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55화
군림천하 (955)
요리는 하규의 말마따나 주방장이 신경 써서 만들었는지 상당히 정갈하면서도 맛이 있었다. 재료 본연의 질감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도 간이 적절해서 계속 입맛을 당기게 했다.
흑의 노인은 금존청을 한 잔 곁들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솜씨가 있는 주방장이로군.”
흑의 노인은 전혀 서두르지 않고 요리의 맛을 음미하듯 천천히 식사를 즐겼다.
머지않아 두 개의 접시가 모두 비워졌다. 그동안 금존청을 반병 정도 비운 흑의 노인은 그제야 젓가락과 술잔을 차례로 내려놓았다.
“이 정도면 아주 적당하군.”
그는 이윽고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이하게도 조금 전만 해도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주루 안이 텅 빈 것처럼 조용해져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대부분의 손님들이 빠져나가 드넓은 일 층에는 몇몇 사람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가 바라보는 와중에 이 층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와 허겁지겁 주루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흑의 노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주루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때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왔다.
“저…… 노인장.”
“자네로군. 주방장에게 내 말을 전해 주었나?”
하규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다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예. 그런데 지금은 이 층이 아닌 밖으로 나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런가?”
하규는 잠깐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말했다.
“조만간 이곳에서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아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피신시킨 거로군.”
“그렇습니다. 노인장께서도 늦기 전에 몸을 피하시지요. 자칫 험한 꼴을 당하실까 걱정돼서 그럽니다.”
“신경 써 줘서 고맙네. 하지만 나는 이 층으로 가 봐야 할 것 같네.”
“노인장…….”
“오랜만에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말이지. 자네의 배려는 고맙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그 친구를 만나야 할 것 같네.”
흑의 노인은 자신을 말리려는 하규에게 고개를 까닥거리고는 천천히 이 층의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규는 우두커니 선 채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하규의 얼굴은 서안의 미친개라는 별칭과는 달리 시체의 그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어. 저 노인의 시선을 받는 순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어. 대체 이게 무슨……’
그 사람이 처음 산해루에 들어왔을 때는 누구도 그를 특별히 주목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사람은 조용히 이 층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소면 한 그릇을 주문했다.
소면이 나올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그를 눈여겨본 사람이 있다면 상당한 시간 동안 미동도 하지 않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손가락은커녕 눈조차 깜박이지 않은 그 모습은 괴기함을 넘어 섬뜩함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한 것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음식을 가져온 점원은 그런 이상한 점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소면 한 그릇을 놓고 가 버렸다.
그제야 처음으로 그 사람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느릿느릿 젓가락을 들어 소면을 먹었다. 몸의 다른 부위는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오직 손과 입만을 움직여 음식을 먹는 그 모습은 괴이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아쉽게도 그것을 제대로 본 사람은 없었다.
처음 이상이 생긴 것은 그 사람이 소면을 절반쯤 먹었을 때였다.
이 층에 들어차 있던 손님들 중 일부가 하나둘씩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식사를 끝낸 사람들이 나가는 것으로 생각했을 테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음식을 반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처음에는 몇 명씩 내려가더니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손님들이 빠져 버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 사람은 소면을 먹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소면을 모두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았을 때는 이미 이 층에는 그 외에 어떤 손님도 존재하지 않았다.
드넓은 산해루의 이 층을 독차지하게 된 그 사람은 그 점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차 한 잔을 따라 느긋하게 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겹군. 언제까지 숨어 있을 셈인가?”
그 사람이 독백처럼 중얼거린 음성이 주루 안을 잔잔하게 뒤흔들었다.
누군가가 그 말을 받으며 삼 층에서 내려왔다.
“숨어 있다니, 서운한 말이로군. 내가 얼마나 애타게 당신을 찾았는지 안다면 절대로 그런 말은 못 할 거요.”
내려온 사람은 건장한 체구를 지닌 당당한 눈빛의 중년인이었다. 그의 뒤로 약간은 왜소한 몸집의 이십 대 청년이 말없이 따르고 있었다. 그 사람의 아무 감정 없는 투명한 시선이 중년인에게 고정되었다.
“철면호?”
보는 사람의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치고도 중년인은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바로 철면호 노해광이오.”
그 사람은 노해광의 전신을 쓰윽 훑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별 볼일 없는 몸이로군.’
노해광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더욱 진한 미소를 매달았다.
“당신 눈에 차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소? 대신…”
노해광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쪽은 그런대로 쓸 만하지.”
“곧 떼어질 머리통이나 보잘것없는 몸뚱어리나 비루한 건 마찬가지지.”
“하하. 당신이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인 줄 미처 몰랐소. 알았다면 장성에 있을 때 진즉에 찾아가서 술이나 하면서 밤새 담소를 나누었을 것을.
“장성에 있었나?”
“십 년쯤 그 일대에서 뒹굴었지.”
“그래서 알았군.”
“뭘 말이오?”
그 사람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나, 주위의 공기가 갑자기 차가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노해광의 뒤에 서 있던 정해는 전신이 빙굴에 빠진 듯 섬뜩한 기운이 느껴져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 사람은 노해광의 두 눈을 한동안 응시하고 있더니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내뱉었다.
“구문백절환, 내가 그걸 바라는 걸 알고 그런 소문을 퍼뜨린 게 아닌가?”
노해광은 짐짓 딴청을 부렸다.
“소문이라니 무슨 소문 말이오?”
“혹시 내가 백 개의 매듭으로 이루어진 기이한 모양의 팔찌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 말이오? 아니면 요즘 여러 가지 변고를 당해 돈이 궁해져서 그 팔찌를 오늘 산해루에서 다른 곳에 팔아 버린다는 소문 말이오?”
그 사람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노해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무심한 시선을 받게 되면 누구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노해광은 별로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나에 대한 소문은 하루에도 수십 개씩 생겨났다가 없어지고는 해서 나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오. 당신이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 되는 거요.”
노해광은 빙글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장성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마침 내가 장성에 있을 때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소. 워낙 오래전 일이라 잊었을 법도 한데, 마침 얼마 전에 용케도 생각이 났다오.”
그 사람은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없었으나, 노해광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강호의 최고 고수 한 사람이 자신의 호적수를 상대하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거쳐 병기 하나를 만들었다고 하오. 그런데 그걸 채 사용해 보기도 전에 수하 한 놈이 그걸 가지고 도망쳤다지 뭐요? 그 고수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자는 용케도 장성을 넘어 중원으로 도망쳤다고 하오. 그때 그 고수가 잃어버린 병기가 다소 특이한 모양의 팔찌였다고 하던데, 자세한 이름은 모르겠소. 워낙 오래전에 대충 흘려들은 이야기라서 말이오.”
노해광은 두 팔을 벌려 보였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기로 합시다. 사실 우리가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노닥거릴 사이는 아니지 않소?”
지금까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그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로 끝내기에는 너무 멀리 왔지.”
“옳은 말이오. 그래서 멀리서 온 당신을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게 있소.”
노해광이 슬쩍 손을 들자 다시 한 사람이 삼 층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백의를 입고 이목이 준수한 청년이었다. 청년의 두 눈은 조금씩 어두워 오는 주루 안에서도 선명하게 보일 만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내 사질인데, 얼마 전부터 당신을 기다리느라 목을 길게 빼고 있더구려.”
백의 청년은 노해광의 농 섞인 말에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그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정중하게 포권했다.
“종남의 낙일방이 신 대협을 뵙습니다.”
그 사람은 백의 청년이 나타났을 때부터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네가 내 큰애를 죽인 놈이냐?”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낙일방의 전신을 한차례 쓰윽 훑었다. 단순한 동작이었음에도 낙일방은 온몸이 그의 눈길에 산산이 해부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잘 닦인 몸이로구나. 확실히 큰애가 당해 내기는 힘들었겠군.”
“운이 좋았습니다.”
“그런 말은 나를 모욕하는 것이다. 내가 키운 녀석들 중 운이 나쁘다고 죽을 정도로 허약한 놈은 없다.”
“제가 결례를 저질렀군요. 신 대협의 대제자와는 좋은 승부를 보았습니다.”
그제야 그 사람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자 녀석과 싸워 보니 나와도 한번 손을 겨루어 볼 만한 것 같더냐?”
낙일방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는 침착한 눈으로 그 사람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예.”
의외의 대답에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고 낙일방을 쳐다보았다.
낙일방의 얼굴은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는 데다 두 눈에 신광이 번쩍이고 있어서 그야말로 옥(玉)을 깎아 놓은 것처럼 준수하기 그지없었다.
“제자분과 싸우면서 그 박투술의 위력에 놀라기도 했지만 일말의 아쉬움도 느꼈습니다. 그래서 박투술의 궁극에 달한 신 대협을 만나서 그 끝을 겪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낙일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묵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박투술의 끝을 보고 싶다고? 그렇다면 좋은 선택을 한 것이다. 내 기꺼이 너에게 그 끝을 보여 주마.”
그 사람은 천천히 낙일방의 앞으로 걸어왔다.
어깨를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발바닥의 바깥쪽을 먼저 지면에 딛는 특이한 걸음을 보자 낙일방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 깊숙한 곳에서 전율이 일어났다.
‘특이한 어깨의 움직임, 미끄러지는 듯한 발걸음. 저게 바로 그 유명한 소마의 마귀보인가?”
소마!
특이한 걸음으로 걸어온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강호 무림의 최정상에 군림하는 우내사마 중에서도 제일인자로 손꼽히는 소마 신지림이었다. 낙일방은 천하의 신지림을 앞에 두고도 주저 없이 몸을 똑바로 세웠다.
상대가 오랫동안 무림을 공포에 떨게 했던 희대의 살성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직 소마의 가공할 육투예와 마귀보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에 모든 심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자신의 무공으로 과연 신지림의 그 독보적인 절학들을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인가?
당금 강호에서 맨손 격투에 관한 한 자타가 공인하는 제일인자인 소마의 육투예는 과연 어떤 위력을 지니고 있을까?
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따위는 아예 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두 주먹만으로 신지림의 육투예와 마귀보를 격파하고 종남파의 안위를 지킨다는 각오만이 그의 머리에 온통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하나 그는 신지림과 싸울 운명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본 채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소마와의 싸움은 나에게 우선권이 있네.”
목소리의 주인은 흑의를 입고 키가 훤칠한 노인이었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고수가 아닌 사람이 없는데, 그들 중 누구도 노인이 이 층에 올라올 때까지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은밀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비록 중인의 이목이 온통 낙일방과 신지림에게 쏠려 있었다고 해도 그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흑의 노인의 신법은 표홀하고
흑의 노인을 보는 사람들의 눈에 어리둥절함과 호기심의 빛이 어른거렸다.
오직 소마만은 반응이 달랐다.
형용키 어려운 복잡하고 미묘한 빛이었다. 지금까지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던, 극도의 무심함으로 덮여 있던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한 감정의 빛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것은 무어라
“자네로군.”
흑의 노인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날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