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12화
군림천하 (912)
백발노인은 여전히 막강한 기운을 뿜어내면서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오랜만에 보았음에도 조카의 설검(劍)은 여전히 날카롭구나. 하지만 말버릇 나쁜 건 조카도 예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는걸!”
백발노인의 웃음소리는 굉량(宏量)하기 그지없어 주위 일대가 온통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한낱 웃음소리에 이 정도 기운을 담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백발노인이 얼마나 심후한 공력의 소유자인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청삼 중년인은 냉정한 눈으로 그런 백발노인을 보고 있다가 눈빛만큼이나 차갑고 무심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내게 웃어른으로 대우받고 싶은 줄 몰랐군. 우리 사이는 그날 이후로 철저한 남이 된 것이 아니었던가?”
“피로 이어진 인연을 몇 마디 말로 끊을 수는 없지. 나도 나이를 먹다 보니 요새 들어서는 핏줄이 더욱 그리워지더군.”
“피로 이어진 인연이라…………. 확실히 그날 아버님이 많은 피를 흘리기는 하셨지. 당신 눈에는 그런 것도 인연으로 보이는가 보구려.”
청삼 중년인이 냉소를 날리자 백발노인의 표정이 처음으로 살짝 굳어졌다.
백발노인은 한동안 말없이 청삼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가뜩이나 신광이 이글거리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 지금은 아예 사람의 몸을 그대로 꿰뚫어 버릴 듯 섬뜩한 광망으로 번뜩이고 있어서 간이 약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몸이 굳어 버릴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그럼에도 청삼 중년인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고, 꼿꼿한 자세에도 한 점의 흐트러짐이 보이지 않았다.
백발노인은 한참이나 청삼 중년인을 예의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고 있다가 문득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먹이를 앞에 둔 맹수의 그것처럼 살벌한 웃음이었다.
“흐흐. 역시 말 몇 마디로 해결될 일은 아니로군. 네가 핏줄을 부정하니 나도 더 이상은 너를 조카로 대우하지 않겠다.”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한층 강력해져서 주위를 질식시킬 듯한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
청삼 중년인의 입가에도 어느새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백발노인의 웃음과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차갑고 서늘한 미소였다.
“진작부터 그렇게 했어야 할 일이지. 늦게라도 제정신을 차린 걸 축하해 주겠소.’
“못된 말버릇만 더욱 나빠졌구나. 강호의 선배로서 너에게 강호의 도리를 일깨워 주마.”
“자기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친족(親族)의 피라도 기꺼이 묻혀야 한다는 도리 말이오?”
청삼 중년인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백발노인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듯한 광망이 피어올랐다.
“어른을 몰라보고 함부로 날뛰는 망나니는 오직 매로 다스려야 한다는 도리 말이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발노인의 신형은 무서운 속도로 청삼 중년인을 향해 날아갔다. 그 기세가 어찌나 강력하던지 흡사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쳐 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고오오!
주위의 공기가 마구 요동을 치며 세찬 먼지바람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일어났다.
하나 그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서 있는 청삼 중년인의 얼굴은 평화로울 정도로 담담하기만 했다.
소용돌이의 기세가 더욱 거세어지며 마치 거대한 회오리바람에 그의 전신이 갈가리 찢겨 버릴 듯한 순간, 청삼 중년인은 오른 주먹을 빠르게 내뻗어 회오리의 한가운데로 집어넣었다가 뺐다.
펑!
공기가 가득 들어찬 풍선이 터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그토록 거세게 몰아치던 회오리바람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백발노인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드러났다.
백발노인은 휘청거리며 두 걸음 물러서더니 왼손으로 오른쪽 팔목 부위를 몇 번 어루만지다가 이내 소맷자락을 떨쳐 냈다.
파아아……………
노인의 오른쪽 소맷자락이 먼지로 화해 부스러지며 팔뚝까지 맨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팔목 부위에는 거무스름한 멍이 들어 있었는데, 백발노인의 왼손이 그 부위를 주무를 때마다 눈에 띄게 멍이 사라져 갔다.
“이건 무슨 무공인데 단일 권에 내 태풍수(風袖)를 무너뜨린 것이냐?”
백발노인이 거친 음성으로 묻자, 청삼 중년인은 처음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일성권(城)이라는 것이오.”
“일성권? 주먹 하나에 성 하나를 무너뜨릴 만한 힘이 담겨 있다고 알려진 그 일성권 말이냐?”
“그렇소.”
백발노인은 무서운 눈으로 청삼 중년인을 쏘아보더니 돌연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크하하! 과연 경천신수의 구대절학은 하나하나가 강호 무림을 놀라게 할 만하다고 하더니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이런 무공을 지니고 있으니 핏줄을 무시하고 백부(父)인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이겠지.”
“쓸데없는 격장지계는 쓰지 마시오. 그 때문이 아니라는 건 당신이 더 잘 알 거요.”
“흐흐. 어찌 되었건 조카인 네가 백부인 나를 향해 살수를 쓴 건 사실이 아니냐? 나는 가문의 어른으로서 너를 훈계하려 했는데, 너는 그런 어른을 못마땅하게 여겨 오히려 나를 제거하려 했으니 이는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백발노인이 어처구니없는 논리로 계속 청삼 중년인을 윽박지르자 한쪽에서 듣고 있던 하늘색 유삼 청년이 어이가 없는지 얼굴이 붉어져서 무어라고 소리치려 했다.
하나 청삼 중년인은 한쪽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고는 여전히 냉정을 잃지 않는 눈으로 백발노인을 바라보았다.
“자꾸 이상한 명분을 고집하는 것을 보니 나를 상대할 나름의 계책을 세워 온 모양이구려.”
“너는 가문의 법도를 어기고 웃어른에게 살수를 썼으니 강호인이라면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른 것이다. 이런 너를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강호의 도리를 올바로 세우는 첩경이 될 것이다.”
“나를 제거하는 게 강호의 도리란 말이오?”
백발노인은 오연한 자세로 그를 쳐다보며 자신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를 쓰러뜨릴 자신은 있소?”
청삼 중년인의 물음에도 백발노인은 여전히 패기가 가득 찬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스스로의 무공에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강호의 일이란 게 혼자의 힘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강호의 도리를 세우는 일 또한 굳이 혼자 할 필요는 없지.”
무언가 말을 내뱉으려던 청삼 중년인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는 묘한 눈으로 백발노인을 응시하더니 이내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이제 알겠군. 지난 세월 동안 나를 만나기를 그토록 피해 왔던 당신이 왜 제 발로 내 앞에 나타났는지 의아했는데, 믿는 구석이 따로 있었구려.”
백발노인은 여전히 당당한 자세로 큰소리를 쳤다.
“나는 나 자신을 믿을 뿐이다.”
“동방광일(東日). 남들은 당신을 패존(覇尊)이라 부르며 떠받들지 몰라도, 내 눈에 당신은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까 두려워 형제를 배반하고, 조카가 무서워서 쥐새끼처럼 꽁꽁 숨어 있던 겁쟁이일 뿐이오.”
백발노인의 짙은 눈썹이 세차게 꿈틀거렸으나, 이번에 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청삼 중년인도 더 이상은 백발노인을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한차례 주위를 둘러본 다음, 우측의 짙은 어둠 속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무엇이 두려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요?”
청삼 중년인의 침착하면서도 낭랑한 울림이 담긴 음성이 주위로 퍼져 나갔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더니 이윽고 하나의 인영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짙은 어둠만큼이나 검은 옷을 입고 키가 상당히 큰 중년인이었다. 날렵한 몸매에 자세가 곧았고, 걸음걸이가 무척이나 경쾌해서 언뜻 보기에도 무척이나 뛰어난 신법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흑의 중년인의 등 뒤에는 손바닥 길이의 날이 삐져나와 있었는데, 청삼 중년인은 한눈에 그것이 날카로운 창날임을 알아보았다.
흑의 중년인은 표홀하기 그지없는 동작으로 청삼 중년인의 삼장 앞으로 다가와 걸음을 멈추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흑의 중년인이 희미하게 웃으며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신가?”
가면을 쓴 듯 무심한 얼굴에 떠올라 있는 웃음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그마저도 이내 사라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청삼 중년인은 흑의 중년인의 무섭도록 냉정한 두 눈을 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도 강호의 도리를 세우기 위해 나를 찾아온 거요?”
흑의 중년인의 대답은 눈빛만큼이나 서늘했다.
“도리? 강호에 그런 게 남아 있었던가?”
백발노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으나 이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청삼 중년인은 다시 물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온 거요?”
“가져가고 싶은 게 있어서.”
“그게 뭐요?”
흑의 중년인의 얼굴에 예의 비정하리만치 차가운 미소가 다시 떠올랐다.
“당신 목 위에 올려져 있는 것.”
청삼 중년인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되물었다.
“떼어 갈 자신은 있소?”
“나 혼자라면 조금 벅차지. 다행히 이쪽은 혼자가 아니라서 말이야.”
청삼 중년인은 가만히 그를 쳐다보다 백발노인을 힐끔 돌아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들 두 사람이라면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는걸.”
흑의 중년인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누가 우리 둘뿐이라고 했나?”
청삼 중년인은 흠칫하다가 이내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왼쪽의 어둠 속에서 다시 한 사람이 미적거리며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갈의를 입은 평범한 인상의 장한이었다. 그 장한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투덜거렸다.
“제길. 가급적이면 조용히 숨어서 지켜보려고만 했는데, 봉 형 때문에 다 틀려 버렸군. 왜 나까지 끄집어들이려는 거요?”
흑의 중년인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짤막하게 말했다.
“놀고 있는 꼴은 보기 싫어서.”
갈의 장한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정말 그것뿐이오?”
“일을 좀 더 확실히 하고 싶어서 말이지.”
흑의 중년인의 말에 비로소 갈의 장한의 얼굴에도 한 줄기 진지한 빛이 떠올랐다.
“봉 형과 동방 가주, 두 사람만으로는 장담할 수 없단 말이군. 확실히 경천신수 동방욱이라면 그럴지도 모르지.”
갈의 장한은 이내 청삼 중년인을 향해 포권을 해 보였다.
“반갑소, 말로만 듣던 경천신수를 마침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구려. 나는 고준이란 사람이오.”
청삼 중년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독선 고준?”
갈의 장한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나같이 서장의 외진 구석에 처박혀 사는 사람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구려. 내가 바로 만독곡의 곡주인 고준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