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48화
군림천하 (948)
제386장 마인마공(魔人魔功)
서안의 아침은 청명했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약간 후덥지근했다.
노해광은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기지개를 켰다. 하나 왠지 개운하기보다는 뻐근한 느낌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오늘은 유달리 긴 하루가 될 것 같군. 모쪼록 흉(凶)보다는 길(吉)이 더 많아야 할 텐데.”
걱정인지 소원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린 노해광은 이내 방의 한쪽에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딸랑!
방울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벌써 기침하셨습니까?”
들어온 사람은 정해였다.
노해광은 오늘따라 눈이 퀭하고 얼굴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정해를 보고 피식 웃었다.
“네놈이야말로 밤새 잠 한숨 안 자고 있다가 나온 것 같구나. 부르자마자 바로 들어오다니 지금까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냐?”
정해가 멋쩍게 웃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네놈 몰골을 보고도 모른다면 눈이 삔 거겠지.”
“자려고 누워서 이것저것 궁리하다 보니 어느새 아침 해가 뜨더군요. 기왕 그렇게 된 거, 계속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것도 이상해서 그냥 일어나 버렸습니다.”
“오늘같이 중요한 날에 밤을 꼬박 새우다니, 나중에 꾸벅꾸벅 졸기라도 할 셈이냐?”
정해는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그럴 리 있습니까? 이삼일 정도는 잠을 자지 않더라도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노해광도 정해가 그런 걸로 일을 그르칠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계속 농을 던졌다.
“만약 눈이라도 감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네놈의 머리털을 뽑아 버리겠다.”
“아이고, 그럴 일 없다니까요. 사숙께선 그렇게도 저를 못 믿으십니까?”
정해가 펄쩍펄쩍 뛰자 노해광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을 믿어 달라고 외치는 놈들 중에서 정말 믿을 만한 놈은 별로 없는 법이지. 아무튼 준비는 잘했느냐?”
“예, 제가 몇 번이나 직접 확인했습니다.”
정해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하자 노해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잠시 후에 한 번 더 검토해 보도록 하자.”
정해의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또 검토해 본다고요? 어제 무려 다섯 번이나 했는데 말입니까?”
“그럼 앞으로 두 번만 더하면 되겠구나.”
“아이고.”
정해가 죽는시늉을 했으나, 그래도 끝까지 못 한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만큼 이번 일이 한 치의 착오도 용납할 수 없는 중요한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용사혈의 마무리도 잘했겠지?”
“예, 그 지역을 담당하는 관원들에게 사례도 충분히 했고, 길도 최대한 원래대로 복구시켰습니다. 겉으로 보아서는 누구도 그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겁니다.”
“산해루에서 강패에게 죽은 사람들은?”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뜨내기손님들이라 집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종적이 밝혀진 사람들의 집에만 장례비 조로 얼마의 금액을 지불했습니다. 그 외에 다친 사람들이 모두 열두 명인데, 섭섭지 않게 보상했으니 뒷말이 나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잘했다. 그 짧은 사이에 많이도 죽고 다쳤구나. 죽일 놈 같으니라고!”
노해광이 이미 죽은 강패를 욕하며 이를 갈자, 정해는 어찌 대꾸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노해광은 한참 동안 강패를 이리저리 씹다가 돌연 정색을 했다.
“장문인의 소식은 들어온 것이 없느냐?”
정해는 어제도 노해광이 비슷한 질문을 한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에 속으로 웃음이 나왔으나 겉으로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알아보라고 할까요?”
노해광은 씁쓸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다. 소마를 상대할 생각을 하니 안정이 되질 않아서 장문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게 되는구나. 어차피 소마는 우리가 상대해야 할 일, 장문인은 잠시 잊도록 하자꾸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해는 그가 내일 아침이 되면 다시 또 장문인의 소식을 물으리라는 것에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노해광뿐 아니라 종남파의 모든 제자들이 진산월 일행의 무사 귀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단순히 소마라는 강적이 그들을 노리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함께 강호행을 떠난 사람들은 모두 돌아왔는데, 진산월과 몇 명만이 오지 않았으니 그들의 안위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진산월은 종남파를 지탱하는 기둥일 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의 정신적인 지주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노해광은 물론이고 사문의 최고 어른인 전풍개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그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돌아오십시오, 장문 사형. 와서 우리 종남이 얼마나 잘 뿌리내리고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는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란 말입니다.’
정해는 진산월이 돌아왔을 때 더욱 떳떳할 수 있도록 이번 소마와의 싸움도 무사히 넘길 수 있기를 정말 간절히 바랐다.
그런 의미에서 노해광이 지시한 두 번의 검토는 오히려 부족한 것 같았다.
정해는 세 번을 더 검토해서 모두 열 번을 채우리라고 결심했다.
정해가 노해광의 방에서 아침 일과를 시작한 사이, 낙일방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내뻗었던 손을 거두며 깊은 심호흡을 했다.
진기가 막힘없이 전신의 경맥을 거대한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고, 근육은 적당히 긴장되어 금강동인이라도 부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신에서 흐르는 땀이 오히려 상쾌하게 느껴졌다.
“흐음………… 휴우!”
낙일방은 다시 한차례 깊이 호흡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것으로 아침의 연공(練功)을 끝냈다.
남들이 다 잠을 자는 새벽에 일어나 한 시진 동안 무공을 수련하는 것은 종남산의 이름 모를 고동을 나온 후로 생긴 낙일방만의 습관이었다. 해조림 사조가 죽기 직전에 소선 우일기의 절학을 건네준 장면을 상기할 때마다 낙일방은 당시의 기억과 각오를 거듭거듭 되새겼다. 새벽 연공은 그런 각오를 다지는 그만의 소소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연공을 마치고 나면 유난히 정신이 맑아지고 몸속에서 새로운 투지가 샘물처럼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다.
‘좋아, 상태는 완벽하다.’
낙일방은 무당산에서 벌어진 악산대전에서 용선생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은 후에도 적지 않은 고수들과 격전을 계속 벌여 와서 몸에 크고 작은 부상이 기록처럼 새겨졌다.
하나 거듭된 연공과 치료로 이제는 부상도 거의 회복되고 전신에 진기가 충만해서 어떤 강적을 만나더라도 능히 겨루어 볼 만한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몸 상태가 좋은 것은 용선생과의 대전을 앞둔 날 아침 이후 처음이었다.
그날도 전신에 기운이 가득했고 기분도 상쾌해서 형산파에서 누가 나오더라도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용선생이 나와서…….’
낙일방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하고많은 상대 중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용선생과 싸우게 될 줄은 정녕 상상도 못 했었다.
그때 낙일방은 정말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낙일방은 지금도 가끔 그날의 꿈을 꾸곤 했다. 그리고 전신이 흠뻑 젖은 채 꿈에서 깨어나면 밤새도록 미친 사람처럼 무공을 수련했다.
그날 낙일방이 용선생을 꺾었다면 전체적인 승패는 같더라도 여러 가지가 달라졌을 것이다.
최소한 임영옥이 성치 않은 몸으로 무리하게 나서는 일은 없었으리라・・・・・・
낙일방은 지금도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던 임영옥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당시의 패배가 사무쳐서 미치도록 고통스러웠다.
더구나 종남파로 돌아오는 와중에 뜻밖의 습격으로 그녀의 행방마저 오리무중이 되고 말았으니, 나중에 장문 사형을 어떻게 대할지 두렵기조차 했다.
‘사저, 잘 있는 거죠? 어디에 있든 무사하기만 해 주세요. 장문 사형이 반드시 사저를 찾아낼 겁니다.’
낙일방은 허공을 올려다보며 간절한 소망을 빌었다. 임영옥이 제발 무사하기를, 장문 사형이 그녀를 데려올 수 있기를, 그리고 그 두 남녀가 행복하게 되기를 정말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낙일방은 소마가 두렵지 않았다.
‘누구도 본 파를 위협할 수 없다. 장문 사형이 돌아올 때까지 본 파의 기왓장 하나도 부수게 내버려두지 않겠다.’
낙일방은 결연한 각오를 다지며 옷을 차려입고 방을 벗어났다.
화창한 날씨였다.
낙일방은 푸른 하늘을 지고 떠 있는 햇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꼭 그날의 아침 같군.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소마든, 소마의 할아버지든 본 파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침부터 기백이 대단하군. 소마도 겁을 좀 먹겠는걸.”
낙일방은 나타난 사람을 보자 황급히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성 사숙의 눈을 어지럽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나타난 사람은 성락중이었다.
성락중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오히려 자네의 패기만만한 모습을 보니 무거웠던 마음이 걷히며 힘이 나는군.”
낙일방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오늘 소마가 나타난다면 제게 양보해 주시는 겁니까?”
성락중은 우내사마의 일인자로 누구나 두려워 마지않는 소마를 시정잡배 말하듯 하는 낙일방이 신기한지 그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낙일방은 준수한 얼굴에 한 점의 거리낌이나 어색함 없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낙일방은 제대로 된 고수들과 싸운 적이 별로 없었다. 원당과의 싸움에도 성락중이 나섰고, 채병익 또한 성락중의 손에 쓰러졌다. 그제야 성락중은 낙일방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고 고소를 머금고 말았다.
‘이제 보니 두 번이나 자기 대신 내가 나갔다고 불만이 쌓인 모양이구나.’
성락중은 그런 낙일방이 귀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해서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알았네. 오늘은 자네에게 맡기지.”
낙일방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사숙.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소마가 오늘 오지 않는다면?”
“예?”
낙일방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자 성락중은 짐짓 정색을 해 보였다.
“그가 내일 온다면 내가 상대할 걸세. 설마 언제까지고 자네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낙일방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성락중의 말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지 난처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저………… 그래도 소마는 제가 상대하는 것이………….”
“오늘은 자네가, 내일은 내가 첫 번째 순서일세. 정해진 순번을 어기지 말게.”
성락중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진지한 얼굴로 낙일방을 응시했다.
낙일방은 한동안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우연히라도 만나게 되면………….”
“그거야 불가항력적인 일이니 어쩔 수 없지. 왜, 소마를 찾아 이 넓은 장안성 일대를 뒤지고 다니기라도 할 생각인가?”
“아닙니다. 제가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할 리가 없지요.”
어색하게 웃는 낙일방을 보고 성락중은 그가 잠깐이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