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31화
군림천하 (931)
양척기는 송악중의 의중을 훤히 안다는 듯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네 솜씨를 보고 싶었다. 이제 쾌의당주에게 얼마나 잘 배웠는지 보자꾸나.”
말의 내용은 부드러웠으나 그 어조와 표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왠지 섬뜩한 느낌을 일으키게 했다.
양척기는 예전부터 손속이 매섭기로 이름난 인물이었다. 점잖고 부드러운 외모와는 달리 일단 손을 쓰면 절대로 사정을 봐주거나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어서 그를 상대할 때는 끝을 각오해야 했다.
송악중은 양척기가 단단히 마음먹은 것을 알고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어서 내일모레면 관짝이나 찾아야 할 노인네가 성질머리는 그대로인 모양이구나.’
양척기의 무공이 대단하기는 했으나, 오직 그 때문에 겁을 먹고 싸움을 피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송악중은 쾌의당주에게 탈혼검을 배운 후, 아직 강호에서 두려워할 만한 적수를 만난 적이 없었다. 다만 절대적인 승산을 자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굳이 양척기와 싸울 필요성을 못 느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더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양척기의 주름진 손이 금시라도 덮쳐들 듯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두 손이 조금씩 쳐들릴 때마다 기이한 경기가 구름처럼 일어나 꿈틀거리는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모골이 송연해지게 하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송악중은 양척기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려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일이 꼬이는군. 이렇게 되기 전에 끝냈어야 했는데…………
막 양척기의 손이 그를 향해 날아들려 할 때였다.
휘이이이익!
어디선가 한 줄기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왠지 듣는 사람의 신경을 잡아 뜯는 것만 같은 괴이한 힘이 담겨 있었다.
양척기조차도 무심결에 내뻗었던 손을 순간적으로 멈추어 버릴 정도였다.
하나 누구보다 극명한 반응을 보인 사람은 송악중이었다. 그는 휘파람 소리를 듣는 순간, 얼굴을 굳히더니 그대로 신형을 날려 근처의 숲으로 향했다.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 민첩했던지, 양척기가 다시 손을 쓰려 했을 때는 이미 수림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반응하지 못했을 만큼 놀라운 신법에, 양척기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토해 냈다.
“가공할 신법이로군. 저 정도라면 매신 종리궁도 못지않겠어.”
매신 종리궁도는 한때 십대신법대가의 일인으로 꼽혔을 만큼, 신법에 관한 한 강호의 어떤 고수에게도 뒤지지 않는 절세의 신법을 쓰는 인물이었다.
하나 그 뛰어난 신법만큼이나 성격이 괴팍하고 음흉하기로 유명했다. 양척기는 송악중의 몸놀림이 종리궁도를 연상케 할 만큼 뛰어나다고 감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순식간에 꽁무니를 말고 사라져 버린 그의 행태를 비웃은 것이었다.
송악중이 홀연히 떠난 후,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양척기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눈을 번득이며 전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는 종남파의 제자가 맞는가?”
양척기와 전흠, 두 사람 모두 무당산에서 벌어진 집회에 참석했으나 서로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직접 대면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흠은 양척기가 자신의 조부인 전풍개와 비슷한 연배임을 알기에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인사했다.
“종남의 이십일 대 제자 전흠이라고 합니다. 양 대협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종남파의 이십일 대라면. 신검무적의 사제?”
“그렇습니다.”
“자네가 이곳에 온 것이 단순한 우연 같지는 않군.”
전흠은 숨길 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사실대로 말했다.
“장문 사형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양척기의 눈에 한 줄기 신광이 어른거렸다.
“그럼 신검무적도 같이 왔단 말인가?”
“제가 무당산에서부터 장문인을 모시고 산 아래까지 동행했지요.”
“그는 지금 어디 있나?”
전흠은 침착함을 잃지 않던 양척기가 다급하게 물으니 덩달아 마음이 급해졌다.
“헤어질 때는 산 정상 쪽으로 가시는 것 같았습니다만, 자세한 장소는 모르겠습니다.”
“이리 주게.”
양척기는 손을 내밀어 전흠이 안고 있던 한시몽을 넘겨받았다.
“이 녀석을 구해 주어 고맙네. 이번 일은 잊지 않음세.”
그러고는 한시몽의 몸을 십여 군데 빠르게 짚어 나갔다. 그러자 기식이 엄엄해 보였던 한시몽이 한차례 몸을 격하게 떨더니 벌떡 일어났다.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해서 마치 시체를 보는 것 같았던 안색도 어느 사이 혈색이 감돌아 한결 나아진 모습이었다.
“사숙·
양척기는 손을 흔들어 무언가 말하려는 한시몽을 제지하고 전흠을 힐끗 돌아보았다.
“자네도 자네 장문인을 찾고 싶겠지?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는 게 좋겠네.”
전흠이 반색했다.
“짐작 가는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무래도 자네 장문인이 가는 곳이 내가 가려는 곳과 같은 방향인 듯하군.”
그 말을 끝으로 양척기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무거운 표정으로 신형을 날렸다. 한시몽이 말없이 그 뒤를 따르자, 전흠 또한 더 묻지 못하고 그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세 사람 모두 강호의 절정 고수들인지라 순식간에 장내를 벗어나 수림을 헤치고 쏜살같이 나아갔다. 가장 앞에서 달리는 양척기는 물론이고 한시몽도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어 마치 생사대적을 만나러 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전흠은 조용히 그들을 뒤따르면서도 의아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들의 기세가 급박하면서도 결연해서 비장한 느낌마저 드는구나. 대체 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진산월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어떤 일을 맞닥뜨리든 진산월이라면 별 어려움 없이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는 절대적인 확신 덕분이었다.
울창한 송림을 지나 가파른 능선을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산의 정상이 눈에 들어왔다.
정상 바로 아래 십여 장 크기의 제법 널따란 공터가 나왔는데, 공터 한쪽에 누군가 우두커니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흠은 그가 다름 아닌 진산월임을 알아보고는 반색하며 다가갔다.
“장문 사형, 이곳에 계셨군요…..?
하나 이내 입을 다물어야 했다.
진산월의 시선을 따라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어떤 노인을 보았기 때문이다. 수수한 마의 차림새의 노인이었는데, 주름살이 가득해서 당장 관에 들어가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노인은 이미 숨이 끊어졌는지 얼굴에 희미한 핏기조차 보이지 않았고, 한 가닥 숨결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노인을 본 양척기와 한시몽이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들처럼 몸을 떨기 시작했다. 심지어 한시몽은 버티지 못하고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양척기가 떨리는 손으로 노인의 맥문을 잡더니 비통한 신음성을 토해 냈다.
“거・・・・・・ 검주!”
노인의 몸에는 별다른 상흔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마치 잠이라도 든 것 같았다. 금시라도 눈을 뜨고 한차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날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양척기는 한참이나 마의 노인의 시신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수십 성상(星霜) 동안 강호의 거친 풍파를 헤쳐 오면서도 항상 냉정함을 잃지 않았던 노강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문득 그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마의 노인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한층 신중해진 동작으로 가슴팍 부근의 옷깃을 들추었다.
“음.”
그의 굳게 다물어진 입술을 뚫고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마의 노인의 가슴은 나이답지 않게 널찍했으나, 근육이 빠져서인지 주름지고 쭈글쭈글한 피부로 덮여 있었다.
그 왼쪽 가슴의 한 치 위에 실처럼 가느다란 검흔(劍痕)이 보였다. 주름진 피부에 가려져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미한 검흔이었다.
양척기는 그 검흔을 손가락으로 슬쩍 만져 보았다.
피는 묻어나지 않았다. 대신에 섬뜩하리만치 짙은 한기가 손끝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정말 지독한 검기로구나.’
양척기는 가슴이 오싹해져서 깊은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그 검흔은 정확히 심장 위를 지나는 혈맥만 끊어 놓았다. 더구나 손끝에 닿은 한기로 보아 심장 주위의 혈맥이 꽁꽁 얼어붙었을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정말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악랄하기 그지없는 살인 수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의 노인의 사인을 알았건만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운 기운은 오히려 몇 배나 가중되었다. 양척기는 마의 노인의 시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서 있는 사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철탑처럼 강인하면서도 무심하기 이를 데 없는 눈빛이 제일 먼저 시선을 끌었다. 이어 한쪽 뺨에 그려진 희미한 칼자국과 굳게 다물린 입술, 그리고 딱 바라진 어깨를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선과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당당한 자세에 이르자 양척기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정말 타고난 무인(武人)이로구나!’
자신이 언제나 꿈꾸었던 완벽한 무인상이 눈앞에 있었다. 그만이 아니라 무공을 익히고 강호를 종횡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저리되기를 간절히 원할 것이다.
양척기는 무당산의 집회 당시 진산월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진산월의 눈빛과 자세, 기도에 크게 감탄했는데, 이렇게 다시 눈앞에서 보게 되니 탄복하는 마음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히 당금 무림의 제일인자다운 풍모가 아니겠는가?
양척기는 애써 자세를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양척기라 하네. 무당산에서 잠깐 본 적이 있는데, 기억하는가?”
진산월은 무림의 대선배 격인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했다.
“물론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양척기의 입가에 한 줄기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하고 싶지만, 자네도 보다시피 전혀 그렇지 못하네.”
이어 그는 마의 노인의 시신을 가리켰다.
“이분이 누구인지 짐작하겠는가?”
“혹시 신목령의 주인 아니신지요?”
“옳게 보았네. 이분이 바로 한목신검주시라네.”
한목신검은 신목령의 상징이고, 그 주인은 당대의 마도제일고수라는 신목령주다.
무림삼성보다 오히려 한 단계 위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마도제일인이 이름 모를 산정에 차가운 시신이 되어 누워 있는 것이다.
양척기의 말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눈앞의 이 주름살 가득하고 평범한 마의를 입은 노인이 그 유명한 신목령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으리라.
진산월 또한 혹시나 하는 의구심을 품긴 했지만, 막상 자신이 발견한 시신이 당대의 거목인 신목령주임을 알게 되자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었다.
그동안 신목령과는 크고 작은 일로 얽혀 결코 좋은 관계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주인인 신목령주에 대해서는 강호에 몸담고 사는 무림인으로서 일종의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은 좀처럼 흔들림이 없는 진산월에게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모습으로 계실 분이 아닌데, 놀랍습니다.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있겠습니까?”
진산월의 직설적인 물음에 양척기의 얼굴에 말로 형용키 어려운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그건 내가 먼저 물어볼 말인 것 같군.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산 아래에서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져 황급히 달려왔습니다만, 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난 후였습니다.”
“상황이 끝났다는 건・・・・・・?”
“신목령주께서 쓰러져 계셨고, 한 사람이 막 자리를 떠나는 참이었습니다.”
양척기는 숨 쉴 틈도 없이 재차 물었다.
“그자가 누구인지 아는가?”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기에, 건장한 체구의 인물이라는 것 외에는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그자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기억할 수 있겠나?”
“평범한 회색 단삼이었습니다.”
양척기는 그제야 질문을 멈추고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챙이 달린 모자에 단삼이라…… 전형적인 마부의 복장이로군.”
진산월이 잠시 그자를 떠올려 보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확실히 마차를 끌기에 어울리는 복장이기는 했습니다.”
양척기의 두 눈에 보기만 해도 섬뜩해지는 무시무시한 살광이 어른거렸다.
“항상 종적을 숨긴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자가 검주 앞에 제 발로 나타난 것이 못내 불안했는데, 결국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군.”
“그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양척기에게서는 한동안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진산월이 돌아보자 그제야 씹어뱉듯이 그가 말했다.
“쾌의당주. 그자가 바로 쾌의당주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