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49화
군림천하 (949)
“그런데 무슨 일로 아침부터 저를 찾아오셨는지요?”
낙일방의 질문에 성락중은 자신의 이마를 탁 쳤다.
“내 정신 좀 보게. 정작 찾아온 용건을 말하지 않았군.”
성락중은 장난기 가득했던 모습을 지우고 본연의 진중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사실은 한 가지 상의할 일이 있어서 자네를 보고자 했네.”
낙일방은 평소 누구보다 예의 바르고 침착한 성락중이 아침부터 찾아와 상의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 무언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말씀하십시오, 사숙.”
그가 공손히 경청할 준비가 되었다는 자세를 취하자 성락중은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네.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 말일세.”
“알겠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일전에 소마의 제자와 싸운 적이 있지 않나?”
“야월각에서 말이군요.”
“그렇네. 그때 나는 소마의 둘째 제자인 도인수를 상대했고, 자네는 첫째인 적화승과 싸웠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닌지라 낙일방도 당시의 일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과의 싸움은 상당히 치열한 격전이었는데, 낙일방은 살벌하기 그지없는 근접 박투 끝에 간신히 적화승을 격살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성락중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도인수를 검으로 쓰러뜨렸었다.
적화승과의 치열한 싸움을 떠올리자 낙일방의 눈가가 자신도 모르게 살짝 찌푸려졌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만만치 않은 상대였습니다. 저의 유인책에 그자가 걸려들지 않았다면 누가 이겼을지 장담할 수 없군요. 어쩌면 승부를 가르지 못해 지금까지 싸우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성락중은 다분히 엄살 섞인 그의 말에 담담하게 웃었다.
“하하. 그런 것치고는 별다른 부상도 입지 않고 멋지게 해치우지 않았나?”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운만으로 소마의 첫째 제자를 이길 수는 없지. 아무튼 당시의 싸움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싶어서 자네를 찾아온 것일세.”
“그자는 이미 땅속에 묻혀 버렸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낙일방이 의아한 듯 묻자, 성락중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적화승은 소마의 무공을 가장 많이 이어받은 자라고 할 수 있네. 그래서 그와 싸운 당시의 상황을 잘 검토해 보면 소마의 무공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낙일방의 눈이 커지며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사숙의 고견이 옳습니다. 저는 그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소마를 어찌 상대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문득 그의 제자들과 싸운 것이 그에 대한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네.”
“확실히 그럴 수 있겠습니다.”
낙일방은 잠시 기억을 되짚어 보고는 그때의 일을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낙일방이 자신이 겪은 적화승의 무공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이야기하자 성락중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적화승의 무공은 전신의 모든 부위를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손가락과 손목, 팔꿈치 등 상반신은 물론이고 두 다리와 무릎까지 적절하게 사용하는 바람에 상대하기 무척이나 까다로웠습니다. 그중에서도 어깨를 이용한 공격은 너무나 변칙적이어서 저도 큰 낭패를 당할 뻔했습니다.”
“그게 바로 말로만 듣던 소마의 그 유명한 육대무예일세. 달리 육투예라고도 한다지.”
“육투예! 저도 얼핏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만, 막상 싸우면서도 그게 육투예일 거라고는 짐작도 못 했습니다. 다만 모든 공격이 하나같이 예상을 벗어난 각도에서 날아들 뿐 아니라, 자신의 안전을 도외시한 채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 같아서 사람 잡아먹기 딱 좋은 무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이든 자신이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쓰러뜨리고야 말겠다는 살의 같은 게 느껴져서 말이지요.”
“잘 보았네. 그게 바로 소마의 무공에서 가장 무서운 점이지.”
육투예는 소마가 직접 창안한 무공이었다.
육투예는 박투술로는 가히 최고봉에 올라 있는 절학 중의 절학으로, 소마가 육투예를 펼치면 누구도 그의 손에서 십 초를 넘기지 못했다.
소마의 수하인 위고릉이 소마가 펼치는 육투예를 보고 영감을 얻어 칠왕격이라는 무공을 만든 것은 흥안령 일대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였다. 낙일방은 육투예도 육투예지만 소마라는 인물 자체에 더욱 관심이 들었다.
대체 어떤 심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토록 살벌하고 잔인하며 일견 무모하기까지 한 무공을 만들어 낸 것일까?
그러한 사람과 직접 손을 마주 대고 싸운다면 그건 과연 어떤 기분일까?
낙일방은 살심으로 가득 찬 희대의 살성과 서로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육체와 육체로 맞닥뜨린다는 상상을 하자 절로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것은 무인으로서의 호승심이기도 했고, 찰나의 승부로 생사를 가르는 승부사의 심정이기도 했다.
한동안 말 못할 흥분에 휩싸여 있던 낙일방은 문득 자신이 사숙과 대화 중이라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성락중은 그런 낙일방의 변화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지나친 호승심과 승부욕으로 아예 평정을 잃어버릴 줄 알았더니 의외로 빨리 안정을 되찾는군. 확실히 하루가 다르게 심신이 발전하고 있구나.’
성락중은 이제 겨우 약관에 불과한 사질의 그런 모습이 한없이 대견하면서 자랑스러웠다.
그의 나이와 충직한 성격, 그리고 무공에 대한 재질과 높은 성취도로 보아 이대로 조금만 더 성장하면 장문인 못지않은 문파의 주축이 될게 분명했다.
‘어쩌면 이미 그런 경지에 올라 있는지도 모르겠군.’
성락중은 관옥같이 준수한 얼굴에 신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낙일방을 바라보며 절로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낙일방은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성락중을 의아한 듯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숙께서 상대하신 도인수의 무공은 어땠습니까?”
“도인수는 적화승에 비할 수 없는 인물일세. 그래서인지 낫 모양의 기병(奇兵)을 사용했는데, 모자란 실력을 병기의 기이함으로 보완하려 했던 것 같네. 하지만 보법만큼은 상당히 뛰어나더군. 아마 소마에게 제대로 배운 건 보법 하나인 것 같았네.”
낙일방은 성락중이 칭찬하는 도인수의 보법에 호기심이 일었다.
“어떤 보법이기에 그러십니까?”
“발이 아닌 어깨의 움직임을 이용해 이동하는 방식이었네. 무척 특이하고 그 궤적 또한 일반적인 것과는 많이 달라서 쉽사리 대응하기 힘들었네.”
낙일방이 혀를 내둘렀다.
“어깨를 이용하는 보법이라니. 상상도 안 가는군요.”
“소마의 성명절기 중 마귀보라는 게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닐까 싶네. 도인수가 사용한 보법은 두 가지뿐이었는데, 그래서 몇 번 보다 보니 그 움직임을 그나마 파악하게 되어서 그를 쓰러뜨릴 수 있었지.”
성락중은 뒤로 조금 물러나서 자신이 보았던 도인수의 움직임을 흉내 내 보였다.
양쪽 어깨를 흔들며 옆으로 이동하는 성락중의 모습은 다소 우스꽝스러웠으나 낙일방은 눈도 깜박하지 않고 집중해서 쳐다보았다.
성락중은 몇 번이나 비슷한 동작을 취해 보고는 몸을 멈추었다.
“얼핏 보기에는 쉽게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해보니 비슷하게도 안 되는군. 아무튼 움직이는 방식은 이와 유사했네. 무엇보다, 한 번 어깨를 흔들면 반경 일 장 내외를 미끄러지듯 이동한다는 것만 알아 두게.”
“정말 움직임이 괴이하군요. 막상 눈앞에서 당하면 어떻게 상대할지 모르고 당황할 것 같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몇 번이나 헛손질을 했다네.”
성락중 같은 검의 고수가 헛손질을 했다는 것은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낙일방은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상만 해도 정말 상대하기 까다롭겠군요. 지금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습니다. 사숙께선 그런 보법에 어떻게 대응하셨습니까?”
“나야말로 운이 좋았지. 보법을 제외한 도인수의 무공은 별로 대단할 게 없어서 생각보다 상대하기 어렵지 않았네. 더구나 도인수는 단지 두 가지 동작밖에 사용할 줄 몰라서 미리 움직임을 예상하고 공격을 가해서 쓰러뜨릴 수 있었네.”
낙일방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무심결에 물어보았다.
“만약 그가 그 보법을 완벽하게 펼칠 수 있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소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었으나, 마귀보에 대한 생각에 골몰해 있는 낙일방은 미처 그 점을 의식하지 못했다.
성락중도 전혀 개의치 않고 기꺼이 답변해 주었다.
“아마 그가 보법을 자유자재로 펼쳤다면 상대하기가 몇 배나 더 까다로웠을 것이네. 하지만 그래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걸세. 그자의 다른 무공이 별 볼일 없었으니 말일세.”
성락중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낙일방은 자신의 질문이 성락중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일 수도 있음을 알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제가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사숙의 심기를 어지럽힌 것 같습니다.”
“아닐세. 자네의 질문은 핵심을 찌른 것일세.”
“예? 제 질문이 핵심을 찌르다니요?”
성락중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으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도인수는 다른 무공이 변변치 않아 쉽게 쓰러뜨렸지만, 만약 그가 육투예 같은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예를 들어 육투예를 익힌 적화승이 마귀보를 익힌 상태로 덤벼들었다면 그래도 과연 쉽게 상대할 수 있었을까?”
“아!”
“그리고 그 상대가 소마라면? 육투예를 완성하고 마귀보를 완벽하게 익힌 소마와 싸우게 된다면? 과연 그때도 그를 상대로 승리를 자신할 수 있겠는가?”
성락중의 말을 들을수록 낙일방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성락중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니 우리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하네. 우리가 상대해야 할 인물이 어떠한 자인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