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39화
군림천하 (939)
한바탕 토한 덕분에 겨우 정신이 드는지 그 사람이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미, 미안하오. 뒤집어쓴 국물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소.”
마의 거한은 냉소를 터뜨렸다.
“흥. 내 손에 잡히고도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
그가 손에 힘을 주자 멱살을 잡힌 사람은 숨이 막히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바둥거렸다.
“미・・・・・・ 미안하다고 사과하지 않았소? 아무리 내가 형장의 면전에 토했기로서니 겨우 이런 일로 사람을 죽이려 한단 말이오?”
마의 거한이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이런 꼴이 되고도 계속 발뺌을 하는구나. 내가 듣기로 철면호는 배짱이 좋고 담대해서 사내다운 인물이라고 하던데, 영락없는 거짓말이 아니냐.”
“철면호라니? 무언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나는 배송(裵松)이라는 사람이오.”
상대가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니 마의 거한도 순간적으로 자신이 착각했나 싶었다.
하나 조금 전의 상황은 단순히 속이 안 좋아 토했다고 하기에는 그 내용물이 너무도 정확하게 자신에게로 날아들었다. 그 순간 또한 교묘해서, 자신이 비장의 장기인 회륜(回輪劫)을 펼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그 국물을 뒤집어쓰고 말았을 것이다.
마의 거한은 자칭 배송이라 주장하는 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핏빛이 살짝 감도는 눈동자에 섬뜩한 광망이 이글거리는 그의 눈은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배송 또한 안색이 핼쑥해져 제대로 그 눈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계속 피력하고 있었다.
“나, 나는 정말 속이 너무 안 좋아서 토한 것뿐이오. 난데없이 매운 국물을 뒤집어쓴 것도 억울한데, 형장이 나를 엉뚱한 사람으로 착각해서 살수를 쓴다면 그건 정말 사람으로서 잘못하는 것이오.”
더듬거리면서도 주절주절 할 말을 다 했다.
마의 거한은 그의 얼굴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돌려 머리와 다른 부위를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배송의 몸에 흘러내리고 있는 국물은 냄새가 조금 지독하기는 해도 독성이 있거나 다른 특별한 물질이 섞인 것 같지는 않았다.
마의 거한은 배송이 토해 낸 국물도 힐끔거렸으나, 겉으로 보아서는 별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너무 과민했던가? 어쩐지, 철면호란 놈은 서안 최고의 실력자라고 들었는데 너무 쉽게 잡았다 싶더니만……………’
마의 거한은 흥안령 일대에서 살성으로 유명한 벽력권 강패란 인물이었다.
그는 철면호를 사로잡거나 제거하기 위해 평소 무리 중 가장 친하게 지내던 단수독 위고릉과 함께 철면호가 거주한다고 알려진 산해루를 찾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배송이 자신에게 정체 모를 국물을 토했을 때, 이것이 바로 철면호의 수작이라고 생각하고 내심 쾌재를 부르며 그를 제압했던 것이다.
그런데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판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아래층에 자리 잡고 앉았던 흑의 중년인이 계단을 올라오는 걸 보고 강패가 반색했다.
“어서 오게. 그렇잖아도 자네 의견을 들어 보고 싶었네.”
흑의 중년인은 단수독 위고릉이었다. 그는 대흥안령과 대막 일대에서 거의 사신(死神)과도 같은 존재로 군림하는 무서운 고수였다.
직선적이고 다소 단순한 성격의 강패와 달리 위고릉은 상당히 냉정하고 치밀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강패가 위고릉과 제일 친한 사이가 된 것도 두 사람의 성격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다.
위고릉은 묵묵히 강패의 말을 듣고 있다가 배송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냄새가 지독하군. 물이라도 끼얹을 것이지 그대로 잡고만 있었는가?”
강패가 히죽 웃었다.
“쥐새끼를 잡았다는 생각에 냄새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네.”
위고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철면호는 서안을 거의 지배하다시피 한 자인데, 그런 꼴을 하면서까지 사람들 틈에 숨어서 암습할 기회를 노렸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군. 강패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럼 정말 이자는 철면호가 아니란 말인가?”
“바닥의 흔적을 보니 독극물도 아닌 그냥 토사물이군. 상대가 자신에게 토했다고 무조건 철면호라고 생각하다니 너무 성급했던 것이 아닌가?” 강패는 계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그게, 너무 공교로운 일 같았단 말이지. 나를 직접 암습할 정도라면 무조건 철면호일 거라는 생각부터 들었지 뭔가?”
“정말 암습이었다 해도 철면호 정도의 인물이 수하들을 쓰지 않고 직접 나섰을 리는 없네.”
“그런가? 제길. 어쩐지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했어.”
강패가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배송을 놓아주었다.
“사과 같은 건 필요 없겠지? 네놈이 나에게 먼저 실례를 했으니 말이다.”
배송은 몇 차례나 목덜미를 어루만지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휴! 오늘은 정말 일진이 나쁜 날이로군. 난데없이 음식물을 뒤집어쓰고 영문도 모른 채 참변을 당할 뻔했으니. 분명 점쟁이가 오늘은
길일(吉日)이라고 해서 자축하려고 애써 산해루로 왔는데 이런 일을 당할 줄이야.”
그는 아직도 머리와 이마 쪽에 묻어 있는 음식물 찌꺼기를 손으로 쓸어 내다가 우거지상을 했다.
“윽! 이놈의 냄새, 정말 지독하구나!”
배송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몸을 돌렸다.
막 그가 일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려 할 때였다.
“잠깐.”
가만히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던 위고릉이 그를 불러 세웠다.
배송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돌아보았다.
“왜 그러는 거요?”
위고릉은 그를 빤히 응시하더니 어느 사이에 그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배송이 움찔하여 더듬거렸다.
“무, 무슨 일이시오? 내가 당신에게는 실수한 게 없는데.”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네.”
“그게 뭐요?”
“자네는 서안 토박이인가?”
배송은 위고릉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만, 그건 왜 묻는지…………?”
“잘됐군. 우리는 서안이 초행이라 길 안내할 사람이 필요했네. 마침 자네가 서안 토박이라니 이곳의 지리를 잘 알 게 아닌가? 신세 좀 지겠네.” 뜻밖의 말에 배송은 당혹스러운 듯 거절하려 했다.
“나는 할 일이 있어서…….”
하나 자신을 보는 위고릉의 두 눈에 점차로 매서운 빛이 감돌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 알았소. 사해는 동도라 했으니 서안을 처음 찾아온 사람을 그냥 둘 수는 없지.”
위고릉은 그제야 살기를 지우며 빙긋 웃었다.
“말이 통하는 친구로군. 잘 안내해 준다면 섭섭지 않게 사례하겠네.”
“사례는 필요 없지만, 굳이 준다면 사양하지 않겠소.”
“처신도 잘하는 친구로군.”
위고릉이 배송을 끌어들이자 강패는 그의 의중이 이해되지 않아 일순 어리둥절했다.
하나 위고릉과 오랫동안 지내면서 그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되었기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위고릉이 떠나려는 배송을 붙잡은 것은 순간적인 판단에서였다.
강패의 손에 잡혀 있을 때는 두려움에 덜덜 떨던 배송이 그의 손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너무도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였기에 약간의 의혹이 일었던 것이다.
위고릉은 혹시나 하는 마음과 실제로 서안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을 구할 필요성 때문에 배송을 잡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질문을 던진 것도 다분히 형식적인 것이었다.
“이곳 삼층에 산해루의 주인인 철면호의 거처가 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배송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철면호가 이곳 삼층에 자주 머무르긴 하지만, 지금은 없을 거요.’
뜻밖의 말에 위고릉과 강패의 얼굴이 모두 변했다.
“그럼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철면호는 열흘을 주기로 몇 개의 주루를 번갈아 돌아다닌다오. 오늘은 아마 대왕루에 있을 거요.”
위고릉이 배송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자네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나?”
배송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서안에서 철면호가 관리하는 주루는 일곱 개가 넘지만,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애착을 갖는 곳이 여기 산해루와 하선루 그리고 대왕루요. 매달 보름 그가 대왕루에서 업무를 본다는 건 서안에서 오래 산 사람이라면 상당수가 아는 사실이라오.”
“오, 과연 서안 토박이로군! 내가 사람을 잘 골랐네.”
위고릉이 칭찬하자 배송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쯤이야. 원한다면 두 분을 그곳까지 모셔다드릴 수도 있소. 대왕루는 이곳과 분위기가 많이 다른 데다 더 크고 웅장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할 거요.”
“그거 좋겠네. 자네 말을 들으니 꼭 대왕루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럼 가시겠소?”
“부탁하지.”
배송은 먼저 팔을 휘적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위고릉이 그 뒤를 따르려 하자 강패가 재빨리 다가와 전음으로 물었다.
-원래 이 산해루를 박살 내기로 하지 않았나?
-계획이 바뀌었네.
-왜 바뀐 건가?
-우리가 산해루로 온 건 철면호를 찾기 위해서였지. 그런데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산해루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는데도 철면호는커녕 그의 수하들조차 나서지 않았네.
강패는 그 말에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도 아무도 나와 보는 놈이 없군. 점원들도 모두 꽁꽁 숨어 버린 것 같고.
-철면호가 이곳에 있었든 그렇지 않든, 지금 없는 건 분명해 보이네. 그러니 배송이라는 놈의 말대로 대왕루를 뒤져 보는 게 순리 아니겠나? 위고릉의 말에 강패는 배송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며 다시 물었다.
-저놈을 얼마나 믿나?
위고릉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믿다니? 내가 누구를 믿을 사람인가?
-그럼 왜 저놈 말대로 움직이려 하나?
-일단 저놈이 서안 일대의 지리에 환하다는 건 사실 같으니 길 안내를 맡기기에 적당한 인물이지. 지금도 놈이 아니었다면 대왕루가 어디 붙어 있는지 한참을 찾아야 했을 걸세.
-확실히 그렇군. 그럼 철면호를 찾은 다음에는?
위고릉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보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섬뜩한 미소였다.
-필요 없어진 도구는 당연히 폐기해야 하지 않겠나? 더구나 약간 미심쩍은 부분도 있고 말이지.
-이제야 내가 아는 위 형 같구려. 그런데 미심쩍은 부분이라면?
-아직은 확실하지 않네. 그냥 나 혼자만의 노파심이라고 알고 있게
뭐, 그러지. 그나저나 저놈은 자기가 죽을 자리인 줄도 모르고 참 열심히도 가고 있구려.
강패는 산해루를 벗어나 저 앞에서 성큼성큼 걷고 있는 배송을 보며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