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18화
군림천하 (918)
사방을 뒤덮을 듯 자욱하게 피어올랐던 연기가 차츰 가시며 드러난 장내의 광경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한시몽은 십여 장 밖의 풀숲 앞에 쓰러져 있었는데, 이미 숨이 끊어졌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동방광일의 상황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몸을 휘청거리며 거의 다섯 걸음이나 물러나 있었는데, 그와 같은 수준의 고수가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 전의 격돌에서 그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었다.
“우웩!”
결국 동방광일은 시커먼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 내더니 그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운남성 제일의 패자로 오랫동안 군림해 온 그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낭패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한시몽과 동방광일이 격돌했던 자리에는 뜻밖에도 동방욱이 우뚝 서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동방욱은 두 다리의 혈을 봉쇄하여 독이 심맥을 타고 흐르는 것을 간신히 막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몸으로는 신법을 펼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원래의 자리에서 십장이나 떨어진 이곳까지 허공을 격하고 단숨에 날아든 것이다.
철탑처럼 오연히 버티고 선 그의 왼손에는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찢어진 소맷자락 사이로 손목까지 푸르게 물들인 기운이 조금씩 팔뚝을 타고 오르는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럼에도 동방욱은 왼팔을 타고 올라오는 독기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신의 아랫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의 창이 그의 배를 뚫고 등 뒤로 삐져나와 있었다.
동방욱은 자신의 배를 관통한 그 창을 무심한 시선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쳐들어 창의 주인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일장에 가까운 창대를 굳게 잡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봉구령이었다.
봉구령은 창을 앞으로 내민 자세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그의 얼굴 전체에 가느다란 경련이 쉼 없이 계속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봉구령은 항상 냉정하고 표정이 거의 없는 인물이었으나, 지금은 누가 보기에도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눈빛이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동방욱은 물끄러미 봉구령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거의 알아차릴 수도 없을 만큼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 무서운 창법이군. 이 초식의 이름은 뭐요?”
봉구령은 여전히 창을 앞으로 내뻗은 모습으로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문득 석상처럼 굳게 다물어져 있던 그의 입술이 살짝 열리며 탁하고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섬(無閃).”
동방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번쩍임이 없다……라. 확실히 여타의 초식과 달리 그리 빠르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소. 그런데도 아주 시기적절하게 공간을 파고들어 내 허점을 찔러 오더군.”
“…….”
“정면으로 대결해도 나로서는 완벽히 막는다고 자신할 수 없었을 거요. 이런 초식을 한낱 암습으로 사용하기에는 아깝지 않소?”
봉구령은 다시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동방욱의 팔을 타고 오르던 푸르스름한 기운이 얼굴 부근까지 번져서 곳곳에 검게 변색된 부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동방욱은 여전히 담담한 눈으로 봉구령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 시선을 마주한 봉구령의 눈빛이 격한 흔들림을 보일 정도였다.
“당하면서도 정말 아쉬웠소. 제대로 된 상황에서 이 초식을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말이오.”
“…….”
“이제 그럴 기회조차 사라졌다는 것이・・・・・・ 안타깝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방욱의 고개가 푹 꺾이고 몸이 축 늘어져 버렸다. 여전히 창에 몸이 꿰여 있기에 바닥에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창대에 몸이 꿰인 채 힘없이 늘어진 그의 모습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봉구령은 창대를 잡아 뽑았다.
파앗!
검붉은 핏물이 튀어나오며 동방욱의 신형이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은 붉기보다는 검은색에 더 가까웠는데, 은은한 악취까지 배어 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맹독의 기운이 담겨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차가운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 동방욱의 몸은 이내 시커먼 핏물에 잠겨 들어갔다. 무림구봉에 못지않다고 평가받던 절세고수의 최후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허무한 죽음이었다.
이상한 것은 봉구령이었다. 강적인 동방욱을 창으로 쓰러뜨렸음에도 그는 전혀 기뻐하거나 뿌듯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몸을 떨고 있다가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창대로 땅을 짚어 몸을 지탱하지 않았다면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을지도 몰랐다.
부스스・・・・・・
그의 가슴팍 부근 옷자락이 먼지로 화해 부서지며 잘 단련된 건장한 가슴이 송두리째 드러났다. 그 가슴의 중앙에 잎사귀 모양의 손도장 하나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장인(掌)의 크기는 어린아이의 손바닥만 했는데, 어찌나 생생한지 얼핏 보기에는 진짜 나뭇잎 하나가 가슴 위에 올려져 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봉구령의 코와 입으로 시뻘건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봉구령은 떨리는 손으로 장인 부근의 혈도 몇 개를 짚고는 다시 한차례 몸을 휘청거렸다. 그때 한 사람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릴 줄이야. 강호의 일이란 정말 예측하기 어렵구나.”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는 그 사람은 지금까지 한쪽에 멀찌감치 떨어져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고준이었다.
고준은 시커먼 핏물 속에 잠겨 있는 동방욱의 시신을 보고 있다가 몇 차례인가 혀를 차고는 다시 봉구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봉구령의 가슴에 나 있는 장인과 그의 핼쑥해진 얼굴을 본 고준이 눈을 크게 떴다.
“이런・・・・・・ 괜찮은 거요?”
봉구령은 가슴을 타고 치밀어 오르는 통증을 억누르며 날카로운 눈으로 고준을 쏘아보았다.
“동방욱은 독지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고준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그가 설마 자신의 한 손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독의 영역을 벗어날 줄은 몰랐소. 그리고 당신들 두 사람이 암습을 하고도 그와 양패구상(俱傷)을 할 줄은 더더욱 몰랐소.”
봉구령의 얼굴에 스산한 빛이 감돌았다.
“말을 함부로 하는군. 양패구상이라니, 동방욱의 저런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가?”
고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양패구상이라고 하는 거요. 동방욱의 몸이 중독되지 않고 정상이었다면 당신의 가슴에 손자국이 찍힌 게 아니라 그 모양 그대로 구멍이 뚫렸을 거요. 그랬다면 동귀어진(同歸於盡)이라고 해야겠지.”
봉구령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으나 더 이상 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고준의 말이 한 치의 과장됨도 없는 진실이라는 것을 그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방욱의 마지막 한 수는 정말로 무서웠다.
십여 장의 허공을 날아 장중(場中)으로 뛰어든 동방욱은 왼손과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상태였다. 독지에서 흘러나오는 독기를 막기 위해 두 다리의 혈도를 봉쇄한 동방욱은 한시몽이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는 왼손으로 땅을 후려치며 그 반탄력을 이용해 한시몽과 동방광일의 사이로 날아들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의 왼손은 독기에 물들어 버렸다.
두 다리와 한 팔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동방욱은 오른손만으로 동방광일을 날려 버렸고, 그 틈을 노린 봉구령은 치명적인 암습을 가했다. 봉구령이 펼친 무섬은 혈섬육창의 최고 초식으로, 봉구령은 아직 단 한 번도 이 초식을 펼쳐서 실패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동방욱이 이쪽으로 오리라는 것을 알고 미리 방위를 선점한 상태에서 적절한 시기에 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그 효과가 극에 달했다.
설사 동방욱이 정상적인 몸 상태였다 하더라도 승부를 예측하기 힘들 터였는데, 두 다리와 한 팔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런 완벽한 공격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봉구령의 창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동방욱의 아랫배를 뚫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동방광일을 날려버린 동방욱의 오른손이 너무도 유연하게 봉구령의 가슴을 향해 다가왔던 것이다.
그 손의 움직임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현묘한 것이어서 봉구령으로서는 그저 눈을 뻔히 뜨고 그 손이 자신의 가슴에 와닿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방욱의 손이 닿는 순간, 봉구령은 사력을 다해 전신의 내공을 끌어 올려 심맥을 보호하려 했다. 무언가 차가운 기운이 내공의 벽을 너무도 수월하게 뚫고 몸속으로 파고든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봉구령은 순간적으로 암담한 절망감을 느꼈으나, 그 한기는 이내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독기에 중독된 상태에서 무리를 한 동방욱의 진기가 바로 그때 바닥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동방욱에게 한 줌의 진기만 더 남아 있었어도 봉구령의 심장은 철저히 파괴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고준이 말한 대로 봉구령 또한 시커먼 핏물 속에 식어 가고 있는 동방욱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마지막 순간에 동방욱의 힘이 다하는 바람에, 봉구령은 심각한 내상을 입기는 했으나 심장을 무사히 보호할 수 있었고 무시무시한 동방욱의 손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평생 두려움을 모르고 험한 칼날 아래서 살아온 봉구령으로서도 아찔한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어찌 되었건 그들은 당초 목표였던 동방욱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들 세 명이 전력을 기울이고도 양패구상을 면치 못할 정도로 동방욱의 무공은 가공스러운 것이었으나, 결과는 변함이 없었다. 세 사람은 모두 살아남았고, 동방욱만 비명에 쓰러지고 말았다.
봉구령은 아직도 체내에서 들끓고 있는 진기를 다스리느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고는 이내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다시 한차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황급히 고준을 돌아보았다.
“신목십이호는 어디 있나?”
고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신목십이호라니? 누구를 말하는 거요?”
“동방 가주와 싸우던 꼬맹이 말일세.”
“그자라면…….”
고준은 한시몽이 나가떨어졌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풀숲 앞에 쓰러져 있던 한시몽의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어? 저쪽에 있었는데……………..”
봉구령은 다시 동방광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나 동방광일은 바닥에 앉은 채 운기요상에 정신이 없어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봉구령은 마지막으로 한시몽과 제일 처음 싸웠던 갈의 청년을 돌아보았다.
“둘째 공자, 한시몽을 보았소?”
갈의 청년도 고개를 흔들었다.
“그자가 쓰러진 뒤로는 동방욱에게만 신경을 쏟고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그리했을 것이다. 한시몽은 이미 피를 토하며 십여 장 밖에 쓰러져 있었으니, 모두의 시선이 온통 동방욱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봉구령 자신도 그러했기에 갈의 청년을 탓할 수는 없었다.
봉구령은 가슴이 쪼개지는 듯한 통증을 억누르며 한시몽이 누워 있던 공간으로 몸을 날렸다.
조금 전에 사람이 누워 있었던 듯한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고, 주위에는 핏자국 또한 선명했다. 하나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한시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봉구령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동방욱, 끝까지 약은 수를 썼구나!”
봉구령은 조금 전에 한시몽이 날아간 것이 충격을 받아서가 아니라 동방욱의 수작에 의한 것임을 그제야 깨닫고 분통을 터뜨렸으나 이미 때늦은 후회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