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401화
제 360 장 암도진창(暗渡陳倉) (3)
황량하기만 했던 먼젓번의 석실과는 달리 여기저기에 장식품이 달려있고 한쪽 벽면에 책이 가득 꽂혀 있는 서가가 있는 공간은 화려하지는 않아도 정갈하면서 아늑함을 느끼게 했다. 그들이 들어온 문 외에 다른 출입구는 없었으나, 실내의 공기는 전혀 탁하지 않고 오히려 쾌적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 실내의 중앙에 몇 개의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의자에 앉은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세 사람이 있었다.
그중 중앙의 사람은 대청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금우신군 오윤이었다.
오윤의 양옆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비일염의 시선은 그중에서도 우측에 있는 청년의 얼굴에 못 박히듯 고정되었다. 비쩍 마르고 신경질적으로 생긴 청년의 유달리 날카로운 두 눈을 보자 비일염의 뇌리에 문득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탁세호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안에 들어온 이후 줄곧 우측에 있는 청년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중앙에 앉아 있던 오윤이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휴우. 결국 여기까지 찾아왔군. 그 집요한 끈기에 찬사를 보내고 싶구려.”
탁세호의 시선이 그제야 오윤에게로 향했다.
“교토삼굴(狡?三窟)이라는데, 신군의 솜씨가 워낙 좋아서 애로사항이 적지 않았소. 솔직히 몇 번은 더 고생을 할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 신군을 다시 보게 되니 반가우면서도 의아한 생각이 드는구려.”
겨우 도망간 곳이 여기냐는 비아냥이 담긴 말이었다.
오윤은 다시 한 차례 탄식을 토해냈다.
“암도를 따라오더라도 앞의 석실에서 더 이상 쫓아오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그토록 이른 시기에 석실을 열고 이곳까지 올 줄은 몰랐소.”
탁세호가 노골적으로 우측의 청년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가에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나저나 신군 덕분에 만나기 어려운 분을 만나게 되었구려. 이렇게 직접 눈앞까지 안내해주니 고맙기 이를 데 없는 일이오.”
뚱한 얼굴로 앉아 있던 청년은 그의 그런 시선이 못마땅한지 입술을 삐죽거렸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모양이구려?”
표정만큼이나 퉁명스러운 음성이었다.
탁세호가 비록 서장에서 주로 활동했다고 해도 적지 않은 중원의 고수들은 그의 명성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서장에서 그의 위치는 중원의 무림구봉에 못지않은 것이어서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심지어 흑갈방의 방주인 위태심조차도 그에게만큼은 존중을 잃지 않고 예우를 해주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청년은 마치 저잣거리의 노인을 대하듯 행동거지에 거침이 없으니 탁세호 본인이 아니라 그 옆에 있던 비일염이 오히려 무안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하나 탁세호는 조금도 화를 내거나 언짢아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소리 내어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내가 어찌 천하에 명성 높은 산수재 이 공자를 모르겠소? 이 공자를 찾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이 공자는 짐작도 하지 못할 거요.”
청년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내가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 다니는 무뢰배도 아니고 남들 모르게 꼭꼭 숨어 지내는 은자(隱者)도 아닌데 나를 찾는 일이 무어 그리 어려웠단 말이오?”
“이 공자가 꼬리를 감춘 신룡(神龍)처럼 쉽게 행적을 드러내지 않으니 이 공자를 찾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소. 어찌 되었건 이렇게 이 공자를 만나게 되었으니 정말 기쁘고 반갑기 그지없구려.”
“나는 귀하를 처음 보는데, 나를 그토록 만나고 싶었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구려. 무슨 일로 나를 그렇게 애가 타도록 찾고 있었던 거요?”
청년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천연덕스럽게 물어오자 강호 경험이 많고 심기가 깊은 탁세호도 일순간 말문이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탁세호는 이내 너털웃음을 지으며 합장을 해 보였다.
“허허! 신군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는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내 이름은 탁세호라 하오.”
서장의 최고 기인 중 한 사람인 혼천마군 탁세호가 먼저 신분을 밝히며 인사를 해오자 청년도 더 이상은 그를 무시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 보니 서장십이기 중의 한 분인 혼천마군이셨구려. 오 대협에게 두 분의 말씀은 들었지만 어느 분이 무영천자이고 어느 분이 혼천마군인지 몰라 미처 인사드리지 못했소. 나는 이정문이라 하오.”
청년, 이정문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하자 이제껏 말없이 탁세호의 옆에 서 있던 비일염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신과 탁세호를 무시하는 듯한 그의 말에 불쑥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서장 무림의 원수라 할 수 있는 이정문을 앞에 두고 태연히 대화나 주고받고 있는 눈앞의 상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정문은 두뇌가 비상하고 술수가 뛰어나기로 강호무림에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상대가 이정문임을 확인한 이상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며 그에게 기회를 주기보다는 단숨에 그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 비일염의 생각이었다.
그런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겉으로 드러났는지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흉흉했고, 전신에서는 살기등등한 기운이 진득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연인지 그때 이정문의 시선이 비일염에게로 향했다.
이정문은 흉악한 빛이 감돌고 있는 비일염의 얼굴을 빤히 보고서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귀하가 바로 무영천자이겠구려. 예상했던 대로의 모습이어서 정말 다행이오.”
비일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날카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뭐가 다행이란 말이냐?”
“소문으로 듣기로는 흑갈방의 수뇌 중 총순찰을 맡은 무영천자는 성격이 화급하고 시야가 좁아서 큰일을 맡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했소. 게다가 시기심이 심하고 아량이 부족해서 아랫사람을 다스리기도 쉽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 하지만 나는 무영천자가 그런 인물이라면 흑갈방 같은 거대문파의 수뇌가 될 리 없다고 생각해서 그 소문을 반신반의하고 있었소.”
“…….”
“그런데 실제로 보니 소문 그대로 성격은 불같이 급하고 성질도 좋지 않은 인물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겠구려. 이런 인물이 흑갈방을 이끄는 수뇌 중의 한 사람이니, 흑갈방을 상대해야 하는 나로서는 어찌 다행스런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소?”
이정문이 무슨 말을 하는지 가만히 듣고 있던 비일염의 얼굴에 붉은빛이 어른거리며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광이 피어올랐다.
“다 지껄였느냐?”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비일염의 모습을 뻔히 보면서도 이정문은 그를 향해 입을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화가 난다고 살기를 흘리고 씩씩거리는 것은 소인배나 하는 짓이오. 보아하니 당신의 나이도 적지 않은 것 같은데, 쓸데없이 혼자 성질에 못 이겨 실수하지 말고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거요.”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구나. 어디 머리통이 잘려나간 다음에도 아가리를 놀릴 수 있는지 한번 보자!”
비일염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려 했으나, 그때 탁세호가 그를 제지했다.
“물러서게.”
비일염이 성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나서지 않을 생각이면 탁 형은 가만히 있으시오.”
“방주께서 이번 일을 누구에게 맡겼는지 잊지 말게.”
탁세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그 말을 듣자 비일염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몇 차례 거친 숨을 몰아쉬고는 탁세호를 향해 호랑이가 으르렁대는 듯한 음성으로 낮게 말했다.
“저놈의 마지막 숨통은 내가 끊어 놓을 거요. 그건 탁 형도 분명히 알아두시오.”
탁세호는 그 말에 가타부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비일염을 진정시키고 이정문을 돌아본 탁세호의 얼굴에 쓴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정문은 눈앞의 소동을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탁세호는 그 얄미운 모습에 비일염을 괜히 말렸나 하는 후회감마저 들었으나, 일을 마무리 짓기 전에 필히 확인해야 할 사항들이 있기에 스스로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수밖에 없었다.
“휴우. 이 공자의 입담이 대단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토록 예리할 줄은 몰랐구려.”
이정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건 탁 대협이 몰라서 하는 소리요. 내가 진짜 입담이 대단한 친구를 알고 있는데, 아마 그를 만났다면 나보고 입담이 어쩌고 하는 소리는 하지 않았을 거요.”
“그 대단한 친구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만,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구려.”
“말씀하시오. 여기까지 어렵게 나를 찾아와준 성의를 생각해서 기꺼이 들어드리겠소.”
이정문의 계속되는 입담에 탁세호는 고개를 한 차례 내젓고는 이내 예리한 눈으로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신검무적은 지금 어디에 있소?”
이정문의 작게 찢어진 두 눈이 조금 크게 뜨여졌다.
“신검무적의 행방을 왜 내게 묻는 거요?”
탁세호의 얼굴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 공자가 신검무적과 함께 본 방을 없애기 위해 힘을 기울여 왔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오. 아마 이번 팽가장의 회갑연을 기회로 본 방에 본격적으로 손을 써오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소.”
“…….”
“그런데 이 근방에서 신검무적의 종적이 묘연해져서 본 방의 힘으로도 찾을 수가 없게 되었소. 그래서 이 공자라면 그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요.”
이정문은 한 차례 어깨를 으쓱거렸다.
“진 장문인이야말로 진정으로 신룡 같은 사람이라 나로서도 행방을 알 수가 없소. 설사 알고 있다고 해도 내가 탁 대협에게 알려줄 리도 의무도 없고. 인연이 있다면 탁 대협도 그를 만날 수 있지 않겠소?”
탁세호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씩 짙어졌다.
“역시 쉽게 말하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 이 공자는 아마도 우리의 손에서 벗어날 자신이 있어서 여유를 부리는 것이겠지만, 이번에는 쉽게 그러지 못할 거요.”
이정문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그런 말은 많이 들어왔소.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이렇게 분명히 살아있고, 나를 위협했던 사람들은 모두 보이지 않게 되었소. 탁 대협도 그런 전철을 밟을 것이 우려되는구려.”
“하하. 대단한 배짱에 입담이오. 그 좋은 입담이 언제까지 가나 두고 보겠소.”
“입담이 좋은 사람은 따로 있다니까.”
이정문이 퉁명스레 대꾸하는 순간, 탁세호가 벼락같은 일장을 날렸다.
그의 장력이 향한 곳은 이정문이 아닌 가장 좌측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백의를 입은 평범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는데,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돌연 탁세호가 느닷없는 공격을 해오자 순간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우측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꽝!
두 사람의 장력이 허공에서 격돌하며 세찬 경력이 실내를 한바탕 뒤집어 놓았다.
탁세호는 살짝 눈을 찌푸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으나, 이내 눈을 빛내며 백의 중년인을 응시했다. 백의 중년인 또한 한 걸음 물러서 있는 것을 확인한 탁세호의 두 눈에 신광이 이글거리며 피어올랐다.
“역시 이 공자가 믿는 사람이 따로 있었군. 당신도 십이비성의 한 사람이오?”
백의 중년인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십이성좌의 천칭좌(天稱座)를 맡고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