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51화
군림천하 (951)
진산월과 전흠이 식사를 절반쯤 했을 때였다. 점원 하나가 다가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괜찮으시다면 다른 분들이 합석을 해도 되겠습니까?”
점원의 뒤에는 늙수그레한 부부가 나란히 서 있었다.
진산월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상관없네.”
“감사합니다.”
점원의 안내를 받고 탁자로 온 노부부는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우이.”
“별말씀을 편하게 자리하십시오.”
노부부가 의자에 나란히 앉은 채 소곤거렸다.
“친절한 사람들 같아요.”
“그래도 조심해야 돼. 둘 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잖아. 저 키 큰 청년은 얼굴에 칼자국까지 있고.”
“그래도 풍기는 분위기가 험악하게 느껴지지 않는데요?”
“당신은 매사를 너무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그래서 싫어요?”
“싫기는. 그랬다면 사십 년 동안 살을 맞대고 살지 못했지.”
노부부는 투덜거리기도 하고 키득대기도 하면서 계속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았다.
전흠은 처음에는 흥미가 일어 몰래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으나, 두 사람의 대화가 비슷한 식으로 흘러가니 이내 흥미를 잃어버렸다.
평생을 같이 산 노부부가 할 이야기란 게 뻔하지 않겠는가?
때마침 진산월이 젓가락을 내려놓자 전흠은 그가 식사를 다 마친 줄 알았다. 그런데 그릇을 보니 음식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다른 걸 시킬까요?”
“아니다. 오늘은 식욕이 별로 없구나.”
노부부도 진산월이 음식을 거의 먹지 않은 걸 보고는 걱정스럽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비쩍 마르고 키가 큰 노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입맛이 없다면 산매탕(酸梅湯)을 먹어 보는 게 어떤가? 이 집의 산매탕은 아주 별미라네.”
통통한 몸매에 작은 키의 노파가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만화루의 산매탕은 낙양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오. 오늘같이 더운 날에 먹기에는 정말 최고라고, 젊은 양반.’
“우리도 시킬 걸 그랬나?”
노인이 입맛을 다시자 노파가 그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예산 초과예요. 내일부터 이틀 동안 밥을 굶을 자신이 있으면 시켜 보든가.”
“산매탕이 그 정도 가격은 안 할 텐데.”
“내 입에 침이 고이게 한 벌이에요.”
“그건 벌이 아니라 상을 줘야 할 거 같은데.”
노부부가 만담을 하듯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진산월이 마침 지나가는 점원에게 산매탕을 주문했다.
“여기 산매탕 네 개만 가져다주게.”
진산월이 하나도 아닌 네 그릇을 시키자 노부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많이 시킨 건가? 혼자 먹기에 한두 그릇이면 충분할 텐데.”
진산월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좋은 음식을 소개해 주신 두 분께 답례해 드리려는 것이니 부담 갖지 마십시오.
노파가 둥근 얼굴에 실 같은 웃음을 지었다.
“호호, 고맙기도 하지. 젊은 사람이 예의도 바르고 정말 친절하구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네. 당신도 어서 고맙다고 해요.”
“고맙네. 잘 마시겠네.”
별로 비싸지도 않은 산매탕 두 그릇에 나이 먹은 두 노인이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대단한 것이 아니니 괘념치 마십시오.”
“자네 덕에 이틀간 밥을 굶지 않아도 되겠으니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노인의 농 섞인 말에 노파가 다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자꾸 그러면 당장 오늘 저녁부터 굶을지도 몰라요.”
“어이쿠! 그건 안 되지.”
노인이 자신의 입을 닫는 시늉을 하자 노파가 그를 잔뜩 흘겨보았다. 그래 보았자 통통한 얼굴에 웃는 인상이어서 전혀 무섭지 않았다.
산매탕은 빠르게 나왔다.
점원이 가져온 네 그릇의 산매탕이 각자의 앞에 놓이자 다들 산매탕을 마시기 시작했다.
산매탕은 엄밀히 말하면 음식이라기보다는 음료라고 할 수 있었다.
매실에 몇 가지 약초를 넣어 끓인 다음 차갑게 식힌 것으로, 한여름에 마시기에 적합했다. 어떤 약초를 넣었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 때문에 만드는 곳마다 특색이 있었다.
만화루의 산매탕은 단맛을 가급적 배제하고 약간의 신맛과 톡 쏘는 듯한 맛에 집중해서 마실 때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더구나 은은한 화향(花香)이 코끝을 자극해 더욱 입맛을 돋우었다.
산매탕 한 잔을 마시고 나자 진산월은 사라졌던 입맛이 다시 돌아왔는지 남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전흠은 진산월이 장문인의 신분으로 차갑게 식은 음식을 먹고 있는 게 불편했는지 그를 말리려 했다.
“음식이 식었습니다. 새로 주문하시죠.”
“아니다. 지금 이 상태에서 먹고 싶구나.”
진산월은 단숨에 남은 음식을 모두 비웠다.
노부부가 그 모습을 흐뭇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진산월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진짜로 제대로 된 식사를 마친 것이다.
그런데 진산월이 산매탕 한 그릇을 추가로 시켰다.
노인은 그의 심정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산매탕은 역시 식후에 마시는 게 제일 좋지. 나도 좀 참았다가 밥 먹고 나서 마실 걸 그랬나?”
노인이 이미 비어 버린 자신의 산매탕 그릇을 보고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자, 노파가 그에게 눈총을 주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아요. 당신 성격에 행여나 참았겠어요.”
“무슨 소리야? 젊었을 때는 나도 참을성이 강한 남자였다고. 그래서 당신 같은 여자와 결혼할 수도 있었잖아.”
“그거 무슨 뜻에서 하는 소리죠?”
“나야 모르지.”
노인이 시치미를 뚝 떼자, 노파는 다시 그의 옆구리를 꼬집으려고 손톱을 세웠다.
때마침 점원이 그들의 음식을 가져왔기에 노인은 옆구리가 멍드는 신세를 피할 수 있었다.
노부부는 서로 툭탁거리면서도 사이좋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들이 주문한 것은 평범한 소면과 만두였으나, 그들은 천하의 진미를 맛보는 사람들처럼 행복한 표정으로 조금씩 음미하듯 즐기고 있었다.
“이것 좀 먹어 봐. 오늘따라 면발이 아주 좋군.”
“당신도 좀 들어요. 만두소가 꽉 찬 게 정말 맛이 좋네요.’
“역시 만화루의 음식은 언제나 최고라니까.”
노부부가 소박한 음식을 서로 챙겨 주며 나누어 먹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할 만큼 정겨운 것이었다.
전흠은 그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러운 생각도 들어서 산매탕을 마시면서도 가끔씩 그들을 쳐다보고는 했다.
진산월은 두 번째로 나온 산매탕을 처음과는 달리 음미하듯 아주 천천히 마시고 있었다.
노부부에게는 특별한 관심이 없는지 허공을 응시하거나 간혹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는 것 외에는 오직 산매탕을 즐기는 데만 집중했다.
노부부가 아끼고 아껴서 먹었지만 소면과 만두는 머지않아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쩝. 벌써 다 먹었군.”
“나는 충분히 배불러요. 오늘도 정말 만족스러운 식사였어요.’
“그래, 오늘은 이만하면 충분하지. 다음에 또 오세.”
두 노인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산월은 그때까지도 산매탕을 조금씩 홀짝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만 가 보겠네. 오늘 마신 산매탕은 잊지 않겠네.”
“고마우이, 젊은이. 늘 만화루의 산매탕을 마시고 싶었는데, 자네 덕분에 소원을 풀었네.”
두 노인은 처음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서로를 의지한 채 주루를 떠나갔다.
전흠이 그들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웬 한숨이냐?”
전흠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저도 누군가와 저렇게 해로(偕老)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니 갑자기 암담한 기분이 들어서 말입니다.”
“저들이 부러운거냐?”
“솔직히 그렇습니다. 장문 사형은 아니십니까?”
진산월은 그 말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전흠은 오늘따라 진산월의 반응이 예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그 점에 대해 꼬치꼬치 물을 수도 없어서 그냥 싱겁게 웃고 말았다. 진산월은 아직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가끔 한 번씩 산매탕을 마시는 것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전흠은 이미 진즉에 산매탕을 다 마셨기에 좀이 쑤셔 왔으나, 그렇다고 한 그릇을 더 시키지는 않았다. 해남 태생인 그의 입에는 이곳의 산매탕이 꽃향기가 너무 강해서 조금 느끼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전흠은 문득 생각이 들어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았다.
점심시간은 진즉에 지났건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만화루를 들락거리고 있었다.
‘손님들이 끊이지 않는군. 이러다가는 또다시 합석해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그의 짐작을 확인이라도 해 주려는 듯 조금 전의 점원이 약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다가왔다.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합석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점원도 두 번씩이나 그들에게 합석을 제안한 것이 미안했는지 태도가 한층 더 공손해졌다.
“그러게.”
진산월이 승낙하자 점원은 곧 네 명의 새로운 손님들을 탁자로 안내했다.
그들은 모두 남자였는데, 삼십 대에서 사십 대의 나이로 보였다.
그들 중 수염이 가장 무성하고 나이도 제일 많아 보이는 장한이 빙긋 웃으며 포권했다.
“합석에 응해 주어 고맙소.”
“별말씀을.’
진산월이 답례하자 그들은 각자 의자에 편한 자세로 앉았다.
그들은 언뜻 보아도 친형제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서로 얼굴이 닮아 있었다. 나이 차이가 몇 살씩 난다는 것 외에는 이목구비나 체형이 상당히 비슷했다.
모두 짙은 검은색 옷을 입고 있기에 얼핏 보아서는 네쌍둥이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단지 그들 중 세 사람은 수염을 길렀고, 가장 나이가 젊어 보이는 한 사람만 수염을 기르지 않아서 그나마 어느 정도 구별이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