양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파팡팡팡!
대여섯 가닥의 장력이 연거푸 터져 나오며 철문의 사방 귀퉁이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어?”
비일염이 경호성을 터뜨리는 사이에도 탁세호는 쉬지 않고 장력을 날렸고, 이내 철문을 감싼 문틀 주위가 너덜너덜해졌다.
탁세호는 손을 멈추고 잠시 철문을 살펴보더니 이윽고 가벼운 일장을 날렸다.
쿠쿵!
우렁찬 굉음과 함께 좀처럼 꿈쩍도 않을 것 같던 무거운 철문이 문틀과 함께 육중한 소리를 내며 넘어가 버렸다.
먼지가 수북이 올라오는 가운데 탁세호가 비일염의 어깨를 툭 치며 앞으로 성큼 걸어나갔다.
“혹시 이런 일이 있을지 몰라 조금 전 문을 부술 때 문틀 주위도 파손시켰지. 이제 느긋하게 따라가면 금우신군이 우리를 이정문에게로 인도해 줄 걸세.”
비일염은 먼지가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황급히 탁세호의 뒤를 따라갔다. 그 뒤를 세 명의 죽립인이 묵묵히 뒤따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