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33화
군림천하 (933)
진산월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잔뜩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양척기와 한시몽에게는 너무도 선명하고 똑똑하게 들렸다.
“인지하기 힘들 정도로 짧은 순간에 인간의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압력을 가하는 겁니다.”
양척기의 눈에 불신의 빛이 어른거렸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 방법 말고는 고인의 몸에 난 흔적을 설명할 길이 없군요.”
양척기는 침음하다가 다시 물었다.
“자네는 순수하게 위력만으로 검주를 압사시킬 수 있는 무공이 존재한다고 보는가? 그리고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피부가 먼저 괴사하지 않겠는가? 피부만이 아니지, 장기까지 손상되고 말았을 걸세.”
“확실히 고인 정도의 실력을 지닌 고수라면 아무리 긴박한 상황이라도 순간적으로 진기를 끌어 올려 신체 외부와 내부 장기를 상하지 않게 보호할 수 있을 겁니다.”
“그야, 순간적으로는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럴 경우 경맥은 외부의 가공할 공격과 내부의 기공에 이중으로 노출되는 겁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러한 압력을 양쪽에서 받게 되면 아무리 질긴 경맥이라도 견뎌 낼 수 없지요.”
진산월의 말을 듣고 무심결에 그 장면을 상상해 본 양척기는 머리끝이 쭈뼛하는 섬뜩함을 느꼈다.
알아차리기도 힘든 짧은 순간에 전신에 가해지는 가공할 압력, 그걸 막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가장 자랑하는 내가기공을 끌어 올리는 순간, 미처 보호받지 못한 경맥은 양쪽의 압력에 눌려 갈가리 찢기고 마는 것이다.
그야말로 사전에 상대의 공세를 알지 못한다면 절대로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완벽한 살인 수법이 아닌가?
물론 진산월의 추측이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첫째는 미처 경맥을 보호하지도 못할 정도로 흉수의 공격이 빨라야 했고, 둘째로 단숨에 경맥을 가닥가닥 끊어 버릴 정도로 가공할 압력을 내뿜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하는 상대 또한 그 짧은 순간에 전신의 공력을 끌어 올려 신체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지녀야만 진산월이 말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무척이나 까다롭고 실현 가능성이 극도로 희박한 일이었지만, 양척기는 왠지 진산월의 추측이 단순히 헛된 망상이 아닐 거라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갈수록 무거워지는 마음에 양척기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건 정말 상상만으로도 섬뜩한 일이로군. 그런데 정말 강호에 그처럼 빠르고 강력한 위력의 무공이 있었던가?”
진산월은 이미 생각한 바가 있는 듯,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알기로는 최소한 세 개가 있습니다.”
양척기는 쉽게 경동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이때만큼은 정말 놀라고 말았다.
“그런 무공이 세 개나 된다고?”
“대라삼검이라는 무공이 있습니다.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양척기는 잠시 생각해 봤지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대라’가 붙은 무공이 흔한 것은 아니지만, 대라삼검은 처음 들어 보네.”
“대라삼검의 첫 번째 초식을 대라궁해라고 하지요. 이것은 양 대협도 직접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양척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대라궁해? 역시 들어 본 적 없는 무공이네만.”
“양 대협께서는 얼마 전 무당산에서 벌어진 악산대전을 직접 참관하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운이 좋게도 무당 집회에 참석했다가 그 자리를 함께할 수 있었네. 덕분에 자네의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직접 두 눈으로 볼 기회도 얻었고.”
강호의 숱한 도산검림을 헤쳐 온 양척기에게도 악산대전은 일찍이 보지 못했던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특히 형산파에서 최초로 등장한 육결검객과 종남파의 젊은 장문인 간의 싸움은 안계를 넓힌다는 의미를 새삼 일깨워 준 실로 충격적인 대결이었다.
“당시 제가 상대했던 형산파 육결검객이 최후 절초로 쓴 무공이 바로 대라궁해입니다. 더 정확히는 절반의 대라궁해라 할 수 있겠군요.”
양척기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형산파 육결검객 고진이 마지막에 사용한 무공은 양척기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공스럽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무시무시한 검초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음에도 몸이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가히 압도적인 기세를 보여 준 광세절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고진은 그런 무공을 사용하고도 신검무적을 당해 내지 못해 결국 검하고혼(劍下孤魂)이 되고 말았으니, 새삼 눈앞의 이 젊은 장문인이 어떠한 존재인지 양척기는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절반의 대라궁해란 무슨 뜻인가?”
“나중에 알았습니다만, 당시 고진 대협이 사용한 검초는 반 초의 대라궁해에 자신의 심득을 합한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고 대협이 완성된 대라궁해를 펼쳤다면 어떠한 결과가 되었을지 저로서도 장담하기 힘들군요.”
양척기는 순수하게 경악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로군. 반 초식만으로 그러한 위력을 보였다니. 자네 말대로라면 확실히 대라궁해라는 초식은 검주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무공중 하나일 것이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대라궁해는 대라삼검의 일 초식일 뿐입니다.”
조용한 진산월의 말에 양척기는 탄성을 토해 냈다.
“아! 그렇다면 자네가 말한 세 가지가 바로 대라삼검의 세 초식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대라삼검의 두 번째 초식은 대라장천이라는 것인데, 제가 듣기로 대라궁해에 조금도 못지않은 절초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초식은?”
“그건 아쉽게도 저 역시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분명히 존재하며, 어쩌면 머지않은 장래에 강호에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말과는 달리 진산월은 대라삼검의 마지막 초식이 조만간에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야율척의 말대로 조익현이 대라삼검의 최후 초식을 습득했다면 지금까지 억눌려 왔던 은원을 종결짓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휘두르려 할 것이다. 그 대상이 누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양척기는 진산월의 말에 담긴 의미를 분석하느라 생각에 빠져 있다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하나의 무공인 대라삼검의 세 초식을 하나씩 따로 분리해서 굳이 세 가지 무공이라고 말한 이유라도 있는가?”
“그것은 각 초식이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지녔으면서도 완전히 별개로 독립된 초식들일 뿐 아니라 그 주인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건 정말 특이한 일이로군. 그럼 첫 번째와 두 번째, 세 번째로 나누는 것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밀인가?”
“그렇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제가 각각의 초식을 알게 된 순서라고 하는 게 정확하지요.”
“재미있는 말이로군. 그럼 각 초식의 주인들은 누구인가?”
“대라궁해의 주인은 조익현이란 인물입니다. 혹시 아십니까?”
양척기의 눈자위가 한차례 꿈틀거리고 두 눈에 기광이 어렸다.
“역시 그랬던가……. 쾌의당의 배후에 그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네. 쾌의당주가 그의 제자일지 모른다는 소문이었는데, 진위는 아직 모르겠군.
진산월의 짐작대로 양척기는 조익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쾌의당과 대립하는 신목령의 고수라면 쾌의당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대라장천의 주인은 석동이라고 합니다.”
석동이란 이름에 양척기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석동? 석가장의 전전 대장주였던, 그 석동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에 대해 아십니까?”
양척기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표정이 몇 차례나 변했지만,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른다고 할 수는 없겠군.”
양척기는 자신이 석동을 알고 있음을 시인하면서도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석동을 입에 올리는 것이 불편한 듯한 모습이었다.
진산월도 굳이 석동에 대해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그 때문에 장내에 일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들었다.
잠시 후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의외로 양척기였다.
“자네의 고견은 잘 들었네. 확실히 자네가 말한 무공들이라면 아무리 검주라도 흉사를 피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군.’
“강호는 넓고 무공의 길은 측량할 수 없으니, 대라삼검 외에 또 다른 무공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검주를 쓰러뜨린 자가 쾌의당주임을 생각해 본다면 그가 사용한 수법이 무엇인지는 명약관화한 일이 아니겠는가? 굳이 존재조차 불분명한 다른 무공을 찾으려 들 필요는 없다고 보네.”
진산월도 그 점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이었다.
“이제 문제는 하나일세. 쾌의당주가 대라삼검의 한 초식으로 검주를 쓰러뜨렸다면, 왜 굳이 나중에 탈혼검의 무공을 사용해 엉뚱한 흔적을 남겼느냐는 것이지.”
양척기는 자신이 처음에 탈혼검의 흔적에 사로잡혀 신목령주의 사인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진산월은 나름의 생각이 있기에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자신이 대라삼검의 초식을 사용할 줄 안다는 사실을 최대한 숨기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누구에게 말인가?”
진산월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했고, 눈빛 또한 물처럼 고요했으며, 음성은 차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신목령의 진정한 주인에게 말이지요.”
양척기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없이 번뜩이는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한동안 집요하리만치 계속 진산월의 눈을 바라보던 양척기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그의 모습에 그만 나직한 탄식을 토해 내고 말았다.
“정말 대단한 정심(定心)이로군. 확실히 신목령을 세운 분은 따로 계시네. 검주는 엄밀히 말하면 그분에게 위탁받은 셈이라고 할 수 있지.”
양척기는 위탁이라고 돌려서 말했지만, 그것은 곧 신목령주가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 처지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도제일인이라 평가받으며 강호 무림 최고의 고수 중 하나로 공인된 신목령주가 누군가의 수하에 불과하다는 것은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나, 진산월은 조금도 격동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점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쾌의당, 성숙해, 천봉궁…….
강호를 좌지우지하는 거대한 세력들은 예외 없이 모두 배후에 누군가가 존재했다. 그러니 신목령의 배후에도 진정한 주인이 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쾌의당주는 고인을 제거하기는 했으나, 그 바람에 자신이 꼭꼭 숨기고 싶었던 비장의 무기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탈혼검으로 최대한 그것을 감추려 했을 겁니다.”
“쾌의당주가 탈혼검만으로는 검주에게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단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쾌의당주로서는 아마 탈혼검으로 승부를 가리는 것이 제일 좋은 방향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고인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숨겼던 무공을 꺼낸 것이지요.”
양척기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자네가 아니었다면 그자의 의도는 성공했을 것 같군. 나는 그에 일조한 셈이 되었을 테고.”
“제가 아니더라도 결국 누군가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을 겁니다.”
양척기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 일은 이대로 묻혔을 걸세. 우리 쪽의 누구도 검주의 시신을 다시 조사하지는 않았을 것이야. 그럴 이유도, 명분도 없으니까 말이네.”
그렇다.
누구라도 신목령주의 가슴에 나 있는 탈혼검의 흔적을 보면 그의 사인이 다른 것이라고는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강호상에 탈혼검에 대한 공포스러운 전설이 너무도 확고하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진산월조차도 탈혼검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신목령주의 죽음 안에 또 다른 진실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양척기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다시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자네는 왜 쾌의당주가 그 사실을 숨기려 했다고 생각하나?”
어차피 쾌의당주가 신목령주를 죽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쾌의당주는 굳이 신목령주의 시신에 탈혼검의 흔적을 남겨 놓으면서까지 자신이 어떤 무공으로 신목령주를 살해했는지를 숨기려 했다.
쾌의당주가 특별한 의도 없이 그런 번거로운 일을 했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하나 그 점에 대해서는 진산월도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몇 가지 사소한 흔적과 단서들이 있기는 했으나, 그런 요소들을 모아서 명확하게 파악하기에는 아직은 빠진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진산월은 지극히 원론적인 답변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신목령의 주인에게 자신이 대라삼검의 초식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단순히 그 이유뿐일까?”
“그걸 정확하게 알아낼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양척기는 귀가 번쩍 트이는지 황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
“신목령의 주인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진산월의 너무도 간단한 답변에 잠깐 허탈한 표정을 짓던 양척기가 이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쾌의당주가 굳이 숨기려 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그걸 밝히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겠군.”
“때론 단순한 게 가장 빠른 길일 수 있지요.”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일세. 적어도 쾌의당주가 뒤로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건 그게 이루어지는 일은 없어야겠지. 아무튼 오늘은 여러모로 신세를 졌네. 언제고 갚을 날이 있을 걸세.”
양척기는 신목령주의 시신을 수습하려다 문득 몸을 멈추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내뱉었다.
“자네는 왜 신목령의 주인이 누구인지 묻지 않나?”
“제가 물으면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양척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새삼스럽게도 진산월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정말로 상대하기 까다로운 젊은이로군. 한 가지만 말해 주지. 쾌의당주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는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의 아들을 살해했네. 그분의 역린을 건드린 이상 그자의 최후는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일세.”
진산월로서는 이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고인이 누구의 아들입니까?”
대답하는 양척기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진산월의 귀에는 너무도 선명하게 들렸다.
“철혈홍안. 검주는 철혈홍안의 큰아들인 석호(石湖)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