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65화
군림천하 (965)
진산월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할 정도로 휘청거리고 있었다. 거듭된 격돌의 여파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것을 본 섭소심의 얼굴에 한 줄기 쾌재의 빛이 떠올랐다.
‘신검무적의 약점이 내공일 거라는 생각이 맞았어. 아무리 검술이 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확실히 젊은 나이 탓에 내공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구나.’
그녀의 행동은 사전에 위지립과 상의하에 철저히 계산된 것이었다.
오늘 신검무적을 제거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자들 중 절세고수가 아닌 자가 없었고, 자신의 무공에 자신감을 가지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누구도 단신으로는 신검무적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이번처럼 신검무적을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기회는 앞으로 두 번 다시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번에는 기필코 신검무적을 쓰러뜨려야 한다.
이것을 절대 명제로 그들은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에게 제일 바람직한 결과는 물론 사효심이 신검무적과 격돌하는 틈을 노려 섭소심의 선녀호접표로 신검무적을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실제로 과거에 훌륭하게 성공을 거둔 방법이기도 했다.
하나 그 방법이 이번에도 통한다는 확신이 없던 그들로서는 제이(第二)의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위지립이 신검무적의 나이를 거론하며 순수한 내공은 아직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한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그 점을 최대한 이용하는 길을 연구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내공의 우열로 승부를 가릴 수 있는 장공(功)의 격돌을 유도하자는 것이었다.
늘 자신의 안위에 신경을 쓰며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을 피해 왔던 위지립이 진산월의 지척까지 접근하여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어온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위지립은 이 기회를 놓친다면 절대로 진산월을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스스로 위험을 자처한 것이다.
일단 위지립과 장공으로 맞부딪치게 되면 그 결과에 상관없이 그들의 목표는 달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누가 승리하든 신검무적은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될 것이고, 그를 끝장내는 것이 섭소심의 역할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위지립과 진산월이 부딪친 결과를 확인하지도 않고 먼저 몸을 날려 진산월에게 달려든 것이다.
그때 그녀의 마음은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할 정도로 격앙되고 한편으로는 긴장되었다. 이번이 아니면 절대로 신검무적을 쓰러뜨릴 수 없다는 절박감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금시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던 진산월이 어느 순간 몸을 똑바로 세우고 수중의 검을 앞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막 진산월의 앞가슴을 가격하려던 섭소심은 어느새 차가운 우윳빛 검광 한 가닥이 자신의 목을 향해 쏘아지듯 날아오는 것을 깨닫고 안색이 변해 황급히 손의 방향을 바꾸었다.
꽝!
“급!”
굉음이 터지며 답답한 신음이 뒤이어 흘러나왔다. 섭소심은 교구를 잠시 휘청거리는 듯했으나 재차 신형을 날려 진산월을 향해 달려들었다.
놀랍게도 검광과 정면으로 부딪친 그녀의 고운 옥수에는 한 치의 상처도 나 있지 않았다. 진산월이 펼친 것이 유운검법 중에서도 빠르고 강력한 배운축월임을 생각해 본다면 정말 대단한 수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겉보기와는 달리 섭소심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비록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없었으나, 그녀는 검광과 부딪친 손의 부위에서 상당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소수마공으로 감싼 겉의 피부는 멀쩡했으나, 뼈와 신경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진산월을 향해 계속 손을 쓰는 것은 지금 진산월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진산월은 다급한 와중에 간신히 배운축월의 수법으로 가슴이 박살 나는 참변은 막았으나, 거듭된 격돌의 여파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만큼 커다란 충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몸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핏물을 억지로 눌러 삼켰음에도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시커먼 선혈 한 가닥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아마 입을 열기만 하면 폭포 같은 피 분수를 토해 낼 게 분명했다.
게다가 억지로 배운축월을 펼치느라 그나마 간신히 이어지던 진기의 흐름이 끊겨 공력의 소모가 많은 무공은 펼칠 엄두도 낼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조금이라도 내공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였다면 아마 진산월은 일단 이어룡으로 섭소심의 공격 범위를 벗어난 후에 진기를 가다듬고 그녀를 상대했을 것이다.
하나 공력의 소모가 상당한 이어룡을 펼칠 수 없기에 좀처럼 공세를 완벽하게 빠져나가지 못했다.
섭소심의 명옥수는 절묘한 방위에서 진산월의 요혈을 노리고 집요하게 날아들어 계속 위급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명옥수는 일단 몸에 격중되기만 하면 금강동인이라 해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다른 장공을 상대하듯 맨손으로 맞부딪칠 수가 없었다. 피부에 닿기만 해도 체내에 파고들어 심맥을 가닥가닥 끊어 놓는 그 살인적인 위력을 모르고 무심코 맞섰다가 피를 뿌리며 쓰러진 고수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파파파팍!
주위 사방이 온통 그녀의 새하얀 손그림자에 뒤덮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명옥수로 펼치는 천화집금산수(天花集錦散手)는 그녀가 가장 자신하는 무공으로, 가히 절세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진산월은 구름을 밟듯 신묘한 어운보로 그녀의 명옥수를 피해 나가며 어려운 싸움을 이어갔다.
그나마 어운보는 종남파의 보법 중에서도 가장 진기의 소모가 덜한 무공이었기에 당장의 공격을 피하기는 했으나, 반격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직도 체내의 진기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 내공을 제대로 운기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한순간의 여유만 있어도 숨을 가다듬으며 진기를 회복할 수 있을 텐데, 섭소심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미친 듯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그녀는 금시라도 쓰러질 듯한 기색의 진산월이 용케도 계속 자신의 수공을 피하고 있자 절로 마음이 조급하면서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위지 맹주는 뭐 하느라 합세하지 않는 거지? 이런 상황에서도 안위를 챙기려는 건가? 아니면 혹시……..?
그녀는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질풍 같은 공격을 이어 가면서도 살짝 고개를 돌려 위지립이 있던 곳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한 사람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그 건장한 체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서…… 설마 위지 맹주가 장공의 대결에서 일패도지 했단 말인가?’
그녀는 여태껏 위지립이 진산월과의 격돌로 인한 후유증을 갈무리하느라 지체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위지립은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숨이 끊어졌는지 아니면 단순히 정신을 잃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위지립이 지금의 그녀를 도울 가능성은 아예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진산월을 향해 일방적인 공세를 퍼붓고 있음에도 마음속의 불안감이 점차로 커졌다.
‘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사효심이나 감종간의 행방을 찾기 위해 무심코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지금까지 허겁지겁 그녀의 명옥수를 피하기에 바빴던 진산월이 오히려 그녀를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핏기 한 점 없는 창백한 얼굴에 무심한 눈빛의 그가 자신의 코앞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자 그녀의 동공이 자신도 모르게 흔들렸다.
그녀가 지금껏 억누르고 있던 신검무적에 대한 공포심이 다시 솟구쳐 나온 것이다.
그녀는 무심결에 몸을 피하려고 주춤하다가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앞으로 달려드는 상대를 옆이나 뒤로 피하는 것은 하책(下策) 중의 하책이었다. 더구나 그 바람에 그녀의 공세가 잠시나마 멈춘 것은 고수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그 결과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파앗!
진산월의 용영검이 화살처럼 뻗어 나오며 가공할 검광이 그녀를 향해 세차게 무서운 기세로 날아들었다.
어느새 숨을 가다듬고 진기를 끌어올린 진산월이 유운검봉을 펼친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거대한 검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미 몇 번이나 보았던 초식이었지만, 자신이 직접 당하자 그 중압감과 위세는 막연히 상상만 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이를 악물며 명옥수로 맞서 갔다.
콰쾅!
그토록 많은 무림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명옥수가 파괴되며 백옥 같던 그녀의 손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렸다.
“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그녀의 신형이 삼장 여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감종간은 출수했다.