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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27화


군림천하 (927)

제377장 일적한수(-滴汗)

노해광은 원당의 정체를 알아챘을 때부터 마음속으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원당은 모습을 감춘 지 오래되어 중원에서는 그다지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으나, 장성 일대에서 상당한 기간 활동했던 노해광은 그에 대해 제법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원당은 흥안령 쪽에서 모습을 감춘 후 크게 살겁을 저지르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몇 차례인가 장성 부근의 토착 세력 고수들과 충돌을 일으켜 제법 큰 풍파를 일으켰다.

특히 몇 년 전에는 서장십육사의 일인인 단홍도(斷虹) 새립(立)과 그의 의형제들인 단홍사살(斷虹四)을 한꺼번에 격살하여 사람들을 경악게 했다. 그때 원당이 사용한 것은 오직 한 쌍의 손뿐이었는데, 피로 물든 듯 시뻘겋게 변한 그의 손이 어찌나 무서웠던지 새립과 그의 의형제들은 불과 십여 초 만에 전신의 심맥이 으스러진 채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고 했다. 노해광은 그때 원당이 사용한 무공이 아미파의 비전인 파옥수(破玉手)의 변형이 아닐까 추측했었다.

그렇게 원당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있던 노해광은 원당의 몸이 움직인다 싶은 순간, 훌쩍 몸을 날려 옆으로 피하려 했다. 한데 앉은 자세로 날아오던 원당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움직여 노해광을 바짝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연대구품(臺九品)?”

순간적으로 불문(佛門) 최고의 신법 중 하나를 떠올린 노해광이 경악성을 터뜨리며 앞으로 굴렀다. 다급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나온 반응이었다. 파아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노해광이 있던 공간을 세찬 경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노해광은 머리끝이 쭈뼛하는 느낌에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다시 몇 차례나 굴렀다.

서안의 막후 실력자에 강호를 위진시키고 있는 대종남파 장문인의 사숙이라는 신분을 생각하면 정말 볼품없고 체면을 구기는 모습이었으나, 삼 장여를 벗어나 몸을 벌떡 일으키는 노해광의 얼굴에는 부끄러운 표정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철면호가 아니라 철면서(鐵面鼠)로구나.”

냉랭한 조소와 함께 원당이 예의 미끄러지는 듯한 동작으로 허공을 가르며 다시 노해광을 향해 날아들었다. 여전히 앉은 자세임에도 어찌나 움직임이 유연한지 마치 비단 방석이라도 타고 나는 것처럼 보였다.

노해광은 이어룡의 신법으로 원당의 공세를 벗어나려 했으나, 빠르고 민첩한 이어룡으로도 원당을 떨쳐 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노해광은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자신을 집요하게 따라오는 원당을 향해 삼장(掌)을 연거푸 갈겼다. 종남파의 무공 중에서도 강맹하기로 유명한 대천장이었다.

원당은 피하지 않고 움직이는 여세를 몰아 그대로 노해광이 내뿜은 경력에 부딪쳤다.

퍼엉!

고막이 찢어질 듯한 굉음이 터지며 노해광의 신형이 훌훌 날아 문을 뚫고 밖으로 튕겨 나갔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대가 되지 못한 일방적인 결과였다.

하나 원당은 오히려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성난 음성을 토해 냈다.

“약은 짓을 부리는구나!”

노성이 장내를 뒤흔드는 찰나의 순간에 그의 몸은 어느새 노해광을 따라 대전 밖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장력이 부딪친 여파를 이용해 노해광이 밖으로 몸을 피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막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노해광을 발견한 원당의 신형이 한 줄기 유성처럼 그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노해광의 반응이 이상했다. 조금 전만 해도 다급하게 바닥을 구르며 낭패스러운 모습을 보였던 그가 무서운 기세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원당을 보았으면서도 놀라거나 두려워하기는커녕 바닥에서 일어나 태연하게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고 있었다.

노해광에게로 날아가던 원당의 신형이 갑자기 화살 맞은 기러기처럼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허공에서 한차례 휘청이던 원당은 이내 앉아 있던 자세를 풀고 바닥에 내려섰다. 노해광에게서 이 장쯤 떨어진 위치였다.

원당의 얼굴은 조금 전과 달리 진짜 금불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래, 과연 한 수를 숨기고 있었군.”

한마디 뱉어 낸 원당은 노해광이 아닌 그 옆의 어둠 속을 쏘아보았다.

막 노해광을 공격하려던 그가 갑자기 물러선 것은 어느 순간에 전신이 빙굴에 빠진 듯한 섬뜩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절정의 검객만이 발출할 수 있는 무형 검기임을 깨닫고 황급히 몸을 멈춘 것이다.

짙은 어둠 속에 언제부터인가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청삼을 입고 이목구비가 수려한 중년인이었다. 허리춤에 고색창연한 장검 한 자루를 차고 있었는데, 무심한 듯 한 손을 검의 손잡이에 올려놓았다.

원당은 검을 잡고 서 있는 자세만 보아도 그가 어느 수준의 검객인지 알 수 있었다. 자연스레 안광을 돋우어 그의 전신을 찬찬히 살폈다.

“종남의 문인인가?”

청삼 중년인은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성락중이라 하오.”

원당의 눈빛에 기광이 번뜩였다.

“성락중이라면 악산대전에서 형산파의 비응검을 꺾은 무영검군?”

“맞소.”

“비응검은 성격은 지랄 맞아도 검법 하나는 귀신같은 늙은이인데, 자신의 사질뻘 되는 자에게 패했다고 해서 의아했지. 그런데 실제로 보니 그럴 만했군.”

“과찬의 말씀이오.”

원당은 성락중의 기품 어린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나이로 보아 철면호와 사형제지간일 텐데, 두 사람의 분위기가 너무 다르군. 하나는 바닥 구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파락호요, 다른 하나는 명가의 품격이 물씬 느껴지는 정통 검객이라・・・・・・ 종남파의 구성은 정말 다채롭기 그지없구나.”

원당의 음성은 한편으로는 비아냥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얼마쯤 감탄하는 마음도 뒤섞인 것같이 오묘했다.

성락중은 담담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그게 본 파의 저력이라고 생각하오.”

“흐흐. 요즘 종남파의 위세를 보면 틀린 말은 아닐지 모르겠군. 앞뒤가 꽉 막힌 땡추중들만 가득했던 아미파에 비하면 종남파는 확실히 기존의 문파들과는 다른 구석이 있는 것 같네.”

“대사께선 아미파 각명선사(覺明禪師)를 사사(師事)했다고 들었소.”

성락중이 난데없이 자신의 스승을 입에 올리자 원당의 눈썹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살짝 찌푸려졌다.

“오래전 일인데, 용케도 알고 있군.”

“각명선사께서는 나의 사부님과 상당한 친분이 있어서 그분에 대한 소식을 가끔이나마 듣고 있소.”

그제야 원당은 성락중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깨달았다.

“그렇군. 자네가 바로 질풍검의 제자로군.”

“각명선사께서 몇 년 전에 돌아가신 걸 뒤늦게 아시고 사부님께서는 몹시도 슬퍼하셨소. 그리고 하나뿐인 제자가 파문당해 그분의 임종을 보지도 못하게 된 것도 무척이나 안타까워하셨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원당의 얼굴이 다시 예의 괴이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흐흐. 과거의 인연은 아미산을 떠나면서 훌훌 벗어던진 지 오래다. 그 땡중이 나에게 베풀었던 은(恩)도 이미 이 손도장 하나로 모두 갚았고,

원당은 반쯤 풀어 헤쳐진 승포 자락의 가슴 부근을 슬쩍 벌려 보였다.

그의 투실한 오른쪽 가슴 위에 작은 손도장이 흐릿하게 찍혀 있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손도장은 마치 어린아이의 손자국처럼 앙증맞았다. 하나 성락중은 한눈에 그 장인이 아미파의 비전 절학적인(葉印)의 흔적임을 알아보았다.

적엽인은 아미파의 신공 중 하나인 적하신공(赤霞神功)을 대성한 사람만이 시전할 수 있는 절정의 수공(功)으로, 일단 적중되면 금강동인이라도 으스러뜨리는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다.

아미파 최고의 무공은 강호에 널리 알려진 대정신공이지만, 적하신공은 그에 필적하는 뛰어난 내공 심법이었다. 그리고 아미파에서 적하신공에 가장 정통한 인물이 다름 아닌 각명선사였다.

적하신공을 최고의 경지로 익힌 자만이 펼칠 수 있다는 적엽인이 원당의 가슴에 찍혀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무심한 듯 가슴 위의 손자국을 슬쩍 어루만진 원당은 승포 자락을 다시 여미며 두 눈을 부릅떴다.

“쓸데없는 짓을 하느라 아까운 시간만 보냈구나. 밤이 길면 꿈자리가 사나운 법이니 우리 일도 더 늦기 전에 매듭을 짓도록 하자.

성락중은 피하지 않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오. 우리가 찾는 사람을 내주시오. 그러면 우리도 순순히 물러나겠소.”

원당이 예의 섬뜩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생긴 대로 골방 샌님 같은 얘기만 하는군. 오늘 내 손에서 살아날 수만 있다면 그놈은 저절로 너희 수중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대사의 말씀을 믿고 감히 한 수 가르침을 청하겠소.”

원당은 참지 못하고 홍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언제까지 군자연(君子然)하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나 보자.”

그리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훌쩍 신형을 날렸다. 가벼운 동작이었는데도 그의 몸은 순식간에 공간을 압축하여 성락중의 코앞으로 바짝 다가들었다.

원당의 주름진 손이 무섭게 성락중의 목을 잡아 왔다. 손이 날아드는 속도와 기세가 그야말로 살인적이어서 금시라도 성락중의 목 줄기가 터져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 검광 한 가닥이 어른거렸다. 막 성락중의 목을 잡아 뜯을 듯 덤벼들던 원당은 황급히 손을 거두며 옆으로 빙글 몸을 돌렸다.

팟!

시퍼런 검기가 원당의 코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야말로 실낱같은 간격이어서, 누구보다 담대하다고 자부하는 원당으로서도 순간적으로 가슴 한구석이 섬뜩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원당은 성락중이 검을 뽑는 동작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다만 무언가 차가운 것이 자신이 내뻗은 손의 경로로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몸을 비킨 것이다.

“정말 멋진 출수로구나.”

원당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성을 토하면서도 회전하는 몸의 탄력을 그대로 살려 성락중의 우측으로 접근하며 양손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파파파팍!

수십 개의 수영(影)이 마치 세찬 비처럼 퍼부어졌다.

성락중은 전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수중의 장검을 몇 차례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전신을 뒤덮을 듯 날아들던 수영의 한쪽이 뻥 뚫리며 시퍼런 검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원당 또한 더 이상 물러서거나 피하지 않고 수십 번의 장력을 폭포수처럼 쏟아 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하나 처음의 매서운 일 검을 보여 준 외에 성락중의 검은 원당을 위협하지 못하고 근처에서 맴돌기만 했다. 그것은 원당의 공세가 맹렬한 탓도 있지만, 그가 사용하는 특이한 보법 때문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마구잡이로 돌진하는 것 같아도 원당의 모든 움직임은 정교한 장치처럼 치밀한 안배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무심결에 그의 공세를 따라 대응하는 성락중의 검로가 조금씩 비틀렸던 것이다.

방금도 성락중이 원당의 옆구리를 노리고 내뻗은 일 검이 채 반도 도달하기 전에 원당의 몸은 어느새 왼쪽을 돌아 오히려 성락중의 옆구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성락중은 검을 거두며 마주 왼쪽으로 회전하여 재차 검을 날려야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성락중이 조금씩 열세에 처하는 듯하자, 멀지 않은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해광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한때 아미파 최고의 고수라는 소리를 듣던 인물답군, 낙중의 검으로도 상대하기 어려울 정도였나?’

노해광이 이번 일에 준비한 고수들은 적지 않았으나, 그중 성락중만큼 믿음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비록 싸움을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해도 성락중이 점차로 수세에 몰리는 듯 보이자 불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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