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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17화


제373장 형세미궁(形勢迷宮) (1)

군림천하 (917)

한시몽은 격하게 두근거리는 마음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었다.

몇 시진 전만 해도 설마 이런 일이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경천신수 동방욱이 누구인가?

무림에서 활동한 시간이 많지 않아서 무림구봉에 속하지는 못했지만, 그 실력만큼은 구봉 못지않다는 걸 누구나가 인정하는 최고의 고수가 아닌가? 심지어 무림구봉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마도제일인 신목령주조차 감탄해 마지않는 구대절학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한시몽은 신목령의 오천왕 중에서 낙화수사 조옥린을 가장 존경하지만, 그런 조옥린도 진실한 무공 실력으로는 결코 동방욱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조옥린은 예전에 종남산에서 서장 무림의 고수인 철사자 등곽의 괴혈장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후 아직 본신의 실력을 모두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 신수무정 제갈외 덕분에 목숨이 위태로운 최악의 상태는 넘겼지만, 그의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설사 완쾌된다고 해도 전성기에 보여 주었던 경지에는 더 이상 미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신목령의 십이사자 중 신목령주에게 직접 무공을 사사한 자는 백자목이 유일했고, 그 외의 다른 인물들은 대부분 오천왕에게 고루 가르침을 받았다.

동방욱이 동방촌에 칩거한 채 강호에 좀처럼 나오지 않았기에 십이사자가 동방욱에게 배움을 청하기 위해서는 중원의 구석에 있는 동방촌까지 찾아와야만 했다. 하나 동방촌이 워낙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동방욱 또한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는 적지 않게 까다로운 사람이었기에 막상 십이사자 중 그에게 제대로 무공을 배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열성적으로 동방촌을 찾은 사람이 신목십이호 한시몽이었다.

한시몽은 신목령의 사자들 중 제일 막내였으나, 무공에 대한 재능만큼은 첫째인 백자목과 비견할 정도로 최고의 인재로 손꼽히고 있었다.

동방욱은 나이가 어리면서도 무공에 대한 뛰어난 재질과 뜨거운 열정을 지니고 있는 한시몽을 귀엽게 여겨 그에게 자신의 진전을 알려 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동방욱의 구대절학 중 네 가지 이상을 배운 사람은 열두 명의 사자들 중에서 한시몽이 유일할 정도로 동방욱의 한시몽에 대한 기대와 관심은 각별한 것이었다.

한시몽이 가장 최근에 동방욱에게 배우고 있는 것은 철비파수(鐵琵琶)라는 무공으로, 비파를 연주하는 듯한 가벼운 동작 안에 상대의 뼈를 으스러뜨리는 가공할 위력이 숨겨져 있는 상승 절학이었다. 자신의 무공 중에서도 동방욱 스스로가 세 손가락 안에 꼽는 최고의 수공이어서, 아직 한시몽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늦은 오후, 동방욱에게 한 장의 밀서(書)가 날아든 순간에도 한시몽은 철비파수를 가다듬는 데 심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누가 보냈는지 모를 그 밀서를 읽어 본 동방욱은 한참이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더니 동방촌의 촌장을 불러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동방욱이 한시몽에게 오늘 저녁의 공기가 심상치 않다며 주의를 당부할 때만 해도 한시몽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자기 혼자뿐이면 몰라도 천하의 동방욱이 함께 있는데 무슨 큰일이 일어나겠는가 싶었던 것이다.

하나 야심한 시각에 동방욱의 거처를 습격한 자들은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동방욱은 다른 집에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그들을 근처의 야산으로 유인했는데, 신법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한시몽으로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움직임은 표홀하고 재빠르기 그지없었다.

동방욱과 한시몽을 쫓아온 자들은 체구가 건장한 노인과 갈의를 입은 젊은 청년이었다. 한시몽으로서는 모두 처음 보는 인물들인 반면, 동방욱과 노인은 서로 아는 사이임이 분명해 보였다.

한시몽은 자연스레 갈의 청년과 싸움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자의 무공은 결코 한시몽의 아래가 아니었다. 특히 그의 기형검에서 발출되는 검기는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은 듯하면서도 예측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어서 한시몽은 싸우는 내내 단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결국 갈의 청년과는 승부를 가르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지만, 한시몽의 뇌리에는 오늘의 일이 순탄하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쳐 갔다.

뒤이어 다시 두 명의 괴인들이 나타났다.

그때야 비로소 한시몽은 그들이 쾌의당의 고수들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정체가 말로만 듣던 쾌의당의 사방신임을 알고 난 한시몽의 마음속에서는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희미한 불안감이 점차 현실로 구현되어 분명해지는 것만 같았다.

사방신 중 세 사람이 동방욱을 합공하려 했을 때, 한시몽은 순간적으로 그들 싸움에 끼어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하나 그렇게 잠깐 머뭇거린 찰나의 순간부터 그의 눈앞에서 급작스럽게 펼쳐진 상황은 그로서는 끼어들 엄두도 낼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다.

동방욱은 현오하기 그지없는 무공으로 사방신 두 사람을 단숨에 격퇴시켰으나, 마지막 하나의 고비를 넘지 못하고 말았다.

동방욱이 서 있는 일대가 모두 독지로 변해 버리는 장면은 놀라움을 넘어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한시몽은 그런 독술이 있다고는 한순간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한시몽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사실 독지계는 놀라운 독술이긴 하지만 몇 가지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시전하는 데 상당한 제약이 뒤따를 뿐 아니라, 완벽히 펼쳐진 후에는 시전자조차 마음대로 조정하지 못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요소를 지닌 수법이었다.

한시몽이 조금만 더 냉정하고 강호의 경험이 풍부했다면 그러한 독지계의 단점을 알아차렸을 것이고, 그 허점을 이용할 방법을 모색하려 했을 것이다.

하나 한시몽은 그러지 못했고, 그의 눈에 비친 독지계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절대적인 수단으로만 여겨졌다. 그래서 한시몽은 암담한 절망감에 빠져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한시몽은 어려서부터 무공의 천재로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신목령에 들어온 후에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강호의 후기지수로서 늘 남들의 칭송과 찬사 속에 살아왔다. 그런 한시몽에게 자신이 하늘같이 믿고 의지하던 동방욱이 독지에 갇혀 꼼짝도 못 하는 신세가 되어 있는 지금의 상황은 너무도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찌해야 하는가?’

한시몽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동방욱을 구하러 독지로 뛰어들 수도 없고, 그를 내버려 두고 혼자 몸을 피할 수도 없었다. 독지를 펼친 고준에게 덤벼들고 싶어도 그의 독공을 당해 낼 자신 또한 없었다.

한시몽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동방욱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휘익!

한차례 차가운 바람이 일렁이며 누군가가 그에게로 빠르게 날아들었다.

한시몽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보니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동방광일이 무서운 속도로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동방광일의 두 눈에 이글거리듯 피어올라 있는 살기가 따가울 정도로 느껴지고 그의 눈빛이 시야에 가득 들어온 순간, 한시몽은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쾅!

한시몽은 내뻗었던 오른손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에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으나, 뒤로 물러서지 않고 반탄력을 이용하여 옆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왼손을 번개같이 휘둘렀다.

동방광일은 한시몽이 자신의 일장을 정면으로 받고도 오히려 반격해 오자 눈을 부릅뜨고 사나운 일갈을 토해 냈다.

“하룻강아지 같은 놈이 감히 누구 앞에서 잔재주를 부리려는 게냐!”

그의 양손이 질풍처럼 흔들리며 거센 경기를 일으켜 냈다.

파파파팡!

수십 개의 수영(手影)이 구름처럼 일어나 한시몽의 전신을 뒤덮어 갔다.

한시몽은 사력을 다해 동방광일의 공세에 맞섰으나 누가 보기에도 거센 바람 앞에 언제 꺼질지 모르는 촛불처럼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한시몽의 무공이 비록 젊은 층에서는 손가락에 꼽힐 만큼 탁월하다고 해도 오랫동안 운남성의 패자로 군림해 왔던 동방광일에 비할 수는 없었다.

동방광일은 너무도 수월하게 한시몽의 방어를 뚫고 지척까지 접근하여 거침없이 그의 목덜미를 향해 손을 내뻗고 있었다.

한시몽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느낀 것처럼 오른손을 두서없이 마구 흔들어 댔다. 뚜렷한 투로도 없고 제대로 공력도 담겨 있지 않은 듯한 미약한 손짓은 태풍에 휩쓸린 나방의 마지막 발버둥처럼 부질없어 보였다.

그러나 쇠로 만들어진 갈고리처럼 단단한 손가락으로 막 한시몽의 목을 움켜잡으려던 동방광일이 갑자기 다급한 표정으로 훌쩍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한시몽의 아무렇게나 흔들리는 듯하던 오른손이 동방광일의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파아아…………….

동방광일의 옆구리 부분 옷자락이 먼지처럼 부스러졌다. 그와 함께 훤하게 드러난 그의 옆구리에는 시퍼런 손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동방광일은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에 이를 악물며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나마 마지막 순간에 한시몽의 손짓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담겨 있음을 알아차리고 몸을 피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대로 몸통을 가격당해 치명적인 상태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시몽이 최근 들어 심혈을 기울여 연마하고 있는 동방욱의 절학, 철비파수임은 동방광일도 알지 못했다. 하나 자기가 방심한 탓에 하마터면 이제 겨우 약관을 벗어난 한시몽의 손에 커다란 낭패를 당할 뻔했다는 것만큼은 누구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살심이 솟구친 동방광일이 성난 노호성을 터뜨리며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이 찢어 죽일 놈!”

그의 오른손이 커다란 원을 그려 댔다.

고오오오!

괴이한 음향과 함께 거대한 기운이 요동치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분노를 참지 못한 동방광일이 자신의 최고 절학인 사방건원장(四方乾元掌)을 펼친 것이다. 사방건원장은 달리 절명수(絶命)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살인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어서, 정파를 표방하는 명문세가의 무공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었다. 그래서 동방광일도 아주 위급한 상황이나 남들의 시선이 없는 곳이 아니면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비전의 절학이었다.

그런 무서운 무공을 자신의 손자뻘밖에 되지 않는 한시몽을 향해 거침없이 펼친 것만 보아도 그가 지금 얼마나 분노에 가득 차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한시몽은 회심의 한 수로 생각했던 철비파수로 동방광일에게 부상을 입히기는 했으나, 오히려 그의 가공할 공세를 맞닥뜨리게 되자 한순간 암담한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그로서는 사방에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휘몰아쳐 오는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한시몽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는 순간, 갑자기 그의 귓전으로 한 구절 시구를 읊는 듯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좌분광(分光), 우월강(右月罡), 선호반전(仙狐反轉)!”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한시몽의 몸은 무의식적으로 그 음성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성의 말대로 왼손으로는 분광착영수를 펼치고, 오른손은 월강수를 뿌려 댔으며, 몸을 뒤집으며 선호보(仙狐)의 구결을 밟아 나간 것이다.

금시라도 한시몽의 전신을 압축해 버릴 듯 가공할 기세로 몰아쳐 오던 동방광일의 거침없는 공세에 작은 구멍이 뚫렸다. 허공을 비상하는 한 마리 여우처럼 허리를 뒤로 한껏 젖힌 한시몽의 눈에 검은빛으로 물든 밤하늘이 가득 들어왔다.

그 어두운 암천의 한편에서 하나의 신형이 유성과 같은 기세로 허공을 가로질러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광경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아서 한시몽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신형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독지에 갇힌 채 꼼짝도 못 하고 있던 동방욱임을 깨닫고 한시몽이 눈을 부릅뜬 순간, 그의 몸에 엄청난 격통이 다가왔다.

콰르릉!

“크윽!”

“으음!”

거센 굉음과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경기의 파편 속에서 몇 가닥의 짧은 신음과 비명이 거푸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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