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35화
군림천하 (935)
정해는 그의 죽음으로 화산파와의 일이 종결되었다는 것에 내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노해광은 아직도 검단현이 종남파 본산의 습격을 사주한 것에 대한 분노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다.
“검단현의 시신을 넘겨주었을 때 화산파에서 다른 말은 없었느냐?”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입을 굳게 다문 채 조용히 시신을 운구해 가더군요.”
노해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산파의 장문인인 용진산이 돌아왔다고 하던데. 용진산이 검단현의 죽음을 알고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니, 이상하구나.”
검단현은 용진산의 잠재적인 경쟁자였다. 비록 장문인과 제자라는 신분 때문에 검단현이 용진산의 지시를 어기지 못하고 상당 기간 영어의 몸이 되기는 했으나, 그 때문에 용진산은 더욱 검단현을 경계했다. 검단현의 성정으로 필시 자신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용진산이 무당에서의 무림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본산을 떠난 후 화산파를 실질적으로 이끌던 천절검사 단우진은 용진산에 의해 반강제로 칩거해 있던 검단현을 풀어 주고 종남파를 상대하는 중책을 맡겼다.
하나 검단현은 임무에 실패했고 회람연의 대결마저 패한 데다 그 자신이 한 구의 시신이 되어 돌아왔으니, 무당산에서 복귀한 용진산이 그 사실을 알고 어떠한 심정이었을지 노해광이 아닌 다른 누구라 해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경계하던 검단현의 몰락을 반겼을지, 아니면 확연히 벌어진 종남파와 화산파의 위상 차이 때문에 분노했을지, 선뜻 짐작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정해는 검단현의 죽음으로 화산파와의 일이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노해광은 은연중에 아직도 화산파에 대한 경각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다져진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화산파가 멸문이라도 하지 않는 한 그들에 대한 경계를 풀 수는 없지. 그들도 아마 우리에 대해 같은 마음일 것이다.’
결국 화산파와 종남파는 영원한 숙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현재 종남파가 실로 오랜만에 화산파와의 경쟁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노해광은 이러한 상황이 최대한 오래 유지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만간 눈앞으로 닥쳐올 거대한 파도를 잘 헤쳐 나가야만 했다.
“소마에 대한 조사는 어디까지 진행되었느냐?”
노해광의 물음에 정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소마는 대흥안령 쪽의 대석채(石寨)라는 곳에 기거했는데, 그때부터 다섯 명의 수하들이 따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이번에는 그들 중 한 명만 본거지에 남고, 다른 네 명 모두 소마를 따라온 듯합니다.”
“후우. 고민스럽군.”
정해는 노해광이 무엇을 고민하는지 잘 알고 있기에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않으셨습니까? 적어도 오늘 오후까지는 사람을 보내야 내일을 대비할 수 있습니다.”
노해광이 눈썹을 찌푸린 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평소의 그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한동안 굳어진 얼굴로 허공을 응시한 채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마음을 굳혔는지 단호하게 말했다.
“본산에는 사람을 보내지 않겠다.”
정해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소마뿐 아니라 세 명의 절정 고수가 함께 온다면 지금 우리의 전력으로는 그들을 완벽하게 막는다고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 노해광의 굳건한 표정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본산이 검단현의 농간으로 인한 습격의 여파를 이제 간신히 수습한 참인데, 다시 무거운 짐을 떠맡길 수는 없지. 이만한 일도 감당하지 못하고 또다시 지산과 전 사숙에게 손을 내민다면 너무나 한심한 일이 아니겠느냐?”
정해는 무어라고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노해광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만 보아도 그가 어떤 각오를 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해광의 두 눈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섬뜩한 광망이 이글거리고 있었고, 두 손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노해광을 몇 달 동안이나 지척에서 지켜보았던 정해로서도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결연한 모습이었다.
정해는 속으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숙께서는 이번 일에 목숨을 거셨구나.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더 이상 본산의 도움을 받지 않고 우리의 힘만으로 뚫고 나가기로 결심하신 거야.’
그것은 무모한 집념이라고 할 수도 있고, 비장한 각오라고 할 수도 있으며, 단호한 의지라고 할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노해광은 이미 마음을 정했다.
그렇다면 아랫사람으로서 마땅히 사숙의 결정을 존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해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보았다.
‘성 사숙과 낙 사제라면 소마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하 사숙과 노 사숙이 채병익을 막는다면 위고릉과 강패만 남게 돼. 최 방주와 삼묘가 위고릉과 강패를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낙 사제로 하여금 위고릉을 최대한 빨리 쓰러뜨리게 하면 어떨까? 성 사숙께서 과연 낙 사제가 합류할 때까지 소마를 상대로 버틸 수 있을지・・・・・・・ 아니, 그보다는 수비에 강점이 있는 하 사숙이 채병익을 맡고, 그사이에 노 사숙이 최방주와 힘을 합쳐 위고릉이나 강패 중 하나를 먼저 처리하는 것이…?
그렇게 끝없이 머리를 굴리다가 무거운 탄식을 토해 내고 말았다.
‘당최 어떤 방법이 우리의 전력을 보존하면서 소마 일당을 상대하기에 가장 적절할지를 예상할 수가 없으니… 아! 내 무공이 너무도 미천해 이런 위중한 시기에 한 손을 거들 수 없으니, 정말 너무나 원통하구나!’
“넷 중 하나는 원당 대사였을 테고, 다른 세 명은?”
“낭아신검 채병익과 단수독(獨) 위고릉(魏陵), 벽력권(霹靂拳) 강패(覇)란 자입니다.”
낭아신검 채병익은 흥안령 일대를 오랫동안 주름잡던 인물이었고, 단수독 위고릉과 벽력권 강패는 감숙성과 몽고고원에서 적지 않은 명성을 떨치고 있는 고수였다.
노해광은 장성 일대에서 제법 오래 생활했기에 그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소마 하나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데 위고릉과 강패에 채병익까지 함께라니, 갈수록 일이 더 험해지는구나.”
노해광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자 정해의 얼굴이 덩달아 굳어졌다.
“채병익은 얼핏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위고릉과 강패란 인물은 처음 듣는군요. 사숙께서 우려하실 만큼 위협적인 자들입니까?”
“위고릉과 강패는 몰라도 채병익은 정말 만만치 않은 인물이다. 그가 소마의 수하로 들어갔다는 게 쉽게 믿어지지 않는구나.”
“원당 대사에 비하면 어떻습니까?”
“위고릉과 강패는 반수 처지고, 채병익은 동수라고 봐야겠지.”
정해는 성락중이 원당과의 싸움에서 간신히 득수했다는 이야기를 이미 전해 들었기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흥안령에 그 정도 고수가 많습니까?”
노해광은 정해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빙긋 웃었다.
“그랬다면 장성 일대는 진즉에 그들 손에 넘어가 버렸을 것이다. 채병익은 대흥안령 산맥의 터줏대감 같은 존재라서 그 일대에서는 가히 최고의 고수라고 할 수 있지.”
“그런 사람도 소마의 수하밖에 안 되는군요.’
정해가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자 노해광은 무거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만큼 소마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의미다.”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소마 신지림!
강호 최고의 고수들이라는 우내사마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살성이었다. 벌써 수십 년 동안 그의 명성은 온 강호를 진동시켰고, 많은 무림인들에게 공포스러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런 희대의 마인이 세 명의 절정 고수들을 수하로 거느린 채 서안으로 쳐들어온다고 생각하니 담대한 성격의 노해광으로서도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소마가 언제쯤 오리라고 보느냐?”
“원당 대사의 말씀대로라면 늦어도 내일까지는 오지 않겠습니까?”
노해광의 표정이 더욱 무거워졌다.
정해가 본인의 무능함과 나약함을 자책하고 있을 때, 가만히 그의 어깨를 짚어 오는 손이 있었다.
“또 쓸데없는 데 심력을 소모하고 있구나.”
정해는 흠칫 놀랐다가, 두툼한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사숙의 모습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죄송합니다, 사숙. 제가 여기서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노해광은 한차례 빙긋 웃더니 대수롭지 않은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람마다 쓰임새가 다르고 각자가 맡은 역할이 있거늘 어찌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하려 하느냐? 너는 지금처럼 정보를 취합하고 뒤처리를 매끄럽게 해 주면 된다. 나머지는 내가 해야 할 일이니.”
“하지만 사숙, 이번 일은 너무도 중대하고 그만큼 위험천만합니다. 사숙의 입으로 소마는 정말 무서운 존재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래, 소마는 강호의 누구도 상대하기를 꺼리는 인물이지. 아마 당금 강호에서 그를 상대로 승산을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네 장문 사형 외에는 없을 것이다.”
“…….”
“그렇다고 그를 상대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몇 가지 써 볼 만한 방법이 있어.”
정해가 근심을 지우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정통적인 방법과 파격적인 방법이 있다. 어느 것부터 듣고 싶으냐?”
정해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파격적인 방법입니다.”
노해광이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역시 궤령낭군다운 선택이군. 정도보다는 사도를 택하겠단 말이지?”
정해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으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게 아니란 건 사숙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흐흐. 그래, 정통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는 대충 짐작이 가니까 파격적인 방법이 궁금한 것이겠지. 여하튼 네가 정통보다 변칙을 좋아하는 건 분명한 사실 아니냐.”
정해도 그 말까지 반박하지는 못했다. 확실히 그는 편법 쓰는 걸 주저하지 않으며, 느리고 안정적인 길보다는 빠르게 질러가는 길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노해광은 그를 놀리는 것을 그만두고 진지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소마 일당을 정면으로 상대해서는 승산도 희박할뿐더러 설사 이긴다 해도 우리 쪽의 피해가 얼마나 심각할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건 최후의 최후가 되어서나 선택할 길이야.”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강호의 길이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소 돌아가더라도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해야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소마 일당을 상대하기 어려운 것은 소마 본인의 무서움만이 아니라 그가 몇 명의 수하들을 대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마가 상수(常數)라면 다른 자들은 변수(數)인 것이지. 우리는 그 변수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정해는 노해광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리 거창하게 시작하는지 궁금해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황급히 물었다.
“혹시 사숙께서는 ‘상옥추제(上屋抽梯)’의 계()를 쓰시려는 건지요?”
노해광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바로 맞혔다.”
“하지만 상옥추제만으로는………….”
“상옥추제만으로는 미흡한 구석이 있지. 그래서 거기에 두 가지 계를 더하려 한다.”
“그게 무엇입니까?”
“금선탈각蟬脫殼)’과 ‘공성계(空城計)’다.”
그제야 비로소 정해도 노해광이 무엇을 노리는지 알 수 있었다.
“사숙께서는 장기전을 계획하시는군요.’
노해광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네 녀석이라면 알아차릴 줄 알았다. 그럼 이제 일을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말해 보겠느냐?”
정해의 두 눈이 어느 때보다 영민하게 빛났다. 아마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 수많은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쉴 사이 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으리라.
“적지 않은 인원과 적당한 장소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지선이 되어 줄 관원과 보이지 않는 칼도 있어야 합니다.”
노해광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미끼가 될 사람이 필요합니다. 최악의 경우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기꺼이 미끼가 되어 줄 사람 말입니다.”
그때 비로소 노해광은 묵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다행히 모두 우리에게 있는 것들이지.”
정해가 생각에서 깨어난 듯 노해광을 쳐다보며 물었다.
“미끼가 되어 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물론이다.”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미끼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겁니다.”
“당연히 그가 스스로 자원한 일이다.”
노해광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하자 정해는 의아해졌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일인데, 그 일을 하겠다고 선뜻 나선 사람이 대체 누구입니까?”
노해광은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활짝 웃으며 거침없는 음성을 토해 냈다.
“바로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