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425화
제370장 낙양회로(洛陽回路)(1)
“장문 사형.”
전흠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진산월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냐?”
전흠은 생각이 많은 얼굴로 진산월을 바라보다가 약간은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정말 이대로 떠나도 괜찮은 겁니까?”
팽가장에서 벌어진 회갑연은 무사히 끝이 났다.
야율척과의 약속 때문인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형수의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던 흑갈방의 무리들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모습을 감추어 버렸고, 회갑연 또한 특별한 문제 없이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다.
노심초사하고 있던 팽철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회갑연이 끝난 후 진산월은 바로 형수를 떠났다. 팽철영은 물론이고 회갑연의 주인인 팽도엽마저 좀 더 팽가장에 머물러 주기를 간곡히 청했으나, 진산월은 주저하지 않고 작별 인사를 건넨 후 팽가장을 나온 것이다.
그가 이끌던 선반의 고수들은 당분간 부반주인 이정문이 맡기로 했기에, 진산월은 좀 더 홀가분한 상태에서 사제인 전흠만을 대동한 채 길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전흠은 따라오겠다는 선반의 고수들을 마다한 채 훌쩍 떠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 모습이었다.
사실 성격이 투박해서 사교성이 별로 좋지 못했던 전흠은 선반의 고수들과 동행하면서 의외로 몇몇 사람과 서슴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청성파의 제일기재라는 남해일과는 나름대로 각별한 우정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를 두고 떠나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던 것이다.
더할 수 없이 드넓고 광활한 중원 무림에서 이렇게 헤어진다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기약할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남해일이 몸담고 있는 청성파는 종남파가 있는 섬서성에서 수천 리나 떨어져 있기에 전흠은 더욱 짙은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선반처럼 하나의 특수한 조직에 속한 상태로 다른 문파의 고수들과 활동을 해 본 적이 없는 전흠으로서는 선반의 고수들과 함께 좀 더 강호를 누벼 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나 엄밀히 말하면 선반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무림맹이 선반에 기대했던 것도 중원에 침투해 들어온 서장의 전초 세력에 대한 탐지와 제거였고, 그것은 너무도 완벽하게 이루어진 상태였다.
더구나 서장 무림을 이끌고 있는 야율척이 자기 입으로 중추절까지 활동을 자제하겠다고 공언한 이상 선반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진산월에게는 선반을 이용해 명성을 쌓거나 그들을 세력화하여 자신이 이끌어 나갈 의도 같은 것이 전혀 없었기에 이쯤에서 선반과 결별하는 것이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수순이었다.
선반을 정식으로 해체하는 건 무림맹 본산에서 해야겠지만, 일단 진산월은 몇 가지 개인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을 위해서 선반의 고수들과 먼저 작별할 수밖에 없었다.
전흠도 그런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생애 처음으로 친하게 지냈던 남해일과 갑작스럽게 헤어지게 되니 아쉬운 생각이 계속 머리에 남아 있었다.
진산월은 미련과 아쉬움이 가득한 전흠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빙긋 웃었다.
“남 소협과 제법 친해진 모양이더구나.”
전흠이 잠시 머뭇거리다 그답지 않게 조금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남 소협과는 이야기가 제법 통하는 편입니다.”
진산월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말을 잘 들어 주는 사람과는 이야기하기가 편하지.”
전흠이 생각해 보니 진산월의 말마따나 남해일은 자신의 말을 잘 들어 주는 편이었다. 사투리가 심하고 말주변도 별로 없는 전흠의 거칠고 투박한 말도 남해일은 짜증 내거나 불편해하지 않고 항상 웃으면서 받아 주었다.
전흠이 남해일과 친하게 된 것도 그와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대화가 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전흠은 그저 남해일이 자신과 성격이 맞나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진산월의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와 친해진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남해일은 자신뿐 아니라 선반의 대다수 고수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편이었다. 누구와도 서슴없이 대화를 나누고 잘 웃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전흠은 왠지 들떴던 기분이 가라앉으며 약간의 서운함마저 들기 시작했다. 아직 사람을 사귀는 데 익숙하지 않은 전흠으로서는 자신이 유일하게 친구라고 생각한 남해일이 자신뿐 아니라 여러 명의 친구를 두고 있다는 것이 왠지 야속하게 느껴졌다.
진산월은 여러 차례 변하는 전흠의 얼굴만 봐도 그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는지 담담하면서도 차분한 음성으로 그를 향해 말했다.
“남 소협 같은 사람은 누구와도 쉽게 친해질 수 있지. 하지만 너는 다르다. 너 같은 사람은 정말 흔하지 않다.”
전흠은 무슨 말이냐는 듯 진산월을 힐끔 쳐다보았다. 무언가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고 싶은데, 차마 장문인에게 그럴 수는 없어서 불만을 속으로 삭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진산월은 그의 그런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너는 쉽게 남에게 다가가지도 않고, 쉽게 마음을 열거나 믿지도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도 않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능숙하지 못하지.”
“…….”
“그래서 너는 친구 만들기가 쉽지 않은 성격이다. 그런 네가 우정을 느끼고 손을 내밀어 사귀는 친구라면, 그도 또한 네가 얼마나 어려운 선택을 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진산월의 말을 듣고만 있던 전흠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불쑥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남 소협이 네가 처음으로 사귄 친구라서 너에게 소중하다면, 남 소협 또한 너를 다른 누구보다 특별하고 소중한 친구로 생각할 것이라는 말이다.”
딱딱하게 굳어졌던 전흠의 얼굴이 갑자기 활짝 풀어졌다.
“장문 사형은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렇다.”
진산월의 대답은 짤막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전흠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전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 되어 있었다. 약간은 처졌던 어깨도 펴지고, 내딛는 걸음걸이도 한결 경쾌해졌다. 심지어는 걸으면서 나직하게 콧소리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진산월은 전흠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전흠은 무공이나 강호에서의 경험에 비해 대인 관계가 무척 서투른 편이었다. 그래서 그가 선반의 고수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할 것을 걱정했던 진산월은 사제가 남해일과 친해지게 된 것이 무척 기꺼웠다.
단순히 남해일이 명문 정파인 청성파의 제자이며 전도양양한 후기지수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진산월이 본 남해일은 성격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했고, 함부로 신의를 버리거나 남을 속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인물 됨이 준수하고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하니 교우 관계가 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남해일이라면 남과 사귀는 것이 서투른 전흠의 좋은 안내자가 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기대대로 남해일과 알게 되면서 전흠은 자연스레 남해일과 절친한 몇몇 고수들과도 안면을 익히게 되었고, 다양한 사람들과 사귀면서 조금씩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어두운 그림자를 지워내기 시작했다.
진산월은 전흠이 악산대전에 참가하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났던 마음의 짐을 거두고 표정이 한층 풍부해진 것을 이번 여정의 가장 큰 소득이라고 생각했다.
전흠의 나이는 아직 젊었고, 무공은 비슷한 연령층에서는 거의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전흠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 때문에 고뇌와 번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일만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그것은 전흠 본인을 위해서도 그리고 종남파를 위해서도 절대로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여정에 전흠을 대동한 것은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성큼성큼 걷던 전흠이 문득 고개를 돌려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장문 사형,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전흠은 종남산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아무리 봐도 지금 진산월과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은 방향이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진산월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낙양.”
전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낙양은 형수로 오기 전에 들렀지 않은가? 거기를 왜 다시 거슬러 가는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흠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계속 쳐다보았으나, 진산월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흠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리면서도 마음속에는 짙은 의문이 떠올랐다.
입을 굳게 다문 진산월의 얼굴에 평상시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비장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진산월의 그런 표정을 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무당산에서 벌어진 형산파와의 악산대전 당시 진산월은 절영검 비성흔과의 혈전 끝에 힘겨운 승리를 거둔 임영옥을 부축해 데리고 왔다. 그리고 고진과의 마지막 결투를 위해 다시 격전장으로 돌아갔다.
그때 진산월의 얼굴에는 감히 쳐다보기도 힘든 결연한 빛이 감돌았다. 전흠은 물론이고 종남파의 제자들 중 누구도 진산월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했다.
지금 진산월의 얼굴에는 그때와 비슷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당시 진산월은 연인인 임영옥의 희생으로 형산파와 마지막 승부를 가를 기회를 얻게 되었다.
목숨이 위험한 상태를 넘어 기식조차 엄엄한 그녀를 뒤에 두고 이십 년에 걸친 문파의 치욕을 씻기 위해 홀로 앞으로 나서야 했던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전흠은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체 진산월로 하여금 그런 표정을 짓게 할 일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낙양에는 어떤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의문을 해결할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래서 전흠은 더욱 힘찬 걸음으로 낙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군림천하 (908)
그 시체를 발견한 것은 해가 조금씩 서산으로 기울어 가고 있는 늦은 오후 무렵이었다.
처음 전흠은 그것이 시신인 줄 모르고 무심히 지나가려 했다. 어서 빨리 낙양으로 갈 욕심에 미처 주위 상황을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진산월의 음성에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저쪽에 시신이 있구나.”
전흠은 진산월이 가리킨 곳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과연 길옆, 숲이 막 시작되는 지점의 나무 아래에 한 구의 시신이 누워 있었다. 앞으로는 수풀이 제법 길게 자랐고 뒤편은 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진산월이 알려 주지 않았다면 못 보고 그냥 지나쳤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시신은 하늘색 유삼을 입은 젊은이였다. 이목구비가 제법 수려하고 피부도 깨끗한 것으로 보아, 이렇게 이름 모를 숲속에서 시체로 나뒹굴고 있을 사람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시신은 언뜻 보기에 아무런 상처도 없이 외관이 깨끗했기에 처음에 전흠은 독살을 당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나 좀 더 가까이에서 살펴본 다음에야 시신의 가슴팍 부근 옷자락이 살짝 베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 치가 겨우 될까 말까 한 그 흔적은 혈흔(血痕)도 거의 없어서 한 사람을 죽인 상처라고 보기에는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하나 전흠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 흔적이 예리한 검기에 의한 것임을 알아보았다.
시신의 윗옷 자락을 조심스레 열어 보니 과연 왼쪽 가슴에 실처럼 가느다란 혈선(血線)이 그어져 있었다.
혈선은 시신의 심장 바로 위를 정확히 가르고 지나갔다. 혈선의 길이는 한 치에 불과했고, 실처럼 희미해서 제대로 보지 않았다면 도저히 한 사람의 목숨을 끊어 놓은 치명적인 사인(死因)이라고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전흠은 그 혈선을 손가락으로 만져 보았으나 핏기가 조금도 묻어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가느다란 검기도 있단 말인가? 대체 무슨 무공의 흔적일까?”
그때 그의 뒤에서 진산월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건 마도 제일의 살인 수법인 탈혼검에 당한 것이다.”
전흠은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탈혼검이라면…….”
시신의 가슴에 나 있는 혈선을 응시하는 진산월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탈혼검에는 모두 세 가지 초식이 있는데, 그중 두 번째인 교탈혼(巧奪魂)은 전문적으로 상대의 심장을 노리는 수법이다. 그래서 교탈혼에 당하면 이런 흔적이 나게 되는 것이다.”
전흠은 시신의 상처에 난 흔적이 전설적인 무공인 탈혼검에 의한 것이라는 말에 그저 놀랍고 신기한 표정이었으나, 진산월의 마음은 겉으로 드러난 표정과는 달리 몹시 복잡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교탈혼은 과거 쾌의당의 살수인 풍도가 사용한 수법으로, 진산월도 하마터면 미처 피하지 못하고 당할 뻔했던 정말 무시무시한 초식이었다. 그때 진산월은 풍도와 쾌검의 승부를 보았는데, 치밀한 심기 싸움까지 벌이고서야 간신히 풍도를 물리칠 수 있었다.
자신도 자칫했으면 시신의 꼴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팍이 풀어 헤쳐진 채 풀숲에 누워 있는 시신의 모습이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풍도는 신비로 점철된 쾌의당주의 셋째 제자였고, 탈혼검은 쾌의당주만이 익히고 있는 무공이었다. 그렇다면 눈앞의 시신을 쓰러뜨린 교탈혼의 주인은 쾌의당주이거나 그의 또 다른 제자 중 하나일 것이다.
쾌의당주와 그의 제자들만이 익히고 있는 탈혼검에 당해 쓰러진 시신의 정체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그를 쓰러뜨린 흉수는 쾌의당주 본인일까, 그의 제자일까?
흉수가 강호의 전설적인 수법인 탈혼검까지 써 가며 이 젊은이를 제거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자신이 가는 길옆에 시신이 놓여 있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수많은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머릿속을 휘감고 돌아다녔다.
그때 시신의 정체를 알기 위해 이리저리 품속을 뒤지던 전흠이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짤막한 경호성을 발했다.
“엇?”
그의 손에 쥐어진 물건을 본 진산월의 표정이 무겁게 굳어졌다.
전흠이 시신의 품속에서 찾아낸 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목검(木劍)이었다. 거무스름한 빛을 띤 그 목검의 하단에는 백발노인의 좌상이 새겨져 있고, 손잡이에 ‘사(四)’라고 조그맣게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건 신목령이 아닙니까?”
전흠의 놀란 음성에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게도 시신은 신목령의 사호사자였던 것이다.
강호에 알려진 신목사호(神木四號)의 이름은 절검수사(絶劍秀士) 천세기(千世琦)였다.
신목령의 명성은 최근에 와서 연이은 사자들의 실종과 사망으로 인해 예전에 비해 조금은 퇴색된 감이 있으나, 그들이 마도의 제일 세력이라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 신목령의 핵심 인물인 신목사호가 탈혼검에 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진산월은 몇 번이나 신목령과 쾌의당의 고수들이 연수(聯手)하거나 행동을 같이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기에 지금의 상황이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방침을 바꾼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신목령일까, 쾌의당일까?’
이번 일이 우연한 충돌일 가능성은 처음부터 배제했다. 신목령에서도 몇 명 남지 않은 사자가 쾌의당에서도 당주와 제자들만이 익히고 있는 무공에 당해 차가운 시신이 되었다는 것은 절대 우연하게 벌어질 만한 일이 아니었다.
신목령과 쾌의당 중 한 곳에서 의도적인 사건을 벌인 게 분명했다.
그 가능성은 쾌의당이 훨씬 더 크지만, 신목령에서 먼저 도발했고 쾌의당은 그저 그에 반응만 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만약 쾌의당이 고의적으로 저지른 일이라면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이것은 혹시 이북해가 예측한 대로 쾌의당이 본격적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노선을 걷는다는 신호탄인 것은 아닐까?
신목령의 변화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쾌의당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뒤에 있었던 쾌의당주가 본격적으로 전면으로 나서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배후에는 지금까지 암중에서 무림을 좌지우지해 왔던 조익현이 있을 것이다.
진산월은 왠지 가까운 장래에 그들을 만나게 될 것 같은 기이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은 또 하나의 벽(壁)을 넘게 될 것이다.
만약 넘지 못한다면?
야율척과의 중추절 약속은 무의미한 일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군림천하를 이루라는 사부의 명도 지킬 수 없게 되겠지.
진산월은 더 이상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쾌의당주든 조익현이든 지금의 그에게는 단지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다.
군림천하를 향한 여정 중에 거쳐야 할 과정!
그 기나긴 여정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진산월도 알 수 없었다. 하나 그 여정의 끝이 그리 머지않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두 번째 시신을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이 흐른 후였다.
그들이 걷고 있는 관도는 제법 넓어서 평상시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나, 지금은 거의 인적이 끊겨 사람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해는 이미 서산으로 완전히 기울어 주위에 땅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고, 그토록 더웠던 날씨도 서쪽 하늘 한편에서 바람이 불어오면서 제법 선선함을 느끼게 했다.
저 앞에 보이는 조금 커다란 고개만 넘으면 작은 마을이 멀지 않았기에 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는데, 또 다른 시신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번에는 전흠도 놓치지 않고 시신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두 번째 시신은 체구가 건장한 중년인이었다.
전흠은 먼저 중년인의 가슴부터 살폈다. 하나 가슴에는 아무런 상처도 나 있지 않았다.
전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중년인의 몸을 뒤적거리려 할 때, 진산월의 음성이 들려왔다.
“인후혈이다.”
전흠이 그 말에 자세히 보니 과연 중년인의 인후혈에 희미한 혈선이 그어져 있었다. 정말 작은 흔적이어서 얼핏 보기에는 목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주름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것도 탈혼검의 흔적입니까?”
“그렇다. 측탈혼(側奪魂)이라는 수법이지. 전문적으로 사람의 목젖만을 노린다고 하더군.”
전흠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형의 칼날이 자신의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든다고 생각하자 왠지 섬뜩한 생각이 들어 절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좀처럼 두려움을 모르는 성격이었으나, 두 번씩이나 보게 된 탈혼검의 흔적은 그런 그에게도 공포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전흠은 시신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시신의 품을 뒤지려 했다. 하나 진산월이 그를 제지했다.
“그럴 필요 없다.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누굽니까?”
“천봉궁의 팔대신장 중 한 사람이다. 갈휘라고 했던가?”
진산월이 잠시 기억을 더듬으며 말하자 전흠이 몸을 움찔거렸다.
“천봉궁의 고수라고요?”
전흠은 시신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예전 노군묘 앞에서 보았던 인물 같군요. 그때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지 않아서 몰라봤습니다.”
갈휘는 형인 추혼무상 갈혁과 함께 팔대신장에서도 핵심적인 인물로, 특히 총관인 차복승의 신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예전 노군묘에서 단봉공주 일행과 만났을 때 종남파의 고수들을 상대로 주로 이야기를 했던 사람이 옥봉 누산산과 갈혁이었기에 전흠은 미처 갈휘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신목령의 고수에 이어 이번에는 천봉궁의 인물마저 탈혼검에 당한 시신으로 발견되자 진산월도 더 이상 이번 일을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시신이 진산월이 움직이는 행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이건 마치 누군가가 진산월을 향해 다가오는 고수들을 막고 있는 형국이지 않은가?
천봉궁뿐 아니라 신목령의 고수들이 자신의 주변에 어른거린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들을 쓰러뜨린 누군가가 탈혼검의 고수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꺼림칙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