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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404화


제 361 장 쌍괴출현(雙怪出現) (2)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두 명의 죽립인이 서 있었다. 그중 왼쪽에 있던 죽립인이 어느새 몇 발자국 앞으로 나와 있었는데, 왼손의 다섯 손가락을 모은 채 살짝 앞으로 내밀고 있는 자세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죽립인은 쳐들었던 손을 다시 자연스레 아래로 늘어뜨렸다.

죽립 아래로 괴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쇠기둥을 칼로 긁는 듯한 거칠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배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랫동안 함께 했던 동료를 향해 거침없이 손을 쓰기에 완전히 썩어 빠진 줄 알았더니 눈까지 썩은 것은 아니군.”

듣기 거북할 정도로 쇳소리 가득한 그 음성에는 왠지 듣는 이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기이한 힘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탁세호는 물론이고 강호에서 온갖 풍상을 겪어왔던 마송일과 오윤, 심지어는 지금까지 줄곧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있던 이정문마저 얼굴이 굳어지고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탁세호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경악과 당혹감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지선(地仙)……! 팽가장에 있어야 할 당신이 어떻게 여길…….”

죽립인은 천천히 죽립을 벗었다.

거무튀튀한 얼굴에 주름이 잔뜩 진 초라한 몰골의 노인이었다. 수정처럼 차갑게 빛나는 유달리 작게 찢어진 두 눈을 제외하고는 누가 보아도 촌노(村老)를 연상케 하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노인은 무심한 시선으로 탁세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쌍위 대신 노부가 이곳에 있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군.”

이제까지 두 명의 죽립인은 중인들의 주시에서 은연중 벗어나 있는 상태였다.

그것은 이정문 일행은 물론이고 탁세호와 비일염조차도 그들이 위태심을 호위하는 수신쌍위인 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위태심이 외부에 모습을 드러낼 때는 늘 수신쌍위를 대동했기에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탁세호 또한 그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기에 죽립인의 정체를 알아차린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드러난 죽립인의 정체는 그가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했던 공포스런 존재였던 것이다.

흑갈방에서는 방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봉공의 신분을 가진 그들을 천지쌍노라 불렀다. 천지쌍노는 평상시에는 좀처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행사 또한 신비스럽기 그지없어서 흑갈방 내에서조차 그들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하나 탁세호는 그들의 진정한 신분을 알고 있었다. 천지쌍노는 다름 아닌 서장 무림의 전설적인 존재인 천산이괴(天山二怪)의 변신이었던 것이다.

천산이괴는 서장의 제일지자였던 단목초가 꼽은 서장무림 최고의 고수들이었다. 단목초는 살아생전에 중원의 ‘일령삼성’에 빗대어 서장의 ‘이괴사불’이라면 능히 그들과 견줄 만하다고 말하곤 했었는데, 그가 지칭한 ‘이괴’가 바로 천산이괴였다.

‘사불’은 천룡사의 사대불법존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들 또한 반백 년 가까이 서장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했던 불가일세(不可一世)의 고수들이지만 단목초는 천산이괴를 그들보다 앞자리에 놓았다. 그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의아함을 표했으나, 단목초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내뱉은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사실 천산이괴는 평생을 천산에서 칩거하여 외부로 모습을 나타낸 적이 거의 없어서 그들의 실제 무공이 어떠한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하나 단목초의 발언 이후 호승심에서 천산을 찾았던 많은 고수들 중 살아서 천산을 내려온 자들은 거의 없었고, 그 후로 누구도 그들의 무공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았다.

촌로의 모습을 한 노인은 천지쌍노 중의 둘째인 지선 공태(貢泰)로, 탁세호는 지금까지 딱 한 번 그를 만났을 뿐이었다. 그 한 번의 만남만으로도 탁세호는 공태가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무서운 고수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탁세호는 천지쌍노의 행적에 늘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 오전만 해도 천지쌍노는 팽가장에 가서 회갑연에 참석하려는 인물들을 제거하고 회갑연의 주인인 팽도협을 살해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내일이 회갑연이기에 상대의 의표를 찌르기에 충분했고, 또한 오가장에 숨어있는 이정문을 노리는 양동작전으로도 완벽한 것이어서 탁세호조차도 그 계획에 한 점의 의문을 가지지 않았었다.

육 년 동안이나 속마음을 숨긴 채 은인자중하고 있던 탁세호가 기꺼이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내며 방주인 위태심을 향해 주저 없이 손을 썼던 것도 오늘의 계획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기에 더 이상의 반전은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팽가장으로 간 줄로만 알았던 천지쌍노가 쌍위로 변장한 채 모습을 숨기고 있었으니 탁세호로서는 경악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공태의 수법에 양손이 모두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음에도 탁세호는 통증보다는 마음속의 두려움을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공태는 시퍼렇게 굳어 있는 탁세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어서 줄에 널려 있는 생선을 보는 것처럼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누구도 그런 시선을 본다면 가슴이 섬뜩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래는 당초 계획대로 팽가에서 벌어지는 회갑연에 갈 생각이었지. 그런데 방주가 아무래도 이번에는 미꾸라지 사냥을 해야 할지도 모르니 손을 빌려달라더군. 호기심에서 승낙했는데, 진짜 미꾸라지를 사냥하게 되었으니 정말 재미있는 일 아닌가?”

탁세호는 이를 악물며 위태심을 돌아보았다.

“나를 의심하고 있었나?”

위태심은 탁세호의 손에 잡혀 있느라 손자국이 나 있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당신이나 총순찰, 둘 중 한 사람에게 이정문의 손길이 닿아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소.”

비일염이 깜짝 놀라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나는 아니오, 방주. 나는 단 한 번도 방주에게 역심(逆心)을 품은 적이 없소.”

위태심은 그를 슬쩍 돌아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둘 중 하나라면 총순찰보다는 총호법이 더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소. 총순찰은 이런 일을 벌이기에는 담이 좀 약한 편이지.”

비일염은 그 말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위태심은 그의 표정이야 어떻게 변하든 여전히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정문의 행적이 우리에게 노출되었을 때부터 최악의 경우, 과거와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소. 아무리 바보인 나라도 똑같은 일에 두 번씩이나 당할 수는 없지 않겠소?”

위태심의 시선이 이정문에게로 향했다.

“어떻소? 아직도 내가 실망스럽소?”

이정문의 얼굴은 평상시보다 훨씬 딱딱하게 굳어있어 가뜩이나 뚱해 보였던 얼굴이 더욱 심통 사나워 보였다.

이정문은 한동안 아무 대꾸도 없이 위태심과 한편에 서 있는 천지쌍노를 번갈아 보더니 이윽고 땅이 꺼져라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실망스러운 건 위 방주가 아니라 나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묻는 거요?”

“스스로가 실망스럽소?”

이정문은 씹어뱉듯이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내 자신이 너무 실망스러워서 내 손으로 이 머리통을 잘라내 버리고 싶을 정도요.”

“그 머리통을 자를 사람은 따로 있으니 굳이 당신이 손을 쓸 필요는 없소.”

“그 누군가는 바로 위 방주이겠구려?”

“그렇소. 나로서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일이니 누구에게도 양보할 생각이 없소.”

위태심의 음성은 나직하고 조용했으나, 이정문은 그 속에 담긴 결연하면서도 단호한 기색을 알아차리고 다시 한 차례 탄식을 토해냈다.

“휴우! 이번에는 정말 빠져나갈 길이 없어 보이는구나. 한순간의 판단 착오로 일을 이 지경에 빠지게 했으니, 나도 이제 머리가 다 된 모양이다.”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이정문이 공태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인사도 드리지 못했군요. 이정문이 강호의 노선배님을 뵙습니다.”

공태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 박혀 있는 두 개의 작은 눈이 실선처럼 가늘어지며 괴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끌끌. 소문과는 다르게 예의를 아는 젊은이로군. 노부는 공태라 하네.”

“비록 서로 뜻이 달라 칼을 겨누는 사이가 되기는 했으나, 무림에 몸담고 있는 말학(末學)으로서 오랫동안 혁혁한 명성을 쌓아온 선배고수에게 무례를 범할 수는 없지요.”

공손하게 인사를 마친 이정문은 아직 죽립을 벗지 않고 있는 죽립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분도 천지쌍노 중의 한 분이시겠지요? 무림말학(武林末學) 이정문이 인사 올립니다.”

죽립인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이정문을 묵묵히 쳐다보고 있더니 천천히 죽립을 벗었다.

드러난 얼굴은 새하얀 백발에 대춧빛 피부를 지닌 노인이었다. 주름살이 가득한 공태와는 달리 젊은이의 그것처럼 팽팽한 피부를 지닌 백발 노인의 이목구비는 준수하기 그지없어 한창 시절에는 뭇 여인들의 방심(芳心)을 흔들었을 게 분명해 보였다.

“나는 궁해(弓海)다.”

짤막한 말이었으나, 그 말 한 마디에 장내의 공기가 갑자기 꽁꽁 얼어붙는 듯한 살벌함이 감돌았다.

천살(天殺) 궁해! 천산이괴의 첫째이며, 한때 천산 일대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희대의 천살성(天殺星)이라고 불렸던 전설적인 존재였다.

수려한 외모와는 달리 일단 손을 쓰면 상대를 살려두지 않는 냉혹무비한 그의 솜씨 때문에 천산에서는 ‘그의 손이 움직이면 하늘이 피로 물든다!’라며 공포에 떨기도 했다.

지선 공태 또한 ‘손가락이 날아오르면 땅이 피에 젖는다’라는 노래가 있을 정도로 무서운 인물이었으나, 천산이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공태보다 궁해를 더욱 무서워했다. 공태는 그래도 몇 마디의 대화라도 나누는 경우가 있지만, 궁해는 말보다는 살수를 쓰는 것을 더욱 즐겨 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탁세호 또한 아까부터 궁해 쪽으로는 일부러라도 시선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 우연히 눈이라도 마주쳤다가는 당장이라도 궁해의 무시무시한 손바닥이 자신의 머리통을 박살 내 버릴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정문 또한 궁해의 이름을 직접 듣는 것으로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다만 죽립을 벗지 않고 있는 그가 진짜 천산이괴의 궁해인지를 확인해 보고자 했을 뿐이었다.

이제 장내의 상황은 확실하게 피아가 구분되었을 뿐 아니라, 우열 또한 확실하게 판가름이 났다.

이정문은 비록 십이비성의 두 사람에게 보호를 받고 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천산이괴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설사 그들 두 사람이 합공을 한다 해도 천산이괴 중 한 사람조차 당해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회심의 한 수로 준비했던 탁세호는 양손을 부상당했을 뿐 아니라 완전히 기가 꺾여서 스스로의 몸조차 제대로 돌보기 힘든 상태였다.

그에 비해 상대편은 천산이괴 외에도 흑갈방의 방주인 위태심과 총순찰인 비일염이 버티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어느 쪽이 우세한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고, 그 우열은 미세한 것이 아닌 절대적인 차이였다.

그럼에도 위태심은 조금도 방심하거나 사태를 낙관하지 않고 처음의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가 이정문이기 때문이었다.

두뇌가 비상하고 임기응변에 능한 둘째 사형 상관욱을 계략으로 꺾고, 심기가 깊고 치밀한 대사형 감종간을 함정에 빠뜨려 그를 이용해 사부인 단목초를 살해한 자가 바로 이정문이었다. 그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고 있기에 위태심은 이정문의 머리통을 분명하게 잘라놓을 때까지는 절대로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런 그의 마음속에는 이정문이 이대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의 불안함이 존재하고 있었다. 자신이 몇 번이나 검토하고 수정한 끝에 마침내 그를 완벽한 구석에 몰아넣었다고 확신했지만, 그래도 마음속에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정문이 문득 자신을 쳐다보았을 때 위태심은 공연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의 그런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이정문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위 방주의 계획은 정말 완벽했소. 한 가지만 빼면 정말 흠잡을 곳이 없구려.”

위태심의 눈이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살짝 찌푸려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게 무엇이오?”

이정문은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양 손바닥을 위로 펼쳐 보였다.

“내가 왜 하필이면 이곳에서 위 방주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거요.”

위태심은 이곳에 어떠한 기관진식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몇 차례나 확인했기에 이정문의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이 장소에 특별한 의미라도 있단 말이오?”

이정문은 어느새 처음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뚱하고 퉁명스러워 보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용의주도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지하를 돌고 돌아오느라 미처 몰랐던 모양인데, 이곳은 오가장의 대청 바로 밑이오.”

위태심은 흠칫하여 자신도 모르게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귓전으로 이정문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니 굳이 힘들게 기관진식 같은 걸 설치할 필요 없이 대청 바닥을 뜯어내기만 하면 누구든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오.”

그 순간, 한 줄기 검기가 천장의 일부분을 뚫어내더니 이내 천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러고 한 사람이 그 구멍 안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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