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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43화


군림천하 (943)

제384장 월과험관(越過險)

그 검은 너무도 갑작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날아왔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불쑥 나타난 그 검은 그야말로 사신의 손길 같았다.

노해광이 그 검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만약의 사태에 철저히 대비한 덕분이었다.

노해광은 위고릉의 말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순간부터 전신의 촉각을 곤두세우고 공력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무언가가 눈앞에 번뜩인다 싶은 순간, 그것의 정체를 파악할 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전력을 다해 옆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살인적인 검광은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공간을 가르고 지나갔다.

검광은 이내 사라졌지만, 노해광은 전신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 검광은 무섭도록 가공할 위력을 담고 있었다. 지금의 그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키가 껑충하게 크고 짙은 갈색 옷을 입은 산발의 괴인이었다.

괴인의 허리춤에는 유난히 검폭이 좁은 검이 검집도 없이 매어져 있었다.

노해광은 한눈에 그 검이 조금 전에 무시무시한 검광을 일으켰던 것임을 알아보았다.

산발 괴인의 걸음은 느릿느릿했으나, 장내의 누구도 그의 걸음이 느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산발 괴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장내의 이목을 집중시킨 산발 괴인은 노해광에게서 오 장쯤 떨어진 곳에 우뚝 섰다.

제법 먼 거리였으나, 노해광은 왠지 상대가 자신의 코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정도 거리면 괴인과 같은 검의 고수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산발 괴인이 무심한 시선으로 노해광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내뱉었다.

“마침내 만났군.”

“나를 아시오?”

“철면호. 서안을 막후에서 지배하는 최고 실력자이며 종남파 장문인인 신검무적의 사숙이지. 그리고 이제 곧 내 검에 스러져 갈 사람이기도 하고.”

산발 괴인의 음성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아 듣는 사람의 모골을 송연하게 할 만큼 차갑기 그지없었다.

하나 노해광은 두려워하는 빛도 없이 오히려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나를 알아봐 주다니 내가 확실히 출세를 하기는 한 모양이구려.”

이번에는 산발 괴인이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장성 너머에서 잠깐 활동한 적이 있는데, 그때 멀리서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지. 그때 당신은 정말 검(劍)의 신(神)처럼 대단한 존재로 보였는데…….”

노해광은 뒷말을 맺지 않았으나, 산발 괴인의 눈에서 차갑기 이를 데 없는 광망이 흘러나왔다.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단 말이로군.”

“예전에는 오르지 못할 것처럼 한없이 높아 보였던 산도 나이를 먹으면 쉽게 오를 수 있는 동네 언덕처럼 여겨지는 법이오.”

노해광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산발 괴인은 절대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낭아신검 채병익!

순수하게 검법으로만 따진다면 누구나 장성 일대에서 최고의 고수 중 하나로 인정하는 절세의 검객이었다.

노해광이 종남파를 떠나 장성 일대를 돌아다닐 때 이미 채병익은 중천에 떠 있는 해처럼 찬란한 명성을 구가하고 있었다.

당시 노해광은 거느린 자들도 대단치 않았고 본인의 명성도 보잘것없어서 채병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채병익과 대등한 위치에서 마주하고 있으니 어지간한 일로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노해광으로서도 마음 한구석에 야릇한 소회가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듣기로 당신은 화면신사에게 포섭되어 흑갈방에서 호법으로 행세하고 있다고 했는데, 언제 소마의 수하로 들어간 거요?”

노해광의 물음에 채병익은 무심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나에 대해서 제법 상세히 알고 있군. 흑갈방에 들어가기 전부터 나는 신(辛) 대형을 모시고 있었네.”

채병익이 흑갈방의 호법이 된 것은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화면신사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이름을 빌려주었기 때문이다. 흑갈방에서 호법의 지위를 인정받기는 했어도 실제로 채병익이 흑갈방 소속으로 활동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나저나 내가 이곳에 있는 건 어찌 알았소? 나름대로는 모습을 감춘다고 제법 신경을 썼는데.”

노해광은 채병익이 용사혈의 미로처럼 복잡하게 엉클어진 골목길에서 정확히 자신이 있는 곳을 찾아온 것이 못내 신기한 모양이었다.

“알고 보면 별것 아니야. 나는 아까부터 두 사람의 뒤를 따르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이 골목길이 너무 복잡해서 잠시 그들의 행적을 잃었는데, 담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찾아올 수 있었지.”

채병익의 말마따나 속사정을 알고 나니 그들이 무슨 특별한 방책을 썼거나 노해광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위고릉과 강패를 먼저 보내 노해광을 찾게 하고 채병익으로 하여금 그들을 뒤따라 혹시라도 그들이 함정에 빠지거나 잘못된 경우를 대비했던 것이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쉽고 간단한 방법이었으나, 그 때문에 노해광이 정교하게 짜 놓은 함정은 자칫 무용지물이 될 뻔했고 노해광은 그의 검에 노출되는 위기에 처했으니 정말 세상일이란 모를 일이었다.

계획이 어긋나고 오히려 채병익에게 위협받게 된 상황임에도 노해광은 당황하지 않고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당신이 검을 쥐고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두려워했을지도 모르겠소. 하나 지금은 아니오. 더 이상 당신은 나를 두렵게 할 수 없소.”

채병익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저 없이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강호의 일은 입이 아닌 손으로 해결하는 법이지. 조금 후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한번 보세.”

채병익이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노해광에게 달려든 것은 장내의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위고릉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도 계속 옆구리를 만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상이 상당히 심각함을 알 수 있었다.

그를 습격한 자는 우람한 체구의 중년인이었는데, 지금도 호시탐탐 그의 빈틈을 노리고 있는 모습이 조만간 다시 손을 쓸 것이 분명해 보였다. 강패의 상황도 좋지 못했다. 그는 삼십 대로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장한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 처음에 선수를 빼앗긴 뒤로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하고 계속 조금씩 수세에 몰렸다.

채병익은 노해광이 또다른 술수를 부리기 전에 우선 그를 처리하고 위고릉과 강패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일단 손을 쓰자 채병익의 검은 무섭도록 빠르고 날카로웠다.

쉬악!

노해광은 그가 검을 뽑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시퍼런 검광이 자신의 정면을 휩쓸듯 쏘아져 오는 것을 알았다.

눈앞의 시야가 온통 검광에 가려져 버린 듯했다.

하나 사실을 알고 보면 채병익은 단지 일 검을 날린 것뿐이었다. 단지 그 검이 너무도 압도적인 기세로 날아들었기에 노해광의 눈에는 마치 사방이 온통 검광으로 뒤덮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노해광은 자신의 실력으로는 채병익을 당해 낼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위치가 채병익과 나란히 설 정도로 올라서기는 했으나, 무공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사안이었다.

그래서 채병익이 공격할 기세를 보인 그 즉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로 훌쩍 몸을 날렸다.

“아쉽게도 당신 상대는 내가 아니오.”

그와 함께 무너지지 않은 근처의 담벼락 위에서 하나의 검광이 튀어나왔다.

땅!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이 터져 나오며 세찬 경기가 장내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금시라도 노해광을 베어 버릴 듯한 기세로 달려들었던 채병익은 한차례 몸을 휘청거리다가 검광이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사이엔가 한 사람이 담벼락 위에 우뚝 서 있었다.

청삼을 입은 준수한 용모의 중년인이었다.

채병익은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한 기상의 청삼 중년인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또 다른 수를 숨겨 놓았을 것 같았지. 당신은 누구요?”

청삼 중년인이 표홀한 동작으로 담벼락 아래로 내려와 그를 향해 마주섰다.

“나는 성락중이란 사람이오.”

채병익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바로 무당산에서 비응검을 물리친 사람이군.”

“운이 좋았소.”

“그 운이 오늘도 통용되는지 한번 봅시다.”

채병익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는 수중의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성락중은 그 모습만 보아도 채병익이 어떠한 인간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검을 들고 싸우기로 마음먹은 이상 무슨 말을 주고받든 하등 불필요한 일이다. 쓰러뜨려야 할 적이 눈앞에 있다면 불문곡직하고 쓰러뜨려야 한다.

그것이 평생 장성 너머의 거친 세계를 살아온 채병익의 신념이었다.

성락중 또한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기에 주저하지 않고 검을 들어 맞서 갔다.

채병익의 검은 직선적이고 날카로웠다. 낭아신검이라는 별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검은 늑대의 이빨처럼 매서웠고, 상대의 허점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반면에, 성락중의 검은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했다. 그의 검은 변화무쌍했으며, 화려함 속에 무거운 힘을 담고 있었다.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사람의 검이 마주치자 강호에서도 좀처럼 보기 드문 검투(劍鬪)가 벌어졌다.

얼핏 보기에는 그다지 격렬하지 않은 것 같았으나, 안목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그들이 펼치는 일 검, 일 검에 얼마나 무섭고 살벌한 위력이 담겨 있는지를 알아차리고 전율하고 말았을 것이다.

노해광은 두 눈을 부릅뜨고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았으나, 누가 더 우세한지를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 또 다른 사람이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났다.

노해광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어떻게 되었느냐?”

나타난 사람이 나직하면서도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소마는 이곳에 오지 않았습니다.”

“확실한 거냐?”

“적어도 용사혈 일대에서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형의 짐작대로 소마는 필요한 인원만 보냈을 뿐 자신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나타난 사람은 마정기였다.

마정기는 노해광의 지시로 흑선방의 인물들과 함께 용사혈 일대에 보이지 않는 치밀한 그물망을 쳐 놓고 출입하는 모두를 은밀히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수고했다. 언제 소마가 이상함을 느끼고 이곳으로 올지 모르니 계속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마정기가 인사를 하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노해광은 성락중과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는 채병익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당신보다는 내 운이 더 좋은 것 같소. 오늘이 확실히 나에게는 길일인 모양이군.”

채병익과 성락중이 싸움을 시작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위고릉도 습격자와 다시 치열한 격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를 습격한 사람은 흑선방의 방주인 최동이었다. 최동의 무공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위고릉보다 몇 수 아래였으나, 위고릉이 옆구리의 부상 때문에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서인지 그런대로 대등한 싸움을 벌여 나가고 있었다.

위고릉은 주위의 상황이 좋지 않음을 깨닫고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원래 그들의 계획은 머리 역할을 하는 노해광을 제거하고, 서안에 나와 있는 종남파의 고수들을 쓰러뜨린 다음, 상황을 봐서 최후에는 종남파의 본산까지 공격하는 것이었다.

당금 무림에 퍼져 있는 평판에 따라 종남파의 위상을 생각해 본다면 무리한 계획이라는 의견도 있었으나, 제자들의 죽음에 분노한 소마의 마음을 돌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위고릉 또한 노해광이 아무리 서안의 실력자라고 해도 자신과 강패라면 충분히 상대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함정에 빠져 노해광을 제거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니 실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비장의 한 수로 생각했던 채병익까지 등장했음에도 사태를 반전시키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위고릉은 옆구리의 통증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느끼고 더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무언가 수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최동의 오른 주먹이 강맹한 위력을 띤 채 위고릉의 가슴팍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언뜻 보기에도 빠르고 무거운 힘을 지닌 강력한 공격이었으나, 위고릉은 오히려 눈을 빛냈다.

빠르고 위력적이긴 했으나 그만큼 변화가 단조로워서 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나 단순히 피하기만 해서는 지금의 상황을 반복하게 될 뿐이었다.

‘여기서 승부를 본다!’

위고릉은 마음을 굳히고 최동의 주먹을 피하지 않고 오른팔의 팔꿈치를 휘둘러 정면으로 맞서 갔다. 그 와중에 부러진 갈비뼈를 보호하듯 안고 있던 왼팔을 슬쩍 구부렸다.

팔뚝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의 왼손 손가락은 특이한 형상으로 모여 있었다.

그것은 칠왕격 중에서도 가장 위력적인 탄혈조(彈血)의 기수식이었다. 위고릉은 환철주의 일 식으로 최대한 최동의 주먹을 막고 그 반동을 이용해 탄혈조로 최동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 한 것이다.

비록 그 때문에 옆구리의 상처는 더욱 심해지겠지만, 기습적인 탄혈조의 공격이라면 최동의 머리통을 박살 내 버릴 것이라고 위고릉은 자신했다.

한데 두 사람의 주먹과 팔꿈치가 충돌하기 직전이었다.

그들의 바로 옆에 있는 돌무더기에서 난데없이 하나의 인영이 쏜살같이 튀어나와 위고릉의 옆으로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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