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44화
군림천하 (944)
그것은 전혀 예상도 못 했던 상황인지라 위고릉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그 인영의 공격이 그의 옆구리에 거의 도달한 상태였다.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그 인영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검이 위고릉의 옆구리를 그대로 뚫고 들어왔다.
쾅!
“크윽!”
“으음!”
굉음과 비명, 신음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최동은 그나마 멀쩡했던 오른 주먹도 부러지고 탄혈조에 어깨를 가격당해 상반신을 구부린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최후의 순간에 최대한 고개를 비틀어 머리가 박살 나는 참변은 면했으나, 대신에 그의 어깨뼈는 완전히 으스러지고 말았다.
그에 비해 위고릉의 상태는 겉으로 보아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최동의 일권파황을 정면으로 마주쳤음에도 팔꿈치가 조금 까진 것 외에 특별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하나 그의 옆구리에 하나의 날카로운 장검이 꽂혀 반대편 옆구리까지 뚫고 나가 있었다.
위고릉은 억지로 고개를 돌려 장검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이십 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청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위고릉은 청년의 냉정해 보이는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누구냐?”
“흑선방의 강표라 하오.”
“흑선방…
・・・・・・ 그래, 철면호가 부리고 있다는 흑도 문파의 이름이 흑선방이었지. 그럼 저자는?”
“본 방의 방주이시오.”
“그래, 그렇군. 결국 철면호도 아니고 그가 부리는 자들도 당해 내지 못한 거였어.”
위고릉은 핏물이 흘러나오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몸을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흥안령과 대막을 종횡으로 휩쓸고 다니던 인물답지 않은 허무한 최후였다.
강표는 위고릉의 옆구리를 관통한 장검을 뽑았다.
위고릉의 몸이 맥없이 허물어지는 광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그가 생각난 듯 황급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최동에게로 다가갔다.
“방주님, 괜찮으십니까?”
최동은 고통을 억누르느라 전신에 가는 경련이 일고 있는데도 얼굴은 전혀 일그러지지 않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양손이 모두 못쓰게 되어 당분간은 쉬어야겠다.”
강표가 그의 양손과 뼈가 으스러져 주저앉은 어깨를 번갈아 살펴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번에는 정말 지독하게 당하셨군요. 방주님이 이렇게 심하게 다치신 걸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숨은 붙어 있지 않느냐? 흑도에게 이 이상을 바라는 건 사치지.”
“솔직히 이번 상대는 우리가 상대하기에 너무 강했습니다.”
최동도 그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확실히 위고릉은 흑선방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하나 노해광이 파 놓은 완벽한 함정과 최동 자신이 몸을 불사르면서까지 감행한 효과적인 암습, 그리고 시기적절한 강표의 살수로 대어를 낚을 수 있었다.
강표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한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쪽도 끝나가는군요.”
최동은 그가 가리키는 곳을 힐끔 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지(死地)로 몰아넣고 선수를 잡은 이상, 결과는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생각보다 오래 걸린 걸 보니 강패의 실력이 예상보다 뛰어났던 것 같군.”
마침 그들이 보고 있는 동안에 강패가 목덜미를 움켜잡은 채 허탈한 표정으로 쓰러졌다.
강패로서는 그런 표정을 지을 만했다.
그는 처음 습격을 받을 때부터 단 한 번도 승기를 잡거나 반격하지 못하고 계속 수세에 몰리다 결국 목에 일 검을 맞고 말았다.
그의 무공이 상대보다 약해서 그렇게 된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제대로 된 장소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면 상대는 그의 손에서 백 초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강패가 일방적으로 몰리다가 쓰러진 것은 그가 암습을 당한 장소가 너무 안 좋았을 뿐 아니라 상대의 교묘한 수법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강패는 노해광의 뒤에 바짝 붙어서 따르다가 담벼락이 무너지는 순간에는 골목길이 꺾이는 모서리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담벼락이 무너지고 노해광이 교묘하게 몸을 숨기자 강패는 무심결에 뒤로 한 걸음 물러섰는데, 그 자리가 바로 노해광이 심혈을 기울여 마련해 놓은 사지(死地) 중의 사지였다.
다른 곳과는 달리 골목이 꺾이는 모서리였기에 담벼락이 세 군데에서 무너져 내렸는데, 무너진 담벼락의 조각들이 쌓여 교묘하게 절진(絶陣)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것은 삼원미리진(三元迷理陣)이라는 것으로, 상대를 가두거나 목숨을 위협하는 위력은 없었다. 대신에 상대의 눈과 귀를 어지럽혀 제대로 주위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게 만드는 절진이었다.
위력 자체도 그리 뛰어나다고 할 수 없고, 효과 또한 상대를 잠깐 곤란하게 만드는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강호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하나 특정한 상황에서 한 사람을 곤란하게 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무너진 담벼락과 먼지 사이에서 난데없이 날아든 암습에 정신이 팔린 강패는 자연스레 삼원미리진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고, 심지어 쓰러질 때까지도 자신이 진법에 갇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단순히 담벼락이 무너져 잔해가 여기저기 쌓여 있다고만 생각했지, 그것들이 합쳐서 하나의 교묘한 진법을 이루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 진법 속에 몸을 숨긴 사람은 삼묘 중 하나인 초희의 오빠 초력이었다.
초력은 강호에서 독초응이란 별호로 활동하던 고수로, 오랫동안 청부 살인을 해 와서 살검(殺劍)에 관한 한은 노해광도 한 수 접어주는 무서운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담벼락이 무너지고 삼원미리진에 빠져 버린 강패는 절진의 사각에서 날아드는 초력의 공세에 쩔쩔매게 되었고, 결국 제대로 실력 발휘도 해 보지 못하고 그의 검에 목이 뚫리고 만 것이다.
위고릉과 채병익도 강패가 정체 모를 장한에게 몰려 수세에 처해 있는 광경을 보았으나, 그 정확한 이유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이 진법에 별다른 조예가 없었을 뿐 아니라 삼원미리진이 워낙 알려지지 않아서 겉으로 보아서는 단순히 돌 더미가 쌓여 있는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위고릉과 채병익은 강패가 곧 정신을 차리고 수세에서 벗어나리라고 기대했겠지만, 강패는 끝까지 일방적으로 몰리다가 초력의 검에 쓰러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흥안령 일대를 휩쓸고 다니던 두 명의 절정 고수가 목숨을 잃어버렸다.
어찌 보면 너무나 허무한 죽음 같았지만, 그들을 쓰러뜨리기까지 노해광과 그의 수하들이 세워 놓은 정교한 계획과 투여한 수고를 생각해 본다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노해광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커다란 능선 하나를 넘게 되었다.
아직 채병익과 성락중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으나, 노해광은 성락중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기에 그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아무리 채병익이 장성 일대에서 최고의 검객으로 인정받았다고 해도 형산파의 오결검객들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성락중은 그 오결검객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비응검 사공표를 격파한 인물인 것이다.
그뿐 아니라 얼마 전에 성락중의 손에 패한 원당 대사는 채병익와 비슷한 수준의 고수였다.
이런저런 상황을 신중히 검토해 본 노해광이 채병익을 상대할 인물로 성락중을 선택한 것은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니었다.
그 바람에, 내심 자신이 활약할 무대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던 낙일방은 지금도 서안의 중심부에서 혹시 모를 소마의 발호를 저지할 임무를 받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노해광의 예상대로 채병익과 성락중의 결전은 이백 초 가까이 흐른 다음에 판가름이 났다.
채병익은 자신의 가슴을 예리하게 가르고 지나간 성락중의 검 끝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무심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의 검은 신검무적에 비하면 어느 정도인가?”
성락중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감히 비할 수 없소.”
채병익이 다시 물었다.
“나라면…… 나 정도면 신검무적과 겨루어 얼마나 버텼을 것 같은가?”
성락중은 침음하다가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당신의 검은 굳이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을 만큼 훌륭했소.”
채병익이 고개를 저으며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런 입에 발린 말 말고・・・・・・ 내가 신검무적을 상대로 백초지적(百招之敵)은 되겠는가?”
“당신은 내가 상대한 인물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검객이었소.”
채병익의 신형이 한차례 휘청거렸다. 하나 채병익은 몸을 꼿꼿하게 세우며 집요하게 물었다.
“말해 주게, 내가 신검무적의 손에서 몇 초나 버텼을 것 같은가?”
성락중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채병익은 확연히 느낄 수 있을 만큼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고,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하반신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간절한 눈으로 성락중을 응시하며 물었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 온 것이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한 것뿐이네. 그러니 말해 주게, 나는・・・・・・ 어느 수준의 고수였는가?”
성락중은 핏기를 잃어 가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라면 장문인과 좋은 승부를 했을 것이오.”
채병익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복잡함이 가득 담긴 웃음이었다.
“그렇지? 아무리 신검무적이라도 내 검이라면 한 번쯤 승부를 겨뤄 볼 만했겠지?”
성락중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마친 채병익의 몸이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져 버렸기 때문이다.
성락중은 차갑게 식어 가는 그의 시신으로 다가가 아직도 뜨여 있는 눈을 감겨 주었다.
그에게 다가오던 노해광이 이 광경을 보았는지 가볍게 혀를 찼다.
“사제는 예전부터 잔정이 너무 많았지. 나이를 먹고 강호의 거친 공기를 쐬다 보면 달라질 줄 알았건만 그 성정은 여전하군그래.”
성락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존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소. 나와 싸울 때 불리함을 느꼈으면서도 단 한 번도 비겁한 공격을 하거나 암수를 쓰지 않았소.
노해광은 그런 정당한 승부 따윈 개에게나 줘버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성락중의 표정이 워낙 진지해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았네. 그의 시신은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 주도록 하지.”
“부탁하겠소.”
노해광은 느긋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일이 잘 마무리되어 큰 피해 없이 소마의 수하들을 제거할 수 있었군. 이제 한 명만 남게 되었으니, 커다란 고비 하나만 남은 셈이네.”
“한 명만이라고 하기에는 소마라는 이름이 너무 무겁지 않소?”
“물론 그렇지. 하지만 생각해 보게.”
노해광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유난히 번쩍거렸다.
“우리는 그동안 크고 작은 무수한 고비들을 때로는 넘고 때로는 돌파하며 여기까지 왔네. 소마라는 산이 비록 높고 험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헤쳐 온 길을 생각한다면 넘지 못할 것도 없지 않겠나?”
성락중은 다부진 음성으로 말하는 노해광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오. 그럼 사형께선 앞으로 어떻게 소마를 상대하실 생각이오?”
“수하들을 모두 잃어버린 소마가 선택할 길은 그리 많지 않네. 나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거라고 보네.
“그게 무엇이오?”
“하나는 우리를 각개격파하기 위해 암습하는 것이네.”
성락중의 준수한 이마가 찌푸려졌다.
“우내사마의 최고라는 소마가 설마 그런 짓을 하겠소?”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하지 않나? 소마의 제자들을 떠올려 보면 소마의 성정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걸세. 소마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체면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기꺼이 살수행(行)을 저지르고도 남을 인물일 게 분명하네.”
성락중은 상상만으로도 걱정이 되는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너무도 무서운 일이 될 거요. 언제 어디서 살수를 쓸지 모르는 소마를 막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테니 말이오.”
노해광은 전혀 표정이 달라지지 않은 채 말을 계속했다.
“그래도 그건 두 번째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것일세.”
성락중이 흠칫 놀랐다.
“그보다 더 두려운 일이 있단 말이오?”
“그렇네.”
“그게 무엇이오? 나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는구려.”
“바로 본산을 공격하는 것일세.”
노해광의 말에 성락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소마가 본산으로 직접 쳐들어갈 수도 있단 말이오?”
“이미 제자들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동고동락했던 수하들을 모두 잃은 소마일세. 눈이 뒤집힌 그가 못 할 짓이 어디 있겠나?”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정말 큰일 아니오? 본산에 있는 사람들만으로는 소마를 감당하기 힘들 거요.”
종남파의 본산에는 소지산과 전풍개를 비롯한 고수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 하나 전풍개는 오랫동안 부상에 시달려 본신의 무공이 많이 떨어져 있었고, 소지산 또한 화산파와의 회람연에서 입은 부상이 완전히 낫지 않아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니었다.
그들 외에 쓸 만한 고수라면 방취아와 우문화룡 정도인데, 그들만으로 우내사마의 일인자를 상대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소마가 어디에서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본산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자칫하면 전력이 분산되어 뜻밖의 낭패를 당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성락중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해광은 여전히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아무도 모르네. 그러니 우리는 그가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네.”
성락중은 노해광의 말에 숨은 뜻이 있음을 짐작하고 다시 물었다.
“어떻게 말이오?”
“두 가지 중 어느 쪽을 선택해도 우리에게는 극도로 불리한 일 아닌가? 그러니 그가 제삼(第三)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